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밖 57호][특집] 철의 시대와 노인의 나라: 헤시오도스, 플라톤, 그리고 쿳시를 중심으로/ 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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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원

1. 들어가며

이 글은 쿳시(J. M. Coetzee)의 작품 『철의 시대』(Age of Iron, 1990)의 제목이 환기하는 신화적 은유가 유년기와 노년기의 관계를 선형적 시간관 너머에서 바라보려는 작가의 시도를 구체화한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먼저 쿳시의 “철의 시대”의 심상이 헤시오도스(Hesiod)의 금속 신화뿐만 아니라, 플라톤(Plato)과 베르길리우스(Virgil)의 신화적 재구성까지 복합적으로 차용한 결과물임을 분석한다. 특히 헤시오도스가 철의 시대의 타락상을 묘사하기 위해 언급한 “흰머리의 아이들”이 플라톤이 재해석한 황금 인류의 묘사에서 유사하게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플라톤이 황금시대를 양가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노년과 유년의 관계에 대한 플라톤의 이해에서 기인함을 밝힌다. 젊은이로 형상화된 아름다움은 인간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 이상인 선(善)을 이해하도록 돕지만1) 정작 선을 실행하려면 노년의 지혜가 필요하다. 젊은이는 노년의 지혜를 구하고 노년의 철학은 젊은이의 아름다움을 통해 가능해진다는 호혜적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철학의 목적은 늙음이라는 비참함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되레 늙음이 비로소 철학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다.2)

한편 쿳시는 플라톤과 헤시오도스 등의 금속 신화를 빌려와 20세기 후반 아파르트헤이트의 맥락에서 다시 씀으로써 인종과 늙음의 문제가 교차하는 지점에 천착한다. 1980년대 말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식되기 직전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죽음을 앞둔 어머니가 미국으로 이민 간 딸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식의 소설이다. 케이프타운의 은퇴한 고전학 교수 커런 부인(Mrs. Curren)은 어느 날 불현듯 자신의 차고 부근에서 지내기 시작한 거리의 부랑자 버퀼(Vercueil) 때문에 일상을 침범당한다.3) 버퀼이 커런의 집에서 발견된 날은 공교롭게도 커런이 자신의 몸에 암이 있다는 판정을 받은 날이기도 하다. 바라지 않았던 낯선 이방인과 암세포는 커런의 평온하던 일상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첫 계기가 된다. 

주인공 커런의 질병과 임박한 죽음이 소설의 핵심 소재이니만큼 광범위한 늙음의 문제에 관해 적지 않은 비평적 논의가 있어왔다. 일례로 홀(Alice Hall)의 장애 연구는 쿳시의 후기 소설들에 그려진 노인의 의존성을 중심으로 커런과 버퀼의 환자-간병인 관계에 주목한다.4) 한편 그레이슨(Erik Grayson)의 경우, 쿳시의 작품들이 노년을 초월과 자족적 행복을 획득하기보다는 지난한 퇴보와 소외의 과정으로 그려내었음을 포착한다.5) 홀의 연구가 돌봄노동의 맥락에서 노년성을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바라보려는 시각을 견지한다면, 반대로 그레이슨의 연구는 노년성을 체험하는 개개인 내면의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출발한다. 얼핏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접근방식은 노년문제의 핵심을 아우른다. 즉 노년에 이르러 개인은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쇠퇴와 소외를 경험하지만, 이는 동시에 유의미한 사회적 역할을 박탈당하는 관계적 무력감으로부터 오는 것이기도 하며, 특히 사회가 노년인구를 어떻게 돌보는지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이렇듯 『철의 시대』는 개인의 늙음을 소재로 삼되, 궁극적으로는 집단적이고 시대적인 늙음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작품이다. 하지만 쿳시가 늙음을 성숙과 동일시하여 긍정하느냐의 질문에 관해서는 좀 더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폰도(Blossom Fondo)의 주장에 따르면, 『철의 시대』가 포착하는 노화의 과정은 도덕적 성숙과 종종 맞물리며, 노인의 풍부한 경험을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주요한 단초로 제시한다.6) 분명 커런의 노화 과정은 아파르트헤이트와 인종갈등에 관한 중요한 문제의식을 배태시키는 요인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막상 소설에서 커런의 노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커런이 당면한 정치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늙음을 선과 분리시키고 선을 알아보는 지혜를 확립하는 것이 플라톤이 요청하는 노년의 덕이라면, 쿳시는 선도 지혜도 인종적 차이 앞에서 무력해지는 역사적 현실을 일깨운다. 실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노령인구를 돌보는 사회보장제도가 인종분리정책에 근간하였음을 고려할 때, 주인공의 ‘나이 듦’은 당사자에게는 박탈감의 원천이지만 주변 흑인 인물들로부터 그녀를 소외시키는 일종의 특권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글은 노화가 인종에 따라 달리 적용되는 시대적 현실을 쿳시의 소설이 포착했음에 주목한다. 특히 작중 늙음의 관념이 플라톤과 헤시오도스의 금속 신화에서 차용되었음을 밝히고, 쿳시의 소설이 이러한 신화적 맥락을 통해 노년이 유년과 청장년의 시기를 거쳐 순차적으로 온다는 연속적 시간관에 의문을 제기했음을 분석한다. 쿳시의 소설은 젊음과 늙음의 은유를 결합시키며 나이의 구분을 혼란스럽게 만드는데, 예컨대 커런은 마치 아이처럼 미성숙하게 그려지는 반면, 흑인 아이들은 조로하여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다. 직선적 시간관은 노년이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덕을 축적할 수 있다는 믿음의 원천이나, 정작 소설은 커런이 노인이라서 다른 등장인물들보다 더 빼어난 도덕적 성취를 이루는 것이 아니며, 시대가 아이들의 노화를 가속시킴으로써 커런의 깨달음을 이끌어낸 것처럼 묘사한다. 결국 『철의 시대』는 노화 과정을 성숙의 과정으로 섣불리 치환하지 않고 노년과 도덕성을 분리하여 커런의 개인적 쇠퇴를 인류사적 관점에서 재조명한다.

2. 다섯 인류의 신화를 통해 본 노인의 자리

고대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는 인류를 황금시대, 은의 시대, 청동시대, 영웅시대, 그리고 철의 시대 총 다섯 단계로 구분한다. 영웅시대의 예외를 제외하면, 헤시오도스의 다섯 시대는 인류를 귀중한 광물(황금)에서 덜 가치 있는 금속(은, 청동, 철)에 빗댄 구분법 때문에 일견 시간순으로 인류의 단계적 쇠락을 서술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헤시오도스 본인이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가) 살고 있는 마지막 다섯 번째 시기인 철의 시대는 흔히 가장 열화된 인류의 시대로 설명된다. 단계적으로 쇠퇴한다는 시간관은 달리 말하면 철의 시대가 최후의 시대라는 해석으로 곧잘 이어진다. 예컨대 둘리(Gillian Dooley)는 헤시오도스의 시간을 선형적이라고 보고, 따라서 철의 시대 다음은 없다고 해석한다.7) 이와 반대로 베르낭(Jean-Pierre Vernant)은 황금에서 철에 이르기까지 질적 쇠락의 과정이 과연 연속적일지에 관해 의문을 제기한다.7)그는 일단 금속에 비유되지 않은 영웅시대가 그러한 연속성을 끊어낼뿐더러, 철의 시대 이전 또는 이후에 태어났더라면 좋았겠다는 헤시오도스의 감상을 보더라도 신화의 순환적인 시간성이 드러난다고 주장한다.8) 비록 헤시오도스가 철의 시대 이후에 어떤 시대가 올지는 명시하지 않았으나, 최소한 철의 시대가 우주적 시간의 완전한 끝이라 본 것은 분명해 보인다. 헤시오도스의 신화가 순환의 주기에 따라 철의 시대 이후에 다시 처음(황금시대)부터 반복해서, 또는 시계를 거꾸로 돌리듯 역순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해석은 플라톤이 『정치가』(Statesman)에서 상술하는 바와도 일치한다. 철의 시대의 무질서가 극에 달하면 그동안 세계의 운행을 방임하던 신이 개입해서 다시 질서와 영원한 생명의 시대로 되돌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이 바로잡는 시대에 현재의 시간은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황금시대에 “땅에서 태어났던 흰머리의 아이들”은 “다시 한번” 죽어서 땅으로 돌아간다.9) 과거의 사망(died)이 미래에 재현(again)됨으로써 헤시오도스와 플라톤의 우주는 과거의 시간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화적 시간의 방향성을 밝히는 일은 이 글에서 다루려는 쟁점이 아니지만, 각 시대별 선후관계에 대한 대립적인 기존 해석이 늙음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시대 간 차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각 시대가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타락을 거듭한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는 헤시오도스가 은의 시대와 청동시대 사이의 가치적 우열을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금-은의 관계와 영웅-청동의 관계를 일종의 동치관계로 본다. 달리 말하면 금의 시대가 은의 시대보다 우월한 기준과 같은 맥락에서 영웅시대는 청동시대보다 우월하다. 이때의 우열을 논하는 기준이란 디케(dikē)와 휘브리스(hubris)의 불균형이다. 즉 금의 시대는 은의 시대보다 휘브리스(오만, 지나침) 측면에서 더 우월했고, 영웅시대는 청동시대보다 더 정의로웠는데 이 또한 휘브리스의 차원에서의 상대적 가치평가라는 것이다.10) 그런데 철의 시대는 여타의 시대와 달리 휘브리스에 근거한 가치평가가 일관되지 않아서, 말기에 휘브리스가 지나친 수준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멸망에 이르게 된다. 바로 이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베르낭은 다섯 번째 시대가 다른 이전의 시대와 가장 뚜렷하게 차별화되는 지점으로, 노화가 가능해진 시간성에 주목한다. 금과 은의 시대는 고정되어 변화하지 않는 유년기와 생명력의 시대라면, 청동과 영웅시대는 유년기도 노년기도 경험하지 않는 성인기의 시대로 묘사된다. 우리가 통념적으로 이해하는 “늙고 소진되어가는” 시간적 쇠락은 오직 철의 시대에서만 경험하는 독특한 시간적 특징이다.11)

베르낭은 이러한 늙음의 시간성 때문에 철의 시대를 단일하지 않은 서로 다른 두 종족의 시대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헤시오도스가 살고 있는 철의 시대는 그래도 도덕규범이 살아 있고 선과 악이 공존하지만, 먼 미래의 철의 시대에는 아이들이 흰머리를 가지고 태어나며 부모자식 간의 유대관계가 해체되고 규범은 무시될 것이라고 예상된다. 반면 잰커(Andreas Zanker)는 헤시오도스의 시제 사용을 분석하여 철의 시대의 쇠락이 두 단계(초기와 말기)에 걸친 것이 아니라 좀 더 점진적일 것이라고 해석한다.12) 하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대체로 평자들은 헤시오도스의 금속 신화가 질서에서 무질서로 이동하는 쇠락의 역사를 담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 

한편 플라톤은 헤시오도스와는 달리 금속 신화의 하강의 시간성을 뒤죽박죽으로 재구성하여 쇠락의 관념 자체를 해체한다.13) 일례로 『정치가』에서 엘레아 출신 이방인의 목소리를 빌려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행복의 기준은 철학적 사유로부터 온다. 따라서 크로노스의 통치를 받은 황금시대는 역설적이게도 이후 제우스의 통치를 받은 세계보다 행복할 수 없다.14) 철학이 가능해진 제우스의 시대가 크로노스의 시대보다 행복하다면 황금시대는 더 이상 이상향이 아니게 된다. 

황금에서 철로 이어지는 하강의 시간관이 해체되는 것과 더불어 플라톤의 금속 신화는 헤시오도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늙음의 관념을 제시한다. 앞서 밝혔듯 우리가 이른바 늙음이라고 이해하는 노화의 과정은 오직 철의 시대에만 존재하는 특징적인 삶의 단계이지만, 플라톤은 헤시오도스의 『일과 나날』(Works and Days)에서 철의 시대 말기에 태어날 흰머리의 아이들을 황금 인류를 묘사할 때 차용한다. 늙지 않는 황금 인류에게 늙음의 요소를 추가하는 것, 특히 가장 양극단에 위치한 황금 인류와 철의 인류를 흰머리의 비유를 통해 묘사하는 것은 얼핏 보기에 부자연스러운 변용이다. 다수의 평자는 황금시대의 묘사가 철의 시대를 예견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지만,15) 늙음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황금시대에 늙음의 비유를 통해 철의 시대를 예견하는 것은 어쩐지 설득력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이 때문에 황금시대에 대한 플라톤의 평가가 일관되지 않고, 유토피아와 미성숙한 세계라는 상반된 해석을 오가며 모호한 입장이 공존한다고 평가받기도 한다.16)

개중 늙음의 비유인 흰머리를 황금 인류의 특징으로 묘사하는 것은 플라톤의 황금시대에 대한 비판적 사유가 드러나는 대목으로 생각된다. 엘 머(Dimitri El Murr)는 플라톤이 “흰머리”의 비유를 반복함으로써 황금시대를 헤시오도스보다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는 설득력 있는 해석을 제시한다. 요컨대 플라톤은 헤시오도스의 비오스 오토마토스(βίος αὐτόματος, 자동적인 삶) 개념을 문제적으로 재해석했다는 것이다.17) 비오스 오토마토스란 인위적인 개입 없이 우연에 의해 모든 작물이 풍요롭고 인간의 삶에 아무런 거슬림이 없는 유토피아적 상태를 의미하는 황금시대의 특징이다. 헤시오도스가 묘사하는 황금 인류는 노동과 출산으로부터 자유롭고, 늙지도 않고, 죽을 때는 마치 잠에 드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18) 반면 플라톤의 황금 인류는 태어날 때부터 어른의 모습으로, 출산을 통해서가 아니라 땅에서 태어나며,19) 점점 늙는 대신 거꾸로 어려져서 땅으로 돌아간다. 달리 해석해보면 황금시대의 흰머리를 한 아이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아이가 아니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숙하는 대신 미성숙해진다. 플라톤의 시각에서 보면 자연으로부터 풍요가 보장되는 유토피아적 삶은 황금 인류로부터 성숙의 시간을 박탈시킨다. 이와 대조적으로 철의 인류는 스스로의 노동으로 식량을 구하고 출산을 통해 후손을 봐야 한다. 철의 시대에 태어난 흰머리를 한 아이의 은유를 해석함에 있어, 결국 인간이 삶의 경험 없이 태어난 순간 이미 늙어버렸으며, 어른으로 성숙하여 이른바 늙음이 주는 장점을 박탈당한 것이라는 로(Christopher Rowe)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20) 이들은 부모 세대의 지혜를 받아들이지 않고 기존의 질서에 저항하는 특성을 타고 태어난다. 흥미롭게도 로의 이러한 설명은 플라톤이 묘사한 흰머리의 황금 인류에게도 적용 가능하다. 황금 인류 또한 늙음이 주는 성숙의 경험을 누리지 못한다.

『크라틸루스』(Cratylus)에서 소크라테스가 설명하길, 황금 인류는 죽어서 다이모네스(δαίμονες), 곧 신이 되었다고 하며, 이는 동음이의어로 현명한 자(δαήμονες)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를 풀어보면 황금은 곧 지혜롭고 선한 사람들을 비유하는 표현이고, 선한 사람은 죽어서 신(spirit)이 되며, 이는 곧 지혜로운 자가 된다는 뜻으로 읽힌다. 따라서 모든 선한 사람은 살아 있건 죽었건 간에 신의 특성을 지녔으며, 그러므로 비유적 차원에서 신으로 간주될 법하다.21) 그런데 죽어서 지혜로운 자가 된다는 말은 돌이켜 생각해보면 살아서는 (아직은)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치가』에서 플라톤이 황금 인류를 신들이 키우는 동물로 간주하며, 이 시대를 아무 노동도 고통도 모르기에 철학이 불가능한 시대였다고 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플라톤에게 지혜는 훈련을 통해서 오는 것이며 훈련은 시간과 함께 무르익으므로 지혜로운 정치가는 노년의 모습으로 형상화되곤 한다. 그러나 지배계층이 아닌 대다수의 노년은 적절한 훈련을 받지 못하고, 따라서 지혜를 얻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된다.22) 『법률』(Laws)에서 플라톤은 나이 든 부모는 신을 숭배하는 것에 버금가는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23) 하지만 몽텔스랭(Laetitia Monteils-Laeng)은 플라톤이 노인 부모를 제대로 보호하고 봉양하지 못하는 자녀에게 무거운 처벌을 내릴 필요를 느꼈다는 사실에 미루어볼 때, 역설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노인 인구가 처했던 현실이 결코 녹록치 않았으리라고 해석한다. 실제로 파킨(Tim G. Parkin)의 연구에 따르면 전근대, 특히 그리스 로마 시절에 노인이 특권을 지녔으리라는 짐작은 어디까지나 환상에 불과하다. 고대에 노인들이 전통적 가치를 더 많이 내재하고 경험이 축적되었다는 점에서 존중받기는 했으나, 그들의 쇠퇴한 신체 능력은 피치 못할 소외의 근거로 작용했다. 물론 현대와 달리 고대에는 급여노동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은퇴(retirement)의 개념 또한 없었고, 본인의 건강이 따라주는 한 지속적으로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었으므로 노인을 사회구조적으로 소외시키는 현대와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24)

플라톤이 생각한 이상적인 정치체제는 최선의 법률을 먼저 확립하고 그로부터 구축된 질서를 보전하는 보수적인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이 젊음보다 노년이 우월하다고 할 때의 우월성이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으로, 노년은 젊은이보다 더 오래 살았고 더 안정적이기 때문에 (법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우월한 것이지 절대적으로 우월한 것이 아니다. 요컨대 젊음이 기존 질서를 무너뜨릴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하고자 한 것이다.25) 달리 말해 만약 노인의 인생 경험이 법적 질서를 수호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늙음은 사회적으로 가치를 인정받기 어렵다. 따라서 젊음과 늙음은 나이라는 절대적 기준에 의해 구분된다기보다 사회적 질서를 얼마나 잘 지켜낼 역량을 내재하고 있는가, 또는 사회적 책무를 수행하는가에 의해 그 가치를 평가받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플라톤이 철의 시대와 황금시대에 각기 활용한 흰머리의 은유는 늙음이 사회적 질서(정의)에 부합하는가 그렇지 못하는가를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황금시대는 인간에게 지혜와 철학이 주어지지 않은 원시적 낙원의 모습을 하고 있으므로 이때의 늙음은 흔히 이해하는 질병과 죽음으로 가는 과정으로서의 늙음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가장 “완성된” 형태로부터 출발한다는 역설적 시간관을 형상화한다. 이때의 완성형 인간에게는 시간적 경험이 길러주는 지혜가 부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혜의 부재는 아이러니하게도 신적 정의의 증거가 된다. 황금시대에 우주는 신이 잡은 조종간에 의지해서 굴러가므로 인간의 지혜는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철의 시대의 아이들이 노인의 상태로 태어나는 것은 그들이 부모 세대의 지혜를 거부하고 도덕적 하극상과 문명적 퇴보를 체현하는 것이지만, 이는 기득권의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질서에 대응하는 민주주의적 평등성을 갈등의 중심으로 끌어오는 것이기도 하다.26) 플라톤이 해석하는 철의 시대에 이르러 늙음은 정의를 재단하기 위한 주요한 의제로서 급부상한다. 

결국 플라톤이 재해석한 금속 신화는 시대와 개인이라는 거시적이며 미시적인 차원 모두에서 시간적 선후관계를 비틀어내어 젊음에서 늙음으로 진행하는 순차적 성숙의 은유에 제동을 건다. 사람의 덕이란 노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모색되는 것이 아니므로 지속적으로 쇠락의 경향성에 역행하려는 철학적 노력이 요구된다. 이처럼 시간을 거스르는 덕성을 함양하여 국가적 정의를 추구하는 특성은 차후 논의될 쿳시의 작품에서도 발견되며, 커런이 형상화하는 노년의 플라톤적 토대를 짐작게 한다.

3. 늙을 수 있는 특권

그리스 당대에 구전되던 다섯 인류의 신화를 집대성한 원전으로 주로 헤시오도스의 『일과 나날』을 들지만, 쿳시의 소설은 헤시오도스 외에도 여러 고전을 망라하며 기원신화를(그리고 철의 시대의 은유를) 변주한다. 가령 “철의 시대. 그 뒤에는 청동시대. 얼마나, 얼마나 더 지나야 돌아올까, 부드러운 시대, 진흙의 시대, 대지의 시대의 순서가?”와 같은 구절을 보면 커런이 금속 신화의 시간관을 연상시키는 시대 구분을 원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27) 철의 시대에서 청동, 그리고 마침내 땅의 시대가 돌아온다는 커런의 생각은 토기에서 청동기, 그리고 철기로 이어지는 인류 역사의 발전 순서를 역행한다. 헤시오도스와 마찬가지로 여기에는 좀 더 나은 시대였던 먼 과거에 대한 향수가 있다. 태초에 흙처럼 부드러웠던 시대가 있었고, 인류는 차츰 칼처럼 날카롭게 벼려지며 서로를 해치게 되었다. 하지만 커런의 상상이 헤시오도스보다는 플라톤과 더 유사한 지점도 존재한다. 흙의 시대에서 철로 발전해온 인류는 다시금 그 순서를 연어처럼 거슬러 올라가야만 현 시대의 폭력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요컨대 금속 신화처럼 커런 역시 순환적 시간관을 보여준다. 늙음이 선적인 시간의 최후에 오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유년기를 준비하는 단계라는 인식은 노화의 진행 양상을 비정형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노년은 생각하기에 따라 절대적인 나이(산업화 이후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은퇴연령)가 아니라 상대적인 삶의 시기일 수 있고, 이는 “‘노인성’(노년성)은 연령과 상관없이 찾아오는 인간의 유한성, 혹은 ‘말년성’”이라는 박대현의 지적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28)

소설 『철의 시대』에서 커런의 유년기는 일종의 신화적 시대, 역사 이전의 황금기에 빗대어 표현된다. 고전학에 정통한 커런은 작중 여러 차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드』(Aeneid) 6권의 내용을 헤시오도스의 신화에 접붙인다. 커런이 기억하는 유년기란 “잠에 들어 있는 어린 시절이요, 원래대로라면 고난이 없고 열반으로 향하는 평탄한 길이어야 했을 삶의 도입부”였다.29) 그녀의 유년기는 황금시대가 그러했듯이 평화롭고, 살아 있되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소설에서 커런의 유년기를 인형에 빗대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녀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현실을 온전히 인지하지 못한 무지함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전반적인 묘사가 황금 인류의 비오스 오토마토스의 상태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수사법의 활용은 커런의 유년기가 개인의 차원에 한정되지 않게끔 종적 차원의 유년기로 확장시키는 장치가 된다.

적어도 우리가, 지나간 시대의 아이들인 우리가, 열반(Nirvana)에 이르도록 허락받을 수 있을까? 나[커런]는 회의적이다. 설령 정의가 통치한들, 우리는 지하세계의 첫 번째 입구 뒤에 갇혀 있을 것이다. 유충처럼 흰 기저귀를 찬 우리는 처치되어, 아이네이아스가 듣고 울고 있는 줄 착각했지만 사실은 영원히 칭얼거리는 젖먹이 영혼들과 함께하게 될 것이다. (…) 마치 영원히 해변가에 누워 있는 것처럼, 파도가 편안히 철썩이는 소리가 들리는 곳에 수천의 동족들과 함께 느릿느릿 반쯤 잠들어 있는 끝없는 일요일처럼. 인 리미네 프리모(in limine primo), 죽음의 경계에서, 삶의 경계에서. 바다가 게워낸 생명체들, 모래 위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미정의, 우유부단한,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이도저도 아닌 것들.30)

커런의 서술과는 달리, 아이네이아스가 지하세계에서 젖먹이 영혼들의 칭얼거림을 “울음소리로 착각”했다는 부분은 실제 『아이네이드』 원문에서 찾아볼 수 없다. 번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지하로 간 아이네이아스는 삶을 살아보지 못한 아이들의 혀짤배기 울음소리를 듣게 된다.31) 따라서 커런의 실수이거나 쿳시가 의도적으로 신화를 재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왜 하필 “칭얼거림”과 “울음소리”일까? 여기에는 소리를 내는 주체의 나이가 주요한 기준이 된다. 지적 발달 없이도 가능한 갓난아이의 칭얼거림과 달리, 인간은 훨씬 나이를 먹고 성숙해야 슬픔의 깊이를 이해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다. 그리고 커런의 상상 속에서 아이네이아스는 칭얼거림과 울음소리를 구분할 수 없다. 목소리로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문제는 소설에서 커런이 존의 할머니와 통화하고 어머니인 줄 착각하는 장면에서도 재등장한다.32) 소설은 목소리를 통해 세대 간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을 포착한다. 아이네이아스처럼 커런은 젊음과 늙음을 구분하지 못한다.

나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착각이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수준에서 머무르지 않고 소설에서 늙음과 성숙을 분리하여 사유하려는 철학적 시도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주목할 점은 황금 인류의 아이와 노인의 역전된 관계(아이는 어른으로 태어나 아이로 늙어간다는)가 유년과 노년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드는 주요한 은유로 사용된다는 사실이다. 그러기 위해서 황금 인류와 철의 인류의 높은 유사성이 강조된다. 예컨대 커런의 상상 속 아이네이아스가 마주친 아기 영혼들은, 신화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 어린 나이에 죽은 철의 종족처럼 보인다. 그러나 커런을 황금 인류에 빗대어 표현했기 때문에 커런이 죽어서 합류하는 지하의 아이들 역시 점점 나이를 거꾸로 먹다가 죽어서 땅으로 돌아가는 황금 인류의 신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더군다나 “설령 정의가 통치한들” 커런과 동류들이 지하에 갇힐 것이라는 구절은 신화 속에서 가장 정의로운 시대, “순수한 디케가 지배하는” 황금시대와 상통하는 설명이다.33) 이렇게 황금 인류와 철의 인류를 혼동시키는 방식의 비유를 통해 소설은 노년을 어린아이처럼, 그리고 어린아이를 노년처럼 구현한다. 어린아이 같은 노인과 노인 같은 어린아이, 둘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지혜로운지 모호해진다. 커런은 자신의 오랜 인생 경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사태에 직면한다. 그녀의 진정한 노인성은 결국 암에 걸리고 육신이 노쇠한 것보다 그녀의 발화가 이미 옛것이 되어버렸다는 무기력한 자기인식에서 온다. 그녀가 하는 말은 “여자의 말이기에 무시해도 되며, 늙은 여자의 말이기에 두 배로 무시해도 되고, 무엇보다 백인의 말”이기 때문이다.34)

죽음을 앞둔 노인인 커런의 상상 속에서 그녀의 세대, “지나간 시대의 아이들”은 이미 멸망한 황금 인류에 비유되며, 따라서 이미 그들의 시대는 만료된 과거다. 이는 일종의 시대적 미성숙을 겨냥하여, 그녀의 세대가 충분히 깨어 있는 상태로 살지 못했고 죽을 때까지 남아프리카의 현실에 관해 반쯤 잠들어 있었다는 통렬한 자기판단에서 기인한다. 커런은 늙었으나 어떤 면에서는 어린아이와도 같다. 그녀는 “아이들은 죽음이 뭔지 상상하지 못한다”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녀 자신이 죽은 아이들(베키와 존)을 본 뒤에 깊은 충격을 받고 현실에 눈을 뜬다.35) 물론 죽음은 결정적 계기일 뿐, 이러한 변화는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커런은 저항적이고 아이답지 않은 존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나, 그의 부재하는 어머니 대신 최소한의 선의를 베푼다. 그녀는 아이가 길 위에서 피를 흘리자 지혈하고, 구급차를 부르고, 병원을 찾아가 안부를 확인하고, 과일을 가져다준다. 무엇보다 존이 경찰의 추적을 받아서 사살당하기 전, 커런은 아이를 보호하고자 몸부림친다. 이 사건을 목도하기 이전까지 세상의 부조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커런의 미성숙함은 플라톤이 해석하는 황금 인류의 특징인 철학이 부재하는 특성을 환기한다. 황금시대에는 신적인 정의(디케)가 만물을 굽어보고 조율하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선을 궁구하는 철학이 필요 없기도 하거니와 애당초 철학적 사유의 전제조건인 성숙의 과정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커런의 성숙은 흑인 아이들이 처한 현실을 부족하나마 함께 체험함으로써 비로소 아주 늦은 나이에, 황금시대가 저문 이후에야 시작된다.

잠들어 있는 유년기의 은유는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추산해볼 때 20세기 초중반을 가리킨다. 훗날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실시하게 될 국민당(National Party)이 집권한 것은 1948년이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인종분리정책과 흑인 및 혼혈인에 대한 차별은 존재했다. 1970년대 이후 서구사회에서 은퇴연령인 60~65세가 노인을 정의하는 분수령처럼 자리잡으면서, 노동가치를 실현하지 못하는 나이 또는 연금을 수령하는 나이가 된다는 것이 구조적으로 늙음에 대한 통상적인 관념에 영향을 끼쳤다.36) 그리고 남아프리카에서 노동과 은퇴는 첨예한 인종차별의 화두 중 하나였다. 1965년경 공화국 정부는 백인, 갈색인37)과 인도계, 그리고 흑인 순서대로 4:2:1의 비율로 연금을 차등적으로 지급하기에 이르며, 이때의 논리는 인종별로 생활수준이나 수입이 다르다는 것이었다.38)

커런은 노동하지 않아도 되었던 과거(일종의 황금시대에 대한 은유)와 달리 앞으로 올 미래는 노동을 반드시 해야 하는 시대라고 버퀼에게 설명한다. 오늘날의 아이들은 술주정뱅이가 드러누워서 게으름 피우는 것(leeglopery)을 참아주지 못한다는 것이다.39) 그러나 그녀의 노동에 대한 언급은 역설적인 측면이 있다. 노동의 당위성과는 별개로, 커런 본인은 이미 정년퇴직을 하고 충분한 노령연금을 받고 있으며 그 자체가 그녀의 특권을 보여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공공영역에서 지급하는 퇴직연금이 없었는데, 노년의 국민들 대다수가 의지하는 것은 1928년에 처음 도입된 노령연금으로, 초기의 구상안에 따르면 백인과 갈색인만 수령 가능하고 흑인과 인도계 국민은 받을 수 없었다.40) 1944년 공화국 정부는 노령연금을 모든 인종에게 확대했지만 수령액은 여전히 인종 간 차이가 존재하다가, 1970년대 이후로 국제사회의 비판적 여론을 의식한 결과 차츰 격차가 줄어들어 1993년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균일해졌다.41) 하지만 그러한 수령액의 증가가 실질적으로 유색인 인구의 노인복지를 백인 인구와 동일한 차원으로 끌어올렸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이는 제도적으로 인종별 노인 부양에 달리 접근했기 때문이다. 법적으로는 1967년 노인법(Aged Persons Act) 제81호가 통과되면서 주로 백인에 한정하여 노인 인구의 부양 문제를 제도 안으로 편입하기 시작했다.42) 반면 흑인 커뮤니티에서는 노인 부양을 가족의 몫으로 떠넘겼고, 계원들(stokvel)끼리 서로 상조했으며, 정책적 차원에서는 충분한 부양책을 마련하지 못했다.43)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면, 커런이 늙고 병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체로 이미 사회적으로 늙을 수 있는 특권을 반증한다. 앞서 커런이 존의 할머니를 어머니로 오인했던 것도 한편으로는 출산 연령의 차이로 인해 흑인 인구가 훨씬 빨리 조부모가 되는 상황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인의 기준이 백인에게 훨씬 더 뒤늦게 적용된다고 볼 수도 있다. 일례로 존이 알코올성 치매가 의심되는 백인 노인과 함께 병동에 방치될 때, 두 인물의 대조는 노년이 박탈된 흑인들의 시대적 현실을 적시한다. 노령에 정신이 온전치 못한 백인이 있는 “장례식을 기다리는 대기실” 같은 병동에 단순 외상 및 뇌진탕 환자인 청소년을 함께 방치한다는 것은 젊은 흑인의 가벼운 상해가 나이 든 유병자와 유사하게 죽음에 가까운 것으로 취급당하는 실상을 폭로한다.44) 아파르트헤이트의 사회에서는 늙음을 제대로 대우받는 것마저 특권이 되며, 흑인 아이들은 아이인 상태로 이미 (병원과 보호시설의 기준에서는) 죽어가는 노인이나 다름없다. 노년은 사회적으로 규정된다. 백인은 육체적 쇠락을 늦춤으로써 노년의 도래를 지연시킬 수 있으나, 흑인은 일찍부터 사회구조적으로 말년성을 상정하는 것이다.

이처럼 늙음의 관념이 인종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는 점을 고려할 때 커런의 늙음을 마냥 긍정적인 깨달음의 원동력으로 해석할 수만은 없다. 플라톤이 황금시대의 은유를 통해 늙음의 부정성과 긍정성 모두를 고찰한 것과 흡사하게, 쿳시 또한 늙음에 대한 양가적 고민을 지속해나간다. 쿳시가 노년의 가치를 긍정한다고 보는 입장에서, 프리토리어스(Antoinette Pretorius)는 소설이 “노년을 유아화하는 편견을 해체”하고 “나이 든 여성의 몸을 불가피한 쇠락과 퇴보가 아니라 초월의 표식”으로 내세운다고 주장한다.45) 이러한 읽기는 노년의 지혜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이 듦의 가치를 추산한다. 특히 커런의 “임박한 죽음은 남아프리카의 민주화가 이루어지기 직전 정치체제의 죽음과 텍스트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쿳시가 “유년기와 노년기를 결합”시킴으로써 이러한 구조를 더욱 강화한다는 프리토리어스의 해석은 일리가 있다.46) 그러나 프리토리어스가 “유년기와 노년기를 결합”하는 방식을 해석할 때 금속 신화의 비유적 맥락을 염두에 두지 않았고, 그로 인해 두 가지의 한계점을 수반한다. 하나가 앞서 밝힌 늙음의 다양성(인종 간의 격차)의 문제를 놓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조로의 문제(젊은 세대의 말년성)를 등한시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진짜 노인인 커런의 죽음은 조숙해버린(상징적으로 흰머리를 가졌다고 볼 수 있는) 아이들의 죽음에 후행한다. 늙음과 죽음 사이의 근소해 보였던 거리는 커런의 예상보다 멀다. 아이들이 노인보다 먼저 죽는 사회에서 늙음의 문제는 한층 복잡해진다. 

4. 사망에서 희망으로, 노년에서 유년으로

소설에서 커런의 노년성은 그녀가 처한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할 핵심적 실마리로 제시되기는 하나, 대안으로서의 한계 또한 명확하다. 이는 쿳시가 그리스 신화에서 빌려온 희망의 양가성과도 상통한다. 헤시오도스는 『일과 나날』에서 다섯 인류에 대해 서술하기에 앞서 판도라의 이야기를 꺼내는데, 이때 희망은 늙음의 개념 이후에야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판도라가 등장하는 대목은 비록 앞뒤가 맞지 않은 서술적 디테일 때문에 종종 비판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왜 인간이 노동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47) 널리 알려진 신화에 따르면 판도라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신들에게 받은 선물상자를 열어보자 그 안에서 온갖 악이 뛰쳐나와 세상에 고통이 가득하게 되었다. 오직 희망만이 상자를 떠나지 않았기에 인간은 고통이 넘쳐나는 삶 속에서도 희망을 간직할 수 있었다고 한다. 철의 시대 이전까지 흥망성쇠를 겪은 네 차례의 시대에 노동이 불필요했던 것과는 달리, 오직 철의 인류만이 농토를 일구고 출산을 해야만 생계를 유지하고 후손을 볼 수 있었다. 판도라는 ‘선과 악이 불가분의 상태로 공존’하는 철의 시대의 고유한 특징을 예증하는 인간상이며, 노동과 노화가 사실상 인류에게 주어진 동일한 고통의 서로 다른 두 얼굴임을 알려준다. 결국 인간은 오직 늙음을 통해서만 희망을 발견하는 존재인 것이다.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희망”은 『철의 시대』에서 주인공의 가정부 플로렌스의 첫째 딸 호프(Hope)의 이름이다. 둘째 딸의 이름인 뷰티(Beauty)와 함께 두 아이는 커런에게 그리스적 알레고리처럼 다가온다. 커런이 플로렌스에게 호프와 아들 베키의 행방을 묻는 장면은 판도라의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에서 희망만이 인간의 곁에 남겨졌듯이, 플로렌스의 “희망”(고유명사와 일반명사, 둘 모두의 차원에서) 역시 가족의 품에서 보호된다. 그러나 판도라가 세상에 풀어놓은 고난이 없었더라면 희망도 없었을 것이기에, 쿳시의 희망 역시 불행에 힘입어 존재하는 비관주의적 낙관의 씨앗이다. “사랑스러운 악”이라 불리는 판도라는 인류에게 노화의 고통이 선행함으로써 후손을 통한 희망을 타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형상화하는 원형적 인물로 볼 수 있다.48) 따라서 소설 속 희망의 존재는 혼란스러운 시국의 막연한 개선을 약속한다기보다는, 희망 외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인간 존재의 비참한 상황을 강조하는 것에 가깝다. 이러한 연유로, 작중 소중하게 간직된 희망이 부질없게 느껴질 만큼 그 밖의 상실들은 너무나 뼈아프다. 아들 베키의 행방에 관해 플로렌스는 대답하지 못하고, 그 침묵은 이후 벌어질 베키의 때 이른 죽음을 예견하는 듯하다.49) 사회질서에 반항하는 청소년은 조숙하며, 그 결과 노인보다 빠르게 죽음으로 달려간다. 아이들의 조로증은 삶과 죽음의 질서마저 뒤흔든다. 어쩌면 인간은 태어나서 성숙하고 나이 들어 죽는 것이 아니라, 마치 늙어서 태어나 성숙하지 못한 채 땅으로 돌아가는 황금시대의 아이들처럼, 어떤 일관된 순서를 밟아서 죽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상상을 슬그머니 떠올리게 한다.

커런은 노인으로서 쌓아온 인생 경험을 앞세워, 아이는 아이답게 커야 하는데 플로렌스와 타바니 같은 어른들이 베키의 교육을 방임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또한 인종분리정책으로 인해 이동이 제한된 상황에서 플로렌스와 아이들을 자기 차에 태워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선뜻 제안한다. 물론 커런의 선의는 완벽하지 않고, 사람의 선의가 꼭 완벽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흑인 구역에서 문제가 생길 경우 언제든 본인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태도는 그녀의 선의가 어디까지나 자기보전의 영역 안에서 작동함을 그려낸다. 그녀가 노인의 지혜로 흑인 청소년들을 계도하려는 시도는 자기본위적이며 흑인 구역의 현실에 맞지 않은 철학과 신념을 전가하려는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 실제로 쿳시의 여타 작품에 등장하는 노년의 백인 인물들이 식민주의 계승자로서의 자기인식으로 인해 윤리적 고뇌에 직면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반성이 다분히 제한적일뿐더러 현실 차원의 개선을 그려내지 못한다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커런이 그저 연령에 기반한 우월의식을 표출할 따름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충분히 할 만하다.50) 그럼에도 커런의 분노는 미숙하고 불완전할지언정 정당하며, 사회의 부조리와 싸우는 데 필요하다. 그 분노가 윤리적으로 무결해서가 아니라 커런에게는 그 외의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흑인 구역에서 목격한 불의함은 그녀의 언어적 이해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며 본인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 노인의 철학은 인간이 역사의 조종간을 잡은 시대에 분명히 기여하는 바가 있다. 

이는 플라톤이 강조했던 수련을 통해 다듬어진 늙음의 사회적 가치를 닮았으며, 오늘날 노년학에서 말하는 노년초월(gerotranscendence)의 가르침과 맥락이 닿아 있다. 물질주의적 관심사에서 멀어지는 명상적 상태를 가리키는 노년초월의 개념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경험하는 노년의 시간 체험에 주목하며, 인생을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서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간관을 수반한다.51) 개인은 세대 간 계승을 가능하게 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히 미미한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노년초월의 특징이다. 이는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다음 세대의 주인공인 아이들에 대한 공감의 확장을 가능하게 한다. 경찰이 존을 체포하기 위해 커런의 집을 에워싸는 순간에 “저들이 너를 해칠 수 없게 할 거라고 약속”하던 커런의 말은 “거짓말”인 동시에 진실된 마음의 표출이기도 하다. “내 안의 무언가가 존에게 건네졌다. 나는 못 견디게 그를 껴안고 싶었고, 보호하고 싶었다”던 커런의 고백은, 이어지는 장면에서 경찰들에게 두 번이나 반복해서 “이 애는 아직 어린아이일 뿐이에요”라고 옹호함으로써 완성된다.52) 요컨대 커런에게 존은 흑인이나 불법 주거침입자, 총기를 무단으로 집 안에 반입한 불량청소년이기 이전에, 지켜주고 용서해야 할 어린아이인 것이다. 다음 세대와의 연결성을 중시하고 자기중심성이 쇠퇴하는 것이 노년초월의 특징임을 감안할 때, 커런의 노년성은 인종 간 이해와 공감의 단초로 작동한다.53)

그렇다면 커런의 불행은 본인의 공감이 차츰 확장되는 것과는 반대로 그녀의 경험이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되는 상황에서 얼마간 기인한다. 커런은 은퇴한 노교수에다, 그나마 가르치던 학문조차도 오래전에 사멸한 언어로 쓰인, 죽은 시인들의 글이다. 게다가 베키와 존처럼 “흰머리가 관자놀이에서 자라난” 청소년들은 노인의 초월적 깨달음 없이 지나치게 빨리 어른 몫을 하게 됨으로써 진짜 어른들의 지도를 받기를 거부한다. 나이 든 세대를 존중하지 않는 청소년 세대는 헤시오도스와 플라톤이 이야기했듯이 철의 시대가 쇠락에 접어들었다는 징후다. 존을 처음 마주쳤을 때 커런은 “오만하고 전투적인” 소년을 못마땅히 여긴다.54) 구세대가 이러한 저항적 신세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실제 공화국의 세대 간 갈등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이미 1970~80년대에 청소년들에게 중장년 이후의 세대는 새로운 정치체제에 방해가 된다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었다. 다수의 케이프타운 흑인 지구가 사실상 청소년 범죄자 패거리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이른바 흑인소년범(tsotsis)이라 불리던 이들이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함에 따라 나이 많은 어른들이 정치적 목소리를 잃어버린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55)

따라서 소설에서 플로렌스나 타바니 같은 비교적 젊은(30~40대) 흑인 기성세대들이 아이들의 정치적 투쟁을 옹호하는 것은 백인 노인인 커런의 불만을 더욱 극적인 세대/인종 간 격차에서 비롯된 것으로 만든다. 커런은 신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늙어버린 느낌을 받으며, 또한 백인이기에 더더욱 흑인 인물들로부터 배척된다. 흑인과 백인 모두가 차세대를 키우는 일에 실패하고 있다는 관점은 꽤나 그럴듯하게 들린다. 일례로 빔버그(Christiane Bimberg)는 쿳시의 소설에서 그려지는 흑인과 백인 양측 모두의 유년기가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 본연의 목적을 상실하여 “삶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으며, 그리하여 인종을 막론하고 아이들의 “도덕적 타락”으로 이어진다고 본다.56) 분명 커런이 경험한 것들을 듣고 배워야 했을 딸은 커런의 곁에 없으며, 노년의 지혜는 정당한 계승자로부터 단절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타락”으로 보아야 할지는 의문이다. 적어도 소설은 약간 모호한 입장을 취한다. 

그렇다면 흑인 아이들의 조숙성을 쿳시는 어떻게 바라보는가? 커런과 쿳시의 입장을 반드시 동일시할 필요는 없겠지만, 조숙하여 일찍 죽음에 이른 베키와 그의 친구들이 다시금 유년기의 얼굴을 되찾는 일련의 과정은 커런의 시선이 조로증을 시대적 상실의 한 형태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살아생전 아이이기를 거부하던 베키의 얼굴은 사후에 “다시 어린아이가 되었”으며, 커런은 그 어린아이의 얼굴을 “애도”하지 않을 수 없다.57) 아이들을 노인보다 빠르게 늙혀 죽이는 시대에 조숙함은 곧 애도의 대상이다. 이 점에서 쿳시는 그리스적 철의 세계로부터 중요한 분기점을 만들어낸다. 도덕적 타락과 시대적 멸망으로 이어지는 신화 속 철의 인류와 달리, 소설 속 흑인 인물들의 망실된 유년기는 커런의 애도를 통해 종적 한계를 확장시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달리 표현하면, 커런의 도덕적 성숙은 아이들의 상실이라는 토대 없이는 이른바 플라톤이 주장한 노인의 철학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죽은 베키의 얼굴 앞에서 비로소 커런은 자신의 인생 경험이 다음 세대보다 앞서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음 세대의 상실로 말미암아 가능해졌음을 인지한다.

그 아이[베키]가 이제 땅에 묻혔고 우리는 그 위를 걸어가네요. 당신께 말씀드리자면, 나는 이 땅, 이 남아프리카 위를 걸어다닐 때면, 검은 얼굴들 위를 걸어가는 느낌이 자꾸만 들어요. 그들은 죽었으나 영혼은 떠나지 않았어요. (…) 다시 일으켜 세워질 것을 기다리며 (…) 철의 시대가 돌아오길 기다리며.58)

이제 역사적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지 않고 미래의 땅 위에 과거가 걸어간다. 어쩌면 이러한 표현조차도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커런의 시간은 남아프리카 땅의 지층처럼 차곡차곡 쌓이면서 언젠가 다가올 미래에 다시 한번 화석을 발굴하듯 과거와 미래의 공존을 상상한다. 지금은 철의 시대이면서 동시에 철의 시대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다른 시대다. 쿳시의 세계에서 황금 종족과 철의 종족은 아이러니한 공존을 하고 있다. 서로가 자신의 시대가 이미 끝났거나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헤시오도스와 플라톤의 신화가 놓친 인종과 시간의 문제를 통렬히 짚어낸다. 황금 인류와 철의 인류는 분리된 세계에서 서로 다른 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며, 커런은 자신을 황금 인류와 철의 인류 모두에 빗대어 표현한다. 쿳시의 황금시대는 먼 과거가 아니라 철의 시대의 다른 이름이 된다. 따라서 각각의 개인이 서로 다른 시간에 머무르며 공존하는 이 시대에 무엇이 정의로운가를 규정하는 일은 치열한 쟁점일 수밖에 없다. 

5. 나가며

과연 한 인종의 노년의 지혜가 다른 인종에게도 지혜로 간주될 수 있는가? 황금시대의 가르침이 철의 시대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 일단은 이러한 의문점에 대해 조금은 회의적인 대답만이 주어진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베키와 존에게 무기를 내려놓고 학교에 가라는 커런의 가르침은 흑인 커뮤니티가 듣기에 기존 아파르트헤이트의 부조리를 지속시키라는 뜻에 불과하다. 베키는 학교에 가는 것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우리를 적응시키려는 것”이라고 반감을 드러낸다.59) 물론 커런이 완전히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다. 베키와 존은 커런이 오랜 경험으로부터 얻은 지혜와 조언을 무시하고 섣부른 만용을 부리다가 목숨을 잃는다. 그러나 커런의 조언대로 그들이 무기를 포기하고 학교에 돌아갔다고 한들 그들을 차별대우하는 땅에서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위의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노년의 지혜가 유년에게 계승된다는 일방향적 시간을 전제하는 것 자체가 오류일 수도 있다. 커런의 노년성에 대한 작중인물들의 비존중은 한편으로는 폭력이지만 동시에 차후 커런을 새로운 인식의 지평으로 이끌어줄 원동력이기도 하다. 삶의 지혜는 세대 간에 계승되기보다는 다양한 층위에서 여러 갈래로 흐른다. 아이들을 통해 새롭게 성장하는 커런과 시대적 조로증에 걸린 베키와 존은 노년과 유년의 역설을 첨예하게 그려낸다. 커런은 황금시대가 이미 지나갔으며 자신이 세상의 기준에서 너무 늙어버렸다고 느낀다. 하지만 정작 커런이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한 베키와 존은 반대로 자신들이 시간에 뒤처졌고 따라서 학교에서 교육이나 받으며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리다는 것은 세상의 자원을 차지하는 전쟁에 너무 늦게 참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후발 주자는 선발 주자와 같은 전략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 쿳시가 생각하는 철의 시대에서 아이들은 어른의 지혜를 답습하지 않고 전통을 거부한다. 그리하여 개인은 죽고 종이 생존한다.


1) Helen Small, The Long Life (Oxford and New York: Oxford UP, 2007) 24면.

2) 같은 책 35면.

3) 커런은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이름의 철자를 “Vercueil, Verkuil, Verskuil”(37면) 등으로 추측하고, 이후 첫 번째 철자 “Vercueil”만이 지속적으로 사용된다. 『철의 시대』 국역본에서 이 이름을 퍼케일로 번역했으나, 이 글에서는 샤피로(Gary Shapiro)가 “Vercueil”의 언어유희적 연원을 사선 기호(slash, /)를 뜻하는 단어 “virgule”로 제시한 바가 설득력 있다고 보았다. 또한 샤피로는 커런이 버퀼을 종종 베르길리우스와 연관지어서 서술한다는 측면에서 버퀼과 베르길리우스의 영어식 발음인 버질(Vergil 또는 Virgil) 간의 발음상의 유사성을 포착한다. 좀 더 자세한 논의는 Gary Shapiro, “Reading on the Edge of Oblivion: Virgil and Virgule in Coetzee’s Age of Iron,” Literary Studies and the Pursuits of Reading, ed. Eric Downing, Jonathan M. Hess, and Richard V. Benson (Rochester, NY: Camden House, 2012) 233~48면 참조.

4) Alice Hall, “Dialectics of Dependency: Ageing and Disability in J. M. Coetzee’s Later Writing,” Disability and Modern Fiction: Faulkner, Morrison, Coetzee and the Nobel Prize for Literature (Basingstoke: Palgrave Macmillan, 2012) 92~144면.

5) Erik Grayson, “The Ones Who Cry”: Aging and the Anxiety of Finitude in J. M. Coetzee’s Novels of Senescence (Diss.: State U of New York at Binghamton, 2010).

6) Blossom Fondo, “Coming to Terms: Ageing and Moral Regeneration in J.M. Coetzee’s Age of Iron and Elizabeth Costello,” Imagining Ageing: Representations of Age and Ageing in Anglophone Literatures, ed. Carmen Concilio (Bielefeld: transcript Verlag, 2018) 137면.

7) Gillian Dooley, “‘Hades This Place, and I a Fugitive Shade’: Classical Cultures and Languages in J. M. Coetzee’s Age of Iron,” English in Africa 43.1 (2016) 103면.

8) Jean-Pierre Vernant, Myth and Thoughts among the Greeks (1983; Brooklyn: Zone Books, 2006) 28면.

9) 원문은 다음과 같다. “Those newly born from the earth with hoary hair died and passed below the earth again.” 『정치가』의 판본은 Plato, Plato in Twelve Volumes, trans. Harold N. Fowler (Cambridge: Harvard UP; London: William Heinemann Ltd., 1921) 273e면 참조.

10) Vernant, 앞의 책 29면.

11) 같은 책 45~46면.

12) Andreas T. Zanker, “Decline and Parainesis in Hesiod’s Race of Iron,” Rheinisches Museum Fur Philologie 156.1 (2013) 1면.

13) Helen Van Noorden, Playing Hesiod: The ‘Myth of the Races’ in Classical Antiquity (Cambridge: Cambridge UP, 2015) 150면.

14) Plato, 앞의 책 272b~d면.

15) Van Noorden, 앞의 책 149면.

16) 같은 책 150면 각주 188.

17) Dimitri El Murr, “Hesiod, Plato, and the Golden Age,” Plato and Hesiod, ed. G. R. Boys-Stones and J. H. Haubold (Oxford: Oxford UP, 2010) 284~94면.

18) Hesiod, “Works and Days,” The Homeric Hymns and Homerica, trans. Hugh G. Evelyn-White (Cambridge, MA: Harvard UP, 1914) 113~15면.

19) Plato, 앞의 책 269b면.

20) Christopher Rowe, “On Grey-Haired Babies: Plato, Hesiod, and Visions of the Past (and Future),” Plato and Hesiod, ed. G. R. Boys-Stones and J. H. Haubold (Oxford: Oxford UP, 2010) 305면.

21) Plato, 앞의 책 398b~c면.

22) Laetitia Monteils-Laeng, “Platon et la Vieillesse: Idéalisation du Grand Age ou Valorisation de l’Ancien?,” Revue de Philosophie Ancienne 37.2 (2019) 158~60면.

23) Plato, 앞의 책 930e~931a면.

24) Tim G. Parkin, “Ageing in Antiquity: Status and Participation,” Old Age from Antiquity to Post-Modernity, ed. Paul Johnson and Pat Thane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998) 35~39면.

25) Monteils-Laeng, 앞의 책 173~78면.

26) 반 노어든(Helen Van Noorden)은 헤시오도스가 『일과 나날』에서 취하는 수평적 서사구조가 플라톤의 금속 신화 재해석에도 얼마간 영향을 주었다고 봄으로써, 전통적 질서를 수호하는 노년에 대한 옹호가 반드시 평등한 민주주의적 관계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기존 조언문학의 수직적 특징(아버지가 아들에게 또는 현자가 왕에게 하는 설교 형식)과 사뭇 다른 헤시오도스의 독특한 평등성(내재적 위계가 없는 형제 간의 조언)을 플라톤이 대담 형식을 통해 일정 부분 수용하고자 한 것이라는 해석은 설득력이 있다. Van Noorden, 앞의 책 165면 참조. 비록 플라톤은 당대 민주주의에 비판적이었으나, 그가 철의 시대를 재구성한 서사에는 수평적 의견교환을 긍정하려는 태도가 발견된다.

27) J. M. Coetzee, Age of Iron (1990; New York: Penguin Random House, 2018) 50면.

28) 박대현 「한국노년문학과 말년성(lateness)의 지형학: 노년문학연구의 비판적 검토와 논의 확장을 위한 시론(試論)」, 『한국문학논총』 79 (2018) 399면.

29) 원문은 다음과 같다. “A childhood of sleep, prelude to what was meant to be a life without trouble and a smooth passage to Nirvana.” Coetzee, 앞의 책 92면.

30) 같은 책 92면.

31) 인용은 6권 426행. 번역은 Virgil, Aeneid, trans. H. R. Fairclough (1918; Cambridge, MA: Harvard UP, 1954) 영역본을 참조.

32) Coetzee, 앞의 책 67면.

33) Vernant, 앞의 책 32면. 원문은 “the reign of pure dikē.” 물론 젖먹이 영혼들을 황금 인류로 보는 해석에도 맹점은 있다. 황금 인류는 죽어서 “땅 위의”(epichthonian, 30면) 다이모네스가 되었다는 점에서 커런의 “땅 밑의” 영혼에 대한 설명과 불일치한다. 하지만 다섯 인류의 신화가 저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황금 인류가 다이모네스가 되기 전 일단 땅으로 돌아가는 것을 고려한다면 땅 아래의 젖먹이 영혼들을 다이모네스가 되기 전의 황금 인류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

34) Coetzee, 앞의 책 79면.

35) 같은 책 16면.

36) Paul Johnson and Pat Thane, ed., Old Age from Antiquity to Post-Modernity (London: Routledge, 1998) 3, 223면.

37) Brown people. 남아프리카의 다인종혼혈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컬러드(coloured)라고도 부른다.

38) Marianne S. Ulriksen, “A Racialised Social Question: Pension Reform in Apartheid South Africa,” One Hundred Years of Social Protection: The Changing Social Question in Brazil, India, China, and South Africa, ed. Lutz Leisering (Cham: Palgrave Macmillan, 2021) 244면.

39) Coetzee, 앞의 책 72면.

40) Tukishi Elias Manamela, South Africa’s Occupational Retirement System: A Comparative Social Security Perspective, Diss. U of South Africa (2015) 140면.

41) Antoinette Lombard and Elma Kruger, “Older Persons: the Case of South Africa,” Ageing International 34 (2009) 126면.

42) 같은 글 121면.

43) E. Thomas, “Rotating Credit Associations in Cape Town,” South Africa’s Informal  Economy, ed. Eleanor  Preston-Whyte and Christian Rogerson (Oxford: Oxford UP, 1991) 292~93면.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오늘날에 이르러 노인들은 연금을 친지들과 나눠 써야 한다는 도의적 압박을 느끼고, 실제로 자신들의 연금을 때로 십수 명에 육박하는 가족구성원과 나눠 씀으로써 자존감과 사회적 존경을 얻는다. 관련 연구로 Andreas Sagner and Raymond Mtati, “Politics of Pension Sharing in Urban South Africa,” Ageing and Society 19.4 (1999) 393~416면 참조.

44) Coetzee, 앞의 책 77면.

45) Antoinette Pretorius, “‘I Become Shameless as a Child’: Childhood, Femininity and Older Age in J.M. Coetzee’s Age of Iron,” Ageing Women in Literature and Visual Culture: Reflections, Refractions, Reimaginings, ed. Cathy McGlynn, Margaret O’Neill, and Michaela Schrage-Fruh (Cham: Palgrave Macmillan, 2017) 255~56면.

46) 같은 글 259면.

47) Lilah-Grace Fraser, “A Woman of Consequence: Pandora in Hesiod’s Works and Days,” The Cambridge Classical Journal 57 (2011) 11면.

48) Vernant, 앞의 책 43면. 원문은 “the loveable evil.”

49) Coetzee, 앞의 책 91면.

50) 가령 안선영은 『수치』(Disgrace)의 백인 남성 주인공 데이비드 루리의 자기반성과 동물에 대한 윤리적 깨우침이 인종차별적 사고를 토대로 한 것으로 보이며, 그로 인해 동물과 인간의 윤리적 문제에 어느 쪽으로나 부적절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Sunyoung Ahn, “Animal Ethics and the Human Question in J. M. Coetzee’s Disgrace,” TheJournal of English Language and Literature 67.1 (2021) 7면.

51) Lars Tornstam, “Maturing into Gerostranscendence,” The Journal of Transpersonal Psychology 43.2 (2011) 169면.

52) Coetzee, 앞의 책 152~53면.

53) Tornstam, 앞의 글 169, 171면.

54) “I did not like that look: arrogant, combative,” Coetzee, 앞의 책 47면.

55) Sagner and Mtati, 앞의 글 397면.

56) Christiane Bimberg, “Perversions and Reversals of Childhood and Old Age in J. M. Coetzee’s Age of Iron,” Connotations 15.1~3 (2005) 64면.

57) Coetzee, 앞의 책 125면.

58) 같은 책 125~26면.

59) 같은 책 67면.

│최지원│

崔智媛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강사. 최근 논문으로 「무덤의 낙원과 죽음의 유충: 쿳시의 고딕적 세계」(202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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