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밖 59호] [연작기획] 인류세 소설과 인류세 담론:『하늘의 물레』와 『새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을 중심으로 / 황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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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학적 도전으로서의 인류세?

‘인류세’는 그 출처인 지질학의 경계를 벗어나 “우리가 처한 새로운 상황을 가리키는 지적 단축키이자 확장된 의문부호”로서 이제 널리 구사되는 “학계의 수사(rhetoric)”로 자리잡았다.1) 말 그대로 ‘새로운 시대’, 그것도 그냥 새로운 것이 아니라 여태까지 새로운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게 새로운 시대임을 표방한 근대2) 이래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내세우는 주장들과 계속해서 마주쳐왔고 그런 마주침은 점점 가속화하는 추세이기도 했다. 그와 함께 숱한 새로움의 표방이 실상 새로움이 불가능함을 암시하는 제스처이거나 새로움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무력함의 징후라는 느낌도 함께 커져오던 참이었다. ‘인류세’라는 이름은 시대구분의 엄청난 스케일이라는 면에서나 그에 함축된 경고의 전례 없는 위급함이라는 면에서 근대적 새로움의 주장들을 단숨에 초과하며 강력한 담론적·실천적 의미장을 형성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인류세의 관점이 문학에도 중대한 도전을 제기하고 있다는 인식은 자연스럽다. “기후위기는 (…) 상상력의 위기이기도 하다”3)고 한 고시(Amitav Ghosh)의 널리 알려진 말이 이를 잘 요약해주는데, 상상력의 위기 중에서도 그가 주목한 것이 문학의 실패, 특히 소설의 실패다. 소설은 ‘있을 법한 일’이라는 개연성 또는 정상성의 틀에 갇혀 있어서 전례 없는 사건들이 이어지는 기후위기의 실상을 사실상 은폐한다는 것이다. 고시가 주장하는 소설의 또 다른 실패는 ‘자연’과 비인간에 대한 관습적인 태도로서, 그때문에 인류세의 문제의식이 전경화하는 그들의 행위능력이 간과되어왔다. 인류세 담론들이 강조하는 자연과 문화, 인간과 비인간의 연속성이나 혼종성에 대한 무관심도 이와 연결되어 있다. 또한 소설의 시공간은 한정된 자기완결적 생태계여서 현실감을 주기에는 용이한 반면 “도무지 상상하기 힘들 만큼 광대한 힘이 좌우하는, 피할 수 없는 집요한 연속성(continuities)의 세계”4)인 인류세의 지구라는 스케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다. 고시는 ‘개인의 도덕적 모험’으로 흔히 일컬어질 만큼 소설이 개인의 심리를 중심으로 서사를 전개하게 된 것도 집단적 곤경인 인류세의 위기들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게 한 또 다른 요인이라고 이야기한다.

고시의 논의는 인류세가 문학에 제기하는 도전들을 포괄적으로 망라하고 있어서 이 주제를 다룬 논의에서 자주 인용되고 변주되어왔다. 그런데 SF나 판타지 같은 ‘비주류’ 소설들이 기후위기와 관련한 상상력을 더 잘 발휘해왔다는 언급에서도 알 수 있듯 고시의 비판은 소설 일반이라기보다 ‘본격 소설’로 여겨지는 부류, 그중에서도 특히 사실주의 소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인류세가 “지구적 위기일 뿐만 아니라 재현의 문제”5)이며 특히 사실주의적 재현의 한계를 부각한다는 인식은 인류세와 문학의 관계에 관한 논의에서 널리 공유되는 바이기도 하다. 사실적 재현의 한계는 스케일상의 한계이면서 동시에 어떤 질적 한계로 설명되는데, 여기에는 고시가 지적한 장르적 관습에 더해 애나 칭(Anna Lowenhaupt Tsing)의 ‘비확장성’(nonscalability) 개념이 하나의 준거로 언급되기도 한다. “[자본주의] 문명의 제1원리를 벗어나 진실된 이야기를 할 때가 왔다”6)는 칭의 선언에서 표적이 된 제1원리란 확장가능성(scalability)을 말하는데, 그에 대비되는 인류세의 구성원리인 ‘열린 배치’(open-ended assemblage)나 ‘패치성’(patchiness), ‘얽힘’(entanglement) 등에는 사실주의적 재현으로 포착되지 않는 정도의 우연과 차이와 복잡성, 곧 “일종의 비사실주의”(irrealism)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7)

하지만 문학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재현에 대한 도전이란 새삼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사실상 문학의 출발점이자 내재적 구성요소라고 할 수 있다.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문학 논의에 따르면 근대적 의미의 ‘문학’은 애초에 재현의 경계와 위계를 무너뜨리는 것을 주된 속성으로 하여 등장했다. ‘문학의 정치’를 말하며 플로베르(Gustave Flaubert)를 가장 즐겨 다룬 이유이기도 한데, 랑시에르는 사실주의 소설이 종종 비판받는 지점인 “묘사적 과잉”(descriptive excess),8) 곧 전통적인 문학관에서 볼 때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것에 대한 쓸데없는 묘사가 많다는 점이야말로 문학적 민주주의와 평등의 범례적인 구현이라 본다. 요컨대 인간이든 사물이든 아니면 “원자들의 무심한 뒤섞임에서 나오는 전(前)인간적(prehuman) 개체”9)든, 누구나 또 무엇이나 재현을 통해 문학의 평등한 주민이 될 수 있다는 점이 문학의 핵심이라는 것이다.10) 문학이 재현에 부과된 온갖 제약을 걷어내며 재현을 해방시켰다면, 해방된 재현에게는 ‘인간을 초과하는’ 스케일이나 더없이 복잡하게 얽힌 인류세의 세계 역시 원칙적으로 넘지 못할 벽으로 작용하기보다 또 다른 모험을 촉발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인류세의 문제들을 다루는 문학의 역량에 대한 기대도 여러 각도에서 표현된다. 인류세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고, 오래된 이야기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며 “기후변화 경감이라는 새로운 목적을 위해 이야기의 힘(…)을 활용해야”11) 한다면 이는 무엇보다 문학의 일로 여겨진다. 인류세 담론들이 조명한 인간과 비인간, 또는 자연과 사회 사이의 ‘얽힘’에 관한 통찰 역시 “비인간을 인간의 공간으로 데려오거나, 반대로 인간을 심층 시간 또는 비인간 공간으로 옮겨주는 문학의 능력”12)에 든든히 기댈 수 있다. 전통적인 과학적 구분들이 더는 유지될 수 없을 때 문학이 “기후문제 인식의 저장고일 뿐 아니라 인간행위자와 비인간행위자 사이의 얽힘에 관해 사유할 자원”13)이 되어준다는 것이다. 특히 “대상이나 사건이 어떻게 우리의 개인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지, 그런 관심으로부터 어떻게 애착·분리·헌신의 태도가 형성되는지 결정하는” 것이 정동이라면, 인류세가 위기에 대한 우리의 긴급한 대처를 요구할 때 “비유, 은유, 서사 패턴을 통해 (…) 환경적 관심을 활성화하는 정동적 동력을 지니는” 문학의 역할은 커진다.14)

그런데 이처럼 인류세라는 새로운 문제의식에 비추어 문학의 한계나 역할을 짚어보는 논의들은 어느 쪽이든 인류세 ‘담론’에서 이미 제기되거나 밝혀진 문제들을 문학이 얼마나 충실히, 설득력 있게, 또는 정동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지에 초점을 둔다. 문학적 도전으로서의 인류세가 주로 ‘재현’이라는 틀을 중심으로 논의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하지만 인류세와 문학의 마주침에서 재현에 한정되지 않은 다양한 방식의 대화가 펼쳐져야 마땅하고 또 실제로 펼쳐지고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인류세가 문학적 도전인 만큼이나 문학이 인류세에 대한 담론적 도전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문학이 인류세 담론의 의제들을 문제화하는 방식으로 다른 차원의 논의를 이끌어낼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이 글은 그 점을 염두에 두면서 인류세 소설로 분류할 수 있는 르 귄(Ursula K. Le Guin)의 『하늘의 물레』(The Lathe of Heaven)와 파워스(Richard Powers)의 『새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Bewilderment)을 인류세 담론들의 핵심 주장들과 마주 세워 읽어보려 한다. 인류세 소설과 인류세 담론 사이의 때로 포개지고 때로 어긋나는 대화를 통해 어떤 다른 인류세 이야기가 시작되는지 귀 기울여보겠다.

2. 『하늘의 물레』와 인류세의 ‘폐허’

르 귄의 『하늘의 물레』15)는 1971년에 출간되었으니 인류세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나온 소설이지만 ‘알레고리’라 해도 좋을 정도로 인류세 담론의 주요 특징들을 앞질러 보여준다. 소설의 중심인물인 조지 오어는 자신이 꿈꾼 대로 세상이 실제로 바뀐다는 걸 깨닫고 그 무시무시한 능력이 두려워 자지 않고 버티기 위해 불법적으로 취득한 약물을 복용하다가 당국에 적발된다. 감옥이나 감금 같은 더 나쁜 처분을 피하려고 그는 어쩔 수 없이 꿈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 하버에게 ‘자발적으로’ 치료를 받는데, ‘증강기’(Augmentor)라 불리는 장치로 두뇌를 자극하여 잠과 꿈의 상태를 조정하는 하버는 이 장치와 최면암시를 통해 무슨 꿈을 꿀지 유도하는 방식으로 오어가 ‘안전하게’ 꿈꾸는 상태가 되도록 치료하겠다고 약속한다. 처음에는 오어가 그저 악몽을 두려워하는 환자일 거라 생각하던 하버는 치료 과정에서 그의 ‘효력을 갖는 꿈’(effective dream)이 실재함을 알게 되고 그런 꿈을 꾸고 싶지 않은 당사자의 바람과 무관하게 오어의 꿈을 조작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을 바꾸려 한다. 급기야 오어의 능력을 자신에게 전이시키는 단계에 이른 하버는 기대에 차서 꿈을 꾸지만 그 순간 세계가 붕괴되기 시작한다. 오어가 간신히 증강기를 끄면서 세상의 종말을 모면하는데 하버는 그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들어가고 오어는 하버의 꿈이 남긴 폐허와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이 소설의 대략적인 줄거리다.

쓰여진 당시 기준으로 미래인 2002년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애초에 출발점이 된 (그러니까 오어의 꿈으로 여러 차례 바뀌기 이전의) 현실은 인구과잉과 식량부족, 열악한 주거상황, 팬데믹을 비롯한 각종 질병, 핵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는 여러 전쟁들, 오염된 환경과 기상 이변, 지구온난화와 해수면 상승 등 우리가 ‘인류세’라는 표현에 담고 있는 여러 위기가 가시화된 상황이다. 세상을 개선하려는 ‘선한’ 의지만큼은 의심의 여지 없다고 여러 차례 묘사되는 (물론 그 과정에서 사익을 챙기는 일도 마다하지는 않는) 하버가 오어의 꿈을 활용하려 한 이유도 무엇보다 그런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하버는 오어에게 “자신의 정신적 능력을 피해 숨거나 그 능력을 억누르지 말고 풀어놓으라”(23/125면)고 설득하며 이상기후, 인종차별, 인구과밀, 전쟁 같은 문제들을 꿈을 통해 해결하려 한다. 하지만 한 지역의 이상기후를 해결하라는 암시는 다른 지역의 기후 악화를, 인종차별 없는 세계를 꿈꾸라는 암시는 모든 사람이 회색 피부를 갖는 결과를 낳고, 인구과밀 해소는 역병이 퍼져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방식으로, 그리고 전쟁 중지는 인류가 부득이 단결할 수밖에 없는 외계인의 침공이라는 방식으로 달성된다. 일이 이렇게 꼬이는 이유는 하버의 암시가 어떤 개연성 있는 해법이나 경로를 갖추지 않은 채 목표 자체만을 명령어로 기입하는 식인 반면, 현실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오어의 꿈은 소급적으로 어떻게든 ‘자연의 질서’에 부합하게 결과를 도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하버는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될 거라 생각하고 “자기 말고 다른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진짜 확신하지는 않는”(21/125면) 인물이기에, 그가 ‘효력을 갖는 꿈’을 꾸는 순간 연결성 또는 ‘얽힘’이 소거되면서 세상이 문자 그대로 붕괴되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인류세 서사로 읽을 수 있는 주된 근거는 하버의 목표 설정과 오어의 수행능력의 조합이 갖는 가공할 위력을 통해 인류의 ‘발자국’이야말로 지구적 위기를 초래하는 원인임을 압축적으로 가시화한 점이다. 그 ‘발자국’이 대개 개선과 진보의 이름으로 찍힌다는 사실을 강조한 대목도 인류세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하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오어-하버 조합이 인류세라는 규정에 내포된 어떤 아이러니를 뚜렷이 드러내준다는 것이다. 인류세라는 명칭은 새로운 지질시대로 분류될 만큼 인류의 활동으로 지구생태가 크게 바뀌었음을 가리키는 한에서 인간의 압도적인 행위능력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류세는 지구적 규모의 각종 위기들을 전경화하면서 스스로의 행위능력으로 야기된 종말급 위기를 해결하는 데 인류가 무능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한다. 오어-하버는 세상을 바꾸어 다른 현실을 만드는 무시무시한 실행력을 가졌음에도 위기를 해결하는 데는 무력하다는, 아니 해결을 내세우며 번번이 위기를 악화시키기 일쑤라는 점에서 인류세의 아이러니를 표현하기에 더없이 적절하다.

『하늘의 물레』를 인류세 소설로 읽고 싶은 충동을 고무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즈음의 여러 인류세 담론이 공유하는 어떤 ‘지배서사’(master narrative)가 잘 극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측면은 하버-오어 조합을 분리하여 둘 사이의 대립구조에 주목할 때 확연히 드러난다. 하버라는 인물은 인류세 담론들이 비판의 표적으로 삼는 프로메테우스적 근대성·성장주의·인간중심주의 같은 것들을 대표하고 있으며, 특히 그를 통해 인간중심주의가 실상은 온갖 타자와 더불어 다른 ‘인간’마저 고려하지 않는 자기중심주의임이 폭로된다. 이는 전염병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도 개의치 않고 인구 감소라는 결괏값을 환영하는 모습에서도 잘 나타난다. 더욱이 그의 세계관은 전체의 연결성 또는 존재의 네트워크를 고려하지 못하는 지극히 파편적이고 단선적인, 또 그런 의미에서 전적으로 반생태적인 것이어서 그에 근거하여 세계를 구성한다면 곧장 붕괴에 이를 수밖에 없다.16) 반면 오어의 꿈이 수행되는 방식은 앞서 살핀 대로 모든 것이 연결되어 하나의 변화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다른 것들에 연쇄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세계의 실상과 부합한다. 그 점을 이해하고 있는 오어는 하버의 반대편에서 자신의(알레고리적으로 볼 때는 인류의) 행위능력에 대해 마땅히 품어야 할 두려움을 느끼고 “내가 뭐라고 세상의 운행에 끼어들어 장난을 치겠는가”(11/125면)라는 ‘겸허한’ 태도를 보인다.

장자의 사유가 들어오는 것도 이 지점이다. 소설 제목의 출처인 장자의 한 대목은 대략 요약하자면 감당할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하겠다고 드는 이들은 ‘하늘의 선반’에 갈려나갈 것이라는 이야기다(원문에 충실히 따른다면 ‘그런 짓을 하려 든다면 하늘/자연의 균형이 무너질 것이다’라고 해석될 법하다). 하버가 그렇게 균형을 무너뜨리고 갈려나가는 인물이라면, 대체로 하버에게 휘둘리면서 수동적이고 유약하기만 한 것 같던 오어는 뒤로 갈수록 침착하고 초연한 모습을 보이면서 마치 ‘천균’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인 듯 나타난다. 오어가 지구에 이주해 살게 된 (애초에는 침공한 적이었으나 오어의 꿈으로 우호적 방문자가 된) 외계인들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친구가 되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중심의 위치를 포기하고 ‘평평한 존재론’의 겸손한 구성원이 된 인간으로서 오어는 차크라바티(Dipesh Chakrabarty)가 말한 ‘행성적’ 관점으로 사태를 보며 우주적 연대를 성취했다고 해석할 여지도 생긴다. 이 외계인들이 거대한 바다거북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들과의 연대를 ‘생태적’ 연대의 알레고리로 읽을 법도 하다.

하버의 꿈이 만든 혼돈과 붕괴 사태를 가리키는 ‘거대한 단절’(The Break) 이후 세계는 이럭저럭 수습이 되고 부서진 것들은 자주 방치되기도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국가기구나 국제기구들이 한동안 작동 불능이 된 사이에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기회를 얻고 그 가운데 상당수는 비인간 외계인들에 의해 경영된다. 무엇보다 이제 오어의 꿈은 깊은 바다에서 물결치는 파도처럼 “어디에도 부딪히지 않고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면서 “존재의 바다에 있는 다른 파도들 사이에서 춤출” 따름이며, 그 바다에는 “거대한 초록 바다거북들”이 유유히 헤엄친다(119/125면). ‘단절’ 이후 죽은 줄 알았다가 다시 만나게 된 이전 현실의 아내가 오어에게 꿈으로 세계를 바꿀 수 있었다면서 “이것이, 이 난장판(mess)이 우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어?”라고 묻자 그는 “그 정도면 된 거야”라고 답한다(122/125면). 더 개선하려는 온갖 시도보다 ‘난장판’이 된 세계와 더불어 사는 것이 낫다는 이 태도는 ‘폐허에서 살아가기’ 또는 ‘트러블과 함께하기’ 같은 표현으로 압축되는 오늘날 여러 인류세 담론의 핵심적 메시지와 맞닿아 있다.

결국 오어의 방식에 손을 들어주는 르 귄의 소설은 앞서 언급한 인류세의 아이러니, 즉 압도적 행위능력과 위기해결의 무능함이라는 아이러니를 행위능력이라는 측면을 자발적으로 폐기함으로써 해소한다. 그런데 이런 전개가 일반적으로 설득력 있으려면 행위능력의 포기가 인류의 집단적 죽음충동으로 여겨지지 않아야 한다. 이 지점에서 소설과 담론의 논리적 하중은 달라진다. 담론이 인간중심주의를 가차없이 비판하고 폐허를 수용하는 논의를 펼치는 동안, 소설은 세계를 구성하는 행위역량을 포기해도 인간이 완전히 파멸하지는 않는 세계, 다시 말해 인간이 수동적 주체로서 존재들의 바다 속에 자신을 지우고 닥쳐오는 것을 받아들여도 이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구체적으로 그려내야 하는 것이다. 앞서 본 대로 『하늘의 물레』에서 ‘단절’은 일종의 종말이지만, 종말이라 할 때 흔히 떠오르는 이미지처럼 일거에 문명이 초토화되거나 인류 대다수가 사망하거나 하는 사태가 아니고 살아남기만 한다면 꽤 견딜 만한 폐허로 그려진다. 여기서 ‘단절’이 만들어내는 효과는 종말보다는 소설이 출발한 시점의 세계, 곧 인류세의 여러 위기가 심화되어 이런저런 해결책들이 모색되고 실패하던 시점의 세계와의 단절이다. 따라서 그 위기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나 하는 문제의식은 흐려지고 폐허가 마치 어떤 새로운 출발점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인류세 서사로 읽어왔다면 이처럼 수동적으로 살아가도 괜찮은 폐허라는 ‘맞춤한’ 조건이 인류세라는 문제틀에 비추어 너무 편리한 설정이 아닌지 생각하게 되고, 더 나아가 폐허를 말하는 인류세 담론들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어떤 폐허를 말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함을 상기하게 된다. 인류세적 폐허의 문학적 재현이 폐허 담론의 적실성이라는 문제를 부각하는 것이다.

3. 인류세 담론의 ‘폐허 현실주의’

“인류세의 진실은 인간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보다 인간이 어떤 흔적을 남길 것인가와 관련된다”17)는 말은 일차적으로 지질시대를 가리키는 용어로서의 인류세에서 인간이 무엇보다 지질학적 힘으로 여겨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문장은 지금까지는 인간의 행위와 성취, 인간적 의미가 초점이었다면 이제 그런 것보다 행위의 결과로 지구에 남을 흔적이 더 중요해졌다는 뜻도 담고 있다. 인류세 담론에서 ‘폐허’가 들어오는 것 역시 인간의 여하한 행위가 남긴 흔적을 지칭하기 위해서인데, 인류세가 전경화한 존재적 위기들 앞에서 ‘폐허’라는 비유 또는 개념이 부상하는 것은 얼마간 자연스러운 일이다. 전부터도 폐허는 “익숙한 것과 낯선 것,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과거와 현재, 또는 존재와 부재 같은 대조가 특징”18)인 양가적 공간으로서 예술적 상상력의 매력적인 소재였고, 특유의 대조를 통해 대체로 시간과 문명의 무상함이나 삶의 고적함, 환멸과 허무를 다소간 감상적으로 표현하는 장치로 자주 활용되었다. 인류세와 연결되면서 이제 폐허는 인류의 미래와 지구적 운명을 가리키는 더 축자적인 표현으로 확장·강화된다. 그리고 이때의 폐허를 우리의 감상을 자극하는 풍경이 아니라 르 귄의 소설에서처럼 우리가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하는 장소로 간주하는 경향이 뚜렷이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로 애나 칭의 『세계 끝의 버섯: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 On the Possibility of Life in Capitalist Ruins)는 부제에 잘 압축되어 있듯 자본주의가 폐허를 만들어냈다는 전제에서 일단 출발한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근대화와 진보의 꿈”을 발판으로 지구적 폐허를 야기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그런 “발판 없이 사는 삶에 상상력을 동원해 도전해보는 일”(3%)이 절실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보 이야기를 빼면 세상은 무서운 곳이” 되고 “폐허는 버려졌다는 공포를 담아 우리를 노려”보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93%). 하지만 칭이 보기에 우리에게는 여전히 하나의, 아니 유일한 선택지가 남아 있고, 그 단서는 ‘폐허’를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전 지구적 풍경은 온통 이 같은 폐허로 뒤덮여 있다. 하지만 생명이 다했다고 여겨지는 이런 장소들도 여전히 생기 넘치는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 버려진 자산 들판(asset fields)은 종종 새로운 다종과 다문화의 삶을 생산한다. 전 지구적으로 불안정성이 나타나는 현실에서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이러한 폐허에서 생명을 찾는 일밖에 없다. (5%)

파괴된 풍경의 ‘변두리’ 또는 자본주의의 ‘가장자리’로도 표현되는 이 폐허를 어떤 가능성을 품은 자리로 읽어내는 것이 칭의 기본적인 전략이다. 그가 보기에 “경제적이고 생태적인 붕괴 속에서도 살아가야 한다는 문제에 봉착”한 우리 모두에게는 무엇보다 ‘협력적 생존’이 필요하다(8%). 그런데 폐허야말로 “패치성을 갖는 풍경, 복수의 시간성, 그리고 인간과 비인간의 가변적인 배치”(9%)를 특징으로 하고, 따라서 협력적 생존의 가능성이 풍부하게 발현될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이다. 칭은 일찍이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불안정한 삶을 꾸려왔던 사람들, 가령 “자본주의의 한계 공간들, 엄밀하게 말해서 내부도 외부도 아닌, 세계를 완전하게 담아내지 못하는 자본주의적 규율의 무능력이 특히 명백하게 드러나는 곳을 탐험해왔”던(92%) 송이버섯 채집인 같은 이들의 삶을 조명하며 폐허의 가능성을 입증하고자 한다.

칭의 ‘폐허’는 널리 인용되는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트러블’과도 공명한다. 해러웨이의 책 『트러블과 함께하기: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Staying with the Trouble: Making Kin in the Chthulucene)19)에서 ‘트러블’은 그의 시대인식을 잘 요약하는 표현
이다.

우리―땅 위에 있는 우리 모두―는 어지럽고 불안한 시대, 뒤죽박죽인 시대, 문제 있고 혼란한 시대를 살고 있다. (…) 뒤죽박죽인 시대는 고통과 기쁨이 뒤섞여 흘러넘친다. 그 양상은 매우 부당하고 여태까지 살아온 생명들을 불필요하게 많이 죽이고 있지만, 꼭 필요한 부활로도 넘친다. (…) 우리의 과제는 거친 파도를 잠재우고 고요한 장소를 다시 구축할 뿐만 아니라, 트러블을 만들고, 파괴적인 사건들에 강력한 응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 위급한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안전한 미래를 도모하고, 미래에 불안감을 드리우며 불쑥 나타날 무언가를 방지하고, 다음 세대에게 미래를 안겨주기 위해서 현재와 과거를 말끔하게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트러블을 다루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트러블과 함께하기는 미래라 불리는 시기와 그런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다. 트러블과 함께하기는 진실로 현재에 임하는 것을 배우기를 요구한다. (7~8면)

‘폐허’가 망가지고 버려진 곳이면서 동시에 생명의 가능성을 가진 장소였듯, ‘트러블’도 문제 많고 위급하며 망가진 시대를 가리키는 한편으로 우리가 (해소하기보다) 심지어 야기해야 할 어떤 것이기도 하다. 해러웨이의 이런 입장은 인류세나 자본세 같은 진단들이20) 공포를 불러일으키면서 한편으로는 기술적 해법에 기대는 기술지상주의, 다른 한편에서는 냉소주의와 패배주의로 귀결되기 십상이라는 판단에 토대를 둔다. 그런 식의 도피성 ‘미래주의’보다는 트러블과 함께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고 대안적이라는 것이다.

해러웨이 자신이 일으키는 ‘트러블’은 칭의 전략이 그랬듯 무엇보다 (‘트러블’ 자체를 포함하여) 이제까지 평가절하되거나 부정되어왔던 것들의 가치와 의미를 전복적으로 재해석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 재해석을 통해 천상이 아니라 지하, 두뇌가 아니라 촉수가 가치의 중심에 놓이고, 개별 종이 아닌 복수종(multispecies)이, 자율생산(autopoiesis)이 아닌 공-산(sympoiesis)이 실재에 부합하는 개념으로 제시된다. 또 인간은 여하한 포스트휴먼이 아니라 뜨겁게 뒤얽혀 “예기치 않게 협력하고 결합하”(13면)는 ‘퇴비더미’(compost)로 거듭나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 모두를 포괄하며 해러웨이가 내린 시대 규정이 ‘쑬루세’(Chthulucene)21)다. 전체적으로 한층 도발적이고 강렬한 비유를 구사한다는 차이는 있으나 해러웨이의 선언은 폐허를 두고 펼친 칭의 이야기에서 그리 멀지 않고, 이런 서사는 특히 인문학 분야에서 널리 변주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앞서 르 귄 소설에서 제기된 ‘어떤 폐허인가’ 하는 질문, 다시 말해 인류세의 폐허 담론을 뒷받침하기에 ‘맞춤한’ 폐허가 어떤 것으로 전제되는가 하는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칭과 해러웨이의 폐허 재해석에서 강조되는 점은 최근에 부쩍 익숙해진 개념인 ‘복원력’(resilience)이다. 자본주의의 시선에서 방치되고 망가진 장소가 생기 넘치는 부활의 장소일 수 있다는 것은 이를테면 산불로 훼손된 숲 가운데 인간이 개입하지 않은 곳에서 오히려 활발한 재생이 관측되는 사례에서 잘 확인된다. 심지어 체르노빌처럼 방사능으로 오염된 지역에서도 느리게나마 복원이 이루어진다는 소식이 알려진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모든 폐허가 우리가 기대하는 복원과 부활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아마존 삼림의 훼손처럼 해당 지역의 복원만이 아니라 지구 단위의 복원과 재생 가능성을 궤멸적으로 약화시키는 경우도 있다. 인류세의 위기, 특히 기후위기를 이야기할 때 중요하게 제기되는 이른바 ‘티핑 포인트’가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복원력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고 그에 기초하여 전복적 재해석을 허용하는 단계의 폐허가 있는가 하면, 대다수 인간과 비인간에게 오래도록 복원을 기대할 수 없게 만드는 ‘트라우마’ 단계의 폐허도 있다는 변별은 이들 담론에서 공백으로 남아 있다. 사실상 특정한 성격과 단계의 폐허를 전제한다는 점이 의식되지 않는 것이다. 변별이 없기로 치면 폐허와 트러블이 만들어지고 확장되는 과정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의 확장이 매우 불균등하며 그 결과를 감당하는 부담이 매우 불평등하게 부과된다는 점도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못한다.

이들 담론에서 폐허가 피할 수 없고 또 이미 만연한 것으로 제시되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폐허가 되었거나 조만간 폐허가 될 곳이 있을 따름이라면 사실상 폐허 아닌 곳에서 무언가를 도모할 도리는 없다. ‘폐허에서 살아가기’는 그처럼 폐허 아닌 곳을 가정하기 어렵고 또 가정해서도 안 된다는 일종의 ‘폐허 현실주의’를 전제로 한다. 여기서 현실주의라는 표현은 비교적 더 익숙한 ‘자본주의 현실주의’(capitalist realism)를 본뜬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자본주의 현실주의란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경제 체계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 있는 감각”22)을 가리킨다. 폐허를 야기한 주범으로 자본주의를 지목한 점에서 ‘폐허 현실주의’ 역시 자본주의에 대한 논평인 셈이지만 여기서 자본주의는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자신이 야기한 폐허나 트러블 같은 것들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어서 장차 결코 존립할 수 없는 무엇으로 상정되는데, 그렇게 보면 이제 자본주의 자체를 붙들고 씨름할 이유는 없어진다. 자본주의 현실주의와는 정반대의 이유에서이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체제적’ 대항을 조직하거나 ‘체제적’ 대안을 구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결과로 수렴되는 것이다. 더욱이 트러블을 두고 해러웨이가 했던 말처럼 폐허도 수용되는 것이지 방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직 작동 중인 자본주의가 폐허와 불안정성을 전일화시키는 동안 그것을 저지할 도리나 의지는 발동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폐허 현실주의는 사실상 자본주의 현실주의를 전주곡으로 포함하는 셈
이다.

폐허 현실주의에서 폐허는 자본주의의 주변부나 가장자리로서 마치 자본주의에 의해 다시 포획되는 일이 없을 것같이 묘사된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확실히 끝나지 않는 한 폐허에서 어렵사리 시작된 복원이나 부활은 언제든 자본주의에 의해 전유될 예비자원이 될 가능성이 실재한다. 르 귄의 소설에서 마지막의 폐허가 출발점의 위기들을 슬그머니 지웠음에도 폐허의 ‘난장판’이 또 다른 붕괴를 야기하지 말라는 법이 없고 오어가 남은 세계에 또 다른 하버들이 등장하지 말라는 법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설사 자본주의 자체가 붕괴된다 치더라도 그 결과는 덩그러한 폐허가 아니라 자본주의보다 더 나쁜 유형의 체제, 그리고 자본주의 문명을 대체하는 더 나쁜 성격의 문명이 들어설 계기일 수 있다. 따라서 폐허가 생명력을 북돋는 다른 문명의 단서가 되기 위해서는 애초에 폐허를 야기한 힘, 곧 자본주의와의 싸움이 하나의 관건이다. 요컨대 자본주의의 폐허일지 몰라도 문명적 폐허는 되지 않게 하는 데 모든 것이 걸려 있다.

4. 『새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과 인간-비인간의 ‘얽힘’

인간중심주의 비판을 짙게 깔면서도 『하늘의 물레』가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다분히 비유적이고 주변적으로만 다룬다면, 『새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23)은 이 또 다른 인류세적 핵심 주제를 전면적으로 제기한다. 저자 파워스(Richard Powers)의 전작인 『오버스토리』(The Overstory)는 나무와 특별한 인연을 맺는 인물들의 이야기이면서 무엇보다 나무와 숲이 소설의 핵심 주체로 등장한 점에서 인간적 서사를 ‘넘어서는’(over) 소설로 주목받은 바 있다. 『새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에서는 같은 주제가 ‘얽힘’이라는 표현에 어울릴 만큼 한층 밀도 있게 다루어진다. 기후변화로 인한 전례 없는 홍수와 산불, 식수오염, 서식지 파괴, 인수공통질병, 이민, 폭력, 정부의 권위주의와 반생태적 행태 등 여러 심각한 문제가 언급되는 가운데 서사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축으로 전개된다. 열렬한 환경운동가였던 아내 얼리사가 도로에 뛰어든 동물을 피하려다 트럭과 충돌하여 사망한 후 우주생물학자 시오는 9세 아들 로빈을 혼자 키우며 살아간다. 야스퍼거증후군, 강박장애, 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 등의 진단을 받는 로빈은 급우들이나 교사들과의 관계에서 적절한 의사소통과 감정적 교류를 얻지 못하는 대신 죽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연대를 향한 열망에서 멸종위기 동물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다. 로빈의 엄청난 집중력을 통해 멸종위기, 곧 생물다양성 상실이라는 인류세적 위기가 소설 전반에 걸쳐 존재감을 얻는다.

『새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에서 비인간으로의 정향은 두 가지 차원에서 진행된다. 하나는 지구와 유사한 환경의 행성을 찾아 생명의 존재를 발견하려는 시오의 ‘유사 지구 탐색기’(Earthlike Planet Seeker) 프로젝트다. 시오는 여러 외계 행성의 조건에서 생명체가 어떻게 진화하고 적응할 수 있을지에 관한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로빈과 함께 가상 체험한다. 때로 감당할 수 없이 들끓는 로빈의 감정을 달래는 장치이기도 한 이 체험은 독자 역시 순전한 비인간의 세계로 일순 옮겨놓는다. 생생하게 묘사되는 행성 시뮬레이션은 지구의 단독성이나 지적 존재로서 인간의 예외성을 우주적 차원에서 상대화하면서 매혹적으로 낯선 비인간의 세계를 눈앞에 펼쳐 보인다. 마치 “외계 우주생물학자가 1조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지구를 보듯 바라보는 그 일”(20%), 다시 말해 물리적으로 ‘행성적 관점’을 가상하는 그 일은 또한 생명이 진화한다는 것이 드물고도 극적인 사건이라면 생명을 파괴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범죄일지 에둘러 일깨운다. 결국 시오의 프로젝트가 중단되는 이유는 우주생물학이 지구환경 위기를 이해하게 해준다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과학·환경 예산을 축소했기 때문인데, 우주에서 생명체를 찾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 이유에 대해 로빈이 내놓는 대답이 의미심장하다.

“그쪽에서 숨은 거야, 아빠. 아이솔라의 생명체들이 우리의 머릿속에 들어와서 은폐한 거지.”

“뭐? 어떻게?”

“10억 년은 살아온 존재니까, 몇 가지 재주는 익혔겠지.”

로빈은 이제 지쳤고, 뻔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에게 인내심을 잃었다. 어떤 접촉이든 잘 끝날 확률이 얼마나 되던가? 모든 인간 역사가 대답해주는 것을.

“그래서 우주가 침묵하는 거야, 아빠. 다들 숨었거든. 어쨌든 영리한 생명체는 다 숨었어.” (49%)

“우리가 외계인을 어떻게 알겠어? 새들조차 알 수가 없는데”(81%)라는 말로도 변주되는 로빈의 개탄은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그의 깊은 좌절감에서 비롯하고, 이 좌절감은 이 소설에서 비인간적 관점이 전개되는 더 중요한 방향과 연결된다. ‘인간적인’ 교류를 어렵게 만드는 로빈의 질환은 동물들을 향한 일체감이나 그들과의 ‘얽힘’에 대한 의식을 더없이 날카롭고 전면적인 것으로 만든다. 파워스의 작품들은 “생태적 손상과 신체적 손상의 경험들을 서사적 정동을 통해 결합시키는” “생태질병 소설”(ecosickness fiction)24)로도 분류되는데, 이 소설에서도 로빈의 질환은 비인간을 향한 정향과 공감의 강렬도를 증폭하는 매개다. 행성 시뮬레이션이 외계 행성을 구체적으로 재현했듯이 미국의 멸종위기 동물을 하나하나 정밀하고 강렬한 그림으로 재현하는 일을 통해 로빈이 비인간과 교감을 쌓아간다는 점도 주목을 끈다. 상세하고 생생한 묘사를 뜻하는 ‘에크프라시스’(ekphrasis)가 “인간 중심의 서사를 교란하고 그 한계를 드러내는 역량”을 가진바, 로빈의 그림에 나타난 극히 정교한 “에크프라시스적인 이미지”가 인간 경험의 평범한 스케일을 넘는 세계로 안내하는 것이다.25) 로빈에게는 “핀치새는 비가 오면 어디로 갈까? 사슴은 일 년에 얼마나 멀리까지 걷지? 귀뚜라미가 미로에서 벗어난 방법을 기억할 수 있을까”(56%) 같은 것들이 가장 내밀하고 흥미로운 물음이 된다. “생각해봐, 아빠. 학교의 정규 과정이 될 수도 있잖아. 모두가 다른 존재로 살면 어떤지 배워야 하는 거야. 그러면 얼마나 많은 문제가 해결되겠어!”(60%)라는 로빈의 통찰은 그와 같은 ‘비인간적 전회’(nonhuman turn)에서 비롯한다.

로빈이 멸종위기 동물에게 느끼는 정동적 일체감의 정도는 해러웨이의 ‘공-산’ 개념을 비롯하여 인간과 비인간이 ‘언제나 이미’ 연결되고 얽혀 있다는 인류세 담론의 논의들을 곧바로 연상시킨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 얽힘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과 그 얽힘에 지속적으로 집중하고 전념한다는 것이 별개의 일임을 보여준다. 동물의 고통과 멸종이라는 문제가 자신에게 그런 것처럼 모두에게 선차적인 이슈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에 분노와 슬픔을 제어하지 못하는 로빈의 증상은 한층 심각한 지경으로 치닫는다. 동물들의 고통에 온몸으로 공감하면 할수록 세계와 인간을 향해 느끼는 로빈 자신의 고통도 견딜 수 없이 깊어져 결국 스스로나 타인을 향한 폭력적인 발작으로 분출되는 것이다. 로빈의 반응은 일찍이 비슷한 좌절과 고통을 겪은 얼리사와 대비된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절망적인 분류 작업은 얼리사를 쓰러뜨리곤 했다. 나는 얼리사가 어느 아이오와 사육장에서 비밀리에 나온 영상을 보고 울던 모습을 기억한다. 한 번은 서식지 파괴에 대한 UN보고서를 방 저편으로 집어던지면서 인류 따윈 다 지옥에 떨어지라고 한 적도 있다. 하지만 내 아내의 세포는 낙관을 쏟아냈다. 아내의 영혼은 쇳가루가 자기장을 따라가듯 황홀을 향했다. (35%)

얼리사와 달리 제어력을 잃고 “어둠의 경계선 너머”(31%)로 달려가는 로빈을 더는 감당할 수 없게 된 시오는 화학적으로 무감각하게 만드는 약물치료만큼은 피해보려고 아내의 동료였던 신경과학자 마틴에게 로빈을 데려간다. 마틴은 사람들의 감정의 두뇌 패턴을 스캔한 다음 ‘뉴로피드백’을 통해 필요한 감정 패턴을 모방하여 익히게 하는 실험적인 치료법을 개발한 참이었다. 얼리사의 감정을 비롯해 여러 인물의 감정적 두뇌 패턴을 학습하면서 로빈은 차츰 평정을 찾아간다. 그런데 소설에서 이 과정은 단순히 “몇 년씩이나 지는 싸움을 하면서도 쓰러지지 않”(51%)는 법을 배우는 감정치유 이상의 의미가 부여된다. 프로그램을 이끄는 마틴 자신은 “한 사람의 분노를 다른 사람의 평온으로 달래는 세상을 상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사사로운 공포가 모르는 사람의 용기에 누그러드는 세상 그리고 피아노 교습받듯이 쉽게 훈련으로 고통을 물리칠 수 있는 세상을요. 우리는 여기, 이 지구에서 두려움 없이 사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72%)라는 식으로 정서훈련의 차원을 강조한다. 하지만 타자를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내어주는 훈련방식 자체가 로빈을 그저 달래주기보다 어떤 포스트휴먼적 주체로 변모시킨다.

“사람들이 두뇌를 서로에게 연결하는 행성”(38%)에 사는 것처럼 로빈은 점차 두뇌 패턴을 학습한 그 사람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거나 그러는 것처럼” 느끼고 “내 머릿속에서 우리가 같이 뭘 하는 것처럼” 한 팀으로 받아들인다(40%). 시오가 보기에도 “어떤 특징이 원래 아들의 것이고 어떤 특징이 그 ‘팀’에서 왔는지 확실히 구별”할 수 없고 “매일 작은 변화가 섞여들며 자연스럽게 정착”(42%)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는 감정 패턴을 모방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점차 더 확장된다. “아빠, 난 깨어나는 기분이야. 모든 것의 안에 내가 있는 것 같아.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좀 봐! 저 나무. 이 풀!”(64%)이라거나 “모두가 모두의 안에 있죠”(69%), “그냥 이젠 무섭지 않을 뿐이에요. 전 정말 큰 존재에 섞여 들어가 있어요. 그게 제일 멋진 부분이죠”(73%) 같은 말로 표현되듯 로빈은 모든 존재, 모든 타자와 연결되고 일체화되어 있다는 기분을 갖게 된다. 로빈은 마틴의 실험 가운데 가장 성공한 사례로서 구독자가 수십만 명에 달하는 영상 채널에 출연하고, “제이[로빈의 가명]와 시간을 보낸다는 건 사방에서 친족을 보는 일이고, 당신으로 끝나지 않는 거대한 실험에 참여하는 일이며, 무덤 너머에서 보내는 사랑을 느끼는 일입니다”(70%)라는 폭발적 반응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며 바이럴된다. “로빈과 같은 새로운 눈을 지닌 아이가 만 명이 생긴다면 그 애들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줄지도”(64%) 모른다는 시오의 생각처럼, 로빈은 『하늘의 물레』의 오어가 보여준 수동성과 겸손함보다 더 적극적으로 비인간과 접속하는 미래세대를 대표한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 역시 “연구 대상자의 온전성, 자율성 그리고 존엄성을 침해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습니다”(82%)라는 통보로 지원이 끊기고, 갑작스레 훈련이 중단된 로빈의 증세는 다시 악화되어 이제는 어떤 노력도 아이의 고통과 발작을 거의 달래주지 못한다. 아동학대를 의심한 사회복지사들이 방문하고 일상을 지속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면서 로빈은 “내가 아빠 인생을 망치고 있어”(88%)라고 자책하고 시오도 이제 약물치료를 시작할 수밖에 없겠다고 판단한다. 병원에 가기 전 둘은 예전에 좋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스모키산맥으로 캠핑여행을 떠난다. 시오가 잠깐 잠든 사이 로빈은 새벽에 혼자 수중생태계를 교란하는 돌탑을 무너뜨려 “강을 안전한 집으로 바꾸려고”(95%) 혼자 나섰다가 차가운 물에 휩쓸려 끝내 숨을 거둔다. 인류세 위기들의 여러 양상이 중첩된 이 소설이 안타까운 비극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모든 것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고통에서 해방되기를”(75%)이라는 로빈의 기도가 그 스스로에게 이루어지는 다른 방식을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로빈이 갖는 질병적 증상은 이중적으로 작동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애초에 비인간 존재, 특히 고통받는 동물들에게 남다른 관심을 기울이고 누구보다 예민하게 공감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 관심과 공감을 감당하기는 몹시 어렵게 한다. 마틴의 훈련에서 다른 사람들의 감정 패턴에 동조하는 일에 뛰어난 성취도를 갖게 하지만 훈련이 중단될 때 받는 타격은 훨씬 크게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것은 로빈의 질병이 극히 예외적인 사례를 구현하기보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문제를 끝까지 밀고 나가 분명히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인간과의 ‘공-산’이나 행위자 네트워크에 내재된 친밀함이 어떤 성격의 도전을 함축하는지가 그의 사례를 통해 여실히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인류세 담론이 말하는 인간과 비인간의 얽힘은 상호 의존이나 연결이라는 말이 흔히 그러하듯 위험이나 갈등, 불화보다는 뭔가 더 큰 연대와 조화 같은 것을 암묵적으로 환기한다. 하지만 로빈이 겪는 고통과 비극은 비인간-되기나 비인간과의 동조가 결코 낭만화할 수 없는 ‘목숨을 건 도약’일 수 있음을 일러준다. 여러 면에서 툰베리(Greta Thunberg) 같은 청소년 환경운동가를 연상시키는 로빈이 얼리사를 비롯한 선배 환경운동가들과 감정적으로 교류하면서 기운을 회복하는 점, 다시 말해 로빈이 인간을 넘어선 방식으로 지구에서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경로가 인간의 감정을 배우고 인간과의 교류를 회복함으로써였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비인간-되기’란 고도의 ‘인간-되기’를 요구하며 비인간과의 관계에는 엄청나게 훈련된 인간의 정동적·문화적 역량이 소요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비인간과의 일체감과 공감이 곧바로 인간들 사이의 문제를 해소해주지 않으며, 그 문제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적 관점에서 대처와 싸움이 필요하다는 것도 로빈의 경우를 통해 잘 드러난다.

‘모두가 모두의 안에 있고’ 우리 모두가 ‘더 큰 존재’에 섞여 있다는, 훈련을 통해 다듬어진 로빈의 말은 그가 분노에 차서 뱉은 날카로운 말들에 비해 너무 고양된 것처럼 들려서 일종의 가상적 감정상태일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남긴다. ‘모든 것의 안에 있게 된’ 로빈은 하나의 팀이 되어 두려움을 잊을지 몰라도, 이따금 시오도 의식하듯 로빈‘으로서’ 존재한다는 느낌은 흐려진다. 하지만 둔감하고 무책임한 개별자로 생존하거나 아니면 얽혀 녹아든 ‘퇴비’로 변모하거나 하는 선택지만 우리에게 남는 것일까? 로빈 자체는 매우 개성적인 인물로 각인되지만 장차 출현할지 모를 ‘로빈 같은 새로운 눈을 가진 만 명의 아이들’은 어쩐지 서로 구별되지 않는 포스트휴먼들일 것만 같다. 이 소설에서 마지막에 로빈이 사망에 이른 것은 마틴의 실험적 프로그램이 중단됨으로써 그가 전체와의 연결감에서 벗어나 평정심을 잃었기 때문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늘 고양된 일체감 속에 지낼 수는 없는 일이라면 로빈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일정한 개별성의 경계였을 법도 하다. 로빈이 마지막까지 동물과의 연대에 충실했다 해도 개별자로서 로빈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인간 시오에게 견디기 힘든 상실의 고통임은 분명하다. 결국 얽힘이 모두의 존재양식이라는 말은 진실의 절반일 따름이며 각각의 존재는 또 어느 만큼은 서로에게서 물러나 있고 또 그래야 하는 게 아닐까. 로빈의 말처럼 우리가 “다들 망가졌”고 “그래서 우리가 행성 전체를 망가뜨리는 거”라면(70%) 어떤 얽힘에 앞서 우리의 망가짐을 살피고 최대의 인간적 역량을 기르는 것, 그것이 인류세 담론들의 공백이자 인류세의 중요한 과제다.

인류세라는 이름을 수용하든 아니든 그 이름을 통해 우리가 더 분명히 의식하게 된 세계의 위급한 상태를 재현하고 성찰하는 소설은 앞으로 더 많아지리라 예상할 수 있다. 그런 의미의 ‘인류세 소설’은 이 비상한 과제를 감당하기 위해 어쩌면 지금까지 문학이 그래왔던 것보다 더 자주 담론들과 접속하고 또 더 많이 그것들을 참조할지 모른다. 하지만 앞서 살핀 두 소설이 그렇듯이 문학이 문학인 한 대체로 그 과정에서 은연중에라도 담론의 ‘지배서사’가 갖는 서사적 한계를 문제화하여 우리에게 인류세 시대의 인간과 세계에 대한 탐구가 인류세 담론의 틀에 갇히지 말아야 함을 상기시켜준다. 문학이 제기하는 이런 ‘담론적 도전’은 존중받아야 마땅한데, 다른 한편으로 도전 자체가 반드시 독자적인 사유의 개진은 아니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하리라 본다. 대략 그 차이를 상기하는 지점이 『하늘의 물레』나 『새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이 갖는 문학적 위치일 것이다.


  1. 1)黃靜雅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HK교수. 최근 논문으로 「민주주의는 살아남을 것인가?」(2025), 「인류세 시대의 신동엽과 개벽」(2024)이 있다.Timothy Clark, Ecocriticism on the Edge: The Anthropocene as a Threshold Concept (New York: Bloomsbury Academic, 2015) 3면.
  2. 2) ‘근대’가 ‘새로움’에 대해 남다른 자의식을 지녀온 개념이라는 점은 개념사 연구로 잘 알려진 코젤렉(Reinhart Koselleck)의 ‘근대’ 개념 분석에도 잘 나타난다. ‘새로운 시대’(neue Zeit)라는 표현의 합성어인 독일어 ‘근대’(Neuzeit)가 함축한 새로움에는 그때그때 새롭다는 정도와 신기원적으로 의미로 새롭다는 뜻 둘 다 담겨 있었다고 코젤렉은 지적한다. 라인하르트 코젤렉 지음, 한철 옮김 『지나간 미래』(문학동네, 1998) 345면.
  3. 3) 아미타브 고시 지음, 김홍욱 옮김 『대혼란의 시대』(에코리브르, 2021) 19면. 원제는 The Great Derangement: Climate Change and the Unthinkable (Chicago: U of Chicago P, 2016). 이하 이 단락의 논의는 주로 이 책 1부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고시의 이 저작은 “과학분야에서 물리적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개발된 패러다임들과 문학 제도들 사이의 관계를 역사화한 점에서, 날씨·기후·대기의 미학에 관한 연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Lynn Badia, Marija Cetinić, and Jeff Diamant, Climate Realism: The Aesthetics of Weather and Atmosphere in the Anthropocene (London: Routledge, 2020) 5면.
  4. 4) 고시, 같은 책 86면.
  5. 5) Badia, Cetinić, and Diamant, 앞의 책 123면.
  6. 6) 애나 로웬하웁트 칭 지음, 노고운 옮김 『세계 끝의 버섯: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현실문화연구, 2023) 1%. 이 책의 인용은 e-book 버전의 위치를 표기한다. 원제는 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 On the Possibility of Life in Capitalist Ruins (Princeton: Princeton UP, 2015).
  7. 7) Badia, Cetinić, and Diamant, 앞의 책 131~32면 참조.
  8. 8) Jacques Rancière, The Politics of Literature, trans. Julie Rose (Cambridge: Polity, 2011) 130면.
  9. 9) 같은 책 40면.
  10. 10) 랑시에르가 말한 사실주의 소설의 정치성에 관한 논의로는 황정아 「사실주의 소설의 정치성: 자끄 랑씨에르의 소설론」, 황정아 외 『다시 소설이론을 읽는다』(창비, 2015) 참조.
  11. 11) 마틴 푸크너 지음, 김지혜 옮김 『변화하는 행성 지구를 위한 문학』(문학과지성사, 2025) 21면.
  12. 12) John Parham,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Literature and the Anthropocene (Cambridge: Cambridge UP, 2021) 20면.
  13. 13) Pieter Vermeulen, Literature and the Anthropocene (London: Routledge, 2020) 20면.
  14. 14) Heather Houser, Ecosickness in Contemporary U.S. Fiction: Environment and Affect (Cambridge: Columbia UP, 2014) 8면, 15면.
  15. 15) Ursula K. Le Guin, The Lathe of Heaven (New York: Scribner, 1971). 이하 이 책의 인용은 괄호 안에 e-book 버전의 면수만 표기한다. 한국어 번역본은 어술라 K. 르 귄 지음, 최준영 옮김 『하늘의 물레』(황금가지, 2010). 원제의 lathe는 선반(旋盤)기계를 뜻하고 제목 전체는 장자에 나오는 ‘천균(天均)’에 토대를 둔 것이다. 번역본 제목인 ‘하늘의 물레’에 나오는 (도자기) 물레는 선반처럼 재료를 회전시켜 다듬는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장자에 나오는 애초의 단어에 비추어보면 두 겹의 오역이라고 할 수
    있다.
  16. 16) “하버의 존재에 내재한 공허함, ‘효력을 갖는 악몽’이 꿈꾸는 그의 두뇌에서 바깥을 향해 발산되면서 연결들이 훼손되었던 것이다”(The emptiness of Haber’s being, the effective nightmare, radiating outward from the dreaming brain, had undone connections, 117면)라는 대목에서는 그가 가진 ‘자기중심성’이 실은 존재의 공허함의 다른 양상이라는 사실도 합당하게 지적되어 있다.
  17. 17) Bronislaw Szerszynski, “The Anthropocene monument: on relating geological and human time,” European Journal of Social Theory 20.1 (2017).
  18. 18) Christian Hinz & Jan Lorenz Wilhelm, “An environmental aesthetic approach to ruins: the situativity, relationality and emergence of experiences in a derelict sanatorium,” Journal of Cultural Geography 26.2 (2024) 3면.
  19. 19) 도나 해러웨이 지음, 최유미 옮김 『트러블과 함께하기: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마농지, 2021). 이 책의 인용은 괄호 안에 면수만 표기한다. 원제는 Donna Haraway, Staying with the Trouble: Making Kin in the Chthulucene (Durham: Duke UP, 2016).
  20. 20)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해러웨이는 ‘인류세’라는 명칭을 특히 인간중심주의적이지 않은 대안이나 저항주체를 사유할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쑬루세’라는 대안 개념을 제안했으나 여기서는 어쨌든 질적으로 새로운 시대라는 발상을 채택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인류세’를 의식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친 점에서, 해러웨이의 논의를 인류세 담론으로 묶는다.
  21. 21) 해러웨이의 설명에 따르면 ‘쑬루세’는 그리스어 ‘크톤’(chthon, 땅속)의 변형어로, 식물뿌리·곰팡이 균사·박테리아 등 땅속 존재들의 촉수적인 연결망을 상기시킨다.
  22. 22) 마크 피셔 지음, 박진철 옮김 『자본주의 리얼리즘: 대안은 없는가』(리시올, 2018) 10~11면.
  23. 23) 리처드 파워스 지음, 이수현 옮김 『새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알에이치코리아, 2022). 이 책의 인용도 e-book 버전의 위치를 표기한다. 원제는 Richard Powers, Bewilderment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2021).
  24. 24) Houser, 앞의 책 2면.
  25. 25) Silvia Kurr, “Eco-Ekphrasis in Richard Powers’s The Overstory and Bewilderment,” Ekphrasis: Images, Cinema, Theory 33.1 (2025) 126~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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