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물로의 전환과 동물 서사
서사 장르는 오랜 시간 동물을 알레고리로 활용했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모호하고 그 경계가 좁았던 고대 세계부터 인간과 동물 사이의 구분이 뚜렷해지고 명료한 위계가 부여된 근대 세계에도 동물은 여전히 인간을 드러내는 서사적 기제로서 작동했다. 이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 불가분의 친연적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인간의 서사에서 동물이 주로 상징이나 비유로 소비되면서 정작 동물의 실제적 삶은 관심 밖의 문제가 되는 역설이 발생한다. 그런데 서사가 정작 동물의 삶 자체에 초점을 맞추더라도 대중은 그 의도에 부합하는 관심을 보이지 않기도 한다. 오웰(George Orwell)은 『동물 농장』(Animal Farm)을 통해 명백히 인간의 동물 학대를 중요하게 다루고자 했지만, 그 바람과 무관하게 소설은 대개 인간사회의 정치적 알레고리로서 해독되었다. 싱클레어(Upton Sinclair)는 『정글』(The Jungle)에서 노동자와 동물에게 가혹한 육식산업의 실체를 드러내려 했으나, 당대 독자들은 ‘내가 먹는 소시지’가 그토록 더러운 환경에서 만들어진다는 점에 더 주목하고 분노했다. 그러면서 동물은 부재 지시 대상(the absent referent)1)이 된다.
아감벤(Giorgio Agamben)에 따르면 인간은 인간과 동물을 이분법적으로 가르는 인류학적 기계(anthropological machine)를 작동시킴으로써 자신이 인간임을 인식하는 동물이다. 이 개념에는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로서 인간이 상상해온 인간 원숭이(man-ape) 또는 원숭이 인간(ape-man)이 상정되어 있다. 이 중간적 존재는 인간화되면 동물성을 잃고, 동물화되면 인간성을 박탈당하므로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이 된다. 고대의 인류학적 기계는 인간의 모습을 한 동물의 형상들(야생아, 노예, 야만인 등)로부터 인간을 구분한다. 반면 근대의 생명정치 메커니즘은 이미 인간인 것(유대인, 식물인간 등)에게서 인간성을 박탈하는 비인간화를 통한 동물화가 두드러진다.2) 인류학적 기계는 동물의 인간화와 인간의 동물화 사이를 반복해 오가며 인간으로부터 동물성을 떼어놓음으로써 ‘인간 의식’을 생성하는 장치다.3) 따라서 인류학적 기계는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구분뿐 아니라 인간 존재를 구성하면서 특정 집단이나 소수자(유색인, 원주민 등)에 대한 구별과 배제의 원리로 작동한다. ‘이 이분법적 기계를 어떻게 정지시킬 것인가’의 문제는 인간과 동물의 절멸이 심각한 논제로 떠오른 인류세를 직면하면서 인간과 동물 사이를 가른 언어와 이성이라는 기준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2007년 역사학자 릿보(Harriet Ritvo)는 ‘동물로의 전환’(animal turn)을 선언하기에 이른다.4) 이 선언은 동물의 삶과 동물 문화(animal culture)를 그 자체로 살펴보려는 학계의 관점 변화를 집약하고 있다.5) 동물로의 전환은 근대적 주체의 도구화된 이성의 후광으로 인해 가려졌던, ‘인간이 몸담은 반쪽 세계’로의 전환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때 인간과 동물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해온 단선적 경계(언어, 이성, 문화/기술)를 의문시하며 인간과 동물 사이의 관계를 ‘복잡하게’ 바라보는 질문들이 제기된다. 인간을 주체의 자리에 올려놓은 세계가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동물과 공동으로 이룩한 것이라는 인식적 변화가 개입된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동물을 인간 세상의 쓸모로만 대상화하는 데서 벗어나 ‘동물을 위하는’ 인간-동물 관계로의 전환을 촉구한다.
동물적 전환의 함의는 인간-동물 사이에 우호적이면서도 적대적인 관계의 층위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산업화된 동물 사육과 도축, 동물실험을 나치와 유전학자들의 유대인 학살 메커니즘에 비유했으며,6) 쿳시(John Maxwell Coetzee) 또한 소설 『동물로 산다는 것』(The Lives of Animals)의 강연 장면에서 동물에 대한 물리적이고 인식론적인 폭력을 홀로코스트에 빗댄다.7) 『동물과의 전쟁』(The War against Animals)의 저자 와디웰(Dinesh J. Wadiwel)은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기본적으로 전쟁 상태로 규정한다. 이러한 관계성은 20세기 이후의 전쟁을 적대하는 두 세력 간의 무력 충돌로만 규정하기 어려우며, 교전 지역과 시민정치 공간의 경계가 무너져 전장과 전장 아닌 곳을 분간할 수 없게 된 것과 상통한다.8) 인간-동물이 전쟁 중이라는 것은 인간이 동물을 해치는 절대적인 규모의 물질적 증거로 뒷받침된다. 와디웰은 인간이 동물에 대해 적대적임을 직시하면서도 인간과 동물이 ‘상호 응답하며 공동으로 형성하는’ 관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접근법이 병행될 수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 인간-동물 관계에 대해 이전에는 폭력으로 보지 않았던 것을 폭력으로 볼 수 있는 관점이 더욱 보편화되고 있으며, 인간 우위와 동물 열위라는 기준을 넘어 근대 이데올로기와 인식론적 단절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 근대의 상품 생산 메커니즘에서 비롯된, 동물 상업주의에 뿌리를 둔 대중 사회·문화의 동물친화적 관점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근대적 생산 메커니즘에서 동물은 자원으로 전제되고 상품화되면서도 인간에게 우호성을 표현하는 자발적 주체로서 이미지화된다. 미디어에는 인간의 선택적인 교배를 통해 특정 형질이 고정된 품종 동물들의 인간화된 모습이 가득하다. 동물 상업주의의 틀 안에서 논의되는 동물권은 인간이 동물의 삶을 제약할 권리를 전제하므로 애초부터 모순성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동물적 전환 담론은 동물에게 고유한 삶의 존재 여부와 ‘동물을 위한다는’ 행위의 본질을 되묻는다. 이 담론은 또한 복잡하고 모순적인 사회 시스템, 그리고 인간의 태도에 대한 문제제기를 포괄한다.
오키(Dominic O’Key)에 따르면, 오늘날 인간-동물 관계의 근본을 갈등과 전쟁으로 보는 수사는 비가시화된 폭력구조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관점이다.9) 그에 따르면 문학이라는 제도는 인간을 만드는 기계, 즉 ‘인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특정한 아이디어를 생산함으로써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를 만들고 단속하는 생명권력의 창조 도구(creative contraption)인 인류학적 기계다. 특정 이데올로기를 설파하거나 개인주의적 인간주의를 생산함으로써 인간의 범주를 좁힌 근대소설이 전형적인 사례다. 그런데 또한 문학은 인간 내면에서 인간과 동물을 분리하는 중심적 공백(단절)을 보여주고, 그 공백 속으로 우리 자신을 위험하게 내던지도록 함으로써 이 기계를 중단할 수 있는 양가성이 있다. 문학이 동물과의 전쟁을 사유하거나 대면하여 서술한다는 것은 곧 인간과 동물성을 가르는 범주의 경계에서 인간 중심 규범성(anthroponormativity)이 기계적으로 생산되는 것을 방해하고, 나아가 다른 피조물들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다.10) 그런 점에서 문학은 형식과 장르의 경계를 위반하는 서술이 되어야 한다. 문학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을 통해 인간의 삶을 강화하는 대신 주체적 인간 형상을 흐릿하게 만들 수 있고, 이때 같은 피조물로서 인간이 다른 동물들의 삶에 개입하는 방식을 창조할 수 있다.11)
동물적 전환의 시대, 소설과 영화 서사에서 동물 재현은 동물 메타포와 동물 실재 간의 간극에 관심을 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동물과의 관계에서 시선의 주체가 되어온 인간이 동물의 시선을 알아차릴 수 있는 상호적 존재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12) 과학주의의 영향 아래 동물은 객관적인 대상처럼 관찰되고 사물로 서술되면서 실제적 삶과 존재성에서 멀어지며 타자화되었다. 문학에서 동물은 인간의 관점을 부여받은 인간의 대리인으로 의인화되거나 상징화됨으로써 동물의 삶을 드러내는 데 실패했다. 이에 따라 오늘날 동물을 ‘위하는’ 서사는 과도한 의인화와 감정이입을 경계하는 형식으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이는 동물의 삶과 감정을 유추하되 인간과 동물 간의 동질성으로 치환하거나 포획하지 않고 동물을 그 자체로 바라보려는 시도이자 동물의 시선을 의식하는 타자 윤리적 태
도다.
최근 동물 서사의 초점은 크게 두 가지의 갈래로 구분해볼 수 있다. 먼저, 동물이 당하는 일상적인 일이 폭력·감금·살해임을 서사적으로 재인(recognition)시키려 한다. 예컨대 쿳시의 『동물로 산다는 것』에서 초점 화자인 ‘코스텔로’는 공장식 축산업의 시스템화된 동물 학살이 홀로코스트와 다름없다는 논의를 펼친다. 오스트레일리아 다큐멘터리 「도미니언」(Dominion)은 제목이 가리키듯이 동물과의 관계에서 지배권을 점한 인간의 가해자성을 지목한다. 이 영화는 인간의 가해자성과 동물 학살 피해 시스템의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 동물산업 현장을 잠입 취재하여 동물이 폭력·감금·살해당하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이처럼 동물에 대한 폭력 행위를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서사는 동물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부각하기보다는 인간을 시선의 주체로, 동물을 시선의 객체로 고정한다. 즉 이런 방식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보다는 동물과 인간의 영역과 경계를 더욱 명확하게 확정할 위험이 있다.
다음으로, 동물 서사는 동물의 행위자성(agency)을 부각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수동적인 것으로 여겨진 동물의 능동적인 측면에 주목하는 것이다. 일례로 해러웨이(Donna J. Haraway)는 서로 다른 위치에 놓인 인간과 동물의 상이성을 인정하면서 상호 소중한 타자성(significant otherness)을 발현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13) 이러한 관점은 행위자 네트워크(actor-network) 이론에서 동물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가는 관계망에 주목하는 시각과 궤를 같이한다.13) 해러웨이는 동물을 수동적 피해자로 고정하는 대신에 인간과 반려관계에 놓인 동물과의 우호성에 주목하며 폭넓은 공감을 얻었다. 그러나 와디웰은 인간-동물 간 반려관계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동물의 자유를 제한하는 인간 행위가 사실 동물에 대한 전적인 지배권을 사적 개인에게 위임하는 사유화된 지배 형태임에 주목한다.14) 그는 해러웨이의 반려관계가 위임된 권력을 일상 속 정상성의 범주 내로 도입함으로써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은폐하는 기능을 한다고 본다. 와디웰에게 인간과 동물 관계의 지속적인 과제는 ‘폭력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는 인식론적 폭력의 해결인데, 해러웨이는 생명을 빼앗는 지배권인 ‘책임감 있는 살해의 필요’를 내려놓지 않아 동물에 대한 구조적 폭력의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비판에 직면한다.15)
결국 동물적 전환의 시대에 ‘동물을 위한’ 서사란 동물이 겪는 폭력·감금·살해를 다른 개념으로 치환하지 않으면서 그것이 폭력·감금·살해임을 설득력 있게 구현해야 하는 까다로운 조건을 형성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 예외주의의 표상인 언어가 배제된 동물 재현의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최근 영화 세 편을 통해 비언어적 동물 재현의 새로운 형식과 그 효과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카우」(Cow)16)는 동물을 시선의 주체로 주목하고 인간을 타자화함으로써 동물이 갖는 피해자성과 행위자성이 어떻게 중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다음으로 「군다」(Gunda)17)는 축산시설 내 동물들의 일상성에 집중하면서 그 일상이 헤집어지는 순간을 조명함으로써 동물권의 모순성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플로우」(Flow)18)는 삶의 주체가 되는 동물들의 행위만을 주목하면서 인간중심주의의 폐해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이 영화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언어를 최대한 소거한 채 동물의 소리와 몸짓을 주의 깊게 듣고 볼 수 있는 장치를 구현함으로써 새로운 메시지와 의미를 만들어낸다.
2. 시선의 주체가 되는 동물
2.1. 루마가 느끼는 세계
동물이 피해자일 수 있음은 동물에 대한 폭력을 (말로 설명하든 보여주든) 단지 알린다고 해서 온당하게 인지시킬 수 있는 게 아니다. 제도적 폭력이 은폐되는 것은 그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지식체계가 그것을 폭력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19) 이러한 인식론적 문제로 인해 『동물로 산다는 것』에서 코스텔로는 철학자와의 논쟁과 관객들의 반대 질문 등으로 어수선해지면서 동물 학살의 증언자가 되지 못하고 실패한다. 코스텔로는 자신이 타인을 설득하지 못한 이유를 “동물 존재의 모든 것, 추상화되지 않은, 비지성적인 특성을 절실히 느끼게 하지 못한”20) 자신의 ‘언어’ 탓으로 돌린다. 언어로는 동물 존재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이며, 언어로는 좇을 수 없지만 실재하는 타자의 구체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 해결책으로는 다른 존재의 마음이 아니라 신체를 체험하게 하고 존재에 참여하게 하는 시인의 시를 읽어보는 방법이 제시된다.21) 시로도 감동을 얻지 못하는 경우, 그의 궁극적 제안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동물 옆에서 나란히 걸어보라는 것이다.22) 이는 감각을 통해 감정(동감심)을 발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23) 코스텔로는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공감적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주관적 현실성’을 열어젖힐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를 논의의 핵심에 가져다놓는다.
아널드(Andrea Arnold) 감독의 2021년 다큐멘터리 「카우」는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비지성의 세계로 관람자를 이끈다. 동물을 사고팔 수 있는 대상으로 규정하는 동물 상업주의 시스템 속에서 주인공 암소 ‘루마’는 인간에게 지속적으로 우유와 고기를 제공하는 것으로 관점화된다. 하지만 루마의 입장에서 보면 인위적 임신을 통해 자신의 젖과 새끼를 빼앗기는 것이다. 애덤스는 인간과 동물 간의 젠더화된 착취에 주목하면서 여성 동물이 생산하는 젖과 달걀과 치즈를 여성화된 단백질(feminized protein)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24) 이 다큐멘터리는 여성으로서 인간과 동물이 공유하는 신체와 경험을 위주로 동물의 삶을 보여주지만, 고발의 목적을 지닌 다큐멘터리들과 달리 동물들을 집단적으로 비추는 숏을 거의 활용하지 않으며 루마라는 개체의 시선만을 좇는다.
이 영화의 중요한 특징은 다분히 근대적인 서사 양식인 일인칭 서술에 가까운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인칭 서술은 서술자가 작중의 한 인물과 동일시됨으로써 이야기의 진실성을 입증하려는 형식으로 출현한 것이며, 이는 서술되는 모든 것이 불가피하게 일인칭 서술자와 존재론적인 관련성을 지닌 자료적 가치로서의 의미를 획득하는 고백적 이익(confessional increment)을 발생시킨다.25) 고백의 형식으로서 일인칭 서술은 세계에 대한 자아의 직접적인 표현 형식으로, 인물의 의식 내용을 통해 주관적 현실성을 직접 보여주는 현대 서사의 특징이다.26) 이러한 서사 양식을 동물 다큐멘터리에 도입한 것은 동물의 시점을 전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으로 담아냄으로써 인간과 동물 간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시도다.
영화는 루마의 눈이나 신체의 일부를 직접 보여주며 시선을 암시하는 내적 시각화의 방식으로 루마가 곧 주인공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때 루마는 카메라의 시선과 동일시되는 대상이자 시선의 주체가 된다. 영화 초입에서 카메라는 축사 내부의 모습을 패닝 숏(panning shot)으로 훑으며 비추지만, 곧 루마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출산 모습을 조명하면서 루마에게 밀착한다. 막 태어난 새끼의 얼굴은 양수와 피가 묻어 축축한 모습으로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 이어 피와 짚이 묻은 신체(새끼)를 루마가 핥는 장면에서는 외적 초점 화자(external focalizer)가 조정하는 카메라와 내적 초점 화자(character-bound focalizer, 루마)의 거리가 너무나 가까워 관객은 시야를 확보할 수가 없을 지경이 된다.27) 루마와 새끼의 신체가 엉키는 몇 분 동안 스크린에는 빛이라고는 전혀 없는 어둠이 지속된다. 그 5분 남짓의 시간 동안 외적 초점 화자의 시각은 내적 초점 화자인 루마에게 완전히 구속된다. 새끼의 몸을 핥아주는 소리만이 흐르며 새끼의 몸과 얼굴, 입, 루마의 몸 일부가 제한적으로 보인다. 관객은 루마와 새끼의 시간을 비시각적으로 느껴야 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루마에게 한층 가까워진 카메라는 상하좌우로 끊임없이 흔들리므로 더더욱 대상은 정확하게 포착되지 않으며, 무언가를 보려는 시각적 시도는 방해받는다.
버거(John Berger)는 더 선명한 사진과 영상 제작을 위한 기술적 장치들이 발명되고 개발될수록 동물은 언제나 관찰의 대상이자 확장되는 지식의 대상이 되어 인간과 점점 더 멀어진다고 말한다. 감춰진 카메라, 망원 렌즈, 전등 등의 장치들이 대상에 머무르는 시간은 300분의 1초도 안 되지만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포착하여 인간의 권능을 높인다.28) 동물을 가까이 보거나 오래 볼 필요 없이 대상으로 포착하고 파악할 수 있는 시각성을 확보하면서 인간은 동물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강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카우」가 제공하는 시각성은 인간이 가진 눈의 능력을 초월하여 얻어진 광학적 이미지(optical image)나 관찰자적인 응시(gaze)와는 다른 감각적 경험을 불러일으킨다. 루마가 낳은 새끼의 피부는 분비물로 미끈거리며 루마는 그것을 혀로 핥는다. 이때 시선은 피부 표면에만 머무는 것에서 벗어나 끈적거림이나 촉촉함 등의 촉각적 영역을 활성화시킨다. 마크스(Laura U. Marks)는 자신의 눈으로 영화를 접촉하는 것처럼 시각이 스스로 촉각이 될 수 있음을 파악하고 이를 가리켜 촉각적 시각성(haptic visuality)이라고 명명했다.29) 이러한 견해는 대상과의 물리적 거리를 둔 서구의 시각중심주의(ocularcentrism)를 비판하면서 열등한 것으로 여겨져온 근접 감각(육체와 관련된 촉각, 미각, 후각 등)에 주목하는 의미가 있다. 마크스는 ‘촉각적 인지’라는 개념을 발전시키는데, 촉각적 영상을 통해 인지자와 감각적 대상 사이에 그 어떤 추상화 과정 없이 감각적 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마크스는 신체적이고 체화된 촉각적 수용을 통해 거리와 안전을 기반으로 하는 재현주의 패러다임이 극복됨을 강조한다.30) 「카우」에서는 핥고 쓰다듬는 피부와 살의 뒤얽힘, 얼굴의 클로즈업, 그리고 핸드헬드 카메라의 심한 떨림이 관객으로 하여금 루마의 신체를 응시하는 초점을 흩트리며 외려 루마라는 존재에 참여하도록 이끈다.
초반 5분 이내의 출산 장면에서부터 관객은 루마의 시점에서 상황을 보게 되므로 인간이라는 존재와는 거리를 두게 된다. 실제 카메라는 루마와 훨씬 가까우며, 루마의 어깨 너머로 간간이 등장하는 방식으로 후경화된다. 루마의 새끼는 젖은 털이 말끔해지고 두 다리로 일어서 어미의 젖을 빨려고 한다. 바로 그때 인간의 소리(말소리, 휘파람)가 들리고 루마는 새끼와 분리되어 어디론가로 인도된다. 루마가 가는 곳은 착유 장소인데, 그곳에서 루마는 젖을 짜내도록 강요받는다. 착유하러 가기 직전 루마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관객을 향해 입을 벌려 크게 소리를 내는데, 그 장면이 꽤 오래 지속된다. 정면을 바라보는 루마의 시선은 외화면의 카메라를 바라보는 것일 텐데, 이는 루마가 관객을 보는 시선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선은 루마와 관객의 시선이 동등한 위치에서 마주치는 순간으로, 관객을 루마의 세계로 지속적으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된다.
2.2. 디제시스 바깥을 향한 질문
루마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소리와 몸짓, 그리고 시선 처리를 통해 의사 표현을 한다. 갓 낳은 새끼에게 젖을 먹이려는 순간 새끼를 남겨둔 채 착유 기계로 내몰릴 때와 새끼가 사라졌을 때 루마는 입을 크게 벌려 소리를 낸다. 루마는 새끼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거나 인간의 요구에 저항하는 움직임을 통해 자신의 행위자성을 드러낸다. 그렇게 몇 년간 반복되는 행위들은 루마의 일상과 삶의 궤적을 드러내며, 이는 관객이 루마의 심정을 정황상 짐작하게끔 유도한다. 이 가운데 루마와 디제시스(diegesis) 내 인간 사이에 언어적 우위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비대칭적 권력관계가 드러난다. 루마의 의사 표현과 상관없이 인간은 일방적으로 루마에게 ‘잘하지, 착하지, 계속해야지’ 등의 말을 건네는 방식으로 일상을 통제하고 삶의 행로를 결정한다. 이러한 비대칭적 의사소통 구조는 서사 바깥의 인간에게 루마가 겪는 불합리를 인식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
이 영화에서 외적 초점 화자는 루마보다 조금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루마의 몸 너머의 풍경을 보지만, 완전히 루마를 이탈한 시점을 갖기도 한다. 루마가 낳은 새끼와 다른 송아지들의 모습을 비추어줄 때다. 해를 거듭하면서 루마의 새끼는 늘어나는데, 그때마다 루마는 새끼에게 젖을 먹이지 못하고 떠나보내야 한다. 축산업의 특성상 어미 루마와 새끼의 공간이 분리되기에, 그들을 한 공간에서 다루지 못하고 루마와 새끼를 병행하여 다룰 수밖에 없다. 결국 루마가 갖는 제한적 시각은 인간의 우유와 송아지 착취를 위한 임신-착유-새끼와의 분리를 반복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드러내며, 인간중심주의적 시각을 교란한다. 인간은 어미와 떨어진 송아지에게 어미 젖 대신 분유를 먹이거나 가축 유순화를 위해 송아지의 뿔을 자르고 그 자리를 인두로 지지는 행위자의 모습으로, 루마는 축사 안을 배회하며 소리내는 행위자의 모습으로 병렬된다. 루마는 직접 등장하지 않는 화면에서도 맥락상 주인공이기에 그가 처한 세계는 우리 모두에게 불합리하고 생경한 악몽과 같이 재현된다.
마지막 시퀀스에 이르러 카메라는 루마의 뒷모습, 땅에 닿을 듯 처진 젖, 불편한 듯 절뚝이는 다리를 기울어진 각도에서 불안정하게 비추며 따라간다. 인간은 언제나처럼 후경화되어 있고, 인간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아 루마가 늘 가던 곳이 아닌 헛간으로 가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일상은 아니라는 사실만 알 수 있다. 어딘지 병색이 느껴지는 루마에게 인간은 밥을 가져다주고, 루마가 그것을 먹는 동안 관객은 안도하게 된다. 반전은 그 순간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루마에게 밀착해 있던 카메라가 거리를 떨어뜨리며 멀어져가더니 이내 루마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인간이 등장한다. 루마와 관객이 그 상황을 인지할 틈도 없이 총이 발사되고 루마는 눈을 감지 못하고 죽는다. 지금까지의 장면 중 루마가 처한 상황을 가장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바라보는 롱숏(long shot)이다. 이후 하이앵글숏(high angle shot)으로 죽은 루마의 얼굴을 비춘다. 특히 눈을 조명하던 카메라는 축사 내 햇살이 감싸안은 루마의 몸을 비추다가 갑자기 꺼지며 화면이 검은색으로 바뀐다(cut to black). 이후 루마의 죽음 시퀀스는 스매시 컷(smash cut)을 사용하여 어느덧 훌쩍 큰 송아지가 어디론가 뛰어가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눈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라는 말처럼 영화의 시각화는 비시각화된 것을 유추하게 한다. 시각과 더불어 촉발된 여러 감각은 인지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영화에서 자주 비추었던 루마의 눈, 혀, 얼룩무늬와 복슬복슬한 털로 뒤덮인 피부, 짚과 진흙이 묻은 발, 늘어진 젖, 제각당한 자리가 봉긋 솟아오른 머리 등의 육체적 특성이 우리에게 루마를 기억하게 하며, 그가 바라보던 것과 존재했던 공간을 특별하게 의미화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관객은 루마가 호소하는 이미지에 생리적으로 사로잡힌 채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외적 초점 화자와 내적 초점 화자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관객으로부터 루마를 떼어놓으며, 다 포착할 수 없지만 반드시 존재하는 타자의 정신성에 대해서 사유하게 만든다. 언어만으로 형용할 수 없는 비지성의 세계에서 다시 지성의 세계로 이동하면서, 화면 밖의 관객은 카메라를 보는 루마와 총을 든 인간 양자를 똑같은 거리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카메라가 죽은 루마의 몸과 눈을 비춘 뒤 생동하는 송아지로 장면을 바꾼 것은 관객에게 던지는 무언의 질문이다.
3. 동물 인격화와 자연주의적 시선
「군다」는 “돼지, 소, 닭의 평온한 일상은 인간을 대자연의 세계로 초대한다”라는 시놉시스로 소개된다. 이 소개만 보면 축산업의 동물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지만, 「군다」는 축산농가 동물들의 일상을 대자연의 품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평온하게’ 그려내는 다큐멘터리다. 동물농장 환경은 인간의 수익을 위한 인위적 환경이며, 그런 곳에서 동물들의 일상이란 언제 파괴될지 모르는 가변성을 띤다.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동물은 고기, 가죽, 뿔 등 신체의 일부를 통해 인간에게 필요한 물질의 원천으로서 동물 기계(animal machine)가 되었다. 돼지와 소와 닭은 태어난 지 수개월에서 수십 개월 내에 도살된다. 고기가 되기 위해 태어나고 있는 동물들은 다른 삶의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세상에 나온다. 그러한 동물은 자연을 박탈당한 동물이며 다른 동물과의 접촉과 교류도 차단된다. 도살이 유예되는 암소와 모돈 또한 외부와 차단된 채 지속적인 임신과 출산을 통해 새끼를 ‘납품하는’ 생을 산다. 이렇듯 축산업 시스템 속의 동물과 평온함은 선뜻 연결되지 않는데도, 이른바 동물권 영화인 「군다」는 짐짓 그러한 시도를 하고 있다.
「군다」는 자돈을 낳고 길러 떠나보내야 하는 모돈 ‘군다’를 중심에 둔 이야기이며, 인근의 다른 동물들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군다」의 차별화된 동물 재현 전략은 동물들 간에 어느 정도 독립성이 보장된 동물복지 농장을 배경으로 택하여 동물을 인격적으로 조명하는 한편으로 인간을 등장시키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다. 공장식 축산업에서 돼지는 불결한 환경에서 살아 있는 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어떤 권리도 가지지 못하고 이미 죽은 몸으로 대우받는다. 하지만 군다는 외부로 열린 축사에서 새끼들과 낮잠을 자고 들판에 나가 루팅(rooting)을 하고 진흙 목욕을 즐긴다. 카메라의 시선은 외부세계와 소통하며 생활을 영위하는 군다와 그 가족의 모습을 삶의 주체로 인격화한다. 동물 논의에서 인격화는 타자화와 대비를 이루며 종차별주의에서 벗어나 동물을 조에(zoe) 평등주의의 관점에서 동등하게 바라봄을 말한다.31) 이 다큐멘터리는 인간이 등장하지 않음으로써 평화로운 동물 재현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군다의 거처, 풀밭 한가운데에 열린 채 놓인 닭 케이지, 소들이 뛰어나오는 축사 등의 인위적 배치를 통해 인간의 흔적을 느낄 수 있으나,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 인간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한 상황에서 동물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일상을 산다.
이 영화는 롱테이크(long take) 활용과 천연색을 차단한 흑백 표현이 크게 두드러진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동물의 얼굴과 몸과 행동 하나하나를 주목하게 한다. 인트로 시퀀스에서 군다는 외부로 열린 축사의 잔뜩 깔린 짚 위에서 머리를 밖으로 드러낸 채 곤히 잔다. 군다의 잠은 새끼 세 마리가 등을 타고 내려오는 3분여의 시간 동안 지속되고, 군다는 겨우 잠에서 깨어나지만 1분의 시간이 더 흐른 뒤에야 다음 숏으로 넘어간다. 5분에 걸친 롱테이크 다음에는 잠이 깬 군다가 축사 안에서 새끼들과 시간을 보내는 시퀀스가 이어진다. 군다가 젖을 먹이다가 젖을 빠는 새끼들을 밀어내고 일어나는 숏, 새끼들끼리 엉겨 붙어 있는 숏, 돌아온 군다가 조금 약한 새끼를 돌봐주는가 싶더니 발로 밟는 숏, 군다가 카메라에 등을 보인 채 바깥을 바라보며 누워 있는 숏, 새끼들이 축사 안에서 붙어 자는 숏 등 축사 내부에서 일어나는 군다 일가의 생활이 조명된다. 인트로를 제외한 14분 30초는 총 18개의 숏으로 짧은 숏은 20초 정도, 조금 긴 숏은 1분 30초 정도다. 대부분의 숏들은 인트로의 롱테이크만큼 길게 지속되지는 않지만, 서사 이해에 필요한 정도의 시간을 초과하며 지속된다.
롱테이크는 서사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 이상을 숏에 부여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서사에 불가해한 지점들을 생성한다.32) 먼저, 롱테이크는 편집을 통한 인위적 시공간을 최대한 배제하기에 자연적 시간을 따르는 듯한 효과를 낳는다. 이로써 영화의 시공간은 덜 훼손되고 객관적 현실성이 보존된다. 연출된 현실이지만 관객들은 이 시공간을 객관적이라고 느끼게 되고, 주인공-인물에 대한 몰입도도 더욱 높아진다. 인트로 시퀀스의 낮잠부터 군다 일가의 한때는 그들이 현실에서 어떤 속박도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시간을 충분히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 동시에 그 장면들에서 군다의 행동 변화를 통한 미묘한 감정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즉 ‘군다가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거나 돌본다’고 요약하여 전달할 수 있는 서사 이외의 잉여적 행위들이 담겨 있다. 이러한 롱테이크는 동물 다큐멘터리의 장르 관습에서 흔히 보이는 내레이션을 삭제한다는 점에서 장르 관습을 위반하는데, 이는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동물의 시간을 최대한으로 보여주려는 시도로서 의의가 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같은 동물 다큐멘터리는 인간의 해설을 통해 동물의 서사를 자연화하지만, 사실 야생동물 보호구역 내에서 삶을 이어가는 동물들의 생태와 습성은 확장된 동물원과 다를 바 없다.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에서는 ‘인간에게 보이기 위한 것’으로서 스펙터클을 주조하기 위해 화면을 편집하고, 때로 동물의 행동을 유도하기 위해 사건을 일으킨다.
보송보송한 솜털을 가진 새끼 돼지의 모습, 젖을 내주지만 곧 몸을 일으켜 자리를 떠나버리거나 약한 새끼를 발로 누르는 듯한 군다의 제스처 등은 묘사 가능하지만 쉽게 해석하거나 어떤 단정을 내리기가 어렵다. 군다만이 알고 느끼는 새끼들과의 관계가 있으리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새끼들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여러 개의 숏을 이어 붙여 사건을 하나의 방향으로 만들어가는 일반적인 서사 편집 방법과 달리, 객관성을 확보한 롱테이크 숏은 해석의 여지를 열어두기에 관객은 스스로 관찰하고 해석하면서 군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마찬가지로 닭과 소의 야외 장면도 동물들의 얼굴과 신체를 세밀하게 경험하게 한다. 닭이 케이지에서 풀밭으로 나가 발로 땅을 천천히 딛고 걷는 모습이 클로즈업된 롱테이크는 느린 편집을 통해 발이 흙에 닿고 바람과 풀이 스치는 촉각까지 전달하려는 듯 느껴진다.
햇살, 바람, 비는 흑백의 화면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영화 초입부에서 잠자는 군다는 몸의 반은 햇살에 노출되고 반은 축사 내부에 걸쳐져 있는데, 흑백 영화의 특성상 햇살이 닿는 곳과 닿지 않는 곳의 대비가 뚜렷하고 디테일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총천연색이 제거되었기에 햇빛을 받은 어린 돼지들의 피부 위 솜털은 더욱 보송보송한 결이 살아나 보이며 움직임이 더욱 역동적으로 나타난다. 한편 「군다」의 야외 장면들은 롱테이크와 롱숏의 활용을 통해서 군다 일가가 자연과 일치되도록 보이게끔 한다. 이때 의도된 색채 탈각 효과가 드러난다. 구부러진 채 넘어진 큰 나무와 땅, 숲 등은 인간의 손이 닿기 전, 아주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었던 고대의 장소처럼 보이며, 이러한 대자연을 누리는 동물은 더는 가축이 아니라 대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로서 그 나름의 역사를 지닌 삶의 주체처럼 시각화된다. 어디선가 달려 나온 소들이 들판을 질주하는 행위, 질주하던 소들이 둘씩 짝지어 서서 서로의 피부를 돌봐주는 모습, 소의 얼굴 주변을 날아다니거나 얼굴에 붙는 쇠파리들의 움직임이 역동적으로 포착되며 낯선 느낌을 선사한다. 이는 흔히 수동적이라고 오인되는 ‘가축’의 행위자성을 가시화하며 동물들 사이의 세밀한 소통과 공생의 방식에 주목하는 것이다. 소들이 질주할 때 일어나는 모래나 흩날리는 눈 같은 것들은 컬러 영화였다면 시선을 끌기 어려울 것이다. 색이 없기에 움직임 하나하나의 디테일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지고, 간간이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빗소리, 돼지 소리, 파리 소리, 달리는 소리, 풀을 스치는 소리 등)는 화면을 더욱 풍부하게 구성한다.
여기서 인간의 존재는 결말부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짐칸이 딸린 트랙터와 함께 상기된다. 트랙터(인간)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영화의 장소가 버려진 공간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겠지만, 트랙터가 등장함으로써 흑백의 영화 공간이 형성한 평온함이 훼손된다.
인트로와 결말부는 수미상관의 구조를 이룬다. 인트로 시퀀스의 군다는 번성하여 일가를 이루었지만, 결말부에서 인간의 트랙터가 새끼들을 모조리 실어가버리기에 군다는 텅 빈 축사에 혼자 남게 된다. 인간이 직접 등장하여 새끼들을 트랙터에 태우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지만, 축사 앞에 트랙터가 머무는 동안 어린 돼지들의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외화면에 있던 군다가 등장하여 배회하는 모습은 새끼들을 찾아 헤매는 모습임을 암시한다. 군다는 축사 주변을 뛰어다니다 멈춘 채 새끼들과 함께 가던 들판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축사 안을 다시금 들여다보기도 한다. 군다의 배회는 10분간의 롱테이크로 지속되므로 관객은 군다의 내면에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두리번거림, 뜀,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기, 트랙터가 간 쪽을 쳐다보기, 축사 안을 들여다보기 등을 반복하는 군다의 모습은 우리가 보는 것의 정체를 더욱 깊이 생각하게 한다.
4. 인간이 소거된 동물세계
4.1. 재현성과 비재현성의 얽힘
재현은 예술의 영역에서 대상을 다시 드러내는 표현 행위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예술에서 재현은 특정한 대상(존재)이 고유한 동일성을 지니고 있으며, 재현 대상과 재현된 것 사이에는 유사성의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진다.33) 이러한 동일성과 유사성의 원리를 따라 특정한 장르적 관습도 가능해진다. 앞서 언급한 「도미니언」에서는 동물을 학살의 피해자로 규정하고 동물을 집단화한다. 인간 내레이션이 삽입된 동물 다큐멘터리에서 동물은 항상 행동하는 패턴대로, 인간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동질적인 집단으로 범주화된다. 반면 앞서 논의한 두 다큐멘터리는 동물을 바라보는 재현적 동일성의 원리를 해체하고 있다. 두 영화는 어떤 동질적인 동물 집단을 가정하는 대신 특정한 개별 동물에 초점을 맞추며 그동안 재현되지 못했던 동물의 감정이나 모성애나 자유 욕구 등에 주목한다. 물론 이러한 동물의 특성은 같은 포유류로서 인간과의 유사성 원리에 의해 재현되고 있지만, 인간의 것과는 다른 것으로 치부되어 지속적으로 소외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로 해설될 수는 있을지라도 기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33)
「카우」는 루마를 집단적인 피해자로 대상화하여 재현하지 않는다. 초점의 고정을 방해하는 화면의 심한 흔들림은 시선의 위계, 즉 바라보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주된 요소이자 전통적인 재현적 시선을 방해하는 움직임이다. 루마는 축산 현장의 당사자라는 존재성을 지니며 암소의 삶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재현의 대상인 한편, 인간세계를 낯설게 대상화하는 시선의 주체다. 루마가 새끼와 함께 있고, 젖을 먹이고, 풀밭에 누워 있는 등의 행위는 일차적인 욕망과 감각이기에 인간과 동질적인 코드로 표현되는 재현이지만, 루마가 젖을 짜며 반대편의 소를 바라볼 때나 풀밭에서 하늘을 바라볼 때의 시선이나 감정, 생각 등은 인간의 언어와 논리로 설명하기 어려운 비재현적인 성격을 지닌다. 루마는 피해 당사자로서 행위 주체성이 강하지만, 단지 인간의 생각을 투명하게 투영하는 대상이거나 포획된 주체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한다. 감독이 4년여에 걸쳐 촬영하면서 루마의 반복되는 루틴을 루마의 삶을 대표하는 장면으로 선택하고 나타내려고 한 것이 루마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산업동물로서의 루마가 처한 현실적 제약을 명료하게 각인시키는 사실주의적 입장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는 단순히 객관적 재현성에서 머물지 않으며, 다양한 비재현적인 요소들과의 얽힘을 통해 루마를 인간과 감각적으로 연결시킨다.
「군다」에서도 재현성과 비재현성이 엇비슷하게 나타난다. 이 다큐멘터리는 군다 일가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모돈으로서 군다의 특성에 주목한다. 이 영화는 자연주의적인 시선을 견지하고 있지만, 특히 모성애를 가진 포유류로서 군다의 행위자성에 동질성을 느낄 수 있도록 비중을 크게 할애한다. 그러나 동물의 얼굴과 표정과 소리와 제스처, 그리고 동물 종별 무리의 습성을 인간의 해설이나 편집 없이 오래 보도록 하는 롱테이크 촬영 방식에는 재현성과 비재현성의 요소가 뒤섞여 있다. 인간의 개입이 최소화된 형식은 인간의 의지와 관점대로 동물을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하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의 시작과 끝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장면들은 대부분 어떤 관점이 부재한 중립적 시선으로 보인다. 동물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일일이 다 알 수 없지만, 그간 주목되지 않았던 축산업 농장 동물들의 일상이 드러난다. 이 동물들은 무엇을 원하는지, 그들 간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전혀 알 수 없다. 무심해 보이는 표정들과 특별한 사건 없이 흐르는 시간들, 인간이 부재한 사이 그들만의 시간을 보내는 동물들의 이미지는 어떠한 해설이나 인간의 개입 없이 병렬된다. 요약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화면의 나열은 비재현적인 요소들이다.
확실히 「군다」는 「카우」에 비해 동물이 처한 어떤 현실을 모사하려고 하는지 재현적 의미가 한층 더 모호하다. 다만 시작부와 결말부에서 주목하고 있는 군다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닭과 소)의 모습을 나무나 들판, 즉 자연과 어우러진 존재로 시각화한 장면을 두고 유추하자면, 여기서 동물은 인간 문명의 내부 행위자가 아니라 그 외부를 향한 힘을 지닌 생기적 주체로 그려진다고 말할 수 있다. 흑백으로 처리된 화면은 동물의 습성을 인간 내면의 가치 개념으로서의 자연과 동일시하려는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따라서 「군다」의 동물들은 축산업 동물임에도 자연적 가치를 내포한 원시성의 표상으로 그려지며, 문명으로 대변되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역설적으로 우위를 점한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 또한 결말부에서 현실적 장면을 도입함으로써 관객의 환상을 깨뜨린다. 군다나 다른 동물들이 보여주었던 야외 장면은 사실 화면에서는 비가시화되었지만 매일 감금된 생활을 해야 하는 동물의 현실적 고통을 유예하는 일상으로 존중된 것이다. 결말부에서 보여주는 군다의 행위자성은 갑자기 사라진 새끼들을 찾는 모성적 행동과 혼란스러운 감정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결말은 인간의 필요와 의지대로 다시금 ‘자연’ 속에서 새끼를 낳고 기르는 일을 반복할 군다의 모습이 전혀 자연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모성애를 활용한 동물의 도구화일 뿐임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4.2. 동물 자체로 존재하는 ‘상상적’ 현실
인간과 인간의 언어가 배제된 동물 재현이 가능할까. 「플로우」는 그러한 서사적 시도와 상상력을 보여준다. 「플로우」는 영화를 찍고 기획한 주체가 인간이지만, 인간의 언어로 축소할 수 없는 비인간의 동적 세계를 담아낸 애니메이션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언어로 동물을 무언가 해석 가능한 대상으로 재현하지 않는 서사이며, 현실을 재현한다는 의미를 담지 않은 서사다. 디제시스 내에서 인간이 어떤 이유로 사라졌기에, 어떤 우위를 부여하거나 재현할 대상으로서 ‘인간적’ 현실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디제시스적 세계는 어떤 구체적인 장소성을 담지 않은 가상의 장소로, 어떤 것과 동질화된 세계나 대상의 우위를 모사한 재현의 세계를 벗어난다.
「카우」와 「군다」에서 인간은 동물에게 착취를 가하는 가해자로 또는 관리자로 후경화되다가 「플로우」에서는 인간이 없는 지구가 상상된다. 인간은 문명의 잔재만 남긴 채 사라진다. 곳곳에 물웅덩이와 나무에 걸린 배가 있고, 인간이 남긴 건축물이나 물건 등이 완전히 부식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모종의 이유(아마도 기후변화로 인한 대홍수 같은)로 인간이 사라진 지는 오래되지 않은 시점이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인간은 문명의 흔적으로만 상기된다. 인간 중심의 규범을 완전히 해체하는 조건으로서 인간 자체의 소멸이 전제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곧 지구의 멸망은 아닐뿐더러 오히려 다른 생물종으로 가득 찬 지구가 계속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인간의 힘이 지구의 지질과 지표면을 바꿀 정도가 되었다는 인류세 논의가 나온 지도 20년이 넘었다. 인류세는 다른 종에 대한 인간의 파괴적 영향력을 인간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음을 전제로 암울한 미래를 예견하는 위기의식이다. 하지만 이 또한 인간중심주의적 발상일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제출되고 있다. 와이즈먼(Alan Weisman)은 『인간 없는 세상』(The World Without Us)에서 과학적 지표를 바탕으로 인간 없는 미래의 풍요로운 지구를 상상한다. 또한 각종 동식물이 번성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자연의 행위자에 특정 지역을 그냥 내맡겨둔 수동적 재야생화(passive rewilding)나 인위적 개입 없이 내버려둔 땅이나 인간의 접근이 차단된 땅에서 자연이 복원되는 오토 리와일딩(auto-rewilding)의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다.34) 와이즈먼을 비롯한 여러 학자가 주목하듯이, 한국의 DMZ는 인간이 내버려둔 땅으로서 역설적이지만 재야생화에 성공한 사례다. DMZ에는 인간의 출입이 통제된 지 수십 년 만에 반달가슴곰, 스라소니, 사향노루, 고라니, 담비, 산양, 아무르표범, 머리 빨간 두루미, 재두루미 등 오갈 데 없던 온갖 생물종이 가득하게 되었다.35)
「플로우」는 바로 인간이 개입하지 않고 내버려둔 지구의 재야생화를 다룸으로써 인간의 자연에 대한 확장적(식민지적) 사고를 의미하는 탈야생화(de-wilding)에 맞서는 상상력을 펼친다. 이름 모를 꽃과 식물과 동물이 가득할 뿐 무엇을 명명하는 세계의 종식은 사물의 놀라운 행위자성과 생물의 움직임으로 부산하다. 동물들은 폐허가 된 지구에서 물이 차오르면 물을 피해 배를 타고, 배가 고프면 자연의 원리에 따라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는 것으로 보이지만, 위기의 상황에서 서로를 돕기도 한다. 동물들의 세계는 그야말로 살아남으려 애쓰는 생존 의지로 가득 찬 세계로, 역설적으로 다른 종에 대한 착취에 기반한 인간의 취약성과는 다른 생명력을 보여준다. 또한 시간이 선형적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인도의 소설가 고시(Amitav Ghosh)는 근대 서사 양식이 선형적 시간의 흐름이라는 근대적 관점을 차용하기에 근대성을 강화하는 협애성이 있다고 본다. 협애한 근대 서사와 달리 이야기의 시작과 끝도, 시간의 흐름도 알 수 없는 「플로우」의 서사는 자연의 순환적 시간만을 보여주므로 어떤 선과 악, 윤리와 비윤리도 없다.
인간 문명의 서사를 종식한 세계의 풍요로움을 보여주기에 「플로우」에서는 인간의 언어로 세계를 묘사하거나 재현할 필요가 없다. 또한 인간과 동물 간 경계를 구분하는 인간 의식의 생산이 멈추었기에 인간 주체성을 확립하거나 동물을 타자화하는 서사가 없다. 이러한 서사적 상황은 이분법을 작동시키는 인간의 의식을 양산하는 인류학적 기계가 멈춘 세계를 보여준다. 인간의 언어가 필요 없는 세계에 대한 이 이야기는 서사의 인과관계나 동물 간의 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형식적 특징이 있다. 인간 자체가 없기에 인간의 시선을 가정한 동물들의 주변적인 삶이 아니라 인간과 절연된 채 이루어지는 동물들의 삶이 자유롭게 펼쳐진다. 여러 동물의 행위자성이 드러나지만, 정확하게 어떠한 사건이 일어나는지 알기 어렵다. 예컨대 검은 고양이와 뱀잡이 수리는 먹이사슬 관계에 놓여 있지만 어떤 이유로 서로 돕는 관계가 형성되는데, 그 정확한 이유를 알 길이 없다. 이것은 흡사 인간의 시선에 포획되지 않은 야생동물의 세계를 모두 알지 못하고 또한 알지 못한 채 남겨지는 것이 더 좋은 것과 같다. 이렇게 「플로우」의 세계는 인간이 모르는 미지의 영역에 동물을 남겨둠으로써 인간의 시선이 미치지 않도록 한다. 서사의 인과관계나 동물 간의 관계성을 파악할 수 없는 서사의 형식은 인간이 해석의 주체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새로운 특징으로 주목할 만하다.
「플로우」에서는 현실을 모사한 작품과는 달리, 언젠가 있을 법하지만 현재로서는 완전히 환상적인 현실을 배경으로 삼아 인간으로부터 해방된 동물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동물의 현실을 새롭게 창조한다는 의미가 있다. 동물은 더는 인간사회에 구속되지 않기에 어떤 일방적인 피해자로 재현될 필요도 없고, 어떤 상징으로 재현되지도 않는다. 동물이 그 자체로 동물 문화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현실이 재창조된 것이다. 그간 무시되어온 동물의 능력과 특성이 드러나지만, 그것은 어떤 정보나 지식 전달의 차원이 아니라 동물의 행위 그 자체다.
그러나 인간이 사라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점이라면, 인위적으로 번식시킨 그 많은 가축이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이상한 지점이다. 이 텍스트는 그에 대해 다루지 않지만, 인간이 행위능력을 축소시킴으로써 길들여온 동물들은 자생력이 강한 고양이, 새, 개, 사슴, 바다생물보다 빠르게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가축과 인간이 함께 사라진 상황은 인간을 포함하여 인간이 인위적으로 번식시킨 동물 대부분이 사라진 이후에 다시금 야생 포유류, 조류, 파충류, 양서류 등이 풍부하게 번식할 수 있는 시작점이 제공되는 순환의 역설을 극대화한다. 결국 「플로우」는 인류세가 종식과 절멸의 서사라는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폐허 속에서 생성되는 재기와 풍성함의 스토리”36)이기도 함을 보여준다. 「플로우」는 인간의 언어 없이 동물의 행위만으로도 관객을 몰입시키는 서사적 효과를 입증하며, 인간이 배제된 세계 또한 가능하다는 서사를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으로 모든 생명과 삶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5. 맺음말
이 글은 최근 영상 서사에서 나타나는 동물 재현의 새로운 경향을 통해 비언어적 재현의 가능성을 탐색해보려는 시도다. 기존의 동물 서사는 동물을 인간의 정치적/사회적 알레고리나 상징으로 소비함으로써 동물의 실제적 삶을 간과해왔다. 이는 인간이 인간과 동물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는 인류학적 기계를 작동시켜 동물성을 배제하고 인간중심주의를 강화해온 결과다.
그러나 동물로의 전환 담론과 함께, 동물을 단순한 대상이 아닌 주체적 존재(삶의 주체 또는 행위 주체)로 인식하려는 시도가 활발해지고 있다. 특히 최근의 동물 서사는 지나친 의인화와 감정이입을 경계하고 동물의 고유한 삶과 행위자성을 포착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카우」와 「군다」, 그리고 애니메이션 「플로우」는 중요한 사례가 된다. 「카우」는 암소 루마의 시점에서 출산과 착취의 현실을 촉각적 시각성과 핸드헬드 카메라로 재현함으로써 관객이 동물과의 물리적·감각적 거리를 좁히고 루마의 존재성에 참여하도록 이끈다. 「군다」는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롱테이크 기법을 사용하여 축산 동물을 자연 속의 인격적 주체로 조명하며, 서사의 불확실성을 통해 동물의 삶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플로우」는 인간이 부재하는 지구를 배경으로 설정함으로써 인간중심적 시선과 인간의 언어 자체를 완전히 소거하고 동물들이 자율적인 행위자로서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들은 인간의 언어와 시선이 미치지 않는 동물의 세계를 재현함으로써 동물이 단순한 피해자나 상징이 아닌,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이는 재현성과 비재현성을 동시에 활용하며, 동물에 대한 인간의 인식론적 폭력을 깨뜨리고 인간과 동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 글은 최근 동물 영상 서사 중에서도 인간의 언어를 배제한 텍스트를 중심에 놓고 비언어적 재현의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이들 영화는 인간의 언어를 소거하고 동물의 몸짓과 소리에 집중함으로써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언어를 쓰지 않는 타자를 효과적으로 조명했다. 이것이 곧 언어를 매개로 하는 소설이나 다른 영상 서사보다 우위에 놓인 동물 담론을 제시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예술과 비언어예술을 막론하고 동물로의 전환에 걸맞은 새로운 형식의 창조로 동물을 새롭게 드러내려는 시도들이 있고, 이것의 효과는 모두 다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 1) 실제 지칭하는 대상이 지워진 것을 뜻하는 표현으로, 애덤스(Carol J. Adams)가 육식주의 문화 속 동물이 ‘고기’라는 단어 그리고 은유(metaphor)를 통해 부재 지시 대상이 되는 방식을 분석하고, 동물과 여성 그리고 인종주의를 교차하는 억압에 주목했다. Carol J. Adams, The Sexual Politics of Meats (London and New York: Continuum, 1990) 66~71면.
- 2) Giorgio Agamben, The Open: Man and Animal (Stanford, CA: Stanford UP, 2004) 36~37면.
- 3) 같은 책 26면.
- 4) Harriet Ritvo, “On the Animal Turn,” Daedalus 136.4 (Cambridge, MA: The MIT Press, 2007) 119면.
- 5) 가령 역사학 분야에서는 동물을 렌즈로 삼아 인간을 보려는 역사(animal-lens history)에서 동물의 삶 자체를 들여다보려는 역사(animal-themselves history)로의 변화를 동물사(animal history)라고 명명하며, 인간-동물 관계의 역사가 진지한 탐구 대상이 되고 있다(송충기 「19세기 독일 지역 동물보호협회의 초기 담론: 인간중심주의에서 인간과 동물 사이의 동화 관계로」, 『독일 연구』 50 (2022); 이종식 「동물사(Animal History)의 문제의식과 서사 전략: 영어권 연구 동향을 중심으로」, 『역사학보』 265 (2025) 506~507면). 또한 영미권의 인문지리학은 동물지리학을 하위 학제 범주로 두고 근대적 이분법에 도전하는 인간 너머 지리학(more-than-human geography)을 전개하고 있다(「최명애 「한국 인문지리학의 동물 전환을 위하여」, 『공간과 사회』 63 (2018) 18면).
- 6) Jacques Derrida and David Wills, “The Animal That Therefore I Am”(More to Follow), Critical Inquiry 28.2 (Chicago, IL: The U of Chicago P, 2002) 394~95면.
- 7) 존 쿳시 지음, 전세재 옮김 『동물로 산다는 것』(평사리, 2005) 16~20면.
- 8) 디네시 J. 와디웰 지음, 조꽃씨 옮김 『동물과의 전쟁』(두번째테제, 2025) 26~27면.
- 9) Domic O’key, Creaturely Forms in Contemporary Literature Narrating the War Against Animals (London: Bloomsbury Academic, 2022) 9면.
- 10) 같은 책 26~29면.
- 11) 같은 책 7면.
- 12) 데리다는 반려묘에게서 느낀 수치심의 경험을 사유하면서 인간이 보는 주체의 자리에서 벗어나 동물의 시선(gaze)을 감수할 수 있는지를, 그리고 단순 반응(reaction)과 상호성이 전제된 응답(response)을 구별하는 윤리적 태도를 재정립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Derrida and Wills, 앞의 글 372~82면.
- 13) 도나 해러웨이 지음, 황희선 옮김 『해러웨이 선언문』(책세상, 2019) 115~240면.
- 14) 와디웰, 앞의 책 307면.
- 15) 같은 책 324~25면.
- 16) Cow, Directed by Andrea Arnold, BBC Film·Doc Society·Halcyon Pictures, 2021.
- 17) Gunda, Directed by Victor Kossakovsky, Louverture Films·Sant & Usant, etc., 2020.
- 18) Flow, Directed by Gints Zilbalodis, Dream Well Studio·Sacrebleu Productions·Take Five, 2024.
- 19) 와디웰, 앞의 책 65면.
- 20) 쿳시, 앞의 책 89면.
- 21) 같은 책 66면.
- 22) 같은 책 89면.
- 23) 감각은 신체와 정신, 자신과 타자, 인간과 사물, 즉 모든 형태의 주체와 객체를 이어준다는 점에서 개인과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로, 눈·코·입·귀·혀·손·피부 등과 같은 감각기관을 경유한 외부적 자극의 포착이나 수용 행위를 말한다. 김문조 「감각과 사회: 시각 및 촉각을 중심으로」, 『영상문화』 18 (2011) 9면.
- 24) Adams, 앞의 책 21면.
- 25) 김민수 『환멸의 세계, 매혹의 서사: 한국 소설과 근대성』(거름, 2002) 189~90면.
- 26) 같은 책 191면.
- 27) 초점화 주체인 초점 화자(focalizer)는 담화 내 인물과 동일한 시각을 수용하는 내적 초점 화자와 담화 외부에 위치하는 외적 초점 화자로 구분된다. 내적 초점 화자와 카메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리고 내적 초점 화자가 주인공-인물과 같은 경우 영화는 내적 초점 화자의 시선에 제한을 받게 된다. 김종완 「서사학적 관점에서 본 영화의 초점화 양상 연구」,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14.2 (2014) 75~77면 참조.
- 28) 존 버거 지음, 박병수 옮김 『본다는 것의 의미』(동문선, 2000) 28~29면.
- 29) Laura U. Marks, The Skin of the Film: Intercultural Cinema, Embodiment, and the Senses (Durham: Duke UP, 2000) xi면.
- 30) 토마스 앨세서·말테 하게너 지음, 윤종욱 옮김 『영화이론 : 영화는 육체와 어떤 관계인가?』(커뮤니케이션북스, 2012) 230면.
- 31) 동물을 타자화하는 서술과 인격화하는 서술의 차이에 대해서는 송다금 「한국 서사 장르의 동물 담론 연구: 비판적 동물 연구의 관점을 중심으로」(연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23) 제2장 참조.
- 32) 정새별 「롱테이크의 미학적 기능 연구: <프리다의 그해 여름>을 중심으로」, 『스토리콘텐츠』(2025) 96면.
- 33) 국원호 「기형도 시의 비재현적 이미지 연구」(서강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6) 4~6면.
- 34) 최명애 「재야생화: 인류세의 자연보전을 위한 실험」, 『환경사회학연구 ECO』 25.1 (2021) 223~24면.
- 35) 앨런 와이즈먼 지음, 이한중 옮김 『인간 없는 세상』(알에이치코리아, 2007) 314~ 17면.
- 36) R.-C. Collard, J. Dempsey, & J. Sundberg, “A Manifesto for Abundant Futures,” Annals of the Association of American Geographers 105.2 (2015); E. H. Giraud, What Comes After Entanglement?: Activism, Anthropocentrism, and an Ethics of Exclusion (Durham, NC: Duke UP, 2019). 최명애, 앞의 글 247면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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