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호] [이론과쟁점] 도상, 지표, 상징: 피카소의 입체주의와 회화 기호의 현대적 확장 / 조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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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기호학적 전환? 기호학적 모험!

미술은 기호다. 즉 부재하는 어떤 것을 대신 나타내는(re-present, 재-현하는) 다른 어떤 것이다. 가령 구석기시대의 동굴에 혈거인 화가가 그린 각종 동물 그림은 그 시절 동굴 바깥을 활보하던 해당 동물을 대신 나타내지, 그 동물 자체는 응당 아니다. 그런데 동굴의 그림을 보면서 그것이 동굴 바깥의 동물을 대신 나타낸다고 어떻게 알까? 그림과 그것이 재현하는 대상, 이 둘이 유사한 시각 경험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림은 대상과 시각적으로 유사해야 대상을 대신하는 기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대상을 시각적으로 유사하게 재현하는 기호를 도상(icon)이라고 한다. 그리고 시간적으로 서양미술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대 이전의 미술, 즉 대략 3만 년 전부터 19세기 초까지의 미술은 모두 도상적 기호였다.1) 물론 시각적 유사성에 대한 이해 또는 요구는 시대마다 달랐다. 그래서 인간의 형상을 도상적으로 재현하는 미술이라도 고대 이집트 무덤의 부조와 고대 그리스 묘비의 부조와 중세 수도원 기둥의 부조에 묘사된 인간은 저마다 다른 모습이다. 하지만 묘사의 양식은 다르다 해도 인간의 도상이 예컨대 코끼리의 도상으로 혼동될 일은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현대 이전의 미술은 모두 세계의 어떤 대상을 재현하는 도상적 기호였다는 말의 의미다.

현대미술은 미술의 역사를 지배한 이 도상적 재현, 간단히 줄여 재현을 거부하면서 시작되었다. 시초는 19세기 전반에 등장한 낭만주의였는데, 재현의 원리를 미학적으로 체계화하고 규범화한 근대의 미학, 즉 고전주의에 최초로 반기를 든 미술이 낭만주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현의 거부는 쉽지 않았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심리적 이유로, 미술이 발명된 선사시대부터 재현의 원리는 존재의 간직이라는 미술의 기본 개념과 논리적으로 단단히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사회적 이유로, 미술에 대한 이 심리적 요구를 이상적 미학으로 발전시킨 고전주의를 강력하게 수호하는 제도, 즉 미술 아카데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1648년에 프랑스의 절대군주 루이 14세가 설립한 왕립회화조각아카데미는 구시대의 제도였지만, 프랑스대혁명 이후 현대에도 놀라운 생명력을 유지하며 고전주의에서 벗어나려는 미술의 현대적 시도를 철저하게 탄압했다.2) 살롱이라는 전시 제도와 로마상이라는 포상 제도를 무기로 한 아카데미의 탄압은 워낙 강고해서, 19세기에 현대미술은 고전주의와 맞서 싸우느라 한 세기를 다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낭만주의부터 마네를 거쳐 초기 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19세기 미술의 현대적 시도는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고전주의에 대항했고, 그 과정에서 세계의 재현으로부터 점점 멀어졌지만 이를 완전히 뿌리치지는 못했다. 몇 가지 예만 들어도,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의 「돌진하는 장교」(Chasseur de la garde, 1812), 마네의 「올랭피아」(Olympia, 1863), 모네의 「생 라자르 역」(La Gare Saint-Lazare, 1877), 세잔(Paul Cézanne)의 「생트 빅투아르 산」(Montagne Sainte-Victoire, 1885~1906) 등은 주제의 측면이나 양식의 측면 모두에서 고전주의 미학에 반하는 작품들이지만, 그래도 각 회화에서 재현된 대상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요컨대 19세기 현대미술은 고전주의를 거스른 수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도상적 기호라는 범주를 완전히 척결하지는 못했다는 이야기다.

바로 여기에 “[입체주의] 콜라주의 비범한 공헌”이 있다고 크라우스(Rosalind Krauss)는 썼다. 입체주의 콜라주는 “회화예술 내에서 기호가 수반하는 재현 가능성의 조건들을 체계적으로 탐구한 (…) 첫 번째 사례”라는 것이다.3) 여기서 크라우스가 말하는 ‘콜라주’란 정확히 말해 파피에 콜레(papier collé), 즉 피카소(Pablo Picasso)가 종합적 입체주의 시기(1912~14)에 몰두한 새로운 작업을 의미하고, 이 작업의 ‘비범한 공헌’이란 세계와 유사한 도상이 지배했던 회화의 재현적 기호 체계에 세계와 유사성이 전혀 없는 자의적 상징(symbol)이라는 기호를 도입한 시도를 가리킨다. 많은 학자가 이를 ‘기호학적 전환’이라고 일컬으며 높이 평가했는데, 실로 피카소의 파피에 콜레가 현대회화의 역사에서 결정적 작업인 것은 맞다. 왜냐하면 상징의 도입은 현대회화가 드디어 세계의 무언가를 재현하는 도상에서 벗어나 세계의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 추상이라는 특유의 미학적 성취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피카소가 종합적 입체주의에서 일으킨 ‘기호학적 전환’을 가장 먼저 알아본 이는 일찍이 1910년대 당대의 야콥슨(Roman Jakobson)이었다.4) 그의 선구적 이해는 반세기 이상 잠복했다가 1970년을 전후로 프랑스와 미국의 학자들에 의해 되살아나면서 1990년대가 되면 하나의 정설로 자리잡았다.5) ‘기호학적 해석’이라 불리는 이 입장의 특징은 두 가지다. 상징의 도입에 의한 도상의 대체 또는 파괴를 강조한다는 것과 상징의 작용을 설명하는 데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구조주의 언어학을 활용한다는 것이 그 둘이다.

나는 피카소의 종합적 입체주의에 대해 제시되어온 여러 해석6) 중에서 기호학적 해석의 설득력을 높이 사는 편이지만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데, 두 가지 문제가 걸리기 때문이다. 첫 번째 문제는 피카소가 파피에 콜레에 도입한 상징이 도상을 폐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폐기된 것은 도상의 지배 또는 우위일 뿐이다. 게다가 피카소의 파피에 콜레에서 작용하는 회화적 기호에는 도상, 상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표(index)라는 다른 기호도 있다. 지표는 분석적 입체주의 시기에 등장한 기호이지만, 파피에 콜레에서도 도상, 상징과 더불어 중요한 작용을 한다. 두 번째 문제는 기호학적 해석자들이 파피에 콜레를 설명하는 데 구사하는 ‘도상’ ‘지표’ ‘상징’ 같은 용어의 출처가 소쉬르의 언어학이 아니라 퍼스(Charles S. Peirce)의 기호학이라는 것이다. 세 용어는 기호가 대상을 표상하는 상이한 방식, 즉 대상과의 유사성, 대상의 물리적 현존, 대상과 무관한 법칙적 관계를 가리킨다.7) 이 가운데 소쉬르의 기호 개념과 얼추 상응하는 것이 퍼스의 상징 개념이라, 기호학적 해석자들이 파피에 콜레의 ‘기호학적 전환’을 도상으로부터 상징으로의 이행이라고 제시한 후 상징의 작용을 소쉬르의 기호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에는 별 문제가 없다. 문제는 다시 첫 번째로 돌아가 파피에 콜레에서 상징은 도상을 대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더불어 작용하고 있는 또 하나의 기호, 즉 지표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기호학적 해석의 통찰을 반갑게 수용하면서도, 그 해석의 과장은 제한되어야 하고 해석의 범위도 확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로 회화 기호에 대한 피카소의 탐구는 종합적 입체주의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입체주의 전체를 관통하며, 심지어는 좀 더 이른 시기의 작업도 있다. 이를 나는 피카소의 ‘기호학적 모험’이라 부르고자 하는데, 이 모험은 서양 회화의 유구한 전통인 ‘세계와 유사한 재현의 투명성’을 교란하는 작업부터 회화의 현대적 전환 과정에서 진행된 ‘평면화의 물질적 근거를 정립’하는 작업을 거쳐 ‘세계와 유사하지 않아도 성립하는 회화의 가능성’을 개척한 작업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펼쳐졌다.

이 모험의 중요한 귀결이 추상 회화다. 그런데 피카소가 없었다면 추상 회화가 도래하지 않았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종합적 입체주의 개시 시점에 이미 추상 회화로 나아가는 여러 모색이 있었고, 피카소의 작업은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8) 게다가 피카소는 “완전한 회화적 추상 영역으로 뛰어들고 싶다는 바람을 결코 내비친 적이 없다.”9) 그럼에도 나는 추상 회화의 발전에 피카소의 입체주의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보는데, 회화라는 기호를 심문하고 탐색해간 그의 작업이 회화와 재현의 전통적 관계를 전복하고 나아가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개척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피카소의 입체주의는 재현의 현대적 방식, 즉 회화 외부의 세계가 아니라 회화 내부의 매체에서 출발하는 재현의 방식을 개발했고, 그다음에는 세계를 전혀 재현하지 않아도 성립하는 회화의 가능성, 즉 회화 내부의 구성만으로 충분한 회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글은 피카소의 기호학적 모험이 어떻게 회화 기호를 현대적으로 확장했는지, 그리고 이 확장이 어떻게 추상 회화의 발전에 논리적 근거와 물질적 토대를 제공했는지를 입체주의 전반에 걸쳐 규명하고자 한다.

1. 입체주의 들머리: 도상적 재현의 투명성에 대한 교란

범접할 수 없는 기량을 나타내 스승의 붓을 꺾었다는 전설로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는 레오나르도(Leonardo da Vinci)다. 도제로 수련했던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의 공방에서 스승을 도와 일부(맨 왼쪽 아래 천사)를 그린 「그리스도의 세례」(Baptism of Christ, 1872~75)가 문제의 작품이다.10) 레오나르도의 나이 23세 때의 일이다. 피카소에게도 같은 전설이 있다. 아카데미 양식의 화가이자 미술학교 교수로, 그림에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낸 아들을 가르치던 피카소의 아버지가 자신의 미완성 스케치를 놀랍도록 정확한 기법으로 완성해놓은 작업을 보고 회화를 포기하겠다는 맹세를 했다는 것이다. 피카소의 나이 13세 때의 일이다.11) 재미난 이야기이지만, 대상을 시각적으로 정확하게 묘사하는 이 도상적 재현의 능력이 피카소를 현대미술사에서 넘보기 힘든 분수령이 되게 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바로 이 능력이 있었기에 피카소는 기존 회화의 어떤 양식에든 쉽사리 통달해서 이질적 양식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고, 이것이 도상의 투명성을 뒤흔드는 작업에 크게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가령 피카소의 1904~1905년 작 「라팽 아질에서」(Au Lapin Agile, 그림 1)가 좋은 예다. 이 작품은 한 화면에서 세 가지 다른 양식을 보여주는데, 원경의 기타리스트는 마네, 중경의 여성은 툴루즈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 전경의 광대는 피카소 자신의 청색 시기 양식이다. 하나의 화면에 이렇게 서로 다른 양식들이 등장하면 시각적 통일성이 깨지고, 그러면 도상적 기호가 순조롭게 재현 작용을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 화면은 몽마르트르의 유명한 술집 정경을 재현하기보다 각 양식 자체로 주목을 이끌며, 이 이질적 양식들의 인용과 대조는 피카소가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수단이 된다. 피카소가 자신을 광대로 등장시켜 연결한 미술의 계보, 즉 그의 작업은 마네와 툴루즈로트레크를 잇는 현대회화의 흐름 안에 위치한다는 것이 그 의미다. 그렇다면 여기서 각 양식은 그 술집에 자리한 기타리스트, 여인, 광대를 재현하는 도상적 기호라기보다 피카소가 전하고자 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구사한 “일종의 언어”12)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라팽 아질에서」의 효과는 입체주의의 개시작이라고 알려져 있는 1907년의 회화 「아비뇽의 아가씨들」(Les Demoiselles d’Avignon, 이후 「아비뇽」으로 약칭. 그림 2)에서 더욱 강화되는데, 이제는 화면에 등장한 이질적 양식의 범위가 서양미술의 전통을 넘어 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미술 같은 비서구/주변부 미술로까지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가로세로 모두 2미터가 넘는 이 대작은 다섯 누드 입상을 보여주지만, 르네상스 이후 면면히 이어져온 근대 누드화의 전통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아비뇽」은 마네의 작업, 즉 비너스 여신을 참칭했던 고전주의 누드화의 관음증을 매춘부의 현실적 육체로 폭로한 작품을 적극 계승했다. 「올랭피아」보다 더 납작해지다 못해 각이 진 여성들의 신체 형상, 그리고 더 압축되다 못해 형상들과 전경에서 뒤섞이는 공간은 누드화의 관습, 즉 섬세한 명암법의 형상과 명료한 원근법의 공간을 패러디한 마네의 작업을 한층 강화한 것이다. 여기에 추가된 것이 서양 여성들의 연분홍 신체에 이베리아 및 아프리카 마스크를 씌운 얼굴인데, 이 같은 주변부적/비서구적 요소가 「라팽 아질에서」보다 양식적 이질성을 훨씬 더 두드러지게 함은 물론이다. 이는 시각적 통일성을 더욱 강력하게 파괴하면서 “3차원과 색채를 평평한 표면에 재현하는 회화의 기본 과제를 (…) 일거에 깨뜨린 결정적 한 방”이었다고 당시 피카소의 화상이자 친구였던 칸바일러(Daniel-Henry Kahnweiler)는 썼다.13) 「아비뇽」을 “성격상 외상적 조우”(traumatic encounter)라고 본 스타인버그 또한 “불길한 매춘부들이 미술의 탈승화를 무시무시하게 상연[하는] (…) 이 그림은 전통의 세 가지 마법―이상화, 정서적 거리, 고정 초점 원근법―을 파괴한다”14)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라팽 아질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비뇽」에서도 도상은 ‘언어적’ 기호 역할을 한다. 전자가 현대회화의 역사 안에서 자신이 선 자리를 나타냈다면, 후자는 자신의 작업이 과거 고전주의 회화의 전통과 급진적으로 단절한다는 뜻을 전하는 것이다.

피카소가 도상의 투명한 작용을 좌절시키는 데 활용한 것이 복잡한 양식적 이질성만은 아니었다. 그는 애매한 도상도 구사했는데, 「아비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온 드로잉 한 점은 아주 단순한 도상도 불투명할 수 있음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서 있는 누드」(Standing Nude, 1907, 그림 3)가 문제의 작품으로, 스타인버그의 정밀한 분석에 따르면 이 드로잉은 한 여성의 정면과 후면이 함께 장착된 애매한 도상이다. 인물을 묘사한 모든 선이 이중적 의미작용을 하기 때문인데, 머리·목·상체·가슴 한쪽·하체, 그리고 팔을 나타내는 선들이 절묘하게도 이 도상을 정면으로도 또 후면으로도 볼 수 있게 한다. 구체적으로, 머리는 얼굴을 어깨 뒤로 돌린 후면 방향의 모습인가 하면 얼굴이 4분의 3만 보이는 정면 방향의 모습이기도 하다. 상체의 오른쪽에 그려진 가슴은 뒤에서 본 오른쪽 가슴일 수도 있고 앞에서 본 왼쪽 가슴일 수도 있다. 얼굴과 상체를 잇는 목, 드로잉 왼쪽의 늘어뜨린 팔을 양방향으로 보기는 더 쉽다. 잘록한 허리 아래 풍만한 하체에는 그렸다가 지운 듯 희미한 선의 흔적이 보이는데, 이는 후면 둔부의 꼬리뼈 부위일 수도 있고 전면 복부의 치골 부위일 수도 있다. 이 드로잉에서 제일 까다로운 부분이 오른쪽의 접어 든 팔인데, 뻗은 엄지손가락이 별도로 위에 그려져 있어 상체 뒤에서 본, 손가락을 펼친 오른 손바닥의 모습으로도 또 상체 앞에서 본, 손가락을 접은 왼 손등의 모습으로도 볼 수 있다.15)

15)스타인버그는 피카소의 이 드로잉이 애매한 도상에 대한 곰브리치(Ernst Gombrich)의 유명한 명제를 반박하는 증거라고 보지만, 이는 지나친 주장이다. 『예술과 환영』(Art and Illusion)에서 곰브리치는 잘 알려진 오리-토끼 그림을 예로 들어, 애매한 도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대안적 도상 각각이지 애매함 자체는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16) 다시 말해 오리-토끼 그림을 볼 때 우리는 오리를 보거나 아니면 토끼를 보거나 할 수 있을 뿐 오리와 토끼를 동시에 볼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피카소의 드로잉 「서 있는 누드」에서도 우리는 전면을 보거나 아니면 후면을 보거나 할 수 있을 뿐이지 전면과 후면을 동시에 볼 수는 없다. 따라서 피카소의 이 드로잉은 스타인버그의 생각과 달리 곰브리치의 주장을 반증하는 예가 아니라 애매함을 통한 도상의 불투명성을 입증하는 예로 보아야 한다.

간추리면, 입체주의의 들머리에 피카소는 양식의 이질성과 애매한 도상을 구사하여 세계를 직접 그리고 투명하게 재현한다는, 도상에 대한 전통적 믿음을 근본적으로 교란했고, 이를 통해 하나의 도상이 두 가지의 애매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도상적 화면에서 직접 재현되지 않는 의미까지 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개척했다고 할 수 있다.

2. 분석적 입체주의: 지표의 도입과 재현 구조의 반전

「라팽 아질에서」가 말해주는 것이 피카소가 현대 화가로서 품었던 자의식이라면, 「아비뇽」은 피카소가 현대 화가로서 작정한 작업 방향을 말해준다. 서양미술의 전통, 즉 고전주의와 단절하겠다는 것이 그 방향이고, 이 급진적 단절을 위해 동원한 것이 아프리카 미술 같은 요소였다. 그런데 이러한 비서구적 요소의 도입이 입체주의만의 독보적인 일은 아니었다. 다시 칸바일러가 알려주듯이, 아프리카 미술의 활용은 당시 유럽 현대회화에서 “기존 전통과 단절하는 작업을 시작할 때 흔히 나타났던 현상”17)이었기 때문이다. 독보적이었던 것은 이 단절 작업 이후 피카소가 회화의 물질적 조건을 출발점으로 삼는 구성 방법을 모색한 일인데, 바로 여기서 서양회화는 처음으로 지표라는 기호가 주도적 구성요소로 등장하는 작품을 보게 된다.

이 모색의 진가를 음미하려면 회화의 구조에 대한 일별이 필요하다. 누구나 알듯이, 회화는 3차원의 입체를 매체로 하는 조각과 달리 2차원의 평면을 매체로 하는 예술이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회화는 두 가지 평면으로 이루어진다. ‘표면’과 ‘화면’이 그 둘이다. 표면(surface/support)은 캔버스 등의 매체가 지닌 물질적 평면이고, 화면(picture plane)은 그러한 표면 위에 화가가 그린 구성적 평면이다. 전통적으로 회화는 세계를 재현했고 세계는 3차원적 입체와 공간의 대상이기 때문에, 세계를 재현하는 회화는 응당 표면을 부정하고 은폐하는 화면을 구성해야 했다. 가령 다비드(Jacque-Louis David)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Napoleon Crossing the Alps, 1801~1805)을 보면 나폴레옹과 말의 다부진 입체감과 알프스산맥의 깊은 공간감이 실감나게 펼쳐지는데, 하지만 이 실감은 착시 효과다. 입체도 공간도 들어설 여지가 없는 2차원의 평면에 명암법과 원근법을 써서 입체감과 공간감을 가짜로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착시 효과를 미술에서는 환영주의(illusionism)라고 하며, 환영주의의 성공 여부는 화면이 표면을 얼마나 감쪽같이 숨기는가에 달려 있다. 즉 표면을 의식하지 못하게 해야 전통 회화에서는 성공적인 화면이다.

이러한 전통 회화의 성공적 화면과 정반대인 화면, 즉 표면을 의식하게 하는 화면을 구성하려는 것이 바로 분석적 입체주의를 초기부터 후기까지 시종일관 관통한 노력이다. 그런데 표면을 의식하는 화면의 모색도 분석적 입체주의가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마네의 회화를 “최초의 모더니즘 회화”라고 지목했던 것도 “그림이 그 위에 그려지는 바탕의 평평한 표면을 (…) 솔직하게 선언”한 화면의 창출에 있었기 때문이다.18) 실로 마네 이후 현대회화는 회화의 물질적 바탕, 즉 표면을 부각하는 화면을 구성하는 방향으로 일관되게 나아갔고, 그래서 입체감과 공간감이 날로 축소되면서 점점 평면화되어간 화면은 이미 입체주의 이전부터 출현하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최소한 19세기 중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현대회화의 이러저러한 평면화 흐름에서 분석적 입체주의는 아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이 새로운 양식이 평면화를 추구했던 기왕의 어떤 양식과도 달리 평면화의 물질적 토대인 표면을 인정하고 명시하는 회화 기호를 개발했고 이를 통해 현대회화의 평면화 추세에 확실한 근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회화에서 표면을 명시하는 대표적 기호로 선을 꼽을 수 있다. 캔버스나 종이 위의 선은 그 무엇이기 전에 해당 물질적 표면의 존재를 입증하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표면이 없다면 선이 그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분석적 입체주의에서 선은 당초 8자 모양의 곡선에서 시작해 점차 격자 모양의 직선을 취하며 선의 네트워크를 이루었다. 바로 이 선의 네트워크가 “순수히 지표적인 기호”로서, 오직 “캔버스 자체의 표면을 가리키는” 기호다.19)

지표가 회화의 요소로서 출현한 것은 1907년 말의 「여성 누드」(Female Nude, 그림 4)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피카소는 대략 8자 모양의 곡선 그물망을 먼저 그린 후 그 망에 어울리는 형태, 주로 끝이 뾰족한 타원형을 끼워넣어 여성의 신체 형상을 재현했다. 여기서 화면은 두 팔로 머리를 감싼 채 뒤돌아보는 누드를 얼추 보여준다고 할 수 있지만, 누드의 묘사는 화면의 중앙에서 수직으로 교차하는 강한 대각의 곡선 구조에 맞추어 매우 단순화되어 있다. 이러한 작업을 부아는 지표와 도상을 결합한 “단일 표기 체계”(unitary system of notation)20)의 추구라고 설명했는데, 이는 다소 부정확한 설명이다. 왜냐하면 「여성 누드」에서 피카소가 시도한 것은 단순히 지표와 도상을 결합한 재현의 방식이 아니라 지표가 도상을 주도하는 재현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화면에 군데군데 자리한 명암법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누드의 입체감은 매우 빈약하고 공간의 깊이감은 거의 없는데, 이는 3차원인 대상과 공간의 재현을 2차원인 회화 표면의 조건에 종속시킨 결과다.

회화의 출발점을 재현의 대상인 세계의 특성으로부터 재현의 조건인 표면의 특성으로 이동시킨 이 전환 이후 1910년까지 피카소의 작업은 지표의 변주 그리고 지표와 도상 사이의 경합과 긴장을 보여준다. 「여성 누드」를 확대한 1908년의 대작 「세 여성」(Trois femmes, 그림 5)은 강한 색채 대비와 명암법을 통해 매우 조각적인 인상을 준다. 그러나 마치 판금을 접어 안팎으로 우그린 것 같은 누드의 모난 입체감은 8자 모양 지표를 변형시킨 세 누드의 틀에 인체 형상을 끼워넣은 결과다. 풍만하고 둥근 여성의 신체가 경직되고 각이 진 틀 속에서 큼직한 기하학적 면들로 조각조각 나뉜 다음 조합된 것이다. 1909년 작 「오르타의 집들」(Maisons à Horta, 그림 6)에서 쓰인 지표는 하단이 잘린 대략 마름모꼴 모양이다. 이 마름모꼴은 집들이 늘어선 전경의 언덕을 구조화하는 틀이지만 산과 하늘이 펼쳐진 배경에서도 은은하게 메아리친다. 따라서 화면은 전반적으로 표면에 밀착하고 이로 인해 공간이 압축되는데(이는 특히 전경과 거의 이어진 듯한 오른쪽 배경에서 심하게 일어난다), 이렇게 공간이 얕아지면 그 속의 대상 또한 평면화의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어 지붕과 벽, 길과 담은 각지고 납작한 단면들로 벌어지며 펼쳐지는 어색한 모양이 된다.

그런데 아무리 어색한 모양이라도 아직까지는 대상의 형태가 인체든 집이든 도상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상태다. 그러나 1910년이 되면 표면의 지표인 선적 구조가 대략 직선의 격자 형태로 수렴되면서 대상의 형태마저 깨뜨리는 일이 벌어진다. 가령 1910년 봄 작품인 「만돌린을 든 소녀(파니 텔리에)」(Girl with a Mandolin(Fanny Tellier), 그림 7)를 보면 격자, 즉 캔버스의 사각 형태를 지시하는 지표가 화면 전체를 분할하는 가운데 소녀의 형상까지 침범해 파편화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이는 격자가 구성의 틀을 제공하고 이 틀이 대상의 형태를 좌우한 결과다. 말을 바꾸면, 격자는 2차원 평면이고 대상은 3차원 입체이니, 격자가 구성을 주도하면 대상은 입체적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격자에 맞추어 조각조각 파편화된 다음 격자와 결합하면서 평면화되는 것이다. 이후 지표는 날로 강력해져서, 1910년 가을에 완성된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Portrait of Ambroise Vollard, 1910, 그림 8)에서는 대단히 촘촘해진 격자가 인물의 입체적 형상을 거의 해체하다시피 파편화하여 표면에 평면적으로 펼쳐놓은 화면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초상’이니 ‘풍경’이니 하는 제목이 무색하게 우리가 분석적 입체주의 회화에서 인물이나 풍경의 온전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다.

이처럼 1910년경 분석적 입체주의 회화는 지표가 도상을 주도하는, 즉 표면이 화면을 끌고 가는 구성방식에 도달했고, 이를 통해 고전주의의 주요 원리 몇 가지를 결정적으로 파괴했다. 인간중심주의·형상중심주의·환영주의가 그것인데, 선사시대를 제외하면 서양미술의 역사 내내 가장 중요한 소재였던 인간의 형상이 산산조각났고, 그러자 형상 뒤에 머물렀던 공간이 형상과 뒤섞이며 형상과 공간의 경계와 위계를 흐렸으며, 대상의 명암법과 공간의 원근법이 있어야 확보되는 환영주의는 대상이 파편화되고 공간이 평면화되는 화면에서 도대체 유지될 수가 없었기 때문
이다.

그러면 분석적 입체주의는 지표로 도상을 대체했는가? 잠시 그럴 뻔했다. 1910년 여름 피카소가 카다케스에서 휴가를 보내며 한 작업에서는 격자의 구조가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가운데 도상의 흔적은 파편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작품들이 출현했던 것이다(가령 「만돌린을 든 여자」[Woman with a Mandolin], 그림 9). 알아볼 수 있는 형태가 없었으므로 이 작품들은 응당 추상에 가까워졌는데, 이 지점에서 피카소는 멈췄고 이후 도상을 부분적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1912년 작 「시인」(The Poet, 그림 10)에서 볼 수 있듯이, 화면을 지배하는 것은 격자 구조이고 이 구조에 따라 시인의 얼굴이 파편화되어 있다. 하지만 화면 여기저기에 형태의 일부 또는 전부를 그려넣은 머리카락·콧수염·귀·파이프 등은 도상으로서, 이 작품이 추상 회화가 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해서 분석적 입체주의는 세계의 재현이라는 회화의 전통적 임무를 유지했다. 그러나 재현의 전통적 방식은 거부했는데, 표면을 인정하고 명시하는 화면의 구성을 통해서였다.

요컨대 분석적 입체주의는 회화의 이중구조, 즉 표면과 화면의 전통적 관계를 뒤집어 재현의 현대적 방식을 정립한 양식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양식이 재현의 구조에 일으킨 근본적 변화다. 회화의 임무가 세계의 재현일 때 회화의 출발점은 언제나 외부세계에 있었다. 분석적 입체주의에서도 회화의 임무는 여전히 세계의 재현이지만, 그럴지라도 회화의 출발점은 이제 외부세계의 대상이 아니라 회화 내부의 조건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이동이 가능했던 것은 회화의 물질적 표면을 지시하는 지표적 기호를 도입하고 지표를 도상보다 우위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분석적 입체주의의 중요한 성취는 지표라는 기호를 도입해 회화 기호를 확장하고 도상을 지표에 종속시켜 일으킨 재현 구조의 반전이라 할 수
있다.

3. 종합적 입체주의: 상징에 잠재한 재현 구조의 초월 가능성

분석적 입체주의를 통해 현대회화가 구사할 수 있는 기호는 도상을 넘어 지표로까지 확장되었다. 1912년 가을에 개시된 종합적 입체주의는 또 다른 기호를 등장시켰는데, 여기에는 재현 구조의 반전을 넘어 재현 구조의 초월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잠재했다. 이번에 새로 출현한 기호는 상징으로서, 퍼스의 정의에 따르면 관습에 따라 작용하는 기호이고, 이 점에서 소쉬르가 『일반언어학 강의』(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에서 설명한 언어 기호와 유사한데, 퍼스가 상징의 예로 드는 것도 “단어, 문장, 책 등 모든 관습적 기호”21)다.

소쉬르에게서 기호가 기표와 기의의 두 항으로 구성된다면, 퍼스의 기호는 표상체·대상·해석체의 세 항으로 구성된다. 겉보기에 소쉬르는 2항체계, 퍼스는 3항체계로 차이가 있지만, 상징에 관한 한 퍼스의 기호와 소쉬르의 기호는 작동방식이 거의 비슷하다. 가령 ‘개나리’와 ‘능소화’(표상체, 기표)는 서로 다른 의미(해석체, 기의)와 법칙적으로 연결되고, 이 연결 법칙을 결정하는 것은 한국어 체계의 문화적 관습이다. 기호와 대상의 관계에서도 실질적 차이는 없다. 소쉬르에게서 기호의 의미는 기호 내부의 구조에서 발생하므로 기호 바깥에 있는 대상이 의미작용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면, 퍼스에게서는 상징의 의미가 해석체의 매개로 발생하고 이때 대상의 존재 유무는 관계가 없기 때문에 대상은 역시 의미작용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22) 더불어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퍼스의 상징도 소쉬르의 기호도 대상과의 유사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이다. ‘개나리’와 ‘능소화’는 해당 꽃들과 닮은 모습이 전혀 아닌 상태로 의미작용하는데, 이것이 바로 퍼스의 상징, 소쉬르의 기호다.

이제 피카소가 파피에 콜레에 도입한 상징을 살펴보자면, 크라우스의 치밀한 설명으로 유명한 작품 「바이올린」(Violin, 1912. 그림 11)이 좋은 예다. 분석적 입체주의 양식의 드로잉에 두 조각의 신문지를 붙인 이 작품에서 신문지들은 바이올린 드로잉의 오른쪽 위와 왼쪽 아래, 그리고 드로잉과 겹쳐서 또는 비켜서 붙어 있다. 이 작품에서 제목에 쓰인 바이올린을 의미하는 것은 드로잉이다. 분석적 입체주의 양식으로 펼쳐져 있어도 이 드로잉은 바이올린과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어 보는 즉시 해당 악기라는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문지들의 의미는 본다고 해서 곧바로 알 수가 없는데, 신문지에서는 형태가 의미작용의 근거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형태상 두 신문지는 각각 왼쪽 변에 있는 요철의 반원형으로 보아 직소퍼즐처럼 맞물리는 구조로 한 장의 신문지에서 오려낸 조각들이라는 것, 그리고 요철의 방향으로 보아 둘 중 하나는 뒤집어 붙인 조각이라는 것을 알려준다.23) 형태를 통해 우리가 신문지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가 전부다. 그런데 이 정도를 의미하려고 신문지들이 거기 붙어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 파피에 콜레에서 신문지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작용을 한다. 우선 두 조각의 신문지는 양자의 차이와 관계에 의해 앞과 뒤를 의미할 수 있다. 요철의 차이와 방향 때문에 한 조각은 앞면이고 나머지 조각은 뒷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왼쪽 아래의 신문지와 오른쪽 위의 신문지 가운데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가? 이는 두 신문지의 관계만으로는 결정되지 않고, 신문지들과 드로잉의 관계를 참작해야 결정할 수 있다. 다시 보면, 한 신문지는 바이올린 드로잉의 왼쪽 아래 몸통에 붙어 있고 다른 한 신문지는 바이올린 드로잉의 오른쪽 위 어깨 바깥에 붙어 있다. 이 위치와 관계의 차이가 왼쪽 아래 신문지는 앞, 오른쪽 위 신문지는 뒤라는 의미를 만들어낸다. 나아가 드로잉과의 관계는 이 앞뒤 신문지의 의미를 더 구체화하기도 한다. 이제 전자는 바이올린의 몸통에 붙어 있으니 이 악기의 나무 몸판이고, 후자는 바이올린 뒤에 붙어 있으니 이 악기의 배경인 공간 또는 이 악기를 걸어둔 벽이라는 또 다른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의미작용은 각 신문지의 형태와 관계가 없다. 관건은 두 조각 사이의 차이와 관계, 나아가 두 신문지와 드로잉 사이의 차이와 관계인데, 이 말은 신문지의 의미작용이 이 파피에 콜레의 구성적 체계 안에서 자율적으로 일어난다는 뜻이다. 마치 ‘개나리’와 ‘능소화’를 특정 봄꽃과 여름꽃을 뜻하는 기의와 연결하는 의미작용이 두 기표의 차이와 대응의 관습을 규제하는 한국어 체계 안에서 자율적으로 일어나는 것과 흡사하다. 따라서 두 신문지는 ‘보는’ 기호(도상)가 아니라 ‘읽는’ 기호(상징)로서, 피카소가 이 작품에 앞과 뒤, 악기의 앞 표면과 악기의 뒤 공간이라는 의미를 그리는 대신 써넣은 문자(script)24) 구실을 한다. 흥미롭게도 이 파피에 콜레에는 문자와 실로 비슷한 요소도 있다. 화면 중앙께에 그려진 f 자 모양의 사운드홀이 그것인데, 두 사운드홀은 크기가 심하게 달라서 오른쪽 f 자는 크고 왼쪽 f 자는 작다.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바이올린이 왼쪽 방향으로 회전한다는 것, 그런 회전이 가능한 공간이 왼쪽에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바이올린 왼쪽에 ‘보이는’ 공간은 없다. 그런데도 피카소가 작게 ‘써넣은’ 왼쪽 사운드홀은 큼직한 오른쪽 사운드홀과의 관계 속에서 바이올린의 회전과 공간의 단축을 너끈히 읽게 하는 상징 역할을 한다.

이를 크라우스는 미술의 역사를 지배해온 유사한 도상으로부터 회화의 기호를 해방시킨 결정적 조치로 상찬했다. 이 ‘기호학적 전환’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 그는 ‘개종’이라는 표현까지 썼는데, 이는 “환영 체계 안에서 한 유형이 다른 유형으로 바뀌는 변화가 아니라, 하나의 재현 체계 전체가 다른 체계로, 대략 도상적이라고 불리던 체계가 대략 상징적이라고 불리는 체계로 넘어가는 개종이었다”25)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피카소가 상징을 도입한 파피에 콜레에는 도상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지표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령 크라우스가 「바이올린」에서 상징으로 해석한 두 신문지는 그 단호한 물질적 평면의 특성을 통해 표면의 지표가 되기도 하며, 그러한 지표로서 도상의 환영을 억압하고 상징의 의미작용도 억제하는 작용을 한다. 바이올린 드로잉은 두 신문지 사이에 옹색하게 끼여 화면에 마음껏 펼쳐지지 못하며, 왼쪽의 작은 f 자가 의미하는 바이올린의 회전과 공간은 그것이 기입된 신문지의 즉물적 평면에 의해 반박당하기도 하는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피카소의 파피에 콜레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은 기호학적 전환(상징에 의한 도상의 대체 또는 파괴)이 아니라 이제 도상, 지표, 상징으로 다양해진 회화 기호의 확장이라고 해야 한다. 나아가 부아는 이렇게 확장된 회화 기호들이 끊임없이 “다의성의 게임”(polysemic game)에 돌입하여, 기호의 비-실체적 성격을 강조함과 동시에 의미작용의 비-고정성을 명시한다고 했는데,26) 그 결과가 파피에 콜레에서 풍부하게 일어나는 회화 기호의 향연이다. 이러한 회화 기호의 확장과 향연은 위에서 살펴본 「바이올린」보다 먼저 만들어졌고, 많은 학자가 최초의 파피에 콜레라고 추정하는 「기타, 악보, 유리잔」(Guitar, Sheet Music, and Glass, 1912, 그림 12)에서 석연히 볼 수 있다.

이 파피에 콜레에서 가장 큰 종이는 바탕에 붙인 벽지다. 마름모꼴 패턴 안에 꽃무늬가 들어 있는 이 벽지는 물질적 평면성에 의해 그것이 부착된 표면의 지표이지만, 동시에 그런 무늬의 벽지를 바른 벽의 도상으로서 그 위에 붙인 여섯 조각의 종이가 재현하는 기타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벽지는 기타의 몸통 부분에서도 보인다. 피카소가 해당 부분은 비워놓은 채 주변에만 돌아가며 종이들을 붙여놓았기 때문인데, 여기서 이 주변 종이들의 안쪽 가장자리들이 만드는 사다리꼴 윤곽 안의 벽지는 기타의 몸통 중앙부를 가리키는 상징이 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피카소의 파피에 콜레에서는 동일한 구성요소가 지표, 도상, 상징이라는 상이한 기호들의 역할을 중복해서 수행한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요소가 여러 다른 기호 역할을 하면 그에 따라 발생하는 의미가 각각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 파피에 콜레에는 상징이라는 하나의 기호에서도 얼마나 다양한 의미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특히 잘 보여주는 요소가 있다. 기타의 몸통 중앙부에 위치한 사다리꼴 모양이 그것인데, 이 사다리꼴은 음화 형태(negative form)다. 즉 그것은 주변에 붙인 종이 여섯 조각의 양화 형태(positive form)에 의해 그 모양으로 형성되었지만 실은 속이 빈 투명한 형태라는 이야기다. 이 음화 형태는 주변을 에워싼 양화 형태들이 함께 기타의 형태를 재현하기 때문에 가장 먼저 기타의 몸통 중앙부를 의미하게 된다. 그런데 이 사다리꼴은 피카소가 바탕에 붙인 벽지 위에 만들어진 탓에 음화 형태이면서도 불투명한 모습이다. 하지만 불투명해 보여도 이 형태는 그것이 음화인 한 투명함을 의미할 수 있는데, 이 의미를 확인해주는 요소가 바로 오른쪽 종이에 그려진 투명한 유리잔 드로잉이다. 그런가 하면 또한 음화 형태는 비어 있는 형태라 사다리꼴 윤곽은 주변의 양화 형태들 아래로 있을 수 있는 깊이를 의미할 수도 있다(비록 종이 한 장 두께에 불과한 깊이일지라도). 이 의미는 사다리꼴 윤곽의 상단과 파란색 기타의 목 하단에 걸쳐 있어 사운드홀을 상징하는 흰색 원, 즉 가장 위에 붙여서 그 아래 붙인 종이의 층들을 부각하는 원이 지지한다. 이렇게 사다리꼴 음화 형태가 깊이의 상징이 되면, 그 아래의 벽지는 이제 몸통의 투명한 표면을 통해 들여다보이는 기타의 이면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깊이를 상징하는 음화 형태 속에 있어도 벽지는 또 엄연한 평면이기 때문에 깊이를 부정하는 상징이 될 수도 있다.27)

기호의 향연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정녕 재기발랄한 의미의 퍼레이드다! 이제 피카소의 파피에 콜레가 개척한 회화의 새 지평에 대해 음미해보면, 우선 피카소는 파피에 콜레에 상징이라는 새로운 기호를 도입하여 회화에서 구사 가능한 기호의 범위를 최대치로 확장했다. 파피에 콜레에 도입된 상징의 의미작용은 ‘언어처럼’ 이루어져서 특정 요소와 특정 의미의 대응은 양자의 연결에 합당한 맥락을 부여하는, 파피에 콜레 자체의 구성 체계 내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파피에 콜레에서 상징의 의미작용은 외부세계와 무관하게 일어나므로 재현의 구조를 초월한다. 그러나 파피에 콜레에는 상징과 더불어 도상도 존재하기 때문에 재현 구조의 초월은 가능성의 차원에 머
문다.

결. 피카소의 기호학적 모험과 추상 회화

추상 회화의 역사에서 피카소는 매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추상 회화를 그린 최초의 화가이면서 또한 끝끝내 추상 회화를 부정한 화가이기도 한 것이다. 1910년 여름 카다케스에서 자신이 한 작업의 정체를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고, 이 사실은 1944년 피카소가 당시의 연인 질로(Françoise Gilot)와 나눈 대화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

나는 파블로에게 내 생각을 말했다. 완전히 비구상적인 회화(nonfigurative painting)를 그보다 더 잘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내 생각도 그래 (…) 그 시기에 나는 회화를 위한 회화를 그리고 있었지. 그것은 정말로 순수한 회화(pure painting)였고, 구성은 구성에서 끝났어.”28)

그러나 2절에서 살펴본 대로, 피카소는 이후 “자연의 형태들을 지시하는 요소들”을 화면에 추가했다. 이 요소들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시각적 현실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몇 개의 준거점이었고 (…) 또한 그 뒤에 있는 순수한 회화를 감추기 위해서도 삽입되었다”.29) 회화의 준거점은 자연이라는 믿음이 확고했던 것이고, 이로 인해 피카소는 “추상 미술이란 없다”라고 단언까지 했다.30)

이 단언을 피카소는 무려 1935년에 했는데, 이 시점은 추상 회화가 현대미술의 중요한 성취로 자리잡고도 남은 다음이었다. 사실 추상 회화는 피카소의 카다케스 실험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미술계에 돌연 모습을 드러냈다. 추상 회화에 “기적의 해”(annus mirabilis)는 일찍이 1912년으로, 이 해에 “추상 회화는 미술로서 대중 전시를 시작했고 논문과 비평에서 추상 회화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입장이 개발되었[으며] (…) 추상적 미술작품이라는 관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31) 과연 1912년에 추상 회화는 파리만이 아니라 뮌헨·네델란드·취리히 그리고 대서양 건너 뉴욕에서도 마구 튀어나왔고, 이 그림들은 하나같이 미술의 역사를 지배한 세계의 재현으로부터 탈피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로 충천했다. 그럼에도 이 초창기 추상 회화는 대부분 화면에서 세계에 대한 지시를 완전히 근절하지 못했는데,32) 이는 추상 회화에서 화가가 당면하게 되는 새로운 문제, 즉 재현을 거부해서 회화가 더 이상 세계에 근거를 두지 않을 때, 그럴 때 회화는 어디에 근거를 둘 수 있는가 하는 새로운 문제를 알려준다.

나는 크라우스의 표현을 빌려, 바로 여기에 피카소의 입체주의가 한 비범한 공헌이 있다고 말하겠다. 비록 그 자신은 추상 회화로 나아가지 않았지만, 피카소가 입체주의에서 시종일관 추구한 기호학적 모험은 향후 추상 회화의 발전에 예외적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지표와 상징이라는 두 새로운 회화 기호의 도입이 바로 그 기여로, 두 기호는 향후 추상 회화가 ‘근거 있게’ 발전할 수 있는 두 갈래의 가능성을 제공했다. 연역적 추상과 구성적 추상이 그 둘이다.

연역적 추상을 처음 실현한 화가는 러시아의 말레비치(Kazimir Malevich)다. 1915년 12월 전설의 ‘0,10’ 전시회에서 첫선을 보인 절대주의 회화는 표면의 형태와 질감으로부터 연역한 화면, 따라서 오로지 표면의 지표일 뿐 세계의 재현과는 완전히 단절한 화면을 보여주었다. 「검정 사각형」(Black Square)이 대표적 예다. 구성적 추상을 처음 실현한 화가는 네덜란드의 몬드리안(Piet Mondrian)이다. 몬드리안은 피카소가 분석적 입체주의를 떠난 1912년에 그린 일련의 나무 그림들로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에게서 “매우 추상적 입체주의”33)라는 평을 일찍이 1913년에 듣지만, 그가 화면에서 지시적 흔적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실 구성적 추상이란 표면을 인정하되 제압하는 화면이 관건인데, 표면을 확실히 인정해야 재현을 근절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면이 표면에 종속되면 회화가 캔버스로 환원될 위험 또한 있기 때문이다. 여러 단계를 거쳐 몬드리안이 1920년에 완성한 신조형주의 회화, 가령 「노랑, 빨강, 검정, 파랑, 회색의 구성」(Composition with Yellow, Red, Black, Blue and Gray)은 지표와 상징이라는 두 회화 기호의 놀라운 결합을 보여준다. 선과 면은 표면의 지표로서 회화의 물질적 근거를 천명하고, 원색과 무채색 그리고 수직선과 수평선의 차이와 관계로 이루어진 화면은 이 구성(composition)의 원천인 화가의 구상(conception)을 상징한다.

이로써 추상의 두 갈래 길은 1910년대 중후반에 분명해졌다. 물론 추상 회화의 실제 역사는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그렇더라도 추상 회화에 숙명처럼 따라다니는 의심, 이거 화가가 제멋대로 그린 거 아니야? 대체 이런 그림의 의미는 뭐야? 같은 당혹과 짜증을 동반하는 자의성의 문제에 내놓을 수 있는 답이 두 추상, 즉 연역적 추상과 구성적 추상에는 분명하게 있었고, 그것이 피카소가 입체주의에서 파고든 기호학적 모험 덕분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1) 이 주장은 서양미술의 인간중심주의를 근거로 한 것이다. 선사시대를 제외하면 서양미술은 압도적 위력의 인간(또는 인간 형상의 신적인 존재)을 다양한 양식으로 재현해서 보존하는 데 충실했다. 공예에 뛰어났던 게르만족의 문화가 서양미술에 새로운 원천으로 유입된 중세미술에서 추상적 장식 문양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세는 기독교의 지배 아래 미술을 교리 전파에 필요한 최소한의 교육적 기능으로 제한했고, 이는 다른 시대들보다 더 엄격한 인간중심주의로 귀결되었으며, 여기서 추상적 장식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2) 살롱과 로마상을 운영한 심사단은 미술 아카데미의 회원과 이전 살롱 수상자들로 구성되었고, 심사의 기준은 당연히 고전주의였다. 따라서 고전주의에서 이탈하거나 고전주의에 대항하는 작품은 영락없이 탈락했는데, 1863년의 살롱은 출품작의 3분의 2를 떨어뜨린 심사로 악명 높다. 이 낙선작 모두가 현대미술이었던 것은 아니나, 마네(Édouard Manet)와 피사로(Camille Pissaro) 등 당시 현대미술을 시도하던 많은 미술가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었다. 1863년은 이 많은 낙선자의 항의로 최초의 낙선작 살롱(Salon des refusés)이 열린 해로도 유명하다. 살롱에서 계속 거부당하자 현대미술가들은 독자적으로 전시회를 열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낙선작 살롱으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1874년의 일이다. 모네(Claude Monet), 르누아르(Auguste Renoir), 드가(Edgar Degas) 등이 참여한 이 전시회는 통상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라고 불리지만, 공식 명칭은 ‘익명의 화가, 조각가, 판화가 협회의 제1회 전시회’였다. 스스로 전시회를 열면서도 이름을 밝히기는 꺼린 데서 살롱이 공식 전시 제도로서 여전히 행사한 권위와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살롱의 지배력은 1881년 정부의 후원이 종식되고 살롱의 사회적 지위가 미술가 단체 주관의 민간 전시회로 바뀐 다음에야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884년에는 쇠라(George Seurat)와 르동(Odilon Redon) 등이 독립미술가협회(Société des artistes indépendants)를 결성하고 현대미술 전시회로서 살롱 데 장데팡당(Salon des indépendants)을 개최했는데, 이제 현대미술가들은 이름을 숨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사도 없이, 포상도 없이”(sans jury, ni récompse)라는 기치를 내걸어 살롱의 관행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아카데미 내부에서 고전주의가 붕괴 조짐을 보인 것은 더 늦은 일로, 르누아르가 살롱에서 큰 성공을 거둔 1879년 이후 인상주의가 점점 더 대중의 관심을 끌다가 급기야 인상주의가 침투한 아카데미 미술이 출현한 1890년대의 일이다. 이 시점에 이르러서도 아카데미가 현대미술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는데, 제롬(Jean-Léon Gérôme)의 1895년 작 「호수의 여름 오후」(Summer Afternoon on a Lake)가 좋은 예다. 이 유명한 아카데미 화가의 작품에는 인상주의의 희뿌연 대기 효과와 영롱한 빛의 효과가 스며들어 있지만, 제롬은 인상주의에 극도로 적대적인 아카데미 화가로서 인상주의자들에게 자연을 그리는 법을 훈계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볼 때 고전주의의 붕괴는 아카데미 미술가들에 의해서도 진행된 면이 있지만, 이를 현대미술의 압력과 무관한, 아카데미 내부의 자발적 사건으로 설명하기는 힘들 것 같다.

3) Rosalind Krauss, “In the Name of Picasso,” October 16 (1981) 16면.

4) 종합적 입체주의에 대한 야콥슨의 선구적 이해에 관해서는, 조주연 「타틀린과 가보: 구축주의와 구축 조각의 미학적 차이」, 『현대미술학 논문집』 28.2 (2024) 132~37면.

5) 프랑스에서는 뒤푸르(Pierre Dufour), 로드(Jean Laude), 댁스(Pierre Daix) 등이, 미국에서는 크라우스, 스타인버그(Leo Steinberg), 부아(Yve-Alain Bois) 등이 꼽힌다. 대표적 문헌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Pierre Dufour, “Actualité du cubisme,” Critique 267.258 (1969) 809~25면; Jean Laude, “Picasso et Braque, 1910-1914: La Transformation des signes,” Le Cubism (Saint-Étienne: CIEREC, 1975) 7~28면; Pierre Daix, Picasso: The Cubist Years, 1907-1916, trans. Dorothy S. Blair (Boston: New York Graphic Society, 1979); Rosalind Krauss, “The Cubist Epoch,” Artforum 9.6 (1971) 32~38면과 “The Motivation of the Sign,” Picasso and Braque: A Symposium (New York: Museum of Modern Art, 1992) 261~86면; Leo Steinberg, “The Algerian Women and Picasso at Large,” Other Criteria: Confrontations with Twentieth-Century Art (New York: Oxford UP, 1972) 125~234면; Yve-Alain Bois, “Kahnweiler’s Lesson,” Representations 18 (1987) 33~68면과 “The Semiology of Cubism,” Picasso and Braque: A Symposium (New York: Museum of Modern Art, 1992) 169~208면.

6) 1912년 봄 피카소가 유포와 밧줄을 캔버스 회화와 결합해 미술사상 최초의 콜라주를 제작한 이래 그 뒤를 이은 종합적 입체주의는 워낙 대담하고 충격적인 작업이었던지라, 당대부터 끊임없이 분분한 해석을 일으키며 많은 논의를 낳았다. 그러나 종합적 입체주의에 대해 오늘날까지 쇄도한 해석의 관점은 대략 네 가지로 대별된다. 1) 미술과 세계의 결속을 강화하는 현실의 도입이라는 당대의 관점, 2) 일상적 사물인 이물질을 새로운 재료로 도입한 예술적 혁신이라는 형식주의 관점, 3) 당대 사회에 대한 작가의 발언을 담기 위한 장치라는 사회사적 관점, 4) 미술의 재현 체계를 도상에서 상징으로 이행시킨 전환이라는 기호학적 관점이다. 각 관점을 대표하는 논자들과 문헌들에 관해서는, 조주연 「피카소 콜라주의 조각적 잠재력」, 『미학』 89.4 (2023) 131~32면, 각주 11 참조.

7) 강미정 『퍼스의 기호학과 미술사: 신미술사의 철학을 위하여』(이학사, 2011) 158~ 70면.

8) Leah Dickerman, “Inventing Abstraction,” Inventing Abstraction 1910-1925: How a Radical Idea Changed Modern Art (New York: Museum of Modern Art, 2012) 12~ 37면.

9) Bois, 앞의 글(1992) 174면.

10) Georgio Vasari, The Lives of the Artists [1568], trans. Peter Bondanella et. al. (New York: Oxford UP. 1991) 287면.

11) Lael Tucker Wertenbaker, The World of Picasso (New York: Time-Life Books, 1967) 11면.

12) 스타인버그가 1989년 파리에서 한 강연 ‘피카소의 지성’(The Intelligence of Picasso)의 해당 내용을 Christine Poggi, In Defiance of Painting: Cubism, Futurism, and the Invention of Collage (New Haven: Yale UP, 1992) 31~32면에서 재인용. 피카소의 초기 작업에서 양식적 이질성이 한 역할에 대해서는 스타인버그의 선구적 탐구 외에도 많은 학자의 언급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조주연, 앞의 글(2023) 138~44면.

13) Daniel-Henry Kahnweiler, The Rise of Cubism, trans. Henry Aronson (New York: Wittenborn, Schultz, Inc., 1949) 7면. 1915년에 독일어로 집필되었고 1920년에 출판된 원서의 제목과 서지는 다음과 같다. Daniel-Henry Kahnweiler, Der Weg zum Kubismus (Munchen: Delphin-Verlag, 1920).

14) Leo Steinberg, “The Philosophical Brothel,” October 44 (1972) 74면.

15) 「서 있는 누드」에 대한 이 문단의 서술은 스타인버그의 분석을 간추린 후 나의 관찰을 덧붙인 것이다. Steinberg, 앞의 글 167~68면.

16) 애매한 도상에 대한 곰브리치 설명은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지음, 차미례 옮김 『예술과 환영』(열화당, 2003) 서론과 7장, 피카소를 곰브리치의 반증으로 보는 스타인버그의 설명은 같은 글 411면 각주 27.

17) Daniel-Henry Kahnweiler, “L’Art Nègre et le Cubisme,” Présence Africaine 3 (1948) 368면.

18) 클레멘트 그린버그 지음, 조주연 옮김 「모더니즘 회화」, 『예술과 문화』(경성대학교출판부, 2019) 346면.

19) Bois, 앞의 글(1992) 180면.

20) 같은 글 180면. 이 표현은 부아가 댁스의 ‘écriture unitaire picturale’을 발전시킨 것이다. Daix, 앞의 책 68면.

21) 강미정, 앞의 책 165면에서 재인용. 번역은 일부 수정.

22) 왜냐하면 퍼스의 상징에서 의미작용은 대상이 아니라 해석체가 결정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상징의 의미는 해석체를 매개로 해서 표상체와 대상이 연결될 때(‘개나리’ ‘능소화’)뿐만 아니라, 대상은 없어도 해석체는 있을 때(‘짜디짠 설탕’)에도 발생한다. 이 글에서 언급한 퍼스의 세 기호, 즉 도상·지표·상징은 표상체와 대상의 관계에 따른 구분이지만, 대상의 존재 유무가 의미작용에 결정적인 기호는 지표뿐이다. 도상, 지표, 상징의 작용에서 대상이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에 관해서는 같은 책 168면.

23) 이 문단과 다음 문단의 내용은 「바이올린」을 소쉬르의 기호학으로 분석한 크라우스의 논문 「기호의 동기화」(“The Motivation of the Sign”)의 설명을 간추리고 나의 관찰과 분석을 덧붙인 것이다. Krauss, 앞의 글(1992) 261~64면.

24) 칸바일러는 종합적 입체주의에서 일어난 기호의 변동을 가장 먼저 알아본 이였다. 그는 1912년 여름 아프리카 가면과의 조우를 통해 피카소가 “회화와 조각의 진정한 성격은 문자라는 것”을 새로 발견했으며, 이 발견과 동시에 “분석적 입체주의는 막을 내렸[고], 외부세계를 탐구하는 시기는 끝났[으며], 입체주의 화가들은 이제 기호를 고안해서 사물을 재현하고자 했다”라고 썼다. Daniel-Henry Kahnweiler, The Sculptures of Picasso, Brassaiï 사진집 (1949; New York: Assouline, 2005) 서문, 면수
없음.

25) Krauss, 앞의 글(1992) 264면.

26) Bois, 앞의 글(1992) 205면.

27) 이 문단은 「기타, 악보, 유리잔」을 탐구한 부아와 포기의 설명을 간추리고 나의 관찰과 분석을 덧붙인 것이다. Bois, 앞의 글(1992) 187~88면, Poggi, 앞의 책 52~53면. 포기의 설명에서 이 작품은 「기타와 와인잔」(Guitar and Wineglass)이라는 다른 제목으로 언급된다.

28) Françoise Gilot and Carleton Lake, Life with Picasso (London: McGraw-Hill Company, 1964) 72면.

29) 같은 책 같은 면.

30) Christian Zervos, “Conversation avec Picasso,” Cahiers d’Art X, 7-10 (1935) 173~78면; Dore Ashton, ed., Picasso on Art: A Selection of Views (New York: Viking Press, 1972) 64면에서 재인용.

31) Dickerman, 앞의 책 14면.

32) 이는 추상 회화에 기적의 해를 한 달 앞서 선구적으로 연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가 누구보다 잘 보여준다. 그는 보링거(Wilhelm Worringer)의 『추상과 감정이입』(Abstraction and Empathy)이 나온 1908년 무렵부터 일찍이 추상 회화라는 관념을 곱씹으며 발전시키고 있었지만, 형상을 지시하는 흔적이 매우 희미한 「구성 5」(Composition V, 1911년 12월) 이후에도 그의 작업에서 재현의 근절은 한동안 이루어지지 못했다. 1912년에 추상 회화를 전시한 여러 지역, 여러 화가의 작업에 관해서는, Dickerman, 앞의 책 16~17면.

33) Guillaume Apollinaire, “A travers le Salon des indépendants,” Montjoie! (March 18, 1913); Dickerman, 앞의 책 17면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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