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정책 분야에서 예술-기술 융합 영역을 언급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은 ‘미래’의 예술이다. 기술이 주도하는 사회 변화 속에서 도래할 예술을 실험한다는 의미다. ‘첨단’과 ‘미래’에 주목하는 이러한 시선은 공교롭게도 ‘이미’ ‘지금’의 예술이 기술을 경유해서 마주하는 변화나 뒤틀림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그러는 사이 ‘지금’ ‘여기’의 예술은 마치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낡은 것이 되어버린 양 의문의 1패를 당한다.
김성우의 『인공지능은 나의 읽기-쓰기를 어떻게 바꿀까』는 인공지능이 바꿀 ‘미래’를 향한 열광·기대·불안·회피 반응의 틈바구니에서 애써, 정말로 애써서 ‘지금’ ‘여기’의 읽기와 쓰기, 말과 글, 삶과 사회를 말한다. 그것도 ‘인간만의’라는 당위에 기대거나 옛것에 대한 낭만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에 관한 설명부터 인간에 대한 다면적 탐색까지 빠짐없이 다루면서 논리적으로, 정성 들여 말한다. 책 곳곳에서 족히 수십 번은 넘게 변주되어 등장하는 저자의 요청은 다음과 같다.
‘인공지능의 시대, 읽기와 쓰기는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여전히 깊이 읽고 정성 들여 쓰기가 의미와 가치를 갖는 시대, 우리는 인공지능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1)
저자는 이 질문과 사유의 요청을 여섯 개 장으로 세심하게 다룬다. 1장에서는 인공지능의 등장이 던지는 질문을 탐색하고, 2장에서는 인공지능, 특히 거대언어모델(LLM)의 기술적 특징에 관해 특별한 공학적 지식 없이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한다. 3장에서는 본격적으로 인공지능을 통해 리터러시 생태계가 어떻게 바뀔 것인지를 ‘매개’ ‘전도’ ‘속도’ ‘저자성과 윤리’라는 네 가지 키워드를 통해 제시한다. 비판적 리터러시 연구자로서 저자의 오랜 공부와 고민의 깊이가 느껴지는 장이다. 4장에서는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열풍에 관한 비판적 검토와 함께 “인공지능 시대에는 질문만 잘하면 됩니다”라는 인식이 가진 얄팍함을 뜯어본다. 5장에서는 인간과 기술, 인간과 인공지능이 어떻게 공진화하는 존재로 얽혀 있는지를 보여주고, 6장에서는 빠짐없다 싶을 만큼의 다양한 각도에서 읽기와 쓰기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미래 또는 이미 도래한 미래로서의 현재에 우리에게 필요한 관점과 성찰의 출발점을 제시한다.
버거움
차례를 조금 더 풀어 설명한 위와 같은 요약으로는 이 책의 내용이 아닌 ‘느낌’을 전달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책은 읽기 버겁기 때문이다. 분량 때문도 아니고, 문장력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문장은 대중서에 걸맞게 가독성이 좋고, 이론서로서 내용을 전달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적확한 단어를 고르고 고른 인상을 받는다.
오히려 책을 읽는 내내 경험하는 것은 ‘밀도감’이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며 저자는 인지과학, 언어학, 영어교육학, 일반교육학, 심리학, 매체철학을 비롯한 다양한 이론적 논의를 동원한다. 문제를 바라보는 각도도 교육적 측면, 생태적 측면, 사회문화적 측면을 두루 다룬다.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하는 예시도 기술에 대한 것은 물론이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만한 다양한 읽기-쓰기의 경험, 음악을 비롯한 예술의 사례, 거기에 더해 저자 자신의 구체적 경험까지 가져온다. 보통 책을 읽다 보면 저자의 ‘주장’에 대해 조금은 반박하고 싶은 마음도 들기 마련인데, 마치 그런 마음도 이미 고려했다는 듯 “그러면 흔히들 이렇게……”라고 하면서 그냥 쿡쿡 찔러보고 싶은 마음도 포기하게 한다. 어떻게 보면 좀 빡빡하다 싶을 정도의 치밀함이고, 다르게 보면 어떤 절박한 호소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읽는 내내 내용만큼이나 저자의 ‘심정’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었다. 책의 중후반 정도에서 내 나름 저자의 ‘심정’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게 하는 실마리가 있었는데, 그 부분은 글의 말미에 얘기해보려 한다.
몸
이 책은 읽기-쓰기를 중심으로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에서 파생될 수 있는 쟁점과 사례, 이론을 전방위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두루 다룬다. 그러다 보니 서평을 하는 입장에서 책의 내용을 ‘압축’하는 키워드를 고르기가 쉽지 않다. 아마 저자도 그런 방식의 환원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책을 읽는 동안 나에게 자주 와서 부딪혔던 어떤 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몸’이었다. 저자는 책 곳곳에서 ‘몸’에 대해 천착한다. 몸은 인간의 연속성의 근거인 동시에 인간의 제약이자 인간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바로 이 ‘몸’ 있는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다면적 속성을 하나하나 뽑아 그것이 인공지능이라는 낯선 존재와 대면하면서 경험하는 뒤틀림과 변화를 묘사한다. 그러는 동시에 삭제되거나 압축될 수 없는 ‘몸’의 존재를 건너뛰고 인공지능 담론이 전개되는 것에 문제제기한다.
몸, 생성과 생성
저자가 말하는 몸과 연결되는 논의 중에는 생성(becoming) 없는 생성(generation)의 문제가 있다. 여기서 생성(generation)은 거대언어모델을 특징짓는 말이고, 생성(becoming)은 들뢰즈(Gilles Deleuze) 등의 철학자가 말하는 존재론적 변화로서의 자기생성이다. 저자는 생성형 인공지능의 부상과 함께 내 ‘안’에서의 생성(존재의 변화, 성장 등)이 없는 ‘밖’에서의 생성만 범람하는 것이 인간 자신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 묻는다. 기존의 읽기와 쓰기를 통해 명시지, 형식지로서의 정보를 수용하고 글로 대표되는 지식의 외현화만 달성한 것이 아니라 읽는 몸, 쓰는 몸 그 자체를 생성해왔다는 것인데, 그것이 효율이나 생산성이라는 논리하에서 인공지능으로 대체되어도 좋을 그런 종류의 것인지 반문하는 것이다.
몸, 사회문화적 존재
며칠 전 ‘게임에 빠진 아이, 금지와 갈등을 넘어서기 위해’라는 제목으로 진행한 동료 연구자의 강연을 들으면서도 ‘몸’의 문제를 생각했다. 게임하는 아이는 게임 커뮤니티가 가진 문화를 체화한다. 동시에 아이의 몸은 부모와의 관계, 소통 방식, 가족 내 위계와 문화도 체화하고 있다. 대다수 부모가 커뮤니티 은어는 물론이고 기본적인 메커니즘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저기 손 닿지 않는 곳, 아이들의 세계인가 싶은 곳에 게임문화가 있다. 별로 만날 일이 없어 보이는 부모의 문화와 게임의 문화는 공교롭게도 아이의 ‘몸’이 가진 연속성 때문에 충돌한다. 몸이 문화적 격돌의 장이 되는 셈이다.
저자도 책에서 같은 논지의 얘기를 한다. 요소-첨단 기술의 속도와 생물학적 인간 몸의 속도 불균형의 문제를 비롯해서, 몸이 가진 연속성이 다양한 사회문화적 맥락과 엮이는 현상을 다룬다. 몸을 매개로 하는 사회문화적 존재인 게임하는 아이에게서 ‘게임’만 안 하게 하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사회문화적 맥락과의 얽힘에서 인간-인공지능의 접촉면만 깔끔하게 발라내어 다룰 수 없다는 점을 자분자분 설명한다.
기술에 부정적이라는 오해
이쯤 되면 그래서 저자는 인공지능 기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재미있게도 저자 본인도 책에서 “막연히 기술에 대해 반감을 가진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은 경험”을 언급하면서 나름의 해명을 한다(324면). 나 역시 책을 읽는 동안 꽤 자주 그런 오해의 유혹을 느꼈지만, 잠시 판단을 유보하고 그 오해와 해명의 행간을 이해해보려 애썼다.
추측이지만, ‘기술이 교육을 구원할 것이다’ ‘인공지능이 교육과 학습을 완전히 바꿀 것이다’와 같은 단순화된 기대, 구호, 선동, 압박이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논쟁적 요소와 논의 지점을 가진 것인지 설명하다 보니 그런 오해를 받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냥 좋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 되지. 무슨 설명이 그렇게 많습니까?’ 같은 핀잔에 직면하는 격이라 할 수 있다. 저자가 직접 하는 해명에 따르면 그 자신으로서는 나름 기술을 통한 교육의 불평등 해소, 다양한 리터러시의 실천 가능성을 기대하며 여러 기술 프로젝트와 현장에서 연구하고 실천한 경험이 있다. 그런데 그런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은 단순화된 구호로 ‘해결’되지 않은 사회문화적 존재, 몸을 가진 존재인 인간에 대한 이해였던 것이다. 라투르(Bruno Latour)의 표현을 빌리면, 그래서 매끄럽게 접힌(folded) 간결 명료한 구호를 고집스러운 노인처럼 하나하나 펼쳐(unfold)놓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해봤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술에 대한 논의가 지금처럼 단순화된 슬로건 같은 방식으로 제시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저자도 안심하고 인공지능을 통한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상상에, 관련된 실제 프로그램 개발에 마음을 더 많이 쏟을 수 있지 않았을까? 어찌 보면 이 책의 1~5장은 납작해진 기술 논의에 대한 저자의 염려와 조마조마한 마음이 채우고 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상황이 지금과 같지 않았다면 저자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 책의 6장만 써도 되지 않았을까? 앞서 언급했듯 내가 책을 읽으며 버거움, 간절한 호소처럼 느껴지는 저자의 어떤 심정이 이 부분과 연결되는 게 아닌가 싶다. 누가 대신 크게 외쳐주고 다들 주목한다면, 저자 본인은 홀가분하게 넘겨버리고 싶은 그 염려와 조마조마한 마음이 채운 1~5장 350면의 내용이 나에게는 ‘심정’의 형태로 전해졌다. 아마 초판 출간 직후 탐독한 다음 서평을 쓰기 위해 두 번째 읽는 것이기에 더 그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소중한 것은 삭제하지 않는다
저자는 아버지가 사용하던 타자기를 ‘띵’ ‘드르르르륵’ 등의 사운드 이펙트 제조기로 경험한 시간을 묘사한다. 가장 저항적인 매체를 설명하면서 편지를 주고받는 일의 설레임에 대해서도 묘사한다. 그런 부분을 읽다 보면 저자에게는 지키고 싶은 ‘소중한 것’이 많다는 인상을 받는다.
작년에 영상미디어 관련 학과 학생들과 인공지능 콘텐츠 창작 실습 수업을 하고 연구를 위한 인터뷰를 진행한 일이 있다. 다수 학생에게서 발견되는 공통된 특징이 있었는데, 바로 소중한 것은 인공지능에게 내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글을 쓸 수 있다.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음악을 만들 수 있고, 영상을 만들 수도 있다. 때때로 인간 학생보다 더 잘 만들기도 하고, 혹 퀄리티가 만족스럽지 못하더라도 비교할 수 없는 빠름으로 비교우위를 보여준다. 그렇게 인공지능이 꽤 많은 것을 ‘대신’할 수 있지만, 작가를 지망하는 학생은 쓰기 자체의 즐거움을 넘겨주고 싶지 않아서 문장의 생성은 하나도 맡기지 않고, 본인이 쓴 글에 대한 의견만 물었다.
책 곳곳에서 느꼈던 소중한 것을 보듬고자 하는 저자의 마음에 희망을 걸어보는 이유다. 저자는 물론이고 다수 학생에게는 당연히 소중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인공지능이 대신할 수 있다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인간과 인공지능을 대립시키는 의견도 아니다. 오히려 ‘거의’ 모든 것을 인공지능이 ‘대신’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 그때에도 우리는 몸으로서의 나, 우리를 생성(becoming)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일이다.
글 서두에 인용한 저자의 요청을 다시 살펴보자.
‘인공지능의 시대, 읽기와 쓰기는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여전히 깊이 읽고 정성 들여 쓰기가 의미와 가치를 갖는 시대, 우리는 인공지능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26면)
나는 이 요청에서 ‘여전히’가 가장 눈에 밟힌다. 여전한 그것, 소거되거나 축약될 수 없는 그것에 저자의 심정이 있고, 인간-인공지능 시대의 희망의 자리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1) 김성우 『인공지능은 나의 읽기-쓰기를 어떻게 바꿀까』(유유, 2024) 26면. 앞으로 이 책의 인용은 본문 괄호 안에 면수만 표기.
여전한 것과 도래할 것의 공존을 대하는 진지함
김성우 『인공지능은 나의 읽기-쓰기를 어떻게 바꿀까』(유유, 2024)
│설동준│
薛棟峻 담빛학교 공동대표교사, 캣츠랩 연구위원.
서평
1982년 출간된 『딕테』는 1997년 토마토출판사가 김경년의 번역으로 처음 국내에 소개한 후 IMF 영향으로 절판, 2004년 어문각에서 재출간, 다시 절판 상태가 지속되면서 오랜 시간 한국어 독자들에게는 어떤 부재의 흔적과 소문으로 존재해온 작품이다. 2021년 번역된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Minor Feelings)에서 테레사 학경 차(이하 차)의 죽음을 다룬 장을 통해 차와 『딕테』를 처음 접한 이들도 적지 않다. 미국과 한국에서 거듭 재호출되었지만 『딕테』 번역서 재출간은 명확한 이유 없이 요원한 상태였다. 2024년 마침내 들려온 20년 만의 재출간 소식에 독자들은 뜨겁게 반응했다. 영문학을 비롯해 시각예술, 영화이론, 매체이론, 퍼포먼스 등 번역본 절판과 상관없이 『딕테』를 영어로 접하고 연구해온 이들에게는 새삼스럽고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는 반응이었다. 이는 그만큼 해당 소설이 한국어 독자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절판 상황에 긴 시간 소외되어왔음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딕테』의 공식 한국어 번역이 절판된 시간은 말하자면 디아스포라의 시간과 흡사했다. 공식적인 시간은 멈춰 있었지만 차와 『딕테』가 잊히지 않도록 모여서 조각난 종이를 나눠 읽고 재번역하던 집단기억의 시간은 드문드문 불규칙적으로 흘렀다. 번역은 두 언어 간에만 일어나는 사건일 수 없었다. 『딕테』의 언어, 장르, 매체 간 번역은 몸과 시간과 기억의 번역으로 경험되었다. 『딕테』가 언어와 기억의 시차로 타자의 공간을 여는 것처럼 출간과 번역, 절판과 재출간이라는 작품 밖 사건들은 공식 번역서를 읽기라는 재번역으로 수행하는 독자들에게도 시차를 남기고 비가시적 사이 공간을 창출했다.
1990년대 미국에서 『딕테』가 재조명된 배경에는 1980년대 이후 아시아계 미국인 문학에 대한 관심 증가와 1994년 킴(Elaine H. Kim)이 편집한 『딕테』에 관한 에세이 모음집 『자신 쓰기, 민족 쓰기』(Writing Self, Writing Nation)으로 강화된 비평적 위상을 들 수 있다. 현재 『딕테』를 둘러싸고 있는 수식어들이 공식화된 것도 그때쯤이다. 파편적 서사 구조로 난해하고, 해체적이며, 단일한 의미망에 가둘 수 없다는 특징이 문학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 장르 내부에서 소화되었다. 이후 오바마 당선이 인종차별을 개선하지 못하고, 2016년 인종차별을 종용하는 트럼프가 당선되자 예술의 사회 참여가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흐름 속에서 『딕테』는 다시 한번 주목을 받게 된다. 여러 의미에서 정치성과 미적 실험성을 모두 구현하는 문제가 중요하게 부상한 시기였다. 디아스포라, 퀴어, 페미니스트 작가들과 더불어 차와 『딕테』가 호명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민자, 유색인 작가의 작업이면 어떤 의심도 없이 인종적·정치적인 관점으로 분석되는 흐름과 실험성이 강한 작가의 작품은 으레 민족성과 인종, 젠더를 지우는 특정 비평 태도 모두를 『딕테』는 강하게 밀어내며 벗어났다.
미국에서 『딕테』가 획득한 맥락과 별개로 한국문학의 자장 안에서 이루어진 『딕테』 연구는 한동안 1990년대 후반 아시아계 미국인 문학의 민족성과 언어담론, 탈식민주의 문학, 한국 근현대 이민문학 중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절판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중요한 영문학 논문과 영화, 사운드, 몸, 다매체 분야의 외국 연구들이 확장한 아방가르드 담론, 페미니즘, 정신분석학, 매체이론, 정체성이론, 여성적 글쓰기, 번역과 권력 등의 주요한 관점이 한국어 독자들에게 도착하기까지 불가피한 시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2016년 이후 『딕테』 국내 수용의 프레임 변화는 페미니즘 운동의 역동적 영향력이 요청한 새로운 언어와 위치에 대한 관심과 고민에서 기인했다. 여성 작가와 번역가들이 주목받으면서 여성의 쓰기와 젠더 번역이 연결된 변화의 장 안에서 포착되었다. 즉 『딕테』 재출간은 2000년대 초반 이후 달라진 예술/문화 수용의 장 안에서 벌어진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래된 미래가 있다면 새로운 과거도 있는 것이다. “만약 작품에 힘이 있다면 작품은 청중에 의해 재구성되고 변모할 것이며 이 과정은 무한히 이어질 것”1)이라는 차의 창작론이자 매체론은 새로운 과거로, 독자의 능동적 번역 행위를 통해 다시 한번 재현되기 시작한다.
발수신자로서의 번역자
『딕테』에서 번역은 다의적인 의미망 안에서 수행되고 실패한다. 서구 번역 관습에서 번역은 원문에 충실한 반복이자 재생산이다.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면서 자연스럽게 의미를 연장하고 동화(assimilation)의 맥락을 충실히 이행하는 과정에서 두 언어 간 비대칭성과 권력관계는 소외된다. 초반 프랑스어와 영어가 아래 위로 놓인 부분에서 차는 ‘틀린 받아쓰기’와 번역을 등치시킨다. 받아쓰기는 음성언어를 문자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번역 결과의 불완전성은 필연적이며 각 언어의 문법과 문화의 상이함 탓에 누락되고 오염되어 불투명해지는 부분을 뚜렷하게 부각한다. 멀리서 온 사람(여성)은 언어에 실려 이동되는 권력에 저항하는 잠재적 장소로서의 틈, 비워진 몸으로 받아서 쓴다. 디아스포라 여성의 몸이 곧 번역의 장소가 되고 다음에 오는 “디죄즈”(DISEUS)2)의 의미를 확장한다. 전문 낭송인을 의미하는 여성형 명사이면서 영매이자 현대적 의미에서 여성 작가로까지 존재가 파생되는 디죄즈는 언어 없는 존재의 언어를 해석하고 매개하며 번역을 수행하는 자다. 이러한 다중 주체가 갖는 복수성이 단일한 의미화와 반복 및 재생산으로서의 번역 수행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디죄즈 장에 등장하는 직접적인 번역 문제는 기본적으로 언어 학습의 목표가 모방과 재생산의 실천에 있음을 잘 보여준다. 동시에 차는 번역 연습 문제에 문법적으로 부정확한 영어 문장을 포함하면서 식수(Hélène Cixous)가 말한 여성적 글쓰기가 갖는 초문법적 특징을 드러내며 법 밖의 언어와 그 언어 사용자의 존재를 환기한다.
5. 그녀는 전화하다 그녀는 믿다 그녀는 누구에게 전화하다 대답이 없으니까 계속 전화하다 그녀는 믿다 그녀는 전화하고 상대편은 반드시 들어야 한다. 상대편은 반대쪽이 느끼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3)
5. She call she believe she calling to she has calling because there no response she believe she calling and the other end must hear. The other end must see the other end feel4)
예문에서 한국어 번역은 두 가지를 누락한 채 전달한다. 하나는 영어 동사의 초문법성과 극단적 파편화이고, 다른 하나는 영어의 의미 단위들 사이에 보통보다 크게 놓인 여백이다. 의미의 해석과는 무관해 보이지만 이 두 누락으로 언어들의 관계가 재설정되거나 의미가 확장될 가능성은 줄어든다. 가령 she를 ‘그녀들’이라는 복수 주어로 인식할 수도 있다. 『딕테』의 다른 장에서 주어 she가 여러 여성이 중첩된 주체로 기록되고 있음을 상기하면 이 부분의 법은 역설적으로 법 밖의 주변적 위치에 대한 상상에 조력한다. 이렇듯 언어에 기입된 이데올로기와 권력을 번역하고 있는 『딕테』가 한국어로 번역되었을 때, 그것을 읽는 독자는 차가 「관객 먼 친척」에서 강조한 바 있는 발수신자(sendereciver)로서의 능동적 순환과 저항으로서의 번역을 실천하는 존재가 된다.
“어떤 파헤쳐야 할 이식”
20년은 새로운 번역을 기대하기에 정당한 시간이다. 2004년 판본과 비교했을 때 2024년 재출간본은 판형과 표지색의 변화 외에 아쉽게도 번역에서는 큰 변화를 찾기 힘들다. 다만 『딕테』에서의 번역이 언어가 언어로 옮겨지는 텍스트의 번역에만 한정되지 않는다고 할 때 이미지와 매체, 장르의 번역에서 몇 가지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지면 관계상 두 가지만 소개한다. 먼저 재출간본에서 보여주는 지도 번역이다. 「멜포메네: 비극」 장의 한반도 지도가 제기하는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지도가 땅의 지형과 주변 정세, 역사의 기록과 정치적 선택이 교차하며 형성되는 매체이자 번역이라는 것을 지도는 여러 표식을 통해 보여준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저항운동이 일어났던 지역들과 DMZ가 표시되어 있고, 동해 부분에는 Sea of Japan이라는 표시가 뚜렷하게 보인다. 한반도의 일제 식민지 잔재, 분단, 민주화 역사가 한국 지정학적 상태의 번역 결과로 그려진 지도에서 새 번역본은 Sea of Japan을 지웠다(그림1).5)
2004년과 달라진 이 의도적 누락 또는 삭제를 어떻게 해석하고 번역해야 할지 독자는 선택해야 한다. 번역의 시차가 원본의 맥락을 변화시키거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지만 작가가 근현대사의 기억을 번역한 결과로 제시한 지도의 부분을 삭제한 선택에 대해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여전히 ‘일본해’ 표기가 정치적 문제로 작동하고 있는 현실을 환기하기에도, 청산하지 못한 현대사 문제를 인식하기에도 삭제의 방식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Sea of Japan이 표시된 지도가 번역하고 있는 것은 오래 이어져온 “어떤 파헤쳐야 할 이식”6)이다. 차의 어머니가 만주로 이주하고 차의 가족이 하와이로 이주해야만 했던 이식의 시간과 기억이 번역된 지도에서 정작 삭제되어야 할 것은 과도한 민족주의적 신념일지 모른다. 새 번역본의 이미지는 그렇게 재번역된다. 6)
기억의 질감과 번역
『딕테』에는 이미지나 매체로서의 언어가 여러 번 등장한다. 표지 다음에 나오는 유일한 한국어 이미지와 차의 아버지가 쓴 한자 붓글씨, 「클리오: 역사」 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차의 필기체 이미지 등은 언어를 의미적으로 해독하는 방식으로는 읽히지 않는다. 사진을 흑백으로 여러 번 복사해 시간성을 부여한 『딕테』 이미지들이 어떤 출처도 표시되지 않은 채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 놓임으로써 새로운 관계성과 장르적 경계를 넘는 의미를 획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어와 이미지를 수용하는 관습적 방식이 『딕테』 곳곳에 놓인 번역의 장소에서는 힘을 잃는다. 「탈리아: 희극」 장에 놓인 두 버전의 편지는 소문자 기억(memory) 및 대문자 기억(Memory)과 연계되어 등장한다. 첫 번째 편지는 타자기로 친 듯한 서체에 마지막 서명과 주소만 손글씨로 인쇄되어 있다. 2004년 판본에서는 텍스트로서가 아니라 이미지로 면수 표시 없이 놓여 있는 반면 재출간본에서는 이 부분을 텍스트 삼아 번역하고 면수를 표시
했다.
이렇게 이미지를 텍스트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영문 이미지의 수정 부분인 and와 서명, 주소는 누락되고 만다. 곡선이 크게 휜 필기체가 몸의 움직임을 연상시키는 두 번째 편지는 번역 없이 이미지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첫 번째 편지의 언어 번역은 두 편지가 가진 관계성을 바꾼다. 이 편지들은 언어를 매체로 작업해온 차가 타이포그래피에 내재된 신체성을 적용해 기억을 감각의 영역으로 치환한 이미지로 번역할 수 있다. 편지의 내용은 부차적이며, ‘기억’이라는 소제목을 가진 텍스트들의 정렬 방식이 모두 다르다는 점이 두 이미지 사이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그런데 재출간본의 이미지 번역은 이 관계성을 느슨하게 만들고 언어의 매체성을 다른 의미에서 재차 환기
한다.7)
「탈리아: 희극」 장에는 전화받는 여자가 등장한다. 독자의 기억은 앞서 언급한 번역 문제 5번을 소환하거나 그곳으로 움직인다. 두 부분은 상호 조력하며 서로를 번역하면서 처음 그 자리에서 있던 각각의 의미 너머로, 제3의 번역 장소로 나아간다. 이처럼 『딕테』 내부에서 작동하는 어떤 장면들의 시차와 외부적으로 주어진 번역의 시차로 인해 20년 만에 재출간본을 만난 독자들은 단일한 의미로 파급되는 주류적 시각에 저항하며 맥락화된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4)으로서의 재번역을 새롭게 요청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발수신자’의 읽기란 위치와 몸을 바꾸는 역동적인 번역이고, 기억을 다른 기억으로 받아쓰기다. 새로운 과거는 그렇게 이식된다. 8)
1) “pahts,” Theresa Hak Kyung Cha (1978, 3, Cha Archive, Berkeley Art Museum and Pacific Film Archive, San Francisco, CA).
2) 차학경 지음, 김경년 옮김 『딕테』(문학사상, 2024) 13면. 앞으로 이 책의 인용은 괄호 안에 면수만 표기함.
3) 같은 책 25면.
4) Theresa Hak Kyung Cha, DICTEE (California: U of California P, 2001) 15면.
5) 차학경 지음, 김경년 옮김 『딕테』(어문각, 2004) 90면; Theresa Hak Kyung Cha, DICTEE (California: U of California P, 2022) 78면; 차학경, 앞의 책(2024) 90면.
6) 차학경, 앞의 책(2024) 같은 면.
7) 차학경, 앞의 책(2004) 154면; 차학경, 앞의 책(2024) 154면.
8) Donna Haraway, “Situated Knowledges: The Science Question in Feminism and the Privilege of Partial Perspective,” Feminist Studies 14.3 (Autumn 1988) 575~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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