Category: 안과밖

  • 1. 들어가며 머리(Janet Murray)는 일찍이 영향력 있는 저서 『홀로덱 위의 햄릿』(Hamlet on the Holodeck)에서 디지털 매체를 통한 이야기 생산과 향유가 “음유시인의 전통”(bardic tradition)을 되살릴 것이라 예견한 바 있다. 컴퓨터 기반의 스토리텔링이 문자와 프린트 기술로 매개된 오랜 읽기 경험의 역사를 되돌려 우리를 구전 전통으로 회귀시키고 있다는 것이다.1) 머리에 따르면, 마치 전근대의 음유시인들이 오랜 세월 축적된 이야기의 레퍼토리―인물, 사건, 리듬―를 매 순간 변주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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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들어가며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햄릿』(Hamlet)은 과거의 망령이 현재를 잠식하고, 필연적으로 다가올 비극적 미래가 끊임없이 지연되어 “시대의 관절이 모두 어긋나 뒤틀려버린”(The time is out of joint, 1.5.189)1) 세계를 그린다. 어긋나고 뒤틀린 시대 또는 뒤틀린 시간은 작품 속 인물들이 시기적절하게 행동하기를 주저하거나 섣부르게 행동해서 실수를 저지르거나 하는 등의 적절한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 일어나는 비극적 결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2019년 미국의 독립 게임 개발사 골든 글리치 스튜디오(Golden Glitch Studios)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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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연결과 통합의 중요성 트라우마가 예외적이고 압도적인 참사나 비극의 결과로 인식되면 일상적인 차원에서 행해지는 다종한 폭력이 누적된 피해는 간과되기 쉽다. 성폭력과 아동기 학대 등의 가정폭력, 그리고 정치적 폭력 피해자들과의 상담 연구를 통해 일찍이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 허먼(Judith Herman)은 기존 트라우마 연구가 배제하기 쉬운 고통에 이름을 붙여야 할 필요성을 인식했다. 그리하여 ‘복합적이고 지속적이며 반복적인’ 폭력과 속박에 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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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 기호학적 전환? 기호학적 모험! 미술은 기호다. 즉 부재하는 어떤 것을 대신 나타내는(re-present, 재-현하는) 다른 어떤 것이다. 가령 구석기시대의 동굴에 혈거인 화가가 그린 각종 동물 그림은 그 시절 동굴 바깥을 활보하던 해당 동물을 대신 나타내지, 그 동물 자체는 응당 아니다. 그런데 동굴의 그림을 보면서 그것이 동굴 바깥의 동물을 대신 나타낸다고 어떻게 알까? 그림과 그것이 재현하는 대상, 이 둘이 유사한 시각 경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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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어가며 2024년 11월, 동덕여대의 공학 전환 논란이 촉발되면서 ‘여대는 지금도 필요한가?’라는 오래된 질문이 다시금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다. 동덕여대 측은 학령인구 감소와 경쟁력 강화를 이유로 들며 ‘학교 발전 계획’의 일환으로 일부 단과대학의 공학 전환 시도를 추진했으나, 학생들은 이 과정에서 민주적 절차가 배제되었음을 비판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 사태는 단순한 대학 운영 문제를 넘어, 여성들이 자신들의 공간을 지켜야 하는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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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들어가며: 문학이 의학에게 컬럼비아대학교 의과대학에는 서사의학 석사과정(Master of Science in Narrative Medicine)이 있다. 의학 박사이자 영문학 박사인 컬럼비아 의과대학 교수 샤론(Rita Charon)의 주도하에 2009년 출범하여 큰 성공을 거둔 이 프로그램은 주로 의사, 간호사 등 의료업계 종사자나 이를 지향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프로그램의 목표는 “서사 역량”(narrative competence)의 함양이다. 홈페이지 소개에 따르면, 서사 역량을 갖춘 의료인은 좀 더 “인도적이고 효과적인 의료 행위”를 제공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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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날 이후 2024년 10월 10일 우리에게 노벨문학상이라는 선물이 도착했다.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한강의 이름을 불렀을 때, SNS 생중계로 그 소식을 타전하던 어느 출판사 풍경이 떠오른다. 해외문학 편집팀 식구들이 아카데미 관계자가 전하는 이름 한강이 우리가 알던 작가라는 걸 알아듣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환호가 시간차를 두고 터졌기 때문이다. 노벨문학상이 우리에게 오던 날, 작가는 집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는 저녁을 맞이하고 있었다. 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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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정책 분야에서 예술-기술 융합 영역을 언급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은 ‘미래’의 예술이다. 기술이 주도하는 사회 변화 속에서 도래할 예술을 실험한다는 의미다. ‘첨단’과 ‘미래’에 주목하는 이러한 시선은 공교롭게도 ‘이미’ ‘지금’의 예술이 기술을 경유해서 마주하는 변화나 뒤틀림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그러는 사이 ‘지금’ ‘여기’의 예술은 마치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낡은 것이 되어버린 양 의문의 1패를 당한다. 김성우의 『인공지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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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2년 출간된 『딕테』는 1997년 토마토출판사가 김경년의 번역으로 처음 국내에 소개한 후 IMF 영향으로 절판, 2004년 어문각에서 재출간, 다시 절판 상태가 지속되면서 오랜 시간 한국어 독자들에게는 어떤 부재의 흔적과 소문으로 존재해온 작품이다. 2021년 번역된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Minor Feelings)에서 테레사 학경 차(이하 차)의 죽음을 다룬 장을 통해 차와 『딕테』를 처음 접한 이들도 적지 않다. 미국과 한국에서 거듭 재호출되었지만 『딕테』 번역서 재출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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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유라는 문제에서부터 시작한다.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은유라는 문제를 겹겹이 통과해야 하는 난제 앞에 놓인다. 문학 자체가 겹겹의 번역을 거치며 탄생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특정한 화자 또는 서술자를 내세워 그 서술자로 인해 발생하는 세계의 필연적인 굴절을 문학으로 담아낸다. 작가에서 서술자로, 서술자의 서술로 여러 겹의 해석이 이미 존재하며, 이를 독자가 건네받는 순간 또 한 번의 해석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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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동욱 최근 ‘출생률’과 ‘자살률’이라는 키워드는 우리나라의 슬픈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한다. 출생률 세계 꼴찌, 자살률 OECD 국가 중 1위라는 지표는 대한민국이 ‘가장 살고 싶지 않은 나라’라는 일종의 씁쓸한 고백과도 같다. 이는 대한민국이 감당해야 할 오명으로, 씁쓸함을 넘어 암울하기까지 하다. 설상가상으로 여기에 노인빈곤률 OECD 국가 중 1위라는 지표까지 더해지는데, 이는 우리나라가 ‘태어남’과 ‘나이 듦’, 그리고 ‘죽음’이라는 생애 주기 전반에 걸쳐 삐걱거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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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소미 1. 19세기 말 등장한 노인 흡혈귀 20세기 이후 대중문화 속 흡혈귀는 매력적인 젊은이인 경우가 많으나, 19세기 말 영국문학 속 흡혈귀들은 대체로 겉만 젊은 노인이며 젊은 세대와 적대관계를 형성한다.1) 스토커(Bram Stoker)의 1897년작 『드라큘라』(Dracula) 속 400세의 드라큘라가 대표적인 예다. 물론 드라큘라를 단순히 살아 있는 시체(living dead)로 간주할 수도 있겠으나, 아우어바흐(Nina Auerbach)의 주장처럼 그는 사실 자신의 “오래됨”을 활용하여 “새롭게” 다시 태어나기에 나이는 들었을지언정 질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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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지원 1. 들어가며 이 글은 쿳시(J. M. Coetzee)의 작품 『철의 시대』(Age of Iron, 1990)의 제목이 환기하는 신화적 은유가 유년기와 노년기의 관계를 선형적 시간관 너머에서 바라보려는 작가의 시도를 구체화한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먼저 쿳시의 “철의 시대”의 심상이 헤시오도스(Hesiod)의 금속 신화뿐만 아니라, 플라톤(Plato)과 베르길리우스(Virgil)의 신화적 재구성까지 복합적으로 차용한 결과물임을 분석한다. 특히 헤시오도스가 철의 시대의 타락상을 묘사하기 위해 언급한 “흰머리의 아이들”이 플라톤이 재해석한 황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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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은귀 1. 들어가며 2023년 10월 작고한 미국의 시인 루이즈 글릭(Louise Glück, 1943~2023)은 조로(早老)의 시인이다.1) 스물여덟 번이나 출판사의 문을 두드린 끝에 가까스로 출간된 첫 시집 『맏이』(Firstborn, 1968)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이미 다 살아버린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하다. 품었던 사랑을 잃고, 사랑에 배신당하고, 가난에 점령된 청춘들의 이야기는 이미 서늘하고 초라한 늙음과 죽음에 포획되어 있다. 첫 시집의 첫 시 「시카고 기차」(“The Chicago Train”)에서는 세상 무서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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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승억 보잘것없는 존재가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다루는 하나의 방법은 그 힘에 신성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노화와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그랬다. 인류 역사에서 노화와 죽음은 인간의 손에 쥐여지지 않은, 그래서 신성한 어떤 것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많은 신성한 것이 세속화되었듯 노화와 죽음도 차츰 세속화하고 있다.  1. 생의 의미와 시간성  치열했던 삶의 여정을 보낸 아메리(Jean Améry)는 스스로 죽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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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길 I. 자기발명, 혹은 ‘삶-작품’을 향한 실천 1983년 4월 철학자 드레이퍼스(Hubert Dreyfus)와 인류학자 래비나우(Paul Rabinow)는 버클리에서 푸코(Michel Foucault)와 몇 차례의 인터뷰를 가진다. 이후 그 내용은 ‘윤리의 계보학에 관하여: 진행 중인 작업의 개관’이라는 제목 아래 두 연구자의 푸코 해설서에 후기로 실린다. 이 인터뷰에서 푸코는 말년에 몰두한 윤리학적 문제 설정을 상세히 설명하는데, 그 과정에서 나온 ‘작품으로서의 삶’이라는 명제는 이후 많은 주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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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영은 1. 악을 쓰고 열변을 토했던 여자의 자서전 김연자는 미군위안부 최초의 증언자다. 정희진의 연구에 따르면 김연자는 1993년에 기지촌 여성의 삶을 최초로 증언했고, 그 이후로도 증언자의 존재를 넘어서는 발언을 이어나갔다.1) 정희진이 언급한 증언자의 존재를 넘어서는 행위(action)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2) 김연자는 기지촌 여성을 동정하면서 반미 상징의 구호로 기지촌 여성을 활용하는 사람들을 비판했고, 기지촌 여성을 분단과 미국 제국주의 침략의 희생자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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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지영 1. 아시아 여성 유민 2, 3세의 포스트메모리: ‘여성’ 범주의 복합성 여성 작가의 계보와 경험을 그려낸 『다락방의 미친 여자』1)와 그 후속작인 『여전히 미쳐 있는』2)이 보여주듯이, 글쓰는 ‘여자’는 흔히 비정상성 또는 광기와 결부되곤 했다. 여성주의적 글쓰기는 이처럼 대문자 역사에서 ‘비정상’으로 여겨지거나 ‘공백’으로 남겨진 여성들의 경험을 드러내고 표현하기 위한 실천적 담론이자 글 속에 존재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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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애령 1. 용서에 대하여: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1942년 폴란드 렘베르크의 야노프스카 집단수용소에 수감 중이던 유대인 비젠탈(Simon Wiesenthal)은 부역노동으로 차출된 한 야전병원에서 죽음을 앞둔 SS대원 카를(Karl)을 만난다. 눈은 멀고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임종실에 누워 있던 이 21세의 SS대원은 자신이 1년 전 가담했던 유대인 민간인 300여 명을 학살한 범죄행위를 고백하고 사죄하고자 간호사에게 ‘한 명의 유대인’을 불러달라고 부탁했고, 비젠탈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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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일모 1. 자유전공이라는 유령 자유전공 또는 자율전공이라는 제도가 한국에 선보인 지 30여 년이 지났지만, 올해 들어 유난히 자유전공이라는 유령이 한국의 대학가를 배회하고 있다. 지난 2009년부터 많은 대학에서 자유전공 제도를 도입했으나 미숙한 운영방식 등의 이유로 기대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유전공 제도의 확대를 연상하게 하는 ‘무전공’이라는 어색한 용어가 또다시 화제가 되기 시작했다. 교육부가 올해 1월 「대학혁신지원사업 및 국립대학육성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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