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에서 동시대 여성작가들의 작품들이 국가와 장르를 막론하고 활발하게 번역·소개되는 문화가 반갑던 차였다. 서로 다른 언어로 쓰였지만 그 언어들을 살피다 보면 “내 시대의 여성이라는 걸 / 알기에 충분하다”(enough to let me know / she’s a woman of my time)던 리치(Adrienne Rich)의 시구처럼 동시대의 여성의제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랭킨(Claudia Rankine)의 『그냥 우리: 미국의 대화』(Just Us: An American Conversation, 이하 『그냥 우리』)가 번역된다고 들었을 때, 그것도 북펀드를 통해 출판 예정이라고 들었을 때 다소 놀랐음을 고백해야겠다. 흑인 페미니스트 시인의 에세이 작품이 번역된다니, 그렇게나 수요가 있다고? “한국에서는 인종 문제를 다룬 책이 힘들다는 속설이 있습니다”1)는 출판사 관계자들 사이의 통념도 한몫했을 텐데, 그럼에도 이 책의 발간에 고개를 끄덕였던 것은 수요보다는 필요의 문제를 통감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에서 인종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지배적이었을 것이므로. 어딜 가나 사회 분열 이야기를 하고, 어딜 가나 통합의 필요를 이야기하는 시절이기에 유색인종 여성이 경험한 갖가지 차별의 언어를 소수자의 입장에서 풀어 쓰려는 랭킨의 시도가 한국사회에 필요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의 번역·출간은 한국사회에 개입하는 한 방식이며, 그런 점에서 의미 있는 기획이라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책의 내용을 보면 그 출간 의의가 더 선명해진다. 가장 단순하게 소개하자면 이 책은 그 부제에서 알 수 있듯, 흑인 여성이 미국사회에서 맞닥뜨린 갖가지 대화들의 기록물인데, 이 기록들은 많은 경우 사적인 마주침에서 시작되고 더러는 결코 답할 수 없는 질문으로, 따라서 해결되지 않는 찝찝함을 안고 끝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사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모든 면에 역사와 고발이 흘러넘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랭킨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흑인 여성으로(단, 이때 흑인 여성은 전문직을 가진 중산층 여성이자 백인 남성과 결혼하여 자식을 둔 헤테로 여성 등의 여러 교차적 정체성을 지녔음을, 랭킨 스스로도 자신을 횡단하는 여러 정체성의 면면을 글 전체에서 섬세하게 녹여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살아온 자신의 삶이 흑인 공동체의 역사적 경험과 필연적으로 교차하고 공명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기록의 개인성을 넘어선다.
따라서 이 책은 랭킨의 서정적 에세이이기도 하면서 ‘우리’의 기록, 즉 공적 기록이다. 랭킨이 제사로 삼은 프라이어(Richard Pryor)의 말이 이 기록의 본질을 위트 있게 제시하면서 이 책의 제목이 되기도 했는데, 그는 자신의 코미디 앨범 「…그게 내가 한 말인가요?」(…Is It Something I Said?)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정의(justice)를 찾겠다고 저 밑까지 들어가 봤자 결국 발견하는 건 우리(just us)죠.”2) 이 스탠드업 코미디는 프라이어가 소득세 탈루 혐의로 재판정에 섰을 때 자신의 무고를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흑인에게 불리하게 작동하는 사법 시스템을 유머러스하게 고발하고자 하는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정의(justice)를 수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미국의 사법 시스템이 실제로는 모든 맥락을 무시하고 흑인에게만 가혹한 형량을 선고하는 바람에 교도소에는 그냥 우리(just us)만 득시글하다는 것을 표현한 것인데, 이 문장이 책의 제사에 쓰였다는 것, 게다가 제목이 되었다는 것은, 한 흑인 여성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고투가 사법 시스템의 불평등에 대한 프라이어의 고발과 맞닿아 있다는 것일 테다. 이는 그 유명한 휴즈(Langston Hughes)의 시 「나 역시」(“I, Too”)와도 공명한다. 휴즈가 “나 역시 미국이지요”(I, too, am America)라고 말할 때 이 짧고도 단호한 시구는 분리정책으로 인해 백인들과 식사조차 한자리에서 하지 못했던 흑인을 평등한 미국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단호하게 주장하면서 흑인을 대하는 미국의 구조적 불평등을 직시하는 것이 곧 미국을 직시하는 것임을 동시에 역설한다. 그러니 랭킨이 이 책에서 하고 있는 작업은 동시대 ‘우리’의 이야기를 담으면서 프라이어의 ‘우리’와 휴즈의 ‘우리’를 함께 소환하는, 동시대와 과거를 대화시키며 미래를 가늠해보려는 작업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이런 정치적 의의가 개인의 존재론적 고통을 경유해 획득된다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이자 슬픔이 아닐지. 「윤리적 외로움」이라는 장에서 랭킨은 가깝게 지내온 백인 동성 친구와 함께 연극 「페어뷰」(Fairview)를 보러 갔던 경험에 대해 쓰는데, 흑인 작가가 쓰고 연출하며 흑인 배우들이 상연하는 이 연극은 막바지에 이르러 백인들만을 무대 위로 불러올린다. 흑인 배우의 지시에 어떤 백인은 투덜대며 무대로 오르고, 어떤 백인은 묵묵히 지시를 따르는 동안 랭킨의 친구는 끝까지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평소 “백인성을 생각하는 데 관심이 있”(247면)던 친구와 함께 “인종을 생각하는 데 관심이 있”(같은 면)는 「페어뷰」를 관극하고자 했던 이 경험을 기록하며 랭킨은 연극에 대한 다른 코멘트 없이 오로지 이 친구에 대해서만 거의 15면에 걸쳐 쓴다.
그들끼리의 대화를 상상하다 보면―마치 노예제가 대량 투옥과 제도적 불평등을 통해 21세기에 맞게 변형되고 적응한 일이 없었던 것처럼―나는 노예제를 포함한 모든 것을 부여잡고 손에서 놓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내가 가진 압도적인, 그, 그, 그, 맞다, 그 윤리적 외로움 때문이다. 나는 그가 모든 것을 털어놓는 친구가 아니다. 나는 그가 모든 것을 공유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아니다―그가 자신의 백인성을 내맡길 정도로 신뢰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내 생각과 달리,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257~61면)
여기서 랭킨이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한 “윤리적 외로움”은 스토퍼(Jill Stauffet)의 『윤리적 외로움』(Ethical Loneliness)에서 가져온 것으로 랭킨은 이를 “부당한 침해를 당한 사람이, 혹은 박해받는 집단의 일원이 인류에게 혹은 타인의 삶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사람에게 버림받을 때 느끼는 고립감”(255면)으로 설명한다. 흑인을 합법적으로 박해하던 노예제가 그 피부만 바꾸어 갖가지 차별의 양태로 드러나는 것을 오직 나만이 “손에서 놓지 못하는” 기분. 오래도록 친구라 여겨왔던 이를 “그들”(여기서 “그들”은 백인이다)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 “윤리적 외로움”을 고백하는 것은 깊은 존재론적 슬픔이 아닐 수 없다.
랭킨은 곧 5면에 걸쳐서 “백인 동성 친구”의 진심 어린 글을 공유하는데, 이 글에서 친구는 어떤 답을 주기보다는 자신의 역사를 짚어가면서 자신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일어서지 않았던 그 행동의 기저에 어떤 마음들이 웅성거렸는지를 차근차근 써 내려간다. 친구의 글은 전적으로 랭킨의 처지에 서보려는 적극적인 독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도 백인으로서 일생 동안 느껴왔던 지긋지긋한 백인성과 정면으로 마주쳤을 때의 갈등과 숱한 고민을 비교적 진심을 다해 전달하지만 랭킨 스스로는 그 글에 긴 코멘트를 달지 않는다. 그는 우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267면)고 쓰고, 그 글 자체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 채, “내가 아는 사실은 언제든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이다.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 때라도, 나는 언제든 질문을 던질 수 있다”(269면)며 이야기를 마친다.
사실 이 부분이 이 책에서 거의 유일하게 희망을 드러내는 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에는 “내가 내 반응을 기계처럼 측정하며 스스로 수위를 조절하고 있는 것 같다”(15면)며 흑인의 일상에 스미는 체념을 그리거나, 상담사에게 흑인 여성 앞에 멋대로 끼어든 백인 남성과의 일화에 대해 토로하자 “랭킨 씨는 그 남자한테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이잖아요”(35면)라는 말을 듣고 “내가 그에게 의도적인 모욕 대상이 아니라 아무 존재감도 없는 사람인 편이 더 나은 걸까?”(35면)라고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질 때와 같은, 대안 없는 순간들에 대한 기록이 만연하다. 랭킨의 친구가 참석한 교내 다양성 워크숍의 예에서는 흑인 여성의 얼굴을 재현한 조각상을 두고 “원숭이처럼 생겼다”고 말한 학생을 “기꺼이 선해하”(91면)려 했던 흑인 교직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랭킨의 친구인 백인 교직원이 “학생의 말이 농담일 수는 있어도 그것이 인종 차별적인 농담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음을 지적”(91면)하고 나서야 하나둘씩 학생의 발언이 잘못되었다는 의견이 모이기 시작한다. 다름 아닌, 무려 다양성 워크숍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인종계층이 인종 차별주의에 대해 이야기를 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그런 대화 자체를 안 하지”(81면)라는 답을 듣기도 하고, 트럼프(Donald J. Trump)가 클린턴(Hillary Clinton)을 누르고 당선된 2016년 대선이 끝난 어느 날 전원 민주당 지지자로 구성된 저녁식사 자리에서 인종 차별주의에 대한 랭킨의 말이 고요하게 “씹힌”(195면) 경험 같은 것들이 이 책에 수도 없이 소개된다. 그러니 명쾌한 답을 들을 수 없을지언정 ‘왜 그랬어?’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곧 타인을 이해하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고 언제든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이 이 책의 유일한 희망이자 유일한 답이기도 하다.
이러한 태도를 포함하여 이 책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한 가지는, 독자로서는 방어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부분인데, 매 부분마다 입증 가능한 데이터가 주석처리 되어 있고 그 사실에 근거한 분노와 체념과 의문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작가가 묵묵히 자신의 느낌과 경험을 풀어쓰되 특정한 주장을 펼치진 않는다는 점이다. 어쩌면 방어적으로 보일 이 태도는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 얼마나 많은 것과 맞서야 했는지를 역으로 증명한다. 책에 실린 에세이 전편에 걸쳐서 작가는 절대로 보편성을 상정하지 않는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편향되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절대적으로 흑인의 입장에서 쓰인 이 글은 하지만 바로 그 편향성으로 인해 의미를 획득한다. 세상이 이토록 편향되어 있고, 그 세상의 편향성에 대해 쓰려는 이가 중립적인 위치를 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웅변하는 셈이다. 랭킨은 다만 디킨슨(Emily Dickinson)의 시를 빌려 자신의 기록이 갖는 의미를 부연한다. 전문을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고통이 있다―너무도 절대적인―
본질을 집어삼키는 고통이―
그 심연을 황홀경으로 덮어―
기억이 에두르고―건너고―밟을 수 있게―
마치 실신한 이가―
안전하게 지나가듯―눈을 뜨고라면―
뼛조각 하나하나 무너뜨렸을 곳에서―
There is a pain―so utter―
It swallows substance up―
Then covers the Abyss with Trance―
So Memory can step
Around―across―upon it―
As one within a Swoon―
Goes safely―where an open eye―
Would drop Him―Bone by Bone―3)
고통을 건너가는 방법으로만 읽어왔던 디킨슨의 이 시를 랭킨의 책에서 만났을 때 우리는 오히려 온전하게 건너지 못하는 고통의 깊이에 대해 깨닫는다. 이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 『그냥 우리』의 의의 중 하나다. 『그냥 우리』는 단순히 미국의 인종 이야기가 아니라, 알면서도 누락하거나 회피해왔던 소수자들의 경험과 고통을 마주하고 그 고통을 들여다보는 일이 지금 한국사회에서 필요한 일임을 역설한다.
- 1)朴善雅 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시간강사리시올 플레이타임 (@luciolesptime), “한국에서는 인종 문제를 다룬 책이 힘들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X, (2025년 7월 14일). https://x.com/luciolesptime/status/1944644474027573688?s=46&t=VkQWatuCHu6AUcxU1wQwGA.
- 2) 클로디아 랭킨 지음, 양미래 옮김 『그냥 우리: 미국의 대화』(플레이타임, 2025) 5면. 앞으로 이 책의 인용은 괄호 안에 면수만 표기.
- 3) Emily Dickinson, The Complete Poems of Emily Dickinson, ed. Thomas H. Johnson (Boston: Little, Brown and Company, 1976) 29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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