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스키(Rita Felski)는 미국 버니지아대학의 영문과 교수로,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페미니즘과 비판이론의 다양한 교차를 치열하게 사유해온 학자다. 최근의 포스트비판(postcritique) 논의에서 펠스키의 작업이 특별히 흥미로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앵커(Elizabeth S. Anker)와 공동 편집한 『비판과 포스트비판』(Critique and Postcritique, 2017)이 비판에서 포스트비판으로의 전환을 이해하는 데 신뢰할 만한 안내서로 자리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그 중요성에 비해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논의되었지만, 이보다 앞서 출간된 『비판의 한계』(The Limits of Critique, 2015)는 펠스키 자신이 깊이 관여해온 미국 비판이론의 역사와 포스트비판으로의 이행을 탐구한 생생하고 치밀한 인류학적 비평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펠스키가 포스트비판 담론에서 상징적인 이유는, 그녀의 학문적 여정 자체가 곧 비판과 포스트비판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교차와 긴장을 고스란히 반영하기 때문이다.
1989년에 출간된 펠스키의 첫 저서 『페미니즘 미학을 넘어: 페미니즘 문학과 사회 변혁』(Beyond Feminist Aesthetics: Feminist Literature and Social Change)에는 문학이 단순한 현실 재현이 아니라 현실 변혁을 향한 사회적 실천의 장이어야 한다는 펠스키 초기의 페미니즘적 사유가 담겨 있다. 이어 『근대성의 젠더』(The Gender of Modernity, 1995)에서 펠스키는 서구 근대성 논의가 남성적 경험과 주체성 중심의 서사이자 젠더화된 상상적 구조라는 점을 파헤치면서, 여성의 감정·소비·예술·사적 영역을 근대성의 구조 원리로 재배치한다. 두 책 모두 문학이 사회적 억압의 흔적이 등록되고 해방이 사유되는 특권적 장소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문학 해석을 통한 ‘비판’은 그러한 억압을 폭로하고 저항의 방식을 상상하면서 고유의 정치적 실천을 수행하는 지적 활동을 강조한다.
21세기에 이르러 펠스키의 작업은 비판 ‘이후’의 해석학, 즉 비판과 연속적이고도 불연속적 관계에 있는 포스트비판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탐색하면서 정동이론과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이 주는 영감을 결합하는 시도로 요약될 수 있다.
정동이론의 좌표에서 펠스키가 스스로를 위치시키는 곳은 문화연구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부상하고 있는 포스트현상학 또는 신현상학적 흐름이다. 정조(mood)나 감응(attunement) 등의 현상학적 개념을 역사적·경험적 구체성과 연결시키는 이 같은 흐름은,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아메드(Sara Ahmed)의 『퀴어 현상학: 방향, 대상, 타자』(Queer Phenomenology: Orientations, Objects, Others, 2006)나 리커트(Thomas Rickert)의 『정조적 수사학: 수사적 존재의 감응들』(Ambient Rhetoric: The Attunements of Rhetorical Being, 2013)과 같은 작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03년에 출간된 『페미니즘 이후의 문학』(Literature after Feminism)은 펠스키 사유의 이러한 변화와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이 교차한 결과물로, 여기서 그녀는 정체성 정치의 한계를 짚는 가운데, 문학적 감응과 애착에 대한 생각들을 벼리기 시작한다. 신현상학을 구체적으로 참조하며 문학의 가치와 효용에 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개진하는 곳은 『문학의 쓸모』(Uses of Literature, 2008)다.1)
2010년대 저작인 『비판의 한계』와 『사로잡히다: 예술과 애착』(Hooked: Art and Attachment, 2020)(이후 『사로잡히다』)의 기획에 이르러 펠스키는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roy, ANT)으로부터 받은 영감을 자신의 기존 현상학적 관심과 연결지어 포스트비판 논의에 본격적으로 개입한다. 『비판의 한계』는 비판에서 포스트비판으로의 전환을 정동의 계보학으로 재구성하고, 『사로잡히다』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펠스키만의 포스트비판적 읽기를 제안하는 기획이다. 『사로잡히다』의 전제에 대해 펠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감응과 친화성, 정조와 세계를 말하는 현상학의 흐릿한 언어 구름은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의 경험적이고 사물지향적이며 흔적을 더듬는 탐색적 강조점과 뒤섞일 수 있다. 이러한 방법론적 얽힘은 예술이 무엇을 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왜 중요한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한층 풍요롭게 할 것이라는 전제가 나의 지적 내기(wager)다.”2)
이 글은 펠스키의 포스트비판적 읽기가 『비판의 한계』와 『사로잡히다』를 거치며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그 핵심에는 해석의 규모(sclae)와 태도(stance)를 세밀하게 조율하는 새로운 방법론의 제안이 자리하고 있음을 규명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이를 규모-태도의 해석학이라 명명하고, 몇몇 대목에서는 두 개념의 영어적 음성 공명을 강조해 S-S 해석학(Scale-Stance Hermeneutics)이라 지칭할 것이다. 펠스키의 규모-태도 해석학은 행위자-네트워크 이론과 현상학의 교차점 위에서, 개별 작품을 둘러싼 미학적 경험을 사회적이자 현상학적으로 기술하려는 ‘중간 차원’(midlevel)의 접근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는 영미 비평의 오래된 전통인 개별 작품에 대한 자세한 읽기라는 작은 규모의 접근과 텍스트를 사회·역사적 컨텍스트와 연결하는 큰 규모의 접근이라는 이항 구도를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의 ‘연결’ 개념을 통해 재구성하면서, 여기에 독자의 매혹·감응·동일시와 같은 정서적 기울기(slant)를 통합하는 시도다. 다시 말해 펠스키의 포스트비판적 해석학은 카메라가 피사체와의 거리와 감도를 조절하듯 해석의 규모와 태도를 세밀하게 조율함으로써 해석 행위를 다층적이고 유연한 경험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이 글의 말미에서는 S-S 해석학이 서 있는 감응과 연결의 (탈)주체론적 전제를 살피면서, 펠스키는 주목하지 않았으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의 중요한 행위자-감수자 모델인 ‘망설임’을 논의하면서 규모-태도 해석학의 층위를 두텁게 하고자 한다.
비판의 시대: 방법이자 정조로서 의심
『비판의 한계』는 1980년대 이후 미국 비판이론의 역사를 “비판적 정조”(critical mood)의 계보학으로 다시 쓰는 기획이다. 펠스키에게 학문적 담론의 정동적 어조를 살핀다는 것은 특정 연구자의 심리를 진단한다거나 그 학문적 내용을 심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가 곧 세계에 대한 특정한 태도와 지향이라는 현상학적 접근을 이론 이해에 적극 수용하는 일이다. “사유의 양태는 세계에 대한 특정한 태도와 성향이 스며든 지향(orientation)이며, 논증은 내용만이 아니라 스타일과 어조의 문제”3)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비판은 하나의 방법론일 뿐 아니라 특정한 정조이기도 하다는 전제가 『비판의 한계』의 기획을 이끌고 있다.
정조는 학문적 논의를 구성하는 감수성과 지향을 이해하기 위한 펠스키의 개념이다. 하이데거를 경유해 펠스키가 정조 개념에서 주목하는 것은 “정조는 사유를 동반하며 그것의 흐름을 조율한다”는 점이다(Hooked 21면). 정조란 “세계가 특정한 방식으로 드러나게 만드는 전반적 분위기나 정서적 기후”를 뜻한다. 정조는 대체로 흐릿하게 확산되어 있어 “사고의 전경이라기보다는 배경에 스며 있는 상태”로 작동한다. 열정(passion)의 돌발적이고 격렬한 성질과 달리, 정조는 일정한 지속성과 안정성을 지니면서 우리 앞에 세계가 특정한 방식으로 나타나게 하며 우리가 세계와 관계 맺는 ‘톤 앤 매너’를 설정한다. 그러므로 정조는 모든 형태의 관계 맺기의 전제조건이고, 이는 해석의 과정에서도 예외적이지 않다. 특정한 태도와 신념의 성좌가 텍스트를 향한 하나의 지향을 형성하는 것, 이것이 비판적 정조로서 이론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펠스키가 보기에, 1980년대 이후 미국 비판이론의 정조는 ‘의심’(suspicion)이다. 개인·구조·권력·텍스트·주체를 이해하는 다양한 이론이 공유하는 정서적 기반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퀴세(François Cusset)가 프랑스 철학의 미국 수용사를 다룬 연구에서 포착했듯, “끝없는 의심”이다.4) 『비판의 한계』의 첫 장 「의심의 대가」(“The Stakes of Suspicion”)에서 펠스키는 1980년대 비평계 전반에 만연했던 의심의 정조의 “어조와 결, 느낌과 냄새”(Critique 34면)를 파헤친다. 그 경로는 비판이론이라는 세계가 대학원생 시절의 펠스키에게 흥분과 매혹으로 다가왔던 기억을 경유한 현상학적 자서전이자 인류학적 자기보고서의 형식을 띤다.
나 자신을 포함해, 신비평(New Criticism)과 구(舊)역사주의(old historicism)라는 밋밋한 학문적 식단에 길들여져 있던 대학원생 세대에게, 문학 이론과 비평 방법의 폭발적 등장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1980년대의 지적 열정―마셰리(Macherey) 읽기 모임, 시수(Cixous)와 이리가레이(Irigaray)에 대한 밤샘 토론―은 강렬하고, 열정적이며,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어느 순간, 우리의 손에는 믿기 어려울 만큼 풍부한 어휘가 쏟아졌다. 문학 텍스트를 더 넓은 세계와 접속시킬 수 있는, 넘쳐나는 방법론의 보고(cornucopia)가 펼쳐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나는 이론에 따라붙던 전위주의적 경향들에 의문을 품곤 했다. 마치 최신의 파리 철학에 정통한 사람만이 무지의 안개와 이데올로기적 공모의 수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던 그 분위기 말이다. 그러나 내 동료들 대부분이 그랬듯, 나 역시 그 시절의 취한 듯한 논쟁들이 부정할 수 없이 흥미진진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Critique 18~19면)
1980년대 대학원생 펠스키가 홀린 듯 탐독했던 이론 텍스트들의 궤적은 그 자체로 미국 비판이론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펠스키가 이론에 입문한 것은 알튀세르(Louis Althusser) 이론이 절정을 이루던 1980년대 초반이었다. 주체는 언제나 이미 이데올로기 안에 연루된 존재이며, 다양한 국가기관들에 의해 호출되어 구성된다는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적 사유를 무의식과 억압이라는 정신분석적 개념과 결합시켜 문학비평의 방법론으로 세공한 마셰리(Pierre Macherey)와 제임슨(Fredric Jameson)의 ‘징후적 독해’(symptomatic reading)는 당시 미국 비판이론의 열기가 모여 다양한 비평적 실천을 생산해내는 방법론적 용광로와 같았다.
제임슨의 징후적 독해는 펠스키가 앵커와 공동 편집한 『비판과 포스트비판』에서뿐 아니라 포스트비판 담론의 장 안에서 비판이라는 ‘장르’의 상징적 모델로 중요하게 논의된다. 비판을 장르라고 칭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사유와 글쓰기 안에 특정한 논증과 수사의 스타일이 반복되고 변주되기 때문이다. 미국 마르크스주의 비평의 고전이라 할 『정치적 무의식: 사회적 상징 행위로서 서사』(The Political Unconscious Narrative as a Socially Symbolic Act, 1981)에서 제임슨은 문학 해석이 근본적으로 꿈의 해석의 형태를 띤다고 본다. 그에게 문학작품이란 역사적 모순하에 생산된 산물인 동시에 정치적 무의식에 의해 그 모순을 봉쇄하거나 상징적으로 해결하려는 ‘꿈’의 형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문학 읽기는 언제나 텍스트의 이면을 거슬러 내려가는 꿈의 해석 작업이다. 이때 비평가는 텍스트를 마치 환자처럼 다룸으로써, 표면적 증상 아래 숨겨진 심층의 질병을 진단하고 마침내 이데올로기적 억압을 폭로하는 의사-탐정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후 펠스키의 연구 초점이 페미니즘으로 이동하면서 징후적 독해의 방법론은 남성적 응시, 가장(masquerade)으로서의 여성성과 같은 페미니즘 비평의 언어와 만나 “어지러울 만큼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변화”하게 된다. “수행성과 판옵티콘, 거울 단계와 미장아빔(mise en abyme), 호명과 여성적 글쓰기(l’écriture féminine)” 등 새로 등장한 이론적 틀들은 “짐짓 교활한 눈빛을 한 세일즈맨의 윙크”를 날리며, 이전 이론을 의심에 부치는 가운데 그 한계를 극복하겠노라고 약속하는 듯 보였다. 각 이론은 ‘주체’의 궁극적 이론이나 ‘권력’의 결정적 개념을 제시해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을 듯한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이처럼 역동적으로 경쟁하고 충돌하는 이론적 장 속에서 텍스트라는 개념 또한 다양한 스펙트럼 위에 자리하게 된다. “그 시절 텍스트는 무자비할 정도로 제한적이고, 억압적이며, 닫혀 있고, 강제적이며, 밀폐되고, 배제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아니면 정반대로 다성적이고, 혼란스럽고, 축제적이며,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고, 내적 모순으로 뒤틀려 있으며, 언제 붕괴할지 모를 혼돈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Critique 19면).
펠스키는 징후적 독해의 마르크스주의적·정신분석적 토대가 페미니즘의 언어와 결합하면서 이후 1980~90년대에 부상하는 탈식민주의, 신역사주의, 문화적 유물론, 퀴어이론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음을 강조한다. 일견 그녀의 논의는 이론 내부의 경합과 변환에 초점을 맞추는 듯 보이지만, 펠스키는 이론의 진화와 담론적 전환이 단지 학문 내부의 토론과 논쟁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적 행위자들의 가시성”에 의해서도 촉발되었음을 상기시킨다. 특히 탈식민주의와 퀴어이론은 각자가 거쳐온 운동(activism)의 역사와 경험을 경유하여 비평의 과제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제시했다. “역사적 세부성과 사회적 정체성의 구체성에 대한 높은 관심, 이론의 유럽중심적 가정과 초점을 넘어서는 시도, 그리고 정치적 불평등에 대한 세밀한 조율”(Critique 19면)이 그것이다. 이때 푸코(Michel Foucault)의 계보학적 역사학이 중요한 방법론적 준거점이 되었다는 점 역시 기억해둘 만하다.
이러한 방법론의 부상과 경합이 불과 20여 년 사이에 폭발적으로 전개되었고, 그 과정에 정치적 역동과 변혁을 향한 열망이 동반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 신진 학자였던 펠스키가 느꼈을 현기증과 흥분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펠스키는 1980~90년대 미국 비평계를 지배했던 ‘비판’이라는 이름의 징후적 독해, 이데올로기 비판, 푸코식 역사주의는 그것들 사이의 명백한 차이만큼이나 텍스트 안에서 위반과 저항의 신호를 읽어내려는 다양한 독해의 기술이라는 점에서 ‘의심의 해석학’이라 부를 수 있다고 본다. 이때 의심의 해석학은 “경계심, 거리두기, 신중함의 자세인 의심(suspicion)과 주석적 해석(hermeneutics)의 결합”(Critique 3면, 원문 강조)이다. 그것은 “열림보다는 경계, 순응보다는 공격, 경외보다는 아이러니, 배려보다는 폭로”(Critique 21면)의 태도다. 펠스키의 질문은 이렇다. 의심의 해석학이 지배적인 메타언어의 위상을 가져왔고, 그로 인해 끊임없이 회의하고 경계하며 의심하는 학자가 지식인의 표본이 되어왔지만, 과연 그것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유효한 해석의 방법론일까?
1980년대 이후 미국 학계의 지배적 해석학을 ‘비판’이라는 장르로 상대화하고, 그 해석적 실천에 담긴 정동적 지향을 사유한 것이 펠스키가 처음은 아니다. 정동적 포스트비판의 시초 또는 준거점의 공을 돌려야 한다면, 그것은 리쾨르(Paul Ricoeur)와 세즈윅(Eve Sedgwick)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펠스키는 이 두 사람의 논의에 충분한 경의와 대화의 태도를 가지고 개입한다. 왜 비판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세즈윅식의 편집증(paranoia)이 아니라 ‘의심’의 정조가 관건인지, 리쾨르의 기여는 왜 프로이트·니체·마르크스를 ‘의심’의 해석학으로 연결지은 것이 아니라 의심의 ‘해석학’을 강조하는 데 있는 것인지, 나아가 오늘날 과연 더 많은 의심이 비평의 언어에 추가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지 면밀하게 논의한다.
주지하듯 리쾨르는 현대 비판이론의 거대한 영감이자 자원인 마르크스·니체·프로이트를 ‘의심의 해석학’의 계보 안에 한데 묶으면서, 비판의 정신은 곧 끊임없이 의심하고 회의하는 경계의 자세에 있다는 점을 일깨웠다.5) 리쾨르가 의심의 해석학에서 포착하고 있는 것은 한 범주로 쉽게 묶을 수 없고 때로 서로 반대되거나 길항 중인 방법론들을 관통하는 어떤 공통의 감각과 사유의 형태로, 펠스키의 작업은 이러한 리쾨르의 문제의식의 연장선에 있다. 그러나 펠스키가 볼 때 의심의 해석학 자체는 리쾨르 작업의 핵심도 아니고, 그의 저작 전반에 걸쳐 중심적으로 논의된 개념도 아니다. 포스트비판 논의에서 리쾨르는 주로 이 용어를 통해 소환되지만, 정작 그가 마르크스·니체·프로이트의 혁신으로 보았던 바는 그들이 사유의 급진성을 해석 방식의 근본적 전환으로부터 길어냈다는 점이다. 5)
펠스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리쾨르가 『프로이트와 철학』(Freud and Philsophy)에서 제시한 복원의 해석학(hermeneutics of restoration)을 소개한다. 여기에는 텍스트의 의미를 “경이, 경외, 황홀, 희망, 에피파니, 기쁨”의 순간들을 통해 마주하는 독자의 형상이 있다. 널리 알려진 리쾨르의 “의심의 해석학이 텍스트의 부재를 진단하고 감춰진 의미를 폭로한다면(unmasking), [그의 방법론의 또 다른 차원인] 복원의 해석학은 텍스트의 현존에 귀 기울이며 그 의미를 드러낸다(unveiling)”(Critique 32면). 이는 펠스키의 현상학적 지향이 담긴 리쾨르 해석으로, 『비판의 한계』에서는 부분적으로만 논의되지만, 이후 『사로잡히다』에서 그녀가 제시하는 감응과 애착의 행위자-네트워크 미학 이론을 예견하는 대목이다.
펠스키의 비판적 정조의 관점에서 보자면, 세즈윅이 비판의 특징으로 지목한 편집증은 그 은유적 속성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여전히 병리학적 색채를 해석 행위에 드리운다. 세즈윅은 포스트비판의 언어와 정동을 새롭게 연 기념비적 에세이 「편집적 읽기와 회복적 읽기, 혹은 ‘너무 편집적이라 이 글이 너에 관한 거라고 생각하겠지’」(“Paranoid and Reparative Reading, or, You’re So Paranoid, You Probably Think This Essay Is About You”)에서 동시대 미국의 비판 이론을 지배하는 의심의 해석학을 “다른 [해석적] 가능성들 중의 하나”6)로 상대화하면서, 그 특징을 편집증적 읽기로 규정한다. 세즈윅에 따르면, 편집증적 읽기는 의심을 통해 ‘억압’이라는 이미 예정된 해석의 결말로 나아가며, 그 자체에 대한 의문 제기가 다시금 동일한 의심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모방적이고 반영적이다. 또한 편집증적 읽기는 넓은 규모의 현상을 해석할 수 있는 일반성과 환원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강한 이론(strong theory)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펠스키가 보기에, 편집증적 읽기의 전염성과 모방성은 세즈윅 자신이 고도로 경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이 개념에 기대어 전개된 비평적 대화가 “부정적 스핀 위에 또 다른 부정적 스핀을 얹는” 방식으로 동료 연구자의 “수상하고 위선적인” 해석학적 동기를 폭로하는 우월한 비평적 위치를 선점하려는 비평적 제스처로 기능했다(Critique 35면). 그리고 그 위험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처럼 편집증은 펠스키에게 그 전염적 위험성과 병리적 색채로 인해 비판의 정조를 설명하는 틀로 부적절하다. 그렇다면 회의주의는 어떤가? 회의주의는 의심의 해석학이 취할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이자 태도로 볼 수 있지만, 펠스키에 따르면 그것은 특정한 세계관일뿐더러 미국의 이론을 이루는 정조의 핵심은 아니다. 반면 ‘의심’은 비판의 다양한 정치적 입장과 철학적 신념을 관통하는 스타일과 감수성을 이해하기에 가장 적절한 개념이다. 또한 의심이 편집증이나 회의주의의 전문적 색채와 달리 일상의 언어에 속한다는 점도 펠스키에게는 중요하다. 일상에서 느끼는 억압 및 불의에 대한 의심과 문제제기는 정치적 저항과 변혁의 불길을 당기는 촉매제이고, 이러한 역사 안에서 비판이론은 태동하고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근대의 노동자와 노예들이 고용주와 주인의 약속과 믿음을 의심하고 회의했던 바로 그 지점에서 19세기와 20세기의 중요한 혁명과 변혁이 비롯되었다. 펠스키는 의심이라는 단어에 깃든 전복적 색채가 이러한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펠스키가 그려내는 의심의 계보학을 둘러보면, 의심이라는 비판적 정조가 경계심·거리두기·신중함의 자세를 통해 견인해온 비평적·정치적 결실은 뚜렷하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어떠한가? 펠스키는 의심이 반동적인 정치적 역습의 형태로 돌아오는 현실, 미국 학계에서 의심이 일종의 제도적 정언명령으로 굳어버린 현실은 더 이상 의심이라는 비판적 정조의 진보성을 보증하지 못한다고 본다. “일상적 의심은 특정한 당파성보다는 무차별적으로 퍼져 있다. (…) 우파 포퓰리즘, 큰 정부에 대한 적대, 다문화주의에 대한 지역 공동체의 반발, 이민자 희생양 만들기, 지식인을 향한 경멸과 그들의 학문적 권위를 해체하려는 열의에 찬 조롱과 폭로”(Critique 45면). 또한 의심의 해석학은 이제 제도화된 지식노동의 규범적이고 일률적인 행위양식이 되었고, 연구 안에서 이미 정치를 수행하고 있다는 미국 지식인들의 폐쇄적 안도감을 가져왔다. 이에 대해 지앙(James Jiang)은 이렇게 말한다. ‘학자 됨’과 ‘저항적임’이 함께 간다고 믿는 이러한 인식은 “영문학자들이 밤에 편히 잠들 수 있도록 해준다. 자신의 정치가 자신의 직업적 소명을 정당화하고, 그 소명이 다시 자신의 정치를 정당화한다는 확신 속에서 말이다”(Critique 125면에서 재인용). 그러므로 펠스키는 묻는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더 많은 회의주의, 더 많은 의심이 필요할까?
규모-태도의 해석학: 펠스키의 포스트비판적 읽기
『비판의 한계』의 후반부와 『사로잡히다』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펠스키 자신의 응답이다. 의심의 해석학을 상대화하는 것이 비평적 활력을 위해서나 정치적 전망을 다시 사유하기 위해서나 이로운 것이라면, 우리는 이제 의심의 해석학 ‘이후’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비판의 한계』에서 펠스키는 ‘포스트비판적 읽기’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포스트비판은 그 이전 사유와의 연속성과 관계성을 보존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개념적 모호성이 다양하게 분기하는 해석적 가능성을 한데 묶어두는 임시적 틀(placeholder)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에서 펠스키에게 매력적이다. 한 인터뷰에서 펠스키는 포스트비판의 가장 큰 특징으로, 비판이라는 장르를 상대화하면서 해석의 긍정적·확장적·회복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태도를 꼽는다.7) 이는 단순히 해석의 부정적 태도를 긍정적 지향으로 전환하는 문제가 아니라 비평의 정조·수사·논증의 스타일을 새롭게 하는 작업이며, 읽기라는 행위와 실천이 삶과 앎을 더 풍요롭게 하는 방식을 모색하는 일이다. “우리는 비(非)비판적인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과연 포스트비판적일 수 있을까”(Critique 151)라는 펠스키의 물음에는, ‘비판’이 하나의 장르로 굳어진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읽기 행위의 비판적(critical) 성격, 즉 관습적 독해와 익숙한 직관에 저항하며 새로운 의미를 구성하려는 해석적 행위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다. 7)
『사로잡히다』에서는 의심이라는 비판의 정조를 분석하는 작업이 후경화되면서, ‘애착’(attachment)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이 펠스키의 포스트비판 해석학으로 전경화된다. 펠스키가 보기에, ANT가 예술연구에 주는 통찰이 있다면, 그것은 텍스트를 둘러싼 다양한 행위자들을 탐구의 대상으로 끌어들인다는 점이다. “평평한 존재론”(flat ontology)이라고도 불리는 ANT의 입장에서 보면, 행위자(actant)는 의식·의지·의도를 가진 인간 존재만이 아니라, 상호연결되고 엮이는 가운데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세계를 구성하기도 하는 모든 존재를 뜻한다. 행위자들이 모여 이루는 네트워크는 그 규모, 형태, 밀도, 지속성이 다양하다.
‘연결’의 개념을 중심에 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은 텍스트 간의 관계뿐 아니라, 텍스트와 창작자·독자·비평가·제도 등이 맺는 관계망 전체를 탐구의 대상으로 끌어들인다. 이때 텍스트를 둘러싼 ‘연결’에 주목하는 것은,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반영의 인과 관계로 바라보는 것과는 다르다. 라투르의 비유처럼, 텍스트와 컨텍스트라는 복잡한 행위자들은 단체사진을 찍기 위해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서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테두리를 예기치 않게 벗어나 서로 접속하고 연결된다. 따라서 ANT적 사고를 예술 해석에 도입하면, 작품을 이미 존재하는 세계의 충실한 재현물이나 기만적 모사체로 간주하는 관점에서 벗어나, 예술이 다양한 수용체들과 접속하면서 세계를 새롭게 구성해내는 궤적과 윤곽을 그려내는 작업이 가능해진다고 펠스키는 주장한다.
이때 펠스키에게 중요한 것이 ‘애착’ 개념이다. 펠스키에게 애착은 순진하거나 미성숙한 감수성의 징표가 아니라, 지적인 삶의 모든 형태가 필연적으로 전제하는 조건이다. 돌아보면, 1980년대 이후 비판의 부흥에도 이론이 제기한 질문들에 대한 전율에 가까운 매혹이 있었다. 그것은 “사랑의 안티테제가 아니라 어쩌면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이라 할 만한” 열정, 우리 삶의 근본적 억압과 모순을 건드리는 동시에 희미한 희망을 건네는 지적인 질문에 대한 이끌림이었다(Hooked 133면). 펠스키에게 애착은 사랑이라는 언어에 내재한 “과도한 인격화”와 정동 개념의 비인격성을 서로 중화시키면서, 그녀가 보고 싶어하는 다양한 행위자들의 관계적 풍경을 사유하기에 적절한 개념이다(Hooked 31~32면). 애착 개념을 중심에 두면 “행위자들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관계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되고 있는 것들(things)이 있음을 상기하게 된다. 각각의 고유한 특성과 형태, 윤곽, 그리고 때로는 견고한 모서리까지 지닌 현상들이 존재함을 말이다”(Hooked 32면). 무엇보다 애착은 해석이라는 행위를 ‘관계하기’(relating)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관계(relation)는 인문학에서 이미 오래전 확립된 탐구 방식이다. 우리는 개인과 개인, 개인과 거대 구조의 관계를 탐색하며 세계를 읽어왔다. 반면 관계하기는 여기에 독자의 매혹, 감응, 동일시와 같은 정서적 기울기를 추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계하기로서 해석하기란 곧 애착을 전경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로잡히다』의 도전은 애착이라는 정동적 태도와 행위자-네트워크적 관점을 우리의 비평언어 속에 추가하는 시도가 해석의 방식을 새롭게 할 뿐 아니라 지적인 이점을 가져온다는 점을 논증하는 것이다. 펠스키는 묻는다. 관점의 변화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예술을 새롭게 읽을 수 있는가? 그것이 어떤 앎을 가능하게 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지금 왜 중요한가?
펠스키는 정서적 기울기가 추가된 행위자-네트워크적 관점이 ‘중간 차원’의 비평을 가능하게 한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생각은 비평이 작은 단위(개별 작품)와 큰 단위(사회, 자본주의)라는 이분법 안에서 움직여온 관습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읽기의 규모를 다양화하려는 최근의 움직임과 같은 선상에 있다.8) 『사로잡히다』에서 펠스키는 개별 작품을 둘러싼 미학적 경험을 현상학적이자 사회적으로 기술하는 방식을 ‘중간 차원’의 접근이라 부른다. 이 책에는 스미스(Zadie Smith)의 에세이, 이시구로(Kazuo Ishiguro)의 소설, 마티스(Matisse)의 그림, 미첼(Joni Mitchell)의 음악을 비롯한 무수한 예술작품이 언급되지만, 개별 작품에 대한 자세한 읽기나 텍스트와 사회·역사적 컨텍스트를 연결하는 익숙한 분석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한 개인이 작품에 감응하는 가운데 새로운 앎을 길어올리는 다양한 방식을 현상학적으로 기술하는 가운데, 예술이 그 자체로 읽기의 방식을 변주하는 놀라움들을 포착한다.
펠스키에게 언어란 “방화벽이라기보다는 인터페이스”에 가깝다(Hooked 70면). 이러한 펠스키 언어관의 중요한 근거는 모이(Toril Moi)의 최근 작업이다. 모이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을 경유해 수십 년간 문학연구를 규정해온 언어이론들에 강력한 도전을 제기한다. 언어와 의미 사이의 간극이라는 오래된 전제를 의문에 부치면서, 모이는 언어가 무엇을 재현한다는 논의에 매몰되는 대신, 언어 사용의 구체적 사례들이 지닌 풍부함과 그 놀라운 변주들에 주목하자고 제안한다.9) 펠스키의 중간 차원의 접근이 포착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예술 사용의 구체적 사례들이다. 이때 방법론은 단순히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 감응의 사례들을 기술하는 가운데 무한히 증식될 수 있다.
이러한 중간 차원의 접근은 자세히 읽기(close reading)라는 관행 역시 새롭게 한다. 영미 비평계의 다양한 방법론적 전환과 경합 속에서도 한 가지 꾸준히 지속되어온 관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세히 읽기다. 개별 텍스트 여럿을 개괄적으로 다루기보다 하나의 또는 소수의 텍스트를 꼼꼼하게 읽는 방식이 문학연구에서는 오랫동안 핵심적 실천이자 특권적 방법으로 자리해왔다. 그러나 자세히 읽기를 추동하는 이론적 전제나 해석의 목적이 항상 동일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신비평가들에게 자세히 읽기란 근대적 비평의 객관성과 자율성을 담보하는 방법론으로서, 텍스트의 매혹에 미혹되지 않고 그 내부의 형식과 질서에 집중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반면 컬러(Jonathan Culler)와 같은 해체주의자에게 자세히 읽기는 해석에 저항하는 문학적 언어의 불투명성을 확인하는 우회로와 같은 것이었다. 또한 제임슨의 정신분석적·마르크스주의적 징후의 해석학에서 자세히 읽기는 텍스트의 심층으로부터 길어올려져야 할 궁극적 의미에 도달하기 위해 언어의 저항을 돌파하는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펠스키의 중간 차원적 읽기는 개별 텍스트에 깊이 관여한다는 점에서 자세히 읽기의 전통을 이어가지만, 작은 규모의 분석(세밀한 텍스트 독해)에 몰두하거나 큰 규모의 분석(사회·자본주의·제국주의)에 대의를 거는 대신, 텍스트를 둘러싼 다양한 행위자들이 어떻게 서로 감응하며 연결되는가에 주목한다. 이러한 읽기는 “가깝지만 깊지 않다. 그것은 설명하기보다는 묘사한다”(Hooked 140면).10) 이러한 중간 차원의 접근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왜 여전히 예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 되기 때문이다. 문학뿐 아니라 영화나 음악과 같은 예술연구에서도 자세히 읽기는 여전히 기본이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작은 차원의 미시적 방법이며, 사회적·경제적 구조를 분석하는 거시적 접근 역시 인문학자에게는 익숙할 뿐 아니라 긴요한 방법론이다. 그러나 펠스키는 작은 규모의 자세한 읽기와 큰 규모의 구조 분석을 오가는 이 같은 방식이 문학연구의 일종의 공식(formula)이 되면서 예술을 통한 앎(knowing) 역시 도식화되고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펠스키가 특히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비판이라는 해석의 형식이 미국이라는 특정한 학문 생태계 안에서 제도화되어온 역사다. 노스(Joseph North)가 지적하듯, 지난 수십 년간 영미 비평계가 고도로 전문화하면서 문학비평의 언어는 난해하고 불친절해졌다. 교수의 정년 보장을 좌우하는 핵심 관문인 ‘테뉴어북’(tenure book)은 학계 내부의 논의를 맥락화하고, 특정 연구가 그 논의에 어떻게 개입하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을 일종의 표준 문법으로 확립했다. 미국 학계에서 연구자의 초기 학술지 논문이 박사논문에 기반해 발표되고, 이후 테뉴어북이 그 논의를 발전·확장한 형태로 출간되는 관행을 고려하면, 학계 내부의 대화에 초점을 둔 특정한 비평양식이 취직에서 정년 보장에 이르는 제도적 경로의 일부로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비평의 언어는 하나의 장르적 문법에 갇혀 점차 화석화되고 있다.
펠스키가 볼 때 이러한 비판의 제도화가 가져온 가장 큰 문제점은 텍스트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독자에게 가하는 감흥과 변환의 과정을 제대로 조명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이는 비평가 자신에게뿐 아니라 예술교육의 측면에서도 큰 손실이다. 문학교육의 목적이 분명 학생들을 ‘더 나은 독자’로 길러내는 데 있다면, 해석이라는 행위의 희망을 오직 억압을 폭로하고 텍스트에 거리를 두는 의심의 해석학에 전적으로 거는 태도는 예술과 삶, 예술과 앎을 연결하는 무한한 가능성의 문을 닫는 일이다. 그것은 예술을 통한 앎, 나아가 타자와 세계에 대한 감응적 수용(acknowledgement)의 가능성을 축소하는 좁은 길로 들어서는 일이다.
우리는 각기 다른 사적 경험과 내면의 역사로 인해 서로 다른 예술에 끌리고 애착한다. 펠스키에게 이러한 매혹의 메커니즘은 언제나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의 역동 속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매혹의 인과성을 추적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의미하다. 프랑크푸르트(Harry Frankfurt)가 지적하듯, 우리가 어떤 관념이나 사람, 예술에 깊이 관여하게 되는 일은 우리의 통제 아래 있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연루와 관여의 경험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그 형태를 취하게 된 나”(who one takes oneself to be)를 만나게 되는 순간을 뜻한다. “나는 여기 서 있다. 다르게 서 있을 도리가 없다”(Here I stand: I can do no other)는 루터(Martin Luther)의 언명처럼, 우리는 어떤 것에 어쩔 수 없이 끌린다. 다르게 반응할 도리가 없다(Hooked 129면).
펠스키는 이 수용(receptivity)의 경험이 성찰(reflectivity)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삶과 예술에 대한 새로운 앎과 해석의 지향이 탄생한다고 본다. 예술작품에 감응하는 것은 언제나 일인칭의 주관적 경험이지만, 그것은 언제나 인과성을 벗어나 다양한 행위자들이 얽혀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미적 체험을 통해 우리는 프랑크푸르트가 말한 의지적 필연성(volitional necessity), 즉 어쩔 수 없이 비의지적으로 이끌리는 감각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수동성에서 수용의 힘으로, 수용에서 성찰의 힘으로 전환시키는 정동적 계기를 맞이할 수 있다(Hooked 129면). 이때 우리는 ‘이 작품이 무엇을 보지 못하고 있는가’를 의심하는 대신, ‘이 작품이 내가 무엇을 보도록 힘주어 이끄는가(forcing)’라고 물을 수 있게 되고, 이미 손에 쥔 이론의 언어들을 꺼내 드는 대신 새롭게 펼쳐지는 풍경에 맞춰 렌즈를 새로 구할 채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펠스키에게 방법론은 예술 감응의 사례들을 기술하는 가운데 무한히 증식될 수 있는 것이며, 예술은 그 자체로 이론을 수행한다.
망설임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펠스키의 포스트비판적 읽기의 요지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과 현상학의 교차점 위에서 개별 작품을 둘러싼 미학적 경험을 사회적이자 현상학적으로 기술하려는 ‘중간 차원’의 접근이다. 이는 곧 ‘해석하기’를 ‘관계하기’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망하는 시도이며, 이때 펠스키가 강조하는 ‘애착’ 개념은 독자의 매혹·감응·동일시와 같은 정서적 기울기를 ‘연결’의 사유에 통합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다시 말해 펠스키의 애착의 행위자-네트워크 해석학은 카메라가 피사체와의 거리와 감도를 조절하듯, 해석의 규모와 태도를 세밀하게 조율하면서 해석이라는 행위를 다층적이고 유연한 경험으로 확장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결론을 대신하여, 펠스키의 규모-태도 해석학이 서 있는 감응과 연결의 (탈)주체론적 전제를 살피면서, 펠스키는 주목하지 않았으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의 중요한 행위자-감수자 모델인 ‘망설임’을 논의하면서 규모-태도 해석학의 층위를 두텁게 하고자 한다.
정(Mark C. Jerng)은 펠스키의 『비판의 한계』에 대한 비평에서 프랑스의 사회학자 타르드(Gabriel Tarde)와 미국의 흑인 사회문화 운동가이자 사상가인 듀보이스(W. E. B. Du Bois)가 공통적으로 탐구한 바 있는 ‘망설임’(hesitation)에 주목한다.11) 정은 듀보이스가 주목했던 흑인의 ‘행동하지 않게 됨’(being made not to act) 상태가 펠스키가 강조하는 ‘행동하게 됨’(being made to act)과 더불어 사회적 과정을 구성한다면서, 듀보이스의 이 논의를 라투르가 타르드 사유의 핵심이라 보았던 비-행위적 망설임과 연결시킨다.
정은 듀보이스가 사회학에 관해 쓴 몇 편의 글에서 ‘행동하지 않게 됨’의 부정성을 발견한다. 1905년에 듀보이스가 타자 원고 9면 분량으로 쓴 짧은 글 「사회학 망설이는」(“Sociology Hesitant”)은 2000년에 저널 『경계 2』(Boundary 2)에 실리면서 널리 읽히기 시작했다. 이 글에서 듀보이스는 콩트(August Comte)를 비롯한 사회학자들이 사회를 “인간의 집합, 정부의 변화, 사유의 합의”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이해하면서, 실제로 사람들이 어떻게 모이고 변화하고 사유하는지에 대한 세밀한 연구를 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단편적으로 드러나 있는 사회와 사회적인 것에 대한 듀보이스의 생각은 1940년 『새벽의 황혼: 인종 개념의 자서전을 향한 시론』(Dusk of Dawn: An Essay Toward an Autobiography of a Race Concept)에서 좀 더 구체화된다. 듀보이스에 따르면 흑인들이 살고 있는 사회는 단순한 물리적 환경도, 관념과 관습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환경도 아닌, 그들이 부분적으로만 공유할 뿐인 “다른 이들의 사회적-물리적 환경”이다. 이 사회는 단순한 생각이나 관념이 아니라 “근육과 무장한 사람들 안에, 눈살을 찌푸린 얼굴들 안에, 재판관과 경찰의 위엄 안에, 신법이 된 인간의 법” 안에 “체현되어 있다”.12)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나의 신체적 움직임을 제한하고, 생각과 꿈을 편협하게 만든다”. “나는 움직일 수도, 행동할 수도, 살아갈 수도 없었다. 내 주위를 둘러싼 백인의 세계가 나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지를 매일 세심하게 계산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13)
정은 듀보이스가 묘사한 “움직일 수도, 행동할 수도, 살아갈 수도 없었던” 인종적 속박의 상태에서 ‘행위할 수 없음’ 또는 ‘행위하지 않게 됨’에 주목한다. 듀보이스가 관찰한 이 같은 비-행위성의 수동성과 부정성에 견주어볼 때, 펠스키는 분명 ‘행위하게 됨’의 자유를 주어진 조건(the given)으로 전제하는 측면이 있고, 이는 100여 년 전의 흑인 청년 듀보이스의 일상을 포위하듯 에워쌌고 현재도 크게 달라진 바 없는 다양한 억압과 배제의 사회적 환경을 자연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사회적인 것(the social)을 구성하는 것은 펠스키의 ‘행위할 수 있음’뿐 아니라, 듀보이스가 주목한 ‘행위할 수 없음’ 또는 ‘행위하지 않게 됨’이라는 정의 지적 역시 귀 기울일 만한 대목이다.
『비판의 한계』에 대한 정의 비평은 듀보이스와 타르드의 ‘망설임’에 대한 논의를 환기하지만, 여기에 담긴 수동성과 능동성의 역동을 더 개진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이 남겨놓은 ‘망설임’의 테마는 『사로잡히다』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규모-태도 해석학의 전제를 이해하고 보충하는 데 유용하다.
펠스키의 규모-태도 해석학이 제시하는 애착과 연결의 읽기 모델은 비평적 대화를 이어나가는 태도를 가르친다. S-S 해석학의 지향을 따라 펠스키를 읽으면 우리는 일종의 포스트비판적 각성의 순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즉 펠스키의(또는 다른 누군가의) 비정치성을 ‘의심’하며 이미 우리 안에 익숙하게 탑재된 비판의 화살을 만지작거리는 순간, 이 비평적 태세에 담긴 관성과 정동적 지향을 메타적으로 성찰하게 된다. 이와 같은 포스트비판적 각성의 순간에 펠스키에 대한 비판이 무화될 필요는 없지만, 각자의 고유한 펠스키 독해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사회적 행위자들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고, 그 과정에서 펠스키 논의의 빈틈을 드러내고 그것을 다르게 메워나갈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게 된다. 요컨대 우리는 좀 더 대화적일 수 있다.
펠스키에게서 배운 바를 따라 이 과정에 대한 일인칭의 현상학적·사회적 기술을 해본다면 이렇다. 나는 펠스키가 1980년대 미국에서 제임슨을 경유해 이론에 이끌리던 경험을 나 자신이 2000년대 초반 한국에서 탈식민주의 이론을 경유해 영문학에 이끌리던 경험과 겹쳐 읽었다. 이는 서구 탈식민주의 이론이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 적극적으로 소개되던 역사적 배경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이후 펠스키가 겪은 이론적 언어의 ‘빅뱅적’ 폭발이 한국으로 큰 시차 없이 번역되어 소개되는 21세기를 거치며 나는 학부와 대학원 시절을 보냈고, 문학이 곧 정치의 한 형태라는 열정도 한때 품었다. 이러한 나의 사적인 공부 역사와 한국의 MZ세대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면서 겪는 최근의 어려움과 고민이 만나, 사회적 연결을 사유하며 읽기의 방법을 바꾸자고 제안하는 펠스키의 책들에 나는 ‘사로잡히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작품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 무엇에 감응하는지, 감응하면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어떤 매체로 표현하고 싶은지, 나아가 이 모든 과정이 과연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한 앎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사유하며 해석의 규모와 태도를 섬세하게 조율하는 작업은 문학연구 뿐 아니라 교육의 차원에서도 중요한 전환이다.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정치가 요원한 시대에, 예술을 통해 세계와 연결되는 일인칭 현상학적 기술지를 써내려가는 가운데 삶에 대한 감각을 확장하고 세계에 대한 앎을 길어올리는 이같은 작업은 정치적 변화를 상상하는 일과 멀지 않다. AI가 글쓰기의 내밀하고 사적인 차원을 침범하는 시대에, 일인칭의 현상학적·사회적 예술비평은 더욱 의의가 있다.
그러나 도통 심드렁하고 지친 요즘의 대학생들을 보면서 펠스키가 전제하는 애착과 매혹, 수용성과 성찰성 사이의 유려한 전환, 수동-능동의 막힘 없는 일체감이 놓치고 있는 중간지대를 생각하게 된다. 펠스키의 ‘사로잡힘’은 수동성과 능동성의 경계를 흔들면서도, 그 전환의 긴장을 끝까지 사유하지 않고 ‘연결’의 흥분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정이 주목했던 ‘망설임’의 지대는 수동에서 능동 사이의 전환의 긴장이 발생하는 곳이다. 정은 듀보이스와 타르드를 ‘망설임’의 개념으로 소환했지만, 듀보이스의 ‘행동할 수 없음’의 인종 정치학에 대비해 펠스키의 ‘행동하게 됨’을 논평하는 방향을 취하면서 정작 망설임에 대한 논의를 더 이끌어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떤 말들, 생각들, 믿음들, 행동들 사이에서 우리가 망설인다고 할 때, 그 망설임은 행위인가, 비행위인가? 망설임은 연결의 전제조건인가, 문턱인가, 방해물인가? 이러한 망설임의 불확실성과 혼란, 경계성 속에서 수용성과 성찰성, 연결과 사회적인 것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김홍중은 타르드가 21세기 사회이론에 끼친 영향을 탐구한 글에서 라투르가 주목한 ‘망설임’이라는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라투르가 ‘타르드 작업의 위대한 초점’이라 부른 망설임의 테마는 사회적 주체가 ‘원자’가 아니라 하나의 ‘공간’처럼 존재한다는 점을 드러낸다.”14) 타르드에 따르면, “행위자는 ‘행위’ 이전에 정동의 흐름에 휘말린다. 그 영향을 감수(感受)한다. 수동성이 능동성에 선행하며, 감수가 행위에 앞선다”.15) 타르드적 주체의 행위능력은 자율적 사고와 합리적 판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 매혹되고 휘말리며 감응되는 수동성으로부터 온다. 망설이는 자는 행위자성(agency)과 감수자성(patiency)의 얽힘을 자신의 존재와 실천 속에서 체화하는 자다. “페이션시는 능동성과 이분법적으로 대립하는 수동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능동성과의 역동적 연관 속에서 생성되고, 변형되고, 전개되는 과정에서 발현되는 수동성을 지칭하는 개념이다.”16)
이러한 ‘망설임’을 고려하면, 펠스키의 논의에서 발견되는 수용성과 성찰성, 수동성과 능동성 사이의 긴장 없는 전환 속에서 생겨나는 빈틈을 볼 수 있다. 망설임은 바로 그 ‘사이’의 공간이다. 세계에 휘말리며 그것을 온통 겪고 있지만, 그 경험이 아직 어떤 능동적 행위나 애착으로 전환되지 않는 상태, 그 잠정적 체류의 시공간이 지금 여기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공통적으로 감지되는 ‘소진’(exhaustion)의 감각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전 그 어떤 세대의 20대보다 치열하게 매일을 살아가지만, ‘탈탈 털린 듯’ 무엇에도 ‘딱히’ ‘크게’ 감응하지 않는 소진된 이들. 그러나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남태령이나 국회의사당 앞에서 행위자적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21세기 한국의 문학교육은 이제 이 ‘망설임’의 공간을 응시하고 사유하는 작업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문학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실은 이제 수용과 성찰의 ‘사이’인 망설임을 관찰하고 해석의 규모와 태도를 실험하는 감광실(感光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 1) 펠스키는 신현상학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신현상학은 역사적 관점과 현상학적 관점의 결합이다. 사회정치적인 성찰을 보류하지 않은 채, 의식의 섬세함과 복잡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Rita Felski, Uses of Literature (Malden, MA; Oxford: Blackwell 2008) 18면.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경험에 대한 두터운 묘사와 정치적 관심을 연결하는 퀴어이론도 이러한 계보 안에 있다. 펠스키는 신현상학적 전회의 선구자로 스티븐 코너(Steven Connor)를 든다. 코너의 대표적인 글로는 다음을 참조할 것. Steven Connor, “CP: Or a Few Don’ts by a Cultural Phenomenologist,” Parallax 5.2 (1991) 17~31면.
- 2) Rita Felski, The Limits of Critique (Chicago: U of Chicago P, 2015) 44면. 이후 이 책의 인용은 본문에 (Critique ○○면)으로 표기
- 3) Rita Felski, Hooked: Art and Attachment (Chicago: U of Chicago P, 2020) 4면. 이후 이 책의 인용은 본문에 (Hooked ○○면)으로 표기.
- 4) François Cusset, French Theory: How Foucault, Derrida, Deleze, & Co. Transformed the Intellectual Life of the United States (Minneapolis: U of Minnesota P, 2008) 83면.
- 5) Paul Ricoeur, Freud and Philosophy, trans. Denis Savage (New Haven, CT: Yale UP, 1970). 리쾨르와 의심의 해석학에 대한 논의로는 다음을 참고할 것. Alison Scott-Baumann, Ricoeur and the Hermeneutics of Suspicision (New York: Continuum, 2009); Ruthellen Josselson, “The Hermeneutics of Faith and the Hermeneutics of Suspicision,” Narrative Inquiry 14.1 (2004) 1~28면.
- 6) Eve Kosofsky Sedgwick, Touching Feeling: Affect, Pedagogy, Performativity (Durham, NC: Duke UP, 2003) 125면.
- 7) Anneloek Scholten, Usha Wilbers & Rita Felski, “The English Studies Interview: Rita Felski,” English Studies 105.6 (2024) 970~77면.
- 8) 읽기의 규모에 대한 논의로는 James F. English and Ted Underwood, “Shifting Scales: Between Literature and Social Science,” Modern Language Quarterly 77.3 (2016) 277~95면; Rebecca L. Walkowitz ed., “What Is the Scale of the Literary Object?,” Modernism/Modernity 3.4 (Feb. 1, 2019). https://modernismmodernity.org/forums/what-scale-literary-object.
- 9) Toril Moi, Rovolution of the Oridinary: Literary Studies after Wittgenstein, Austin, and Cavell (Chicago: U of Chicago P, 2017).
- 10) 이에 대해서는 Heather Love, “Close but Not Deep: Literary Ethics and the Descriptive Turn,” New Literary History 41.2 (2010) 371~92면; Sharon Marcus, Heather Love, and Stephen Best, “Building a Better Description,” Representations 135 (Summer 2016) 1~21면.
- 11) Mark C. Jerng, “Race in the Crucible of Literary Debate: A Response to Winfried Fluck,” American Literary History 31. 2 (2019) 260~71면.
- 12) W. E. B. Du Bois, Dusk of Dawn: An Essay toward an Autobiography of a Race Concept (1940; New Brunswick, NJ: Transaction Publishers, 1984) 135~36면.
- 13) 같은 책 136면.
- 14) 김홍중·조민서 「페이션시의 재발견: 고프만과 부르디외를 중심으로」, 『한국사회학』 55.3 (2021) 98면.
- 15) 같은 글 80면.
- 16) 김홍중 「가브리엘 타르드와 21세기 사회이론: 정동, 페이션시, 어셈블리지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사회학』 56.1 (2022) 5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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