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문학연구 47호] 안티유토피아, 계급, 행위자성: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 권영희

1.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안티유토피아   

H. G. 웰즈(Herbert George Wells)는 주로 기술유토피아의 설계자로 알려져 있다. 1905년 출간된 󰡔현대의 유토피아󰡕(A Modern Utopia)를 비롯해 󰡔해방된 세계󰡕(The World Set Free)와 󰡔신과 같은 인간들󰡕(Men Like Gods) 등 여러 작품에서 그는 기술유토피아적 미래의 비전을 제시했다.그 비전의 핵심은 과학기술자 엘리트들이 주축이 되어 사회체제를 합리적으로 개조함으로써 “윤리적 진화”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2] 20세기 초반 디스토피아 대표작들인 자미아찐(Yvgeny Zamiatin)의 󰡔우리들󰡕(We), 오웰(George Orwell)의 󰡔1984󰡕(Nineteen Eighty-Four), 헉슬리(Aloud Huxley)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가 그러한 “웰즈식”(Wellsian) 기술유토피아에 대한 풍자적 비판 내지 패러디로 받아들여지면서 웰즈 작품 세계에 대한 세간의 고정관념도 강화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초기작들인 1890년대 “과학 로맨스”(scientific romance)[3]에서 웰즈는과학기술의 진보와 더불어 현실의 부정성이 심화하거나 문명이 돌이킬 수 없는 위기에 처하는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썼다.[4] 당대 사회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장르적 독창성을 보여주는 이 작품들은 특히 과학소설의 성립과 관련하여 중요성을 지닌다.

최근 디지털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전지구적 기후위기가 심화하면서 웰즈의 초기 과학 로맨스에 대해 새로운 각도의 논의들이 이뤄지고 있다. 가령, 로젠버그(Aaron Rosenberg)는 인류세의 서사적 요건이라는 견지에서 󰡔타임머신󰡕을 중심으로 1890년대 작품들의 현재적의의를 탐문한다. 그의 글은 심층시간(deep time), 행성 규모의 공간성, 그리고 지질학적 차원의 행위자로서 전체 인류라는 개념을 문학 비평에서 다뤄야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인류세 개념을 통해 보편 주체로서 인간 행위자성에 주목할 것을 제안한 차크라바티(Dipesh Chakrabarty)와, 기후 위기를 서사와 상상력의 위기로 보고 소설의 미학적 쇄신을 촉구한 고시(Amitav Ghosh)의 논의의 연장선에 놓이는 것이다. 로젠버그에 따르면, 웰즈는 심층시간의 서사적 재현을 위해 기존 리얼리즘 소설의 문법이 아닌 로맨스 장르의 관례를 채택했다. 이는 장르적 한계나 미학적 실패가 아니라 “행성적 규모에서 작동하는 집합적인 인간 행위자성”을 서사화하기 위한 전략이다(82). 19세기의 가장 중요한 자연사 논문들인 리엘(Charles Lyell)의 󰡔지질학의 원리들󰡕(Principles of Geology)과 다윈의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에 의해 새롭게 출현한 과학패러다임이 거대한 시간적 지속을 상정하게 했으며, 웰즈는 이 거대한 지질학적, 진화론적 시간 규모로 소설을 쓰려할 때 직면하는 미학적 난제를 예견한 작가라는 것이다. 로젠버그가 보기에, 웰즈는 “로맨스의 환상적이고 마술적인 측면”에서 “심층시간 재현의 가능성”을 보았고 과학 로맨스 개념을 통해 로맨스 장르의 환상적 요소를 “동시대 현실과 과학기술적 발견”에 맞게 현행화했다(83). 󰡔타임머신󰡕에서 세계는 “객체”에서 “행위자”로 변화함으로써 서사적 행위자성을 잠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85), 이는 주체에 대한 면밀한 탐구를 어렵게 하는 서사적 실패라기보다는 인류 전체의 집합성과 그것의 “길들일 수 없는” 힘들을 재현하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93). 󰡔타임머신󰡕은 심층시간 차원에서 출현하는 두 행위자 간의 갈등을 극화하는 방식에 주목하게 하는데, 그 두 행위자가 바로 행성 지구와 집합적 존재로서 인류라는 것이다.   

로젠버그의 이러한 웰즈 다시 읽기는 인류세 비평의 맥락에서 시의적절한 기여다. 그런데 그의 논의는 집합적이고 보편적인 인류(anthropos) 개념을 개별 서사의 세계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웰즈의 여러 과학 로맨스에서 계급 양극화에 대한 비판이 핵심적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5] 로젠버그가 대표적 사례로 드는 󰡔타임머신󰡕의 경우, 웰즈는 기계 장치에 의한 시간여행이라는 새로운 모티프에 기초하여 빅토리아조 당대로부터 80만 년 이상 지난 미래 세계를 제시하는데, 그 세계에서 인류는 두 가지 다른 종으로 진화해있다. 19세기 중상층계급의 후손인, 아름답지만 유약한 신체를 가진 엘로이(Eloi)들은 질병과 해충이 모두 사라진 낙원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지하에서 생산 활동에 종사하느라 외모와 성향이 괴수처럼 변해버린 몰록(Morlock)들에게 엘로이들은 언제든 납치되어 잡아먹힐 수 있다. 그럼에도 편안한 삶에 익숙해져서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한다. 상층계급과 하층계급 모두에서 진보가 아닌 퇴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처럼 웰스는 󰡔타임머신󰡕에서 19세기 말 이미 심각했던 계급 양극화가 심화할 때 종적 분화가 발생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한층 더 뚜렷한 비판은 1899년 같은 해에 연달아 발표한 󰡔잠든 이 깨어날 때󰡕와「다가올 그날의 이야기」,[6] 그리고 󰡔화성에 간 최초의 인간들󰡕(The First Men in the Moon)을 통해 개진된다. 이 작품들의 미래 세계는 상층계급에만 유토피아일 뿐 다수가 노예와 같은 처지로 전락한 하층계급에는 명백히 디스토피아다.

웰즈의 과학 로맨스에 그려진 미래 세계가 계급 양극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유토피아적 측면과 디스토피아적 측면이 혼재된 세상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작품들의 장르적 속성을 좀 더 면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디스토피아와 안티유토피아를 구별하는 헌팅턴의 관점[7]은 꼼꼼한 작품 읽기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한층 더 유용한 참고점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웰즈의 초기 과학 로맨스들이 20세기 디스토피아의 고전적 텍스트들인 오웰과 헉슬리의 작품들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본다. 헌팅턴에 따르면, 웰즈의 1890년대 작품들은 지적 탐구의 차원에서 세상을 이해하고 진단하는 시도인 데 비해, 중기 이후 저작들은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실천적 방법들을 체계적으로 제시한다.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사유”(undirected thought) 대 “정해진 사유”(directed thought)의 대립이기도 이러한 차이는 서사 형식의 차원에서 볼 때 각기 안티유토피아와 유토피아의 구조를 내포한다(141). 안티유토피아가 “세계를 꿰뚫어보고 해체하려는 노력”을 바탕으로 한다면, 유토피아는 “세계를 조합, 합성, 승인하려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다(141). 헌팅턴이 보기에, 1899년에 잇달아 발표된 󰡔잠든 이 깨어날 때󰡕와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에서 공히 “기술의 해방적 가능성에 대한 깊은 양가적 태도”(144)를 엿볼수 있지만,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와 달리 󰡔잠든 이 깨어날 때󰡕에서는 안티유토피아의 해소할 수 없는 딜레마에 묶이지 않고 디스토피아의확정된 공포를 유토피아로 변형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가 “불편한 양가성”을 끝까지 견지함으로써 좌절의 조짐에도불구하고 “우리의 문명과 가치들에 내재한 모순들에 대한 미학적 형식”으로서 안티유토피아의 범주 안에 머문다면 다른 작품은 “기계가 지배하는 미래가 반드시 악몽일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다(148). 이러한 이유에서 헌팅턴은 비평사에서 소홀하게 취급돼온 「다가올그날의 이야기」를 웰즈 작품 세계의 주목할 분기점으로 간주한다.[8] 웰즈의 안티유토피아 작품들에는 부패하고 갈등에 찌든 세계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변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혼재하며, 이 딜레마를 타개하기 위해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이후 새로운형식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그 첫 번째 결과물인 1906년 작 󰡔혜성의 나날들󰡕(In the Days of the Comet)에서 혜성 모티프는 초기 과학 로맨스들과의 유사성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전작들에 담긴 “반어적 사고”가 없으며, 그 결과 서사는 현실 세계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앞부분의 리얼리즘과 해결책으로서 유토피아적 미래 세계라는 두 양식으로 분할구성된다(141). 헌팅턴이 보기에, 웰즈의 1890년대 과학로맨스는 이 두 양식 사이에 있다. 따라서 전적으로 리얼리즘적이지도, 유토피아적이지도 않은 이들 작품들을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가 아닌안티유토피아로 읽자는 것이다. 

이 글은 안티유토피아로서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의 중요성에 대한 헌팅턴의 관점을 계승하되, 계급 양극화 비판에 특히 초점을 맞춰 로젠버그의 인류세 비평과는 다른 각도에서 이 작품의 현재적 의의를 조명하려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 본론에서 먼저 디스토피아 장르의 계급정치성에 대한 맥마너스(Patricia McManus)의 논의를 검토한다. 맥마너스는 󰡔헝거 게임󰡕(The Hunger Games) 3부작과 󰡔잠든 이 깨어날 때󰡕를사례로 드는데, 후자의 경우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노동계급을 비가시화함으로써 진보적 계급 정치성을 상실하는 디스토피아 장르 일반의 경향을 보여준다. 한편 이 작품과 유사한 근미래 런던을 배경으로 하는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에서는 매우 다른 상황이 전개된다. 표면적으로는 이 작품에서도 웰즈는 기술유토피아로 설계되었으나 절대 다수인 하층계급에게는 디스토피아인 세계, 극도로 소외된 노동 형태로 인해 노동계급 인물의 행위자성이 구조적으로 억압되며 신체성 일반, 특히 노동하는 몸의 신체성이 은폐되는 양상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노동을 매개로한 기계-신체 간 상호작용과, 노동계급 인물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신체성을 탈은폐함으로써 노동계급을 가시화하고 노동계급 행위자성의 기반이 신체성에 있음을 드러낸다. 아래에서 주로 이 논점을 중심으로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의 문학사적 의의를 살펴본다.  

2. 노동계급 행위자성 문제

맥마너스에 따르면 디스토피아 소설에서 계급은 현존하는 동시에 부재한다. “계급 정치의 관점에서 읽을 때, 디스토피아 소설은 억압을 극화하기 위해 계급적 분리를 이용하지만 해방의 형태를 상상하기 위해 노동계급 주체성을 활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385). 그는 “인물, 정체성, 공감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와 형식의 문제”로서 계급 관계를 들여다볼 것을 주문하면서, 디스토피아 장르에서 지배계급이 정치적 가시성과 행위자성을 확보하는 데 반해 피지배계급은 비가시화하고 행위자성도 갖지 못한다고 본다(386). 말하자면, 디스토피아 서사에서 집단적 인간 행위자성이 근본적인 양가성을 띤다는 것인데, 맥마너스가 사례로 드는 󰡔헝거 게임󰡕3부작과 󰡔잠든 이 깨어날 때󰡕와 같은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디스토피아적 사회 질서에서 계급 분리를 중심적인 것으로 설정하지만 “그 질서에 대항하는 정치적 도전의 문제”에서 이 분리는 “스러지거나 탈물질화한다”(388-9). 즉, 계급은 디스토피아에서 근본적인 분리이고 인과율에 따르는 것으로 제시되나, 동시에 “그것 자체로는 원인도 없고 틀에 박힌 수사 속에 그 역사성이 지워진다”는 것이다(389). 이처럼 행위자성 문제에 대해 맥마너스는 디스토피아 서사에서 노동계급인물들이 개별화되는 대신 “군중”으로 제시되는 것과 정치적 세계가 “주인공의 삶의 매개체이자 동시에 삶의 불가항력적인 적대자”로 설정되는 것, 이 두 측면을 주로 문제 삼는다.  

나아가 맥마너스는 이러한 양상이 디스토피아 장르의 내재적 속성임을 입증하기 위해 디스토피아에 대한 사전트(Lyman Tower Sargent)의정의에 기초하여 이 장르의 특징적 전략에 관한 모일란(Tom Moylan)과 바콜리니(Raffaella Baccolini)의 논점을 참고한다. 이들에 따르면, 디스토피아의 첫 번째 장르적 요건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독자가 자신의 세계보다 현저히 더 나쁜 곳으로 간주하도록 의도된 시공간에 위치”시키는 것이다(McManus 392 재인용). 이에 더해, 디스토피아 서사에서 대항적 관점을 생성시키는 갈등은 사회 질서 내부로부터 주인공이“언어, 재현, 기억” 등의 수단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야기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디스토피아의 사회 질서가 (현실의 그것보다) “더 나쁘다”는것을 독자가 인지하려면 대항서사가 유발하는 갈등 속에서 텍스트적으로 현실화하는 “가치들”이 중요해진다(392-3). 이러한 모순적 요건 때문에 계급 갈등은 디스토피아의 필수 요소이면서도 작품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못한다. 도래할 법한 미래 세계의 착취적 계급 관계는 독자가 속한 현실의 근본적인 일부이나, 이와 동시에 미래 세계를 “더 나쁜” 곳, 즉 당대 사회와 차별화한 곳으로 제시해야 하므로 계급 분리를 강조하는동시에 지운다는 것이다(393).  

맥마너스가 예로 드는 󰡔잠든 이 깨어날 때󰡕는 디스토피아의 이러한 장르적 모순성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계급 분리는 핵심관심사로서 1899년 무렵 영국 노동계급이 처한 현실보다 훨씬 더 악화한 미래 세계가 펼쳐진다. 주인공 그레이엄(Graham)은 1897년 잠들었다가 203년이 지난 미래 세상에서 깨어나는데, 그의 상속 유산을 관리하기 위해 결성된 소규모 기업 주체였던 “위원회”(Council)는 연이은 공격적투자로 그레이엄의 재산을 천문학적 규모로 늘려놓았고 이제 전 세계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급진적 사회주의자로서 팸플릿 작성과 논쟁에 지나치게 열중하느라 불면증에 빠졌던 그레이엄이 203년 후 깨어났을 때 세상은 노동계급의 불만이 팽배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목전에 두고 있다. 초인적 이력과 막대한 재산 덕분에 그는 노동자들을 해방해 줄 메시아로 추앙받는다. 처음에 그는 위원회의 권력을 찬탈하려는 오스트록(Ostrog)이라는 자본가 인물에게 이용당하지만, 사태의 진실을 알게 된 후 노동계급을 위해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다. 홀랜드(Owen Holland)에 따르면, 이러한 결말은 주인공이 명백히 노동계급의 편에 서있음을 나타내지만 투쟁이 종결되는 방식에 대해서는 “열린 결말”로 남겨둠으로써 작가가 집합적인 “혁명의 주체”로서 노동계급이라는 사안에 대해 “하나의 확정된 입장을 취하기를 거부”함을 암시한다(546). 그와 같은 “부인” 또는 “회피”가 웰즈로 하여금 “한층 더 유토피아적인 시기”로 들어서게 했으며 이후 나온 프로그램화된 유토피아들에서는 “노동계급 자기조직의 모든 흔적이 기이하리만치 감쪽같이 사라진다”는 것이다(549).[9] 홀랜드의 이러한 관점은 󰡔잠든 이 깨어날 때󰡕에 대한 맥마너스의 평가와 일맥상통하며,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를 언급하지는 않지만 웰즈 작품 세계에서 이 중편의 의의에 대한헌팅턴의 평가와 조응하는 측면이 있다.  

󰡔잠든 이 깨어날 때󰡕와 비슷하게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의 경우에도 억압적인 기성 질서에 대해 주인공들이 시도하는 저항은 해방을 모색하거나 상상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보기 어렵기에 디스토피아의 모순적인 계급 정치성에 대한 맥마너스의 비판이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웰즈가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에서 노동계급 인물을 제시하는 방식은 󰡔잠든 이 깨어날 때󰡕와 상당히 다르다. 전작에서 노동계급은 시종일관 지배자에게 선동되는 군중으로 형상화될 뿐 개별적 행위자로 묘사되지 않는 것과 대조적으로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에서는 개별화가 이루어진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소속 계급의 변화로 인한 공간적 이동이 플롯에서 중심적이다. 중산계급에서 노동계급으로 추락한 후 다시 중산계급으로 복귀하는 주인공 남녀는 내부자로서 노동계급의 삶을 경험한다. 웰즈는 미래 사회의 악화한 노동계급 현실을 주인공들이 직접 경험하는 이야기를 통해 󰡔타임머신󰡕을 비롯한 다른 과학 로맨스들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독자의 공감적 읽기를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에서 가능하게 만든다. 이를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 기술디스토피아 세계의 구속력에 소진되지 않는 인물의 행위자성이다. 이 작품에 그려진근미래의 도시 공간은 개별 인물들을 압도하는 초객체적 성격이 두드러지기도 하거니와 신체성을 은폐함으로써 인물의 행위자성을 억압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잠든 이 깨어날 때󰡕와는 달리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에서는 은폐된 신체성을 탈은폐하는 서사적 순간들을읽어낼 수 있고 이 때문에 노동계급의 행위자성에 대해서도 전작들과는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아래에서 먼저 이 중편에서 웰즈가 제시하는안티유토피아적 미래 세계의 제반 측면을 살펴보고, 다음 절에서 신체성을 탈은폐하는 순간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나는지 논의한다.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는 󰡔잠든 이 깨어날 때󰡕에서처럼 다른 세계에서 온 인물이 외부적 시선으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이 아니라, 프롤로그에서 19세기 말에 살았던 모리스(Morris)라는 인물 이야기를 꺼낸 다음 곧장 그의 먼 후손들이 등장하는 22세기로 건너뛴다.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News from Nowhere)의 저자 모리스(William Morris)를 연상시키는 모리스라는 인물은 웰즈의 이 중편이 모리스의 유토피아에 대한 논평이 될 것임을 시사한다.[10] 웰즈의 모리스는 빅토리아조 중산계급의 인습적 사고와 행동양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인물로 명백히 풍자의 대상이다. 이 인물의 묘사에서 반복해서 사용되는 “올바르고 적절한”(right and proper)이라는 표현은 규율(propriety)과 도덕율을 중심으로한 빅토리아조 중산계급 가치체계의 기저에 사유재산(property)이라는 물적 토대가 자리함을 가리킨다(715). 실존했던 모리스가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서사적으로 구현하고자 고도의 상상력을 발휘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웰즈의 모리스는 분별심과 합리성을 중시하지만, 눈앞의 현실 외에는 어떤 것도 상상하지 못하며 애초에 상상력 자체를 불신하는 부류다. 그의 먼 후손인 22세기 런던의 모리스(Mwres) 역시 빅토리아조 선조와 비슷하게 인류의 미래와 노동계급에 대해 지극히 무관심한 인물로 그려진다.[11]

웰즈는 이처럼 근미래의 인물을 19세기 말 당대를 살았던 인물의 후손으로 설정하고 이들을 런던이라는 같은 공간에 위치시킴으로써 당대 독자들이 미래 세상의 인물들을 낯설고도 친숙한 존재들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한다. 1장 “사랑의 치료제”의 첫머리에서 미래의 모리스가 아침에 눈을 뜨고 최면술사를 만나기까지 독자는 22세기 런던의 중상층계급 거주자들은 각자의 집이 아니라 거대한 고급 호텔에 살며, 신문을읽는 대신 AI 스피커가 들려주는 소식을 듣고 온몸을 제모한다는 사실을 접한다. 하지만 웰즈는 프롤로그에서 소개한 19세기의 모리스와 미래의 모리스가 중상층계급의 일원임을 강조하는 한편, 22세기 모리스의 직장인 풍수력 에너지를 생산하는 거대 독점 기업(718)과 “하층계급”에대한 언급(717)을 통해 쾌적한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미래의 눈부신 발전상 이면에 자본주의 체제가 온존함을 보여준다. 가족이 함께 생활하지 않고 각자 호텔과 기숙사에서 사는 것을 보면 가족제도가 크게 바뀐 듯하지만, 모리스가 딸의 의사와 무관하게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거대자본가 빈들(Bindon)과 결혼시키려 애쓰는 설정이나 가난한 젊은이들은 결혼하기 어려운 상황[12]을 보면 가부장제를 기초로한 가족제도, 사유재산제, 혼인관계의 결착이라는 오래된 현실이 이 작품의 미래 세계에도 지속됨을 알 수 있다.       

이후 서사 전개를 요약하면, 덴튼(Denton)은 공항에서 승객의 승하차를 돕는 일을 하는 젊은이로, 과거 세계를 동경하며 여가 시간에 시를쓰는 등 이 세계에서 일종의 별종이다. 이런 그가 못마땅했던 모리스는 딸과 그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최면술사에게 의뢰하여 엘리자베스(Elizabeth)의 기억을 조작한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두 연인은 다시 만나 결혼하는데, 분노한 모리스가 재정 지원을 중단하면서 어려움에 처하는 두 사람은 “옛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듯이” 런던 외곽의 시골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아보기로 한다(738). 하지만 그들은 도시 외부에서의생활 자체가 불가능함을 이내 깨닫고 런던으로 돌아온다. 이후 그들은 엘리자베스의 상속재산을 저당잡히고 빌린 돈으로 얼마간 중산계급의삶을 이어가나 적당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결국 노동계급으로 전락한다. “노동회사”(The Labour Company)가 모든 노동자의 삶을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관리하는 이 세계에서 이들에게, 특히 덴튼에게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어난다. 한편, 빈든은 질투와 배신감에 사로잡혀 부부의몰락을 배후에서 조종하지만 결국 불치병에 걸린다. 안락사 직전 의사가 처방한 약물 작용으로 인해 그는 엘리자베스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단 하나의 욕망에 사로잡히고 이 때문에 두 사람에게 전재산을 남기는 기적을 행함으로써 주인공 부부는 “아래 세상”(underneath)에서 탈출하여 중산계급의 삶을 되찾는다.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를 󰡔시공간의 이야기들󰡕에 자매편으로 실린 「석기 시대 이야기」(“A Story of the Stone Age,” 1897년 연재)와 나란히놓고 읽을 때, 󰡔잠든 이 깨어날 때󰡕와 비슷하게 인물의 행위자성이 원천적으로 제약되는 장르적 특징이 한층 두드러진다. 「석기 시대 이야기」는 등장인물들이 동물적 존재성에서 벗어나 동물을 능가하는 우월한 지위로 도약하며 문명의 첫걸음을 딛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남녀주인공우-로미(Ugh-lomi)와 유데나(Eudena)가 부족장인 우야(Uya)에 맞서 부족 무리에서 이탈하여 우연한 계기로 말타기와 도끼 만드는 법, 거대한 육식동물을 제압하는 기술까지 습득하고 이후 부족으로 돌아온 우-로미가 새로운 부족장의 지위에 오르는 서사에서 개별 인물의 행위자성은 이야기를 이끄는 원동력이다.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는 주인공 남녀의 로맨스가 그들을 기성 질서에서 이탈하도록 이끈다는 점에서는 「석기시대 이야기」와 비슷하다. 하지만 플롯이 진행되면서 그들의 행위자성은 점점 약화하고 빈든이 개입해서 그들을 구출하는 5장에 이르면 거의소멸한 것처럼 보인다. 

한편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에서 22세기 런던은 언뜻 보기에는 과학기술 문명의 이상이 완벽하게 구현된 것처럼 보이는 공간이다. 오염이 없는 풍수력으로 에너지원이 교체되었으며 바닷물을 끌어들여 도시 전체의 용수로 사용한다. 신소재로 포장된 도로들이 도시 내외부를 관통하며 다양한 속도의 여러 차선으로 이뤄진 이동식 플랫폼(moving platform)은 수많은 차량과 사람들을 끊임없이 실어나른다. 이러한 수평적과잉 이동성 아래에 수직적 상향 이동성을 허용하지 않는 계급 분리의 현실이 놓여있다. 1장의 극적인 전개에 이어 웰즈의 서술자는 2장 “텅 빈시골”의 도입부에서 19세기 이후 200년간 발생한 구조적 변화를 집중적으로 설명한다. 19세기 하층계급은 걸핏하면 물에 잠기는 땅에서 매연과 비위생적 환경에 시달리긴 했어도 “여전히 하늘 아래 살 수 있었”지만 “도시가 인류를 집어삼켰다”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도시로의 집중이 극에 달한 22세기 런던에서는 계급에 따라 거주지가 수직적으로 나뉘었다(737). 상층계급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호화로운 호텔과건물” 상층부에 거주하고 노동계급은 그 아래 “지층과 지하” 공간에 산다(737). 두 계급 사이에 이러한 공간 분리가 굳어진 결과 하층계급은 더이상 하늘 아래 살 수 없게 된 것이다.[13] 같은 맥락에서 이 작품에 그려진 도시 공간이 첨단 기술을 이용하여 매우 자극적인 방식으로 노동계급 인물들을 광고에 노출시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들은 중상층계급과 달리 사적인 공간에서 이동할 자유가 없으며, 도로 주변에 늘어선 건물 외벽 전체 또는 일부에 달린 거대한 모니터 화면이 보여주는 영상 광고, 눈앞 허공이나 발치에 글자나 영상을 쏘아대고 음성을 들려주는 현란한 광고 때문에 한순간도 다른 생각에 집중하거나 옆 사람과 편히 대화를 나누기도 어렵다. 이처럼 이 작품의 도시 하부구조는 마치 기묘한 유기체처럼 작동하면서 과잉생산과 과잉소비의 폐쇄회로에 갇힌 노동계급 인물들이 끝도 없이 계속해서 무의미한 반복적 이동을 하지만 결국 주어진 자리에 갇혀있게 만든다. 

3. 신체성의 은폐와 탈은폐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의 미래 세계에서는 기억, 충동, 욕망, 의지와 같은 정신 작용과 내용을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다. 이제 “인공적꿈”이 “경험을 풍요롭게 하고 모험을 회복하며 경쟁적 세상으로부터 도피처를 마련해주게 되었다”(726).[14] 물론 웰즈는 당대 의학 지식의 한계 내에서 미래 세계를 상상했기에 그처럼 엄청난 수준의 정신에 대한 개입을 최면술이라는 낡은 이름으로 명명하지만, 이는 20세기 중반 이후 SF 장르의 익숙한 모티프가 되었고 가상현실의 뇌이식 등을 통해 상당한 정도로 현실화하는 중인 의식 및 무의식의 조작 가능성을 예고하는 측면이 있다. 흥미롭게도, 웰즈의 최면술사에 따르면 기억을 조작하는 일은 강제가 아닌 당사자의 자발적 의지를 필요로한다. 그는 엘리자베스가 역사로맨스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이용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세계로 가는 것과 같은 일종의 가상체험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스스로 최면 상태를 원하도록 유도한다. 그 결과 덴튼에 대한 모든 기억을 상실한 엘리자베스는 당연하게도 공항 활주로 근처 그와 늘만나던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녀의 주소를 몰랐던 덴튼은 런던 여기저기를 찾아 헤매는데 한 식당에서 우연히 엘리자베스를 목격하지만, 그녀는 마치 자동장치인형(automaton)의 눈처럼 공허한 눈빛으로 그를 무심히 일별하고는 이내 고개를 돌린다. 이 장면은 기술의 비약적인발전에 따라 정신까지 손쉬운 조작 대상이 되면서 신체와 정신이 쉽게 분리되는 사태를 암시한다. 이처럼 몸이 정신을 담는 그릇에 불과해질때 인간의 체화된 존재성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측면은 웰즈의 미래 세계에서 신체적 역량이 찬탄이나 욕망의 대상이라기보다 야만성의 표지로 간주된다는 사실이다. 그 원인은 기계에 대한 의존이 심화하면서 신체의 물리력이 상당한 수준으로 기계의 속성으로 이양된 데 있다. 거대자본가인 빈든이 엘리자베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차려입을 때 독자는 이 세계에서 근육질 몸은 실제로 가꿔야하는 이상적 신체상이 아니며 최신 유행에 맞게 디자인된 옷에 공기를 주입해서 근육처럼 보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덴튼과 엘리자베스가 런던을 떠나 시골로 향할 때나 그들이 비바람에 시달리고 심지어 개떼에 맞서 싸워야 할 때에도 야생의 환경에서 살아남기에는 너무도 유약한 그들의 신체는 예외적 특징이 아니라 이 세계의 물적 조건에 의한 필연적 결과로 제시된다.[15] 22세기 런던 중상층계급의 약화된 몸은 그들의 아주 오랜 후손들로서 어린아이처럼 가늘고 부드러운 팔다리를 가진 󰡔타임머신󰡕의 엘로이들을 예고하는 셈이다. 엘로이들을 먹잇감으로 삼는 몰록이 19세기 노동계급의 머나먼 후손이라는 설정이 암시하는 것처럼 신체성의 변화된 의미는 계급 양극화 현실과 깊이 관련된다. 기술디스토피아적 미래 세계에서는 신체의 물리력과 나아가 신체성 자체가 중요성을 상실하며, 이는 노동계급의 신체를 야수화․야만화하는 기존의 이데올로기가 심화하는 현상과 궤를 같이한다. 즉, 신체성 자체가 문명 자체와 문명화된 인간 존재의 반대편에 놓이면서 계급적 함의를 띠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신체성의 계급적 함의는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의 중심 모티프로서 폭력과 조응한다. 그것은 1장에서 덴튼과 최면술사의 충돌 장면에서 처음 출현한다. 엘리자베스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자 극도로 좌절한 덴튼은 엘리자베스를 잊고 싶은 마음에 최면술사를 찾는데, 그가 바로 엘리자베스의 기억을 없앤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 분노한 덴튼은 최면술사를 폭력으로 제압해서 엘리자베스의 기억을 복구하도록 만든다. 그의 폭력을 야만적 행위로 비난하는 최면술사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이 작품 속 상층계급의 삶에서 물리적 충돌은 매우 예외적인 사태이다. 덴튼이 상층계급 삶의 규율을 이렇게 위반함으로써 이전 시대 삶의 방식을 동경하고 시를 쓰는 등 ‘기이한’ 방식으로 사는 데에서 나아가 기성 질서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이 시작되는 셈이다. 금세 폭력은 덴튼과 엘리자베스가 대안적 삶을 살기 위해 떠난 도시의외부는 물론이고 도시 공간 안에서도 노동계급에게는 일상의 일부임이 드러난다. 따라서 주인공들이 노동계급의 일원이 되는 서사 흐름에서그들이 폭력에 연루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도시 외부에서 일어나는 폭력적 사태부터 살펴보면 “도시가 인류를 집어삼킨 후”(772) 사람이 살지 않는 황야로 바뀐 시골 마을의 어느 폐가에 도착하여 며칠간 지내는 동안 덴튼과 엘리자베스는 개떼와 사투를 벌이고 겨우 살아남는다.[16] 표면적으로 이 사건은 도시를 덮은 거대한 지붕 아래서는 경험한 적 없던 폭풍우를 전날 밤 처음으로 겪으며 두려움에 질렸던 주인공 남녀가 막연히 품었던 시골 생활에 대한 낭만화된 동경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계기가 된다. 또한 이 대목은 「석기 시대의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육식동물들과 대결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덴튼과 엘리자베스가 처음에는 겁에 질리지만 “원초적인 욕구”(750)에 따르며 개들을 하나씩 물리치는 모습은 마치 그들이 문명 사회의 일원에서 야만 상태로 퇴화하는 것처럼 생각되기 쉽다. 특히 개떼의 짖는 소리가 “그[덴튼]의 피에 기이한 작용을 했고” 그의 표정이 달라지면서 엘리자베스는 이해하지 못하는 노동계급이 쓰는 어떤 단어를 덴튼이 내뱉었다는 구절은 그런 읽기를 조장한다(749).[17] 그러나 다른 읽기도 가능하다. 자매편 이야기의 유사한 장면들에서 주인공들이 야수를 제압함으로써 인간적 역량을 발견하고 그것이 문명으로의 전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때, 200년 후 미래 세계의 주인공들은 그동안 알지 못했고 행사하지 않던 신체적 힘을 발휘함으로써 야만적 존재들로 퇴행하는것이 아니라 기술디스토피아가 상실하게 한 행위자성을 일정 정도 회복한다고 볼 수 있다. 

도시로 복귀한 후 중산계급적 삶을 유지하기 위한 일련의 시도가 실패한 후 결국 육체노동자가 되는 덴튼은 다른 노동자들과 물리적으로충돌한다. 처음에 그는 프레스기를 혼자 다루는 일을 하지만 얼마 후 다른 작업장으로 파견되어 한 무리의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는데 이곳에서 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다. 서술자는 “아래 세상”에서 “법과 국가 시스템”은 노동자들을 “탐나는 재산과 쾌락에 그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존재할” 뿐 이곳이 사실상 무법천지임을 강조한다(778). “중산계급의 옷을 걸치고 있는 동안” 덴튼은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삶을누릴 수 있었지만, 법이 개입하지 않는 “아래 세상”에서 폭력은 일상적으로 일어나기에 다른 노동자들처럼 “야수화” 되어야 할 뿐 그에게 다른선택지는 없다(773). 이렇게 3장은 노동자가 된 덴튼이 겪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이 작품의 기술유토피아적 외피 아래 놓인 신체성과 야만성의 결부, 육체노동의 야만화와 육체노동자의 야수화라는 경향들이 기계 물신화와 맺는 상관관계를 제시한다. 먼저 기계의 “하인”(766)이 된 덴튼을 묘사하는 아래 구절부터 보면 그가 해야 하는 소외된 노동이 이후 벌어지는 폭력 사태와 깊이 관련됨을 알 수 있다. 

가장 어두운 구석에는 덴튼이 이제 그것의 하인이 된 프레스기가 서있었다. 어찌 보면 고개 숙인 머리같은 상층부가 돌출되어있고희미하게 반짝거리는 거대한 기계였는데, 그것의 필요에 부응하는 기이한 불빛 속에 그 프레스기는 금속제 부처마냥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가끔 그런 기분이 들 때면 덴튼의 눈에 마치 그것은 인류가 어떤 이상한 잘못을 해서 그 존재에게 자기 목숨을 제물로 바친 무명의 우상이 확실해 보였다. [중략] 일이 매끄럽게 돌아가는 한 그것은 바쁘게 찍어대면서 다른 방에서 들어오는 공급기에서쏟아지는 꾸덕한 용액을 끝도 없이 얇은 판으로 압축하고 있었지만, 용액의 조성이 바뀌면 찍는 리듬도 바뀌었고 덴튼은 황급히 필요한 조치를 해야했다. [중략] 기계를 지켜보는 일은 그처럼 사소한 주의를 수없이 기울여야 했고 자연적인 흥미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무진장 애를 써야 하기에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이제 덴튼은 그 일을 하며 하루하루의 3분의 1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766-7) 

In the darkest corner stood the press whose servant Denton had now become: it was a huge, dim, glittering thing with a projecting hood that had a remote resemblance to a bowed head, and, squatting like some metal Buddha in this weird light that ministered to its needs, it seemed to Denton in certain moods almost as if this must needs be the obscure idol to which humanity in some strange aberration had offered up his life…… The thing worked with a busy clicking so long as things went well; but if the paste that came pouring through a feeder from another room and which it was perpetually compressing into thin plates, changed in quality the rhythm of its click altered and Denton hastened to make certain adjustments…… In the painful vigilance a multitude of such trivial attentions entailed, painful because of the incessant effort its absence of natural interest required, Denton had now to pass one-third of his days. 

위 구절은 생산하는 주체로서의 행위자성을 노동자보다는 오히려 기계가 갖고 있음을 암시한다. “금속 부처”에서 “우상”으로 이어지는 비유만이 아니라, 프레스기는 “독자적인 필요들”을 가지며, “그것은 바쁘게 찍으며 […] 일했다”라는 대목에서 주어 자리를 차지하는 데에서 알 수있듯이 기계는 곁에서 보조 역할을 하는 인간 노동자를 압도하는 존재감을 지닌다. 동시에 그것이 완전히 인간의 노동을 대체한 상황도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기계가 노동으로부터 인류를 해방한 것이 아니라 보조자로서 인간은 사소한 주의를 쉴 틈 없이 기울이며 기계의 작업을 고통스럽게 지켜보고 필요한 일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처럼 기계의 하인으로 전락한 노동자들이 노동 현장에서 기계와 무관하게 독자적인 행위자성을 확보하는 유일한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적 존엄성을 상실하고 정글의 짐승처럼 몸싸움을 벌일 때이다. 소외된 노동이 그들의 신체성과 행위자성을 야수화한다고 볼 수 있는것이다. 서술자가 덴튼 주변의 노동자들을 가리키기 위해 이름 대신 사용하는 표현들, “거무스름한 얼굴”(775), “족제비 얼굴”(776), “더러운 얼굴의 흰둥이”(777)는 그들의 야수화된 신체성을 가리킨다.[18] 주먹 쓰는 법을 전혀 몰랐던 덴튼은 그에게 시비를 건 화이티(Whitey)라는 인물에게 흠씬 두들겨맞지만 싸움의 기술을 익힌 후에 설욕하는데, 이처럼 덴튼은 정글의 법칙을 체득한 노동계급 남성으로 거듭나며 모종의 자아효능감을 얻는다. 다른 작업 환경에서 일하던 엘리자베스는 이러한 덴튼의 변모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며 이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결별직전까지 악화한다.  

이러한 서사 전개와 관련하여 헌팅턴의 세밀한 분석을 참고할만하다. 그에 따르면 이 작품의 2장과 4장은 모두 폭력과 더불어 살아가는 문제를 탐구하는데, 2장에서 폭력으로 인해 이전 시대 삶의 형식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이른다면, 4장에서는 “폭력의 유산이 불가피하고 심지어 어느 정도는 존중할 만한 것”(99)이기에 결국 덴튼이 이를 주저하면서도 수용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헌팅턴은 2장에서 폭력으로의 후퇴가절망의 원인이 되는 것과 달리 4장에서 그것은 영웅적인 자질이 되고 “노동의 로맨스와 폭력의 남자다움이 아이러니와 비판 없이 승인된다”고본다(100). 폭력의 문제가 이 작품의 핵심 주제인 것은 맞지만 “아래 세상”에서의 덴튼의 경험을 과연 웰즈가 이렇게 제시한다고 보긴 어렵다. 더불어 노동계급 구성원들 간의 폭력을 왜 과거의 유산으로 간주해야 하는지도 분명치 않다. 헌팅턴은 이 작품에서 폭력이 한편으론 문명이물리친 것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론 문명이 허용하는 모순성을 띤다고 보는데, 사실 이러한 읽기는 심화한 계급 양극화라는 작품의 맥락을 간과하면서 문명 세계 외부의 폭력(2장)과 노동계급에 일상화된 폭력(4장)을 동일선상에 놓는다는 점에서 매우 문제적이다.

마지막으로, 웰즈가 근미래 세계 악화한 노동 현실에서 노동자 간의 연대 가능성이 무화되는 경위를 보여주는 한 장면을 눈여겨볼 만하다. 처음 몸싸움에 휘말려 실컷 두들겨 맞은 덴튼은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이동식 플랫폼의 옆자리에 앉은 “거무스름한 얼굴” 블런트(Blunt)로부터주먹다짐 기술을 전수해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의도치 않게 싸움의 빌미를 제공했던 블런트는 “신사”인 덴튼에게 호감을 표하며 그에게 사과하고 덴튼도 그에게 호응하면서 둘은 손을 맞잡는데, 아래 인용된 구절은 이 순간에 싹튼 동류의식과 연대 가능성이 이 세계에서 현실화할수 없음을 미묘한 방식으로 나타낸다. 악수하는 두 사람이 “연결”(781)되었을 때 덴튼의 시선은 블런트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이동식 플랫폼이지나는 건물에 달린 초대형 거울을 향하고 이 순간 거울은 두 사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비춘다.   

이동식 플랫폼은 성형외과 건물 옆을 지나고 있었는데 건물 전면부 아래쪽에 사람들이 좀 더 균형적인 생김새를 갈구하게 [그들의얼굴을 왜곡하는] 초대형 거울이 달려 있었다. 거기 비친 자신과 새 친구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고 넓혀진 것이 덴튼의 눈에 띄었다. 자신의 얼굴 측면은 퉁퉁 부었고 피로 얼룩져있었다. 바보같이 꾸민 상냥한 미소를 짓느라 얼굴은 기괴하게 퍼져보였다. 머리칼 한 줌이 늘어져 눈 한쪽을 가린 채로. 거울의 마법 덕분에 그 거무스름한 남자의 입술과 콧구멍은 심하게 팽창된 상태였다. 그들은 악수를 하면서 연결되어있었다. 이 모습은 금세 사라졌지만 새벽녘 잠에서 깰 때 어지러운 상념들과 함께 다시 기억날 터였다. (781) 

The moving platform was rushing by the establishment of a face moulder, and its lower front was a huge display of mirror, designed to stimulate the thirst for more symmetrical features. Denton caught the reflection of himself and his new friend, enormously twisted and broadened. His own face was puffed, one-sided, and blood-stained; a grin of idiotic and insincere amiability distorted its latitude. A wisp of hair occluded one eye. The trick of the mirror presented the swart man as a gross expansion of lip and nostril. They were linked by shaking hands. Then abruptly this vision passed—to return to memory in the anaemic meditation of a waking dawn.       

위 장면에서 블런트는 덴튼과 계속 악수하려 하지만 덴튼은 “거울의 영향 때문에 손을 거둔다”(781). 성형외과 시술을 광고하기 위해 설치된 거울이 이처럼 이미 “야수화된” 노동자들의 신체를 한층 더 왜곡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연대를 가로막는 이 장면은 자본주의 체제에 복무하는 기술이 신체성에 미묘하게 개입하여 인간적 교감을 통한 연대를 가로막는 양상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한편 이 작품에서 상층계급의 대표자격인 빈든의 경우, 적어도 상층계급에게는 완벽한 삶을 약속하는 듯 보이는 기술유토피아가 은폐하는 신체성이 치명적인 질병의 형태로 귀환하여 그를 파멸시킨다. 자본의 힘이나 눈부시게 진보한 과학기술로도 여전히 극복할 수 없는 질병은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의 근본적인 탈신체화(disembodiment)와 추상화라는 기술유토피아의 이데올로기 기제를 노정하는 함의를 지닌다. 애초에 주인공 부부를 노동계급으로 추락하게 한 장본인이나 개심 후에는 덴튼과 엘리자베스를 “아래 세상”에서 구원하는 역할을 하는 그 역시체화된 존재로서 유기체의 근본적인 취약성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빈든은 어떻게든 죽음을 피하려고 필사적으로 의사들을 만나는데 그에게냉담하게 파국을 선언하는 한 의사는 현실의 모순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빈든과 같은 자본가들이 아니라 과학기술자 엘리트 집단이 사회체제개혁에 나서는 것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친다. 따라서 이 장면은 젊은 시절 무분별하게 쾌락을 좇느라 유전적 소인으로 인한 발병을경계하지 않은 개인으로서 빈든의 파멸이라는 표면적 차원을 넘어 빈든이 대표하는 자본가 계급 전체의 역사적 과오와 지배계급의 교체라는작품의 메시지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웰즈는 “아래 세상”에서 운 좋게 탈출한 덴튼이 엘리자베스와 함께 런던 외곽의 집 베란다에서 도시와 인근 경작지를 내려다보며 문명의전개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는 눈 아래 펼쳐진 도시가 이백 년 후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 상상하려 하지만 실패하자 거꾸로 이 도시의 과거 모습이 어땠는가 그려본다. 빅토리아 시대에서 스튜어트 왕조로, 이어 로마 침략기 런던이 떠올리면서 그는 이 모든세월이 “지질학적인 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805). “이 광대한 비전”을 통해 덴튼은 인간이 야수들 가운데 위태로운 삶을이어가던 문명 이전의 시기를 돌아보며 “그 기획” 안에서 “자신의 자리와 중요성을 발견하고자” 애쓴다(805). 이처럼 웰즈는 작품의 말미에서개별 인물의 생애라는 차원을 넘어 주인공이 22세기 세계를 사는 인류의 대표자로서 문명 전체의 경로에 대해 성찰하도록 만든다. 프롤로그에서 모리스라는 인물이 철저히 중산계급 삶의 틀에 머문 채 도래할 세상에 대해 무관심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작품 말미에서 덴튼은 중산계급에 복귀하지만 인류 문명의 전개에 관한 “광대한 비전”을 수행하는 것이다.[19] 그 비전의 내용이 이 작품에서 구체화하지는 않는다. 또한, 헌팅턴의 주장처럼 웰즈가 이후 발표한 작품들의 프로그램화된 유토피아에 내포하는 문제점들은 그것대로 비판적 읽기의 대상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상에서 논의한 것처럼 계급 양극화와 노동계급이 처한 암울한 현실이라는 이야기의 알맹이가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를 기술유토피아의 외피를 쓴 디스토피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 읽게 만든다면 웰즈가 덴튼을 통해 암시하는 “광대한 비전”은 계급 분리와 노동계급의삶을 변혁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대안적 세계의 상상과 그에 대한 조심스러운 가능성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4. 나오며: 웰즈 과학 로맨스의 현재성

자미아찐이 갈파한 것처럼 웰즈의 과학 로맨스들이 공통적으로 “기계”를 출발점으로 삼는다면(259),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에서 두드러지는 측면은 과학기술을 기반으로한 자본주의의 고도화와 그로 인한 계급 양극화와 노동소외이다. 한편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성공을 전제로 하고 그 이후에 도래할 세계에 대한 비전을 펼쳐보이기에 19세기 말 당대 사회에 대한 비판은 (인물들의 관계와경험을 통해) 극화되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사실을 적시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안타깝게도 모리스 유토피아 텍스트의 서사적 흥미가 부족하고 독자의 공감을 어렵게 하는 주된 원인이 여기에 있다. 아울러, 웰즈의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와 모리스의 유토피아를 대별해서 읽을 때 인물의 체화된 존재성이 전자에서 부각되는 것과 대조적으로 후자에서 기묘한 방식으로 지워지는 경향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의 또 다른 서사적 약점이자 웰즈의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의 정치적 함의가 재평가돼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아가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를 자미아찐, 오웰, 헉슬리의 디스토피아 소설들과 나란히 놓을 때 전자의 문학사적인 의의가 한층 분명해진다. 계급 분리 현실과 자본주의 비판이 웰즈의 여러 과학 로맨스에서 중심적인 것과 달리 웰즈 이후 디스토피아 서사들이 전체주의적 테크노크라시에 대한 통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필연적 결과물로서 계급 양극화 문제를 제대로 탐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가령 󰡔1984󰡕의 윈스턴 스미스(Winston Smith)는 이 세계에 아직 희망이 있다면 아직 노래하는 능력을 잃지 않은 “프롤”에게 있다고 외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노동계급은 물리적으로는 디스토피아 세계 안에 있되, 서사의 필수불가결한 일부라기보다 부수적인 존재들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노동계급도 태아 공장에서 각각의 기능에 맞게 제조되어 임무를 수행하며 소마에 의해 통제되는 로봇에 불과하다. 이처럼오웰과 헉슬리의 디스토피아에서 노동계급은 두 작가의 당대 계급 현실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방식으로 제시된다. 이들의 디스토피아 서사는개인의 자유(의지)와 전체주의적 통제를 이분법적 대립항으로 설정함으로써 계급 현실 자체를 간과하며 그 결과 애초에 기술디스토피아의 주요한 측면이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와 노동착취라는 점을 망각하게 만드는 대단히 문제적인 경향을 내포한다.

사실 웰즈의 과학 로맨스와 20세기 이후 출현한 디스토피아 소설의 계급 정치적 함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장르 상 밀접한 관련을 맺는 유토피아와 과학소설에 대해서도 해당하는 중요한 사안이다. “사회적 꿈”(Sargent)으로서 유토피아 서사가 대안적 사회를 상상하는 방식에서 계급 차이와 분배 정의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언제나 핵심적인 관심사였다. 최근 부상한 기후소설과 이 하부 장을 포함해 과학소설 장르 전반이 우리의 당대 현실과 맺는 상관성이 현저하게 커졌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유전자 조작과 복제 기술, 인공 장기 이식 기술,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포스트휴먼의 도래가 눈앞의 현실로 다가온 지금 우리는 치체리-로나이(Istvan Csicsery-Ronay)가 적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이미 “과학소설이 된”(1) 세상에 살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웰즈의 과학 로맨스들은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과학소설 장르가 현실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에 대해 주목할만한 현재적 의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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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utopia, Class, and Agency: 
“A Story of the Days to Come”

AbstractYoung Hee Kwon

In light of Aaron Rosenberg’s recent Anthropocene reading and John Huntington’s conceptualization of anti-utopia, this essay examines Wells’s critique of class polarization. Its aim is to illuminate the contemporary significance of Wells’s scientific romances, with a particular focus on “A Story of the Days to Come.” I begin with Patricia McManus’s discussion of the class politics of dystopia, distinguishing between When the Sleeper Awakes and “A Story of the Days to Come.” Set in the same near-future London, “A Story of the Days to Come” presents a techno-utopian-cum-dystopian world in which the agency of working-class characters is structurally repressed through extremely alienated forms of labor that obscure the corporeality of the working body, along with corporeality in general. However, by revealing corporeality in the machine-body interaction through labor, on the one hand, and in the interaction of working-class characters through violence, on the other, the novella makes the working body visible and reveals that corporeality is the basis of working-class agency. Furthermore, I argue that “A Story of the Days to Come” deserves more critical attention for its stance on class issues in comparison with the early twentieth-century dystopian narratives of Orwell and Huxley.  

Key Words

scientific romance, anti-utopia, dystopia, class, agency, corporeality

권영희

서울시립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2] 웰즈는 과학사범대학(Normal School of Science) 재학 시절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을 대중적으로 확산하는 데 기여한 헉슬리(T. H. Huxley)를 스승으로만나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헉슬리는 인류의 의식적 노력 없이는 문명이 쇠퇴나 퇴행적 야만의 상태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고 이러한 “우주적” 과정에 대응하기 위한 “윤리적 진화”(ethical evolution) 개념을 주창했다. “Evolution and Ethics” (1893) 81면.

[3] 웰즈의 초기 과학 로맨스로는 1895년에 출간된 󰡔타임머신󰡕(The Time Machine)부터 세기말까지 연이어 출판된 󰡔모로 박사의 섬󰡕(The Island of Doctor Moreau), 󰡔보이지 않는 남자󰡕(An Invisible Man), 󰡔우주 전쟁󰡕(The War of the Worlds), 󰡔잠든 이 깨어날 때󰡕(When the Sleeper Awakes)와 중편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A Story of the Days to Come”)가 있다. “과학 로맨스”라는 용어는 힌튼(Charles H. Hinton)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4차원에 관한 팸플릿과 이야기를 동명의제목을 붙여 1886년과 1898년에 출판했다. Luckhurst 49면. 

[4] 수빈(Darko Suvin), 버곤지(Bernard Bergonzi), 럭허스트(Roger Luckhurst)와 같은 평자들은 웰즈 초기 과학 로맨스의 리얼리즘적 차원, 즉 이 작품들이 빅토리아조 말기의 현실과 사회문화적 상상력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강조한다. 같은 선상에서 콜(Sarah Cole)은 이 작품들에서 웰즈가 “알아볼 수 있는 법칙과 패턴들에 의해 지배되는 리얼리즘적 우주 안에 그의 환상적 요소들을 심은” 것으로 논평한다(33).

[5] 웰즈의 과학 로맨스에서 계급 투쟁의 주제를 강조한 국내외 평자로 헌팅턴(John Huntington), 파팅턴(John Partington), 이동신을 들 수 있다. 헌팅턴의 경우 “󰡔타임머신󰡕을 비롯하여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와 󰡔잠든 이 깨어날 때󰡕와 같은 초기 과학 로맨스의 핵심에 계급 갈등에 대한 대단히 맑스적인 인식이 자리한다”고 본다(1988, 26). 파팅턴은 󰡔타임머신󰡕의 주인공 “시간여행자”(the Traveller)를 “사회주의자”로 규정하며 이 소설을 유토피아 비판이 아니라 산업자본주의 비판이자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불가피한 도래를 표명하는 작품으로 간주한다(13). 이동신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웰즈의 비판과 그가 20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체계화한 정치사상의 요소들을 󰡔타임머신󰡕과 󰡔보이지 않는 남자󰡕와 같은 과학 로맨스들에서 읽어낸다.

[6] 󰡔잠든 이 깨어날 때󰡕는 “The Sleeper Awakes”라는 제목으로 1899년 1월부터 5월까지 󰡔그래픽󰡕(The Graphic)에 연재됐고, 이어 6월부터 10월까지 󰡔팰맬󰡕(The Pall Mall Magazine)에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가 실렸다. 두 작품 모두 기술적으로 눈부시게 진보한 22세기 런던을 배경으로 한다.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는 매월 한 편씩 잡지에 연재된 다섯 장, “사랑의 치료제”(The Cure for Love) “텅 빈 시골”(The Vacant Country), “도시의 삶”(The Ways of the City), “아래 세상”(Underneath), “빈든이 개입하다”(Bindon Intervenes) 모두의 부제였는데, 연재 후 󰡔시공간의 이야기󰡕(Tales of Space and Time)에 한 편으로 실리면서 전체를 아우르는 제목이 되었다.  

[7] 헌팅턴에 앞서 힐러개스(Mark Robert Hillegas) 역시 안티유토피아 개념을 웰즈 작품 세계에 적용했다. 하지만 힐러개스는 안티유토피아를 디스토피아와 거의 같은 의미로 쓴다는 점에서 헌팅턴과 큰 차이가 있다.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안티유토피아 개념들에 관한 기존 연구를 상세하게 검토하는 작업은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선다. 다만 이 주제와 관련해 유토피아의 속성 가운데 완벽한 사회라는 발상을 제외해야 한다고 보면서 안티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개념을구별한 사전트(Lyman Tower Sargent)의 논의와 󰡔오염되지 않은 하늘의 조각들󰡕(Scraps of Untainted Sky) 4장에 개진된 모일런(Tom Moylan)의 관점이 특히 유용했음을 밝혀둔다. Sargent 5-10면, Moylan, 121-145면.  

[8]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에 특별히 주목한 다른 평자로는 자미아찐이 눈에 띈다. 그는 “도시 동화들”(urban fairy tales)인 웰즈의 과학 로맨스들 중에서도 이 중편을 “가장 예리하고 가장 아이러니컬한 웰즈식 그로테스크”이자 “당대 문명에 대한 멋진 패러디”로 평가한다(265).  

[9] 웰즈가 1903년 개량주의적 사회주의 성향을 띤 페이비언협회에 가입해서 1905년까지 활동한 사실도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10] 모리스의 공산주의 유토피아에 대한 좀 더 명시적인 논평으로 간주돼온 작품은 󰡔타임머신󰡕이다. 웰즈는 시간여행자가 80만 년 후 도착하는 장소를 모리스의 주인공 게스트가 미래 사회에서 깨어나는 해머스미스(Hammersmith)에서 불과 3마일 떨어진 곳으로 설정하며, 시간여행자가 만나는 엘로이들의 옷차림과 주변 경치는 모리스의 유토피아와 매우 유사하다. Parrinder 271면.     

[11] 웰즈가 그려보이는 미래 세계의 변화상 가운데 한 측면은 언어로서, 미래의 모리스는 이름을 “Morris”가 아니라 “Mwres”로 쓴다. 이 글에서 자세히 논의하지는 않겠지만 웰즈는 이 작품에서 노동계급과 중상층계급 인물들이 구사하는 언어상의 차이가 심화했음을 강조한다. 노동계급이 “생활과 태도의 세련됨에 있어서는 조상들인 빅토리아 여왕 시절 이스트엔드 주민들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으나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방언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738면.  

[12] 덴튼이 엘리자베스를 어렵게 다시 만난 이후에도 결혼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 서술자는 “그의 단 하나의 잘못, 즉 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한다. 736면. 

[13] 이 세계에도 “불완전한 사치와 위험한 투기”의 삶을 사는 중산계급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 비중은 매우 “줄어든” 것으로 제시된다(753). 이에 따라 심화된 계급 간 공간적 분리는 웰즈의 과학 로맨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작품에 앞서 󰡔타임머신󰡕에서 802,701년 후 인류의 먼 후손들이 사는 거주지가 지상과 지하 두 공간으로 양분된 상황은 플롯 전개에서 핵심적이며, 󰡔잠든 이 깨어날 때󰡕의 도시 공간도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와 흡사하다.   

[14] 헉슬리가 훗날 󰡔멋진 신세계󰡕에서 선보이는 소마(soma)의 기능이 바로 이런 것들인데, 헉슬리의 세계에서 소마가 필수재이자 통치의 절대적인 수단인것과 달리 웰즈의 미래 세상에서 최면술은 선택적으로 이용된다.   

[15] 웰즈의 22세기 세계에서 적어도 중상층계급에게 “신체적 역량은 전시하기 위해 또는 사람들이 돈을 걸고 내기를 하는 용도 이외에는 지구상에서 사라진”것으로 제시된다. 731면. 

[16] 이 세계에서 농업은 완전히 기업화돼 있다. 사람들은 모두 도시에 거주하고 농업 노동자들이 시골 지역의 근무지에 출퇴근한다. 따라서 더 이상 거주자들이 없어진 곳이라도 이 작품에 제시되는 시골을 문명의 대척되는 공간으로 보는 것은 곤란하다. 주인공 남녀가 맞닥뜨리는 개떼 역시 양치기 노동자들의업무를 보조하는 농업기업 소속의 개들이므로 길들지 않은 자연을 표상하기보다는 도시 문명과 도시에서의 삶의 방식을 뒷받침하는 보완적 일부로 봐야한다.  

[17] 아래에서 논의하겠지만 중산계급 신분에 어울리는 직장을 구하지 못한 덴튼이 결국 노동회사에 소속되어 일하게 되었을 때 신사처럼 구는 태도 때문에다른 노동자들은 그를 질시하면서도 덴튼을 실제로 그들과 다른 부류로 인식한다. 따라서 개떼에게 위협을 당하는 순간 그가 내뱉는 “노동계급 사투리”(749)는 그가 노동계급 출신임을 가리키기보다는 노동계급이었던 선조 대의 특성이 유전적으로 발현된 순간으로 제시된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18] 이들의 이름은 이들 중 한 명과 덴튼이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난 이후에야 등장한다.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잠든 이 깨어날 때󰡕에서 노동계급이 군중으로 제시된다면 이 작품에서는 개별화가 이뤄진다는 점이 중요하다. 한편, 이 작품이 제시하는 노동계급 신체의 야수화는 인종화(racialization)를 연루하는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기제를 인상적인 방식으로 극화한 작품으로 오닐(Eugene O’Neill)의 󰡔털북숭이 원숭이󰡕(The Hairy Ape)를 들 수 있다.    

[19] 필머스(Robert M. Philmus)는 덴튼의 이 비전에서 작품의 유토피아적 갈망이자 전망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이렇게 보기에 이 작품이 제시하는 미래 사회의계급 현실은 너무도 암울하다.  

영미문학연구
Journal of English Studies in Korea
47 (2024): 24-55
http://doi.org/10.46562/jesk.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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