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호] [시평] 남녀공학 전환 논란과 탄핵정국 속에서 바라본 여대와 시위의 의미 / 김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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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2024년 11월, 동덕여대의 공학 전환 논란이 촉발되면서 ‘여대는 지금도 필요한가?’라는 오래된 질문이 다시금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다. 동덕여대 측은 학령인구 감소와 경쟁력 강화를 이유로 들며 ‘학교 발전 계획’의 일환으로 일부 단과대학의 공학 전환 시도를 추진했으나, 학생들은 이 과정에서 민주적 절차가 배제되었음을 비판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 사태는 단순한 대학 운영 문제를 넘어, 여성들이 자신들의 공간을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과 젠더 정치의 문제로 확장되었다.

특히 학생들은 학교가 여자대학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 없이 구성원의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공학 전환을 결정했다는 점에 분노했다. 학교가 남녀공학 전환을 논의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피켓 시위, 대자보 게시, 근조화환 전시, 학교 본관 앞에 과잠(학교 점퍼) 벗어두기, 교내 설립자 흉상 훼손을 비롯해 락카 스프레이로 학교 내·외부 벽이나 바닥에 “공학 전환 반대” “명애롭게 폐교하자”1) 등의 문구를 쓰는 방식의 시위를 벌였다. 몇몇 학생은 총장실 문 앞 점거 시위까지 벌이기도 했다. 학교 측은 이러한 학생들의 시위를 ‘불법 점거’ 및 ‘폭력적 행위’로 규정하며 건물 및 집기 훼손 등의 이유로 일부 학생에게 내용증명을 발송했다.

이처럼 대학 내에서 시작된 시위는 곧 한국사회 전반의 정치적 긴장 국면과 맞물리며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되었다. 동덕여대 공학 전환 반대 시위는 12월 3일 내란사태 이후 탄핵정국과 맞물리며 학생들을 “앞서 싸우고 있던 사람들”로 위치시켰다.2) 계엄 시도 직후부터 시작된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에서는 2030세대 여성들의 높은 참여율이 두드러졌는데, 특히 이들의 응원봉과 깃발, 피켓, 케이(K)팝을 활용한 새로운 시위문화가 단연 이목을 끌었다. 그 사이 동덕여대 시위는 점차 확산되어, 12월 27일 혜화역 근처에서 열린 ‘민주 없는 민주동덕’ 집회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외부 시민 2500여 명(주최 측 추산)이 참여했다.3) 이 집회에서도 탄핵시위와 같은 방식의 응원봉 물결이 펼쳐졌고, 다른 여대 학생들과 여대 졸업생들의 연대도 이어졌다.4) 여대 차원의 지지를 넘어 시민사회와 정치권으로 연대가 확산하는 과정에 있다는 점을 보도하는 언론들도 등장했다.5)

이 글은 먼저 여자대학을 둘러싼 논란의 최근 역사를 살펴본 뒤 동덕여대 사태 발생 당시 이화여대 학부 토론수업에서 나온 동료 여자대학생들의 반응을 공유함으로써, 오늘날 여자대학 구성원들이 여자대학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가 동덕여대 공학 전환 반대 시위의 의미를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또한 동덕여대 남녀공학 전환 반대 시위와 최근 대통령 탄핵 집회의 연결성을 고려할 때 오늘날 한국의 시위 현장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한국 여자대학을 둘러싼 논란과 역사적 맥락

여자대학의 초기 설립 목적은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오랫동안 차별받아온 한국 여성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보장하는 데 있었다. 현재 국내에는 총 7개의 종합 여자대학교(광주여자대학교, 덕성여자대학교, 동덕여자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서울여자대학교, 성신여자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가 있으며, 필자가 재직 중인 이화여대의 경우, 그 기원은 1886년 미국 감리교 해외선교회 소속 스크랜튼(Mary Scranton) 부인이 서울 정동 자택에서 단 한 명의 여학생과 함께 시작한 이화학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후반 이화학당의 설립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1910년 이화학당 대학과 설치, 1925년 영문학과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문과와 음악과를 주축으로 한 이화여자전문학교 설립, 1945년 종합대학교로의 승격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한국에서 여성 고등교육기관의 출현 역사가 약 140년에 이르는 반면, 남녀공학 대학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짧다.6) 1946년 연세대학교가 국내 최초로 여학생의 입학을 허용하면서 남녀공학 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한국의 남녀공학 대학들이 사실상 “‘남자’ 학교에 여학생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7) 여성이 남성과 명목상 동등하게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 이후, 여자대학의 필요성에 대한 의문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왔다. 특히 최근 10여 년간의 논의는 여자대학이 남녀공학 대학과 비교하여 어떤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처럼 여자대학의 설립 배경과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면, 그 존재 이유를 둘러싼 논의는 단순히 과거의 유산을 유지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여자대학의 존재 이유에 대한 논의는 시대적 조건과 교육담론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왔다. 나윤경은 2011년 동덕여대 창학 100주년 학술대회 발표문을 바탕으로 한 논문 「한국 여자대학교의 존재 이유: 남녀공학의 대안 혹은 경쟁자」에서 한국 여자대학들이 남녀공학 대학과 차별화된 경쟁력을 키우지 못한 채 동일한 패러다임 속에서 경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특히 당시 국내 7개 종합 여자대학이 ROTC(학군단) 신설을 경쟁적으로 추진했던 사례를 들어, 남녀공학과 동일한 방식으로 경쟁하는 것이 과연 여자대학의 존재 이유를 강화하는 방향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나윤경은 미국의 5개 여자대학, 이른바 더 시스터스(The Sisters), 즉 바너드칼리지(Barnard College), 브린마우어칼리지(Bryn Mawr College), 마운트홀요크칼리지(Mount Holyoke College), 스미스칼리지(Smith College), 웰즐리칼리지(Wellesley College)8)가 남녀공학 대학과 직접 경쟁하지 않으면서도 교과과정과 교육이념에서 독자적 경쟁력을 갖춘 사례를 들어, 한국 여자대학 역시 여성주의적 시각을 강화하고 여성주의의 사회적 개입을 교육과정에 반영함으로써 고유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9) 이는 여자대학이 단순한 교육기관을 넘어 여성주의적 가치와 실천의 장으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논의라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여성주의적 정체성의 모색이 이념적 차원에서 여자대학의 존재 이유를 정당화했다면, 최근에는 여자대학이 여성들에게 제공하는 구체적 경험과 감정의 차원이 새로운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여자대학이 단순한 학문기관을 넘어 “안전한 공간”으로 기능한다는 점이 주목받고 있다. 김영옥은 2016년 5월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들이 ‘안전’ 문제에 극도로 민감해졌으며, 여자대학이 물리적 안전과 심리적 안전을 보장하는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분석한다.10) 특히 그는 2020년 2월에 있었던 숙명여대의 트랜스젠더 입학 논란11)을 예로 들며, 여자대학이 물리적 안전뿐 아니라 여성이 ‘말하는 주체’로 목소리를 내고, 여성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정의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 강조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안전’ 개념이 배제적 방식으로 작동할 위험도 있다고 지적한다. 즉 여자대학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이 자기 정체성을 구축하는 해방적 공간이지만, 동시에 여성의 범주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난제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자대학이 지속 가능한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배타적인 범주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주류 사회 전반에 대한 급진적·대항적 문화정치 투쟁의 장”으로서 “대항적 공공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12)

최근 동덕여대 사태는 이 같은 담론이 실제 대학 정책 결정과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드러낸 대표적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과거에 반복적으로 제기되었던 여자대학의 공학 전환 문제는 작년 동덕여대 사태를 계기로 다시금 사회적 논의의 중심에 섰다. 권김현영은 사태 발생 직후 발표한 칼럼에서 1990년대 이후 여자대학들의 공학 전환 사례를 분석하며, 공학 전환이 위기의 해결책이 아니라 오히려 대학 서열화와 수도권 집중 현상을 심화시켰다고 지적한다.13) 1990년대 졸업정원제 폐지와 대학설립준칙주의 도입 이후 많은 여자대학이 공학으로 전환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대학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권김현영은 현재의 여자대학 기피론과 무용론이 ‘여자대학 혐오’ 담론과 결합하면서 공학 전환이 마치 불가피한 시대적 흐름인 것처럼 포장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여자대학이 단순한 ‘여성이 안전할 수 있는 공간’으로 머물러서는 안 되며, 궁극적으로 남성 중심 대학 질서에 균열을 가하는 독립적인 학문적·사회적 공간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영옥과 권김현영 모두 “‘안전한 여성 공간’에 대한 강조가 대항 담론으로 등장한 상황”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14) 이들은 여자대학을 “생존 그 이상을 꿈꿀 수 있는 해방의 장소”로 인식할 때 비로소 여자대학의 미래를 전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15) 이렇듯 여자대학의 존재 이유를 둘러싼 최근의 논의는 단순한 교육적 필요성을 넘어서,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여자대학의 정체성과 역할을 새롭게 정의하려는 시도들과 공명하고 있다.

여자대학에 대한 여자대학 학생들의 인식

그렇다면 여자대학에 대한 실제 여자대학 학생들의 인식은 어떠하며, 이는 앞서 살펴본 여자대학의 존재 이유를 둘러싼 논의들과 어떻게 교차하거나 어긋나는가? 2024년 11월 동덕여대의 공학 전환 논란이 불거졌던 당시 필자는 이화여대 영어영문학부 4학년 전공과목인 ‘이론과 비평’ 수업에서 오스틴(J. L. Austin), 데리다(Jacques Derrida), 버틀러(Judith Butler)의 수행적 언어(performative language) 개념을 다루고 있었다. 우리는 오스틴 이후 수행적 언어 개념이 어떻게 재조명되었는지를 살펴본 뒤,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에서 버틀러가 ‘여성’이라는 범주를 문제삼는 방식과 『혐오 발언』(Excitable Speech)에서 논의되는 혐오 발언의 반복성과 역사성에서 기인한 효과에 관해서도 간략히 논의했다. 젠더 수행성 개념을 다루던 중 동덕여대 학내 시위가 언론에 보도되었고, 이어 학교 측의 입장을 담은 인터뷰 기사까지 공개되면서 수업 내에서도 학생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필자는 수업에서 다룬 이론 개념들을 사회적 현안과 연결해볼 수 있도록 이 사안을 토론 주제로 제시했다.

수강생이 60명이 넘다 보니 젠더 수행성과 혐오 발언을 주제로 한 토론은 패들릿(Padlet)에 3~4개의 질문을 올린 뒤, 학생들이 익명으로 자유롭게 질문을 선택해 의견을 제출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첫 번째 질문은 『젠더 트러블』에서 버틀러가 제기한 다음의 주장과 관련이 있다. 버틀러는 “페미니즘 비평은 페미니즘의 주체인 ‘여성’ 범주가 해방하고자 하는 바로 그 권력구조로 인해 어떻게 생산되고 또 규제받는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6) 이에 대해 학생들에게 ‘여성’이라는 범주가 특정한 권력구조에 의해 형성되고 제한된다는 관점에 얼마나 동의하는지 물었다. 아울러 페미니즘 운동이나 담론 속에서 ‘여성’이라는 범주가 배타적으로 설정되거나, 반대로 확장 또는 해체되려는 사례를 찾을 수 있는지도 질문했다. 학생들은 성중립 화장실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입장, 미국 흑인여성 인권운동가 트루스(Sojourner Truth)의 사례 등을 언급하며, 대체로 버틀러의 관점에 동의한다고 답했다. 여자대학이라는 학교의 특성상 교양과목으로 여성학 관련 수업을 수강한 경험이 있는 학생이 많았고 페미니즘에 대한 개인적 관심이 높은 학생도 다수였기에, 다른 주제를 다룰 때보다 훨씬 풍부하고 다양한 사례가 공유되었다. 16)

다음 질문은 혐오 발언에 대한 버틀러의 분석에 관한 것이었다. 『혐오 발언』에서 버틀러는, 혐오 발언은 단순히 발화자의 의도에서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반복되어온 역사성에 기반해 효과를 발휘한다고 주장한다. 학생들에게는 이 점―말하는 자는 혐오 발언의 창시자가 아니며, 그 발화는 발화자의 의도보다 오랜 시간 동안 반복되어온 역사성 때문에 힘을 발휘한다는 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보기를 제안했다.17) 예컨대 “Queer!”와 같은 혐오 발언이 퀴어 운동가들에 의해 재전유되었듯이, 혐오 발언이 원래 의도된 의미에서 벗어나는 “탈인용적”(ex-citable) 발화가 가능하다는 점, 다시 말해 혐오의 언어가 항상 그 의도된 효과를 실현하지는 않는다는 가능성에 대해 함께 생각해볼 것을 요청했다.

토론 질문들 가운데 가장 많은 응답이 모인 질문은 “당신에게 여자대학이란 어떤 곳이며, 현재 동덕여대 사태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였다. 총 40여 명의 학생이 응답했으며, 이들의 답변에는 여자대학의 의미와 존재 이유, 동덕여대 사태의 핵심 쟁점, 그리고 여자대학 폐지 논란과 여성혐오의 연관성이라는 주요 논점이 공통적으로 드러났다. 먼저, 대다수의 학생은 여자대학을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남성의 기준에서 자유로운 공간”이자 “성별의 잣대를 받지 않고 온전히 개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 학생은 “여대에서는 누구도 ‘여자라서’ 특정 역할을 해야 한다는 기대를 강요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남녀공학 대학에 다니는 동성 친구들이 겪는 보이지 않는 장벽과 비교해 여자대학은 여성들이 더 주체적으로 역할을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여학생이 아니라 학생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는데, 이는 여자대학이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사회적 기대와 억압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환경을 제공한다고 여겨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여자대학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도 많은 학생이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발언권과 교육 기회를 보장하는 공간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응답자들은 “여대는 여성들이 온전히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여대는 여성이 기본형인 사회” “남녀공학에서는 여성 총학생회장이 나오기 어려운 구조” “남녀공학에서는 여성이 리더가 되기 위해 2년 휴학을 고려해야 한다는 암묵적 룰이 있다” 등의 의견을 제시하며, 여자대학이 여성들의 주체적 성장을 가능케 하는 환경이라는 인식을 공유했다.

동덕여대 사태와 관련해 학생들이 가장 강하게 문제 삼은 부분은 공학 전환 그 자체가 아니라, 해당 결정이 학생들과의 논의 없이 비민주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었다. 다수 학생은 “여대에 지원한 학생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공학 전환을 강행한 것은 옳지 않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인데, 학생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다”라고 비판했다. 토론에 앞서 우리는 동덕여대 교무처장과 기획처장의 인터뷰가 실린 『동아일보』 단독 보도 기사를 함께 읽었는데, 그중 “아마 학생들의 주장은 ‘아직 우리 대학이 경쟁률도 높고 재정 자립도도 높은데 왜 굳이 이런 선택을 하느냐’가 핵심일 것 같다”는 발언이 학생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18) 학생들은 이 발언이 동덕여대 학생들의 반대 논리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공학 전환 반대의 핵심을 단순화하고 왜곡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반응은 학생들이 이번 사태를 단지 여자대학 폐지 논란으로 보지 않고, 학내 민주주의와 학생 권리를 둘러싼 문제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응답자 다수는 여자대학 폐지 논의가 여성혐오적 사회구조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고 판단했다. “여대가 사라지는 것은 성차별이 해소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 점점 사라지는 과정이다”라는 취지의 답변이 자주 등장했으며, 일부 학생은 “사회적으로 여성들이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여대가 없어지면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를 표했다. 이는 여자대학이 단순한 학문기관을 넘어 여성 연대의 장으로 기능하며, 그 해체가 여성의 발언권과 사회적 위치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인식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응답자 40여 명 중 12명(약 25%)이 여자대학을 “안전한 공간”으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여자대학은 “여성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 여성 대학생들이 안전하게 배움과 공론의 장을 누릴 수 있는 곳” “여성에 대해 안전하게, 그리고 온전하게 토론하고 논의할 수 있는 이야기장”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장소”였다. 이들은 “캠퍼스 어디에서든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안전의 위협 없이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잘 수 있다”는 점에서 안도감을 표현했다.

이러한 응답은 앞서 다룬 김영옥과 권김현영이 왜 여자대학을 ‘안전한 공간’으로만 인식하는 데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는지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해준다. 지난 10여 년간 공공 화장실 몰카, 강남역 살인사건, N번방과 딥페이크 등 젠더 기반 폭력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된 젊은 여성들에게 여자대학이 안전한 공간으로 인식되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성범죄뿐 아니라 상하관계에서 벌어지는 직장 내 권력형 성폭력, 교내 성폭력, 데이트 폭력 등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젠더 기반 폭력 또한 여성들에게 일종의 전조적(proleptic)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다.

필자가 상담했던 이화여대 학부생 및 대학원생들 중 다수가 비혼을 지향하며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이론과 비평’ 수업 기말고사를 치르던 날, 1학년 때부터 지켜봐온 한 수강생이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졸업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졸업 후 진로를 묻자 그는 취업 이민을 목표로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간호대학 편입시험을 치르러 간다고 말했다. 영문학을 향한 깊은 열정을 보였고, 조기졸업을 할 만큼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학생이었기에 이 같은 결정은 뜻밖이었다. 하지만 짧은 대화를 통해 이는 단순한 진로 변경이 아니라 한국사회에서의 삶과 미래에 대한 깊은 고민이 반영된 선택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이성애적 관계를 결혼으로 발전시키는 데 대한 회의감과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지속하는 데 대한 불안이 그의 결정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폭력의 장면

이처럼 많은 학생이 여자대학을 안전한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이화여대에서는 그러한 인식을 뿌리째 흔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탄핵 반대 시국선언과 이를 저지하는 이화여대 긴급행동이 동시에 진행되는 과정에서 신남성연대 등 외부 극우세력이 정문 담을 넘어 교내로 진입해 재학생들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한 사건이다. 『이대학보』는 그날의 사건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일부 탄핵 반대 측 외부인들은 출입이 통제된 정문을 뒤흔들며 “북한으로 꺼져 이 xx아, 빨갱이x들은 다 죽여야 해”라고 외치며 재학생을 위협했다. 극우 유튜버들은 확성기를 든 채 “탄핵 무효” 등을 외치며 정문 담 너머에 있는 재학생들의 얼굴을 촬영했다. 이들은 재학생들이 들고 있는 피켓을 주먹으로 내리쳐 박살내기도 했다.

외부인 극우세력은 재학생들에게 신체 폭력을 가하기도 했다. 추가 피해를 우려해 익명을 요청한 (…) ㄱ씨는 “반대 세력이 다른 벗의 후드를 잡아챈 모습을 보고 말리고자 했으나 힘에서 밀려 머리채를 잡혔다”고 말했다. 신남성연대 대표 배인규 씨는 정문 담을 넘어 교내로 들어와 재학생을 밀쳐 넘어뜨리기도 했다.19)

12월 3일 이후 이화여대 곳곳에는 건물 안팎을 가리지 않고 학생들의 시국선언문과 대자보가 게시되었다. 학생들은 때로는 익명으로, 때로는 실명으로 민주주의와 여자대학 해방의 역사에 대해 성토하며 탄핵집회의 현장으로 나갈 것을 촉구해왔다. 캠퍼스 곳곳에 이례적으로 많은 대자보와 선언문이 붙었고, 이를 기록하기 위한 아카이빙 인스타그램 계정까지 만들어졌다. 이러한 움직임은 학생들이 학교를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에 안전한 장소로 인식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벌어진 외부세력의 학내 난입과 그들이 자행한 폭력은 여자대학을 안전한 공간으로 인식해온 많은 학생에게 감정적 충격과 위기의식을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현재 시위 지형의 복잡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특히 젠더와 세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균열 위에 펼쳐진 이 사태에서 외부세력의 폭력은 시위의 성격과 참여 주체에 대한 이해를 한층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날 이화여대 탄핵 반대 시국선언 현장에는 약 100명이 모였으며, 그중 이화여대 재학생은 약 30명에 불과했다고 전해진다.20) 이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퇴진을 요구하며 열린 이화여대 학생총회에 참여한 재학생 수(2657명)와 비교하면 지극히 적은 수치다. 며칠 뒤, 나는 정문 안쪽 담벼락에 탄핵 반대 시국선언문을 붙이던 한 여학생을 목격했다. 그의 주변에는 여러 명의 남성이 둘러싸듯 서 있었고, 그중 일부는 여학생을 촬영하고 있었다. 해당 선언문은 곧 찢겨 사라졌지만, 극우 유튜버들이 게시 장면을 촬영해 이미 업로드했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몇몇 선동적인 언론과 정치인들이 동덕여대 학생들의 시위와 지난 1월 19일 새벽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발생한 난동 사건을 동일하게 “폭력”이라는 표현으로 묶고 있다는 사실은 또 다른 혼란과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동덕여대 측은 이미 지난해 11월 학내 시위를 “폭력적인 행동”으로 규정한 바 있다.21) 여기에 더해,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은 지난 2월 초 동덕여대와 서부지법을 연이어 방문한 뒤, 두 사건이 “본인들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자 극단적 폭력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수법과 본질이 동일하다”고 주장했다.22)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민주당 고민정 의원을 향해 “서부지법 폭동은 나쁜 폭력이고, 동덕여대 폭동은 불쌍한 학생들의 착한 폭력이냐”고 반문하기도 했다.23) 어찌하여 그의 눈에는 흉상에 계란을 던지고 바닥에 락카 스프레이로 글씨를 쓴 학생들과 경찰을 폭행하고 건물 유리창과 외벽을 부수며 사무실 집기를 파손한 이들이 “동일”해 보이는 걸까?24)

연대하는 신체들, 집회라는 형식

이준석 의원의 발언과 여자대학에 난입한 극우세력은 버틀러의 집회의 수행성에 대한 최근 논의,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집회의 수행성 이론을 위한 노트』(Notes Toward a Performative Theory of Assembly)를 떠오르게 한다. 특히 이 책의 1장 「젠더 정치와 출현할 권리」는 2011년 미국의 5개 여자대학 중 하나인 브린마우어칼리지에서의 강연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으며, 여자대학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버틀러 이론의 두 주요 축인 “젠더 수행성”과 “불안정한 삶”의 연결성을 다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버틀러는 이 책에서 국가와 같은 사법권력이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모인 집단의 단결된 행동”을 실제로 폭력적 행위를 하지 않았더라도 “폭력적인 행동”으로 간주해왔다고 지적한다.25) 이준석 의원의 발언은 바로 이러한 메커니즘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례다. 버틀러는 2014년 여름 미국 미주리주 퍼거슨에서 벌어진 공공시위를 예로 들며, 비무장 흑인청년을 경찰이 살해한 이후 분노한 대중의 저항이 얼마나 신속하게 “소요”나 “폭동”으로 재명명되었는지를 분석한다.26)

버틀러는 집회를 “신체들이 모여 분노를 표출하고 공적 공간에서 복수 형태로서의 그들 존재를 상연”하는 행위로 정의하는데, 이는 단순한 감정 표현을 넘어, 그 존재가 “인정받고 존중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더 넒은 차원의 요구”를 수행하는 정치적 실천이다.27) 그리고 “신체들이 거리에, 광장에, 혹은 (가상공간을 포함한) 다른 형태의 공적 공간에 모일 때, 그들은 복수적이고 수행적인 출현할 권리를 실천하고 있다”라고 주장한다.28) 이 개념을 동덕여대 학생 시위에 적용해보면, 그들의 집회는 애초에 권력을 가진 자들의 폭력이 아니라, 여자대학 구성원으로서 당연하게 누려온 정체성과 안전, 일상적 감각이 깨어지는 경험에 대한 반응이었다. 이들은 “불안정 상태에 차별적으로 노출”되고, “폭력에 대한 취약함” 속에서 학교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즉 자신들의 “세계를 잃었”다고 느꼈을 것이며, 이러한 감각은 시위라는 몸의 불안정을 드러내는 행위를 통해 정치적 요구와 분노로 표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29) 동덕여대 학생들의 시위는 바로 그와 같은 몸의 반응이자, 출현을 통한 정치적 요구의 수행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동덕여대 학생들의 시위와 탄핵정국 속에서 장기화되고 있는 대규모 거리 시위는 “한데 모인 신체들”이 “정의에 대한 요구를 실행”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30) 버틀러에 따르면, 이러한 형태의 시위는 단지 구호를 외치거나 요구사항을 명시하지 않더라도, 그 자리에 함께 모인 행위 자체로 “정의에 대한 요구”를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특히 다음의 인용은 지난겨울 내내 응원봉과 각종 방한 도구를 들고 거리로 나선 이들의 몸짓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다시금 환기시켜준다.

그들이 그 순간 직접적으로 언어를 사용하건 안 하건 간에, 한데 모인 신체들은 “우리는 폐기 가능한 이들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바는 “우리는 끈질기게 버티면서, 보다 큰 정의와 불안정성31)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살 만한 삶에 대한 가능성을 요구하면서 여전히 여기에 있다”라는 것이다.32)

윤석열 정부는 줄곧 젠더 문제를 폐기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해왔다. 2030 여성들의 높은 탄핵집회 참여율은 “젠더”를 배제할 주제로 설정한 정부의 기조와 무관하지 않다. 버틀러는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는가?』(Who’s Afraid of Gender?)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젠더 및 페미니즘 관련 정책을 언급하며, 이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그는 윤 정부가 폭력, 괴롭힘, 임금 격차 등 여성들의 문제 제기를 “‘외부’(outside)와 ‘다른 곳’(elsewhere)에서 온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에 불과하다”라고 규정해왔다고 지적한다.33) 이러한 태도는 “다양한 형태의 민족주의가 젠더를 국가 개념에서 배제하고, 평등과 자유가 본래 존재했으나 외부의 ‘침입’에 의해 사라진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전략의 일환이라는 것이다.34) 이러한 관점은 현실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2024년 한 해 동안 디지털 성폭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 기소율과 형량은 턱없이 낮았다.35) 여성들은 점점 더 자신들이 불안정한 상태에 차별적으로 노출되어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공공 화장실을 걱정 없이 이용하거나 몰래카메라를 염려하지 않고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보장되는 보편적 권리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국가의 소극적 대응은 결과적으로 여성들을 ‘폐기 가능한 존재’로 취급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인상을 남겼다.

그렇다면 극우세력의 여자대학 난입과 그들의 요란하고 주도면밀한 맞불집회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버틀러는 집회가 대중의 의사를 표출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국가권력이 그것을 활용하여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한다. 오늘날 한국의 극우세력들이 미디어를 이용하는 방식은 이 점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집회가 민의를 의미화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심지어 집회가 국가의 정당성에 필수적인 조건들을 의미화하면서 바로 “그” 민의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집회는 한편으로 국가에 의해 교묘하게 조직되기도 한다. 곧 국가가 표면적으로 향유하는 대중의 지지를 미디어 앞에서 뽐내기 위한 목적으로 말이다. 달리 말해 집회의 의미와 효과, 그 정당화 효과는 교묘하게 조직된 행동과 미디어 보도에 의해서도 작동할 수가 있으며, 이는 ‘대중’의 입장이 전달되는 것을 국가의 자기정당화 전략으로 끌어내리고 날조하는 것이다.36)

오늘날 극우세력의 모든 행위가 사실상 미디어상의 재현을 일차적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들의 재현이 ‘대중’ 또는 국민 전체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호도되는 현상은 국가의 자기정당화 전략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전략에 기꺼이 복무하는 이들은 독재자를 추종하며, 그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자들이기도 하다. “미친 독재자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동일시”는 곧 “권력자의 위반―법을 무시하고 권력(파괴능력)에 가해지는 모든 제약을 무시하는 작태―과의 동일시”와 같다.37)

이 글에서 다룬 두 가지 형태의 장기화된 집회는 모두 “어려운 교착상태” 속에서 “타자의 고통을 애도”하면서도, 역설적으로 “함께 희열을 느끼는” 사회적 연대의 현장을 드러내 보였다.38) 지난 몇 달은 많은 시민에게 극도로 힘든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몇몇 “기적 같은 순간들”을 목격한 시간이기도 했다.39) 동덕여대 혜화역 집회에서 “방석, 마스크, 손난로, 응원봉”이 담긴 “시위 가방”을 메고 참여한 중고등학생들,40) 응원봉과 깃발을 든 사람들 사이로 보였던 이태원참사 희생자 가족들이 부스를 차려 보라색 리본과 간식을 나누던 장면, “차이로 인해 차별받고 배제되어온 시민들”이 그 집회를 “나를 드러내도 괜찮은 장”으로 받아들이며 발언하고, 공감과 지지의 박수를 받은 순간들, 그리고 남태령에서 농민과 응원봉이 만났던 순간.41) 이러한 기적 같은 순간들의 힘을 믿는 한 우리는 “끈기 있는 근성과 저항”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연대”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함께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42)


1) 이 표현은 학생들이 김명애 동덕여대 총장을 겨냥해 교내 벽면에 “차라리 명애(명예)롭게 폐교하라”는 문구를 적거나, 해당 문구가 적한 현수막을 게시한 것을 의미
한다.

2) 김효실 「‘응원봉 물결’ 동덕여대에도 이어져…“여러분은 혼자 아니야”」, 『한겨레』(2024년 12월 28일). https://www.hani.co.kr/arti/society/women/1175221.html.

3) 같은 기사.

4) 일례로 이화여대에서는 2025년 1월 3일 「동덕여자대학교의 비민주적인 공학 전환 절차를 규탄하는 이화인 성명문」을 QR 코드를 통해 게시했다.

5) 이예슬 「“지워지지 않는다” 탄압·조롱·공세에도 굽히지 않는 동덕여대 학생들」, 『경향신문』(2025년 2월 9일). https://www.khan.co.kr/article/202502091702001.

6) 나윤경 「한국 여자대학교의 존재 이유: 남녀공학의 대안 혹은 경쟁자」, 『교육과학연구』 42.3 (2011) 151면.

7) 같은 글 같은 면.

8) 과거 세븐 시스터스(Seven Sisters)라 불렸던 미국 북동부의 여성 리버럴 아츠 칼리지(liberal arts colleges) 7개교 중 현재까지 여자대학으로 남아 있는 곳은 이 5개교다. 배서칼리지(Vassar College)는 1969년 남녀공학으로 전환했으며, 래드클리프칼리지(Radcliffe College)는 1999년 하버드대학교에 완전히 흡수·합병되었다. 바너드칼리지는 컬럼비아대학교와 연계(affiliated)되어 있지만, 독립된 사립 여자 리버럴 아츠 칼리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9) 이러한 주장은 미국의 여자대학들이 모두 리버럴 아츠 칼리지인 반면, 한국의 여자대학들은 모두 종합대학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다소 한계가 있다. 특히 연구 중심 대학을 표방하는 종합대학의 경우, 세계 대학 평가 기준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함께 감안할 필요가 있다.

10) 김영옥 「나의 안전은 너의 배제로 완성되지 않는다: 여대의 대항적 공공성을 향하여」, 김은실 엮음, 『코로나 시대의 페미니즘』(휴머니스트, 2020) 45~56면.

11) 2019년 성전환 수술을 받고 성별 정정 허가를 받은 뒤 같은 해 11월 수능을 치른 A씨(22)는 2020년 초 숙명여대 법과대학 정시 전형에 최종 합격했으나 결국 입학을 포기했다. A씨의 합격 소식이 보도된 후 숙명여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논란이 확산했으며, 일부 학생들은 “숙명여대 트랜스젠더남성 입학반대 TF팀”을 구성해 학교 측에 “생물학적 여성”만 입학을 허가하는 학칙 개정을 요구했다. 자세한 내용은 「숙명여대: 트렌스젠더 입학생 결국 입학 포기」 『BBC NEWS 코리아』(2020년 2월 7일)
참조.

12) 김영옥, 앞의 글 55면.

13) 권김현영 「여자대학, 공학 전환은 답이 아니다」, 『한겨레』(2024년 11월 15일).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67534.html.

14) 같은 기사.

15) 같은 기사.

16)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젠더 트러블』(문학동네, 2024) 87~88면.

17) 주디스 버틀러 지음, 유민석 옮김 『혐오 발언』(알렙, 2022) 84면.

18) 임재혁 「‘공학 전환 몸살’ 동덕여대 “철회 어렵다…불법점거 책임 물을 것”」, 『동아일보』(2024년 11월 18일).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241118/130447586/1.

19) 최정은 「우리 대학 난입한 외부 세력…탄핵 찬반 논쟁 넘어 몸싸움까지」, 『이대학보』(2025년 2월 27일). https://inews.ewha.ac.kr/news/articleView.html?idxno= 73288.

20) 같은 기사.

21) 임재혁, 앞의 기사.

22) 박채령 「이준석 “동덕여대 사태, 서부지법 폭동같아”…고민정 “폭력적 사고방식”」, 『경기일보』(2025년 2월 6일). https://www.kyeonggi.com/article/20250206580101.

23) 같은 기사.

24) 이준석 의원의 “나쁜 폭력”과 “착한 폭력”이 있느냐는 질문은 ‘폭력’이라는 용어를 전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폭력은 언제나 해석된 상태임을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이처럼 폭력이 정치적 이해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적 정의에 종속될 때, 우리는 폭력의 정의를 찾아내고 고정하는 일이 어렵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좀 더 자세한 논의는 주디스 버틀러 지음, 김정아 옮김 『비폭력의 힘』(문학동네, 2021) 28면을 참조할 것.

25) 주디스 버틀러 지음, 김응산·양효실 옮김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집회의 수행성 이론을 위한 노트』(창비, 2020) 42면.

26) 같은 책 41~42면.

27) 같은 책 41면.

28) 같은 책 20면.

29) 버틀러, 『비폭력의 힘』 71면.

30) 버틀러,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40면.

31) 버틀러에 따르면, 불안정성은 “여성들, 퀴어들, 트랜스젠더들, 빈민들, 장애인들, 무국적자들, 아울러 종교적·인종적 소수자들을 한데 모으는 표지”이자 일종의 “사회적·경제적 상태”다. 그러나 버틀러는 이를 정체성 정치나 교차성 이론의 틀 안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개념으로 제시한다. 버틀러는 불안정성이 “이처럼 다양한 분류들을 가로지르면서, 서로가 서로의 일원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어떤 잠재적 연대”임을 강조한다. 같은 책 85면.

32) 같은 책 40면.

33) Judith Butler, Who’s Afraid of Gender?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2024) 64면.

34) 같은 책 같은 면.

35) 최윤아 「유엔 “한국, 디지털성폭력 폭발적 증가…가해자 기소율 낮아”」, 『한겨레』(2024년 6월 4일). https://www.hani.co.kr/arti/society/women/1143393.html.

36) 버틀러,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30~31면.

37) 버틀러, 『비폭력의 힘』 215면.

38) 버틀러,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36면.

39) 박현정 「증오의 시대, 기적의 순간들」, 『한겨레』(2025년 2월 2일).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80395.html.

40) 김효실 「‘응원봉 물결’ 동덕여대에도 이어져…“여러분은 혼자 아니야”」.

41) 박현정, 앞의 기사.

42) 버틀러,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3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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