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밖 59호] [서평] 우울증과 같이 살아가기: 회복과 돌봄에 대해 던지는 질문들 앤 츠베트코비치 지음, 박미선·오수원 옮김 『우울: 공적 감정』(마티, 2025) / 이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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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베트코비치(Ann Cvetkovich)의 『우울: 공적 감정』(Depression: A Public Feeling, 2012)은 우울증을 개인의 병리학적 질환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정치적 함의를 지닌 사회적 정동의 경험으로 재해석한다. 그는 퀴어 페미니즘의 틀을 통해 우울증을 사회적 불평등, 자본주의적 피로, 젠더·섹슈얼리티의 규범적 억압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읽어내면서, 이러한 부정적 감정들 속에서 공동체적 연대의 핵심 자원을 발견하려 한다. 츠베트코비치는 이 책을 통해 ‘퍼블릭 필링스 프로젝트’(Public Feelings Project)―벌랜트(Lauren Berlant), 무뇨스(Jose Esteban Munoz), 세즈윅(Eve Kosofsky Sedgwick) 등과 함께한 학제적 연구 공동체 운동―의 정신을 계승한다. 이 프로젝트는 시카고·뉴욕·오스틴·토론토 등에서 아카이브를 통한 감정의 공유지(commons) 구축을 통해 감정과 정동을 공적 사유와 정치적 실천의 장으로 위치시키고, 사회적 소수자의 회복과 연대를 모색했다. 그는 『감정의 아카이브: 트라우마, 섹슈얼리티, 레즈비언의 공적 문화』(An Archive of Feelings: Trauma, Sexuality, and Lesbian Public Cultures, 2003)에서 트라우마·상실·우울의 기록이 집단적 역사와 지식의 형태이며, 문화적·정치적 아카이브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면서, 편지·자전적 서사·퀴어진(zines), 구술사가 전달하는 억압받는 공동체의 기록이 저항과 연대의 정치적 실천으로 기능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울: 공적 감정』은 이러한 이론적 기반 위에서 우울의 정동을 매개로 한 퀴어-페미니스트 돌봄과 회복의 정치학을 제기한다.

저자에 따르면 번아웃과 우울증은 개인의 질병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질서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성과주의와 자기관리의 압박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증상으로서의 정동이며, 자본주의 체제의 폭력을 드러내는 몸의 징후다. 이 책이 제기하는 도발적인 명제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병리적 징후로서의 정동이 사회적 저항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증상으로서의 우울증은 사회구조의 모순을 가시화하고, 새로운 인식과 관계를 열어주는 진단으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흔히 무기력한 저항 불능의 상태로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츠베트코비치는 우울로 인한 무력감에 시달리는 상태가 생산성 지상주의에 매몰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자발적 불복종이 시작되는 지점이라고 본다. 그는 우울을 통해 경험되는 느린 시간성이 자본의 논리에 따라 기능하기를 멈추는 사건이자 정동적 파업임을 강조한다. 우울은 일상의 속도를 늦추고, 무의미한 반복 속에 머무르게 만든다. 그러나 바로 그 정지와 지연의 상태 속에서 우리는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성취의 압박, 즉 효율성의 감옥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자기돌봄(self-care)은 우리의 몸과 정신을 옥죄어오는 생명정치를 거부하는 정치적 휴식으로 기능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자기돌봄과 회복의 의미를 재정의하는 과정은 츠베트코비치의 퀴어 페미니즘 존재론의 핵심이자 우울증을 공적 감정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정치적 휴식으로서의 자기돌봄은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 담론과 충돌하면서, 개인주의와 사적 돌봄과도 변별된다. 페미니스트적·퀴어적 자기돌봄은 관계적 자아에 기반한 공동체적 돌봄이자 고립과 소외를 거부하는 정치적·윤리적 실천이다. 따라서 자기돌봄은 타인과의 상호의존적 관계망 속에서 이루어지는 실천인 것이다. 버틀러(Judith Butler)의 관점을 빌리면, 존재가 자신의 몸에 내재한 타자성과 취약함을 인식하는 것, 나아가 그 취약성이 보편적 삶의 조건이라는 인식이 공동체 형성을 위한 첫걸음이 되는 것이다. 나의 우울이나 무력감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인식할 때, 그것이 감정적 연대의 기반이 된다. 나의 증상이 우리의 정동적 상태를 드러내는 인식론적 기초가 될 때, 우울의 감정이 공적 감정으로 확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동의 공동체는 파괴와 상처를 경험한 이후 감정적·윤리적 돌봄을 통해 새로운 삶을 벼려내기 위한 복원적 실천이며, 이러한 회복적 실천은 우울과 트라우마 그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증상을 버텨내는 힘으로 정의되고 있다. 츠베트코비치가 제시하는 회복적 실천은 최근 포스트비판 담론, 특히 세즈윅이 『감정에 가 닿기: 정동, 페다고지, 수행성』(Touching Feeling: Affect, Pedagogy, Performativity, 2003)에서 제시한 회복적 읽기(reparative reading)와 맞닿아 있다. 세즈윅은 권력과 억압의 작동을 폭로하는 편집증적 읽기(paranoid reading)에 집중하는 기존의 비판이론에서 벗어나 상처와 폭력을 직면하면서도 이를 견뎌내고 그 견딤을 통해 의미와 즐거움, 돌봄의 가능성을 찾는 윤리적 독서로서 회복적 읽기를 강조했다. 츠베트코비치는 회복적 자기돌봄을 통해 완전한 치유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과 새로운 윤리적·관계적 삶을 모색할 것을 촉구한다. 그가 보기에 회복은 불안·냉소·어두운 감정을 부정하거나 극복하려 하기보다, 이를 공유하고 기록하며 관계망 속에서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가능해진다. 츠베트코비치는 증상의 지속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정상성’의 회복이 아니라 상처와 함께, 피로를 견디면서, 감정의 무게를 지닌 채 살아가는 법을, 완전한 치유로 고통의 종결, 완결된 서사가 아닌 상처와 고통을 견뎌내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그렇게 지속 가능해진 삶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감정의 윤리는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이론을 다시 써가는 일이기도 하다. 프로이트는 트라우마를 의식의 보호막을 침투하고 들어가 자아의 면역체계와 통일성을 교란시키는 지극히 파괴적인 일회성 사건으로 정의한 바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정의는 구조적이고 일상화된 폭력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과 그의 극복할 수 없는 상처와 삶의 조건을 대변하지 못한다. 츠베트코비치의 회복적 실천 개념은 고통을 부정하거나 초월하려 하기보다 고통의 정동이 타자와 새로운 관계망을 구성하는 공동체적 돌봄과 창조적 행위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우울: 공적 감정』은 이러한 복원적 실천을 자전서사(memoir)와 이론적 논의를 병치하는 이중 구조의 하이브리드 장르를 통해 실험적으로 시도한다. 자전서사는 기존 비평계로부터 사회구조와 총체성에 대한 성찰에 이르지 못한다는 비판을 종종 받아왔는데, 저자는 자전서사와 이론이 결합된 글쓰기를 통해 감정·몸·지식이 분리되지 않는 수행적 글쓰기의 가능성을 탐색하면서, 자전서사의 정치성을 발굴한다. 그는 법과 제도의 형식적 정의의 외피를 우회하며 작동하는 자본주의 헤게모니의 마이크로 폭력과 그 증상들을 비판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보고, 느리고 파편화된 문체를 통해 우울증의 가족사와 같은 사적 경험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비판적 성찰과 사유를 길어내고자 한다. 이러한 혼종적 글쓰기는 페미니스트-퀴어적 존재론에 기반해 개인의 서사를 비평적 사유로 변환시키고, 감정과 이론의 경계를 허무는 복원적 읽기 실천의 한 범례가 된다.

츠베트코비치의 비망록은 아버지의 사회적·정치적 좌절과 조울증, 그리고 크로아티아계 이민자 집안이라는 가족적 유산과 저자 자신의 우울증 서사 간의 긴장관계를 제시하면서, 개인적 고통과 집단의 역사적 상흔 간의 접점을 보여주려 한다. 자서전적 글쓰기가 노예제, 원주민의 강제 이주, 디아스포라와 같은 역사를 사유할 수 있게 하는 신역사주의적 ‘마법의 순간’을 제공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자전서사의 시적이고 느슨한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산발적으로 제기되는 개인적 소회와 감정의 흔적을 체계적인 역사적 통찰로 엮어내는 과제가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 엄밀한 학문적 거리두기와 논증, 편집증적 읽기를 거부하는 실험성은 한편으로 이 책의 정치적 비전의 밀도를 희석하고 방향성을 모호하게 만든다. 츠베트코비치의 자전적 글쓰기는 감정과 이론·개인과 집단·역사와 현재를 잇는 복원적 시도를 보여주지만, 일상 경험의 감정적 진술이 분석적 접근을 대체하면서 감정의 구조를 해명하기보다 감정의 진술에 머물고, 그의 자전서사는 결국 또 다른 비평적 해석의 과제로 남아 있다.

츠베트코비치는 뜨개질, 요가, 일기 쓰기, 산책, 편지 쓰기, 작은 전시회, 샤워, 지인과의 사교 모임 등 일상적이고 소소한 창작 행위들을 신자유주의적 생산성의 논리에 저항하는 복원적 실천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미시적이고 사적인 행위들은 개인의 상처를 반(反)헤게모니적 정동으로 전환시키며, 감정의 회복과 공감의 확장을 통해 다른 삶의 리듬을 만들어 삶을 지탱시킬 수 있는 정치적 행위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러한 미시적 정치학은 자본주의에 대한 구체적 비판이나 실질적 정치 실천과의 연결지점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우울과 피로, 무력감 같은 부정적 정동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회복의 실천들은 ‘자기돌봄’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 담론과 겹쳐 읽히면서 체제 순응의 윤리로 변질될 위험이 있으며, 책이 제시하는 버텨내는 삶의 방식들은 얼마 전 유행하던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과 닮아 있다. 츠베트코비치의 작업은 완전한 치유나 사회구조의 급진적 변화가 불가능한 세상에서 감정과 정동의 언어로 정치적 삶을 다시 상상하려는 시도이며, 그런 제한된 시야는 이 책을 읽는 우리에게 이론적 긴장과 윤리적 과제를 함께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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