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밖 59호] [특집] 교양교육과 인문학의 역할에 대한 『안과밖』의 성찰과 이후의 단상 / 정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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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5-1995=30

영미문학연구회(이하 영미연)가 시작된 1995년경에 영문학 연구자는 여전히 영어권의 최신 담론과 지식을 한국 학계와 대중에게 전달하는 “중심적인 경로” 역할을 해왔던 듯하다.1) 그해에 대학에 입학한 나로서는 영문과에서 영문학을 배운다는 것을 입시 면접에서 처음 깨달았지만 이후 대학생활 내내 학부 전공으로서 영문학의 위상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당시에 흔했던 해외 체류 경험 같은 것이 전무한 상황에서 입학 후 3월에 ‘퀴즈’(quiz)가 ‘OX 퀴즈’인 줄 알고 갔다가 ‘서술형 쪽지시험’이 나와서 당황했던 기억은 있으나, 문법과 단문 독해 위주의 한국식 수능 대비 영어교육을 받다가 2학년이 되어 영소설 수업시간에 하디(Thomas Hardy)의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 한 권을 독파한 이후 스스로의 비약적 발전이 뿌듯했을 따름이다. 1990년대 중반 학번으로서 대학생활이란 강의실과 도서관을 오가면서 ‘아크로’를 곁눈질하는 것이었는데, 대학이 진보 운동에 앞장섰던 시기의 끝자락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980년 이후에는 영미문학을 하는 것이 혹여 제국주의의 첨병은 아닌가, 외국 문학을 연구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실질적인 변화에는 다소 무감하도록 길들여지는 게 아니냐는 자의식”이 있었다는 성은애의 고백에서 영미연을 창립했던 여러 연구자의 문제의식을 미루어 짐작해볼 뿐이다.2)

필자로서 내가 의뢰받은 주제는 전공인문학/교양인문학 또는 대중인문학으로서 영문학의 의미, 영문학과 교양교육에 관해서다. 영미연 30주년 학술대회 발표를 부담감에 어렵사리 수락하고 복잡한 마음에 읽어본 「창립취지문」에는 한국 사회와 학계의 중심에 있으나 이 사회적 위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외국문학 연구자들이 어떻게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실천과 문화 발전의 밑거름이 될 수 있는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이들의 어떤 비장함 같은 것이 있다. 더불어 이 비장한 진심이 30년 이후의 독자에게는 조금은 아득하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대학이 우리 사회의 ‘비판적 지성’을 자처했으며 영문학 연구자들이 주류 학문 전공자로서 깊게 느꼈던 사회적 책임감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여전히 유효한가에 대해 쉽게 답하기 어려웠다. 그동안 학계와 대학의 상황은 변화했고, 답해야 할 질문 역시 달라졌다.

곧 60호 출간을 앞둔 『안과밖』에는 그동안 영문학 연구와 교육이라는 영문학 전공자들의 업을 메타적으로 바라보고자 한 다각도의 노력이 담겨 있다. 일례로 창간호에 실린 김우창의 「한국의 영문학과 한국문화」가 들려주는 30년 전 영문학을 둘러싼 고민은 여전히 뼈아프게 다가온다. “아무리 우원한 방식으로라도 사람 사는 일의 한구석을 밝혀주는 것”이 학문이라면, “영문학의 많은 문제들을 다루는 데 바쳐지는 자원과 정력과 시간과 재능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는 일로 보이고, 결국은 개인적인 취미의 차원과 더러 일어나는 유출효과(spillover effect) 이외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공허한 정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포문을 여는 김우창의
3)은 이러한 날것의 자기반성을 도약대로 삼아 서양문학인 영문학이 “한국문화의 일부”로서 “한국사회의 이해에 기여”할 수 있는 지점에 대한 문제의식을 날카롭게 벼린다. 이처럼 『안과밖』이 포괄해온 논의의 지층을 낱낱이 탐색해보고 싶은 호기심을 억누르며 이 글은 필자에게 요청된 바에 따라 그동안 『안과밖』에서 전공/교양교육과 관련하여 논의되었던 내용을 정리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아보려 한다.

2. 대학의 교양교육과 인문학의 역할에 대한 『안과밖』의 성찰

이번 호 특집을 위한 학술대회 발표자 사전모임에서 영문학 전공자의 교양교육과 관련하여 학회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대화한 내용을 짧게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최근까지도 한국에서 영문학 전공자들이 교양교육에서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은 ‘영어’와 관련된 부분이다.4) 대학 대부분이 교양영어나 대학영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고, 영문학 전공자들은 강좌를 담당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대학의 영어교육에 이바지해왔다. 영어 관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영문학 학제의 교양교육은 ‘영어’와의 연관성 자체가 그동안 분명 장점이 되었다. 물론 최근 대규모언어모델(LLM) 기반 인공지능 번역기 등의 등장은 대학 내 영어교육의 위상에 변화를 초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이전부터 오랫동안 교양교육을 강화하고 그 내실을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와중에 교양교육 전체의 위상도 예전보다 중요해진 경향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대화 끝에 필자에게는 교양인문학과 전공인문학, 영문학 교육에서 ‘교양과 전공 경계의 모호성’이라는 어려운 질문이 주어졌다.5) 이 절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그동안 『안과밖』에서 이루어진 교양교육과 인문학의 역할에 대한 논의를 추적해본다.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에 따르면 2025년 4월 현재 『안과밖』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은 송승철의 「인문대를 해체하라! ‘전공인문학’에서 ‘교양인문학’으로」다. 이 글은 2013년 상반기 제34호 쟁점 ‘대학 교양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의 첫 번째 논문으로, 같은 꼭지에 실린 오길영의 「대학의 몰락과 교양교육: 미국대학의 교양교육 현황」 역시 이 논문 못지않게 많이 인용되었다. 2013년 당시 이른바 창조경제론과 더불어 잡스(Steve Jobs)의 인문학 예찬, 이에 화답하듯 인문학 전공자를 비롯하여 공학사 출신이 아닌 이들을 선발하여 현장에 투입하는 삼성 ‘컨버전스 소프트웨어 아카데미’의 등장 등 시대는 여러 이름으로 ‘인문학’을 호출했다. KCI 인용지수에서 알 수 있듯이 이후 격렬한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킨 송승철 글의 어조는 비교적 온건하게 시작된다. 세간의 인문학 열풍에 대해 교양교육의 이념은 ‘온전한 인간’을 양성하는 것이며, 억압과 이해관계를 초월할 수 있는 ‘자유인’이자 사회적으로 책임감을 느끼는 ‘시민’을 기르는 것임을 일갈한다. 이후 “한국 인문학이 학문세계를 대중적 현실에서 유리시키면서 전문성을 강화”해나간 끝에 “사물화된 전공중심주의”가 “거의 모든 인문학자들에게서 무의식 수준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강도 높은 비판 이후에 “전공중심주의”를 해체하면서 교양교육원에 일임하다시피 한 교양교육의 책임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 주장이다.6)

현재 시점에서 이 글이 갖는 파급력은 안 그래도 위기인 인문대를 해체하라는 선언에서 오는 것이라기보다 송승철이 10여 년 전에 주장하고 제안했던 여러 변화가 인문학계 내에서의 논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 대신 교육부가 ‘무전공 입학제’를 통해 학부제 개편을 주도하는 상황으로 변화와 개편의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겼다는 데에서 온다. 송승철의 글과 그가 비중 있게 검토하고 있는 「분과학문과 교양교육의 불협화, 그 연원과 현실 그리고 전망」에서 학부제나 계열별 제도로의 개편이 필요하다고 보는 손동현의 주장을 비롯해 학계 내에서도 학제에 관한 여러 논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송승철의 글은 컬럼비아 학부대학의 “중핵교과과정”(core curriculum)을 비롯하여 미국의 리버럴 아츠 칼리지(liberal arts college) 모델, 그중에서도 세인트존스대학에서 4년 동안 서구고전 100권을 읽고 토론하는 ‘위대한 고전 프로그램’(Great Books Program) 등을 교양교육 모델의 대안으로 검토했다. 컬럼비아대학과 미국식 리버럴 아츠 칼리지, 세인트존스대학의 사례를 뒤이은 오길영의 글에서도 똑같이 검토하고 있듯이, ‘몰락’하는 한국 대학의 학부 과정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 논의는 필요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송승철이 예시로 드는 미국 대학 교양교육 프로그램을 오길영도 다루고 있으나, 그가 말하는 ‘몰락’이란 대학이 자본과 시장논리에 의해 잠식되어가는 현상에 대한 진단이며, 글에서 다루는 미국 대학의 교양교육 과정을 “대학의 권력자들이 떠받드는” 것으로 지칭한다는 점에서 송승철에 비해 해당 프로그램들에 대한 거리두기의 관점을 동시에 취하는 차이점이 있다.7) 이 프로그램들의 공과를 본격적으로 논할 역량이 없는 필자로서는 현시점에서 이러한 학부교육 모델을 선제적으로 도입한 곳은 카이스트(KAIST) 융합인재학부라는 정보로 이를 대신해본다. 물론 이 또한 미국식 교육 모델의 직수입이 아닌가 하는 질문 또한 당연히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이쯤에서 송승철과 오길영이 모두 언급한 컬럼비아대 중핵교과과정 또는 핵심교과과정의 현황을 짧게 살펴보자. 학부대학에서 운영하는 핵심교과과정은 예술인문학, 현대문명, 과학의 최전선, 문학인문학, 음악인문학, 글쓰기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8) 서양문명사를 개괄하는 ‘현대문명’ 과정은 플라톤에서 시작해서 크리스틴(Christine de Pizan)과 마키아벨리를 거쳐 계몽주의 철학자들과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파농(Franz Fanon)과 푸코(Michel Foucault),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로 이어지는 커리큘럼의 주요어를 “공동체”로 제시한다. 1년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는 ‘문학인문학’의 첫 학기는 아카드 제국(기원전 2334~2218년)의 여성시인 엔헤두안나(Enheduanna)의 작품을 시작으로 성경의 요한복음으로 끝나고, 두 번째 학기는 흑인 여성시인 랭킨(Claudia Rankine)의 『시민』(Citizen)을 필두로 아우구스투스의 『고백』과 마리 드 프랑스(Marie de France), 셰익스피어를 거쳐 오스틴(Jane Austen)과 울프(Virginia Woolf), 모리슨(Toni Morrison) 작품으로 마무리된다. 엔헤두안나와 랭킨으로 학기를 시작하는 것에서 짐작되는 프로그램이 지향하는 가치는 ‘음악인문학’에서 다루는 마지막 음악가가 흑인인권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시몬(Nina Simone)인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전까지 서양문학의 기원으로 간주되었던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거슬러 올라가 서양문학의 기원을 확장하고 흑인여성 문학가와 음악가를 중요하게 검토하는 이 미국의 학부대학 과정은 교양교육의 지향으로서 자유인/시민 양성이 역사적·사회적 맥락 및 가치판단과 분리될 수 없음을 전제한다. 동시에 “시각 리터러시”(visual literacy)를 함양하고자 하는 예술인문학 및 음악인문학 등 대부분의 대학 전공 체계에서 예술대학에 속해 있는 주제들을 인문학의 영역으로 포섭함으로써 교양인문학의 정체성을 전통적 인문학 커리큘럼에서 벗어나 인간과 세계를 인식하고 읽어내는 시각과 태도로 확장하는 함의를 갖는다. 또한 문학을 ‘문학인문학’으로 명명함으로써 여러 인문학적 인식 및 예술적 표현 방식 중 하나로 그 위상을 재정립하고 있음을 덧붙일 수 있겠다.

송승철과 오길영의 글이 미국 대학의 교양교육을 살피는 과정에서 각자의 주장을 개진한다면, 34호 쟁점의 마지막 글인 「유럽 대학의 교양교육」에서 조효제는 2011년 런던대 소속 좌파 성향 지식인 그레일링(A. C. Grayling)이 ‘인문교양 뉴칼리지’(New College of the Humanities)라는 미국식 교양대학 설립을 발표했던 사건을 소개한다. 도킨스(Richard Dawkins)나 얼마 전 타계한 데닛(Daniel Dennett) 등 이름이 알려진 교수진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의외로 영국 학계의 반응은 이 ‘미국식’ 교양교육에 적대적이었다는 것이다. 2025년 현재 그레일링이 설립한 NCH는 아이러니하게도―어쩌면 자연스럽게도?―보스턴에 있는 미국 사립대 노스이스턴대학의 런던 캠퍼스(Northeastern University of London)로 편입되었으나, 조효제가 유럽 교양교육 부활의 원조로 소개했던 1988년 「대학 대헌장」(Magna Charta Universitatum)은 MCU 2020으로 그 명맥을 꾸준히 이어나가고 있으며,9) 당시 47개국이 속해 있던 볼로냐 존(Bologna Zone)의 회원국은 94개국으로 대폭 증가했다. 조효제의 글은 유럽 대학에서 인문교양 교육이 부활하고 있는 이유가 학생들이 “‘큰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안목”을 기르고 “21세기의 지식경제에 부응”하며 “글로벌 시민권에 대한 융통성 있는 사유”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이를 위해 “인간의 과거에 대한 지식(역사), 인간의 존재론적 성찰(철학), 새로운 현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방식(문화)”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교육은 인문교양 교육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10) 물론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이 목표들 사이에는 내밀한 긴장이 존재한다. 전자가 경제적 효용성을 승인하는 인문교양의 “도구적 가치”에 가깝다면 후자는 “내재적 가치”11)에 해당할 것이다. 인문교양을 둘러싼 두 가지 관점은 한국 대학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텐데, 조효제는 교양교육 과정에서 ‘도구적 가치’를 굳이 배제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덧붙인다.

교양교육으로서 인문학에 관한 문제의식은 같은 해 출간된 35호 쟁점 ‘대안인문학의 가능성’이라는 기획으로 연속된다. 이수영은 현장인문학의 예시로 현재 ‘희망의 인문학’으로 지속되고 있는 노숙인문학, ‘노들장애인야학’과 ‘수유너머’ 등을 든다. 대학교수이자 아프꼼 래인커머(來人comer)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권명아는 결속체를 통한 대안인문학운동의 곤경과 실험을 소개한다. 권명아가 언급한 인문학 결속체 중 하나인 다중지성의정원에서 활동했던 정남영은 리비스(F. R. Leavis)가 “문학비평에서 지성(intelligence)과 감수성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말로 표현한 들뢰즈(Gilles Deleuze)적인 포괄성을 예로 들며, 자기양성·자기교육·자기계몽의 자율성을 지지하고 “자기계몽의 인간학이 모든 과학의 영혼이 되어야” 함을 주장한다.12) 이는 대안인문학운동의 핵심이 “자기해방의 기획이자 실천”으로 평가하는 권명아의 주장과도 공명한다.13) 권명아의 글에서 인문학운동단체들의 “활동형식이 주로 ‘대중강좌’나 ‘북 콘서트’”인 것은 언급된 단체들의 여러 활동이 인문학 대중화로 환원될 수 없으며 그 형식이나 모델이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반성의 지점으로 기술되고, 당시 인문학운동단체들의 문제의식이 어디에 있는가를 되새기게 한다.

한편, 10여 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되돌아볼 때 인문학운동단체 등이 펼쳐온 대중강좌는 대학이라는 제도 밖에서 수행되는 교육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별도의 의의를 갖는 것으로 생각된다. 코로나19 시대를 거치면서 줌(zoom) 등 온라인 매체에 많은 이가 익숙해졌고, 이를 기반으로 한 대중인문학 강의 역시 점차 다양화되고 양적으로도 증가해왔다. 유럽인문아카데미나 필로버스, 다중지성의정원이나 서교연 같은 기존에 어느 정도 기반을 갖추고 있던 단체들 외에도 연구자 개인이 여는 수업 역시 시작되고 있다. 일례로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자신의 세부 전공과 맞지 않더라도 주어진 과목을 강의해야 하는 시간강사 생활 끝에 최소한의 대학 수업을 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수업은 대중 강좌로 개설하는 연구자들이 늘어나는 현상은 제도로서의 대학 바깥에서 교육하고 공부하는 이들의 엄연한 학문적 실천 양상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2015년 하반기 39호 쟁점 ‘위기의 대학과 인문학의 길’의 시선은 다시 대학 ‘내부’를 향한다. 윤지관은 정부의 대학구조조정 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전인한은 ‘새로운 인문학의 출현을 고대’하며 영문학 전공 커리큘럼의 대대적인 개편을 요청한다. 39호 쟁점의 마지막 논문인 김명환의 글을 포함하여 세 편의 글은 모두 송승철이 제기한 ‘교양인문학’과 ‘전공인문학’의 관계에 대해 각자의 방식으로 답변한다. 윤지관은 전인한과 송승철의 인문학 커리큘럼 비판이 정부가 주도하는 “대학구조개혁에 대한 정면대응을 생략하고” 있기에 완벽한 답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하고,14) 전인한은 글의 각주에서 “‘교양인문학’은 대학 교양교육에서 가르치는 인문학을 지칭하고, ‘전공인문학’은 대학 분과학문 체제에서 인문학 관련 학과에서 전공으로 교육되고 연구되는 인문학을 지칭”하는 것임을 명기한다. 사실 이 주석의 핵심은 마지막 문장일 텐데, “‘전문가 인문학’은 문자지배 시대의 폐쇄된 소통구조 속에서 지식 생산과 전수의 특권을 가진 전문가들이 연구하고 교육하는 인문학”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시대와 교육 상황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계의 보수성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15) 이 쟁점의 마지막 글에서 김명환은 송승철이 개진한 ‘교양인문학’ 논의의 허와 실을 분석하면서 아널드(Matthew Arnold)와 엘리엇(T. S. Eliot), 리비스 등을 엘리트주의로 통칭하는 송승철의 관점에 문제를 제기한다.16) 35호에서 정남영이 리비스를 논의하면서 인용했던 지성, 또는 김명환의 번역으로는 “예지”(intelligence)와 감수성의 동시적 함양을 대학 인문교육의 목표로 삼았던 리비스의 교육론에서 영문학이 교양교육의 중심적 토대가 되고 있음을 송승철이 간과함으로써 그가 내세운 대안 역시 의의와 실행 두 가지 관점에서 모두 미덥지 못하다는 것이다.

전인한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여러 분과학문 전문가의 팀티칭이나 김명환이 송승철의 글에서 비판하는 “인문학과 인문학이 아닌 인접 분야를 기계적으로 병렬하는” 것의 문제점17) 등 39호에서 다룬 쟁점들은 이듬해 2016년 하반기 41호 특집의 제목이 된 ‘인문학, 융합을 짚어본다’가 다루고 있는 논점과 일정 부분 조응한다. 첫 번째 글인 「융합, 인문학의 살 길인가」에서 박찬길은 우리나라 학계에서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융합’을 선도”해온 것은 “통섭론”으로 알려진 최재천 교수 등 과학 쪽이었으며, 카이스트가 인문사회 계열 단과대를 “인문사회기술융합대학”으로 부르기 시작한 시대적 변화로 글을 시작한다. 본론에서는 ‘융합’이 주로 정부 재정지원 사업에 의해 주도되는 실상을 적시하면서 국가가 인문학을 ‘지원’하되 그 내용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훔볼트(Wilhelm Humboldt)의 지적을 환기한다.18) 최예정의 「인문대를 해체하면 되는 걸까: 교양인문학 또는 인문학 융합교육의 가능성과 의미」에서 융합교육 변천사 개괄은 대학에서 “융합교육에 대한 요구를 소화하는 대표적인 필드가 교양교육”이라는 통찰로 이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최예정은 “인문학의 자기변신”을 위해 “일반인들의 요구”와 접점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으며, “대중인문학자들이 유치하게 보일지 몰라도 가장 성공한 부분이 바로 이 지점”임을 지적한다. 디지털 문화가 체질화된 학생들과의 접점 및 “디지털 환경에 알맞은 인문학 교육을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는 최예정의 결론은 미디어 리터러시를 인문학 교육의 중요한 의제로 제시하는 전인한의 글과 궤를 같이하는 면이 있다.19)

뒤이은 2021년 하반기 51호 쟁점 ‘대학의 창의융합교육 어디로 가고 있나?’에서 최예정은 “한국에서 교양교육은 전공교육보다 덜 중요하다거나 쉽게 학점을 채우면 되는 과목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먼저 교양교육을 융합의 기초라는 관점에서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거듭 강조한다. 또한 세분화된 학사제도 도입으로 교양으로 이수한 과목을 전공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검토하면서, 교육부는 “교양과 전공의 연계를 장려하는 방식으로 평가방침”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20) 같은 호에 실린 노동욱의 글은 최근 “사회가 요구하는 융합”이 “이과적 기반을 중심으로 한 융합”인 상황에서 융합 담론과 맞물린 “인문학의 토핑화” 현상에 우려를 표명하며 인문학 본연의 ‘역량’인 ‘문제해결력’ 교육이 가능하다고 본다. 결론에서 영문학 전공자들이 “나는 소설 전공이라서 희곡은 잘 모른다”는 식의 말로 여전히 두터운 전공의 벽을 자연스레 체화하고 있음을 비판하는 대목에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21)

주마간산식으로 살펴보긴 했으나, 『안과밖』이라는 아카이브의 지층을 탐색하면서 그간 영미연이 대학 교양교육과 인문학의 역할에 대한 다각도의 시선을 포괄해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학 교양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룬 34호 쟁점은 ‘교양인문학’과 ‘전공인문학’의 경계에 대한 화두를 던지면서 교양교육을 둘러싼 여러 질문을 촉발시켰다. 2년 뒤 39호의 세 필자는 이 물음에 대해 각각 정부의 일방적인 대학구조조정 정책, 시대의 변화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 학계의 보수적 풍토, ‘전공인문학’을 비판하면서도 ‘교양인문학’이라는 해답이 정부나 대학본부에 의해 오도될 가능성을 열어놓은 송승철 글의 한계를 비판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고민을 펼쳐놓았다. 대학 내 ‘전공인문학’이 아닌 여러 인문학 실천의 의의를 살펴보고자 하는 35호 쟁점 ‘대안인문학의 가능성’이 있었고, 학문적 경계를 넘어서는 연구와 교육에 대한 탐구는 이후의 융합 연구와 교육을 다룬 다양한 논의로 이어졌다.

교양교육을 둘러싼 논의들을 살펴본 이 절의 마무리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안과밖』의 여러 호를 탐독하던 지난 2월, 국문학 연구자들의 모임인 한국현대문학자대회에서 교양교육 좌담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듣고 귀동냥이라도 하려는 마음으로 찾아갔다. 2025년 2월 12일 성균관대에서 개최된 ‘교양교육 교수자는 2류 연구자인가?’라는 좌담회에서 전국 각지 대학의 교양교육 교수자들은―국문학회인지라 주로 글쓰기 교수자였다―각자 다른 이유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어떻게 글쓰기를 통하여 학생들과 소통하고 교육하고 있는가를 절절히 고백했다. 좌담회의 마무리에서 한 발표자는 “교양교육 교수자라고 해서 2류 연구자나 교수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는데, 그 순간 좌담회의 타이틀은 수사의문문―2류 연구자가 아니다―인 동시에 현상 진단―2류 연구자로 간주된다―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6년 상반기 창간 10주년 기념호인 20호 특별좌담 「영미문학연구회와 한국의 영문학 연구현황」에서 이명호는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는 영어교육과 영문학 교육 사이에 세워진 근거 없는 위계의 문제”이며, “이 문제는 국문학 쪽에서도 글쓰기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과 국문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의 문제하고도 유사”하다고 지적하는데,22) 20년 전 이명호의 지적은 “영어교육”을 ‘교양교육’으로 대체하면 여전히 유효한 셈이다. 20년 동안 영문학 연구자들의 교양수업이 ‘영어교육’에서 ‘교양교육’ 일반으로 확대된 변화 역시 새삼스레 감지된다. 그간 교양교육에 관한 『안과밖』의 논의를 집중적으로 읽으면서 송승철의 「인문대를 해체하라!」가 던진 파문이 아직도 큰 것을 실감할 수 있었는데, 한편으로 송승철의 ‘문제적’이며 따라서 그런 의미에서 ‘생산적’인 이 글은 논문의 필자가 엄연히 유수 대학 영문과 전임교원이었기에 활자화될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교양교육 교수자가 “인문대를 해체하라! ‘전공인문학’에서 ‘교양인문학’으로”라는 글을 출판했다면 만용과 자격지심의 양자 비판 사이를 오가다가 학계에서 홀연히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3. 전공/교양인문학과 교양교육에 관한 단상

거슬러 올라가 보면 본래 ‘교양과목’(liberal arts)은 “자유로운 인간들, 여가의 인간들”의 전유물이었다.23) “엘리트에 의해 실천되고 향유되던 ‘교양과목’과 대중에 의해 실천되었던 유용한 목적을 위한 수공예 기술로 기예―제작술―가 분할되었던 세상”에서 말이다.24) 코트(Franklin E. Court)의 『영문학의 제도화』(Institutionalizing English Literature)에 따르면 1820년대 말부터 옥스브리지로 대표되는 영국식 엘리트 교육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중간계층을 중심으로 산업화 시대의 수요에 발맞춰 좀 더 실용적이고 “유용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25) 영문학이 대학 교과목으로 안착하는 과정에서 라틴어나 그리스어로 된 고전문학과 달리 ‘유용성’ 담론과 19세기 공리주의의 만남이 어느 정도 역할을 한 셈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20세기 초 대학에서 영문학이 본격적인 분과학문으로 자리잡게 된 데에는 식민지인들에게 영국성을 교육하고자 한 제국주의 프로젝트의 일환 역할도 있었다. 또한 소설발생론을 다시 쓰면서 18세기의 여러 작품이 ‘소설’이라는 단일한 장르로 정의되는 과정이 미국 대학에서 시대와 장르를 나누어 전문화된 분야로서 영미문학이 제도화되는 과정과 맞물려 있는 것으로 보는 브라운(Homer Obed Brown)의 논의도 이런 관점에서 되짚어볼 수 있다.26) 브라운은 이 과정에서 교양으로서 빌둥(bildung)이 중요해지는 맥락을 함께 지적한다.27) 일본식 고등교육체제의 도입과 함께 한국에서도 ‘영문과’가 분과학문이자 전공 분야로 도입되었지만, 대학에 진학해서 인문학 공부를 하는 것 자체가 엘리트적인 특권이었던 시대에 전공으로서 영문학은 여전히 엘리트적인 ‘교양’과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시점에서 영문학 전공자는 교수자로서 교양수업에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이 질문에 원론적으로 접근할 역량이 없는 필자가 오로지 그간의 경험에 미루어 할 수 있는 대답은 “우리말 텍스트로 ‘교양’에 초점을 맞추어 가르친다”는 것뿐이다. 이 답과 관련된 첫 번째 사안은 교양교육과 ‘번역’의 문제다. 영어와 관련된 교양교과가 아닌 일반 교양과목의 경우 새로운 수업을 구상할 때마다 양질의 번역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한다. 그간 몇몇 교양과목을 개발한 짧은 경험을 돌이켜보면 과목에서 다룰 내용과 주제를 결정한 이후에는 관련 텍스트가 번역되어 있는가를 열심히 찾아본다. 영문학 텍스트를 교재로 사용할 경우 시중 번역서 검토는 모든 영문학 전공자의 공통 숙제일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특정 책의 번역이 새로운 수업 개설 아이디어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일례로 필자가 2023년에 ‘디지털 시대의 인문학’이라는 고루한 제목의 교양수업을 구성하게 된 것은 그해 3월에 라 메트리(Julien Offroy de La Mettrie)의 『인간기계론』(L’homme-machine), 8월에는 위너(Norbert Wiener)의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 번역서가 연달아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같은 텍스트를 각각 전공과 교양 수업에서 다룰 때 작품을 대하는 태도나 논점 역시 달라진다. 이른바 낭만주의 ‘빅6’ 시인인 셸리(Percy Bysshe Shelley)가 요새 학생들에게 메리 셸리(Mary Shelley)의 남편으로 소개될 만큼 인기가 많은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을 예로 들어보자. 프랑스혁명기 영국 사상계를 대표했던 아버지 고드윈(William Godwin)의 서재를 탐독했던 작가의 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게 이 소설은 투명성과 교훈주의, 이미지와 말, 시각과 수사의 길항, 의도와 결과의 괴리 같은 혁명기 담론을 흥미롭게 변주한다. 18세기와 감성주의의 대표적 유산인 편지 형식을 소설이 활용하는 방식 역시 중요하며, 세즈윅(Eve Kosofsky Sedgwick)이 지적한바 남성 인물의 관계와 젠더적 함의 역시 흥미롭다. 또한 몽테스키외(Montesquieu)의 『법의 정신』(De l’esprit des lois)을 여는 제사(epigraph) “어머니 없이 창조된 존재”(Problem sine matrem creatam)를 읽는 후대 독자는 『프랑켄슈타인』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이처럼 『프랑켄슈타인』을 계몽주의와 혁명기 등의 관점에서 읽는 방식은 18세기 영문학 연구자인 필자에게 매우 중요하지만, 21세기 한국 독자들에게 작품이 던지는 타자성과 인공생명을 둘러싼 사안 역시 우리가 사는 세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소설을 통해 인종주의나 소수자성, 이민자와 환대, 인공생명의 창조와 관련된 담론을 여러 영문학 전공자들이 다뤄봤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문학을 학제로 정립하는 초기 과정에서 문헌학과 신비평, 시대와 장르에 따른 정전이 자리잡은 역사적 맥락이 물론 있지만, 또한 영문학 연구는 영화학·미디어학·디지털인문학·환경인문학·도시인문학·의료인문학 등 다양한 학제 및 연구 분야를 포괄해왔다. 최예정의 지적처럼 교양교육의 강점으로서 융합교육과의 친연성은 확장되어온 영문학 연구의 외연과 맞물려 교양교육 교수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강의실에서 몰두하고 있는 다양한 수업의 원천이 되고 있다. 특히 2020년대 들어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과학기술의 헤게모니를 일반인들도 매일매일 피부로 느끼고 있는 시점에서 이러한 현상을 염두에 둔 (영)문학 연구와 교육의 접점을 찾는 일이 난데없는 시도는 아닐 것이다. 불과 7~8년 전만 해도 이제는 ‘인공지능’에 밀려 어느덧 잊혀가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기표가 우리 사회를 장악하고 있었다.28) 당시 정확히 어떤 현상에 관한 기술인지 불분명한 상태에서 특히 한국의 경우 선언에 가까웠던 ‘4차 산업혁명’은 LLM 기반 인공지능과 이미지 데이터로 훈련된 생성 AI의 출현 및 그 대중화로 뒤늦게 내용이 채워지고 있다. LLM 기반 인공지능의 등장은 읽고 요약하고 쓰는 행위에 대한 메타적 접근을 요청하며, 문학 교육의 대상으로서 텍스트성과 간매체성(intermediality)에 대한 이해 역시 제고될 필요가 있다.

물론 모두가 인공지능 연구에 몰두할 필요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학생들의 일상과 의식세계 전반을 파고든 이 기술 발전을 우리가 이제껏 해왔던 것처럼 메타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는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최근 교양수업을 진행하면서 새삼 실감하는 것은 태엽으로 작동하는 시계나 외부 동력 없이 스스로 작동하는 자동자/오토마타(automata), 증기기관의 출현과 상용화가 당대인들의 의식과 인간관에 일으킨 파장이다. 자동인형은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기계로서의 동물론에 큰 영향을 주었고,29) 보캉송(Jacques de Vaucanson)의 자동인형을 본 라 메트리는 “인간의 신체”가 “거대한 시계이고 그것도 대단한 기술과 솜씨로 만들어진 시계”라고 단언한다.30) 버틀러(Samuel Butler)의 소설 『에레혼』(Erewhon) 23장 「기계의 책」(“The Book of Machines”)에서는 “증기기관에 의식 같은 것이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되고, 이를 이어받아 튜링(Alan Turing)은 ‘모방 게임’(Imitation Game) 설계안으로 유명한 논문 「계산 기계와 지능」(“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에서 “기계가 생각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31) 위너 역시 “새뮤얼 버틀러가 은유적으로 상상했던 기계의 지배가 기술 진보의 결과로 가장 긴급한 문제”로 부상한 것으로 진단하면서, “17세기와 18세기 초반이 시계의 시대이고, 18세기 후반과 19세기가 증기기관의 시대라고 한다면, 현대는 커뮤니케이션과 제어의 시대”라는 진단으로 사이버네틱스 논의를 시작한다.32) 요컨대 기술 발전과 새로운 사물의 출현은 항상 인간성과 인간사회를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에 영향을 끼쳤으며, 이런 점에서 현재 인공지능 기반 도구나 매체에 대한 학생들의 매혹과 열광 역시 비판적으로 역사화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인문학 학제가 오랫동안 공헌해왔던 우리의 ‘특기’ 분야이기도 하다.

이는 기술 발전과 새로운 사물의 출현이 인간과 세계, 그 재현으로서 문학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현미경과 망원경, 만화경이나 지도제작술, 사진이나 영화 같은 새로운 매체의 출현이 문학과 문학적 재현 방식에 끼친 영향에 관한 방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왔으며, 전보나 타자기, 피아노 건반에 이르기까지 여러 매체와 문학의 상호구성성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서술된다.33) 헤일스(N. Katherine Hayles)는 컴퓨터와 인공지능 등 연산 미디어와 인간이 맺는 관계를 인지적 배치(cognitive assemblages)로 표현함으로써 『어떻게 우리는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How We Became Posthuman)에서 주장한 탈인간중심주의적 인식을 견지하되, 사물의 자율성이나 알 수 없음을 강조하는 일련의 흐름으로부터도 거리를 둔 채 인간의 행위성과 연산 미디어 등 비인간 행위자가 접속하고 연결되는 지점에 주목한다.34) “LLM이 인지 능력을 가지고 있고, 언어가 발명된 이후로 가장 중요한 문화적 적응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세계 안에서 체화된 경험”이 없는 LLM 모델을 사용할 때 “인간의 사고와 인지”가 여전히 핵심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35) 필자를 포함해서 이 글을 접하게 될 교수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학생들은 훨씬 인공지능을 신뢰하고 챗GPT에 의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불러일으킨 사고와 인지 방식의 변화를 돌이킬 수 없듯이, 질문과 대화라는 형식을 통해 그 어떤 연산 미디어보다 손쉽게 의인화해서 자신의 세계로 수용하는 동시에 그 언어적 출력물을 일상적 언어와 학문적 담론 모두에서 빠르게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이 모델이 출력하는 언어들은 사용자들이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뿐 아니라 가치관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36)

교양교육의 관점에서 재진술해보면, LLM 기반 인공지능을 비롯한 새로운 사물/기술/논리가 우리에게 주는 충격과 일종의 언어구성물로서 그것이 새로운 주체성의 일부를 이루는 것을 받아들이되, 동시에 좀 더 장기적으로는 모든 종류의 새로운 사물/기술/논리에서 한 걸음 물러나 그것의 ‘문맥’을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 역시 필요하다. 이를 염두에 두고 먼 길을 돌아 ‘교양과 전공 경계의 모호성’이라는 어려운 질문으로 되돌아와보자. 그렇다면 (매우 이상적이긴 하나) 교양과목에서 함양해야 하는 것은 결국 계속해서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체계적인 지식과 방법론을 교육하는 것이 전공교육의 목표라면 동시에 새로운 것을 맞닥뜨렸을 때 그 사물/기술/논리를 학습자 자신이 갖고 있는 지적 체계 안에서 파악하고 수용하고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학 교수자들이 교양교육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바는 ‘읽기’와 이에 대한 해석에 기반을 둔 비판적 사유라는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로 되돌아오게 된다.

좀 더 실질적이고 제도적인 측면에서는 전공교과목을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커리큘럼 전체를 고려해서 설계해야 하는 것에 비해 교양교과목 영역이 갖는 상대적 자유로움도 고려해볼 수 있다. 최근의 번역서와 동향을 반영한 게릴라식 배치가 가능하며, 문학 텍스트로 영역을 한정하지 않는 다양한 읽기를 포괄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교양교과목의 커리큘럼은 각 학과의 전공교과목과 연계한 ‘마이크로디그리’ 등 소단위 학점으로 구성된 전공 설계와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최예정은 “전공과목 중 기초과목을 개방하여 타 전공 학생들이 교양과목으로 이수할 수 있게” 하는 방안과 더불어 “나노디그리, 자기설계형 전공제 등 다양한 학사제도”를 통해 학생들이 스스로 전공으로 발전시키는 방안을 제안했는데, 이러한 모듈형 교육과정은 최근 학사제도 개편과 함께 여러 대학에 도입되고 있다.37)

물론 실제 교육과정에서 학사제도나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문제보다 더욱 대두되고 있는 것은 어떻게 ‘읽게 하도록’ 할 것인가일지 모른다. 영문학 교수자들이 성취하고자 하는 대부분의 교육 목표는 읽고 생각하고 쓰는 과정과 분리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작년에 『애틀랜틱』(The Atlantic)에 실린 기사 「책을 읽을 수 없는 엘리트 대학생들」에 따르면 컬럼비아대 학부대학 ‘문학인문학’ 과정에서 20년 전에는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을 한 주차에 읽고 다음 주차에 『죄와 벌』(Crime and Punishment)로 토론 수업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전체 플롯을 따라가면서 동시에 작은 디테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읽기의 기본기를 갖추지 못한 학생이 많아서 이런 커리큘럼은 거의 불가능해졌다고 한다.38) 이어서 소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읽어내기 어려워하는 학생들의 사례가 언급된다. 이 기사를 읽으며 전통적으로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장르는 서사가 있는 소설이었으나 이제는 시가 가장 인기라는, 웃을 수만은 없는 영문학 교수자들 사이의 농담이 떠올랐다. 왜 시인가? “짧아서”라는 것이다. 현재에도 학생들은 책을 읽기 전에 블로그나 유튜브 등을 통해 요약본과 논점 등을 미리 접하면서 ‘경제적’(!) 독서를 하고, 비싼 영화표를 사서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영향력 있는 영화평론가의 별점과 분석을 통해 자신이 봐야 할 것을 숙지한 뒤 감상하는 과정에서 이를 확인하는 감상 문화에 노출되어 있다. 대중서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은 최근의 영상 시청 문화를 다각도에서 분석하는 저널리즘적인 성격의 책인데, 저자에 따르면 현세대는 “재미없는 작품을 만나 시간 낭비하는 일”을 시간을 제대로 쓰지 못한 실패로 받아들인다.39)

독서와 텍스트 읽기는 인터넷 블로그, 유튜브, 트위터(현 X)나 챗GPT 같은 여러 매체와 단순한 경쟁관계에 놓여 있다기보다 새로운 매체의 출현으로 그 방식이 끊임없이 재편되고 있다. 블로그가 어느 정도 길이가 되는 글과 이미지를 통해 소통하고자 했다면, 트위터나 인터넷 댓글로 토론하는 문화에서는 주장과 근거를 한두 문장 안에 효과적으로 요약하고 돋보이게 하는 능력이 우선이다. 학부 시절 (인)문학 수업을 통해 배운 것은 살아보지 못한 시대와 삶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어떤 주장이나 삶에 대해 이해하려면 그것이 성립하는 조건을 끊임없이 되물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한두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는 긴 호흡의 사유가 담긴 글을 읽는 것과 맞물려 있을 수밖에 없다. 새로운 매체로서 LLM 기반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는 능력은 더욱 가치 없는 것으로 간주될지도 모른다. 아무리 긴 책도 인공지능이 요약해줄 것이므로 독서에 쓰는 시간은 점차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한 낭비나 실패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읽기’의 경제적 효용과 도구적 가치의 측면에서라도 길고 어려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도움 없이 읽어내는 집중력과 독해력이 고급 역량에 속하는 날이 오지는 않을까.

4. 나가며

이 글에서는 그동안 『안과밖』에 실린 교양교육과 인문학의 역할에 대한 논의를 정리하고 교양교육으로서 영문학 교육을 둘러싼 여러 논점을 제기한 뒤, 학문적으로 면밀히 고찰하는 대신 주로 그간의 교육 경험에 바탕을 둔 솔직한 경험과 생각을 공유하고자 했다. 바르트(Roland Barthes)가 연인의 ‘담론’(discours)이라는 주제로 강의했던 내용을 『사랑 담론의 단편/단상』(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던 것처럼 어떤 글은 단상으로밖에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바르트의 매혹적인 책과 이 짧고 허접한 글을 수평적으로 놓고 비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일종의 파편이자 단상의 모음으로서 이 글에 대한 자기변명에 가까울 것이다. 어쩌면 10년 뒤쯤의 독자들은 챗GPT의 출현에 호도되어 온통 인공지능과 인문학 교양교육에 관한 단상으로 점철된 것으로 이 글의 한계를 평가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결론을 대신하여 다시금 여러 가지 의미에서의 비판적 ‘읽기’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이미 사립학교가 공립학교보다 읽기 교육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하고 있으며, 스마트폰 이후 세대에게서 가정환경이나 교육 수준, 경제적 수준에 따라 읽기 격차가 더욱 벌어지는 현상이 관찰되고 있다. 매우 현실적으로 고려했을 때 취업전선에 뛰어들기 전에 졸업과 학점을 미끼로라도 긴 책을 읽어내고 토론하며 생각해서 글을 쓰는 교육을 원칙적으로나마 재학생 모두가 받을 수 있는 곳은 여전히 대학이 아닐까 한다. 학생으로서의 시간보다 졸업 후 훨씬 오랫동안 변화하는 세계와 부딪치며 살아갈 이들에게 계속해서 배울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는 데에 교양교육이 일조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대학의 존재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 글을 마감하며 장강명의 최신작 『먼저 온 미래: AI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을 읽었다. 2016년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결 이후 바둑계의 변화를 추적하는 이 르포르타주는 오랫동안 바둑을 인간적 가치를 담고 있는 예술로 생각했던 이들로 구성된 바둑 생태계가 바둑 AI의 출현 이후 어떻게 급격히 변모했는가를 통해 각종 AI 이후를 상상한다. 오웰(George Orwell)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The Road to Wigan Pier)을 인용하며 시작하는 이 책의 결론에서 『1984』는 헉슬리(Aldous Huxley)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와 함께 중요한 레퍼런스로 등장한다. 어떤 이들은 현대의 삶이 오웰이 그렸던 파국으로 나아가기보다 헉슬리가 그린 세계와 더 닮았기에 “오웰의 예상은 빗나갔고, 헉슬리의 예상이 옳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작가는 『1984』가 있었기에 현 사회가 감시권력의 파국을 피한 것이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본다.40) 최첨단 기술을 익히고 따라가기에도 급급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도 문학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것은 필연이다.


  1. 1)* 이 논문은 2025년도 서울시립대학교 교내학술연구비에 의하여 지원되었음.鄭禧媛 서울시립대 인문학연구소 교수. 최근 편저로 『인지와 인공지능: 챗GPT부터 스마트 담론까지』(갈무리, 2025)가 있다.영미문학연구회 「창립취지문」(1995년 6월 3일). http://sesk.net/sub1_1.php.
  2. 2) 성은애·오길영·이경덕·이명호·박인찬 「특별좌담: 영미문학연구회와 한국의 영문학 연구현황」, 『안과밖』 20 (2006) 창간 10주년 기념호 28면.
  3. 3) 김우창 「한국의 영문학과 한국문화」, 『안과밖』 1 (1996) 창간호. http://www.sesk.net/data/file/sub2_1/1a4f263da802c9a17783a3a137027ea8_le6ban0k_357a75f24f9518cf0ca1c6ef26aa25723c970a3b.pdf.
  4. 4) 창간호에 실린 김우창의 글 역시 “영어를 수단으로 하여 영문학과는 관계없는 다른 일에 종사하겠다는 학생들”이 대부분인 영문학 학제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5. 5) 고백건대 매 학기 교양교과목을 한두 과목씩 꼭 가르쳤지만, 교양교육 교수자보다 영문학을 전공한 학제 간 인문학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한 내가 얼마나 필자의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교양교육과 관련한 학내 논의 등에도 참여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의 특히 후반부는 학과 교수가 아닌 연구소 교수라는, 대학 교원 사회에서 일종의 소수자로서 그간의 교양교육 경험을 바탕으로 함을 밝혀둔다. 글의 후반부는 이런 점에서 이전에 『안과밖』에 있었던 ‘강의노트’와 유사한 성격일 수도 있다.
  6. 6) 송승철 「인문대를 해체하라! ‘전공인문학’에서 ‘교양인문학’으로」, 『안과밖』 34 (2013) 163~73면.
  7. 7) 오길영 「대학의 몰락과 교양교육: 미국 대학의 교양교육 현황」, 『안과밖』 34 (2013) 177~78면.
  8. 8) https://www.college.columbia.edu/core-curriculum/classes (2025년 8월 11일 검색).
  9. 9) https://www.magna-charta.org/magna-charta-universitatum/mcu2020 (2025년 4월 21일 검색).
  10. 10) 조효제 「유럽 대학의 교양교육」, 『안과밖』 34 (2013) 210면.
  11. 11) 같은 글 213면.
  12. 12) 정남영 「자기계몽으로서의 교육과 새로운 주체성의 형성」, 『안과밖』 35 (2013) 175면.
  13. 13) 권명아 「이행과 자기해방의 결속체들: 대안인문학운동의 곤경과 실험들」, 『안과밖』 35 (2013) 142면.
  14. 14) 윤지관 「구조조정 속의 인문학과 대학: 무엇을 할 것인가」, 『안과밖』 39 (2015) 100면.
  15. 15) 전인한 「시력 약한 박쥐의 아름다운 퇴장: 새로운 인문학의 출현을 고대하며」, 『안과밖』 39 (2015) 121면.
  16. 16) 김명환 「오늘의 한국 영문학 혁신의 길」, 『안과밖』 39 (2015) 155~57면.
  17. 17) 같은 글 159면.
  18. 18) 박찬길 「융합, 인문학의 살 길인가」, 『안과밖』 41 (2016) 13, 34면.
  19. 19) 최예정 「인문대를 해체하면 되는 걸까: 교양인문학 또는 인문학 융합교육의 가능성과 의미」, 『안과밖』 41 (2016) 48, 52, 55면.
  20. 20) 최예정 「창의융합인재 교양교육 강화에 대한 비판적 고찰」, 『안과밖』 51 (2021) 139, 143면.
  21. 21) 노동욱 「창의융합 시대 인문교양교육에 대한 비판적 고찰 및 제언: 영문학의 사례를 중심으로」, 『안과밖』 41 (2016) 147~66면.
  22. 22) 「영미문학연구회와 한국의 영문학 연구현황」, 『안과밖』 20 (2006) 50면.
  23. 23) 자크 랑시에르 지음, 박기순 옮김 『아이스테시스』(길, 2024) 6면.
  24. 24) 같은 책 39면.
  25. 25) Franklin E. Court, Institutionalizing English Literature: The Culture and Politics of Literary Study, 1750-1900 (Stanford: Stanford UP, 1992) 40면.
  26. 26) Homer Obed Brown, Institutions of the English Novel: From Defoe to Scott (Philadelphia: U of Pennsylvania P, 1997) xi면.
  27. 27) 같은 책 xiv면.
  28. 28) 이 내용 없는 기표에 관한 단상으로는 정희원 「책머리에: 포스트휴머니즘과 4차 산업혁명이라는 기표」, 『안과밖』 43 (2017) 2~8면 참조.
  29. 29) Simon Schaffer, “Deus et Machina: Human Nature and Eighteenth Century Automata,” Revue de la Maison Francaise d’Oxford 1.9 (1998) 39면.
  30. 30) 쥘리앙 오프레 드 라 메트리 지음, 이충훈 옮김 『인간기계론·인간식물론』(도서출판b, 2023) 102면.
  31. 31) 앨런 튜링 지음, 노승영 옮김 「계산 기계와 지능」, 『지능에 관하여』(에이치비 프레스, 2019) 67면. 튜링이 『마인드: 심리학과 철학에 관한 계간지』(Mind: A Quarterly Review of Psychology and Philosophy)라는 학술지에 게재한 이 논문에는 버틀러의 『에레혼』 23, 24, 25장 「기계의 책」이 참고문헌으로 실려 있다. 같은 책 111면 참조.
  32. 32) 노버트 위너 지음, 김재영 옮김 『사이버네틱스』(읻다, 2023) 78, 93면.
  33. 33) 관련된 모든 문헌을 인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Cynthia Sundberg Wall, The Prose of Things: Transformations of Description in the Eighteenth Century (Chicago: U of Chicago P, 2006) 2~95면; Friedrich A. Kittler, Gramophone, Film, Typewriter, trans. Geoffrey Winthrop-Young and Michael Wutz (Stanford: Stanford UP, 1999); Colette Colligan and Margaret Linley ed., Media, Technology, and Literature in the Nineteenth Century: Image, Sound, Touch (London: Routledge, 2011).
  34. 34) N. Katherine Hayles, Unthought: The Power of Cognitive Nonconscious (Chicago: U of Chicago P, 2017).
  35. 35) N. 캐서린 헤일스 지음, 송은주 옮김 「인지 모드, 그리고 대규모 언어 모델과 인지 모드의 관계: 챗GPT와 대화하기」, 『인지와 인공지능: 챗GPT부터 스마트 담론까지』(갈무리, 2025) 18, 35면.
  36. 36) 일례로 이번 학기 교양수업에서 장강명의 『먼저 온 미래: AI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을 함께 읽고 있는데,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는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일이 ‘옳은 일’이 되려면, 그 기술이 생화학무기 제조에 쓰이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어야 한다”는 작가의 비판적인 시각에 평소 성실한 수업태도를 보인 어떤 학생은 그러면 “작가는 감기조차 생존에 치명적이고 영유아 사망률이 높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것인가?”라며 작가의 ‘위선적’ 태도에 심각한 반감을 표출했다. 인공지능이 가져다준 획기적인 편리성 이전으로 전혀 돌아가고 싶지 않고 돌아갈 수 없는 사용자로서의 가치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강명 『먼저 온 미래: AI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동아시아, 2025) 283면.
  37. 37) 최예정, 「창의융합인재 교양교육 강화에 대한 비판적 고찰」 140면.
  38. 38) Rose Horowitch, “The Elite College Students Who Can’t Read Books,” The Atlantic (November 2024). https://www.theatlantic.com/magazine/archive/2024/11/the-elite-college-students-who-cant-read-books/679945/.
  39. 39) 이나다 도요시 지음, 황미숙 옮김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현대지성, 2022) 57~58면.
  40. 40) 장강명, 앞의 책 314~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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