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밖 58호] [서평] 은유적 충동과 찬란한 종-횡단적 안무 알렉시스 폴린 검스 지음, 김보영 옮김 『떠오르는 숨』(접촉면, 2024) / 최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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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라는 문제에서부터 시작한다.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은유라는 문제를 겹겹이 통과해야 하는 난제 앞에 놓인다. 문학 자체가 겹겹의 번역을 거치며 탄생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특정한 화자 또는 서술자를 내세워 그 서술자로 인해 발생하는 세계의 필연적인 굴절을 문학으로 담아낸다. 작가에서 서술자로, 서술자의 서술로 여러 겹의 해석이 이미 존재하며, 이를 독자가 건네받는 순간 또 한 번의 해석이 발생한다. 문학이라는 재현예술을 대하는 과정은 그러므로 언제나 변역과 왜곡과 탈락, 자의적 수용과 대상화의 문제와 불가피하게 연루되어 있다. 더군다나 문학 안에는 무수한 은유와 ‘빗대어 말하기’가 있다. 누가 무엇을 무엇에, 어떻게, 왜 빗대는가? 그것은 얼마나 유효한가?

가령 카슨(Rachel Carson)이 쓴 첫 에세이 『바닷바람을 맞으며』(Under the Sea Wind)에는 은유가 가득하다. 바다와 해양생물을 향한 사랑이 담긴 이 관찰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동화나 우화에서 으레 볼 수 있을 법한 서술기법, 즉 의인화다. 예컨대 앤초비가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 이리저리 흩어”1)진다거나 고등어가 “고통과 절망이 뒤섞인 반죽음 상태로 해파리의 수중에서 빠져나”2)온다는 표현이다. 카슨은 “두려워”라는 표현을 택하여 쓰면서도 그 표현 자체가 인간이 바라보는 물고기의 모습에 대한 해석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어딘가에 빠르게 숨는 물고기의 모습이 마치 인간이 ‘두려움’이라고 표상할 만한 행위라는 것이다.3) 카슨은 이 책을 인간에게 읽히기 위해, 즉 독자를 인간으로 상정하고 썼기에 의인화라는 언어적 접속을 활용했다. 인간이 인간의 입장에서 공감하고 타자적 존재와의 거리감을 좁힐 수 있도록 인간적 묘사를 동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해당 유기체의 습성 자체와는 무관해질 수 있다.

다큐멘터리 「산호초를 따라서」(Chasing Coral)에서도 뉴칼레도니아의 산호가 다채로운 형광색으로 빛나는 모습을 보며 인간이 ‘아름답다’고 인지한다는 점이 문제적으로 제시된다. 수온 상승으로 인해 산호가 스스로를 열로부터 보호하려고 일종의 화학적 자외선 차단제를 만들어낸 것인데, 이 생존 기제를 바라보는 인간은 아름다운 빛깔이라고 느낀다는 것이다. 물고기와 산호는 인간과는 전혀 다르게 느끼고 행동하며, 그 행동의 의미를 인간으로서는 단숨에 알 수 없고 그 언어를 알아들을 방도는 더더욱 없다. 인간이 철저히 언어 안에서만 세계를 인지할 수 있다고 할 때, 그러니까 마뚜라나(Humberto Maturana)와 바렐라(Francisco Varela)가 『앎의 나무』(The Tree of Knowledge)에서 인간은 오직 언어 안에서만 인간이라고 할 때, 타자적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다시금 인간적인 언어로 회귀해야 한다는 불가피성은 분명 아이러니하다.

생태적 관점에서 문학 읽기를 시도한다면 이러한 문제는 더더욱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된다. 환경 또는 세계에 관한 서술에서 발생하는 의인화의 위험과 왜곡을 무릅쓸 수밖에 없는가? 만약 다른 ‘앎’의 언어가 가능하다면 어떠한 언어적 접속이 필요하고 가능한가? 이는 포어(Jonathan Safran Foer)가 『우리가 날씨다』(We Are the Weather)에서, 고시(Amitav Ghosh)가 『대혼란의 시대』(The Great Derangement)에서 힘주어 제창하는 ‘상상력의 위기’와도 맞닿아 있는 질문이다. 언어 바깥에서는 앎도 행동도 가능하지 않다면, 언어의 그물 안에 포획되지 않는 대상을 어떻게 상상해야 하는가? 과연 상상할 수 있는가?

검스(Alexis Pauline Gumbs)의 『떠오르는 숨』(Undrowned)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경이로운 답을 보여준다. 검스는 시각을 달리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발명한다. 즉 다면적인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며 세계를 구성하는 믿음체계와 가치체계, 앎을 인지하는 방식, 세계의 생성 원리를 기존과 다르게 바라보기 위해 해양 포유류라는 타자적 존재에게 적극적인 다가가기와 겹쳐지기를 시도한다. 해러웨이(Donna J. Haraway)식으로 말하자면 검스는 ‘응답-능력’(response-ability)을 키운다. 이 책은 문학으로 분류되지는 않겠으나 이리저리 뒤얽히는 이야기들이 제시된다는 점에서 다분히 문학적이다.

인간 흑인 여성 퀴어 페미니스트와 고래는 얼마나 비슷한가? 사실 전혀 다르다고도 할 수 있다. 해양 포유류의 거주지인 물속은 인간이 결코 생존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점부터가 관찰을, 그로부터의 이해를 지극히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고래가 살아가는 방식, 고래가 인간과 뒤얽히며 맺어온 역사는 상처 입은 흑인의 역사와 부단히 겹친다. 검은 존재라는 공통점을 찾고, 흑인 노예무역과 고래 멸종이라는 착취로부터 ‘익사하지 않은 자들’(the undrowned, 이 책의 원제다)을 겹쳐놓는 것은 물론 은유적인 충동이지만, 검스는 리얼리즘적인 측면에서는 개연성이 딱히 없어 보이는 두 존재자의 역사와 습성에 관해 ‘빗대어 말하기’를 주저하기는커녕 힘껏 밀고 나아간다. “안무적 존재”4)로서 뒤얽히고 유동하는 종-횡단적 친족되기를 거리낌 없이 수행하며 공감의 지대를 기이하게 확장해간다. 바로 그 창발성, 즉 우연하고 예기치 못한 흑인-고래의 다층적이고도 혼종적인 마주침들로 인해 떠오르고 빚어지는 현상들이 『떠오르는 숨』의 핵심이다.

“나는 배의 밑바닥에서, 숨 쉴 수 없는 상황에서도 서로의 밑에서 살아남은 이들을 익사하지 않은 자들이라 부릅니다. 익사하지 않은 자들의 호흡은 익사한 친족, 동료 포로들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익사하지 않은 자들의 호흡은 바다의 호흡과 분리되지 않으며 사냥당한 고래들의 날카로운 숨과도, 그 친족들과도 분리되지 않습니다. 익사하지 않은 자들이 각자 숨을 잘 쉬었기에 생존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맥락 속에 놓여 있지요. 익사하지 않기(undrowning)의 맥락요. 숨 쉴 수 없는 상황에서 숨 쉬기란 인종, 젠더, 장애에 따른 차별로 점철된 자본주의가 목을 조르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매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익사하지 않고 있어요.” (16면)

“아직 숨 쉬고 있나요?”(16면)라는 책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질문은 그러므로 은유적이면서 동시에 실재적(물질적)이다. 이 책을 읽으며 독자는 새로운 질문을 품게 된다. 검스를 죽이려는 성차별, 인종차별, 식민주의, 이성애가부장제 자본주의 구조는 고래를 포획하는 마구잡이식 그물과 얼마나 다른가? 둘 다 존재를 숨 쉬지 못하게 한다는 점, 표류하게 만든다는 점,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 유사성을 단순 열거 또는 병치하는 방식이 아니라, ‘당신’(고래일 수도, 독자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둘 다이기도 하다)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을 택한다는 점에서 검스는 탁월하다. 독자가 거리감을 거두게 만들거나 적어도 거리를 가늠해보게 만들고, 변화하는 경계들을 중단 없이 인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는 해양 포유류의 삶의 방식을 정보의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알게’ 됨과 동시에 기이한 은유의 감각 속에서 그들과 자신을 겹쳐 보게 된다.

물론 검스 역시 은유, 즉 인간과 겹쳐놓기의 잠재적 폭력성을 인식하고 있다. 인간과는 전혀 다른 종의 경험을 자신의 경험과 동일시하려는 자세가 그저 자신의 문제의식을 투사하려는 욕망은 아닌지 의심한다. 그 의심으로 인해 그는 취약하며, 역설적이게도 그 취약성을 그대로 내보이고 겸허히 인정함으로써 새로운 발견, 즉 “친족 작업의 생태학”(28면)을 향해 갈 수 있다. 검스가 시도하는 자신과 해양 포유류의 마주침(encounters)이라는 현상 자체가 우연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므로 그를 타자들에게 취약한 상태로 만든다. 이 불안정한 상태는 이종 간의 관계 맺기에서 필연적이다. 관습적으로 정의된 범주를 부수고, 정체성을 뒤집는 일을 수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과정을 통해 ‘나만이 나다’라는 근대적 인간중심주의의 “해로운 전술”(138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선언이나 판단보다는 질문하기와 듣기 쪽으로 비로소, 겨우 나아갈 수 있다.

스스로를 자립적인 개별자로 상정하는 순간 우리는 소외된다. 칭(Anna Tsing)이 『세계 끝의 버섯』(The Musroom at the End of the World)에서 서술한 정의를 참고하면, “생명의 얽힘 관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독립할 수 있는 능력”5)이 바로 소외다. 이는 독립된 또는 고립된 ‘표준적인’ 개별 행위자라는 관념을 통해 말끔하고 추상적인 규격화를 이룩하고, 난삽한 풍경들을 단순화하며, 단일한 독립형 자산을 중시하는, 전형적인 인간중심적 진보 서사다. 칭과 검스는 정확히 그 반대 방향으로 향한다. 새로운 가능성을 창발하고 오염된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지향하며 ‘요약하기’라는 간편한 폭력에 저항하는 말하기를 시도한다. “모든 존재는 오염의 역사를 수반”6)하므로 “우리 자신들(selves)의 신화는 이미 마주침의 역사를 통해 오염되었”7)음을 알기 때문이다. 오염은 비유이자 동시에 실재이기 때문이다.

생태 위기와 환경 파괴라는 전 지구적 문제에 맞서 1980년대 활발히 활동한 1세대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자연 회복, 공존, 조화로운 삶 등 그야말로 화해와 복구를 추구했다. 이때의 ‘공존’은 자연히 개체중심주의를 전제했다. 즉 일정한 경계를 지닌 ‘혼자’인 다종 개체들 간의 공존을 지향했던 셈이다. 그러나 해러웨이에 따르면 이미 개체들은 서로 우발적이며 역동적인 매듭으로 뒤얽혀 있으며, 예기치 않게 협력하고 있다. 그 끝없는 내부-작용(intra-action)에는 죽음도 포함된다. 해러웨이는 “무구한 보편적 몸짓”8)보다 “가차 없이 역사적인 관계의 우발성 속에 있는 위험한 제안”9)을 택하며, 검스 역시 마찬가지다. 해러웨이가 “관계적 물질-기호론적 세계 만들기”라고 부른 것을 검스는 해양 포유류들과 더불어 해낸다. 물질이면서 동시에 기호인, 그리하여 실재이면서 동시에 은유인 이종 간의 관계가 찬란하게, 끔찍하게, 서글프게, 그리고 다정하게 그려진다. 『떠오르는 숨』은 실로 물질성과 은유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매우 드문 책이다.

엄연한 경계 공간을 지닌 개체 대신 이미 서로를 물질-기호론적으로 상호 침투하는 복수종들의 세계를 그리는 것은 그 자체로 새로운 말하기, 새로운 내러티브의 일환이다. 서사학에서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인간의 본능적 성향과 그 유구한 역사성을 강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러웨이는 “자연, 문화, 주체, 객체는 그들이 밀접하게 뒤엉킨 세계를 만들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10)며 언어의 중요성, 즉 세계를 창조하고 동시에 파괴할 수도 있는 양면적인 힘을 강조한다. 세계를 만든다는 것은 결국 언어를 (재)활용하고 변형시키는 일이므로 스토리텔링의 양가성을 직시한다면 세계 만들기의 위험성 역시 인지하게 된다. 무구하지 않은 이야기, 오염된 이야기, ‘얼마나 가능한가/있을 법한가’를 넘어 나아가는 이야기는 대안적 존재론을 가능케 하는 세계 만들기(world-making) 프로젝트다. 해러웨이에 따르면 “대부분의 학자가 관점들을 한 번에 하나로 분리하기 위해 존재론을 사용하는 반면, 세계 만들기를 생각하는 것은 겹치는 양상과 역사에 따른 결과로 일어나는 마찰을 허용한다”.11) 검스가 『떠오르는 숨』을 통해 시도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마찰을 기꺼이 허용하고, 사랑을 말하기. 그럼으로써 새로운 세계 만들기를 시도하고, 그 시도의 결과물을 나누기.

“한때는 내 날카로운 비판이 문제적이라 생각했습니다. 내 앞에 있는 장애물을 뚫고 독선적인 이들에게 상처 주려고 사용했던 것들이요. 네, 나는 나를 억압하는 세상을 지배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세계를 위한 안테나가 필요합니다. 이제 나는 말을 하기보다 더 많이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합니다.

나는 항복합니다. 괴물을 마주하고 인정할 수 있을 만큼 큰 사랑에게. 바다와 고래를 창조할 수 있을 만큼 깊고 넓은 사랑에게. 우리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선조들의 손길에.” (168~69면)

『떠오르는 숨』은 우리가 자연과 맺고 있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꿔야만 변화가 가능하다고 설파하지 않는다. 자연의 신비 앞에 경이를 감각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설득의 어조로 건네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얼마나 타자적인 존재(고래)와 이미 겹쳐 있는지를 매번 새롭게 놀라며 깨닫는다고 이야기를 건네줄 따름이다. 인식의 변화를 추동하는 씨앗이 우리 내면 안에 단단히 자리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발견한 특수하고도 역사적인 씨앗을 고스란히 보여줄 따름이다. 그 씨앗에 깃든 것은 결국 사랑이다. 사랑하는 능력을 회복하고 돌보고자 검스는 해양 포유류라는 타자에게 최대한 다가가 유심히 듣고 응답해보려 한다. 물질세계에 대한 인간적인 의미화라는 그물망의 한계를 또렷이 인식하면서도, 그 그물망 너머로 나아가 보고자 한다. 잉골드(Tim Ingold)가 “비유 속에 더 깊은 진실이 도사리고 있다는 직관”12)을 믿듯, 검스는 은유와 의미부여 안에 이미 다중의 진실이 깃들어 있음을 알고 있는 듯하다. 『떠오르는 숨』을 펼치는 순간, 물질로서의 고래들과 기호로서의 고래들이 한데 뒤얽혀 춤추기 시작한다. 그 몸짓은 더없이 찬란하고, 끔찍하고, 서글프며, 무엇보다 다정하다.


1)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바닷바람을 맞으며』(에코리브르, 2017) 123면.

2) 같은 책 126면.

3) 카슨은 주류적인 과학 글쓰기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표현법을 두고 이렇게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물고기는 물리적으로, 인간은 심리적으로 반응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물고기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인간의 심리 상태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 (같은 책, ‘머리말’ 30면)

4) 알렉시스 폴린 검스 지음, 김보영 옮김 『떠오르는 숨』(접촉면, 2024) 82면. 앞으로 이 책의 인용은 괄호 안에 면수만 표기.

5) 애나 로웬하웁트 칭 지음, 노고운 옮김 『세계 끝의 버섯』(현실문화, 2023) 29면.

6) 같은 책 65면.

7) 같은 책 67면.

8) 도나 J. 해러웨이 지음, 최유미 옮김 『트러블과 함께하기』(마농지, 2021) 31면.

9) 같은 책 같은 면.

10) 같은 책 28면.

11) 같은 책 80면.

12) 팀 잉골드 지음, 김현우 옮김 『조응』(가망서사, 2024) 41~4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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