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밖 59호] [논문] 경계 위의 기쁨: 정동 이론으로 블레이크의 기쁨 읽기 / 유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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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윌리엄 블레이크와 기쁨

막디시(Saree Makdisi)는 『윌리엄 블레이크와 1790년대의 불가능의 역사』(William Blake and the Impossible History of the 1790s)에서 기쁨이 블레이크의 작품을 관통하는 중심 정서임에도 불구하고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기껏해야 “초역사적 욕구”(transhistorical drives) 또는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열정”(abstract ethereal passions) 정도로 폄하되어왔다고 지적한다.1) 이러한 비평적 맹점은 비단 블레이크(William Blake) 비평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신역사주의적 이데올로기 비평이 주도하던 20세기 중후반 낭만주의 비평 전반이 공유하던 시각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 비평의 관점에서 낭만주의는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희생하면서 주체의 자율성에 대한 신화를 유포한 것으로 간주되며, 감정 역시 이 허구적 주체의 산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별도의 비평적 분석 대상이 되지 못했다. 한편 몸의 물질성과 신체적 실천에 주목했던 페미니즘 비평 또한 같은 시기 비평적 분위기와 맞물리며 신체의 역동성 자체보다는 담론이 신체를 구성하는 방식에 더 주목하는 경향을 보였다.2)

물론 막디시의 저서가 출간되던 시기 전후로 이데올로기 비평의 한계를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하려는 일련의 비평적 시도들이 이미 등장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세즈윅(Eve Sedgwick)은 “의심의 해석학”에 기반한 독해 방식의 폐쇄성을 비판하며, “회복적 독서”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한편 마수미(Brian Massumi)는 “정동(affect)은 의식적이지도 않고 최초의 심급에서는 정신 속에 있지도 않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정동이 정신적·사회적·이데올로기적 구조로부터 자율적인 차원을 가진다고 본다.3) 그는 정동을 “활력” “살아 있음의 감각” “변화 가능성” 그리고 “자유”와 동일시하면서, 모든 것이 담론 안에서 구성된다고 보는 사회구성주의적 관점의 한계를 지적한다.4) 마수미의 이론은 당시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전면적으로 일어났던 “정동적 전환”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을 뿐 아니라, 이데올로기 중심의 해석 모델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유 가능성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5)

이후 정동 이론은 파브렛(Mary Favret)의 지적처럼 낭만주의의 미학과 역사 개념을 재구성하는 데 일조했으며, 최근 들어 『팔그레이브 정동 이론과 문학비평 연구』(Palgrave Studies in Affect Theory and Literary Criticism)라는 제목의 연구 시리즈가 출간될 정도로 문학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6) 블레이크 비평에서도 정동 이론이 제시한 다양한 문제의식, 즉 인지와 감정의 상관관계, 감정의 대상과 효과에 대한 논의, 육체적이고 자율적인 반응과 심층적인 정서 상태 사이의 관계 등을 포괄하는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파우(Thomas Pfau)의 『낭만주의적 무드: 편집증, 트라우마, 그리고 우울증』(Romantic Moods: Paranoia, Trauma, and Melancholy, 1790-1840)은 낭만주의 시대의 정서를 분류학적으로 접근하면서, 블레이크의 작품을 당시 역사의 “심층구조적 기질”(deep-structural disposition) 중 하나인 편집증(paranoia)의 발현으로 읽는다.7) 여기서 편집증은 주체 내면에 귀속되는 병리적 상태가 아니라 주체 구성을 구조화하는 ‘가능성의 조건’(conditions of possibility)을 의미하며, 블레이크의 작품은 당시 편집증적 무드의 산물이자 그 시대의 정서를 “추정”하고 “추적”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적 매개체로 기능한다는 것이 파우의 핵심 주장이다.8) 그의 논의는 정서를 사회문화적 맥락과의 관련성 속에서 이해한다는 점과 정서가 완전히 제도화되어 고착되기 이전의 미분화된 감각과 감정들―즉 막 형성되어가는 정동의 징후들―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기존 블레이크 비평과 일정한 접점을 형성하면서도 새로운 이론적 관점을 제공한다.

한편 골드스미스(Steven Goldsmith)의 『블레이크의 동요: 비평과 감정들』(Blake’s Agitation: Criticism and the Emotions)은 유리즌(Urizen)의 집요한 권력에 포섭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힘을 전복하는 잠재력도 지닌 정서적 역동성에 주목한다.9) 골드스미스의 논의에 따르면, 블레이크는 감정과 정서를 단순한 수동적 반응이 아닌 미학의 정치성과 긴밀히 연결된 능동적 요소로 사유함으로써 배타적 주체의 특권적 위치를 비판적으로 넘어서면서도 계몽적 주체의 정치적 행위력을 일정 부분 보존하는 데 성공한다. 블레이크가 제시하는 탈중심화된 주체는 합리적 자율성을 기반으로 한 근대적 주체와는 달리, 확산적이고 불안정한 감정에 정초한다. 이러한 감정은 전언어적(pre-linguistic) 또는 언어 외적(extra-linguistic)인 영역과의 접촉을 가능하게 하며, 이로써 주체는 제도화된 정치적 담론으로부터 벗어나 그 외부를 사유하고 실천할 수 있는 “변화의 동인”으로서의 잠재성을 획득한다.10)

이 글은 골드스미스의 “정동적 행위성”(affective agency) 개념을 계승하지만, 그의 저서의 부제인 “비평과 감정들”이 드러내듯, 객관적으로 보이는 비평 행위 속에 격동적 감정이 은밀하게 개입하는 방식을 탐구하지는 않는다. 골드스미스는 비평과 감정의 얽힘, 독서 행위를 통한 정동의 전이, 블레이크 작품이 낳는 고유한 정동적 효과 등 정동 이론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로지르며 비평의 행위성을 조망한다. 반면 이 글은 텍스트 내부의 감정 구조, 특히 기쁨의 정서에 집중하여 그것이 수행하는 사회적·정치적 기능을 분석하고자 한다.

물론 이 글의 중심 정서인 기쁨에 주목한 비평적 논의들도 존재한다. 특히 정서의 자율성에 대한 마수미의 입장을 적극 수용한 비평가들은, 블레이크가 육체를 억압해온 종교 이데올로기와 그 실천적 체계에 맞서 육체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에너지를 기쁨의 원천으로 재구성한다고 주장한다.11) 예를 들어 샤(Richard Sha)는, 「미국」(“America”)의 “십계명으로 왜곡된 열정적 기쁨”(Fiery Joys perverted to Ten commands, “America” 8:3)이라는 구절을 핵심 근거로 사용하여, 십계명으로 표상되는 종교 이데올로기에 전유되기 이전의 육체에서 비롯된 강렬한 성적 쾌락이 블레이크적 기쁨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12) 이와 유사하게 허칭스(Kevin Hutchings)는 블레이크의 기쁨을 “감각적 향유”(sensual enjoyment)로 규정하고, 특히 성적 욕망의 충족에 기반한 쾌락의 형식에 주목한다.13) 그는 「사랑의 동산」(“The Garden of Love”)을 분석하면서, 육체와 감각을 억압하는 종교적 규범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기쁨이 가능해진다고 지적한다.

이 두 비평가는 공통적으로 블레이크가 생물학적 충동의 형태로 존재하는 기원적 주체(originary self)를 상정하고 있으며, 그 신체에 내재한 기쁨과 자유가 인위적 세계, 블레이크의 용어를 빌리자면 체계(system)와 충돌하면서 소멸되거나 변질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마수미의 구별을 차용하자면, 블레이크에게 기쁨은 “의미와 기능이 부여된, 관습적이고 공유된 형태”(conventional, consensual form, where it can be given function and meaning)인 감정(emotion)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소유되고 인지되기”(owned and recognized) 이전의 정동이라는 의미다.14) 후에 논의하겠지만 팟케이(Adam Potkay)의 『기쁨의 이야기: 성경에서 후기 낭만주의까지』(The Story of Joy: From the Bible to Late Romanticism)에서도 비슷한 구별을 확인할 수 있다.15) 팟케이는 기쁨이라는 정서가 역사적·문화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다층적으로 변화해왔는지를 추적하면서 정동과 감정의 이론적 구분을 통해 블레이크적 기쁨의 개념을 좀 더 확장된 사유의 지평에서 조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몸과 의식의 이분법을 넘어서고 있지는 못하다.

신체에서 기인한 기쁨이라는 “정동”이 이데올로기(또는 의식)에 의해 오염된 낡은 “감정”을 해체한다는 이들의 논의는 타락 이전의 영원한 세계와 타락 이후의 세계를 구별하는 블레이크의 신화 구조와 일정 부분 부합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블레이크 신화 체계에서 신체 자체가 이미 타락의 산물이라는 점을 간과한다. 『유리즌 서』(The Book of Urizen)에서 유리즌은 영원세계로부터 분리되어 “무서운 변화”(direful change)를 겪었고, 로스는 “이를 보고 모든 변화를/철과 황동 못으로 묶어내어”(watch’d in shuddering dear/The dark changes & bound every change/With rivets of iron & brass 7:9~11) 신체를 창조한다.16) 결과적으로 아무런 “신체 기관도 없이”(unorganized) 돌 같은 잠에 빠진 유리즌은 변형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감각기관을 획득한 신체적 주체가 된다. 신체의 탄생을 묘사하는 이 장면은 이후 『네 명의 조아』(The Four Zoas)와 『밀턴』(Milton)에서도 반복되면서, 타락 이전의 무한하고 열려 있던 인간이 폐쇄적이고 제한된 신체 구조에 갇히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물론 타락의 징표로서의 신체는 경계 지어진 유한성과 속박의 표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무형태의 측정 불가한 죽음”(the formless, unmeasurable Death)이라는 무신체적 상태에 머물던 유리즌을 다시 영원의 세계와 접촉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매개가 되기도 한다. 커널리(Tristanne J. Connolly)가 지적한 것처럼 무한성과 개방성, 변화 가능성이라는 차이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영원자의 몸은 인간의 몸과 일정한 연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17)

요약하자면, 블레이크에게 신체는 외부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동시에 세계와 끊임없이 마주치고 소통하는 관계적 가능성을 품고 있다. 따라서 일부 비평가들이 주장하듯이 블레이크가 정동과 감정을 이분법적으로 구별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의 타락 서사의 핵심은 이미 오염된 인간의 몸에서 궁극적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정동”이 감정으로, 또는 감정이 다시 가능성으로서의 “정동”으로 이행하는 복합적이고 비결정적인 과정을 탐색하는 데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18) 블레이크의 작품에서 이러한 이행의 과정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정서가 바로 기쁨이다.19) 기쁨은 비의식과 의식, 정동과 감정, 신체와 이데올로기 사이를 횡단하는 고유한 정서적 역학을 품고 있으며, 이러한 복합적 특성으로 인해 단순한 내면적 체험에 머무르지 않는다. 비록 개인의 내적 정서로부터 출발하더라도 기쁨은 신체들 사이를 유동하며 타자와의 관계망을 형성하고, 정서적·정치적·사회적 결집을 촉진하는 매개로 기능한다. 그러나 동시에 블레이크에게 기쁨은 샤나 허칭스가 주장하듯 일방적으로 해방적이거나 체제 비판적인 에너지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기쁨이 사회적 불평등과 억압적 질서를 내면화하고 고착시키는 순응의 정서로도 작동할 수 있음을 통찰한다. 즉 기쁨은 이데올로기의 내면화를 유도하는 억압의 기제로도, 기존 질서를 전복하고 권력의 재편성을 추동하는 해방의 전략으로도 기능할 수 있는 양가적 정서로 제시된다. 이러한 양면성을 인식하면서도 블레이크는 신체들 사이를 유동하며 이동하는 기쁨의 감응적 특성과 그 증폭 에너지에 주목하며, 그 안에서 응고와 전환의 가능성을 사유한다. 이 글은 블레이크의 초기 시 작품을 중심으로 이러한 기쁨의 경계적 성격을 탐색하고, 그것이 주어진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것’의 생성 가능성을 여는 데 어떠한 조건들이 요청되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II. 경험의 세계 속 “순수한” 기쁨

팟케이는 스토아학파에서부터 20세기의 하트(Michael Hardt)와 네그리(Antonio Negri)의 ‘기쁨의 정치학’에 이르기까지 기쁨의 개념사를 종횡하며, 블레이크의 기쁨의 특징을 탈기독교적(post-christian)이라고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블레이크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순수의 노래』(Songs of Innocence)와 『올비언의 딸들의 비전』(The Vision of Daughters of Albion)이라는 두 초기 시편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20) 팟케이는 이 두 작품을 기독교적 기쁨과 탈기독교적 기쁨을 대비적으로 형상화한 상호보완적 텍스트로 읽으며, 전자는 기독교 이데올로기의 한계와 그 허위성을 드러내는 반면, 후자는 우순(Oothoon)의 목소리를 통해 이데올로기의 경계를 넘어서는 육체의 내재적 역량과 정동적 잠재성을 구현한다고 본다. 신체가 경험하는 것을 “정동”으로, 그것을 감지하고 의미화한 것을 “감정”으로 규정하는 마수미의 구분을 사용한다면, 후자의 기쁨은 “정동”으로, 전자의 기쁨은 그 정동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된 “감정”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블레이크는 정동―좋은(진정한) 기쁨―과 감정―나쁜(허위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기쁨―을 대립적으로 구별하지 않는다. 그 핵심에는 인간의 몸에 대한 양가적인 시선과 기쁨이라는 정서가 몸과 맺는 경계적 성격이 놓여 있다.

예를 들어 「굴뚝 청소부」(“The Chimney Sweeper”)를 살펴보자. 민머리가 되어서 슬퍼하고 있던 톰은 꿈에서 관에 갇힌 굴뚝 청소부들을 빛나는 열쇠로 풀어주는 천사를 만나서, 푸른 들판에서 뛰어놀게 된다. 천사는 톰에게, “좋은 아이가 되면/하나님을 네 아버지로 모시게 될 것이고 결코 기쁨이 부족하지 않으리라”(if he’d be a good boy/ He’d have God for his father & never want joy)고 전한다. 이 기쁨의 약속으로 인해 톰은 다음 날 추운 아침에 온기를 느끼며 굴뚝 청소에 전념하게 된다.

그래서 톰은 잠에서 깨었다. 그리고 우리는 어스름에 일어나

우리의 가방과 굴뚝 솔을 챙겨서 일하러 갔다.

추운 아침이었지만, 톰은 행복하고 따뜻했다.

그래서 모두가 의무를 다한다면, 해를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21~24)

해방의 비전과 함께 천사가 약속하는 기쁨은 소년이 죽음과도 같은 현실로부터 탈주하도록 돕기보다는 현재의 구조적 불평등과 억압적 질서에 순응할 것을 전제로 한다. 소년의 행위를 규율하고 기존 체제에 적응하도록 유도하면서, 기쁨은 차별과 위계의 재생산에 기여한다. 이러한 역설은 벌랜트(Lauren Berlant)가 개념화한 “잔인한 낙관주의”와 긴밀히 맞닿는다. 벌랜트는 『잔인한 낙관주의』(Cruel Optimism) 서두에서 “애착을 유발하는 대상이 애초에 그 대상을 추구하도록 만든 목적을 스스로 방해할 때 그 애착은 잔인해진다”라고 지적한다.21) 이 관점에서 보면, ‘기쁨이 충만한 좋은 삶’에 대한 애착을 매개로 ‘좋은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규범을 내면화하도록 유도하는 천사는 기쁨을 통해 삶의 고통을 정당화하고 감내하게 만드는 잔인한 낙관의 예시로 읽힐 수 있다. 기쁨을 약속하지만, 결국 기쁨의 영원한 지연, 즉 불가능성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블레이크는 ‘잔인한 낙관주의’가 지닌 폭력성과 구조적 잔인함을 통찰하지만, 이 시를 단순히 낙관주의 또는 기쁨에 대한 비판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소년은 천사의 약속을 듣고 실질적인 기쁨을 경험하며, 이 기쁨은 현실의 물리적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창조적 정서로 작동한다. 예컨대 톰이 꿈꾸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낙관은 단지 관념적 위안에 머무르지 않고, 한겨울의 차가운 아침조차 따뜻하고 행복하게 체감하게 만드는 구체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 물론 이러한 몸의 변화도 이중적인 함의를 갖는다. 표면적으로는 이데올로기가 신체조차도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침습성과 강제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정동을 ‘순수한’ 신체 반응으로 간주하며, 정동이 문화적 실천과 사회 변혁의 주체 형성의 계기가 된다고 보는 일부 정동 이론가들의 입장과 명확히 구분되는 관점이다. 블레이크는 정동, 즉 인간의 신체 반응조차도 이데올로기적 조작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통찰한다. 이러한 블레이크의 통찰은 행복을 경험하는 장소로서의 신체를 분석한 아메드(Sara Ahmed)의 논의를 환기한다. 아메드는 사회적 인식이 개인의 몸/정동을 매개하는 과정을 분석하면서, 사회는 기쁨과 같은 긍정 정동을 특정한 대상에 “부착”(stick)해 순환시킴으로써, 개인이 그 대상을 만날 때 자동적으로 그 감정을 경험하도록 유도한다고 주장한다.22) 천사의 약속은 소년의 노동에 긍정 정동을 “부착”하는 과정, 즉 주어진 사회질서에 적응하고 이를 내면화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23) 이처럼 기쁨을 포함한 긍정 정동의 허위성을 지적한 아메드는 사회가 배치하는 기쁨의 질서에서 이탈하여 ‘이방인’이자 ‘정서적 소외자’로 자리잡을 때 비로소 기존의 규범적 조작을 넘어서는 ‘대안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메드가 ‘기쁨을 망치는 페미니스트’를 정치적 주체로 내세우는 이유도 그들이 사회적 규범과 긴밀히 연루된 기쁨을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슬픔과 불행의 정동적 공간을 전략적으로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블레이크의 관점은 아메드와 뚜렷이 대비된다. 아메드는 사회가 부착한 긍정 정동에 불일치하거나 배제된 몸에서, 곧 불행과 부정적 정동에서 전복적 잠재성을 보았다면, 블레이크는 오히려 기쁨을 경험하는 몸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그에게 슬픔과 불행의 정서는 전복적 잠재성이 아니라 무력감과 비활동성을 의미한다. 천사의 약속 이전의 톰은 실천의 방향을 찾지 못한 채 무기력에 머물렀지만, 약속 이후 경험한 기쁨으로 소년은 일정 수준의 자아 효능감과 주체성을 갖게 된다. 또한 기쁨의 경험은 욕망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지속·강화하여 기쁨을 유지하려는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모두가 의무를 다한다면 해를 두려워하지 않으리라”라는 마지막 구절에는 꿈에서 경험한 기쁨이 일회성으로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욕망이 상상적 탐색의 흔적과 함께 담겨 있다. 이 마지막 구절은 천사의 “좋은 아이가 되면/(…) 결코 기쁨이 부족하지 않으리라”는 약속에 대한 톰의 재해석이다. 다수의 비평가가 지적하듯, 천사의 약속 속 want는 ‘부족하다’와 ‘욕망하다’라는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들은 이를 근거로 약속이 기쁨을 ‘욕망할 수조차 없는’ 결핍의 삶과 중첩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를 전도해 읽을 경우, ‘기쁨이 결코 부족하지 않은 삶’은 기쁨을 욕망하는 몸에서 비롯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기쁨을 경험한 소년은 추상적 갈망을 넘어 구체적 욕망을 형성하며, 그 구체성이 변화를 가능케 하는 동력이 된다. 천사의 약속은 체제 유지의 수단으로 심어졌지만, 역설적으로 몸이 경험한 기쁨을 지속·강화하려는 창조적 상상력으로 변형된다. 그 결과 “좋은 아이가 되어라”라는 개별 윤리적 요청은 “모두가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사회 전체의 규범으로 확장되며, 동시에 방치된 공동체를 향한 비판으로 전환된다. 결국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유포된 천사의 약속―즉 기쁨이라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역설적으로 기쁨을 경험하는 몸을 매개로 그 사회를 전복하고 교란하는 힘으로 작동
한다.

「어린 흑인 소년」(“The Little Black Boy”) 역시 이른바 ‘잔인한 낙관주의’가 기쁨의 정동을 생산하지만, 이데올로기적 조건 속에서 경험하는 기쁨조차 새로운 욕망과 상상력을 생성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윌리엄스(Nicholas Williams)가 지적하듯이, 이 작품은 인종주의적 식민 교육이 흑인 어머니를 매개로 흑인 소년에게 이데올로기를 내면화시키는 교육의 재생산 구조를 묘사하고 있다.24) 이 교육은 지연된 기쁨을 약속함으로써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게 하고, 변화를 끊임없이 유예하는 무한 반복의 굴레를 형성한다. 소년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슬픔을 기쁨의 조건으로 치환하도록 학습받는다. 그러나 소년이 교육의 수동적 수혜자에서 벗어나 배운 내용을 백인 소년에게 되돌려 전달하는 순간, 이 반복의 고리는 파열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기쁨의 정동은 더 이상 이데올로기적 억압을 재생산하는 수단에 머무르지 않고, 역으로 균열을 일으키는 장치로 전환될 수 있는 잠재성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열을 견디는 법을 학습하면

구름은 사라지고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될 거야.

작은 숲에서 나오렴, 내 소중한 사랑아.

그리고 내 황금 천막을 둘러싸고 양처럼 기뻐하렴.

이렇게 어머니가 말씀하시며 내게 키스하셨네.

그래서 내가 꼬마 영국 아이에게 말했지.

내가 검은 그리고 네가 하얀 구름에서 자유로워지면,

신의 천막을 둘러싸고 우리는 양처럼 기쁘게 된단다. (21~28)

어머니는 소년이 느끼는 좌절과 슬픔이 최종적인 기쁨을 얻기 위해 필연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굴뚝 청소부」의 천사가 말한 “좋은 아이가 되면 기쁨이 부족하지 않으리라”는 약속처럼, 어머니의 “기뻐하라”는 권유 역시 결핍과 고통의 삶에 저항하기보다는 미래의 기쁨에 대한 낙관을 통해 현재의 고통과 감정적으로 결속되기를 요구하는 기존 질서의 내면화된 명령이다. 소년이 이 명령을 거의 동일하게 반복하는 마지막 연은 기쁨에 대한 애착이 사회규범의 성공적인 내면화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머니와 소년의 발화는 표면적으로는 유사해 보이지만, 기쁨의 주체가 고통받는 주체인 흑인에서 흑인과 백인을 아우르는 ‘우리’로 전환된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앞서 1연에서 소년은 피부색에 따라 흑인과 백인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며, 흑인의 외향과 백인의 내면을 가진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었다. 반면 마지막 연에서는 흑인과 백인을 모두 포함하는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 이러한 혼란이 일정 부분 정서적으로 통합되었음을 암시한다. 이 해소의 방식은 어머니가 제시한 ‘구름’의 비유를 소년이 전유하여 재구성하는 방식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어머니는 검은 피부를 ‘구름’에 비유하는데, 이는 육체를 비롯한 물질세계가 구름처럼 실체 없는 허상이라는 기독교적 의미를 내포하면서도, 검은 피부를 “빛을 잃은 것”으로, 즉 하나님의 태양을 가리는 어두운 장막으로 보는 인종주의적 교육의 결과물이다. 어머니는 차별적 현실에 대해 소극적이고 도피적인 해법을 제시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러한 현실을 정당화하고 영속화하는 담론을 재생산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소년의 반응은 체제 유지에 동원된 기쁨의 약속이 오히려 그 체제를 해체하는 정서적 무기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소년은 자신이 배운 내용을 백인 소년에게 되돌려 전달하며, 기쁨의 주체로서 자신을 재정립하면서 백인의 피부색 역시 검은 피부와 다르지 않은 ‘또 다른 구름’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내가 검은 그리고 네가 하얀 구름에서 자유로워지면/신의 천막을 둘러싸고 우리는 양처럼 기쁘게 된단다”라는 마지막 구절은, 만약 흑인의 피부가 하나님의 빛을 가리는 구름이라면 백인의 피부 역시 동일한 구름에 불과하다는 급진적인 대칭성의 사유를 제시한다. 인종 차이를 절대화하며 차별을 정당화하던 세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 1연의 소년은 이제 진정한 기쁨의 조건이 인종적 평등에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물론 이 상상은 어머니의 가르침에 대한 의도치 않은 오독이며, 제대로 된 기쁨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흑인 소년이 백인 소년에게 기쁨을 가르친다는 아이러니가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 이 아이러니 속에서 블레이크는 기쁨의 정동이 어떻게 기존의 억압적 질서를 전복할 수 있는 상상력의 장이 될 수 있는지를 탐색한다.25) 굴뚝 청소부 소년처럼 흑인 소년은 절망적 봉착 상태를 극복하고 기쁨을 적극적으로 욕망하게 되었고, 그 욕망은 체제 전복적 평등의 비전을 사회에 제시한다. 물론 소년의 상상이 반드시 진보적이거나 더 나은 상태를 자동적으로 생산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특정한 대상을 기쁨의 약속에 결속시키려는 사회의 정동 정치가 기쁨의 발산적 에너지를 완전히 포섭할 수는 없다는 점은 명백하다. 기쁨의 정동은 사회의 규율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서 사회질서의 기본인 대립과 부정의 패러다임을 해체할 수 있는 일종의 도약대를 형성한다.

이처럼 블레이크에게 기쁨은 사회적 규범의 조작 속에서 착취와 불평등을 지속시키는 도구로 기능하지만, 동시에 그 규범의 모순을 폭로하고, 규범 위에 군림하는 이들의 위치를 가시화하는 힘을 지닌다. 기쁨의 확산적 에너지는 규범이 기반하고 있는 ‘배제’와 ‘포함’의 원리를 무력화하며, 자아로 침잠하기보다는 타자와 세계로 시선을 확장하게 한다. 이렇듯 기쁨은 단순한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사람들을 지배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매개이자 해방의 도구이기에, 블레이크는 이후 『올비온의 딸들의 비전』에서 ‘누가, 무엇을 기쁨의 대상으로 규정할 것인가’를 둘러싼 정서의 통제권이 곧 권력투쟁의 핵심임에 주목하게 된다. 즉 『순수의 노래』가 이미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몸에서도 기쁨이 전복적 가능성을 생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면, 『올비온의 딸들의 비전』은 이데올로기 바깥에 있다고 여겨지는 몸의 영역조차 규범적 오염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드러낸다.

III. 우순의 기쁨: 경계적 정서의 정치학

『올비온의 딸들의 비전』은 팟케이가 지적하듯이 “기쁨에 대한 송가”이며, 우순, 브로미온(Bromion), 세오터먼(Theotormon)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기쁨을 전유하고자 한다.26)

브로미온은 “부유함과 안락함 이외에 다른 기쁨이 있는가?”(4:21)라고 질문하며, 물질적 기쁨 외의 가능성을 철저히 부정한다. 세오터먼은 비탄에 사로잡혀 “기쁨이 무엇인지, 어떤 정원에서 자라는지?”(3:24~25)라고 물으며, 절망적 현실에 순응하며 기쁨의 존재 자체를 의심한다. 반면, 브로미온에게 겁탈당한 우순은 누구보다 비탄에 빠질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라면 언제나 기쁨과 즐거움에 열려 있다”(6:22)라고 말하며 세오터먼의 질문에 우회적으로 답한다. 이처럼 서로 충돌하는 기쁨의 정의들 속에서 블레이크가 제시하는 기쁨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이 본 절의 목적이다.

표면적으로는 팟케이를 비롯한 많은 평자가 지적한 것처럼 우순의 기쁨은 브로미온/세오터먼의 억압적 순결 이데올로기와 대립된다.27) 예를 들어 팟케이는 우순의 기쁨을 권력의 장으로서의 육체가 아닌, 즉 사회적 의미가 기입되기 이전의 육체에서 비롯된 자유로운 정동으로 읽으며, 페일리(Morton Paley)는 우순을 경험의 세계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의 세계를 대변한다고 본다.28) 브루더(Helen Bruder) 역시 류타(Leutha)에서의 우순은 이데올로기 이전의 육체에서 비롯된 기쁨을 향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29) 예를 들어 금송화의 꽃을 꺾을까 말까 고민하는 우순에게 금송화는 “내 꽃을 꺾으세요, 부드러운 우순이여/또 다른 꽃이 피어날 거예요, 달콤한 즐거움의 영혼은/절대로 사라지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이에 우순은 꽃을 꺾어 가슴에 꽂는데, 브루더는 꽃을 꺾는 행위는 성적인 함의를, 그 꽃을 자신의 가슴에 꽂았다는 것은 수음(autoeroticism)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또한 브루더는 수음을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성적 주체로 스스로를 규정하는 것으로 평가하며, 이에 뒤따른 브로미온의 겁탈을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일탈한 여성에게 행하는 일종의 처벌이라고 주장한다.30)

이처럼 브루더는 우순의 기쁨이 몸의 물질성에서 비롯된다고 보며, 이를 억압적·가부장적 사회규범과 대립시키면서 자연과 사회, 감정과 정동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분석을 제시한다. 물론 감각적 사랑과 성적 기쁨을 추구하는 금송화/우순은 순결 이데올로기에 갇힌 세오터먼,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소유물로 간주하는 브로미온, 그리고 억압적 권력을 상징하는 유리즌과 분명히 대립한다. 또한 에어스(David Aers)가 강조하듯, 성적 에너지와 감각적 즐거움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역시 이 작품의 핵심 축 중 하나다.31)

그러나 우순의 기쁨이 수음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몸에 기초한 감각적인 기쁨을 무조건적으로 긍정할 수 없음을 암시하며 기존의 이분법적 해석의 한계를 시사한다. 특히 이 시의 후반부에서 블레이크는 우순의 입을 빌려 수음이 욕망의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의 왜곡임을 명확히 한다. 즉 “욕망의 순간”(the moment of desire)을 “커튼의 그림자와 고요한 베개의 주름 뒤에서 사랑의 허상으로 만드는 것”(creation of an amorous image/In the shadows of his curtains and in the folds of his silent pillow, 7:3~7)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물론 후반부의 수음은 종교적 금욕의 결과물, 즉 “자기부정의 자기향유”(self-enjoyings of self-denial, 7:9)이자, 종교적 금욕을 기쁨으로 위장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우순의 수음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럼에도 우순의 수음 역시 타자와의 진정한 조우와 주체의 변혁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지닌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와 관련하여 샤는 ‘주체 해체’(self-annihilation)를 블레이크 급진성의 핵심으로 보면서, 수음이 오히려 주체 해체와 반대되는 효과, 즉 자아의 강화 또는 자기애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계한다.32) 나아가 샤는 블레이크가 ‘주이상스’(jouissance)에 대해 취하는 양가적 태도를 분석한다. 샤에 따르면, 일부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주이상스가 상징계 내에서 일관되게 교란적이고 해방적인 것으로 작동한다고 볼 수는 없다. 블레이크에게 주이상스는 반드시 주체 해체나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욕망과 수동적인 육체성”이라는 일종의 쇠사슬로 작동할 위험을 내포한다.33) 샤는 주이상스의 수동성과 자기애적 성격에 특히 주목하며, 블레이크에게 주체 해체는 주체의 능동적 결단의 결과이자 상호성의 심화를 향해 나아갈 때만 의미를 지닌다고 강조한다.34) 이러한 관점은 데이먼(Foster Damon)이 지적했듯, ‘성적 즐거움’의 공간인 뷸라(Beulah)와 생식의 세계인 제너레이션(Generation)은 예루살렘(Jerusalem)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초월해야 하는 단계라는 점과도 연결된다.35) 우순이 세오터먼과 진정으로 조우하기 위해서는 류타의 영역을 넘어 “브로미온의 영토”를 통과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브로미온의 영토에서 가능한 기쁨을 직접 탐색해야 한다는 점은 류타가 상징하는 성적 에너지와 감각적 기쁨이 지닌 한계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브로미온의 폭력과 유리즌의 통제가 지속적으로 우순의 성적 에너지에 집중된다는 점은 신체와 감각적 기쁨이 결코 사회의 통제와 규범을 초월한 자율적 영역이 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한계는 브로미온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우순이 “죽음의 암흑으로 나를 가둔 밤은 지났다”(2:29)라고 선언하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바라보던 세계가 오감의 감옥에 갇힌 세계에 지나지 않았음을 인식하는 장면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우순은 오감이 “자신의 무한한 뇌를 작은 원에 가두고/자신의 가슴을 심연에 침몰시켰다”(2:32~33)라고 고백하며, 류타의 영역에서 추구하던 감각적 기쁨이 이데올로기 이전의 ‘순수한 몸’에서 비롯된 ‘진정한’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수음’이라는 감각의 감옥 안에서 경험하는 자기애적 쾌락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오감의 감옥에서 빠져나온 우순은 주변의 다양한 존재자들에게로 눈을 돌리며, “정화된” 감각으로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을 이해하게 된다.36) 우순은 “어떤 감각으로 닭은 굶주린 매를 피하는가?”(3:2)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비둘기·벌·쥐·개구리 등의 비인간 존재자들도 오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각으로 세상을 경험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무슨 감각으로 닭은 배고픈 매를 피하는가?

무슨 감각으로 길든 비둘기가 창공을 재는가?

무슨 감각으로 벌은 벌집을 만드는가? 쥐와 개구리도

시각과 청각과 촉각이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그들의 거주지와

그들의 지향하는 바는 그들의 모습과 그들의 기쁨이 다른 것만큼이나 다르지 않은가?

야생 당나귀에게 왜 짐을 지지 않는지, 온순한 낙타에게

왜 인간을 사랑하는지 물어보라. 눈과 귀와 입과 피부,

숨 쉬는 콧구멍 때문인가? 아니다! 왜냐하면 늑대와 호랑이도 같은 것을 갖고 있기에 (3:2~9)

이러한 수사적 질문들이 강조하는 핵심은,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비인간 존재자들이 “눈, 귀, 입, 피부, 숨 쉬는 콧구멍”과 같은 감각기관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존재는 오감 너머의 내재적 역량을 통해 고유하고 입체적인 특수성을 발현한다는 점이다. 이 내재적 역량은 각 존재자의 ‘거주지’ ‘지향점’ ‘형태’뿐 아니라 그들의 ‘기쁨’까지도 구성한다. 다시 말해 기쁨은 단순한 감각적 자극의 산물이 아니라 존재자 고유의 형식 및 지향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우순, 나아가 블레이크의 기쁨에 대한 탐색 역시 이 지점에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출발한다.

이후 우순은 유리즌의 기쁨과 대립하면서, 인간 고유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적극적으로 탐구한다. 『순수의 노래』에서 몸은 기쁨의 가변적 토대로 작동하며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내부와 외부를 횡단했으나, 『올비온의 딸들의 비전』에서는 이 토대가 좀 더 체계화된 정동적 질서로 변모하며, 기쁨은 대항적 이데올로기의 핵심으로 부상한다.

유리즌이여! 인간의 창조자여! 오류에 빠진 천상의 악령이여!

그대의 기쁨은 눈물이어라, 인간을 네 형상으로 만들려는 그대의 헛된 노력.

어떻게 기쁨이 다른 기쁨을 흡수하랴? 각기 다른 기쁨이

성스럽고, 영원하며 무한하지 않은가? 기쁨은 사랑이어라.

커다란 입은 선물을 비웃지 않는가? 좁은 눈꺼풀은 조롱하지 않는가?

임금없는 노동을

(…)

가난을 경멸하는 이와, 고리대금을 혐오하는 이가

같은 열정을 느끼는가? 같은 것에 감동받는가?

선물을 주는 이가 상인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는가?

공업에 종사하는 이가 농부의 고통을 경험할 수 있는가?

텅 빈 북을 치며 노래하는, 살찐 고용병은 얼마나 다른가.

온 곡식밭을 사들여 폐허로 만들고는, 황야에서 노래하는?

그들의 눈과 귀는 얼마나 다른가? 이 세상은 얼마나 다른가? (5:3~8, 10~16)

유리즌식 기쁨의 가장 큰 특징이 타자의 ‘흡수’, 곧 타자성의 삭제에 있다면, 우순의 기쁨은 ‘사랑’, 곧 타인을 환대하고 수용하며 타인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데에서 출발한다. 유리즌은 자신의 주관 안에서 일방적인 기쁨의 개념을 확립하고, 그 기쁨의 틀 안에서 인식된 세계를 타인에게 강요하고 투사한다. 반면, 우순은 ‘사랑’을 기반으로 다양한 형태의 기쁨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우순의 기쁨은 타자의 고유성을 지켜내며, 타인의 기쁨을 확장하고 증진시키는 역량의 실현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우순의 기쁨의 성격은 다음 구절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우순은 그렇지 않다, 처녀의 상상으로 가득 찬 숫처녀,

기쁨에, 즐거움에 열려 있다,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아침 태양에 그것이 있다면, 그곳을 응시하며,

(…)

행복한 교접을 하리. 부드러운 저녁이라면, 일로 지쳤더라도,

강둑에 앉아서 이 자유로운 기쁨을 흡수하리. (6:21~23, 7:1~2)

여기서 기쁨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 기쁨은 아름다움의 경험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둘째, 이 경험은 ‘행복한 교접’이라는 육체적 관계, 즉 신체의 섞임 이미지로 구체화된다. 셋째, 이러한 기쁨은 궁극적으로 자유로움의 성격을 띤다. 비록 블레이크의 이 작품은 칸트(Immanuel Kant)의 주요 저작이 영국에 널리 소개되기 이전에 쓰인 것이지만, 아름다움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칸트의 ‘미’ 개념을 환기시킨다. 칸트에 따르면, 미적 경험은 ‘사심 없음’(disinterest)의 태도를 요구한다. 이는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그 대상의 유용성이나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순수하게 그 대상을 주목하는 탈아적 관점이다. 이러한 무관심성은 모든 대상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평가하는 유리즌의 태도와 뚜렷이 대조된다.

이 사심 없음의 태도는 대상과의 ‘행복한 교접’을 가능하게 하는데, 블레이크가 인식의 과정을 ‘교접’이라는 신체적·성적 은유로 표현한 점은 우순이 류타를 떠났음에도 기쁨의 신체적 근거를 완전히 초월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관점은 블레이크가 로크(John Locke)의 경험주의를 전적으로 부정하기보다는 감각을 상상적 사유와 비전을 매개하는 기초적 통로로 재구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37) 동시에 ‘교접’은 단순한 육체적 결합을 넘어 타자와의 열린 소통, 상상적 연대, 상호 창조의 관계를 지시하는 개념으로 확장된다. 이 확장은 이 시의 핵심 사건인 성적 해방을 인식과 관계의 해방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하며, 신체적 기반을 유지하면서도 사회적·존재론적 차원으로 나아가는 블레이크적 비전을 보여준다. 따라서 ‘교접’이라는 표현은 신체와 관계, 두 층위에서 기쁨이 작동하는 방식을 동시에 드러내는 핵심적 은유라 할 수 있다.

또한 기쁨이 지닌 ‘자유의 속성’(free-born joy)은 초기 우순이 빠져 있던 자기중심적 감각의 감옥으로부터의 자유이자, 이후 브로미온/유리즌의 기쁨의 기반이 되는 배타적 소유의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자아의 견고한 감옥에서 벗어나 무수히 많은 아름다운 타자들과 결합하며 확장되는 자아의 기쁨은 “작은 완전함에서 더 큰 완전함으로 이행하는 것”을 기쁨이라 정의한 스피노자(Benedict de Spinoza)를 연상시킨다.38) 그러나 스피노자가 완전함을 자기결정력, 즉 활동 능력의 크기로 이해한 반면, 블레이크에게 완전함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행·횡단·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실현된다. 한 물체가 다른 물체와 본질적으로 연결되는 ‘교접’의 사건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면, 이 과정에 연루된 신체들이 서로 공명하며 완전함이 증폭되고, 결국 새로운 집단적 신체가 출현할 것이다. 블레이크는 이 집단적 신체에 참여하는 것을 ‘신이 되는 것’, 즉 진정한 자아의 확장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과연 사회적 이데올로기와 구조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율적이고 저항적이며 집단적인 정서인 기쁨이 유리즌/브로미온이 구축한 견고한 세계에 실제로 물질적 균열을 낼 수 있는가? 아름다운 만물의 존재들과의 ‘행복한 교접’, 그 사랑의 기쁨에 대한 우순의 찬미가가 어떠한 실천적 가능성을 지니는가? 하다못해 우순의 당면 목표인 세오터먼을 절망과 분노에서 해방시켜 자신의 기쁨에 동참시키려는 시도는 실현 가능한가? 나아가 세오터먼이 ‘사랑스러운 교접’에 참여하게 되는 우순의 상상은 단순한 희망적 기획인지, 아니면 실제로 성취 가능한 비전인지 의문이 남는다.

나는 외친다. 사랑! 사랑! 사랑! 행복한 행복한 사랑! 산바람처럼 자유로운!

사랑일 수 있을까? 물을 빨아들이는 스폰지처럼 타인을 흡수하는 것이?

질투로 그의 밤을, 울음소리로 낮을 그늘지게 하는 것이?

오래된 거미줄로 그를 둘러싸는 것이, 회백색의 어두운.

그래서 눈앞에 매달린 과일에 눈이 아파올 때까지?

그것은 모두를 질투하는 자기애, 서서히 다가오는 해골,

얼어붙은 혼인 침대를 지켜보는 램프등과 같은 눈들!

우순이 견고한 실크 그물과 올가미를 펼쳐서

부드러운 은빛, 강렬한 금빛 소녀를 잡을래요.

강둑 위 당신 옆에 누워 음탕한 놀이를 지켜볼래요,

사랑스럽게 교접하며, 겹겹이 축복 속에, 세오터몬과.

장밋빛 아침처럼 붉게, 첫 번째 햇살처럼 욕정에 차서,

우순은 그의 소중한 기쁨을 바라볼래요. 질투의 구름은

관대한 사랑의 하늘에 드리우지 않고, 이기적인 병충해도 없을 거예요 (7:16~29)

브로미온에게 우순을 빼앗겼다는 믿음에 사로잡혀 질투와 비탄에 잠긴 세오터먼에게, 우순은 그가 꿈꾸던 “얼어붙은 혼인 침대”가 아닌, “산바람처럼 자유로운” 사랑을 제안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우순은 세오터먼이 사랑을 소유로 바라보는 기존의 관점에서 벗어나 자신과 함께 “소중한 기쁨”을 경험하는 것을 상상한다. 작품을 마무리하는 이 장면은 오랫동안 상반된 비평적 해석의 쟁점이 되어왔다.

브루더는 이 장면에서 우순이 “실크 그물과 올가미로 (…) 금빛, 은빛 소녀들을 잡아들이는” 행위를 “유리즌의 공범”이 되는 일종의 “변절”로 평가한다.39) 브루더는 특히 우순이 사용하는 ‘그물’과 ‘올가미’가 바로 직전에 유리즌이 “처녀의 기쁨”을 포획하기 위해 사용한 도구(With nets found under thy night pillow, to catch virgin joy, 6:11)와 동일하다는 점을 핵심 근거로 제시한다.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헤이들리(Karen Hadley)는 우순이 단순히 유리즌의 전략을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유리즌의 폭력적이고 착취적인 질서에 깊이 연루된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우순이 유리즌적 질서의 무의식적 재생산자로 기능하며, ‘해방적 주체’로 보기 어렵다고 평가한다.40) 반면 그린은 오히려 우순이 유리즌의 도구를 그대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블레이크의 정치적 급진성이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그린에 따르면, 우순은 “억압의 도구를 해방의 도구로 전환”하려는 전략적 실천을 보여준다.41)

이러한 상반된 해석은 작품에 내재하는 구조적 모호성에 의해 더욱 증폭된다. 예를 들어 “강둑 위 당신 옆에 누워 음탕한 놀이를 지켜볼래요/사랑스럽게 교접하며, 겹겹이 축복 속에, 세오터먼과”(I’ll lie beside thee on a bank, and view their wanton play/In lovely copulation, bliss on bliss, with Theotormon, 7:25~26)라는 구절에서 ‘세오터먼과 사랑스러운 교접을 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브루더와 헤이들리는 이 구절을 ‘금빛, 은빛 소녀들’이 세오터먼과 교접하는 장면으로 해석하며, 우순이 소녀들의 의사를 배제한 채 성행위를 강요하는 억압적 역할을 한다고 본다. 그러나 만약 이 구절을 ‘사랑스러운 교접’의 주체가 우순과 세오터먼이며, 금빛, 은빛 소녀들은 그들끼리 ‘외설적 놀이’(wanton play)에 빠져 있는 것으로 읽는다면, 이 장면은 자유로운 기쁨을 향유하는 이성애와 동성애의 공존 가능성을 시사할 수도 있다. 이처럼 해석의 여지가 열려 있다는 점이 작품의 중요한 특징이다. 마찬가지로, 27행의 “장밋빛 아침처럼 붉어진, 첫 번째 햇살처럼 욕정에 찬” 존재 역시 중의적이다. 이 표현이 세오터먼과 교접하는 우순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일 수도 있고, 세오터먼이 느끼는 기쁨을 수식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는 홉슨(Christopher Hobson)이 지적했듯이, 이는 세오터먼의 쾌락과 그것을 바라보며 기쁨을 느끼는 우순을 동시에 묘사하는 복합적 이미지일 수도 있다.42)

이러한 해석상의 난점은 기쁨이라는 정서가 지닌 다면적인 특징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먼저 교접과 기쁨의 주체가 명확하지 않은 이유는, 기쁨이라는 정서가 폐쇄된 개인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신체와 신체를 순환하며 확산되는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 특징은 기쁨의 고유한 특징으로서, 절망과 슬픔의 주체가 명확히 규정되는 점과 대조된다. 김성호는 스피노자의 정서(affect) 개념, 즉 “그로 인해 신체의 활동 능력이 증가하거나 감소하며, 촉진되거나 제한되는 신체의 변용과 그 변용의 관념”에 비추어, 정서의 순환과 확산을 “비인격적 상호변용 과정”으로 설명한 바 있다.43) 그런데 블레이크에게 모든 정서가 “상호변용”의 힘을 지닌 것은 아니다. 『순수의 노래』에서부터 이 작품까지, 절망과 슬픔이 지닌 고립과 자기중심성은 기쁨이 지닌 확산과 증폭의 특성과 대립된다. 따라서 슬픔의 주체는 명확한 반면, 기쁨의 주체는 미끄러지고 전파되고 증폭되는 것이다. 이처럼 기쁨의 본질을 고정된 ‘개인’이 아닌 다자적이고 확장적이며 순환적인 정동 네트워크로 제시하면서, 블레이크는 기쁨이 타락의 원인인 자기중심성을 극복하는 변혁의 동인이라 규정하는 듯하다.

그러나 기쁨이 지닌 혁명적 가능성이 견고하고 쉽게 변하지 않는 현실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블레이크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굴뚝 청소부의 꿈이나 흑인 소년이 상상하는 천국처럼, 우순이 그리는 기쁨 역시 이미 기존의 권력과 제도에 의해 오염되었음을 밝힌다. 우순이 소녀를 포획하기 위해 유리즌과 동일한 그물과 덫을 사용하는 것은 기쁨의 상상마저도 체제 내부에 포섭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장면은 정서가 때로는 억압과 통제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해방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는 블레이크의 일관된 신념을 반영한다. 다시 한번 블레이크의 정서가 감정과 정동을 명확히 구분하는 최근의 정동 이론과 차이를 보여주는 지점이라 하겠다. 블레이크에게 인간의 정서는 순수한 감각과 이념적 조작 가능성 사이에 놓인다. 모든 정서를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여 문화적 규범과 사회체제에 부합하는 삶의 경로를 강제하려는 유리즌/브로미온의 기획은 우순의 저항에 의해 균열된다. 그러나 기존 질서에 대한 우순의 거부 역시 그녀가 속한 사회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우순이 사용하는 “그물과 올가미”는 당대의 역사적·정치적 맥락을 가로지르며, 기존의 사유 방식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기쁨을 상상하는 순간에도 정서의 사회문화적 특수성은 지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
낸다.

IV. 마치며

블레이크는 정서를 해방의 도구이자 통제의 수단으로 바라보며, 인간 정서가 단순히 순수한 감각이나 이데올로기적 고착으로 환원될 수 없는 광범위한 스펙트럼 위에 존재함을 보여준다. 그는 이를 통해 감정체제와 개별 감정의 관계를 단순한 지배와 저항의 이분법으로 환원하지 않고, 오히려 감정의 정치성을 정교하게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앞서 살펴보았듯, 굴뚝 청소부 소년은 기쁨이라는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구조적 불행과 사회적 불평등에 눈감게 되었지만, 동시에 그 이데올로기의 언어를 되돌려 사용함으로써―블레이크의 표현을 빌리면 “아폴로를 그의 활로 찌르듯”(piercing Apollon with his own Bow, “Jerusalem” 12:14)―그 약속의 지연을 고발한다. 소년이 마땅히 누려야 할 기쁨이 무기한으로 유예되고 있다는 아이러니는 기쁨의 이데올로기가 불행의 원인을 완전히 은폐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알비온의 딸들의 비전』에서 우순은 기존 체제 내에서 규범화된 유리즌적 기쁨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역동적이고 대안적인 기쁨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러나 블레이크는 이러한 기쁨의 힘이 곧바로 대안적 정치로 또는 집단적 실천으로 발전되리라 낙관하지 않는다. 브로미온뿐 아니라 세오터먼 역시 “갓난 기쁨을 노래하고”(sing your infant joy), “축복을 향유하라”(drink your bliss)는 우순의 초대에 응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알비온의 딸들이 그녀의 애통함을 듣고 그녀의 한숨을 반향했다”는 구절을 근거로 우순의 시도가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분석한 바와 같이, 우순의 외침은 ‘애통’이나 ‘한숨’이 아니라 ‘기쁨’과 ‘욕망’의 외침이었다. 알비온의 딸들이 그녀의 기쁨이 아닌 한숨만을 반향한다는 것은 기쁨의 확산 가능성을 차단하는 셈이며, 윌리엄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 자체로 “이데올로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44) 즉 사회적 규범에 저항하는 듯한 감정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곧 자율성을 담보하거나 체제 균열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네 번째 동판(plate 4)의 삽화는 이러한 우순의 해방적 기쁨이 지닌 양가적 성격을 시각적으로 포착한다. 삽화 속 우순은 태양이 반쯤 떠오른(또는 반쯤 진) 새벽녘, 문턱에 앉아 얼굴을 무릎에 묻고 있는 세오터먼 위를 날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발목에는 바닥의 커다란 돌과 연결된 굵은 사슬이 채워져 있다. 발이 묶인 채로 나는 모습, 반쯤 떠오른 태양, 경계의 공간인 문턱은 인간 정서가 향하는 두 가지 상반된 방향을 시사한다. 우순이 자신을 “비존재의 경계에서 울고 있는 외로운 그림자”(A solitary shadow wailing on the margin of non-entity, 7:15)라고 칭하는 대목은 그녀가 존재와 비존재 사이, 즉 현 체제 안에서 비존재가 되거나, 새로운 체제를 구축해 기존 체제를 비존재화하려는 경계 위에 서 있음을 시적으로 드러낸다.


  1. 1)柳先茂 아주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최근 논문으로는 「신유물론 시대에 문학 읽기」(2020)가 있다.Saree Makdisi, William Blake and the Impossible History of the 1790s (Chicago: U of Chicago P, 2003) xiii면.
  2. 2) 페미니즘과 이데올로기 비평의 상호 연관성과 차이점에 대한 논의로는 Stacy Alaimo and Susan Hekman, “Introduction: Emerging Models of Materiality in Feminist Theory,” Material Feminism, ed. Stacy Alaimo and Susan Hekman (Bloomington and Indianapolis: Indiana UP, 2008) 참조. 페미니스트적 낭만주의 비평은 Anne K. Mellor, Romanticism and Gender (New York: Routledge, 1992)를 필두로 시작되었고, 이 글에서는 Helen P. Bruder, William Blake and the Daughters of Albion (New York: Palgrave, 1993)과 Tristanne Connolly, William Blake and the Body (New York: Palgrave, 2002)의 논의를 참조한다.
  3. 3) Eve K. Sedgwick, Touching Feeling: Affect, Pedagogy, Performativity (Durham: Duke UP, 2003); Brian Massumi, “The Autonomy of Affect” Parables for the Virtual: Movement, Affect, Sensation (Durham: Duke UP, 2002) 23~45, 31면 참조.
  4. 4) Massumi, 같은 책 36면.
  5. 5) 인문학에서의 마수미의 영향력과 정동 연구의 복잡한 방향성에 대해서는 Melissa Gregg and Gregory J. Seigworth ed., The Affect Theory Reader (Durham: Duke UP, 2010)의 서문 “An Inventory of Shimmers” 1~25면 참조.
  6. 6) Mary Favret, “The Study of Affect and Romanticism,” Literature Compass 6.6 (November 2009) 1159~66면.
  7. 7) Thomas Pfau, Romantic Moods: Paranoia, Trauma, and Melancholy, 1790-1840 (Boltimore: Johns Hopkins UP, 2005) 11면.
  8. 8) 같은 책 10, 17면.
  9. 9) Stephen Goldsmith, Blake’s Agitation: Criticism and the Emotions (Boltimore: Johns Hopkins UP, 2011).
  10. 10) 같은 책 311면.
  11. 11) 블레이크의 육체와 육체에서 기인하는 에너지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에 대한 정리는 Alicia Ostriker, “Desire Gratified and Ungratified: William Blake and Sexuality,” An Ilustrated Quarterly Blake 16.3 (Winter 1982/1983) 156~64면 참조.
  12. 12) Richard Sha, Perverse Romanticism: Aesthetics and Sexuality in Britain, 1750-1832 (Boltimore: Johns Hopkins UP, 2009).
  13. 13) Kevin Hutchings, “Nature. Ideology, and the Prohibition of Pleasure in Blake’s ‘Garden of Love,’” Romanticism and Pleasure, ed. Thomas Schmid and Michelle Faubert (New York: Palgrave, 2010) 204면.
  14. 14) 앞의 책 28면.
  15. 15) Adam Potkay, The Story of Joy: From the Bible to Late Romanticism (Cambridge: Cambridge UP, 2007).
  16. 16) William Blake, The Complete Poetry and Prose of William Blake, ed. David V. Erdman (New York: Doubleday, 1988). 앞으로 이 책의 인용은 괄호 안에 작품명과 동판 번호: 시행 순으로 표기.
  17. 17) Tristanne J. Connolly, William Blake and the Body (Houndmills, Basingstoke and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02) 192~93면.
  18. 18) 사실 마수미와 같은 비인지주의적 이론가는 이데올로기 밖 신체에서 기원하는 정동에 집중하지만, 정동 이론은 상당히 이질적인 이론들이 묶여 있는바, 정동의 개념적 정의를 보더라도 비의식적 과정만을 의미하기도, 또는 이데올로기가 몸에 새겨지는 다소 의식적인 과정을 의미하기도, 또는 그 사이의 애매한 경험을 의미하기도 한다. 피글로위츠(Marta Figlerowicz)의 지적처럼 정동 이론은 비의식적인 정동과 의식적인 (정동)경험 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그 주요 목적 중의 하나로 보아야 한다, Marta Figlerowicz, “Affect Theory Dossier: An Introduction,” Qui Parle 20.2 (Spring/Summer 2012) 4면 참조.
  19. 19) 김성호는 정동 이론의 이질성을 지적하면서, 비의식적인 affect에 국한해서 정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정동 이론의 다양한 용례를 포괄하는 용어로는 정서를 사용한다. 이 글에서도 affect theory를 ‘정동 이론’으로 번역하는 것과 비의식적 정서에 국한해서 정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김성호의 선례를 따라 ‘정서’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블레이크에게도 몸에서 기인하는 정동의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개념은 인간의 신체와 연동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잠재성과 순간성으로만 드러나는 영원자의 신체와 연동되는 것이다. 김성호 「정동적 미메시스: 정동 순환의 매체로서의 소설」, 『안과밖』 48 (2020) 14~38면.
  20. 20) Potkay, 앞의 책 172면.
  21. 21) Laurent Berlant, Cruel Optimism (Durham: Duke UP, 2011) 1면.
  22. 22) Sara Ahmed, “Happy Objects,” The Affect Theory Reader (Durham: Duke UP, 2010) 50면.
  23. 23) 같은 글 30면 .
  24. 24) Nicholas Williams, Ideology and Utopia in William Blake’s Poetry (Cambridge: Cambridge UP, 1998) 2장 특히 63~68면 참조.
  25. 25) 블레이크도 마지막 행에서 소년이 제시한 평등 비전의 한계를 인지하고 있으므로 소년의 천국을 묘사하는 이 시의 삽화 중 일부에서 여전히 인종적 차이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6. 26) Potkay, 앞의 책 175면.
  27. 27) 대표적인 비평가로는 Harold Bloom, Blake’s Apocalypse: A Study on Poetic Argument (New York: Cornell UP, 1970) 101~16면; Jean Hagstrum, The Romantic Body: Love and Sexuality in Keats, Wordsworth, and Blake (Knoxville: U of Tennessee P, 1985) 114~15면; James E. Swearingen, “The Enigma of Identity in Blake’s ‘Visions of the Daughters of Albion,’” The Journal of English and Germanic Philology 91.2 (Apr. 1992), 203~15면이 있다.
  28. 28) Morton Paley, Energy and Imagination: A Study of the Development of Blake’s Thought (Oxford: Clarendon P, 1970) 35~36면
  29. 29) Helen Bruder, William Blake and the Daughters of Albion (London: Macmillan P, 1997) 55면.
  30. 30) 같은 책 75~77면 참조.
  31. 31) David Aers, “Blake: Sex, Society and Ideology,” Romanticism and Ideology: Studies in English Writing 1765-1830, ed. David Aers, Jonathan Cook, David Punter (London: Routledge, 1981) 27~43면.
  32. 32) Richard Sha, Perverse Romanticism: Aesthetics and Sexuality in Britain, 1750-1832 (Baltimore: Johns Hopkins UP, 2009) 205면.
  33. 33) 같은 책 45면.
  34. 34) 같은 책 47면.
  35. 35) Foster Damon, A Blake Dictionary: The Ideas and Symbols of William Blake (London: UP of New England, 1988) 42~44면.
  36. 36) 블레이크가 오감의 감옥을 경계했으나, 이를 “영혼과 분리된 육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블레이크의 심신이원론 비판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즉 육체/오감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감의 정화를 통한 확대된 감각으로 세상을 경험해야 한다는 의미다. 『천국과 지옥의 결혼』(Marriage of Heaven and Hell)의 “지각의 문이 정화되면 만물이 존재하는 대로 보일 것이다. 무한하게”(If the doors of perception were cleansed every thing would appear to man as it is, Infinite, 14:13~14)라는 주장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나듯이, 블레이크에게 인간의 감각은 여전히 세상을 경험하는 도
    구다.
  37. 37) 전통적 비평은 블레이크를 경험주의의 강력한 비판자이자 자연주의의 적으로 보았지만, 최근 비평 경향은 이를 재해석하고 있다. 많은 비평가는 블레이크가 현상세계에 묶여 있던 감각기관을 해방시켜, 감각을 진리에 도달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커널리는 블레이크가 “경험주의를 일종의 신비주의의 형태로 수정했다”(revising a form of empiricism into a form of mysticism)고 분석하며(Connolly, 앞의 글 30면), 그린(Matthew Green)은 ‘비전을 지닌 물질주의’(visionary materialism)라는 개념을 통해, 블레이크가 감각의 물질성과 상상력의 초월성의 이분법을 극복했다고 평가한다. Matthew J. A. Green, Visionary Materialism in the Early Works of William Blake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05) 3면.
  38. 38) Benedict de Spinoza, Ethics in A Spinoza Reader: The Ethics and Other Works, ed. and trans. Edwin Curley (Princeton: Princeton UP, 1994) 161면.
  39. 39) Bruder, 앞의 책 82면.
  40. 40) Karen Hadley, “Blake’s Visions of the Daughters of Albion and the Biopolitical Unconscious,” PMLA 133.2 (2018) 314~28면.
  41. 41) Green, 앞의 책 148면.
  42. 42) Christopher Z. Hobson, Blake and Homosexuality (New York: Palgrave, 2000) 35면.
  43. 43) 김성호, 앞의 글 17면.
  44. 44) Williams, 앞의 책 9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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