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날 이후
2024년 10월 10일 우리에게 노벨문학상이라는 선물이 도착했다.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한강의 이름을 불렀을 때, SNS 생중계로 그 소식을 타전하던 어느 출판사 풍경이 떠오른다. 해외문학 편집팀 식구들이 아카데미 관계자가 전하는 이름 한강이 우리가 알던 작가라는 걸 알아듣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환호가 시간차를 두고 터졌기 때문이다. 노벨문학상이 우리에게 오던 날, 작가는 집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는 저녁을 맞이하고 있었다.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다 전화를 받은 2023년 수상자 노르웨이의 욘 포세(Jon Olav Fosse)나, 새벽에 자다 일어나 전화를 받은 2020년 수상자 미국의 루이즈 글릭(Louise Glück)처럼 저녁에 식사 후 차를 마시다 수굿하게 전화를 받은 작가의 목소리에 우리는 진짜 선물이 당도했다는 걸 알았다. 선물을 선물이게끔 하는 첫 조건은 기대 않은 우연함이니 말이다.
누군가는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조용히 지나갔다고 아쉬워하면서 ‘만약 나이 지긋한 남성-작가가 받았다면’ 국가적 축제였을 거라고 한다. 대화의 맥락에서 그 ‘만약’은 한강의 수상을 폄훼하는 의미가 아니라 이 사회의 모든 권위 있는 자리에 포진하는 젠더의 비대칭성을 묻는 연장선에서 나온 것인 줄 알면서도,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조용히 지나간 축제의 자리, 그리고 연이어 터진 정치적 비상사태를 지나며 돌아보니 작가의 고요함은 지금 시대 우리가 만나는 문학의 자리를 더 엄중하게 비추어준다는 생각이다. 지금 우리가 지나는 여러 위기를 생각하면 노벨문학상과 그 이후를 묻는 일의 의미가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글을 수정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불타는 세계와 문학의 자리’라고 제목을 바꾸어야 하지 않나 고민하며 이 문화비평 꼭지에 전 세계적으로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와 문학 바깥의 이야기를 더 해야 하지 않나 고심한 것도 그런 이유다.
노벨문학상은 그동안 한국문학의 소원이자 아킬레스건이었다. 오랜 세월, 질타에 가까운 질문이 참 많았다. 이토록 시인이 많은 나라에서 왜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하느냐? 한국문학이 한국이라는 지역에 갇혀 있는 것 아닌가, 특수성이 아니라 세계적 보편성을 발휘하는 작품을 써야 하는 것 아닌가? 번역이 문제라서 그래, 맨부커상을 봐, 번역이 중요해. 국정감사장에서, 세미나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회의에서, 술자리에서, 질문들은 불시에 날아들었다. 그 사이 K팝이나 K무비 등 문학보다 앞질러 세계에 알려진 한국의 문화적 성취 속에서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염원하는 저마다의 가슴에 한국문학은 세계문학 장에서 여전한 불통으로 자리하는 듯 여겨졌다. 실은 그렇지 않았는데 단지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렇다면 2024년 10월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한국문학이 세계화되었는가? 이 질문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지난 30년간 한국문학과 번역을 둘러싼 논의에서 채택된 ‘한국문학 세계화의 길’ ‘한국문학 세계화 전략’ 등의 문구는 수많은 정책 브리핑과 함께 익숙하게 우리 안에 들어와 있지만 한국문학의 ‘세계화’는 우리가 넘어서야 할 문제적인 틀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것이 국가적 과제인 것처럼 구축되었던 한국문학의 세계화 전략이 가진 불편한 함의를 되묻는 지점에서 시작한다.1) 이 글이 노벨문학상 이후를 질문한다면 그것은 ‘다음엔 누가 노벨문학상을 받을까요?’ 식의 질문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오히려 문학상 중심으로 재편되는 세계문학의 현실은 현실대로 들여다보면서, 문학의 자리와 세계의 관계를 성찰하는 질문이 중심에 놓여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온갖 위기, 전쟁이나 기후위기, 난민 문제는 물론이고 지금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는 민주주의의 위기 속에서 문학은 희망의 자리를 만들 수 있을까? 문학의 역할과 자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세계문학이 작동하는 현실의 판과 자본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시장 논리를 도외시하고는 가능하지 않다. 이 글은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틀이 갖는 문제적 함의를 되묻는 동시에 세계가 직면한 민주주의의 위기 속에서 문학의 자리를 가늠하기 위해 겨울에서 봄에 이르는 몇 가지 기억의 파편들을 엮어보고자 한다.
2. 노벨문학상의 경제학: 블랙리스트와 지원 제도
한강은 박근혜 정권 때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던 작가다.2) 2014년 출간된 『소년이 온다』가 박근혜 정부 당시 사상적 편향성을 이유로 세종도서 사업에서 배제되었다는 것, 그리고 소설 『채식주의자』를 스미스(Deborah Smith)가 번역하여 출간한 The Vegetarian이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았을 때 대통령 축전이 없었다는 점 등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수사한 특별검사팀 조사에서 밝혀졌다.3) 한강은 2017년 10월 7일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에 기고한 글 「미국이 전쟁을 말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While the U.S. Talks of War, South Korea Shudders”)로 극우들의 비난의 표적이 된 바 있다. 작가는 처음 NYT에서 기고문 청탁을 받았을 때는 사양했지만 그 후에 “말들의 전쟁”이 가속화하면서 쉽게 전쟁을 말하는 위정자의 태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면서 ‘누가 ‘승리’의 시나리오를 말하는가?’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 그 글이 제목이 바뀌어 나온 것이다.4)
한국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실감을 전하려고 글을 쓴 작가의 소박한 출발점이 이념적으로 해석되어 왜곡되는 지점은 우리 현대사의 아픈 통점을 지난다.5) 칼럼이 나온 직후 보수 언론과 정치인들이 트집을 잡으면서 작가의 역사 인식이 국회에서까지 거론되었고, 어느 신문사 논설위원은 “누가 그에게 북핵과 한반도 전쟁 위기에 한국인을 대변할 자격을 주었나?”라는 유치한 질문으로 공격했다.6) 비슷한 반응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직후에도 반복되었다. 2024년 10월 14일 스웨덴 대사관 앞에 피켓을 들고 선 이는 “미래 세대들에게 잘못된 사상이 새겨질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말했다. 거꾸로 생각하면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 즉 질문하고 연결하는 힘은 문학에 내재된 본질적인 불온성이고 오늘의 문제들을 직면하게 하고 현실을 바꾸는 토대가 되기에 그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있는지도 모르겠다.7)
그 한강이 아시아 첫 여성 작가라는 이중의 장벽을 뚫고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지금이야 수많은 문학상이 나라마다 있지만 문학상이 지금 시대 갖는 위상을 공고히 한 명백한 지점은 1901년 노벨문학상부터다. 노벨문학상이 만드는 문화적 확산의 범주와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소년이 온다』는 10주 연속 도서판매 종합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여 120만 부가 새롭게 판매되었고, 『채식주의자』와 『작별하지 않는다』 등 다른 작품들도 모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해외 각국에서도 한강의 책이 품절되었다. 한강 작가가 언급한 책들 또한 주문이 폭주했다. 파급 효과는 여러 방식으로 드러났다. 제주4·3을 전혀 알지 못했던 이들이 『작별하지 않는다』를 찾아 읽으며 역사 공부를 새로 한다는 고백도 심심찮게 들리고, 괴로워서 읽지 않으려 했던 『소년이 온다』도 많은 이가 찾고 있다. 문학 장 전체를 놓고 보면 한강의 작품만 팔리지, 다른 작가들은 더 가난해진다며 불평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문학출판 시장은 하나가 팔리면 다른 하나가 거두어지는 제로섬 게임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예스 24에 따르면 10월 10일부터 16일까지 문학 구매자가 전체적으로 증가했다. 한강의 책을 빼더라도 소설/시/희곡 분야 판매량이 전년 대비 49.3퍼센트 증가했다.8) 문학 독자의 저변을 확대하는 일은 한 사건이나 우연이 단순한 촉매로 작용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작가와 독자와 번역가와 출판사, 언론과 문화재단을 포함한 여러 노력이 함께 만들어내는 이인삼각 경기다.
그 점에서 노벨문학상이 창출한 효과를 우리는 아직도 누리고 있는 셈이다. 문학상의 효과와 양상을 산업의 관점에서 접근하여 연구한 잉글리시(James English)는 노벨문학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1895년 11월, 노벨(Alfred Nobel)이 파리 자택에서 ‘인류에 대한 선물’이라는 숭고한 뜻을 담아 영구적인 상금 지급을 명시하는 유언장을 작성하던 바로 그 순간, 노벨상은 사회적·제도적·이념적이라는 세 가지 주요 축을 따라 문화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매우 적합한 도구(경제학적 의미에서)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되었다.”9) 전 세계적으로 100개 이상의 신문을 통해 발표되는 노벨상은 19세기만 하더라도 문화 활동의 부수적인 형태로 간주되던 상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주된 관심사로 끌어올렸다.10) 스웨덴 화폐로 1100만 크로나(SEK), 미화로 110만 달러, 원화로 13~15억 원 정도 되는 어마어마한 상금 외에도,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는 출판시장의 가치, 전 세계가 주목하는 문화 행사의 구심점으로 자리잡은 노벨문학상의 명성을 폄하하기는 쉽지 않다.
해방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남한 문학장의 구성원들에게 세계문학의 중심부로 단박에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 노벨문학상 수상이라고 본 연구도 있듯이, 노벨문학상을 향한 국가적 열망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11) 거슬러 올라가면 1968년 일본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가뜩이나 일본과 경쟁관계에 있는 한국인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는지도 모른다. 1969년 스웨덴 아카데미로부터 노벨문학상 후보 추천을 의뢰받은 국제PEN 한국본부는 그해에 추천작을 내지 못했는데, 만족할 만한 번역이 없어서였다.12) 이후 계속해서 노벨문학상 후보 추천을 맡은 국제PEN 한국본부는 지난 10월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열린 공청회에서 단체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면서 지난해 추천 작가가 한강이 아니었다고 실토한 바 있는데,13) 현장을 놀라게 한 돌발성 발언이지만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논의의 무게 추가 이미 다른 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그날 모두 발언에서 전수용 한국문학번역원장은 그동안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지원한 한국 작가들의 번역 출판 통계에 비추어 한강의 작품에 대한 지원이 가장 컸다는 사실을 밝혔는데, 28개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8억 5천만 원 정도 소요되었다는 것이다. 도서전 등 행사에 대한 지원까지 더해서 2024년 10월 기준, 44개 언어권에 총 2171건의 번역 출간에 10억 원 정도가 지원되었다는 사실은 문학작품이 탄생되어 다른 언어권에 뿌리내리는 지난한 과정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국가에서 관 주도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통제를 시도하더라도 다른 층위에서는 정부가 주도하는 문화 지원 사업이 다른 숨길로 열려 있었다는 사실, 이 어긋남은 꽤나 흥미롭다. 이는 마치 대통령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군대를 국회에 보내도 계엄령의 불법적인 행위를 아는 바른 군인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임한 2024년 12월 3일 밤의 상황과도 닮아 있다. 문학작품이 국민문학과 국가의 경계에서 벗어나 세계문학의 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번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를 돕기 위해 구체적으로 일을 실행하는 실무자의 감각과 자율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일화다.14)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 가지를 뻗는 데는 여러 힘이 필요하다. 한강을 국제적으로 주목받게 만든 The Vegetarian, 즉 『채식주의자』의 번역이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진행된 것은 잘 알려졌지만, 잘 모르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는데, 2012년부터 4년간 스미스가 재단법인 국제교류진흥회의 연구비 지원을 받아 다른 번역가에 비해 좋은 조건에서 번역에 집중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15) 한국문학을 번역하여 해외에 소개하더라도 성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다양한 경로로 번역 출판의 씨앗을 뿌린 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야 독자와 비평가의 반응이 뒤따르고 후속 번역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예술가에 대한 지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번역이 중요한지 창작이 중요한지, 특정 작가를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나은지 편중되지 않게 골고루 지원하는 것이 나은지 등 논의는 분분하다. 국가적 정책 안에서 예술이 자유로운 숨구멍을 확보하려면 이런 논의는 다각도로 이어질 필요가 있다. 다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노벨문학상 수상이 번역과 출판이라는 중요한 과정을 통과하고 나오는 것이니만큼 적어도 한 세대 이상의 집중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앞서 잉글리시가 예리하게 갈파했듯, 예술이 취할 수 있는 문화적 유희이자 국가적 경쟁이 작동하는 투쟁의 장으로 노벨문학상을 바라보면 다양한 문화적 형식과 연계되고 확장될 수 있는 ‘문화게임’으로서 노벨문학상의 아성은 여전히 굳건하다. 우리 정부와 문화재단들이 수십 년간 번역 지원 사업을 진행하면서 세계문학 장 안에 한국문학을 들여앉히기 위해 노력한 과정은 그 ‘문화게임’을 위한 전초기지를 쌓는 작업으로 의미를 다독여 사줄 필요가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이 단순한 도서 판매량을 넘어 문화 영역 전체에 끼치는 파급효과를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다소 빠른 감이 있겠다. 하지만 필사나 책 읽기 모임을 포함하여 책을 즐기는 방식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으며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일정 부분 동력을 견인하는 것은 사실이다.16) 노벨문학상이 우리 사회의 문화적 자장에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풍경을 숫자적 결과로 도출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문학이 이 세계에 자리하고 작동하는 과정, 작가가 작품을 쓰고 번역가가 번역을 하는 일 외에 출판과 편집 과정, 문학상 후보 지명 및 선정 과정 등 창작·번역·출판에 개입되는 다양하면서도 정교한 구조들을 면밀히 살펴보는 작업은 비평의 밑거름으로 의미가 있겠다. 국가 간 경계를 넘어 문학이 확산되는 방식, 번역 출판이 문학상이라는 거대한 산업을 향해 문화적인 ‘명성’(prestige)의 경제를 동원하는 과정을 검토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앞서 작가에 대한 블랙리스트와 번역 지원 제도가 함께 가지 않은 우리의 사례에서도 드러나듯이, 문학작품은 살아 있는 생물과 같아서 어느 한쪽의 의도대로 빚어지고 걸러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토양과 좋은 씨앗이 필요하며, 그 기반 위에서도 뿌려진 씨앗이 어디에서 어떻게 발아될지는 많은 우연이 개입된다. 번역 출판이 작가의 명성을 만드는 방식에 대해서는 다음 장면에서 살펴보자.
3. 번역의 윤리와 정치성, 세계문학의 ‘세계’들
“번역되지 않은 작품은 절반쯤 쓰인 것에 불과하다”라는 르낭(Ernest Renan)의 유명한 명제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번역은 원전을 새로 태어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제다.17) 세계문학을 이야기할 때, 필자는 ‘번역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라고 자주 이야기하는데, 이는 과장이 아니다. 한국문학을 세계문학과 함께 이야기하려면 어떤 경우든 ‘번역’이라는 깊은 골을 건너야 한다. 여기서 ‘깊은 골’이라 표현하는 것은 하나의 형식으로서 번역에 필연적으로 개입되는 실패와 시련, 이질성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앞서 한강의 사례를 들어 한국문학을 세계 안에 안착시키기 위해 국가와 문화재단의 다양한 지원이 따랐던 사례를 짚어보았는데, 그렇다고 하여 세계시장에 내보이는 시도나 노력이 국가 프로젝트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작가의 언어에 삶과 역사가 있다면, 책 한 권이 다른 언어로 탄생하는 일,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일에는 번역과 편집과 출판과 비평 등 수많은 과정과 힘과 논리와 나눔, 문화적 확산이 개입된다. 따라서 노벨문학상 작품을 우리의 모국어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자긍심 너머에서 우리가 무엇을 번역하고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지, 한국이 세계 안에서 어떻게 자리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해야 한다. 그날 이후 우리의 논의에 무엇이 더해졌는지, 무엇을 거두고 또 나누고 있는지.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2024년 11월 29일,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열린 한 학술대회로 돌아가본다.
‘한강의 시선-세계의 시선: 세계 언론 및 문학계에 비친 한강의 문학’이라는 제하의 학술대회는 스웨덴, 영국, 미국, 독일, 네덜란드, 러시아, 프랑스, 포르투갈, 이탈리아, 에스파냐, 발트 3국, 폴란드, 체코, 세르비아-크로아티아, 튀르키예, 이집트, 인도, 중국, 일본에 이르기까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전 세계 언론이 한강의 문학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만 가능한 목소리의 총합을 듣는 자리였다. 여기서 뜻밖의 전제가 하나 있었으니, 논의를 세계 각국의 언론 반응에 국한하고 번역에 대한 평가는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날 번역을 언급한 흥미로운 발표가 두엇 있어서, 오역과 중역의 문제를 건드려주었다. 세르비아-크로아티아 문화권을 다룬 발표에서 발표자는 한강의 문학에 대한 세르비아 문학평론계의 다소는 부정적인 시선을 거론했다. 많은 국가에서 한강의 노벨문학상을 상찬했지만 그와는 대조적인 반응을 전하며 김상헌은 그 이유로 중역의 문제를 짚었다. 소수어로 번역된 『채식주의자』의 경우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 직접 옮긴 것이 아니라 스미스의 The Vegetarian을 옮긴 중역이어서 많은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세르비아어 번역은 한국어에서 영어로 번역된 것을 중역했고, 크로아티아의 경우에는 한국어에서 영어, 영어에서 러시아어, 러시아어에서 크로아티아어로 옮긴 이중의 중역을 거쳐 책이 나왔다는 것이다. 발표자는 오역이 매우 많아서 논란이 이어졌던 스미스의 영어 번역에 기반한 중역과 이중 중역을 거친 번역이 좋은 작품이 되기 어렵다며 세르비아-크로아티아 문화권에서 유독 한강에 대한 호평이 많지 않은 이유가 이런 사실 때문이라고 했다. 나아가 스미스의 영어번역을 페미니즘 번역 또는 창조적 번역이라고 상찬하는 것은 번역의 윤리를 도외시한 평가라고 질타했다.18)
충분히 의미 있는 문제제기였다. 지금까지 나온 논의는 한국어와 영어의 관계에 집중되었는데, 중역이 내포하는 구조적 문제는 세계문학 장에서 한국문학을 이야기할 때 앞으로도 충분히 예견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짧게 언급하고 싶은 것은 번역의 윤리를 스미스가 의도적으로 망각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점이다. 2016년 The Vegetarian이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탔을 때 한국문학 최초의 쾌거에 대해 작품 자체에 대한 평가보다 번역에 대한 상찬이 많았다. 그러다 두 작품을 면밀하게 읽은 이들이 오역의 문제를 지적하기 시작하여 한동안 국내의 번역비평은 The Vegetarian에 과도하게 몰입되었다. 가혹한 비난의 다른 편에서 스미스의 창조성이나 해석 능력을 옹호하는 비평은 원작의 성취를 폄하하거나 축소하는 방식으로 나아가기도 했다.19) 이런 읽기는 또 다른 질문을 낳는데, 원작의 문제의식과 분리된 해석이 어느 정도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20)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에도 원작과 번역을 둘러싼 논의가 계속되었으며, 한 사례로 2024년 11월과 12월에 젠더·어펙트연구소에서 진행한 ‘연구 현장의 언어로 한강의 문학을 이야기하기: 네 갈래로 살펴보는 한강 문학/소설’이라는 세미나를 떠올릴 수 있다. 국문학자, 외국문학 연구자, 문학 비평가, 번역비평 연구자, 그리고 일반 독자들이 모두 함께 줌으로 만난 세미나에서 도드라진 질문 중 번역 과정에서 작가와 번역가가 어떤 역할을 했는가에 대한 항변이 있었다.21) 이 글이 한강의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번역비평을 목표로 하지는 않지만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면, 이 논란을 지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스미스가 밝힌 글에서 그 번역 논쟁의 대극적인 지점들에 대해 역자 스스로 어느 정도 정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책들을 번역한 이후 여러 해 지났지만 나는 그 책들을 읽어보지는 않았다. 맨부커상 수상 이후 나와 나의 번역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있었는데, 경험 부족뿐만 아니라 존중과 배려가 부족했기에 번역 오류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비난은 가혹하고 개인적이었으며, 뒤에서는 더 심했다. 반면, 내 번역이 과장되게 포장되어 한강 작가의 예술성을 깎아내리기도 했다. 나는 문학계의 과도한 인종적 불평등에 사로잡혔다. 백인이기에 (번역)업계로 진입하는 것이 용이했고, 내 작품이 지나치게 칭찬받고 눈에 띄었다.22)
스미스는 번역가에 대한 과도한 상찬에 원어민으로서의 이점이 있다는 걸 말하고, 이어서 과도한 비난에는 여성혐오적인 시선도 있지 않았는지 묻는다. 번역비평에서 번역가의 젠더적·언어적 정체성을 완전히 도외시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영문학을 전공한 영국 여성 스미스에게 초기에 덧씌워진 번역에 대한 상찬이 다음 단계에서 날선 비판으로 돌아온 과정을 생각하면, 스미스의 곤혹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시장이나 평단의 반응으로 가늠되는 번역의 성취는 번역의 윤리와 정치성의 관점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도 하는 것이다. 원작과 번역을 균형 있게 잘 읽어내는 비평가의 안목은 번역비평에서도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환기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맨부커상 수상 직후 작가 한강보다도 번역가 스미스로 중심축이 기울어 다소 과열되게 논의된 비평이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한강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은 바람직하고 다행이다. 지금 시점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어에서 영어, 영어에서 다른 소수언어로 중역되는 문제를 포함하여 세계문학 장에서 한강의 작품이 제대로 읽히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론을 더 진지하게 점검할 필요가 있다. 초국적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영어라는 언어를 중심으로 세계문학의 범박한 평준화에 적절히 만족하고 안주한다면, 작품에 대한 온당한 평가는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학술대회에서 중역이 이루어진 다른 사례를 거론한 임소라에 따르면, 포르투갈은 재외동포의 숫자가 현저히 적고 번역학 연구 기반이 상대적으로 취약하기에 한국문학이 거의 대부분 중역 출간된다고 한다.23) 포르투갈에서 스미스의 번역은 『채식주의자』 외에도 『소년이 온다』 『흰』 『희랍어 시간』 등 세 권이 더해졌는데, 한국 작가로는 한강이 가장 많이 소개되었다고 한다.24) 임소라는 스미스의 한국어가 빈약했던 시기에 옮겨진 The Vegetarian에서 역자가 한강의 독특한 문체적 특징을 빅토리아 소설 투의 화려한 문장으로 변모시켰고, 이런 특징이 중역에서도 반복되었다는 점을 안타까이 바라보는 많은 연구자 중 한 명이다.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라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로서 이제 본격적인 작품론이 세계문학의 장에서 개진될 필요가 있는데, 그걸 위해서도 “원문의 미니멀리즘적 특성”이 “지나치게 화려한” 문체로 변모된 스미스 번역을 그대로 따라간 중역의 문제는 아쉬운 점이 많다는 것이다.25) 나아가 임소라는 『소년이 온다』에서 ‘당신/너’라는 2인칭 대명사가 서술의 주체가 되는 상황에 대해, 작가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선택한 결과로 비극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자들과 죽은 소년이 각각 ‘나’와 ‘너’로 호명되고 살아남은 여러 ‘나’들이 호명하는 2인칭의 ‘너’를 통해 과거 사건이 계속해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관계의 기호”로 작용함을 특별히 강조한다. 영어 번역에서는 이 점이 지워져 작가의 의도가 충분히 살아나지 못했기에 화자와 청자의 거리감을 살리면서 “서술의 다성성”을 각별히 들여다보는 새로운 번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26)
한국문학이 영어 이외의 언어로 퍼져나가는 과정에서 중역의 문제점을 짚어낸 김상헌과 임소라의 지적은 앞으로 개진될 세계문학 비평의 장에서 중요한 과제를 안겨준다. 번역문학과 문학상을 통해서 작동되는 세계문학의 장에서 ‘세계’는 영어권을 중심으로 영어를 통해 퍼져나가는 세계를 의미한다.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에 이르기까지 영어 중심의 세계문학 지형도에서는 대중성이 우선시되고, 원작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오역이나 원작의 훼손은 별것 아닌 것이 된다. 2017년에 한강이 이탈리아 최고의 문학상 말라파르테상을 받았을 때, 대상 작품이었던 『소년이 온다』 이탈리아어 번역도 영역본 Human Acts에서 중역된 작품임은 알려진 사실인데, 그런 현실에서 번역의 아쉬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비평가의 까탈로 쉽게 간주된다.27)
세계문학의 ‘세계’가 영어를 통해 재편되고 번역 출판계에서 소수언어권 번역이 중역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을 좀 과도하게 밀고 나가면 번역문학이 세계의 “모든 고유한 문화적 경계와 역사를 지우고 독자들을 하나의 획일적 덩어리로 고착화”한다는 유희석의 문제의식에도 닿을 수 있다.28) 이 질문은 영어 외 소수언어권에서 한국어 및 한국문화와 교호하는 좋은 번역가를 어떤 방식으로 길러낼 수 있을까 하는 교육현장의 실질적 질문으로도 이어진다. 주지하다시피 지금 우리 대학에서 외국어교육은 점점 협소해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문학번역이 언어적 층위의 전달자가 아니라 비평가로서의 훈련을 거친 이를 필요로 한다는 점은 더 고민스러운 질문으로 이어진다. 한강 작품의 중역 문제에서 연구자들이 느끼는 불만은 번역을 통해서만 가능한 초국적 연대로서의 문학의 힘을 논할 때 영어를 거치지 않고 한 언어권에서 다른 언어권으로 직접 가닿으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를 되묻게 한다. 영어를 거치지 않는 주변부 소수언어권들의 연대는 어떻게 가능한지, 이 질문을 앞에 두고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언어교육 커리큘럼을 돌아보면 소수언어권 교육이 더 좁아지는 추세가 매우 아쉽고 안타깝다.
이 글에서 세계문학의 ‘세계’를 물을 때, 번역과 출판을 전제로 하는 세계문학으로 다소 좁혀서 시작한 것은 괴테가 처음으로 언급한 세계문학 논의가 거의 200년을 지나오면서 어떤 명확한 의미로 수렴되기 힘들다는 점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세계체제론으로서 문학연구의 틀을 설정하는 모레티(Franco Moretti) 또한 『멀리서 읽기』(Distant Reading)에서 “우리는 세계문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함으로써 같은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모레티는 중심부, 주변부, 반주변부라는 세 개의 위치로 환원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론 내에서 “세계는 하나이면서 불균등하다”는 점을 강조하는데,29) 세계문학의 세계가 영어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현실은 그 불균등한 ‘하나’를 돌아보게 한다. 18세기 이전의 세계문학과 그 이후의 세계문학을 나누어 설명하면서 모레티는, 첫 번째 세계문학은 따로 떨어진 지역 문화들의 모자이크로서 강력한 내적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며 분기별로 새로운 형식들을 생산함을 강조하고, 두 번째 세계문학은 세계문학 체제 내에서의 세계문학, 국제적 문학 시장에 의해 통일되는 문학, 점점 커지면서 하나로 수렴된다고 말한다. 과거 시간성에 기초하여 문학을 사유하던 방식에서 “역사적 장소”를 중심으로 공간성이 개입된 시공간의 문제로 확대하는 모레티의 논의는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과거의 문학만이 ‘위대한’ 문학으로 간주되었다면, 오늘날 유일하게 ‘타당한’ 문학은 현재의 문학이라는 시선의 이동을 가능하게 한다.30) 이때에도 문학적 관계와 경제적 관계가 서로 평행선을 달리면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각별히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세계문학 공간에 세계체제론을 적용할 때 전 지구화(globalization)를 가능하게 하는 동일화 과정, 특히 번역을 놓고 보자면 영어 중심의 번역 현실은 여전히 문제적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의식하는 앱터(Emily Apter)는 오늘날 세계문학의 경향성이 “세계의 문화적 자원들을 선집과 커리큘럼으로 만드는 기업가적이고 폭식적인 추진력”을 보인다고 비판한다.31) 이러한 문화 자원의 야망이 폭주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일종의 과속 방지턱으로 앱터는 ‘번역 불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이때 ‘번역 불가능성’은 세계문학에서 문화적 등가와 대체 가능성을 순진하게 믿는 쪽이나 민족적·인종적으로 상표화된 차이들을 지지하는 경향 모두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세계문학의 팽창주의”에 맞서는 “디플레이션적 제스처”다.32) 앱터의 논의는 9·11 이후 비판적으로 제기된 미국중심주의에 맞서는 문화 번역의 이론적 지점들을 매길 때 흥미롭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소수언어들 간의 연대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한 질문도 날카롭게 돋우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문학이 유통되는 현실적 방식을 놓고 보면 결론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작품이 상품으로 거래되기 위한 전제조건인 언어로 다시 돌아오는 세계문학 장 안에서 교환가치를 가장 쉽게 하는 ‘영어’의 아성은 당분간 무너지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앱터의 경우, 미국 내부에 자리하는 이론가로서 다양한 문화적 층위에서 영어의 중요성을 내려놓을 수는 있겠지만,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나아가는 과제를 떨칠 수 없었던 우리나라의 시대적 소명과 문화적 기반에서는 아웃바운드 번역이 자연스러운 출판시장의 흐름에 기대지 않고 적극적 지원과 강제적 이식을 통해 뻗어간 측면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2장에서 문학상을 다루면서 문학상이 문학의 자리, 그 외연을 가장 쉽게 확장하는 방법론적 장치로 기능하는 점을 짚은 것도 그런 이유다. 댐로시(David Damrosch)를 위시한 세계문학 평자들이 멀리, 또 가까이 텍스트를 밀고 당기면서 문학작품이 품고 있는 가치를 보편적으로 확보하는 방식을 논하면서 유통이나 출판산업을 연결하는 것은 문학이 국가별로 결코 평등하지 않은 언어에서 배태된다는 점을 여실하게 확인해준다. ‘하나이면서 불균등한 세계문학’의 언어로서 영어는 문학적 표현 양식을 위한 단순한 수단이 아니다. 작가나 번역가의 서로 다른 자리를 생각한다면 누가 영어를 소유하고 있는지는 더욱 문제적인 영역 안에 놓여 있다. 언어의 권력은 정치권력 못지않게 정치적이다. 영어권 이외의 다른 번역가들이 있음에도 한강의 노벨문학상 여정에서 스미스의 역할을 짚는 것도 세계문학 장에서 영어의 권력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번역비평은 더 중요해진다. 두터운 번역 논쟁을 거치며 결국 작가 한강은 스미스와 함께 한결 꼼꼼히 번역을 살펴서 67여 곳의 오역을 수정했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33) 영어권 독자들에게 한강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번역자의 감식안은 그대로 사줄 필요가 있음에도 The Vegetarian은 여전히 문제적인 지점이 많은데,33)34) 번역은 여전히 언제, 어디서, 누가 번역하는가에 따라 원작과는 별개로 만들어지는 ‘후생’(afterlife)의 생명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The Vegetarian의 경우 원작의 작품성이 오역의 벽을 뚫고도 잘 전달되었다고 보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것은 그런 이유다. 대표적인 번역비평가 베누티(Lawrence Venuti)는 번역 전략을 설명할 때 자국화(domestication) 전략과 이국화(foreignization) 전략을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자국화에 가까운 스미스의 번역은 도착언어권 독자에게 더 친절한 번역이다. The Vegetarian을 읽다 보면 작가가 고심한 목소리의 문제가 번역 과정에서 충분히 고민되지 않았기에 조금 기이한 해석이 개입된 부분도 있고, 아내 영혜를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 또한 원작보다 더 거칠게 반영된 측면이 있다.35) 번역은 시간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최근에 나온 『작별하지 않는다』의 영역본 We Do Not Part의 경우 자연스러운 영어로 한국문화의 이질성을 도드라지게 만드는 이국화 전략이 효과적으로 구사되었으며, 문체나 형식 측면에서도 문제적인 오역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36) The Vegetarian에서 스미스의 번역은 리쾨르(Paul Ricœur)가 번역 윤리를 말할 때 강조하는 ‘언어적 환대’를 부분적으로만 제한된 방식으로 실천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언어적 환대는 “이국의 언어를 모국어라는 자기 집에 받아들임으로써 타자의 언어를 체험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으로 설명된다.37) 이는 자신의 모국어에 반성적 거리를 두고 다른 언어로 열어나가는 실천의 시작이다. 번역가는 출발언어와 도착언어 사이의 정확한 중간 지점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결코 평등하지 않은 번역의 정치성을 수행하는 번역가가 잊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윤리가 있다면, 언어적·문화적 정치성의 다른 층위 사이에서 원작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읽어내는 시선이 아닐까. 이 점을 윤지관은 “문학번역이 중요한 것은 문학이 민족어로 이룩한 성취의 핵심이기 때문”이라 강조한 바 있다. 이론적 논거를 들지 않더라도 획일화된 영어에 맞서는 문학 번역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탐색을 강조한 부분이다.38)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일차적으로는 우리 문학이 오래 갈구하고 목말랐던 세계문학을 향한 인정 욕망을 충족했다는 의미도 있지만, 기존에 논의된 세계문학론을 한층 새롭게 갱신했다는 의미도 크다.39) 모레티나 카자노바(Pascal Casanova)를 위시한 서구 이론가들의 구도, 즉 주변부 문학이 세계문학으로 이입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기반한 지역적·민족적·정치적 문제들에서 벗어나 세계문학 공간에서 미적 근대성을 모방하면서 세계적 작가가 되는 전형적인 공식에 한강은 들어가지 않는다.40) 이광호는 한강의 노벨상 수상이 세계문학의 장과 한국문학 장에 동시에 어떤 충격을 가한다고 본다. 최고의 권위를 가진 것도 아니었고 익숙한 소설문법의 대중적인 작품도 아니었던 ‘비주류’ 한국문학, ‘남성-이성애자’를 문학의 주체로 상정해온 오랜 역사 속에서 지역적으로나 젠더적으로 주변화된 아시아 여성 문학이 세계문학의 중심에 서게 된 사건으로,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세계문학과 한국문학을 동시에 변화시키는 예외적인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41)
이로써 한강의 새로움은 상업성을 내세운 번역문학의 세계 및 영어의 세계에도 저항하는 측면이 있다. 저항을 위해 저항을 했다기보다는 작가가 써야만 하는 것을 쓰겠다는 구도(求道)의 글쓰기, 그 결심과 하루하루의 실천이 필연적으로 품는 내핍과 저항 말이다. 그래서 원작에 밀착된 번역의 과제는 더욱 중요해진다. 광주와 제주에서 피 흘린 역사의 현장, 그 땅, 그 시간과 공간을 구체적으로 살다가 죽어간 사람들의 삶과 역사를 공부하면서 한 땀 한 땀 썼을 한강의 한국어가 다른 언어로 다시 태어나 다른 세상의 사람들과 만날 때, ‘자국화’ 전략에 못지않게 ‘이국화’ 전략이 강조된 번역이 실행된다면, 한국문화의 특이한 역사와 시간, 그 다양한 지점들이 더 구체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새롭게 들여앉히고 또 확장해나갈 것이다. 그럴 때 문학상이 구현하는 ‘문화게임’은 상업적인 통속성에 귀속되지 않고 새로운 창조의 힘으로 이어진다.
4. 빛과 실: 문학언어의 힘
글을 마무리하며 기억의 마지막 장면으로 넘어가보자. 이 글을 쓰게 만든 추동력은 실은 이 기억에 기댄다. 2025년 4월 3일. 그날 안국동 거리 바닥에서 본 길거리 아트 이야기다. 추운 날이었다. 실패로 돌아간 친위 쿠데타 이후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일정이 거듭 연기되면서 모두 긴 기다림으로 마음이 타들어가던 중이었다. 4월 3일은 제주의 상흔이 77년을 맞는 날이기도 했다. 안국동 길바닥에 77년 전의 처참한 희생을 상기시키는 빨간 동백꽃들이 무리지어 그려져 있었다. 그 옆에 노란 분필로 적힌 글귀를 봤다.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42) 『작별하지 않는다』의 한 구절이다. 그 위에 반대 방향으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가 보라와 흰 빛으로 적혀 있다. 길바닥 예술은 서너 명이 옹기종기 모여 시적인 문구를 쓰는 식으로 진행되기에 글이 방사형을 이루어 사방으로 뻗어간다. 두 구절은 먼 시간차를 둔 다른 장르의 언어이지만, 사랑으로 겹쳐 내 마음에 새겨졌다.
비상계엄이 떨어진 12월 3일. 늦은 밤에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이 맨손으로 총을 막았고 일사분란하게 모여든 국회의원들이 어렵게 해제안을 가결시켰다. 45년 전 계엄의 기억, 몸속에서 잠자던 공포 세포를 깨운 밤, 물리적인 충돌을 피하며 기적 같은 우연이 모여 계엄령은 해제되었지만 내란에 대한 단죄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친 날들의 끝. 헌재 선고를 기다리며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걷던 나는 그 길바닥 아트 덕분에 더 걸어갈 힘을 얻었다. 한강은 작품에서 사라지지 않고 순환하는 물의 파동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죽은 자의 뺨에 내리는 눈송이와 산 자의 뺨에 내리는 눈송이.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는 눈은 물의 순환 속에서 시대를 잇고, 언어는 죽은 자와 산 자를 잇는다.
대통령이 파면된 이후에도 끝까지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절망과 졸렬과 수치들은 계속 기이한 풍경을 연출한다. 노벨문학상의 기억이 정치적 아우성 속에서 아스라한 지금, 작가는 『빛과 실』이라는 산문집을 내놓았다. 이 책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작가가 글을 만들기 위해 고투하는 시간이다. 한 자 한 자, 수를 놓듯이 책을 쓰는 작가는 “여러 주 동안 고작 한 페이지”만 만들어내기도 하는 글에 매달려 쓰고 지우고 다시 쓴다.43) 아마 글을 쓰는 이들은 공감하는 대목일 것이다. 노벨문학상 이후를 되짚어보던 어느 날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물어보았다. 한강이나 글릭 등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들의 책을 일부러 찾아 읽는지. “시간이 없어요.” 머쓱해하는 학생들을 보며 생각했다. 세계문학의 ‘세계’가 영어라는 자장에서 형성된다는 전제는 틀렸다고. 세계문학의 ‘세계’는 지금-여기의 시공간에서 우리 각자의 경험을 되짚어 읽기와 접점을 만들 때만 유의미하다고. 작가의 쓰는 시간과 독자의 읽는 시간이 현재형으로 만나는 그 겹침이 중요하다고.
문학상이 뭐고 상 타는 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를 생각할 때면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에서 강가에 모인 동물들이 젖은 몸을 말리려고 코커스 달리기를 한다. 달리기를 제안한 도도가 경주 끝에 이렇게 말한다. “모두 다 이겼으니, 모두 다 상을 타야지요”44)라고. 누가 상을 줄 것인가 묻자, 도도가 앨리스를 가리키며 말한다. “저 아이.” 앨리스가 사탕을 나누어주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이어지는데, 여기서 도드라지는 것은 모두 달리고 모두 젖은 몸을 말리는 놀이의 즐거움이다. 작가 캐롤(Lewis Carroll)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도도는 1등, 2등 줄 세우기를 하는 게 실은 별 의미 없는 일임을 잘 안다. 상은 그런 것이다. 다들 즐겁게 힘껏 달리고 땀에 젖은 몸을 말리면 되는 것이다.
노벨문학상이라는 사건을 지나 문학의 자리를 돌아보니, 오랜 시간 우리를 괴롭힌 문화적 후진성이라는 자의식을 극복하게 한 선물은 기쁘게 받되 작가 한강이 응시했던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 역사의 질곡과 언어의 힘에 다시 집중하자고 말하고 싶다. 긴 세월 여러 사람의 노력이 역사가 되어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이 어우러지는 자장을 만들었다. 중요한 것은 세계‘화(化)’가 아니라, 한국문학의 어떤 새로움이 세계문학을 이끄는 힘이 될 수 있을지를 더 적극적으로 가늠하는 일이다. 길바닥에서 만난 『작별하지 않는다』의 구절은 노벨문학상 이후 문학의 자리를 상상하는 힘이 되었다. 인간이 이 세계를 얼마나 망가뜨릴 수 있는지 실감하는 시간, 차가운 눈을 맞으며 버티던 인내의 시간에 우리가 기대었던 언어·사랑·기억. 안국동 길바닥에서 나는 새로운 세계를 구체적으로 기대할 수 있었다.
“훼손되지 말아야 할 생명, 자유, 평화의 가치를 믿습니다. 파면은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일입니다.” 2025년 3월 24일, 작가들의 성명이 나왔고 여기 한강의 목소리도 함께했다. 이 세계에서 작가로 산다는 것은 언어라는 씨앗을 퍼뜨리는 일을 수행하는 자라는 뜻이다. “내란을 공부하는 고통, 헌법을 공부하는 비참, 극우의 배후와 분열의 배후를 공부하는 통증, 공부하는 분노가 반드시 이길 거라는 믿음”이라고 쓴 시인 김소연의 다부진 결의는 돌이킬 수 없이 훼절된 언어를 목격하는 이 시절에 문학의 길이 어떠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글이 노벨문학상 이후를 상상하면서, 다시 또 누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것인가 추측하지 않는 것은 어떤 상을 기다리는 일은 문학의 언어가 지닌 수행성에서 가장 하위의 일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온 힘을 다해 글을 쓰고 번역가는 힘을 다해 글을 옮기고 편집자는 책을 만든다. 읽고 쓰고 옮기고 또 읽는 과정에서 언어는 새로운 씨를 뿌리고 문학의 영토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뻗어간다. 하여 다시 문학을 이야기한다. 우리 앞에 놓인 반생명과 반지성에 맞서기 위해, 알 수 없는 불안을 안고서라도 계속 살기 위해, 일상을 옥죄는 다양한 폭력들이 얼굴을 바꾸며 달려들 때 그를 견디는 힘을 얻기 위해. 훼절된 언어를 되살리는 문학이라는 형식에 기댄다. 그것은 흡사 모르는 이들 사이에서 혼자 걷는 큰길의 모임만큼이나 외롭고도 씩씩한 일이다. 죽음과 삶을 잇는 언어를 매만지는 각자의 걸음 속에서, 실처럼, 빛처럼 생명은 계속 이어진다.
1) 2021년부터 2024년까지 한국문학번역원 원장을 지낸 곽효환 시인은 2021년 7월 6일 열린 간담회에서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말을 더 이상 쓰지 않겠다고 하면서, ‘세계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으로 방향 전환을 예고했다. “노벨문학상이 한국문학의 목표는 아니다” “노벨문학상을 목표로 움직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로 한국문학의 세계화 담론이 서구 중심으로 기울어진 세계문학 장에 포섭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에 비판적인 입장을 밝히며 한국문학의 생태계를 건강하게 조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강조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그러한 노력이 다년간 축적된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최재봉 「세계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 첫 장 열겠다」, 『한겨레』(2021년 7월 6일).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002343.html (최종 접속 2025년 4월 30일).
2) 블랙리스트 문제는 아직도 선명하게 정리되지 않은 미완의 사건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부터 윤석열 정부에 이르기까지 반복된 문화예술계 검열과 표현의 자유 침해에 대해 진단하고 이를 차단할 수 있는 ‘(가칭)블랙리스트 특별법’ 제정을 위한 토론회가 5월 8일 국회에서 열렸다.
3) 한강뿐만 아니라 영화 「기생충」으로 오스카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도 보수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고 한다.
4) 임미나 「작가 한강 “뉴욕타임스 기고문 청탁 처음엔 사양했다」, 『연합뉴스』(2017년 12월 7일). https://www.yna.co.kr/view/AKR20171207141000005 (최종 접속 2025년 4월 16일).
5) 『문학동네』 2017년 겨울호에 한글 원문을 실으면서 한강은 칼럼이 실리게 된 경위도 함께 밝힌 바 있다. 『뉴욕타임스』의 글은 아래 사이트를 참조하면 되겠다. 흥미롭게도 조갑제 사이트에 이 글의 전문이 번역되어 실려 있다. 『문학동네』와 『뉴욕타임스』의 글을 면밀히 비교해보면, 한반도에서 치러진 전쟁이 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주변의 강대국들에 의해 한반도가 분할된 뒤 발발한 일종의 “이념적 대리전”이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보수 논객들이 예민하게 트집잡은 이 부분은 번역문에서는 살짝 줄여서 처리되어 전쟁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살지 않고 다소는 성글게 표현되었다. Han Kang “While the U.S. Talks of War, South Korea Shudders,” The New York Times (Oct. 7, 2017). https://www.nytimes.com/2017/10/07/opinion/sunday/south-korea-trump-war.html (최종 접속 2025년 4월 16일).
6) 김태익 「한강의 뉴욕 타임스 기고」, 『조선일보』(2017년 10월 10일).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0/09/2017100901714.html (최종 접속 2025년 4월 16일).
7) 심우삼 「한강 노벨문학상 따지러…스웨덴 대사관 몰려간 ‘부끄러운 보수단체’」, 『한겨레』(2024년 10월 21일).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 1163059.html (최종 접속 2025년 4월 16일).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우리 사회를 이루는 기득권 카르텔 안의 소수이며 정신이 어긋난 괴물 같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12월 어느 강연장에서 한강의 시를 읽었는데, “스웨덴이 사회주의 국가라서 한강에게 노벨상을 수상한 것 아니냐”고 묻던 분은 세계문학의 고전들을 찾아 읽는 교양인이었다. 우리 시대의 점잖은 상류층 지식인으로 사는 일상에 자부심 가득한 그 시민은 끝내 한강의 이념적 불온성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일그러진 우리의 초상은 어디에나 있다.
8) 예스24 「한강 노벨상 수상 이후 문학 판매량 49.3% 증가」, 『채널예스』(2024년 10월 21일). https://ch.yes24.com/Article/Details/56042 (최종 접속 2025년 4월 16일).
9) James English, The Economy of Prestige: Prizes, Awards, and the Circulation of Cultural Value (Cambridge: Harvard UP, 2008) 50~51면.
10)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노벨상 시상식이 처음으로 열린 지 3년 뒤 1903년에는 프랑스 공쿠르상(Le prix Goncourt)이 만들어졌다. 상금은 단 10유로에 불과하지만 프랑스의 자존심이라고 할 만한 상이다. 바로 이듬해 1904년에는 페미나(Prix Fémina) 문학상이 만들어졌는데 공쿠르상이 다소는 남성중심적인 상이라는 비판적 인식하에 여성 심사위원단을 독점적으로 꾸려서 제정되었다. 한편 미국에서는 헝가리 출신의 언론왕 퓰리처(Joseph Pulitzer)가 노벨문학상에 버금가는 미국의 상을 만들겠노라고 선언하여 50만 달러의 기금으로 1917년부터 퓰리처상을 만들었다. 상대적으로 미국이 노벨문학상에 대한 반응이 뜨뜻미지근한 것은 문학과 저널리즘에 수여하는 미국의 자존심, 퓰리처상의 전통 때문이기도 하다.
11) 이종호 「한국문학번역장의 형성과 세계문학을 향한 열망: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Korea Journal을 중심으로」, 『구보학보』 32 (2022) 289~330면.
12) 이종호 「1970년대 한국근현대소설의 영어번역과 세계문학을 향한 열망」, 『구보학보』 19 (2018) 459~96면; 소영현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의 한국문학」, 『문학인』 17 (2025) 18~33면도 함께 참조할 것.
13) 2024년 10월 16일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고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열린 공청회에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국립한국문학관 등 5개 공공기관과 한국문인협회, 국제PEN 한국본부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의 장, 그리고 문학번역 전문가 등이 한데 모였다. 노벨문학상 이후 한국문학이 당면한 여러 과제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뜻밖의 고백이 나왔던바, 국제PEN 한국본부에서는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기대하지 않았으며 한강의 노벨문학상은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르 클레지오(Jean-Marie Gustave Le Clezio)의 외교적 도움이 있었을 거라는 추측성 발언을 했다. 좀 무례한 그 고백이 사실인 것 같지는 않다. 그간 시인 고은을 집중적으로 추천한 국제PEN 한국본부로서는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기엔 ‘너무 젊은 여성’ 작가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14) 처음 베트남어로 번역된 2001년부터 2024년 10월 11일 시점까지 작가의 뛰어난 문학적 역량뿐 아니라 여러 국가에서 번역 출간이 가능하도록 지원한 한국문학번역원의 노력에 대해서는 다음 보도자료를 참조할 것. https://ltikorea.or.kr/kr/board/press/boardView.do?bbsIdx=15373.
15) 국제교류진흥회는 시사영어사로 알려진 ㈜ YBM이 1982년 한국문학의 세계화 및 국제교류 증진을 위해 설립한 비영리 문화재단으로, 한국문학 번역가 양성사업은 1997년부터 진행되었다. 첫 번째 수혜자가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교수로 서울대학교에서 국문과 박사 과정을 다니던 풀턴(Bruce Fulton)이다. 한국학을 공부하고 번역과 출판 작업을 활발히 하다 서강대 교수를 한 프리머리(Wayne De Fremery)도 이 재단의 수혜자다. 한국문학번역원, 대산문화재단과 함께 국제교류진흥회의 역할 또한 어느 시점에 짚어볼 필요가 있다 판단되기에 소략하게나마 밝혀둔다. 번역가 양성 사업은 2017년까지 진행되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다음을 참조할 것. 재단법인 국제교류진흥회 「한국문학 번역가 양성사업 수혜현황」. https://www.icfkorea.net/translator/program.asp (최종 접속 2025년 4월 16일).
16) 필사는 새로운 독서 흐름 중 특이한 움직임인데, 최근에는 윤석열 대통령 파면을 선고한 헌법재판소의 판결문과 헌법 전문을 필사하는 이도 많다고 한다. 과거와 다른 결로 진행되는 이런 독서 흐름에 대해, 정치적·경제적 혼란이 극심해지면서 ‘불안’이 우리 시대의 지배적 정서가 되다 보니 몰입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식으로 필사를 선호한다는 분석도 있다. 최윤아 「“윤석열 탄핵 결정문 필사 해야지” 한국인은 왜 ‘베껴’ 쓰는가」, 『한겨레』(2025년 4월 19일).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193211.html (최종 접속 2025년 5월 1일).
17) 윤성우 『번역철학』(HUINE, 2022) 67면에서 재인용.
18) 학회 발표문이 논문으로 완성되어 『외국문학연구』 2024년 겨울호에 실렸지만, 김상헌의 발표는 빠졌다. 각 국가별 반응에 대해서는 『외국문학연구』 97호에 실린 금영진, 문지희, 박문정, 박인나, 박정원, 서유정, 오은영, 유선비, 이난아, 임소라, 최성은, 홍재웅의 논문들을 참고할 것.
19) 과거 2000년대 초반에 영미문학연구회에서 주도적으로 진행하여 결과를 낸 프로젝트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가 인바운드 번역을 대상으로 문학 번역을 점검했다면, The Vegetarian을 둘러싸고 본격화된 번역비평은 역자의 단순 오독에 따른 실수에서부터 의도적인 의역에 대한 문체비평까지 폭넓게 진행되었다. 찬사에 치우쳤던 초기 논의를 지나 번역가의 자질에 대한 다소는 가혹한 논란에 이르기까지 번역비평의 장에서 보기 드문 열띤 논의였다. 주로 외국문학 연구자들과 통번역학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된 논의는 국문학자들에게로 이어졌고, 작품 속 등장인물들, 특히 주인공 영혜와 영혜 남편, 언니 인혜 등에 대한 이해를 원작과 다르게 이해하도록 안내한다는 주장까지 수많은 후속 논의를 낳았다. 얼핏 몇 개만 짚어보더라도, 김영신 「이국화인가 자국화인가: 한강의 『채식주의자』 번역을 중심으로」, 『동서비교문학저널』 37 (2016) 37~55면; 김대중 「『채식주의자』번역 속 의역/오역 사례를 통해 살펴본 번역가의 과제 연구」, 『인문과학연구』 52 (2016) 31~59면; 조재룡 「번역은 무엇으로 승리하는가?」, 『문학동네』 90 (2017) 1~21면; 김번 「『채식주의자』와 The Vegetarian: 원작과 번역의 경계」, 『영미문학연구』 32 (2017) 5~34면; 이지민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데보라 스미스의 The Vegetarian에 대한 한국어 독자와 영어 독자 반응 비교 연구」, 『번역학연구』 19.4 (2018) 149~83면; 조의연·조숙희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관과 ‘결여-향상’과 ‘해석-다양성’ 재번역의 관점에서 본 The Vegetarian」, 『번역학연구』 20.5 (2019) 197~216면이 있다. 번역가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논문으로는 윤선경 「번역에서 문학으로: 데보라 스미스의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 영어번역을 중심으로」, 『외국문학연구』 94 (2024) 84~105면; Sun Kyoung Yoon, “Deborah Smith’s Infidelity: The Vegetarian as feminist translation,” Journal of Gender Studies 30.8 (2021) 1~11면을 참조할 것.
20) 가령 바로 앞에 언급한 윤선경의 2024년 논문에서 저자는 번역가가 “단어 대 단어 충실성이나 정확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원본의 작품성을 살펴서 영어로 훌륭한 소설을 쓰고자 하였다”고 하면서 두 문화의 차이를 좁히기 위한 번역가의 타협을 적극적인 창조행위로 옹호한다. 또한 윤선경은 2021년 논문에서 두 텍스트의 이질성에 대해서 번역가가 페미니스트 번역을 했다고 옹호하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원작이 품은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은 다소 소홀히 다루어지는 측면이 아쉽다. 작가·번역가·연구자를 거치면서 작품은 굴절되고 왜곡되기도 하는데, 스미스는 노벨문학상 이후에 쓴 이 글에서 그간의 번역비평에서 비판이든 상찬이든 다소는 편향적으로 치우친 문제적 지점들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는 듯 보인다. 번역이 출판되어 나올 때 편집자가 자의적으로 변형시킨 부분들도 있으며, 한국어, 영어 두 텍스트의 다름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 모든 과정에 대한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 『채식주의자』와 The Vegetarian은 그 점에서 번역비평의 장에서 텍스트뿐만 아니라 작가와 번역가에게까지 오해와 논의를 함께 낳은 텍스트라 하겠다. 이에 대해 다른 지면에서 소상히 밝힐 기회가 있으리라 본다.
21) 한강의 문체를 사랑한다고 고백한 어떤 독자는 “작가가 스미스 번역의 문제를 정말 제대로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하면서, 한강의 정갈한 문체가 영어 번역에서 훼손되었다고 항변했다. 한강의 문체와 스미스의 문체 차이에 대해서는 각주 19의 논자들도 많이 거론했는데, 번역 과정에서 작가가 역자의 문체를 가지고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다. 또 작가가 세심한 눈으로 살핀다 하더라도 번역의 잘잘못을 다 가려내기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22) Deborah Smith, “Reflecting on Han Kang,” Korean Literature Now 66 (2024) 9면.
23) 2024년 11월 29일 학술대회 발표집 『한강의 시선-세계의 시선: 세계 언론 및 문학계에 비친 한강의 문학』 40면; 임소라·성효정 「한강 문학과 포르투갈어 번역 수용 양상」, 『외국문학연구』 97 특별호 (2024) 131~70면.
24) 포르투갈에 한국 작가의 작품이 4권 소개된 경우는 한강이 유일하다고 한다.
25) 임소라, 앞의 발표집 44면; 앞의 논문 142~43, 149면.
26) 임소라는 영어에서 중역을 하지 않고 한국어에서 포르투갈어로 직접 번역한 김지윤의 번역을 스미스의 번역과 비교하면서 김지윤의 번역에서 원작의 특이성이 한결 효과적으로 전달된다고 짚고 있다. 임소라, 같은 발표집 44면.
27) 한편 2023년 『작별하지 않는다』로 프랑스 4대 문학상에 해당되는 메디치상을 수상했을 때는 영어 번역보다 프랑스어 번역이 먼저 되어 프랑스어 번역으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영어 외의 언어도 다양한 층위로 문화적 권력구조가 작동하여 문학번역 출판시장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랑스어의 경우 인바운드 번역이 가장 활발한 언어 중 하나다.
28) 유희석 「세계문학의 개념들: 한반도적 시각의 확보를 위하여」, 『영미문학연구』 17 (2009) 67면.
29) Franco Moretti, Distant Reading (New York: Verso, 2013) 127면.
30) 같은 책 134~35면.
31) Emily Apter, Against World Literature: On the Politics of Untranslatability (New York: Verso, 2013) 3면. 이 점은 앞서 잉글리시가 문학상이 만드는 문화적 ’명성의 경제’ (economy of prestige)를 말할 때 갖는 비판적 태도와 만난다.
32) 같은 책 3면.
33) 한강은 The Vegetarian의 경우 스미스가 번역을 할 때 자신이 『소년이 온다』 집필에 몰두하던 때라 충분히 꼼꼼하게 보지 못했다고 이야기한 바 있는데, 격화되는 오역 논쟁에서 역자의 태도를 문제 삼는 과한 지적들로부터 나름으로 최선을 다한 역자의 노력을 감싸준 것이라 생각된다. 번역가의 선택이 아니라 편집권의 결정에 따라 텍스트에 변화가 생기기도 한다는 점 또한 번역비평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이다. Han Kang, “Han Kang interview: ‘I never imagined The Vegetarian would find so many readers,” The Booker Prizes (July 28, 2023). https://thebookerprizes.com/the-booker-library/features/han-kang-interview-i-never-imagined-the-vegetarian-would-find-so-many (최종 접속 2025년 5월 1일). 최근 조사에 따르면 『채식주의자』는 현재 32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34) 가령 “People mainly used to turn vegetarian because they subscribed to a certain ideology”와 같은 문장이 눈에 띄어 원작과 비교해보면, “요샌 사상체질 때문에 채식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던데… 저도 체질을 알아보려고 몇 군데 가봤더니 가는 데마다 다른 얘길 하더군요”로 되어 있다. ‘사상체질’처럼 외국의 독자들에게 낯선 단어를 처리하는 문제에 관해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오역인지 문화적 차이를 좁히려는 창조적인 번역인지 검토하는 비평작업이 작가가 고심한 원작의 결에 가까이 가려는 번역가의 노력만큼이나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Han Kang, The Vegetarian: A Novel, trans. Deborah Smith (London: Portobello Books, 2015) 22면. Kindle Edition.
35) 가령 “아내는 마치 자신의 선택이 이성적이고 타당하다는 것이라는 듯 차근차근 답했다”가 “Her reply was so methodical, it was as if she thought that this ridiculous decision of hers was something completely rational and appropriate”라고 되어 있는데, “this ridiculous decision of hers”의 경우 번역가의 지나친 정서적 개입이 작가의 시점으로 오해받기 쉬운 한 예다. 같은 책 13면.
36) 이예원(E. Yaewon)과 모리스(Paige Aniyah Morris)의 협업이 성공적으로 작동한 예라고 할 수 있다.
37) 윤성우, 앞의 책 101면.
38) 윤지관은 2006년부터 2008년까지 3대 한국문학번역원 원장을 지냈다. 윤지관·임홍배 「대담: 세계문학의 이념은 살아 있다」, 『세계문학론: 지구화시대 문학의 쟁점들』(창비, 2010) 297면.
39) 이경재 「수많은 이분법을 넘어선 자리」, 『문학인』 16 (2024) 37면.
40) 모레티나 카자노바 등의 세계문학론이 갖는 유럽중심주의에 관해서 김용규 「세계문학과 로컬적 코즈모폴리터니즘」, 『코기토』 93 (2021) 28면 참조할 것.
41) 이광호 「한강과 한국문학의 시간이동」, 『쿨투라』 125 (2024) 31면.
42)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1) 165면.
43) 한강 『빛과 실』(에크리, 2025) 44면.
44) Lewis Carroll,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30th ed. (Pittsburgh: Project Gutenberg, 1994), ch. 3: Christopher Hitchens, “These Glittering Prizes,” Vanity Fair 56 (January 1993) 20면. 이에 대해 정은귀 「노벨문학상 이후: 어떤 빛을 기다리는 일」, 『문학인』 17 (2025) 34~51면 참조. 글의 제목이 어쩌다 보니 비슷하지만 『문학인』은 영미문학계에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들의 궤적을 훑으며 한강 수상의 의미를 되짚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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