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안과밖 58호

  • 읽기의 풍경이 변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구입한 e-book을 읽으며 이제 막 상상과 사유의 장이 열리려는 찰나, SNS 메시지 알림이 울린다. 인상적인 문장을 사진 찍어 공유하고 도착한 댓글에 답하는 사이, 새로운 피드에는 관련 상품과 콘텐츠들이 나타난다. 문장은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읽기는 흐트러진다. 고요한 몰입은 사라지고 대신 분산된 자극과 기술의 개입이 그 자리를 채운다. 포스트디지털 시대의 읽기는 인쇄된 텍스트뿐 아니라 디지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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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들어가며 읽기는 인간의 활동 중에서 상대적으로 새로운 요소로 인류사에 등장한 지 6000년도 되지 않았으며, 모든 사람이 읽고 쓸 수 있는 보편적 문해력의 확산은 비교적 최근의 혁신이다.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의 스콧(A. O. Scott)의 말처럼, “역사의 대부분 동안 우리의 언어는 구어였으며 우리의 문학적 상상력은 구술적이었다.”1) 이 같은 읽기의 짧은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는 여전히 읽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확한 개념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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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서론: ‘웹’이라는 물질성 디지털미디어의 등장은 단순한 기술적 전환이 아닌 삶의 방식에 대한 근원적인 혁명을 야기했다. 이는 스마트폰에서 한 정점을 이룬다. 정보의 저장·이동·활용이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드라마틱한 변화가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손에 들고 다니는 작은 스마트폰 없이 현대사회의 이기(利器)를 누리는 것은 불가능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팬데믹 시대를 거치면서 이는 불가역적인 현실로 완전히 자리잡았다. 모든 문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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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들어가며 머리(Janet Murray)는 일찍이 영향력 있는 저서 『홀로덱 위의 햄릿』(Hamlet on the Holodeck)에서 디지털 매체를 통한 이야기 생산과 향유가 “음유시인의 전통”(bardic tradition)을 되살릴 것이라 예견한 바 있다. 컴퓨터 기반의 스토리텔링이 문자와 프린트 기술로 매개된 오랜 읽기 경험의 역사를 되돌려 우리를 구전 전통으로 회귀시키고 있다는 것이다.1) 머리에 따르면, 마치 전근대의 음유시인들이 오랜 세월 축적된 이야기의 레퍼토리―인물, 사건, 리듬―를 매 순간 변주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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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들어가며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햄릿』(Hamlet)은 과거의 망령이 현재를 잠식하고, 필연적으로 다가올 비극적 미래가 끊임없이 지연되어 “시대의 관절이 모두 어긋나 뒤틀려버린”(The time is out of joint, 1.5.189)1) 세계를 그린다. 어긋나고 뒤틀린 시대 또는 뒤틀린 시간은 작품 속 인물들이 시기적절하게 행동하기를 주저하거나 섣부르게 행동해서 실수를 저지르거나 하는 등의 적절한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 일어나는 비극적 결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2019년 미국의 독립 게임 개발사 골든 글리치 스튜디오(Golden Glitch Studios)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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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연결과 통합의 중요성 트라우마가 예외적이고 압도적인 참사나 비극의 결과로 인식되면 일상적인 차원에서 행해지는 다종한 폭력이 누적된 피해는 간과되기 쉽다. 성폭력과 아동기 학대 등의 가정폭력, 그리고 정치적 폭력 피해자들과의 상담 연구를 통해 일찍이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 허먼(Judith Herman)은 기존 트라우마 연구가 배제하기 쉬운 고통에 이름을 붙여야 할 필요성을 인식했다. 그리하여 ‘복합적이고 지속적이며 반복적인’ 폭력과 속박에 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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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 기호학적 전환? 기호학적 모험! 미술은 기호다. 즉 부재하는 어떤 것을 대신 나타내는(re-present, 재-현하는) 다른 어떤 것이다. 가령 구석기시대의 동굴에 혈거인 화가가 그린 각종 동물 그림은 그 시절 동굴 바깥을 활보하던 해당 동물을 대신 나타내지, 그 동물 자체는 응당 아니다. 그런데 동굴의 그림을 보면서 그것이 동굴 바깥의 동물을 대신 나타낸다고 어떻게 알까? 그림과 그것이 재현하는 대상, 이 둘이 유사한 시각 경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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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어가며 2024년 11월, 동덕여대의 공학 전환 논란이 촉발되면서 ‘여대는 지금도 필요한가?’라는 오래된 질문이 다시금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다. 동덕여대 측은 학령인구 감소와 경쟁력 강화를 이유로 들며 ‘학교 발전 계획’의 일환으로 일부 단과대학의 공학 전환 시도를 추진했으나, 학생들은 이 과정에서 민주적 절차가 배제되었음을 비판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 사태는 단순한 대학 운영 문제를 넘어, 여성들이 자신들의 공간을 지켜야 하는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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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들어가며: 문학이 의학에게 컬럼비아대학교 의과대학에는 서사의학 석사과정(Master of Science in Narrative Medicine)이 있다. 의학 박사이자 영문학 박사인 컬럼비아 의과대학 교수 샤론(Rita Charon)의 주도하에 2009년 출범하여 큰 성공을 거둔 이 프로그램은 주로 의사, 간호사 등 의료업계 종사자나 이를 지향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프로그램의 목표는 “서사 역량”(narrative competence)의 함양이다. 홈페이지 소개에 따르면, 서사 역량을 갖춘 의료인은 좀 더 “인도적이고 효과적인 의료 행위”를 제공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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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날 이후 2024년 10월 10일 우리에게 노벨문학상이라는 선물이 도착했다.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한강의 이름을 불렀을 때, SNS 생중계로 그 소식을 타전하던 어느 출판사 풍경이 떠오른다. 해외문학 편집팀 식구들이 아카데미 관계자가 전하는 이름 한강이 우리가 알던 작가라는 걸 알아듣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환호가 시간차를 두고 터졌기 때문이다. 노벨문학상이 우리에게 오던 날, 작가는 집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는 저녁을 맞이하고 있었다. 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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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정책 분야에서 예술-기술 융합 영역을 언급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은 ‘미래’의 예술이다. 기술이 주도하는 사회 변화 속에서 도래할 예술을 실험한다는 의미다. ‘첨단’과 ‘미래’에 주목하는 이러한 시선은 공교롭게도 ‘이미’ ‘지금’의 예술이 기술을 경유해서 마주하는 변화나 뒤틀림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그러는 사이 ‘지금’ ‘여기’의 예술은 마치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낡은 것이 되어버린 양 의문의 1패를 당한다. 김성우의 『인공지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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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2년 출간된 『딕테』는 1997년 토마토출판사가 김경년의 번역으로 처음 국내에 소개한 후 IMF 영향으로 절판, 2004년 어문각에서 재출간, 다시 절판 상태가 지속되면서 오랜 시간 한국어 독자들에게는 어떤 부재의 흔적과 소문으로 존재해온 작품이다. 2021년 번역된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Minor Feelings)에서 테레사 학경 차(이하 차)의 죽음을 다룬 장을 통해 차와 『딕테』를 처음 접한 이들도 적지 않다. 미국과 한국에서 거듭 재호출되었지만 『딕테』 번역서 재출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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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유라는 문제에서부터 시작한다.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은유라는 문제를 겹겹이 통과해야 하는 난제 앞에 놓인다. 문학 자체가 겹겹의 번역을 거치며 탄생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특정한 화자 또는 서술자를 내세워 그 서술자로 인해 발생하는 세계의 필연적인 굴절을 문학으로 담아낸다. 작가에서 서술자로, 서술자의 서술로 여러 겹의 해석이 이미 존재하며, 이를 독자가 건네받는 순간 또 한 번의 해석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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