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문학연구49호] 포스트디지털 시대 디지털 미디어 서사를 활용한 영문학 교육: 강의실 젠더갈등 해소를 향한가능성/ 박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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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 중에서도 영문학은 글로벌화한 현대사회에서 젠더, 인종, 계급의 복잡다단한 교차점들을 탐사하기에 대단히 적합하고 유용하다. 근대 이후 자본주의 패권을 영미가 주도하였고, 이 질서에 따라 형성된 글로벌세계의 복잡다단함이 영어를 공유 기반으로 깊고 다양하게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단순히 영미권 문학뿐만 아니라 영연방 및 영미 제국주의 영향 아래 생산된 영어권 문학 등을 포함하므로 광범위하며 그만큼 근대세계의 모순을 집적하여 표현하고 있으므로 학생들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발전과 상관관계에 있는 젠더, 인종, 계급 등의 차이에 관한 이슈를 영문학 작품 읽기를 통해 성찰하며 세계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역사적, 사회적 지식과 윤리적 덕목을 훈련할 좋은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최근에 필자는 영미 단편소설 수업에서 읽을 작품을 선정할 때 젠더나 섹슈얼리티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 작품이나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아도 이 이슈들이 첨예하게 제기될 가능성이 높은 작품들 앞에서는 주저하게 된다. 

원래는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에 교양수업이란 형식적 틀 안에서 서로 존중할 수 있는 거리를 지키며 함께 토론하고 다양한 의견을 나눌 기회를 제공하고자 이 분야의 고전 단편소설들인 샬롯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의 「노란 벽지」(“The Yellow Wallpaper”)나 케이트쇼팬(Kate Chopin)의 「한 시간 동안의 이야기」(“The Story of an Hour”), D. H. 로런스(D. H. Lawrence)의 유명한 단편들과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의 「지붕 위의 여자」(“A Woman on the Roof”)와 같은 작품들을 수업에서 읽었다.[1]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이 작품들을 수업에서 다루기가 곤혹스러워졌는데, 학생들이 남녀 불문하고 이 문제에 관해서는 토론 자체를 아예 꺼리기 때문이다. 

남녀 사이 ‘관계’의 일은 우리 삶의 중대한 부분이고 삶 전반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젠더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지 않더라도 성장, 예술, 언어, 부모와 자식 관계, 교육, 사회와 문화, 도덕과 정의, 역사와 미래세계 등의 주제를 다루는 모든 작품에서 결국 이 이슈는 긴밀하게 연관되어 어느 시점에는 튀어나오게 마련이다. 모든 수업은 해당 학기 학생들의 구성에 따라 다양한 다이내믹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 이슈와 관련해서는 학생들이 수업에서 제공하는 공적 토론에 참여하기를 꺼린다. 많은 경우 고개를 숙이고 침묵으로 질문과 토론의 시간을 버티거나 소극적으로 적당히 안전한 발언을 하며 상황을 모면하고자 한다. 대면 토론이 어렵다면 온라인 수업 게시판에서라도 서로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을텐데, 학생들은 어떤 형태로든 이 주제에 대한 발화 자체를 꺼리는 듯하다. 남녀 학생 대부분이 서로 불편해하면서 침묵하는데 계속 토론을 시키자니 교수자의 처지에서는 원치 않는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꼴이 되고 교육적 효과를 고려해 종국에는 이 작품들을 읽기 리스트에서 빼게 된것이다. 

수업의 주제면에서 오늘날의 젠더갈등이 문제라면 설상가상으로 수업의 형식면에서도 어려움이 중첩되면서 오늘날 강의실에서 학생들의 ‘차이’에 대한 ‘배움’을 방해하고 있다. 산업뿐만 아니라 현실재현의 모든 기반이 디지털화되고 이에 기반하여 인공지능이 상용화되는 현실에서 기존의 텍스트 해석과 분석 방식 및 글쓰기를 통해서 이를 정리하고 확인하는 방식이 얼마나 유효한가 의심받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기존의 비평이론에 기반한 읽기와, 말의 일관된 논리 구성에 기반한 선형적, 단계적 글쓰기 훈련에 전제된 도식적이고 이념적인 경향과 형식주의는 남녀 학생 간 이념적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조장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 달라진 매체에 적합한 새로운 인식적 지도 그리기를 기반으로 학생들이 서로의 상이한 입장을 구체적이고 경험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다른 방식의 읽기와 토론 실습의개발이 필요하고, 더불어 새로운 방식의 비평적·창조적 산출물을 설계해야 할 시점인 것이다. 

이 글에서는 필자가 교수자로서 강의실에서 마주한 곤경을 수업의 내용적, 형식적 두 가지 측면에서 탐구해보고자 한다. 첫째는 청년세대의 젠더갈등이 교양과목으로서의 영문학 수업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현상하는지 그 현실을 더 큰 사회적 맥락과 연결하여 살펴볼 것이다.단, 여기서 필자가 제시하는 예들은 순전히 필자의 개인적인 수업 경험에 기반한 것으로서 설문을 거친 통계자료가 아니기 때문에 일반화할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단지 필자가 파편적이고 개인적으로 경험한 현상의 사회·문화적 맥락, 즉 이 현상이 접속하고 있는 공유 기반을 탐구함으로써, 이 경험의 의미 지평을 성찰하고자 함이다. 이 과정에서 청년세대의 젠더갈등을 서구식 개인화와 한국식 개인화의 차이를 통해 살펴본 사회학자 홍찬숙의 논의를 빌려올 것이다. 홍찬숙은 “압축적 개인화” 및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일어나는 특수한 상황이 한국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에 서구페미니즘이 끼친 영향과 한국 남성성의 모델 부재 및 남성이 기댈 수 있는 이론의 부재를 지적하고 최종적으로 서구식 개인화 모델이 우리 현실에 들어맞지 않다는 암시를 준다. 바야흐로 우리 현실에 적합한 새로운 모델 또는 그를 넘어서는 새로운 존재론의 모색이 요구되는 시점이라 하겠는데, 본 글에서는 이러한 모색의 하나로 새로운 존재론을 시사하는 교육실험의 한 예를 살펴봄으로써향후 가능한 새로운 형식의 교양 영문학 수업의 단초를 그려보고자 한다. 

이 글의 두 번째 목표는 읽기와 토론, 그리고 이 활동의 성과를 검증하는 학술/비평적 에세이 쓰기를 축으로 돌아가는 기존의 영문학 수업방식이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어떻게 변모하면 좋을지, 이러한 변형은 읽기와 쓰기의 개념을 어떻게 바꿔놓을 것인지 살펴보는 것이다. 최근전 세계적으로 대학생의 전반적인 학력 수준이 저하되고 있다는 진단이 무성하다. 많은 전문가는 이를 디지털 미디어가 현대사회와 생활 전반을 잠식한데서 오는 문제점으로 지적하지만, 반대로 이런 진단 자체가 디지털 환경에서 형성된 새로운 인식론적, 감성적 성향에 대해 기성세대가 제대로 평가할 수 없어 비롯된 결과라 볼 수도 있다. 현재 대학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인공지능 기술의 놀라운 도약과 대중화로 인해 기존의 교육방식과 실천을 고수하기 어려워진 상황에 있다. 이에 따라 이 글에서는 디지털 네이티브로서 오늘날 청년세대가 세계를 인식하고 관계맺는 방식에 기반하여 기존과는 다른 독서경험, 토론방식 및 기존의 비평적 에세이 형식과 다른—창조적이지만 여전히 비평적 관점의 형성을도와주는—새로운 독서 산출물 형식의 가능성을 가늠해 보고자 한다. 새로운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남녀 학생간의 ‘이념적’ 대립을무력화하고,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는 교육모델의 설계에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1. 젠더갈등과 영문학 수업: ‘개인화’에서 ‘관계의 존재론’으로

오늘날 강의실에서 체험되는 젠더갈등 현상의 원인은 단순히 청년세대의 특수성으로만 돌릴 수 없는 문제라 포괄적 시각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 최근 청년세대의 젠더갈등을 서구 사회학의 ‘개인화 이론’에 기반하여 샅샅이 추려본 홍찬숙의 논의는 강의실 젠더갈등의 현상을이해하는데 유용한 맥락을 제공한다. 홍찬숙은 한국 사회에서 세대 간 문화변동과 성별 문화변동 과정에서 유난히 갈등과 충돌이 두드러지는이유가 “한국적 근대화 경로의 특수성” 때문이라고 진단한다(홍찬숙 󰡔개인화󰡕 56). 그가 이론적 근거로 사용하는 울리히 벡(Ulrich Beck)의 사회화 이론에 따르면, 서구의 개인화는 근대 시민혁명과 현대 신사회 운동을 거쳐 두 단계로 진행된다. 즉 근대 산업화 과정에서 시민계급 남성이 전근대적 가부장제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1단계 개인화이고, 1단계 개인화의 주축이었던 시민 남성 계급의 안정성이 깨지면서 불안정성이확대됨과 동시에 해방의 주체가 여성과 다른 사회적 타자로까지 확대되며 2단계 개인화가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는 영리하게도 탈산업화와 신자유주의 등의 “자기 혁신”을 이뤄내며 여성을 노동시장에 끌어들이기 위해 노동시장의 가부장성을 완화하고 성역할로부터의 여성해방을 장려하면서 2단계 개인화를 지원한다(56-60). 그러나 한국의 군사정권 주도의 산업화 과정에서는 1단계 개인화, 즉 “전근대적 공동체로부터 개인이 풀려나면서 개인주의 규범이 사회적 관계의 새로운 기초가 되는” 사회관계의 재배치가 일어나지 않았고(86), 87년 정치 민주화이후 민주화와 성평등 정책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근대적 발명인 핵가족, 사회계급, 국민국가로부터 개인들이 풀려나는 2단계 개인화가 여성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즉 한국에서는 1, 2단계의 개인화가 압축적으로 진행되면서, 비동시성의 동시성에 기인한 혼란이 ‘성 대결’로 환원되고 왜곡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62). 

청년 남성의 측면에서 보면 “노동시장의 가부장성 약화”가 “남성 가장의 권력 약화(비정규직화 및 취업기회 상실)”로 진행된 반면에 여전히 개인이 되지 못하고 집단주의적 규범에 매여있다 보니 기득권 상실이 더 크게 인지될 수밖에 없다(61). 즉 이들에게 기존 가부장제로부터의단절은 개인적 해방이라기보다 오히려 공동체적 보호를 박탈당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129). 이런 맥락에서 한국 청년 남성에게 개인화는 “패배”로 인식될 가능성이 증가한다. 반면에 애초부터 계급조직으로부터 주변화한 여성에게 개인화는 새로운 “성취 명령”으로 인식될가능성이 크다(73). 개인주의로의 규범 변동에 있어 한국에서 여성 주도의 2단계 개인화가 페미니즘적 특성이 두드러지는 이유다(90). 과거의수직적 가부장제를 넘어 수평적 가부장제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는 청년 여성은 장구한 역사를 가진 서구페미니즘 담론을 수용하여 새로운자유의 주체로 등장하였으나, 청년 남성은 한국적 특수성이 더해져 전 세계에서 유례없는 상황을 맞아 자신들의 문제를 표현할 언어와 담론이부재한 처지에 놓인 것이다(21). 

이와 같이 한국적 개인화의 특수성에서 비롯된 비동시성의 동시성으로 인한 혼란과 “성별화 정치의 변증법”(홍찬숙 󰡔개인화󰡕 130)은 강의실에서 현상하는 젠더갈등을 이해하는데 좋은 참조가 된다. 가령, 강의실에서 가부장제를 둘러싸고 나타나는 모순과 대립 현상을 예로 들어보자. 서두에서 언급한 쇼팬과 길먼의 단편소설은 흔히 가부장제하에 억압된 여성의 욕망과 해방 이야기의 고전이라 여겨진다. 특히 비교적단순하고 명백한 쇼팬의 단편과 달리, 내용과 형식 면에서 다양한 분석적 함의를 내포한 길먼의 소설은 집과 가부장 담론의 폭압에 미쳐가는여성을 그린 비판적 여성주의 소설내지는 젠더화된 가정 공간이 고딕적 주체를 생산하는 추이를 기록한 여성주의적 소설의 전형으로 읽힌다.[2]

실상 가정이라는 사적공간에서 행사되는 가부장제의 부당함에 관한 한 남녀 학생 모두는 대체로 이견이 없다. 홍찬숙이 청년 남녀를 상대로 진행한 설문조사를 봐도 가부장제 의식에 있어 청년 남성들은 기성세대 남성들보다 훨씬 “선진화”되어 있고(홍찬숙 󰡔갈라치기󰡕 197) 사적가부장제—가족 내 폭력이나 불평등한 성역할—에서 성평등한 규범을 선호한다. 이들이 반발하는 지점은 공적 가부장제—국가정책이나 일자리—에서 제도적 성평등을 강화하는 것이다. 여성과 ‘이익’을 두고 사회에서 경쟁하는 상황에 관련된 불만이 제도적 성평등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가부장제 비판에 있어 여성은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반면에 남성은 개인적, 사적 문제로 접근하려는 차이가 나타난다(홍찬숙 󰡔개인화󰡕 171). 이런 복잡한 입장의 차이가 서로 뒤엉키다 보니 강의실에서 가부장제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비판적분석이 가능한 빅토리아 시대 작품에 대해 쉽게 공감대가 형성되거나 반대로 소통하지 않으려는 현상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다. 

가령,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의 시 「나의 마지막 공작부인」“My Last Duchess”에 나타난 폭력적 가부장인 공작에 대한 비판은 대부분 큰 이의 없이 공유한다 (Norton Introduction, 667). 그러나 똑같은 19세기 작품이라도 사적 가부장제의 폭력이 명백한 브라우닝의 작품은 수용이 가능하지만, 여성 주인공의 입장에서 서술되고 가부장제를 공개적으로 공격하며 남편이 죽기를 욕망하거나 쓰러뜨리는 결말로 끝나는여성작가의 소설은 토론이 잘 진행되지 않는다. 홍찬숙에 따르면 가부장제에 저항하면서 청년 여성은 불평등과 차별을 결합하여 보는데 반해(󰡔갈라치기󰡕 79–81) 청년 남성은 불평등과 차별을 분리하여 받아들인다. 남성은 세습되는 부와 권력의 불평등에 더 민감하며(󰡔갈라치기󰡕 125) 이들에게 불평등은 경제적 격차, 계층/계급적 차이를 의미하는 한편, 차별은 남성에 대한 역차별과 같은 성별 차이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들에게 온갖 부와 권력을 거머쥐고 자의적으로 부인을 살해한 공작과 달리, 큰 잘못이 없어 보이는 평범하고 성실한 중산층 남편이 몹쓸 인간으로 비판받는 듯한 이런 작품들은 수용하기 어려운 역차별로 인식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가부장제를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여성주의적 입장 역시 복잡다단한 삶의 모든 문제를 가부장제와 남성우월주의의 문제로 치환하는 ‘환원의 순환 고리’에 빠지기 쉽다. 이러한 태도는 복잡다단한 작품세계를 충실히 검토하고 이해하는데 큰 걸림돌이 된다. 학습한 이론을 직간접적 경험을 통해 검증하고 성찰하는노력 자체가 관념 차원에서 선제적으로 차단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홍찬숙이 말한 “성별화 정치의 변증법”은 반여성주의뿐만 아니라 여성주의 입장을 통해서도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다. 

길먼의 작품은 워낙 여성주의적 주제의식이 전경에 있다보니 주제적 측면에서뿐 아니라 작품 언어의 구조적 패턴과 가부장제 담론의 유사성을 논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실상 이 작품은 젠더 이슈에만 묶이기엔 내포하고 있는 함의가 무궁무진한 작품이다. 이런 점에서 길먼의 「노란 벽지」를 “경계를 넘나드는”(boundary-crossing text) 텍스트라 정의한 칼라 머피(Karla J. Murphy 339)는 이 작품이 단순히 젠더 관점뿐만아니라 작문, 문학, 언어학, 심리학, 철학, 장르와 문화연구 등 다방면에서 접근과 활용이 가능한 작품이라 주장한다(Murphy 339). 메타 내러티브적인 요소 역시 가지고 있어서 이야기 자체를 교육학적 메타포로 읽는 탐구도 가능하고,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우울증, 고독, 고립과 소통 등에 관한 주제를 심도있게 논의할 수도 있고, 상호텍스트성의 관점에서, 또는 독자-수용적 관점에서 작품을 읽는 것도 가능하다(340). 화자가 처한 상황의 은유성이 함축적이어서 어떤 형식으로든 억압을 경험한 개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보편성을 담고 있는 작품이 젠더갈등이라는 이념적 대립으로 환원되다 못해 대립과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남녀를 불문하고 읽기조차 원치 않는 작품이 되어가는 현실이다.     

수업에서 읽을 작품 리스트에서 제거한 소설 중에 필자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운 작품은 도리스 레싱의 「지붕 위의 여자」다. 이 작품의 명시적 주제는 젠더갈등 자체가 프레임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갈등은 세대갈등, 계층/계급갈등, 이념/종교갈등, 남녀갈등, 인종갈등 등이 복잡하게얽혀 있는 ‘중첩성’이 근본적 특성이다. 「지붕 위의 여자」는 열사병에 걸릴 듯한 혹서에 지붕에서 배관수리 작업을 해야 하는 노동자계급 남성들과 옆집 지붕에서 옷을 벗고 썬텐을 즐기며 책을 읽는 지식인 여자 간의 불쾌한 만남을 통해 어떻게 중첩된 사회적 갈등의 양상이 젠더갈등의 프레임으로 환원되어 남녀간 혐오와 괴롭힘으로 끝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Understanding Literature 655-61). 피해자는 바로 혐오와 괴롭힘의 회로에 들어가 고통받고 있는 남녀 개인 당사자들이다. 레싱은 자기도 모르게 차별 담론의 대리인이 된 가해자/피해자가 처한 사회, 경제, 심리적 맥락을 묘사하는 재능이 탁월한 작가다. 이 작품은 청년 학생들이 겪고 있는 젠더갈등을 간접 체험을 통해 ‘메타적으로’ 톺아볼 다양한양상과 층위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젠더갈등을 전면적으로 내세우다 보니 소통을 시작하기조차 어려운 작품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남녀간 소통 불능의 원인이 다름 아닌 젠더 프레임 자체에 있다는 주제를 명시적으로 표현한 또 다른 작품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시 「집안의 매장」“Home Burial”은 비록 남녀의 대립을 다루고 있으나 앞서 언급한 대로 가정이라는 제한적이고 사적인공간에서의 대립을 다루기 때문에 비교적 토론이 활발하다(Norton Introduction 493-96).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부부의 소통 불능의 책임이 남편에게 있느냐 부인에게 있느냐를 따지기보다 두 인물의 언어습관에 침윤된 젠더 이념을 알아보는 것이다. 즉 두 사람이 젠더화된 언어로 서로를 향해 발화하다 보니 이들의 대화가 젠더갈등의 프레임 속에서 계속 헛돌고 있는 상황 자체를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특정한 인물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의지가 성찰을 방해하여 불통 속에서 헛도는 시 속 상황이 강의실에서 종종 재현되기도 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남녀가 함께 구속되어 있는 이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이념의 순환회로’는 서구에서 들어온 ‘근대적 개인 중심의 존재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궁극적으로 이것을 극복하고 초월하지 않는 한 이 회로에서 해방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페미니즘이 마치 절대적진리라도 되는양 맹신하는 태도 역시 경계할 필요가 있다. 서구페미니즘 이론 역시도 근대 자유주의 이론에서 파생되었고 자본주의의 탈산업화와 신자유주의 기획을 은밀하게 보조하는 담론이기 때문에 이 자체를 극복하고 초월하는 진전을 이뤄내지 못한다면 궁극적인 해방의 길에역린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울리히 벡은 산업사회가 일으킨 다양한 문제들 특히 환경, 기후, 생태 위기 등의 문제로 인해 산업사회는 필시 위험사회로 가게 되어있고 이 위험사회 단계에서는 산업사회의 물질주의 문화와 달리 생태, 여성, 다양성을 강조하는 탈물질주의적 정치문화, 개인적 성찰에 따라 삶을 바꾸자는 태도의 변화, 즉 제2단계의 개인화가 진행된다고 보았다. 그는 위험사회의 의제가 전지구적 문제이므로 이렇게 진행된 개인화는 결국 세계시민주의 규범의 창출로 연결되리라 낙관했다(󰡔갈라치기󰡕 173–80).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위험사회에 다다른 오늘날 우리가 마주친 현실은 “근대 민주주의의 자기부정,” “근대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심장부”인 서구에서 진행되고 있는 반동적인극우화다(184). 

홍찬숙도 암시했듯이 벡의 이론이 실패한 원인은 그의 이론이 근본적으로 근대적 개인 관념에 입각한 데에 있다(󰡔갈라치기󰡕 186). 바야흐로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와 심각한 기후 위기로 지구의 존속 자체가 위협받는 시대에 자율적 개인이라는 개념적 이상에 근거한인간 대 인간의 합리적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존재론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 개념은 무엇보다도 자연과 인공의 범주적 구분이 흐려진 포스트디지털 시대를 포괄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과 비인간까지 포섭할 수 있는 관계, 존재의 근본적인 ‘관계성’ 혹은 존재의 필연적 조건으로서의 ‘상호 의존성’에 대한 성찰에 근거한 새로운 관계의 정립, 새로운 종류의 존재론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그리고 이미 이러한 ‘근대적 개인’에근거한 존재론 자체에 대한 의심을 바탕으로 근대의 근본이념이었던 자유주의를 뛰어넘으려는 다양한 담론(돌봄 존재론, 신유물론, 탈인간중심주의, 탈성장담론 등)들이 등장하는 중이다(󰡔갈라치기󰡕 184). 

새로운 존재론을 상상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비록 남녀평등의 이념이 서구 계몽주의와 자유주의 정치사상의 중대한 유산임에도 불구하고실질적으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유지를 위한 교묘한 알리바이로 이용되기 때문에 “자본주의 아래서 성차별주의의 폐기는 불가능하다”고 본월러스틴의 주장도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백낙청의 재인용 146). 또한, 그런 이유로 우리가 “여성해방의 궁극적인 목표”를 설정할 때, 차별과차이에 관한 불필요하게 긴 논쟁이 따르기 마련인 “성평등”보다 “남녀의 조화로운 관계”로 방향을 틀어 볼 수도 있다는 백낙청의 제안도 고려해 봄 직하다(백낙청 147). 오늘날 우리가 강의실에서 맞닥뜨린 젠더갈등의 교착상태를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갈 기본적인 토대는 이러한 비전위에서 가능할 것이다.

또한 새로운 존재론은 그에 걸맞은 새로운 매체와 새로운 소통방식을 요구한다. 디지털 미디어가 삶의 일부로 통합된 포스트디지털 시대의 핵심어는 유동성과 가변성이다. 자율적 주체 중심의 개인주의에 대한 강조는 텍스트를 완결된, 닫힌 체계로 인식하는 읽기 실천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새로운 존재론은 우리가 텍스트를 생성하고 소비하며 활용하는 모든 방식에서, 이 유동성과 가변성의 개념들을 현실화할 것이다. 이에 대한 문학 교육의 대응과 양상은 어떠해야 할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문학 작품에 대한 기존 접근 방식의 유효성을 먼저 재고할필요가 있다. 다음 절에서는 기존의 문학 읽기 방식을 재고하면서 이념적 대립을 낳는 형식적 읽기 실천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포스트디지털시대에 적합한 관계적 읽기, 텍스트에 대한 열린 경험은 어떤 방식으로 성취될 수 있을지 가늠해 보기로 한다.

2. 포스트디지털 시대의 문학 읽기

흔히 문학 읽기는 인지적, 감성적 능력을 자극하는 문화 활동이라 여겨진다. 우리는 독자가 텍스트를 통해 타인의 삶을 상상하고 감정을 공유하면서 세계를 해석하는 능력을 훈련받는다고 믿어 왔고 이러한 읽기 행위가 단순한 정보 습득을 넘어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타자성에 대한이해를 심화시키는 인문학적 실천으로 기능한다고 믿어왔다. 특히 대학에서 문학 읽기는 쓰기와 함께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를 배양하는 중요한 교양훈련 중의 하나로 여겨져 왔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디지털 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인공지능의 상용화는 읽기에 대한 전통적인 통념과실천에 근본적인 도전을 던지고 있다.[3] 현시대는 더 이상 아날로그와 대립하는 디지털 시대가 아니라 포스트디지털 시대로 명명된다. 즉 디지털 기술은 더 이상 새롭거나 인간활동과 분리된 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표준화된 일상생활에 이미 통합되어 있다. 나아가 인간과 비인간 기계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면서 이 시대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기술과 인간, 인간과 비인간 존재와의 윤리 관계를 재구성하라고까지요구한다(신상규 외 󰡔포스트휴먼으로 살아가기󰡕 머리말). 이에 따라 디지털 기술은 이제 문학 텍스트의 존재 방식 자체도 다중적이고 유동적이며 인간중심주의를 초월하는 양상으로 변화시키고 있고, 달라진 문학 텍스트를 읽는 방식은 자연히 인식론적, 분석적 관점에서 달라질 수밖에 없다.[4] 이렇게 디지털 미디어의 발달은 새로운 형식의 문학 존재론 및 읽기 형식을 제안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텍스트 중심의 전통적 문학을 읽는 방식에도 질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최근에는 전통적인 ‘자세히 읽기’ 방식에 도전하며 문학 텍스트를 방대한 데이터로 전환하고기술적 프로그램을 활용해 해석하는 ‘원거리 읽기’ 방식이 빠르게 도입되는 상황이다.

디지털 인문학과 같이 직접적으로 읽기에 기술을 활용한 비평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문학 읽기 행위 자체를 과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비평도 등장하고 있다. 가령, 문학 읽기를 인지과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비평가 일레인 오영(Elaine Auyoung)은 비평가의 읽기가 전문지식과 훈련을 바탕으로 특권화되고 특정한 읽기 목적—예컨대 작품에 담긴 당대의 이념적 억압을 드러내는 해석—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하면서(Auyoung 104), 비평의 정치적·문화적·윤리적 영향력에 대해 기존과는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훈련된 비평가는 “실제적 증명과 상관없이 설명적 힘을 가지는 해석적 추론(interpretive inferences that have significant explanatory power regardless of their probability)”을수행한다(94). 즉 비평가는 “해석적 의미생산과 경험적 진리 추구 사이의 차이”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to differentiate the production of interpretive meaning from the pursuit of empirical truth),” 문학이 역사·문화·사회적 조건에 이런저런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믿음을 뒷받침하기 위한 “임시적주장”(casual claims)을 내놓는다(110). 하지만 정작 비평가가 하는 일은 실제적 검증보다는 다양한 텍스트 읽기를 통해 일관된 패턴을 발견하는것이다. 인지적 관점에서 볼 때, 기존에 인식되지 못했던 패턴을 발견하는 과정은 지적·미학적 즐거움을 제공하며, 능숙한 비평가의 해석 능력은 때로 문학 텍스트가 독자의 감수성을 단련시켜 주는 증거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5] 비평가들은 자신들의 해석 행위를 단순한 “감상”(appreciation)과 구분하고 이 구분이 침해될 때 학문분과로서 문학의 정당성과 학술적 엄밀함이 위협받는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오영의 결론은 결국 비평가의 해석 행위란 아무리 사회적·공동체적 가치를 옹호하는 정치적·윤리적 주장을 포함하더라도, 그 핵심은 의미 있는 설명을 창조해냈다는 개인적·미학적 즐거움에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인문학이 이제껏 실천해온 문학적 읽기-비평은, 다른 전문화된 분야와 마찬가지로, 특화된 ‘전문가의 일’(숨겨진 패턴의 발견)로 봐야지 지나치게 사회, 정치,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비과학적(실제적 증명은 불가능한) 행위라는 말과 같다. 

오영의 비평은, 영미권에서 가르치고 글 쓰는 일을 급진적 정치의 한 형태로 인식한 영문학 교수들의 ‘직업적 자기망상’에 대해 신랄하게비판한 미국학자 존 길로리의 비평을 상기시킨다(Guillory Ch. 1 and 3). 길로리는―그의 책 󰡔비평의 직업화󰡕 Professing Criticism를 리뷰한 스테판 콜리니(Stefan Collini)의 표현을 빌리자면—영문학 교수들이 점점 글로벌 자본에 잠식되어 가는 사회에서 전문 분야로서의 자기 위상을 합리화하고 사회적 효용성을 주장하기 위해 비평의 정치적 효과를 극도로 과장해 왔다고 비판한다(Collini “Exaggerated”). 길로리의 주장이 사회학적 기반에서 문학 비평사를 조망하는 여전히 논쟁적인 담론의 영역에 속해 있다면, 오영의 주장은 인지과학이라는 과학적 토대를 기반으로길로리의 비판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해 준다. 이들의 주장은 한편으로는 오늘날 대학의 교양 영문학 수업에서 청년 남녀가 원활한 소통을 하지못하게 된 원인이 애초에 여성주의 작품을 가르치면서 자신이 급진적 정치를 하고 있다고 믿는 영문학 교수들 자신의 이러한 ‘직업적 자기망상’에 있지는 않은가 하는 반성을 부른다. 이 반성은 그것대로 필요하다. 다른 한편 길로리와 오영의 주장은 대학과 학문을 중심으로 실행되는제도(institution)로서의 전문적 문학비평에 국한된 것이다. 이런 논의는 허구적 예술로서의 문학과 이를 향유/소비하는 독자의 관계 및 일반 독자의 다양한 읽기 실천까지 포괄한 통찰이라 할 수는 없다. 즉 이들의 비평 자체가 애초에 실제 사람들의 삶과 현실에서 괴리된 전문가 집단의활동에 비판적 시선을 보내는 또 다른 전문가적 비평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사회학적 관점을 빌려와 문학비평의 ‘구성된전문성’을 비평한 길로리와, 과학을 근거로 한 오영의 비평은 그 자체로 오늘날의 읽기 실천에 큰 변화가 왔다는 것을 암시한다. 즉, 이들의 전문적 읽기 실천에 대한 탈신비화는 그간 특화된 전문적 실천이 가려왔던 읽기의 진정한 예술적·사회적·공동체적 가치를 회복할 가능성 또한열어주는 것이다. 

오늘날 읽기에 일어나고 있는 커다란 의미 변화는 디지털 미디어의 변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그런 점에서 영미문학 비평이 미디어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대응하고 발전했는지 간략하게 개관한 조성경의 논의가 유용한 면이 있다. 조성경이 정리한 비평담론과 미디어의상호작용 변천사를 따라가면 비평 담론은 두 가지 상반된 흐름으로 나뉜다. 하나는 신비평에서 구조주의, 탈구조주의, 페미니즘, 신역사주의로 이어지는 이론 중심의 자세히 읽기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감각과 감성의 즐거움을 중심으로 자유롭고 개인적인 읽기를 강조하는 흐름이다. 후자는 바르트(Roland Barthes)와 손탁(Susan Sontag)을 거쳐 세즈윅(Eve Kosofsky Sedgwick)의 “회복적 읽기”(reparative reading) 개념으로 이어지는데, 세즈윅은 텍스트 내부에 숨겨진 이데올로기적 질서를 폭로하는 “편집증적 읽기”(paranoid reading)를 비판하고, 읽기의 핵심에 감각적·정서적 경험을 재배치한다(조성경 29–31). 세즈윅 이후 이 흐름은 ‘강한 이론’ 중심의 비평에 대한 저항으로서 표면 읽기(surface reading)를 제안한 베스트(Steven Best)와 마커스(Sharon Marcus)로 이어진다(32). 이들은 독자의 정서적 공감, 감정적 미학, 윤리적 사유를 강조하며, 기존의 이념중심 비평에 대한 대안적 읽기 방식을 제시한다(33). 조성경은 세즈윅의 회복적 읽기가 “소비하는 독자의 정서적 필요를 위한” 읽기 개념을 환기한다고 본다. 미디어 시대의 도래로 문학과 예술 영역이 점차 미디어의 영역에 겹치면서, 읽기는 이제 치유의 방식으로서 문화의 경계를 넘어 사회 전반에서 공유되는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조성경 30-31).

실상 지난 20세기 후반 이후 대학에서의 영문학 교육은 ‘편집증적 읽기’와 ‘강한 이론 중심의 읽기’ 패러다임의 전성기였다고 볼 수 있고, 최근에는 이런 경향에 대한 반동적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강의실에서 페미니즘 읽기가 처한 곤경도 이 맥락 속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웬디 브라운(Wendy Brown)은 ‘진리’라는 명목으로 우리 삶의 전반이 정치화되면서 사적 영역이 사라지는 문제가 대두되었다고 주장한다(our age … is not simply confessional but empties private life into the public domain … [in] the modernist conceit that the truth makes us free, Jo의 Wendy Brown 인용재인용 943). 학계뿐만 아니라 대중에서도 이와 같은 반작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최근의 북스타그램 현상이 그 한 예가 되겠다. 조성경에 따르면 이 북스타그램 현상은 최근 정치적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욕망만큼이나 자율적 주체의식이나 사회적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개인의욕망이 강력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한 마디로 문학이 정체성 정치에 대한 피로감으로부터 해방되는 피정의 공간으로 이용되는 것이다. 독서는 이제 독자가 자신의 정체성에서 잠시 벗어나 자기를 돌보는 시간을 제공한다. 책은 더 이상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나임’의 버거움”(the burden of being I)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간다(950). 이러한 경향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지속적인 강조, 그리고 근대적 자율 주체 개념에 기반한 정체성 철학의 반복적 재현에 대해 현대 개인들이 느끼는 피로감을 반영하는 반작용이라 볼 수 있다.

이렇듯 대학교육 현장에서의 문학 읽기가 ‘자세히 읽기’와 비평이론을 중심으로 세즈윅, 베스트와 마커스 등이 비판한 ‘편집증적 읽기’나 ‘강한 이론 중심의 읽기’ 패러다임에 지배당해 온 반면에, 책과 텍스트 중심의 문화에 부담을 갖는 디지털 세대 학생들의 요구는 점차 다변화하고 있고, 최근 놀라운 속도로 전개되는 미디어의 발달은 이러한 변화에 부응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과 도구를 끊임없이 제공하고 있다. ‘자세히읽기’의 방식은 여전히 중요한 방법론이지만 이와 결합한 강한 이론 중심의 읽기는 이제 그 유효성을 재고할 필요가 있고, 새로운 학생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새 기술들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제 새로운 읽기 방식의 개발이 필요하다. 어떤 방향이 됐건 이 새로운 읽기의 형태는 문학에 대한 미학적, 정동적, 디지털적 접근과 밀접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터랙티브 미디어와 플랫폼 기반 디지털 매체의 등장, 그리고 시청각 기술의 발전은 읽기의 감각적·정서적 경험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더욱 정교하고 다양하게 만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조성경 33–34, 37-40). 따라서 디지털 세대와 함께 강의실에서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문학 읽기는 읽기를 인지적·해석적 과정뿐만아니라 정서적·감각적·체험적 과정으로서 확장해서 이해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가능할 것이다.

3. 디지털 미디어 서사를 활용한 영문학 교육실험과 확장 가능성

디지털 기술이 교육의 형식과 내용 모두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가운데 디지털 미디어 서사는 문학 교육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는핵심적 도구로 작용할 수 있다.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텍스트를 단순히 해석하는 것을 넘어, 텍스트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과정이다. 이는 학생들이 수동적인 독자에서 능동적인 창작자로 전환되는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특히 디지털 환경에서는 텍스트가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다양한 미디어 요소—텍스트, 이미지, 사운드, 인터랙션—가 결합되어 하나의 서사를 구성한다. 이러한 다중양식적(multimodal) 특성은 문학 교육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학생들은 디지털 스토리텔링을 통해 텍스트를 ‘읽는’ 동시에 ‘쓰는’ 경험을 하게되기 때문이다. 이는 전통적인 문학 교육에서 강조하는 해석적, 분석적 사고는 물론 감각적 체험과 창의적 사고를 포함하는 포괄적이고 복합적인 학습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디지털 환경은 협업적 학습을 촉진하며, 학생들이 텍스트에 대한 공동의 서사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타인의관점을 이해하고, 다양한 해석을 수용하는 능력을 기르게도 도와준다.

초기 디지털 공간에서 데브라 피터슨(Debra K. Peterson)이 구현하고 실행한 교육실험은 이러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초기 실험의사례다. 피터슨은 2000년대 초반 당시 다중 사용자를 위한 객체지향적 가상공간을 제공하는 디지털 스토리텔링 매체 무(MOO space)를 활용하여 길먼의 단편 「노란 벽지」에 등장하는 공간, 건축, 가구나 물체 등을 가상공간에 모의로 재현하고, 학생들이 그 공간을 체험하면서 텍스트의다양한 의미를 탐사하게 하였다. 상상된 세계에 디지털 물질성을 부여한 것인데, 베쓰 콜코(Beth Kolko)에 따르면 “가상공간에서의 모든 움직임은 가상신체와 주변환경과의 관계를 개념화한다 (16, Peterson 재인용).” 즉 가상신체는 가상공간의 구조 및 코드와 협상하면서 그 공간에서의 체험을 제어하므로 그의 모든 움직임은 곧 의미화의 과정이 된다. 공간 참여자의 움직임과 탐사의 경로가 그 자체로 가상 세계를 짓고 다시짓는 과정이 되고, 참여자는 이렇게 공간적 특성을 만들고 쌓아가며 그 세계를 더 몰입감 있게 만드는 것이다. 피터슨은 이런 특성을 살려 <노란 벽지 저택 무 공간> “The Yellow Wall-Paper” Estate Moo Space를 구축하고 이곳에서 학생들이 상호작용(interactivity)을 통하여 텍스트의 의미와구조를 분석하도록 설계하였다. 여기에 또한 작품의 원본 텍스트, 다양한 이론에 대한 정보나 이차자료들, 자세한 문학분석에 사용되는 관례나 도구들을 제공하여 학생들이 자유롭게 활용하게 하였다. 전통적인 텍스트가 일차원적이고 단선적이라면 디지털 텍스트 공간은 독자이자동시에 작가를 텍스트에 들임으로써 삼차원을 만든다(Peterson 19). 참여자는 상호 연결되어 있고 가상공간이 참여자들에게 영향을 주는 그 이상으로 참여자 역시 공간에 영향을 준다. 

피터슨의 <노란 벽지 저택 무 공간>은 초기 디지털 공간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메타버스처럼 삼차원의 시공간에서 삼차원의 아바타가 움직이는 공간이 아니라, 예전 PC 통신 공간처럼 텍스트 기반의 가상공간이다. 참여자는 간단히 프로그래밍된 명령어를 입력하면서 이 가상공간을 돌아다닐 수 있다. 이곳에는 통로길, 정원, 저택, 어린이방 등의 가상공간이 개별로 구축되어 있고 각 참여자는 이 공간들을 돌아다니며 다른 참여자들과 상호 소통하거나 각 장소에 프로그램된 챗봇 인물인 두 주인공 제인(Jane) 및 존(John)과 소통할 수 있다. 피터슨에 따르면 교수자의 재량에 따라 무 공간에서 노란 벽지의 텍스트 공간을 구축하는 방법에는 다양한 선택지가 있을 수 있다. 가령, 텍스트를 일기(diary) 형식으로 재편할 수도 있고, 극장 무대처럼 만들고 학생 참여자들이 역할극을 하게 만들 수도 있다(20). 학생들은 각자 개별적으로 다른 공간에서 움직이고 행동하지만, 그에 의해 밝혀진 모든 사실은 전체 참여자의 스크린에 모두 기록되기 때문에 무 공간 내에서 생성된 모든 자료는 나중에학생들이 텍스트 분석하는데 활용될 수 있다.

피터슨의 무 공간이 실제 어떻게 구축됐는지는 오로지 그의 논문을 통해서만 짐작할 수 있다. 이 공간은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디지털기술의 빠른 발달과 전환으로 인해 발생하는 전형적인 아이러니는, 디지털 미디어 콘텐츠가 흔한 믿음처럼 영구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속적업데이트가 없다면 급속도로 퇴화할 뿐만 아니라 대부분 소실되고 많은 경우 복구 불가능하다. 따라서 필자는 2000년대 후반에 출시되어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비선형적 대화형 스토리를 만들어주는 오픈소스 도구인 트와인(Twine)을 활용하여 피터슨의 무 공간 일부를 아쉬운 대로 재현해 보았다. 트와인은 이미지와 동영상 및 음향을 사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텍스트 중심의 도구이기 때문에 피터슨이 사용했던 무 공간을 재현하는데 가장 유사한 도구라 할 수 있다. 피터슨의 무 공간에서는 학생들이 노란 벽지 저택에 들어오면 일단 정원을 탐사하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표 1] (Peterson 23)

여기서 “trees”와 “John”에는 하이퍼 링크가 연결되어 있어 해당 내용으로 갈 수 있다. 피터슨의 무 공간에서 이 단어들에는 별표가 붙어 있는데 해당 단어가 별도의 설명이나 기능을 가진 객체임을 나타내는 방식이었다. 이 정원을 묘사하는 언어는 모두 길먼의 원본 텍스트에서 가져왔으나 피터슨이 묘사의 시점을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바꾼 것을 볼 수 있다. 때문에 참여 학생들은 마치 자신이 직접 정원 공간에 들어와 정원을 보는 듯한 체험을 하게 된다. 이 공간은 소설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 어린이 방(the nursery)에서와 같은 다양하고 풍요로운 옵션은없지만, 여기서 참여 학생들은 소설의 분석을 위한 몇 가지 활동을 할 수 있다. 즉 공간을 보고, 공간 안의 사물(나무)을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고, 원하면 주인공 제인이 창문에서 정원으로 던져버렸던 열쇠를 찾거나, 혹은 남편 존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피터슨의 무 공간에서는 이와 같은 활동들을 위해서 “tress”와 “John”을 활성화하는 명령어를 입력해야 하지만 트와인(Twine)에서는 이 단어들을 클릭해서 바로 연결된 하이퍼텍스트 공간으로 옮겨가면 된다. 

[표 2] 트와인에서 전체 스토리의 연결구조를 보여주는 표이다. 피터슨의 설명에 맞춰 일부 재현하였다. 

존을 클릭하면 다음과 같이 존의 링크로 넘어간다.

[표 3] (Peterson 23)

여기서 존은 챗봇으로서 오로지 작품의 서술자(제인)와 교수자인 피터슨이 허락한 말과 방식으로만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만약 학생이 가령 작품 이해에 있어 핵심이 될 가장 궁금한 질문 즉 노란 벽지의 의미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한다면 존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이 모든 것이 뭘 의미한다고 보나요? 

“I don’t know. What do you think it all means?”(Peterson 24)

답을 주지 않고 되물어서 학생으로 하여금 핵심 단서가 있을 노란 벽지가 발라진 어린이 방으로 가게 하거나 스스로 생각하고 답하게 유도하는 것이다. 소설의 핵심 사건이 일어나는 어린이 방에서 학생들은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된다. 서로 소통하거나 주인공 제인과 소통하거나 아니면 다른 참여자가 소통하는 것을 스크린으로 읽고, 다시 원본 텍스트로 돌아가기도 하고, 이차자료도 보면서 작품의 해석에 대한 단서를 찾고 분석한다. 제인 역시 존과 마찬가지로 핵심적인 질문, 가령 그녀는 미친 것이 맞는가, 이유가 무엇인가 등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는다. 제인의챗봇 역시 텍스트의 관련 부분을 반복해서 제시하거나 텍스트의 특정 부분, 가령 저널을 보라는 식의 답을 함으로써 학생들이 스스로 해석 능력을 벼리도록 유도한다. 이렇듯 학생들은 공간의 설계를 따라가며 각자의 방식대로 텍스트를 분석하고 조사하게 된다. 

이 공간에서의 상호작용은 철저히 참여에 기반해 있고 학생이 직접 공간을 탐색하면서 주인공의 눈으로 공간을 체험하기 때문에 주인공의 입장에 공감하기가 쉽다. 토론의 경우도 강의실 토론과 달리 가상공간에서 실시간으로, 집단적으로, 대화적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토론에 활용되는 형식과 언어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29-30). 이렇게 모인 의견과 분석은 집단적 글쓰기의 훌륭한 토대 자료가 되기때문에 글쓰기 프로젝트로 이어지기 쉽고 학생들은 무 플랫폼을 활용해서 수월하게 공동집필을 실행할 수도 있다(31). 

피터슨에 따르면 이와 같이 학생 참여자들의 ‘인터랙티브’ 활동을 통해 「노란 벽지」라는 작품에 대한 집합적 의미구축을 해낼 수 있다는것이 <노란 벽지 저택 무 공간>의 가장 인상적인 성과다. 피터슨의 실험은 단순한 기술 활용을 넘어, 문학 텍스트의 공간적 구조와 감정적 층위를 학습자가 직접 ‘살아보는’ 방식으로 전환시킨다. 강의실은 비록 가상공간이지만 더 이상 젠더갈등이나 서로 다른 이념적 입장을 확인하고대립하는 장소가 아니라, 상대의 입장을 ‘체험’해 보는 장소가 된다. 이는 문학교육을 단순히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속 세계를 ‘재구성’하고 ‘체험’하는 과정으로 전환하는 것이며, 최종적인 개인의 분석 결과는 집단적 분석의 맥락 속에 위치하게 된다.

이와 같은 실천은 궁극적으로 독자와 문학 작품의 관계를 재정립하며 읽기 활동에 대한 전면적 재정의를 부르고 독자가 문학 작품으로 할수 있는 일의 범위도 확장시킨다. 피터슨의 <노란 벽지 저택 무 공간>은 초기의 디지털 교육실험으로서 당시에 혁신적이었지만 오늘날의 입체적 인터랙티브 플랫폼 기술에 비하면 가상공간 구성이나 활동 디자인 등에서 비교할 바가 못 된다. 가령, 오늘날 인터랙티브 픽션의 기술을활용할 경우 코딩을 할 줄 아는 남학생들은 원한다면 존의 입장을 대변하는 챗봇을 새롭게 만들 수도 있고 독자와의 상호작용에 따라 이 챗봇은 그 자체로 작품 내의 독립된—존의 목소리를 대변하는—새로운 작품이 될 수도 있다.[6]

이러한 교육실험은 디지털 환경에서 문학 교육이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학생들은 텍스트를 읽는 동시에 쓰고, 공간을 탐색하며 의미를 구성하고, 공동의 서사를 창조하는 참여자가 된다. 이는 단순한 기술의 도입을 넘어, 문학 교육의 존재론적 전환을 요구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기존의 문학 교육이 텍스트의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이었다면, 디지털 환경에서는 의미를 ‘창조’하는 과정으로 전환된다. 학생들은 더 이상 만들어진 정답을 찾는 독자가 아니라, 자신만의 의미를 구성하는 창작자이며, 텍스트는 고정된 구조물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상호작용적인 공간이 된다. 이러한 교육적 접근은 문학을 단순한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감각적·정서적·윤리적 체험의 장으로 만드는데기여한다.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문학 텍스트를 살아있는 공간으로 재구성하며, 학생들이 그 안에서 움직이고 느끼고 사유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4. 결론: 문학 교육의 목적과 미디어 기술

문학은 오랫동안 인간의 감성과 사유를 자극하는 고유한 매체로 기능해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디지털 매체의 급속한 발전은 문화의 생산과 소비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문화는 더 이상 고유한 의미나 가치의 전달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상품화된 콘텐츠로서 대중의 관심을 끌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구조 속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경쟁적 환경은 문화가 “비지식의 영역(zones of non-knowledge)”으로 전락할 위험을 내포하며, 문학 역시 예외가 아니다(Jo의 Berry and Dieter 재인용, “Digital Storytelling” 43). 게다가 최선령이 지적했듯 시공간적 거리와 언어적 난해함으로 인해 19세기나 20세기 영문학 작품은 한국의 디지털 세대 학생들에게 큰 장벽으로 작용한다. 복잡하고 긴 텍스트를 읽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학생들에게 기존의 비평 중심 수업은 ‘재미’와 ‘의미’ 모두를 제공하지 못하며, 문학에 대한 흥미를 오히려 저해하는 결과를 낳는다(최선령 306).

따라서 문학 교육은 새로운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학생들이 텍스트를 감각적으로 체험하고, 정서적으로 반응하며, 창조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디지털 환경은 이러한 전환을 가능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하이퍼텍스트, 인터랙티브 픽션, 디지털 게임 서사, 멀티미디어 에세이 등은 학생들이 텍스트를 단순히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구성하고 재창조하는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하이퍼텍스트의 구축을 활용한 창작 혹은 글쓰기 방식은, 글이 하나의 주제만을 중심으로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것뿐만 아니라, 여러 주제의 다양한 의미 가능성을 품고 있는 하나의 글을 실제로 구현할 수 있게 해준다. 이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비디오 논문이나 비디오 발표라는 형식도 학계에서 수용되는 추세다. 문학의 근본이 감성과 사유의 소통이라면 이제 최신의 다양한 미디어를 활용한 소통은 점점 필수가 되어가고있다. 

나아가 이러한 교육적 실천은 이념적 충돌을 완화하고, 경험 기반의 소통을 촉진한다. 기존의 비평 중심 수업이 갈등을 유발했다면, 새로운읽기 방식은 학생들이 서로의 관점을 조정하고, 공동의 의미를 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생산적 협업을 경험하게 한다. 이는 문학 교육이 단순한지식 전달을 넘어, 사회적 상호작용과 윤리적 성찰을 촉진하는 장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교육적 접근이야말로 문학의 본래적 기능—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 타자에 대한 공감, 사회적 현실에 대한 성찰—을 회복하는 길이며, 동시에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문학 교육의방향을 제시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코리건(Paul Corrigan)이 주장한 바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문학입문”(Introduction to Literature) 수업이 아닌 “문학결론”(Conclusion to Literature) 수업으로의 전환이 필요할지 모른다. 즉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이냐가 아니라 이제까지 외면해왔던 ‘왜’ 문학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한 답이 필요한 것이다(Corrigan 37–40). 도대체 문학을 왜 배워야 하는가란 질문에 답할 수 없는 교육은 도태되어 마땅하다. 실상, 지금까지 고등교육 기관에서의 문학 교육은 ‘왜’를 중심으로 한 교육은 아니었다는 절실한 반성 역시 필요하다. 결국 문학이 삶에 어떤 직/간접적 효용성을 가지는가란 중대한 문제를 외면하고 지적유희에 머문 탓에 삶과 분리되어 아무런 효용도 갖지 못하는 학문이 되어 버렸고, 비평가란 그럴듯한 추론에 기반해 증명할 수 없는 임의적 주장을 하는 지적 전문가 집단이란 오영의 평가를 반박할 여지가 실상 없는 상황에 처한실정이다. 매체의 전환과 함께 근본적 전환의 기로에 있는 문학은 이제야말로 삶과의 연결성을 회복하는 길로 가야만 한다. 

물론 이 회복의 길에서 우리는 디지털 미디어 기술을 활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작품도 비평도 모두 써주는 시대를 맞아 이제우리가 해야 할 진정한 작업은, 구조주의부터 시작되었고 이론 중심 비평이후 줄곧 외면되어왔던 ‘평가’의 문제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가장근본적인 것,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일지 모른다. 즉, 이제는 문학을 ‘해석’하는게 아니라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평가의 기준은 이런저런 정치적 맥락을 가진 이론에 작품이 얼마나 잘 들어맞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인간의 창조적인 삶’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적 삶’을 중대한 문학비평의 평가 가치로 제시했던 리비스(F. R. Leavis)의 비평 역시 돌아볼 필요도 있다. 물론 이 말이 과거의 ‘자세히 읽기’에 근거한 ‘전통적 방식’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당연히 아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환경은 이제 사라졌기 때문에 새로운 환경에 맞는 새로운 방법론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우리가 좋은 문학과 그렇지 못한 문학을 구분하고 질 좋은 것들을 살려 나가는 작업을 하지 못한다면 무한 생산하는 인공지능 시대를 무사히 항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인공지능과 바둑을 둬서 결국 지고 말았던 이세돌 선수는 한 인터뷰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바둑 두는 목적의 다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밝힌다. 인간으로서 바둑 선수들은 “최선의 수”를 찾는다. 선수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물론 이기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상대를 배려하고 존경하고 소통하는 아름답고 참된 대국, 명국”을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인공지능은 “승률이 높은 수”만 둔다. 대국을 이기는 목적을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공지능은 “명국”에 관심이 없고, 오묘하기 그지없는 명국의 진정한 가치를 프로그래밍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세돌은 인공지능이 나온 이후로 많은 바둑 기사들이 명국을 만드는 “최선의 수”보다 이기는 “승률이 높은 수”를 찾게 되었다고 말한다(234-35). 인간이 인공지능을 따라가려고 흉내를 내는 꼴이다. 이러한 시점에 문학 교육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대한 목적은 문학이 우리 삶의 진,선,미의 가치를 구현하는 예술이라는 것, 그 가치를 알아보고 삶에서 실천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문학 교육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문학 교육의 진정한 효용성은 다름 아닌 삶의 자리에서 확인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기술 역시 그러한 목적을 도와주는 도구로서 활용될 때 비로소 자신의 참된 의미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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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 Literature Education Using Digital Media Narratives in the Postdigital Age: 
To Explore Possibilities for Resolving Gender Conflicts in the Classroom

AbstractYeo Sun Park

This paper examines the pedagogical challenges of teaching Anglo-American short stories in general education courses, focusing on issues of gender and sexuality. Dialogue in the classroom on gender issues has become increasingly strained, reflecting wider social and economic divisions that hinder meaningful engagement with difference. Meanwhile, the increasing digitalization and commercialization of artificial intelligence are changing the way knowledge is produced and represented, necessitating a reappraisal of conventional approaches to textual analysis and interpretation. In this context, reading and writing practices rooted in ideological frameworks risk reinforcing rather than overcoming gender-based divisions.

The study adopts a dual approach to these challenges. Firstly, it contextualizes gender conflict in classrooms within broader sociological contexts, drawing on Chan Sook Hong’s insights into compressed and asynchronous individualization in Korean society. These dynamics highlight how gender tensions manifest in academic settings. Secondly, it questions whether conventional pedagogy, centered on reading, discussion and essay writing, remains effective for digital natives. The paper interprets these shifts as evidence of a generational epistemological change, and concludes by proposing reimagined pedagogical models that prioritize interaction, engagement and experiential learning through digital technologies. These models aim to foster mutual understanding across gender lines and adapt literature education to contemporary realities.

Key Words

gender conflict, individualization, postdigital age, digital media storytelling, literature pedagogy, digital pedagogy, experiential learning


[1] 대부분의 작품은 다음의 두 선집에서 선별하였다. Walter Kalaidian, Judith Roof and Stephen Watt, Understanding Literature: An Introduction to Reading and Writing (Houghton Mifflin, 2004), Kelly J. Mays, The Norton Introduction to Literature (W.W. Norton & Company, 2014). Portable 11th edition.

[2] 가부장 담론의 폭력은 이지현(Jihyun Lee)의 글을, 고딕적 주체 생산 관련 입장은 정희원의 글을 참조. 그밖에 길먼의 작품에 대한 여성주의 관점의 독해는다음의 자료가 유용하다. The Captive Imagination : A Casebook on The Yellow Wallpaper, edited by Catherine Golden (Feminist Press at the City University of New York), 1992. 

[3] 독서의 형태가 “개인적 성격의 종이에서 대화가 가능한 스크린으로” 옮겨가면서 미국의 대형출판사 사이먼앤슈스터(Simon&Schuster)는 가상화면에 영상을 내장한 전자소설을 출판하기 시작했고 출판사의 이사 주디스 커(Judith Curr)는 “글을 읽을 때 이제 더 이상은 선형적 방식만 고집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160-2). 에세이 작가 칼렙 크레인(Caleb Crain)은 지난 시절 읽기의 목적이 “개인적 깨달음이나 즐거움”이었다면 이제는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글을 읽는 시대라고 주장하며, 니콜라스 카(Nicholas Carr)는 “디지털 시장에서 출판은 종결형 사건이 아니라 많은 수정이 가능한 “진행중인과정의 일부”가 되었다고 말한다(󰡔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162).

[4] 디지털 기술의 도래와 함께 문학 텍스트의 달라진 존재양식 및 읽는 방식에 일어난 변화와 관련한 상세한 논의는 국내 하이퍼서사를 다룬 장노현의 논문 3편과 8-90년대 미국에서 발흥했던 전자문학(Electronic Literature)의 고전적 설명서인 N. Katherine Hayles, Electronic Literature: New Horizons for the Literary (University of Notre Dame, 2008)을 참조.

[5] 그렇다고 오영은 문학을 읽고 감수성을 단련하는 것이 독자를 윤리적으로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준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111). 

[6] 물론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소설 세계를 재건축하고, 이 재건축된 세계를 학생들이 탐사하는 과정에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발생하는 단점은 하이퍼텍스트 자체의 문제점이기도 한데, 바로 “링크들을 평가하고 그 사이를 항해하는” 과정에서 뇌의 인지과부하가 걸려서 되려 “독자가 읽는 대상을 이해하고기억하는 능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189). 따라서 몰두하는 고전적 독서는 당연히 불가능하고 이야기를 연결하는 것도 어려우며 독자는 “이야기가 제공하는 경험보다 하이퍼텍스트의 조작과 기능”에 더 관심을 쏟게 된다 (191). 게다가 멀티미디어 형식은 “시청자의 집중력의 한계를 초월”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195). 그러나 발달심리학자인 패트리샤 그린필드(Patricia Greenfield)가 정확히 보았듯, 모든 미디어는 특정 인지기술을 쇠퇴시키는 동시에 다른 인지기술을 발달시킨다(󰡔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210). 즉 결과적으로 우리는 과거에 비해 더 부족하거나 더 향상된 뇌가 아닌 과거와“다른 뇌”를 갖게 되는 것이다(219).

영미문학연구

Journal of English Studies in Korea

49 (2025): 24-101

http://doi.org/10.46562/jesk.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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