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철학자의 체계화된 사유에 의거해서 여러 작가의 소설을 읽는 일은 드물고, 또 위험하다. 작가마다, 심지어 작품마다 그 나름의 세계를 품고 있다면, 체계적이고도 연역적인 사유는 그 고유한 복수의 세계들 속으로 발을 들이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니 이런 염려는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의 방어적 편견에 불과할 수도 있겠다. 이른바 ‘작품세계’의 고유함이 과장되었을 가능성은 차지하고라도, 철학자의 사유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세계, 그 구석구석에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 시대의 한계에 대한 뚜렷한 자각, 새로운 가치를 향한 모험정신이 응축되어 있는 세계라면, 그러한 사유와 다기한 작품들의 대면에서 우리는 동일한 의미의 반복이 아니라 오히려 예상치 못한 것의 출현을 기대해봄 직하다. 아마추어의 판단이지만, 스피노자는 실로 그런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철학자가 아닌가 한다.
『스피노자로 영국 소설 읽기: 신, 정서, 픽션』은 그 야심찬 제목이 명시적으로 가리키는 것보다 더욱 야심찬 기획을 담고 있다. ‘스피노자로’에서 우리는 스피노자 개념들의 비평적 활용을 떠올리게 되고, 실제로 지면의 상당 부분은 그러한 작업에 할애된다. 그러나 저자는 책에서 다루는 일곱 편의 소설 못지않게 스피노자 철학 자체를 다시 읽어내고자 한다. 물론 그의 철학 전체는 아니고, 저자가 “스피노자 철학과 영국 소설을 연결해 읽는 주요 연결 고리”로 거론한 세 가지─“존재의 일의성” “욕망과 정서의 윤리” “상상 역량의 덕(훌륭함)”1)─중 세 번째와 관련해서인데, 여기서 저자는 스피노자 미학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작품 읽기를 통해 구체화하려 한다. 책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인 만큼, 이 글에서도 나중에 상상에 관련된 저자의 논의를 조금 자세히 살펴보려 한다.
위에 열거된 세 “연결 고리”는 책의 부제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책의 구성도 그것을 따른다. 총론에 해당하는 1장을 지나 1부에서 저자는 “‘신 즉 자연’: 스피노자와 존재의 일의성” 제하에 디포(Daniel Defoe)의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 셸리(Mary Shelley)의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브론테(Emily Brontë)의 『워더링 하이츠』(Wuthering Heights) 세 편의 소설을 ‘신=자연’ 또는 ‘신의 지적 사랑’에 대한 스피노자의 사유를 경유하여 다시 읽는다. 『로빈슨 크루소』에서는 상충하는 두 가지의 신 개념, 즉 한편으로 로빈슨의 입을 통해 표현되는 기독교적인 ‘섭리의 신’ 개념과, 다른 한편으로 그를 둘러싼 자연, 그 속의 그의 고군분투, 그리고 그가 “자신의 실존 역량(연장속성)과 이해 역량(사유 속성)을 늘려 가는 과정”(84면) 등을 통해 암시되는 스피노자적인 ‘신 즉 자연’의 개념이 서사에 ‘이중 리듬’을 부여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프랑켄슈타인』과 관련해서도 이중성이 부각되는데, 신의 역할을 하는 프랑켄슈타인이 창조론 또는 (데카르트의 기계론에 연결되는) ‘제작론’의 관점을 견지한다면 그의 ‘피조물’(Creature)은 프랑켄슈타인의 예측을 벗어나 자기 나름의 변용 능력을 드러내는 “스피노자적 개체”(99면)의 특징을 지닌다는 것이다. 『워더링 하이츠』의 논의에서는 캐서린의 사랑 내부에 대립이 설정된다. 그에 따르면 에드거에 대한 사랑은 수동적 정념으로서의 이성애적 사랑이지만,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그리고 캐서린에 대한 그의 사랑)은 수동적 기쁨과는 상관없고 어떤 필연성을 지닌 것, 그리하여 스피노자의 『윤리학』 5부에서 언급되는 ‘신의 사랑’에 근접한 것이다. 이처럼 의인화될 수 없는 스피노자의 신(즉 자연)의 관념을 통해 서사와 인물을 재해석하는 것은 소설 비평에 흔치 않은 신선하고 과감한 시도라 하겠다. 다만 로빈슨 크루소의 자연이나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이 지닌 어떤 특징들에 대한 설명이 꼭 스피노자의 개념들을 요청하는가, 아니면 스피노자에 기댄 저자의 설명이 다른 용어들로 ‘번역’될 수도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은 남는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관계를 (얼마간 유보를 달아) ‘신의 사랑’으로 설명하는 것은 더 독특하고 흥미로운 시도인데, 신(즉 자연)의 자기에 대한 사랑 및 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동일시되는 “신에 대한 정신의 지적 사랑”(『윤리학』 5부 정리 36 따름정리)이 지닌 의미를 두고는 논란이 있을 법하다.
2부는 “스피노자 윤리학: 욕망과 정서의 윤리”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코나투스(conatus), 정서, 정서 모방, 정념, 욕망, 능동적 기쁨, 명예심(gloria), 명예욕(ambitio), 갈망, 연민, 덕(훌륭함), 자기만족감 등 스피노자의 정서 이론에 등장하는 개념들을 광범위하게 활용하여 디포의 『록사나』(Roxana), 그리고 앞서 한 번 살핀 바 있는 『프랑켄슈타인』 및 『워더링 하이츠』의 인물과 서사를 분석한다. 정서 이론에서 인간 본성과 인간관계에 대한 스피노자의 현실주의적 통찰은 가장 빛나고, 동시에 관념주의와 도덕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의식은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 따라서 그의 정서 이론은 ‘스피노자로 영국 소설 읽기’에 가장 무난한 또는 적당한 개념적 무기를 제공한다. 특히 『록사나』를 다루는 5장은 깔끔한 스피노자주의 독법을 선보인다. 다음과 같은 진술이 전형적이다. “록사나가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부덕한 인물인 건, 그녀의 이 모든 행보가 부적합한 관념으로 점철된 기존의 억압적 성 이데올로기뿐 아니라 수동적 정념과 자기혐오, 그리고 자신과 타인에 대한 과도한 통제 욕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163면). 이 대목에서 저자는 여성의 통제 의지를 높이 사주는 페미니즘 비평 경향과 거리를 두면서, 록사나의 강박적 통제 의지가 왜 이데올로기뿐 아니라 ‘욕망과 정서의 윤리’의 층위에서 문제인지를 자상하고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마지막 3부의 제목은 “상상 역량의 덕(훌륭함): 스피노자 미학과 문학 활용법”이다. 여기서도 세 편의 소설이 논의 대상이 되는데, 스위프트(Jonathan Swift)의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 인치볼드(Elizabeth Inchbald)의 『단순한 이야기』(A Simple Story), 그리고 오스틴(Jane Austen)의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이 그것이다. 『걸리버 여행기』를 다루는 장에서 저자는 흔히 이성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후이넘의 형상화를 스피노자의 이신론(理神論) 또는 무신론에 대한 비판으로 보는 일부 비평을 소개한 뒤에 후이넘과 스피노자의 차이를 조목조목 따진다. 후이넘의 세계가 실은 야후의 타자화와 억압 위에 세워졌고 따라서 선악 개념을 은밀히 내포하고 있으며 생성과 변화, 상상과 픽션을 결여하고 있는 반면, 스피노자는 선을 옹호하는 대신 선악 이분법 자체를 부적절한 관념으로 간주하고 코나투스 또는 욕망에 기초한 덕(훌륭함), 즉 역량의 증대를 윤리의 핵심으로 삼는데, 그 역량에는 ‘적합한 관념으로서의 상상’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단순한 이야기』는 스피노자가 말하는 ‘공통 관념’의 견지에서 논의된다. 공통 관념은 정념과 부적합한 관념으로부터 적합한 관념과 능동적 기쁨으로 나아가는 통로로서, 『단순한 이야기』의 주인공 남녀는 사랑의 정념으로부터 ‘덜 보편적인 공통 관념’(즉 서로에게 공통적이면서도 독특한 성질에 대한 이해)을 형성했으나 “둘 사이에 존재하는 불합치의 관계에 대한 이해 역량이라 할 ‘더 보편적인 공통 관념’”(289면)을 형성하는 데는 실패하여 슬픔의 정념을 초래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오만과 편견』의 논의에서도 ‘공통 관념’은 중요하게 등장하는데, 이 경우에는 특히 그 개념이 함축하는 ‘배움’에 강조점이 놓인다.
저자의 구도에서 공통 관념과 ‘적합한 관념으로서의 상상’(또는 적합한 상상) 및 픽션의 역량은 정서와 이성을 아우르는 스피노자 미학을 가능케 하는 요인들로서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상상 역량의 덕(훌륭함), 혹은 지성의 질서에 따라 이루어지는 ‘적합한 관념으로서의 상상’과 밀접히 연관된 개념이 스피노자의 공통 관념이다”(338~39면). 저자는 공통 관념에 대해서는 스피노자에 더해 들뢰즈(Gilles Deleuze)의 논의를, ‘적합한 관념으로서의 상상’에 대해서는 국내 철학자 박기순의 논의를 적극적으로 참조한다. 이들은 따분한 주석가가 아니고, 스피노자의 개념들을 어느 한 방향으로 밀어붙여 그가 표명하지 않았거나 구체화하지 않은 생각이나 관념을 새로이 구성해내는 진정한 의미의 해석자들이다. 그런 만큼 이들의 해석은 논쟁의 여지를 내포한다. 본 서평 책의 저자가 스피노자의 공통 관념을 “계속 생성 변화하는 개체들 간의 변화하는 관계가 만들어 내는 제3의 무엇을 염두에 두는 생성의 개념”(278면)으로 규정할 때, 저자는 들뢰즈에 대단히 밀착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너무 밀착된 건 아닐까? 공통 관념은 변용의 인과관계에 있는 둘 이상의 신체에 공통된, 그리고 그것들에만 고유한 어떤 성질(property)의 관념일 수도 있고, “모든 것에 공통된 것”(『윤리학』 2부 정리 37)의 관념, “모든 신체가 합치하는” 지점의 관념, 따라서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어떤 관념이나 개념”(2부 정리 38 따름정리)일 수도 있다. 흔히 언급되는 예로, 연장(extension)의 관념은 후자에 속할 것이다. ‘생성’에 관한 위 저자의 말은 두 번째 경우(이른바 ‘더 보편적인 공통 관념’)에도 적용될까, 아니면 애초에 그 말은 그것을 배제하고 하는 말일까?
‘적합한 관념으로서의 상상’은 더 많은 논란거리를 내포한다. 저자와 박기순이 공히 알고 있듯이, 『윤리학』은 적어도 명시적으로는 그러한 상상의 개념을 지지하지 않는다. (박기순은 『지성개선론』과 『신학정치론』을 『윤리학』과 함께 검토한다.) 상상 자체가 아니라 상상의 대상이 현존하지 않음을 모르는 상상이 오류라는 주장은 있지만, 이것이 그것을 아는 상상(현실과 혼동되지 않는 상상)은 언제나 적합하다(즉 실재에 관한 참된 인식을 담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가령 귀신은 없다고 믿는 사람이 귀신 놀이를 할 때, 그 귀신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부적합한 것은 아니지만 또 그 자체로 적합한 것도 아니다. 스피노자는 기억과 같이 신체 변용의 질서와 연쇄에 따라 일어나는 관념과 “지성의 질서에 따라 일어나는”, 따라서 “모든 인간에게서 동일한”(『윤리학』 2장 정리 18 주석) 관념을 뚜렷이 구분하며 후자만을 적합한 것으로 본다. 물론 서평 책 저자의 의도는 바로 이렇게 벌어져 있는 정서와 이성 사이를 하나로 이어서 스피노자의 세계 안에 문학이 들어설 자리를, 또는 문학 안에 스피노자가 들어설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 시도는 스피노자 연구의 맥락에서 크나큰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지성의 질서에 따라 일어나는” 상상이 과연 가능할까? 자신의 허구성에 대한 의식은 출발점에 불과하며, 결코 그런 상상의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실재에 관한 참된 앎을 담고 있어야 하고, 그 앎은 어떤 보편성을 지녀야 하지만, 문학과 예술의 경우 그 보편성이 과학적 가설의 보편성과는 다른 어떤 것, 실로 ‘1종 인식’으로서의 상상이 지닌 개별성 또는 독특성이 보존되는 동시에 ‘지성’의 보편성이 빛을 발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문학과 예술에 관련된 것으로서 ‘적합한 관념으로서의 상상’은 이렇듯 심오한 아포리아를 내포한다. 책의 저자도 이 점을 잘 알고 있겠지만, 아포리아 자체의 궁구보다는 그것의 해소에 더 힘을 쏟은 듯하다.
책의 서두에 저자는 이렇게 써놓았다. “스피노자의 『윤리학』 및 그의 다른 저서들과 관련 글을 본격적으로 읽으면서 문학과 철학과 수행(영성) 사이의 어떤 지점, 내가 머무르던 작은 모퉁이 공간이 광활하지만 구체적인 사유의 대지로 활달하게 펼쳐지는 느낌이었다”(6~7면). ‘수행’이라는 단어에 눈이 꽂힌다. 수행하는 사람, 스피노자도 수행 길로 삼는 사람이 동학 중에 있음에 고마운 마음이 든다.
- 1) 이혜수 『스피노자로 영국 소설 읽기: 신, 정서, 픽션』(그린비, 2024) 11면. 앞으로 이 책의 인용은 괄호 안에 면수만 표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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