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밖 57호] [특집] 『드라큘라』를 통해 살펴본 19세기 말 노화와 세대 갈등/ 안소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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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미

1. 19세기 말 등장한 노인 흡혈귀

20세기 이후 대중문화 속 흡혈귀는 매력적인 젊은이인 경우가 많으나, 19세기 말 영국문학 속 흡혈귀들은 대체로 겉만 젊은 노인이며 젊은 세대와 적대관계를 형성한다.1) 스토커(Bram Stoker)의 1897년작 『드라큘라』(Dracula) 속 400세의 드라큘라가 대표적인 예다. 물론 드라큘라를 단순히 살아 있는 시체(living dead)로 간주할 수도 있겠으나, 아우어바흐(Nina Auerbach)의 주장처럼 그는 사실 자신의 “오래됨”을 활용하여 “새롭게” 다시 태어나기에 나이는 들었을지언정 질긴 생명력을 발휘하는 노익장이다.2)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본거지를 떠나 영국으로 이주하여 그곳의 젊은이들을 희생시킨다. 새롭게 살기 위해서는 실제 나이를 숨기고 젊은 외양과 영생을 얻어야 하는데, 신체적으로 건강한 이들의 피와 에너지를 연쇄적으로 강탈하지 않고는 이들을 얻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국 청년들은 늙은 이방인을 물리쳐야 자신들의 생존을 보장받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 드라큘라의 상징성에 대해 적어도 두 가지 해석을 해볼 수 있다. 첫째, 늙은 드라큘라가 동유럽 출신으로서 영국에 유입되어 국가적 존속을 위협하는 것은 그가 세기말 영국에 퍼져나갔던 제국의 붕괴 또는 퇴행(degeneration)에 대한 불안을 체화함을 의미한다. 둘째, 드라큘라가 자신의 모국이 아닌 영국의 청년세대와 갈등을 빚는 것은 그의 노화가 실은 영국의 노인문제에 대한 메타포일 수 있음을 나타낸다. 물론 드라큘라의 국적은 영국이 아니다. 하지만 동유럽 제국의 흥망성쇠를 수백 년 동안 경험했다는 그가 근대 제국의 중심인 런던으로의 이주를 치밀히 계획하고 이에 성공한다는 점은 우리에게 그를 단순히 동유럽 출신 타자로만 볼 수 없도록 만든다. 그가 런던에서 자신의 피와 젊은 영국인의 피를 맞교환하는 과정을 통해 국적과 나이라는 두 겹의 경계를 허물면서 영국의 사회문제를 가시화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두 번째 해석을 바탕으로 이 글은 드라큘라를 세기말 영국의 노인을 대표하는 존재로 읽어보려 한다.

『드라큘라』는 노화나 세대갈등에 대한 세기말 영국인들의 인식이 다분히 젊음 중심적이었음을 드러낸다. 미쿠엘발델루(Marta Miquel-Baldellou)는 빅토리아 시대 흡혈귀 소설이 흔히 “문학적 흡혈귀를 늙은 동시에 젊은 것으로 특징짓는데, 이는 노화의 관점에서 외면과 내면이 불일치하는 경우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증폭되던 당대 현실을 보여준다”라고 주장한다.3) “나이를 속이는 외양”의 흡혈귀는 속이는 노년층도, 속을 뻔한 청년층도 나이 듦을 병적 징후로 간주하면서 이에 대해 깊은 혐오를 느꼈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다.4) 체이스(Karen Chase) 역시 “늙은 모습이어야 마땅한 존재가 젊은 몸을 소유한다는 것”이 세기말 흡혈귀 문학을 읽던 젊은 세대에게 깊은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을 것이라 분석한 바 있다.5) 이러한 기존 비평에서는 빅토리아 시대 흡혈귀를 젊은이로 변장한 노인으로 규정하면서 높은 생활연령(chronological age)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러운 퇴화 과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젊은 신체를 인위적으로 회복하기 위해 벌이는 노력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던 당시의 사회적 시선에 주목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들은 19세기 소설가 무어(George Moore)가 남긴 유명한 문구처럼 “젊은 남성”을 국가적 페르소나로 내세웠던 빅토리아 시대의 주류인 젊은이들이 노화에 대해 느낀 부정적인 정서만을 지적할 뿐 내적으로 나이 든 흡혈귀가 젊은이들 이상의 발전력을 보여준다는 사실, 곧 그가 노화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거스르며 역동적인 노년기를 펼쳐간다는 점에는 주목하지 않는다.6) 이와 달리 이 글에서는 좀 더 드라큘라의 입장에 서서 그의 노화가 갖는 의미를 독해하려 한다. 외적/신체적 젊음의 위장술에 불과한 물리적 흡혈보다는, 이것만으로는 가릴 수 없는 내적/정신적 노회함, 곧 4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쌓아온 세상에 대한 경험치가 오히려 드라큘라를 수백 년의 장수에 성공한 노년의 생존자로 만듦에 주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드라큘라가 표면적으로 갈구하는 것은 젊은 신체와 영생이겠으나 실제로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그가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축적해온 지식과 경험, 곧 나이 듦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드라큘라』에서 노인 흡혈귀가 이런 역량을 바탕으로 무궁한 발전을 이뤄온 자신의 장수를 정당화하는 서술에 주목하면서 구체적으로는 그가 노화 비평에서 말하는 인생 비평(life review)과 젊음의 가장무도회(masquerade)를 펼치는 방식을 분석하려 한다. 드라큘라가 조너선 앞에서 늘어놓는 생존자로서의 자신의 과거에 대한 재구성은 자신의 장수와 영생의 필요성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며, 젊은 신체를 연출하는 일은 청년층에게 자신의 발전의 진정한 원동력인 내적 나이 듦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 비평과 젊음의 가장무도회는 높은 활동성과 생산성을 보여주는 드라큘라가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기만적인 행위일 수 있다. 이는 그가 이룬 노년의 발전에 사회적 부작용이 반드시 따른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비록 그의 발전이 노년기가 쇠퇴와 정체의 시기라는 고정관념에 도전한다는 의의를 지닐 수 있다 해도, 그 이면에 앞으로 오랜 세월을 생존하며 사회 발전을 이끌어야 할 청년들의 희생이 놓인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드라큘라』가 흡혈귀를 통해 노년의 발전을 제시하면서도 그에 수반되는 사회적 부작용인 청년세대의 쇠퇴를 함께 엮어 그 불가분의 관계를 묘사하는 방식으로 세기말 영국의 세대갈등을 문학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2. 19세기 영국의 노인과 세대갈등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영국의 평균수명이 꾸준히 늘어나고7) 인구 또한 급증하면서 1801년부터 공식 인구조사가 시행되었다. 자연히 노년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노년층이 하나의 독립적인 사회계층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사실 인구구조는 여전히 젊은 편이었다. 1892년 영국에 65세 이상의 인구가 “140만 명”이었는데, 이는 같은 해 65세 미만 인구인 “2800만 명”의 20분의 1에 불과했다.8) 그렇지만 이미 노년층의 자율성 부족이 사회의 선형적 발전을 저해하는 큰 장애물로 인식되었다. 1834년 영국 빈곤법 개정(English Poor Law Amendment Act)에 따라 노인들에 대한 사회적 지원은 오로지 구빈원 내에서만 가능하게 되었고, 1866년 스마일스(Samuel Smiles)가 『자조론』(Self-help)을 내놓은 이래로는 스스로를 도울 능력이 없는 계층을 낙오자로 낙인찍는 경향이 굳어졌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열심히 일하지 않는 빈곤층에게 사회적 지원을 해서는 안 된다는 통념이 확산했는데, 사실 빈곤층 중 상당수가 60대 이상이었다. 1890년대 초반 구빈원에 수용된 이들 중 무려 3분의 1이 고령층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9) 그래서 19세기 중후반 영국인들은 신체 및 경제적 자립도가 떨어지는 노년층을 수용할 수 있는 요양원, 자선시설, 정신병원 등 사회복지 시설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맹검(Teresa Mangum)은 빅토리아 시대에 “장수” “인간 수명” 그리고 “가장 오래 산 구성원을 돌보는 사회적 책임”에 대한 담론이 꾸준히 생산되었던 것은 노년층이 사회 전반, 특히 젊은 세대에게 큰 부담을 지우며 기생하고 있다는 통념이 퍼져갔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10) 체이스 또한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노인들을 젊은이를 착취하는 흡혈귀로 보는 시선이 늘었고 “노인혐오증”(gerontophobia)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11)

근대사회에서 노화를 중요한 사회문제로 인식하게 된 근간에는 개인의 출생부터 사망까지의 노화 과정이 사회 전체의 건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믿음이 자리한다. 푸코(Michel Foucault)의 주장처럼 “신체 종속과 인구 통제를 달성하기 위한 무수하고 다양한 테크닉”으로 인해 근대사회는 개인의 삶을 발전이라는 이념하에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개인들은 자신들의 개별 노화 과정을 사회적 눈높이에 맞추게 되었던 것이다.12) 이처럼 개인의 성장과 사회의 발전을 일치시키는 과정이 바로 18세기 후반 등장하여 19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문학 장르로 자리잡은 사실주의 성장소설의 주된 줄거리다. 모레티(Franco Moretti)가 지적한 바와 같이 사실주의 성장소설의 핵심은 주인공의 청년기다. 바로 이 시기에 주인공은 근대사회와 갈등을 빚게 되지만, 나이가 들고 성숙해감에 따라 결국 갈등을 원만히 해결하고 내적 성숙에 다다르며, 종국에는 기성세대로 안착하면서 제자리를 찾기에 이른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젊은이의 “내적 불안정함”이 최종적으로는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성숙의 형태로 진화되어야 하며, 이것이 근대사회 전체에 유익한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13) 이에 따라 중장년기에는 사회로부터 안정감이라는 보상이 주어지고, 자연히 더는 사회와의 갈등을 빚을 필요가 없는 편안한 노년기가 찾아와야 할 것이라는 환상이 빚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청년을 주인공으로 하는 사실주의 텍스트 속에서 그의 노년기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주이샥(Jacob Jewusiak)은 “발전하는 사회를 재현하는 사실주의 소설의 노력이 미처 담아내지 못한 잔여물이 있다면 그것은 노인의 존재”라고 말한다.14) 이런 맥락에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노인문제가 가시화되었던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세기말에 이르기까지 발전 이데올로기 및 젊음 중심의 패러다임에 대한 의구심을 본격적으로 제기하는 반사실주의적 소설 장르가 유행한다. 아라타(Stephen Arata)에 따르면, 이 같은 반사실주의 텍스트는 기존 사실주의 성장소설이 강조한 개인과 사회의 선형적 발전의 당위성에 대한 의문을 표하기 위해 “오래도록 계속되는 상실”을 과장된 방식으로 형상화했다.15) 이를 통해 인간과 문명의 쇠퇴의 불가피함, 그리고 그것이 자아내는 근원적 공포를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플롯하에서 쇠퇴를 겪는 것은 비단 노인뿐만이 아니라 젊은이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노인들은 자연적 노화와 사회적 소외를 거부하고 타인에게 기생하며 젊음을 연장하려는 왜곡된 말년을 살기도 한다. 

이렇게 젊음과 늙음,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 간의 관계를 전도시키는 텍스트가 바로 『드라큘라』다. 여기서 동유럽 출신이면서 인간에서 괴물로 퇴행한 노인 귀족 흡혈귀가 자신의 오래된 성에서의 안정적인 삶을 거부하고 영국으로 넘어와 이곳의 미래를 짊어질 중산층 젊은이들의 피와 생명을 착취하여 그들의 역동성을 무력화시킨다는 설정은 젊은이의 성장 동력을 발판 삼아 도약해온 근대 영국에 대한 도전을 보여준다. 드라큘라는 개인의 성숙이 근대 사회와 문명에 이바지하는 발전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로 삶과 죽음에 대한 자연의 법칙을 전복시키면서 자신의 퇴행적 흡혈 행위를 다른 이들에게 퍼뜨리는 가운데 자신의 발전이 근대 문명사회 전체를 붕괴시키도록 한다. 무엇보다 그가 “매우 젊고 강하며 피가 매우 순수한” 영국인들 중에서 희생자를 찾아낸다는 점에서 영국 내 젊은 세대의 치사율이 높아짐을 알 수 있다(158면).16) 사회 주변부로 물러나서 정적인 노년을 맞이하려 들지 않는 노인의 자기중심적 생존 본능이 영국의 평균연령을 높이면서 젊은이들의 성장을 차단하여 기형적 인구구조를 만드는 셈이다.

실제로 20세기를 앞두고 있던 1890년대 영국은 다양한 분야에서 세대 간의 갈등을 겪었다. 특히 빅토리아 여왕과 함께 나이 들어온 19세기 영국인들에게 20세기의 도래는 기대와 혼란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20세기 초에는 저널리스트 잭슨(HolbrookJackson)이 1890년대를 본질적으로 과도기일 수밖에 없는 시간으로 언급하면서 당시 영국인들이 급격한 사회 변화에 노출된 상태에서 세대갈등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특히 젊음의 표상이었던 “신남성”과 “신여성”에게는 이 시대가 “희망과 행동의 시대”였는데, 이것은 이들이 마침내 진정한 “자신이 되는” 것과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기에” 적합한 변화의 시간이 도래했다고 믿었음을 보여준다.17) 그러나 발전에 대한 청년세대의 열망만으로 기존의 사회체제를 완전히 전복시킬 수는 없었는데, 이는 “너무나 늙었지만” 그만큼 오랫동안 생존해온 노인들, 곧 19세기를 오래도록 버텨온 기성세대의 반발이 강력하여 “매우 젊은” 청년들의 사회 개선 의지를 꺾어놓기 십상이었음을 의미한다.18)

이러한 배경하에 탄생한 『드라큘라』와 같은 고딕 흡혈귀 문학이 노인을 물러나지 않는 괴물로 내세우는 것도 “노인이 자신들의 영역을 넘어 젊은이들의 영역까지 침범하리라는 두려움”을 반영한다.19) 고딕문학뿐 아니라 그랜드(Sarah Grand)의 『훌륭한 쌍둥이』(The Heavenly Twins, 1893)와 같은 사실주의 텍스트 또한 “늙은 잎을 잘라주어야 새순이 번성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시인 랜더(Walter Savage Landor)의 말을 인용하면서 노인들이 물러가지 않는 세상 속 젊은이들의 어려움에 대해 비판한다.20) 이 같은 예는 혁신을 향한 열망이 큰 젊은 세대일수록 그것을 막아서는 노년의 반동력을 재발견하고 공포를 느꼈던 시대가 세기말이었음을 알려준다. 『드라큘라』에서는 늙은 흡혈귀와 젊은 영국인들로 구성된 빛의 함대 사이의 대립구도가 바로 당시 영국의 세대갈등을 반영하고 있다. 스스로 트란실바니아의 긴 역사를 대표한다고 자부하는 드라큘라이지만, 그는 근대 영국으로 활동무대를 옮겨오면서 세기말 영국 내 젊은이들의 취약점을 건드리고 영국의 미래를 위협하는 존재로 자리한다. 물론 이 소설 속 흡혈의 피해자가 모두 청년층은 아니다. 예를 들어 미나와 루시에게 공동묘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해주던 스웨일스는 “끔찍하게 늙은” 사람이며, 흡혈귀로 변한 루시의 피해자들은 어린아이들이다(60면). 그러나 스웨일스와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혈기왕성한 청년층이다. 또한 루시가 흡혈귀로 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적으로 저항력이 없는 아이들을 범행 대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상황까지 고려해본다면, 이 텍스트 속 흡혈의 피해자들이 주로 건강한 신체와 충만한 생명력을 가진 젊은 세대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드라큘라의 역할은 인생의 전성기에 오른 영국의 청년층을 공격하여 이들이 인간으로서의 생을 조기에 마감토록 하고, 자신은 흡혈귀로서의 생을 연장하는 동시에 신체적 회춘까지 이루면서 젊음을 압도하는 나이 듦을 과시한다. 

3. 늙은 흡혈귀의 자기발전 서사

이방인이자 적대자(antagonist)인 드라큘라가 서술자로서의 자리를 선점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조너선의 초기 서술을 통해 그가 자신을 조너선에게 제법 상세히 소개하고 있음에 주목할 만하다. 비록 조너선의 일기를 통해 영국 독자에게 재생산되는 한계는 있겠으나, 이를 통해 적어도 젊은 영국인인 조너선이 늙은 동유럽인 드라큘라의 첫인상을 어떻게 그려내는지, 그리고 드라큘라가 자신의 수백 년간의 생존을 어떻게 회고하며 자기발전 서사로 꾸려내는지를 엿볼 수 있다. 트란실바니아 성에 도착하여 드라큘라를 만난 조너선은 그가 “거대한 폐허의 성”(22면)에 고립된 “혈색이라고는 전혀 없는”(15면) 노인이라고 생각한다. 이 성의 낡고 음산한 분위기와 자신이 “더 이상 젊지 않음”을 강조하는 드라큘라에게 기만당한 채 그의 수상한 정체에 대한 진실을 아직 파악하지 못하는 셈이다(22면). 흥미롭게도 노회한 드라큘라는 자신이 영국의 젊은 세대에게 어떻게 비칠지에 대해 영민하게 인지하고 있다. 말하자면 문명화된 근대 영국의 청년세대가 보기에 자신과 같은 동유럽 출신의 노인은 미약한 생명력밖에 없는 주변적 존재에 불과할 수 있으므로 이 맹점을 이용하면서 쇠약한 외양 너머의 내적 원숙함을 감춘다.

드라큘라의 원숙함은 수백 년간의 삶 속에 누적된 경험치, 곧 세상의 변화를 버텨낸 고령자만이 입증할 수 있는 강한 생존 능력에서 기인한다. 조너선이 성에서 머무는 기간 동안 드라큘라는 “들썩대던 시대”(20면)와 “망자들을 애도하던 지친 시간들”(22면)을 버텨온 자신의 생존 경험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특히 조너선이 트란실바니아의 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표현하자 드라큘라는 “그의 가문과 이름의 자부심은 그 자신의 자부심이고, 그들의 영광이 그 자신의 영광”이라며 “거의 복수형으로, 왕과 같이” 말한다(27면). 여기서 그는 자신을 국가와 국민을 현재까지 살아남도록 이끈 승리의 지도자로 정의한다. 다시 말해 트란실바니아를 이끈 것은 나이 든 자신의 오랜 생존력이며, 그것이 젊은이들의 역동성 이상의 힘을 가진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처럼 장기간 국가를 지휘한 경험 덕분에 주어진 환경과는 다른 새로운 환경에서도 적응할 수 있다는 확신도 내비친다. “조너선의 위대한 런던 거리를 누비고 다니면서 바쁘게 서둘러 움직이는 사람들 한가운데 있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노년의 발전 서사의 무대를 근대 영국으로 확장하는 장면이 이를 보여준다(19면).

사실 드라큘라는 끝없는 독서와 학습을 통해 근대문명 한복판으로 진입하기 위한 정신적 발전을 이루어왔다. 영국과 런던에 관한 책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으며, 이 책들이 자신에게 “긴 즐거움의 시간”을 제공하는 “동반자”라고 말한다(같은 면). 이렇게 드라큘라는 쉼 없는 정신적 단련을 거쳐온 평생학습자로서 400년간의 장수를 통해 축적한 방대한 지식을 십분 활용하여 영국으로의 이주를 준비해왔다. 오랜 세월 동안 지켜본 세계의 흥망성쇠가 그에게 노년기에도 쉬지 않고 최신 문물과 정보를 받아들여야 하는 당위성을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드라큘라의 서가에 영국의 “역사, 지리, 정치, 정치경제, 식물학, 지질학, 법률”에 대한 방대한 양의 책이 꽂혀 있음을 발견한 조너선은 그가 영국에 대해 적극적으로 학습해왔음을 눈치채지만, 그중 어느 것도 “아주 최근의 것”은 아니라는 이유로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같은 면). 사실 조너선 자신 또한 런던 영국박물관 내의 도서관을 방문하여 트란실바니아에 관한 책과 지도를 미리 탐색하면서 드라큘라를 만나기 위한 준비를 했는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드라큘라와 조너선 모두 정보를 수집하는 근대 문명인임을 알 수 있다. 나이와 국적이 다른 두 사람이지만 모두 타국으로의 여정을 준비하는 데 지식 축적이 필수임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신 정보를 기반으로 한 영국박물관의 자료는 수백 년 된 동유럽 고성의 위치를 정확히 표시하지 못한다. 하지만 조너선은 영국이 소장한 자료가 불완전할 리 없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드라큘라의 “나라에 대한 지도 중에는 아직 우리 나라의 병기 조사 지도(Ordnance Survey maps)에 비견할 만한 것이 없다”라고 결론지어버린다(2면). 하지만 근대 영국의 최신 지도나 그 지도를 익숙하게 읽고 분석하는 젊은 영국인의 자국중심주의적 확신만으로 낡고 오래된 타국의 본질을 쉽게 포착할 수는 없다. 조너선 본인도 결국 인정하듯이 “과거의 세기들은 ‘근대성’으로 제거할 수 없는 자신들만의 힘을 가져왔고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34면). 

말하자면 400여 년간의 독서 경험을 가진 동유럽 노인이 근대 영국 내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당연시하며 이전의 역사에 관해 잘 알지 못하는 젊은 영국인 이상으로 영국 제국주의의 발전사에 관해 잘 알고 있는 셈이다. 아직 역사성의 힘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청년들과 달리 늙은 드라큘라 자신은 “영국의 삶과 변화, 죽음, 그리고 영국을 현재 상태로 이끌어온 모든 것을 공유”하려는 욕망을 품고 있기에 영국의 역사를 면밀히 조사해왔다고 단언하는 장면이 이를 입증한다(19면). 물론 드라큘라의 자기합리화가 기만적이기는 하나 그가 자신의 노회함을 최대한 활용하여 노년에도 발전이 가능함을 입증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처럼 드라큘라가 노년기에도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은 쇠퇴를 인정할 수 없는 집념과 선형적 발전의 영속화에 대한 집착이라 할 수 있는데, 비단 드라큘라뿐 아니라 그의 공격 대상인 세기말 영국제국도 유사한 특성을 내비친다. 19세기 내내 영국의 제국주의적 세속이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880년대부터 상대적으로 신흥 제국이었던 미국과 독일에 비해 영국이 너무 노쇠해버렸다는 국가적 우려가 커져갔다. 1885년 『국가주의자』(The Statist)에 실린 기사가 보여주듯이 “영국이 이미 너무 약해졌거나 너무 무감해졌다”는 불안이 증폭되었고,21) 헝가리 출신 노다우(Max Nordau)의 『퇴행』(Degeneration, 1892)이 번역 출간되면서 이 책이 짚어내고 있는 세기말 유럽 전역의 망조가 영국제국에도 이미 깃들었다는 진단이 쏟아졌다. 이러한 분위기하에 노년기에 접어든 제국의 쇠퇴를 막기 위한 선제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는데, 이것이 노다우의 책에 대한 헤이크(Alfred Egmont Hake)의 응답이었던 『재생: 맥스 노다우에게 답함』(Regeneration: A Reply to Max Nordau)의 밑바탕이 된다. 헤이크는 퇴행적 문화의 확산을 막기 위해 앞장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국가가 영국이라고 말한다. 영국이 결국 “퇴행의 놀랄 만한 징조가 실은 재생의 첫 징조”22)임을 전 세계에 입증하면서 직선적 발전을 계속해갈 것이라는 제국주의적 논리를 펼치면서 이의 근거로 영국이 타 국가들과의 관계 속에 이뤄온 역사를 계속된 성취의 과정을 제시한다. 오랜 선형적 발전의 끝에 쇠락이 따라올 수 있음을 부정하면서, 영국에게는 타국과의 오랜 경쟁의 역사에서 승리자로서 일궈낸 내적 역량이 있기에 유럽 전역을 휩쓴 퇴행의 기운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으며 미래에도 다른 국가들을 선도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헤이크의 입장은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의 젊은 구성원보다도 오히려 그들과 대척점에 있는 늙은 이방인 드라큘라를 통해서 잘 구현되고 있기에 우리는 세기말 영국제국 또한 드라큘라처럼 선형적 발전에 집착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젊음과 영생에 대한 드라큘라와 영국제국의 집착은 분명히 문제적이지만, 적어도 노화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노년기에도 발전을 위해 정진하고 자기보존에 성공한다는 것은 충분히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처럼 노화에 굴하지 않고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드라큘라는 키케로(Cicero)가 일찍이 기원전 44년에 제시한 노인의 발전 가능성을 실현하는 인물이 된다.23) 인간이 나이가 든다고 해서 반드시 일방적인 쇠락의 과정만을 겪지는 않는다고 주장한 키케로는 신체와 정신의 나이 듦을 분리하면서 신체의 쇠락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정신적 성장이라고 보았다. 이는 높은 생활연령에도 “새롭고 신선한 것”을 배우려고 쉼 없이 노력한다면 의미 있는 노년기를 맞이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24) 신체적 생명력의 상실이 정신적 성숙의 획득으로 상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 문명사회의 지식을 쉬지 않고 왕성하게 습득해온 늙은 흡혈귀가 회춘에 성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드라큘라의 노화는 20세기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상당히 많은 노인 연구가 말하는 성공적인 노화의 조건 또한 어느 정도 충족한다. 일례로 볼링(Ann Bowling)은 이상적 노화를 “활동적 노화”(active ageing)로 정의했고, 노인들이 “사회적 활동, 가치, 역할 그리고 관계의 연속성”을 통해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해야 함을 역설했다.25) 청년층 못지않게 노년층 또한 생산성이 높은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면서 “사회적·심리적·신체적 건강, 자율성, 독립성, 권한 부여, 삶의 만족도 향상”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26) 왕성한 사회활동을 통해 자아실현을 멈추지 않는 노년기를 살아가는 드라큘라가 이를 증명한다.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생존하면서 동유럽인들의 “심장의 피, 두뇌, 칼” 역할을 해왔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꾸준한 사회 기여가 바로 활동적 노화의 원동력이었음을 드러낸다(28면). 늙은 드라큘라의 이러한 주장은 제국으로서 긴 역사를 자랑하지만 노년기에 들어선 영국이 그러한 경험치를 바탕으로 새로운 세기에도 선구자적인 역할을 맡아 퇴행하는 타 국가들을 이끌 수 있다는 헤이크의 주장과 궤를 같이한다. 두 주장 모두 이미 인생의 절정기를 한참 지나온 노인은 사회 주변부로 밀려나서 정체된 시간만을 보내게 된다는 통념을 깨면서 역동적 성장이 젊은이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4. 노년층의 발전에 따른 사회적 부작용

그런데 세기말 유행하던 퇴행 서사의 전형인 『드라큘라』에서 외려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그려낸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차리스(Andrea Charise)는 19세기 말 퇴행에 대한 불안 속에 탄생한 노화의 서사라 할 수 있는 고딕 텍스트 속에서 괴물 안타고니스트가 자신의 노화를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성공의 서사로 합리화하는 것은 노쇠함(senility)이 “미적으로는 생산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한다.27) 그러나 이는 생산성 높은 노년기에 대한 문학적 묘사는 미적으로만 유의미할 뿐 실제 사회현실을 반영하지 못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실 ‘활동적 노화’는 다분히 문제적인 개념이다. 이것은 서구사회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발전 이데올로기의 산물로서 나이 들어가는 주체들에게 괄목할 만한 발전을 쉼 없이 이뤄낼 것을, 또 자연적 노화를 부정할 것을 강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툴레(Emmanuel Tulle)는 노년층이 사회적으로 유용한 활동에 끊임없이 참여한다는 것은 이들이 발전 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해 자연적 “쇠퇴를 밀어내고자” 고군분투해야 하는 상황을 보여준다고 말한 바 있다.28) 노인에게도 퇴행 대신 전진이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히 패러다임의 전환이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성장과 전진을 줄거리로 삼았던 성장소설의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단지 성장의 주체가 청년에서 노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자연적 노화를 거부하고 영생과 회춘을 이뤄내려는 드라큘라 또한 영원토록 끝없는 발전을 향한 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초조한 근현대인의 표상일 수 있다. 

드라큘라는 분명히 적잖은 심리적 압박을 받고 있다. 특히 조너선에게 영어로 말할 때 “아주 작은 실수라도 하면 알려달라”고 요청하면서 영어를 완벽히 구사할 때까지 배움을 멈추지 않겠다고 말하는 장면은 늦은 나이에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는 데 따르는 불안감을 담고 있다(20면). 말하자면 외국어 학습 불안(foreign language anxiety)에 시달리고 있는 셈인데, 이는 근대 영국 도시 속에서 “이방인”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자의식에서 비롯된다(19면). 트란실바니아에서 오랫동안 세켈리 민족의 “주인”으로 활동적 노년기를 펼쳐오던 드라큘라는 자신이 런던에서는 주변적 존재로 전락하여 늙은 “이방인”으로 규정될 수도 있음을 예감하고 있기에 극도의 긴장감을 느끼고 더 철저히 대비하려 한다(같은 면). 

자기보존에 대한 노인의 강박은 죽음의 순간이 멀지 않았으며 반드시 찾아온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지만, 노인학자 버틀러(Robert N. Butler)는 죽음의 필연성에 대한 이 같은 두려움이 갖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고 말한다. 죽음을 앞둔 노인이 오히려 삶의 이전 단계에서 겪었던 심리적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버틀러는 이렇게 노인 주체가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받아들인 후 많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자신의 과거를 소환하여 인생을 재정리하는 비평(review) 행위가 상당히 “진보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한다.29) 삶에 대한 재역사화를 통해서 노인 주체가 자신이 과거에 이룩한 성취와 발전의 경험 이면에 담긴 모순적 행위를 다시 이해하고 자아를 “재통합”하면서 궁극적 종결의 순간에 더 잘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30)

지나간 과거에 대한 드라큘라의 서술은 버틀러의 인생 비평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 격동의 세월을 버텨내면서 지도자로서 생존해온 과정을 서사화하면서 자신에게 나이 든 생존자라는 정체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인생 비평은 노인 주체가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자신을 구성한 방식 및 남아 있는 짧은 미래의 삶을 준비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과거·현재·미래의 상호작용에 기초하는데, 지금까지 동유럽에서의 생존투쟁을 거울 삼아 영국에서도 생존하고 말겠다며 자신의 영구한 발전을 정당화하는 드라큘라도 이처럼 시간에 대한 통합적 인식을 나타낸다. 문제는 그의 인생 비평이 죽음의 필연성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고, 시들지 않는 발전을 향한 집착 및 생의 자연적 종결을 회피하려는 비정상적인 욕망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드라큘라의 이야기를 듣는 조너선도, 읽는 독자도 자신의 오랜 생존이 자신뿐 아니라 동유럽 전체에도 유의미한 발전으로 이어졌다는 그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 오히려 밤마다 성에 찾아와 자신의 아이를 내놓으라고 울부짖는 여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드라큘라의 장수는 타인의 희생 위에 쌓아올린 기형적 결과다. 그렇다면 그의 인생 비평은 과거 경험을 왜곡하고 조작하면서 생의 종결을 수용하는 대신 회피하고 지연시키기 위한 서술 행위다. 이 지점에서 드라큘라의 인생 비평은 과거에 이룬 발전 이면에 담긴 갈등을 재조명하면서 죽음의 불가피성을 수용하는, 곧 자기성찰을 목적으로 두는 버틀러의 그것과 크게 달라진다.

우드워드(Kathleen Woodward)는 버틀러의 논의가 “죽음이 아닌 생”에만 집중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31) 죽음을 앞둔 노인이 지나간 생을 돌이켜 재구성한다 해서 죽음에 완벽하게 대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오히려 지나간 사건에 대한 회고가 과거의 삶에 대한 애착을 강화할 수 있고, 이로 인해 미래의 죽음에 대한 더 큰 부정으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드라큘라가 자신의 현재 생존을 합리화하기 위해 과거를 왜곡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인생 비평은 죽음의 불가피성에 대한 인정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생에만 집착하게 하는 문제적 사례가 된다. 특히 드라큘라는 젊은 타인의 피뿐 아니라 정체성까지 빼앗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의 종결 가능성을 차단해버린다. 예를 들어 드라큘라는 조너선의 피를 직접 마시지는 않지만 그에게 자신의 일방적 인생 비평을 늘어놓는 과정을 통해 그의 정신을 지배하고 그의 에너지를 흡입한다. 심지어 조너선의 젊은 외양을 모방하는 기이한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 그가 조너선의 옷을 입고 자신의 성을 빠져나가는 것은 조너선이 정확히 예상하듯이 자신이 “저지르는 모든 악한 일”을 조너선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함이기도 하지만(42면), 더 나아가 젊은 조너선의 신체적 외양을 덧입은 상태에서 자신의 늙은 자아를 감추면서 종결 없는 영생을 실현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젊은 조너선을 모방하는 것은 드라큘라가 젊음과 늙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간교한 가장무도회를 벌이고 있음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생활연령으로는 노인이지만 신체적 젊음을 획득하고 연기하면서 나이 든 내면과 젊은 외양을 동시에 지니는 모순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는 비단 빅토리아 시대의 흡혈귀뿐 아니라 현대의 노인들에게서도 흔히 나타나는 경향이다. 우드워드는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외양”을 통해 나이를 재구성하는 현대문화 속에서 현대인은 누구나 화장이나 성형 등을 통해서 외적인 젊음을 인위적으로 연출하는 가장무도회에 가담한다고 본다.32) 그러나 그 어떤 현대인도 드라큘라만큼 젊음의 가장무도회를 잘 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신의 근거지인 트란실바니아를 떠나 영국으로 이주하는 데 성공한 드라큘라가 마침내 런던 도심을 누비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가 이전보다 훨씬 활기찬 모습으로 회춘하는 등 제법 성공적인 노년기를 보내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래서 이때 드라큘라와 마주친 조너선은 그가 확연히 “젊어졌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161면). 이 장면은 드라큘라가 신체적 회춘의 가장무도회를 통해 자신의 몸에 각인된 나이 든 흔적을 지워버리면서 자연과 사회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데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 같은 연출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나이 듦, 곧 드라큘라 자신이 오랜 시간 내적으로 쌓아온 생존 경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역사와 시간은 신체 표면뿐 아니라 신체 내부에 쓰이기” 마련이기에 그 어떤 신체적 젊음의 연출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우드워드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33) 겉보기에 젊은 자신에 도취되어 실제 생활연령을 잊고 산다 해도 내면에 각인된 실제 생활해온 시간만큼의 생존 경험치를 지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위적 젊음 연출에 내재된 불안정성은 주체가 나이 듦을 자각하지 못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청년으로 고정시켜놓고 살다가 어느 한순간 거울을 보고 그것이 환상에 불과했음을 인지하는 순간에 극적으로 표출된다.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1919년 「언캐니」(“The Uncanny”)에서 어느 날 문득 창문에 비친 노인을 보고 그 노인이 “바로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이었음을 깨닫고 자신이 “철저히 그 노인의 모습을 싫어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34) 거울에 비친 자신의 늙은 “더블”(double)을 통해 자기객관화에 다다르는 순간은 늙음을 무의식 저편으로 밀어넣은 후 늙지도 죽지도 않고 영원히 젊게 살 수 있으리라는 환상만을 키워온 자신의 모순이 폭로되는 극적인 순간, 곧 그동안 자신이 젊음을 가장해오면서 자신의 쇠퇴를 부정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순간이기에 충격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35)

그런데 드라큘라에게는 불안정성을 폭로해줄 거울 속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드라큘라의 성에서 그와 함께 서 있던 조너선이 거울 속에 비치는 형상이라곤 오로지 자신뿐임을 깨닫고 드라큘라의 “모습이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이를 확인해준다(24면). 전통적으로 흡혈귀가 거울에 비치지 않는 이유를 그가 인간과 달리 영혼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찾는데,36) 이는 거울을 통해 주체가 확인하는 것이 단순히 외양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주체는 거울에 비치는 외양 너머의 영혼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울 앞에 선 드라큘라 또한 단지 자신의 외양뿐 아니라 영혼을 확인해야 마땅한데, 그에게 거울상 자체가 부재하기에 이것이 불가능해진다. 이는 그가 자신의 늙은 영혼을 굳이 확인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나이 든 인간 주체의 입장에서 거울을 통해 오랫동안 무의식 속으로 억눌러오던 자신의 늙은 자아를 맞닥뜨리는 것은 두려운 일인 동시에 그간 부정해오던 자신의 늙음을 직면하고 있는 그대로의 늙은 자아를 수용하게 되는 기회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노인들의 거울 보기는 무의식 속 늙은 더블이 진정한 자아일 수 있음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자각의 순간인 것이다. 그러나 흡혈귀 드라큘라가 벌이는 젊음의 가장무도회는 지극히 의식적 행위라 할 수 있다. 외적으로 연출하는 인위적 젊음과 내적인 나이 듦 사이에서 충돌을 경험할 필요 없이 이미 양쪽 모두를 움켜쥔 상태에서 매우 계획적으로 영생과 회춘을 건 게임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400년간 쌓아온 자신의 나이 듦을 정확히 인지한 상태에서 그 경험과 노회함을 최대한 활용하여 생의 종결을 효과적으로 회피하고 지연시키는 방식으로 영원한 발전을 시도하는 드라큘라는 단지 표면적 젊음의 연출에만 치중할 뿐 신체 내부에 각인된 나이를 무의식중에 억압하여 망각하면서 지나간 경험이 곧 자신의 성장 동력이었음을 깨닫지 못하는 보통의 인간들과는 다르다.

그런데 거울 앞에서의 장면은 단순히 드라큘라의 문제만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장면은 거울에 비치지 않는 드라큘라의 나이 듦뿐 아니라 젊은 조너선에게 이를 간파해낼 능력이 부재함을 알려준다. 생존자로서 드라큘라가 이루어온 오랜 발전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인생 경험이 부족한 젊은이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특히 드라큘라의 발전이 자신과 같은 젊은 타인의 피와 에너지를 강탈하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대해 아직 조너선은 알 수가 없다. 드라큘라는 바로 이러한 약점을 이용하면서 젊은이들을 무력화시켜간다. 말하자면 미래 세대의 피와 에너지를 흡수하여 이들이 인간으로서 내일을 맞이하지 못하고 자신과 같은 흡혈귀가 되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태에 놓이도록,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은 젊은이로서의 가장무도회에 성공하는 것이 바로 드라큘라의 자기보존 방식이다. 이처럼 그의 장수가 실은 후속세대의 파괴하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은 그가 자랑하듯이 서술한 자신의 과거 생존 경험과 무용담의 이면을 비춘다. 여기에 세기말 노화의 언어를 덧씌워보자면, 드라큘라의 노화가 노인이 젊은이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고 영구히 자기발전을 도모하면서 구세대의 힘으로 신세대의 변혁 의지를 꺾어버리는 양상으로 진행됨을 볼 수 있다. 세대 간 힘겨루기 속에서 노인세대의 발전을 향한 집착이 지속될 때 청년세대가 불리한 상황에 놓일 수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처럼 드라큘라는 노인의 쉼 없는 성장이 청년의 조로(premature aging)라는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음을 그려낸다. 츠월라인(Anne-Julia Zwierlein)이 주장하듯이 19세기 중후반 여러 텍스트에서 “빠르게 쇠락하는 주인공”을 내세우면서 발전 이데올로기를 무효화하는 경우가 많았는데,37) 이들은 사회와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유한한 생명력을 너무 빨리 소진해버리는 것으로 묘사된다.38) 『드라큘라』에서도 노인의 공격을 감당하면서 고통받는 청년층이 일찌감치 쇠퇴를 겪는다. 드라큘라의 성에 감금되고 난 후 우여곡절 끝에 미나와 재회한 조너선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뇌염”에라도 걸린 듯이 고통스러워하고, 루시가 “인정사정 없는 잔인함”과 “방탕함”만을 가진 흡혈귀로 퇴행하고(197면), 드라큘라를 무찌르기 위해 소집된 빛의 함대(Crew of Light)의 일원이었던 미국인 퀸시가 전투 끝에 사망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물론 이 모든 갈등 끝에 드라큘라를 무찌른 조너선과 미나는 아들을 얻고 흡혈귀의 위협이 없는 안전한 영국의 미래를 꿈꾸면서 그동안 “견뎌낸 고통”이 현재의 “행복”으로 보상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354면). 그러나 한편으로는 트란실바니아를 다시 한번 방문하여 “끔찍하고 생생한 기억”이 여전하다고 덧붙이면서 당시의 상처가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음을 암시하기도 한다(같은 면). 

5. 꺼지지 않는 세대갈등

소설의 말미를 장식하는 것은 자신들이 겪은 엄청난 고통이 “타자기로 친 종이 묶음”으로만 남아 “제대로 검증된 하나의 문서” 형태를 갖추지 못함에 당혹스러워하는 조너선이 아니라, 그런 그를 위로하는 반 헬싱, 곧 또 다른 노인이다(같은 면). 여러모로 드라큘라와 대비되는 존재인 반 헬싱은 모두의 존경을 받는 원로 의사다. 무엇보다도 젊은이들의 생명력을 높이 살 뿐 아니라 이들의 의견을 경청할 줄도 아는 인물이기에 그가 젊은이들을 인솔해 빛의 함대를 이끄는 일은 무리없이 진행된다. 그러나 나이 든 반 헬싱보다 최신 문물에 적응이 빠른 젊은이들이 그의 방식에 반발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는 순간도 있다. 반 헬싱의 제자로서 그를 영국으로 초청하여 루시를 살려보고자 노력했던 수어드 박사의 경우는 최신 과학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초자연적 현상에 대해서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수어드는 은사 반 헬싱이 설명하는 흡혈귀의 속성에 대해 의구심을 품기도 하고, 그의 문제 해결 방식에 반발하기도 한다. 또한 미나의 경우는 반 헬싱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자신이 속기법으로 쓴 일기를 도발적으로 내놓고 늙수그레한 외국인인 반 헬싱이 그것을 읽을 수 없음을 솔직히 인정하는지를 지켜보면서, 늙은 남성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신을 아담에게 “태초의 사과”를 건넨 이브에 빗대기도 한다(171면). 이는 젊은 영국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빛의 함대와 갈등을 빚는 것이 비단 늙은 괴물 드라큘라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알려준다. 노인과 청년이 대치하던 세기말 세계 속에서 반 헬싱과 같이 귀감이 될 만한 노인 또한 청년들의 입장에서는 낡은 질서의 수호자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린(James Aaron Green)이 주장한 바와 같이, 『드라큘라』처럼 늙은 흡혈귀를 활용한 세대갈등의 서사는 새 시대에 맞게 새로운 서사를 꾸려가야 할 청년세대가 윗세대의 노욕으로 인해 “기회와 에너지”를 상실해버리는 19세기 말 사회현실에 대한 “불안”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39) 그렇지만 반 헬싱이 조너선과 미나의 아들을 축복해주면서 더 이상 불안해할 필요 없이 미래를 살아가도 된다고 확인해주는 마지막 장면은 젊은이들의 불안을 잠재워주는 것 또한 원숙한 노인의 역할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래세대의 성장을 무력화시키던 드라큘라가 물러간 세상에서 조너선 부부와 그들의 자손이 노년에도 건재한 지적 능력을 가진 또 다른 노인 반 헬싱에게 정서적으로 의지한다는 사실은 미래를 열어갈 젊은 생명력 못지않게 과거를 통해 축적되어온 노회함 역시 강력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드라큘라가 젊은이들의 힘을 약화시키며 자신의 질서를 유지해나가는 가장 큰 원동력은 그가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쌓아온 지식과 경험이다. 그렇지만 그가 수백 년간 이뤄온 발전은 젊은 타인의 희생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기형적인 것이기에 그의 이야기는 장수 노인의 자기발전 서사인 동시에 청년층의 조로 서사가 된다. 그리고 이처럼 노년의 발전에 따르는 사회적 부작용이 그가 중세부터 오랜 세월을 거주해온 동유럽이 아닌 근대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불거진다는 사실은 이 소설이 구세기와 신세기가 교차하던 세기말 영국에서 고조되었던 노인문제나 세대 간의 관계에 대한 문학적 재구성일 수 있음을 드러낸다. 정리하자면 『드라큘라』는 노인이 축적해온 오랜 발전 경험이 그가 쇠퇴에 맞서 싸우며 발전을 계속하도록 하는 원동력임을 알려주지만, 한편으로는 무궁한 발전에 대한 이 같은 믿음이 노인 개인을 넘어서서 국가 전체의 강박으로 이어질 수 있고 이것이 청년세대의 희생을 불사하는 위험으로까지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1)安炤眉 부산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부교수. 최근 논문으로 “The New Woman’s Fantasy about Adoption and Transnormative Family in George Egerton’s ‘The Spell of the White Elf’”(2024)가 있다.

1896년부터 97년까지 스토커의 『드라큘라』 외에도 브래든(Mary Elizabeth Braddon)의 『좋은 숙녀 두케인』(Good Lady Ducayne) 케널리(Arabella Kenealy)의 『아름다운 흡혈귀』(A Beautiful Vampire) 등이 연이어 출판되었는데, 이 텍스트들은 모두 젊은이들의 피 또는 기운을 통해 젊음과 영생을 얻는 늙은 흡혈귀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2) Nina Auerbach, Our Vampires, Ourselves (Chicago: U of Chicago P, 1995) 63면.

3) Marta Miquel-Baldellou, ““It Made Her Age Hard to Guess”: Narrating the Dynamics of Aging and Gender through Victorian Gothic Archetypes in Susan Hill’s The Woman in Black,” Frontiers of Narrative Studies 9. 1 (2023) 76면.

4) Marta Miquel-Baldellou, “From Pathology to Invisibility: The Discourse of Ageing in Vampire Fiction,” EnterText 12 (2014) 99면.

5) Karen Chase, “Senile Sexuality,” Interdisciplinary Perspectives on Aging in Nineteenth-Century Culture, ed. Katharina Boehm, Anna Farkas, and Anne-Julia Zwierlein (New York: Routledge, 2014) 136면.

6) George Moore, Confessions of a Young Man (London: Heinemann, 1886) 176면.

7) 1801년 36세에 불과했던 평균수명이 1901년에는 50세로 증가했다.

8) George R. Boyer and Timothy P. Schmidle, “Poverty among the Elderly in Late Victorian England,” The Economic Historic Review 62. 2 (2009) 250면.

9) Teresa Mangum, “Growing Old: Age,” A Companion to Victorian Literature and Culture, ed. Herbert F. Tucker (London: Blackwell, 2005) 103면.

10) 같은 글 102면.

11) Karen Chase, “Senile Sexuality,” Interdisciplinary Perspectives on Aging in Nineteenth-Century Culture, ed. Katharina Boehm, Anna Farkas, and Anne-Julia Zwierlein (New York: Routledge, 2014) 132면.

12) Michel Foucault, The History of Sexuality, trans. Robert Hurley (New York: Pantheon, 1978) 141면.

13) Franco Moretti, The Way of the World: The Bildungsroman in European Culture, trans. Albert Sbragia (London: Verso, 2000) 6면.

14) Jacob Jewusiak, Aging, Duration, and the English Novel (New York: Cambridge UP, 2020) 69면.

15) Stephen Arata, Fictions of Loss in the Victorian Fin de Siecle (Cambridge: Cambridge UP, 1996) 1면.

16) Bram Stoker, Dracula (New York: Doubleday, 1897). 앞으로 이 책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기.

17) Holbrook Jackson, The Eighteen Nineties, a Review of Art and Ideas at the Close of the Nineteenth Century (London: Grant Richards, 1913) 30면.

18) 같은 책 30면.

19) Chase, 앞의 글 134면.

20) Sidney Colvin, Landor (London: Macmillan, 1888) 158면.

21) “How Shall We Face It?,” The Statist (Feb. 7, 1885) 146면.

22) Alfred Egmont Hake, Regeneration: A Reply to Max Nordau (London: A. Constable, 1895) 315면.

23) 인간의 나이 듦에 대한 키케로의 철학적 고민은 생애주기에 대한 서구의 사고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는데, 이는 『드라큘라』가 출판되었던 19세기 말 그리고 21세기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24) Cicero, Cicero on Old Age, trans. Sir Robert Allison (London: Arthur Humphreys, 1916) 16면.

25) Ann Bowling, “Perceptions of Active Ageing in Britain: Divergences between Minority Ethnic and Whole Population Samples,” Age and Ageing 38.6 (2009) 704면.

26) 같은 글 같은 면.

27) Andrea Charise, The Aesthetics of Senescence: Aging, Population, and the Nineteenth-century British Novel (Albany: SUNY Press, 2020) 139면.

28) Emmaneulle Tulle, “Introduction,” Old Age and Agency, ed. Emmanuelle Tulle (New York: Nova Science, 2004) ix면.

29) Robert N. Butler, “The Life Review: An Interpretation of Reminiscence in the Aged,” Psychiatry 26.1 (1963) 66면.

30) 같은 글 같은 면.

31) Kathleen Woodward, “Reminiscence and the Life Review,” What Does It Mean to Grow Old?, ed. Thomas R. Cole and Sally A. Gadow (Durham: Duke UP, 1986) 145면.

32) Kathleen Woodward, “Youthfulness as a Masquerade,” Discourse 11.1 (1988-89) 121면.

33) 같은 글 135면.

34) Sigmund Freud, “The Uncanny,” The 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Works of Sigmund Freud, ed. and trans. James Strachey (London: Hogarth, 1919) 248면.

35) 같은 글 같은 면.

36) Leonard G, Heldreth, “S. P. Somtow’s Timmy Valentine: The Vampire as Archetype and Fragmented Reflection,” The Blood is the Life: Vampires in Literature, ed. Leonard G. Heldreth and Mary Pharr (Bowling Greenstate: Bowling Greenstate UP, 1999) 121면.

37) Anne-Julia Zwierlein, ““Exhausting the Powers of Life”: Aging, Energy and Productivity in Nineteenth-Century Scientific and Literary Discourses,” Interdisciplinary Pespectives on Aging in Nineteenth-Century Culture, ed. Katharina Boehm, Anna Farkas, and Anne-Julia Zwierlein (New York: Routledge, 2014) 45면.

38) 하디(Thomas Hardy)의 『무명의 주드』(Jude the Obscure, 1895) 속 애늙은이 캐릭터인 리틀 파더 타임(Little Father Time)이 대표적인 예다.

39) James Aaron Green, “‘Old Things Made New’: Transfusive Rejuvenescence in M. E. Braddon’s ‘Good Lady Ducayne’ and H. G. Wells’s ‘The Story of the Late Mr. Elvesham,’” Frontiers of Narrative Studies 9.1 (2023) 51면.

│안소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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