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밖 57호][특집] “말할 수 없는 소녀”: 루이즈 글릭과 노년의 시간성/ 정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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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귀

1. 들어가며

2023년 10월 작고한 미국의 시인 루이즈 글릭(Louise Glück, 1943~2023)은 조로(早老)의 시인이다.1) 스물여덟 번이나 출판사의 문을 두드린 끝에 가까스로 출간된 첫 시집 『맏이』(Firstborn, 1968)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이미 다 살아버린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하다. 품었던 사랑을 잃고, 사랑에 배신당하고, 가난에 점령된 청춘들의 이야기는 이미 서늘하고 초라한 늙음과 죽음에 포획되어 있다. 첫 시집의 첫 시 「시카고 기차」(“The Chicago Train”)에서는 세상 무서울 것 없이 한창 나이인 아비의 초라한 여정이 “헐벗은 해골을 기댄” 채 잠들어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가장자리」(“The Edge”)에서 신혼의 아침에 남편의 팽팽한 허벅지가 자기 몸에 와 닿는 걸 느끼는 젊은 아내는 “심장을 침대 헤드보드에 묶”으며 집과 함께 불구로 늙어간다.2) 세계의 끝으로 내몰린 기진(氣盡)한 군상들의 고독한 외침은 젊으나 이미 늙고 병든 이들이 내지르는 신음소리, 상처 입어 죽어가는 흐느낌으로 울린다.3)

늙음과 노년의 주제가 나이 든 시인들만의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 예이츠(W. B. Yeats)는 「당신 늙으면」(“When You Are Old”)을 26살에 썼고 늙음의 주제를 평생에 걸쳐 다룬다. 예이츠에게 늙음이 모드 곤(Maud Gonne)과의 관계 안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드러난다면, 젊은 나이에 노년의 시를 많이 쓴 또 다른 시인 엘리엇(T. S. Eliot)의 경우 노년은 퇴락한 문명을 상징하는 은유로 동원된다. “나 늙어가네, 늙어가네”(I grow old … I grow old) 한탄하는 프루프록(J. Alfred Prufrock)의 늙음은 시인이 경험한 진짜 늙음이라기보다는 사랑의 불능과 시절의 불화에 대한 자괴감에 가까우니 말이다. 최근의 현대시 비평 연구동향에서 노년 문제는 한층 중요해졌는데, 젊음이 즐겨 가져다 쓰는 시적 소재의 차원이 아니라 생의 주기 안에서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늙음과 나이 듦의 문제가 의료인문학과의 관련 속에서 논의되기도 한다. 혐오와 기피 대상이 된 노년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구체적으로는 치매 등의 질환과 연결하여 사례연구 중심으로 진행되고, 노년에 겪는 육체적·심리적 위기를 그리는 효과적인 형식으로 서정시의 가능성을 새롭게 탐색하는 글도 눈에 띈다.4)

이 글에서 글릭을 두고 노년의 시간성을 이야기할 때는, 다른 시인들처럼 치매나 망각 등 노년의 경험‘에 대한’ 시를 썼다거나 젊음 가운데서 늙음을 ‘상상하는’ 시를 쓴 층위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유년기에 유난히 일찍 죽음을 알아버린 이, 언니의 죽음 이후 태어난 생명으로 처음부터 상실에 빚지고 태어난 이, 열 살 무렵부터 늙음과 죽음의 문제에 몰두하고 청소년기에는 거식증으로 인해 죽음을 대면한 자로서 글릭이 거꾸로 살아낸 어떤 몰락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202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에도 자신은 ‘시인-되기’를 향해 걷고 있다고 말한 글릭의 시 세계를 되짚어보면서 이 글은 시인이 통과하고 해석한 노년과 늙음, 대개는 죽음으로 가까이 가는 생의 마지막 주기로 생각하는 그 단계를 새롭게 바라보고 끌어안는 작업에 가깝다. 

글릭에게 노년은 극복이나 회피, 혐오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이 지나는 생의 주기에서 어쩔 수 없이 만나는 단계이고 알 수 없는 타자이지만 회억과 염오가 뒤섞인 채 도무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마녀 같은 시간이 아니다. 그에게 노인은 잉여이자 과잉으로 남은 존재, 피하고 싶은 대상이 아니다. 노년은 나를 해치는 질병의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노년은 기억 속에서 반복적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기원의 지점과 연결된다. 노년은 죽음 이후의 삶을 산 시인이 현재와 만나는 자리이고, 지금-여기의 삶의 방식에 대해 독특한 전망을 열어주는 핵심적이고 신비로운 장치다. 이 글에서 말과 침묵, 생과 사의 명확한 경계를 그을 수 없이 알 수 없는 상태에 놓인 글릭 시의 여성 주체를 아감벤(Giorgio Agamben)이 포착한 ‘말할 수 없는 소녀’(the unspeakable girl) 코레와 연결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5)

글릭의 시를 통해 노년의 시간성과 ‘말할 수 없는 소녀’ 코레(페르세포네)를 겹쳐 사유할 수 있다고 착안한 것은 코레가 죽음과 생, 두 세계를 동시에 경험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생명력’(vitality)을 뜻하는 ‘코레’(kore)의 목소리는 페르세포네-데메테르 신화가 집중적으로 재현되는 『아베르노』(Averno, 2006)뿐만 아니라 마지막 시집 『협동 농장의 겨울 요리법』(Winter Recipes from the Collective, 2021)에까지 계속 들린다.6) 그 목소리는 견고한 말로, 때로는 침묵의 형식으로, 때로는 잘 알아듣지 못할 자연의 소리 등으로 다양한 옷을 입는다. 젊었으나 늙은, 늙었으나 젊은, 여자이면서 남자인,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목소리를 지닌 말할 수 없는 소녀 코레의 생명력은 글릭이 몸소 경험한 때 이른 늙음인 동시에 죽음을 넘어서게 한 힘이다. 일상의 나날 속에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주되는 말할 수 없는 소녀의 생명력은 침착하고 규칙적인 반복 운동으로 늙음의 시간을 살아내도록 이끌고 독자는 그 신비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이 글은 글릭이 그리는 시의 풍경을 통해 노년을 혐오와 기피 또는 극복의 대상이 아닌 하강운동 안에서 거듭 피어나는 생명력으로 끌어안고자 하는 시도다. 젊음은 젊을 때 알 수 없는 것, 삶은 삶 속에서 알 수 없는 것, 죽음은 완벽히 낯선 타자다. 글릭이 시에서 그려 보인 노년의 시간성을 돌아보며 지금 시대, 별 반성 없이 소모되고 질타받고 경시되는 노년, 그 고약하고 고통스럽고 불쾌한 상투어를 새롭게 읽고 해석하여 다른 시선을 품어보는 것, 이 글이 도달하기를 희망하는 소박한 지점이다. 

2. 막간: 말할 수 없는 소녀의 곤경 

첫 시집 『맏이』부터 마지막 시집 『협동 농장의 겨울 요리법』에 이르기까지 총 13권의 시집을 냈고 그간 퓰리처상,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상, 노벨문학상 등을 수상한 글릭은7) 20세기 미국시의 역사에서 어느 특정한 유파로 분류되지 않는 시인이다. 서정시가 홀대받는 분위기 속에서 꿋꿋하게 서정시 장르를 고수하면서 개인의 목소리에 의지해 목소리를 다양하게 변주하는 방식으로 시를 썼다. 단일한 서정 주체라는 서정시의 오랜 규범에 새로운 문법을 더한 이가 글릭이다.8) 첫 시집이 고백시파의 아류라는 아픈 평가를 받은 이후 글릭은 시의 형식에 대한 고민을 지속적으로 하면서 고백의 외피를 두르지 않고 자기 경험이 투사된 고백시를 썼는데, 그 직간접적인 고백의 형식 속에서 죽음의 그림자과 늙음에 대한 사유는 초기부터 후기까지 끈질기게 드리운다. 어느 인터뷰에서 시인은 열 살 이후 늘 죽음을 생각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9) 상실에 대한 고찰이 주를 이루는 글릭의 시에서 아이는 배 속에서 죽고, 태어나자마자 죽고, 물에 빠져 죽고,10) 엄마는 돌봄보다는 죽음의 전문가로 호명된다.11)

실제로 어려서 먼저 죽은 언니를 잊지 못하는 부모님 때문에 글릭은 태어나면서부터 언니의 죽음과 겹으로 함께 살았다. 엄마의 인정과 시선을 갈구하는 아이로 자라면서 지독한 결핍과 상실을 앓았던 글릭의 시가 가족 서사에 집중하는 것도 평자들은 일정 부분 거기서 이유를 찾는다. 『아베르노』의 여러 시편에서 보듯 9·11 등 사회적 재난을 그릴 때조차도 친구 또는 가족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재배치되는 것 또한 그 관점에서 이해 가능하다.12) 관계에 대한 성찰이 주를 이루는 글릭의 시들은 가정생활을 중심으로 성장과 갈등, 상실과 늙음이 극심한 내핍을 견디는 마음 풍경으로 그려진다. 

글릭에게 시간은 흡사 버튼(Benjamin Button)의 시간처럼 거꾸로 가는 모양새로 보인다.13) 초기 시에서 플라스(Sylvia Plath)나 섹스턴(Anne Sexton)과 같은 당대 고백시파 시인들처럼 생을 다 살아버린 늙은 목소리를 담아냈다면, 뒤로 갈수록 신화 속 인물들을 현대적으로 변주한 시나 일상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이야기 시를 통해 삶의 여러 층위에서 드러나는 비극들을 다채롭게 담아낸다. 생의 후반부로 갈수록 문장이 단순해지는데, 단순함 속에서 대명사의 활용에 의해 의미는 복잡해지고, 환상적인 요소들이 가미되면서 시는 실험적으로 젊어지는 느낌을 준다. 시인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주면서 미국시의 역사에 글릭을 단단히 자리매김시킨 『야생 붓꽃』(Wild Iris, 1992)에서는 단일한 서정 주체가 아니라 한 목소리 안에 여러 겹의 목소리를 만드는 방식이 시도되었고, 이야기 시의 틀 속에서 신화 속 인물들을 다양한 현대의 일상 안에 초대하는 분방한 상상력이 매 시집마다 개성 있는 다른 무늬들을 만든다.14) 첫 시집에서 어둡고 암울한 목소리로 마치 다 살아버린 듯 생중사(生中死)의 시간을 견디던 인물들은 뒤로 갈수록 점점 더 태연하고 말끔하고 심드렁하게 일상 속의 이웃, 그 속의 나와 너로 자리잡는다. 

2020년 스웨덴 한림원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가 극찬한 『아베르노』에서 글릭은 페르세포네-데메테르 신화를 현대적으로 변용한 시편들을 선보이면서 ‘늙음’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여기서 글릭은 딸과 엄마, 처녀와 여인, 남성과 여성 등 익숙하고 선명한 이분법으로 갈라지는 대상을 겹쳐 사유하면서 혐오와 기피의 대상인 노년과 늙음의 문제를 묵직한 주제로 끌고 온다. 글릭이 특별히 좋아했던 후기 시편 『신실하고 고결한 밤』(Faithful and Virtuous Night, 2014)과 한동안 작품을 쓰지 못하다가 코로나 팬데믹 이후 힘들게 완성한 마지막 시집 『협동 농장의 겨울 요리법』은 죽음을 앞두고 죽음을 준비하는 목소리로 가득하지만, 이야기는 자주 동화나 우화의 틀을 입고 전해진다. 단순한 늙음이든, 갑자기 맞는 병이든, 돌이킬 수 없는 지독한 별리든, 죽음을 기다리는 일 말고는 남은 일이 별로 없어 보이는 시간의 지층에 새겨진 시의 풍경은 어린 날 글릭이 죽음처럼 통과했던 한 시절, 말을 못하고 먹지도 못했던 시절과 고스란히 중첩된다. 

글릭의 시가 일찌감치 도달하고 통과했던 어떤 정신적인 늙음을 지나, 노년의 시간은 시인 자신이 직접 늙음을 경험하기 이전부터 가족관계 안에서 다양하게 그려진다.15) 아버지의 늙음과 병환을 지켜보고 마침내 죽음 이후 그를 애도하는 『아라라트산』(Ararat, 1990)에서 글릭은 아버지를 떠나보면서 어린 날 자신을 사로잡았던 고통의 뿌리를 비로소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된다.16) 「거울 이미지」(“Mirror Image”)에서 시인은 “오늘 밤 나는 어두운 창문에서 나 자신을 / 아버지의 이미지로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삶은 / 이렇게 속절없이 지나갔다, / 죽음을 생각하며, / 다른 감각적인 것들은 배제하고”(237면)라며 아버지의 늙음과 죽음을 통해 아버지를 꼭 닮은 자신의 늙음을 미리 바라본다. 죽어가는 아버지, 죽은 아버지를 통해 바라보는 노년은 통렬한 회한에 갇혀 있는 시간이며, 다른 이들까지 함께 죽음을 앓게 만드는 공동의 시간이다. 「아마존 여전사들」(“Amazons”)에서 “우리 가족에겐 민감한 시기, 늘 그랬다 / 우리도 또한 죽어가고 있으니, 부족 전체가”라는 서글픈 초상으로 드러나듯, 한 가장의 병은 온 가족의 병이 되고, 그의 죽음은 곧 온 가족의 죽음이 된다(239면). 

아버지의 죽음, 또는 죽어가는 아버지를 통해 바라보는 노년은 그럼에도 여전히 시인에게는 ‘알 수 없음’으로 남는다. 아버지가 떠난 후 살아 있는 아버지 친구들이 서로를 끌어안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 「애도」(“Lament”)에서, 해가 지고 소슬한 저녁 바람에 여인들의 숄이 흔들릴 때, “복된 삶”은 “현재에 존재한다는 뜻”으로 드러난다. 건조하게 장례식 풍경을 그리면서 시의 말미에 살짝 드러나는 시인의 통한은 살아 있는 이들 속에 아버지의 부재를 받아들이면서 삶을 다시 본다(236면). 죽음이 가져오는 아버지의 부재는 슬프지만, 동시에 죽음은 아버지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다시 쓰는 딸-시인에 의해 아버지의 늙음 또한 재해석되는 것이다. 시집 후반부에 시인은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생의 비밀, 상처와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그리고 있는데, 시집의 마지막 시를 보자. 

오래전, 나는 상처를 입었다. 나는 

살았다 복수하려고

아버지에게, 그 시절의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그 시절의 나 때문에. 까마득한 옛날부터,

어린 시절, 나는,

고통이란 내가 사랑받지 

못했다는 뜻이라 생각했다. 

그건 내가 사랑했다는 뜻이었다. (242면)

이 시는 시집의 첫 시 「파라도스」(“Parados”)와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지는데, 첫 시도 똑같이 “오래전, 나는 상처를 입었다”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첫 시는 “나는 배웠다”로 이어지고 마지막 시 「최초의 기억」(“First Memory”)은 “나는 살았다”로 이어진다. 아버지가 떠난 후 아버지에게서 받았던 상처는 아버지를 사랑했던 그만큼의 크기였음을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시인은 아버지의 부재 안에서 비로소 사랑의 본질을 갈파한다.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일차적으로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아버지의 늙음과 죽음이 여전히 아버지 본인에게나 자신에게나 알 수 없는 대상으로 완전한 이해 너머에 머물러 있다 하더라도, 시인은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아버지의 상처 또한 들여다본다. 아버지가 딸과 아내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만큼 고통받았으리라는 것을. 

롱아일랜드섬에 위치한 유대인 묘지 ‘아라라트산’(Mt. Ararat)에 묻힌 아버지가 늙음과 죽음이라는 완벽한 타자를 환대로 맞으며 떠났는지 아닌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마지막 만남에서 떨리는 손을 흔드는 부녀를 보며, 마음을 온전히 꺼내어 보여주지는 않지만 서로를 짐작하는 부녀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이들이 어떤 화해에 도달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235면). 첫 시 「파라도스」에서 시인은 “나는 소명을 가지고 태어났다”라고 말하는데, 그 소명이란 위대한 신비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이다. “나는 탄생과 죽음을 모두 / 보았기에, 나는 알고 있다 / 그 어두운 본성에 대해 / 이것들이 신비가 아니라 증거임을―”이라고 말할 때(203면), 우리는 아버지의 고통과 자신의 고통을 이해함으로써 글릭이 탄생과 죽음을 동시에 보는 증거자가 되었음을 확인한다. 글릭 자신이 말할 수 없는 코레였고, 그 코레가 이제는 생명 가진 존재의 소명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3. 말할 수 없는 ‘늙음’을 끌어안는 일

늙음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늙음은 온전한 발화가 불가능한 완벽한 타자에 가깝다. 나의 늙음도 타인의 늙음도 그러하다. 그 타자를 ‘환대’의 방식으로 끌어안을 수 있을까?17) 이 질문은 오늘날 불가능에 가깝다. 늙음은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혐오의 사회적 확장을 이야기하면서 비장애인이 장애인에 대해 찍는 낙인과 소인의 예를 들고 있는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 그 대상은 늙음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18) 주름을 주사로 펴고, 늘어지는 살을 시술로 강제로 끌어올리면서 맹렬히 늙음을 거부하는 사회에서 늙음과 노년은 저항해야 하는 대상이다. 늙음이 구차하게 여겨지고 늙음을 말끔히 지우고 싶어하는 사회에서 젊음이 늙음을 향해 혐오를 발산하고 낙인과 소인을 찍을 때 시인 글릭이 그려 보이는 노년의 시들은 노년이라는 시간이 돌아갈 곳이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길 위에서 서서히 떨어지는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더욱 살뜰히 새겨야 하는 시간임을 차근차근 알려준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는 않다. 청춘의 시기를 지나고 중년을 지나 노년으로 가는 시간여행은 글릭의 시들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때로는 생의 주기에서 전형적이고 보편적인 양상을 띤다. 여섯 번째 시집이자 퓰리처상 수상작인 『야생 붓꽃』의 후반부 시들, 가령 「물러가는 빛」(“Retreating Light”)과 「구월의 황혼」(“September Twilight”)에서 시인은 다 자란 아이들을 바라보는 지친 중년의 엄마, 분노와 피로와 화가 어우러진 목소리를 철없는 인간 군상을 바라보며 답답해하는 신의 목소리와 정확히 겹쳐 그리고 있다. “우는 게 너희가 할 수 있는 전부였어. / 너희는 모든 걸 듣고 싶어 했고 / 스스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어”라고 힐책하는 목소리는 세상을 에워쌌다 물러가는 빛의 목소리인 동시에 아이를 독립적인 존재로 키워나가는 일에 열심이다가 지쳐버린 엄마의 목소리다(292면). 또 “나는 지쳤어, 너희들에게, 살아 있는 / 세계의 혼돈”이라고 말하면서 급기야는 “너희는 / 한 생의 가치가 있어, 딱 그 정도 // 내가 너희를 함께 모았지. / 나는 너희들을 지워버릴 수 있어 / 던져버린 초안처럼, / 습작처럼”(301면)이라고 할 때는 자신이 창조했으나 무지막지하게 말을 듣지 않는 인간세계를 바라보는 신의 한숨이 다 컸다고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한숨과 정확히 만난다. 

“너희는 / 한 생의 가치가 있어, 딱 그 정도”라는 말은 인간의 희비극을 바라보는 신의 야멸차고 냉정한 말인 동시에 가장 깊은 애도의 상상을 끝내버렸다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의 창조의 직무에서 비로소 놓여난 홀가분한 목소리다. 신이 인간화된 야멸찬 방식으로 세상을 향해 내지르는 목소리는 동시에 아이들을 다 키워놓고 독립시킨 후에 비로소 홀가분해진 엄마의 목소리가 된다. 이처럼 글릭은 하나의 단일한 서정 주체를 내세우는 전통적인 서정시 방식에 균열을 가하여 늙음이라는 주제를 자기 개인에게 당도한 어떤 한계로서가 아니라 이 세계 전체, 자연의 질서 안에서 새롭게 바라본다. 늙음은 여전히 알 수 없고, 엄마도 신도 물러가는 빛도 그 홀가분한 놓아두기 후에 당장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할 것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우리가 사회에서 학습된 방식으로 아는 단일하고 고정된 노년의 시간성과 그 재현에 균열이 생긴 것은 분명하다. 

글릭에게 늙음으로 향하는 시간여행은 ‘돌봄’이라는 무거운 책임에서 놓여나는 과정이고 그래서 서서히 내려가는 길, 하강하는 노년의 시간은 기쁨이기도 하다. 여덟 번째 시집 『새로운 생』(Vita Nova, 1999)의 시, 「계곡으로 내려가기」(“Descent to theValley”)는 상승하던 시절과 인생의 변곡점을 지나서 삶을 돌아본다. “위로 올라가는 그 세월들은 걱정들로 꽉 차서” 참 어렵다고 말하며 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

지금 내 인생이 얼마나 좋은지,

계곡엔 안개가 걷혔고

비옥하고 평온하다. 

그렇게 하여 처음으로 나는

앞을 내다보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381면)

내려가는 길에 비로소 삶의 평안을 알게 되고, 비로소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고백, 심지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고백은 쓸쓸하고 아름답다. 이 시집을 쓴 시기를 꼽아보니, 시인의 나이 쉰여섯이었다. 노년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청춘 또는 젊음이 더는 불가능함을 확연히 알게 되는 시점이다. 노화를 크게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은 싱싱하지 않은 몸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는 나이다. 내려가는 단계에서 인생의 평온을 알게 되고 비로소 앞을 내다보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시인의 고백은 비록 본격적인 늙음이 오기 전의 시간이지만, 글릭이 걸어간 노년의 시간의 한 지점을 정직하게 비추어준다. 

그렇다면 본격적인 ‘늙음-하기’를 직면하는 노년의 시간은 어떨까?19) 글릭에게 ‘늙음-하기’는 회한이나 공포보다는 의지적인 어떤 견딤의 행위에 가깝다. 이 견딤은 견고한 견인(堅忍)의 자세와 흡사하다. 베이커(Robert Baker)는 글릭 시에 드러나는 이런 태도를 “고행”(ascesis, ‘극기’ 또는 ‘자제’로도 옮길 수 있다)으로 보면서, 이러한 태도에 도달하려면 “자기부정을 통한 자기긍정 연습”과 “환상을 통해 바라보는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20) 이 글에서 ‘말할 수 없는 소녀’를 초대한 것은 이 견딤, 고행의 여정에 ‘말할 수 없는 소녀’ 코레의 그 비결정성이 힘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말할 수 없는 소녀는 글릭의 청년 시절, 지독한 거식증으로 정말로 말을 할 수 없었던 그 깡마른 소녀이기도 하고, 동시에 글릭의 시를 계속 끌고 나가는 어떤 은유이자 시를 추동하는 시의 천사다. 

페르세포네-데메테르 신화를 변용한 시편들이 자리한 『아베르노』의 시들은 본격적인 ‘늙음-하기’의 전주곡이면서 동시에 ‘죽음-이후’의 이야기에 해당된다. 신화에서 페르세포네는 플루톤(하데스)에게 납치된다. 제우스는 여기서 협력자로 등장하고, 딸을 빼앗긴 데메테르는 횃불들을 들고 딸을 찾아다닌다.21) 그녀의 분노에 이 땅의 모든 곡식과 식물이 메말라버린다. 땅의 풍요가 폐허로 바뀌고, 데메테르의 벼락같은 분노에 다른 신들도 당황한다. 신화에서 페르세포네는 순수의 전형이고, 하데스에게 납치된 사건은 그 자체로 죽음에 해당될 것이다. 하지만 글릭은 이 오래된, 신성불가침의 신화에서 순수의 외피를 벗겨낸다. 순결한 딸과 헌신적인 엄마라는 전형적인 구도를 깨면서 페르세포네의 납치는 납치라기보다는 자발적인 선택이 들어간 성장의 한 과정이 된다. 엄마의 보호 아래 있는 어린 딸의 순수는 탈피해야 하는 것, 벗어야만 하는 거추장스런 옷이다. 시 「순수의 신화」(“A Myth of Innocence”)를 보자. 

어느 여름, 그녀는 여느 때처럼 들판에 나간다

자기를 비춰보던 웅덩이에 

잠시 멈춰 서서 어떤 변화가

있는지 살핀다. 그녀는 본다

같은 사람을, 딸한테 입히는 전형적인 옷 

그 끔찍한 망토가 아직도 그녀에게 달라붙어 있다.

태양은, 물속에서, 아주 가까이 있는 것 같다.

저기 삼촌이 또 엿보고 있네, 그녀는 생각한다―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은 어떤 면에서 그녀의 친척이다.

나는 절대 혼자가 아니야, 그녀는 생각한다,

생각을 기도로 바꾸면서.

그리고 죽음이 나타난다, 기도의 응답처럼. (532면)

여기서 페르세포네가 입고 있는 망토는 엄마가 딸에게 입혀주는 전형적인 옷, 딸다움의 꺼풀로 이 옷은 끔찍해서 벗어버려야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순수는 깨어지게 마련인 것, 아니 어떤 삶의 여정에서 반드시 깨어져야 하는 것이고, 그 깨어지는 과정은 죽음처럼 하데스의 세계로 진입하는 일이다. 적어도 글릭의 시 안에서 페르세포네는 어느 정도 자발적인 의지로 죽음의 세계로 걸어 들어간다. “나는 납치되지 않았어”라고 선언하는 페르세포네, “내가 나를 바친 거야. 나는 / 내 몸을 벗어나고 싶었어”라고 원문에서 이탤릭체로 특별히 강조되는 이 선언은(532~33면) 순진한 소녀의 납치로 정형화된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말할 수 없는 입으로 하여금 말을 하게 만든다. 

이제 죽음의 신에게 납치된 소녀의 비극은 끔찍한 비극이 아니라 욕망하는 여성-주체의 성장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성장통이자 성인으로 가는 통과의례가 된다. 어머니 데메테르가 보호해주는 세계가 아무리 따뜻하고 안온하다 하더라도 그 세계에 머물러 있는 삶은 행복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아베르노』에서 황폐하게 버려진 벌판과 불에 탄 대지의 이미지가 나오고, 시집이 여름이 끝나고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계절을 배경으로 하는 것은 데메테르의 분노, 딸이 납치된 어미의 분노를 잘 보여주지만, 신화에서 이상화된 그 절절한 모녀관계는 이 세계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페르세포네 그 방랑자」(“Persephone the Wanderer”)에서 “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다, 어머니들로 인해 / 이 땅이 돌아간다는 것을, 이만큼은 / 확실해. 그녀는 또 안다” 다음에 “유폐에 / 관한 한, 그녀는 믿고 있다 // 그녀가 딸로 태어난 이상 계속 포로였다는 것을”이라는 말로 시인은 이상적인 신화이자 희생적인 애정으로 포장된 모녀관계에 드리운 어둡고 부정적인 속성을 정확히 짚는다.

글릭이 『아베르노』에서 밤과 죽음을 새롭게 사유하고 하데스의 욕망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페르세포네와 데메테르의 관계를 뒤집어 해석하면서 시도한 신화 다시 쓰기는 딸-엄마, 생-죽음, 지옥-이승 등에 대한 고정된 개념의 틀을 깨고 욕망에 대해, 죽음에 대해, 삶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열어 보인다. 시간은 삶에서 죽음으로 직선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대지는 더 이상 안정된 공간이 아니다. 지하세계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 죽음으로 가는 문을 통과한 후에 페르세포네는 더 충만한 자아로 다시 태어난다. 『아베르노』를 기억 이론을 통해 정신분석학적으로 읽어내는 고스만(Uta Gossmann)은 『아베르노』를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시집으로 단언한다.22) 인간이 필멸의 존재이기에 우리는 늘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메멘토 모리’. 우리는 미래에 닥칠 죽음을 준비해야 함을 잘 안다. 하지만 죽음은 개인의 앎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그토록 오래 바라보면서도 아버지의 죽음을 알 수 없었던 글릭처럼, 우리 모두처럼 말이다. 다만 우리는 우리에게 닥칠 미래의 일을 기억하기 위해 타인의 죽음을 바라보고 타인의 시선을 읽는다. 이 세상과 저승을 오가며 반복적으로 죽음을 경험하기에 “죽음의 ‘전문가’”(“expert” in dying)가 되는 페르세포네-코레.23) 글릭의 시에서 새롭게 재구성된 코레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딸은 어머니의 헌신과 사랑·억압·분노를 동시에 짊어지는 존재라는, 관계의 그토록 다층적인 복합성을 비로소 희미하게 자각한다. 죽음의 전문가 페르세포네-코레의 신비 안에서 글릭은 신화 속에서 단순하게 드러난 여성의 피해자 서사를 넘어서서 자기 욕망에 충실한 다각적인 여성 주체를 완성한다. 

4. 코레의 생명력과 노년: ‘죽음-하기’의 여정과 동반(同伴)

하지만 동시에 죽음의 전문가 페르세포네는 생명의 전문가 페르세포네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아감벤이 페르세포네-코레를 ‘신성한 소녀’로 재해석할 때 이는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전환에 더 방점을 두는 표현이다. 씨앗을 뜻하는 영어 core의 어원을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아감벤은 땅에 묻혀 있던 씨앗이 새로운 생명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강조한다.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하계로 간 페르세포네가 다시 지상으로 귀환하는 과정은 그러므로 죽음의 여정인 동시에 생명이 다시 돌아오는 생명의 순환이고, 코레는 생명 또는 탄생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아감벤은 “여인(어머니)과 소녀(처녀)라는 여성성의 두 본질적인 상 사이의 구분을 무화하면서 또 동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향이 있음을 말하면서 코레의 “불안한 비결정성”에 대해 언급한다.24)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젊은 소녀인 동시에 백발의 주름투성이 늙은 여자이기도 한 코레는 글릭의 후기 시편들 『신실하고 고결한 밤』과 『협동 농장의 겨울 요리법』에서 보여주는 어떤 견인의 자세 안에 들어 있는 힘의 근원을 밝혀주는 동인이 될 수 있다. 『신실하고 고결한 밤』에서 어머니마저 떠나보내고, 시인이 자신의 늙음을 훨씬 더 실체적으로 대면할 때 보여주는 어떤 견인의 자세는 앞선 시집 『아베르노』에서 활달하게 시험한 주체적인 방랑자 페르세포네, 스스로 죽음으로 걸어간 그녀의 생명력을 계속해서 다시 지피는 일에 가깝다. 『신실하고 고결한 밤』의 시 「한밤」(“Midnight”)에서 ‘늙음-하기’가 기억 속의 어떤 장면 속에서 죽음으로의 여정처럼 그려지는 것도 그와 비슷한 연장선이다.

마침내 그 밤이 나를 에워쌌다.

나는 그 밤 위를, 어쩌면 그 안을 떠다녔다,

혹은 밤이 나를 데리고 갔다 강이

보트를 데리고 가듯, 또 동시에

그 밤에 내 위로 소용돌이쳤다,

별이 총총했지만 그래도 어두웠다.25)

글릭에게 죽음은 과거가 미래가 되는 일이며, 밤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그 여행은 어둡지만 별과 함께하고, 내 위로 소용돌이치는 밤은 나를 온전히 안고 있는 위무자이기도 하다. 『아베르노』의 시 「야간 이주」(“The Night Migrations”)에서 새들이 야간 이주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죽은 이들은 이것들 다시 보지 못할 거라고 / 생각만 해도 무척 슬퍼지는데”라면서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이 다 사라지는 상황을 상상한다. 시인은 그럴 때 영혼이 어디서 위안을 찾을까 묻다가 답을 한다. “영혼은 이런 즐거움들 더 이상 /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아”라고. 왜 그런가? 존재하지 않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기 때문이다(489면). 

죽음과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마지막 시집 『협동 농장의 겨울 요리법』 또한 여행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 여정은 이제 혼자가 아니다. 다음 시를 보자. 

아래쪽으로 또 아래쪽으로 또 아래쪽으로 또 아래쪽으로 

바람이 우리를 데리고 간다,

나는 너를 위로하려 하지만 

말이 답이 아니다,

엄마가 내게 노래했던 것처럼 나는 네게 노래한다―

(…) 

우리는 다만 떨어지는 중이다―

세상이 지나간다, 

모든 세상들은, 하나하나가 마지막보다 더 아름답다,

너를 보호하려고 나는 네 뺨을 만진다―26)

시집을 여는 첫 시, 「시」(“Poem”)라는 간단한 제목의 시에서 글릭은 얼음 덮인 산을 오르는 ‘우리’를 그린다. 어린 소녀와 소년으로 등장하지만 아감벤의 말을 빌리면 늙음인지 젊음인지 알 수 없는 무결정의 존재다. 죽음 이후의 어떤 영(靈, spirit)의 상태일 수도 있다. 소년과 소녀는 “바람이 우릴 들어올려달라 기도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고, 바람은 “밑으로 또 밑으로 또 밑으로 또 밑으로” 그들을 데리고 간다. 어디로 내려가고 있는지 말하지 않지만 그곳이 무서운 곳이라는 건 분명하다. 다만 떨어지는 중이니 말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죽음 추동을 생명력 삼아 떨어지는 걸 자각하는 이는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라는 점이다. 서로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우리. 뺨을 어루만지며 보호하는 우리. 

글릭의 마지막 시집에서 죽음으로 가는 시간은 외롭고 격렬한 추락이 아니라 소년과 소녀가 함께하는 완만한 하강의 여정이면서 하나의 모험으로 그려진다. 앞서 『신실하고 고결한 밤』의 시 「모험」(“An Adventure”)에서 죽음으로 가는 여정이 준마를 타고 떠나는 모험으로, 때로 아우슈비츠를 연상시키는 기차여행의 형식으로도 그려졌다면, 이 시집에서 죽음은 완만한 하강곡선의 유영이자 기다림이다. 그 여정은 백색의 알 수 없음, 무(無)의 이미지로 드러나고, 늙어버린 여행자는 거듭 다시 소년과 소녀가 된다. 명시적으로 신화를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여기서도 그 소년과 소녀는 코레의 다른 모습이다. 소년과 소녀는 화가가 되어 늙어가는 예술가이고, 손녀의 손을 잡고 죽음의 여행을 떠나는 할머니이기도 하니까. 

글릭에게 ‘늙음-하기’는 ‘죽음-하기’와 동의어다. 그리고 그 ‘늙음-죽음-하기’를 감행하는 만년의 시편들에서 다행인 점은,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다. 죽음으로 떠나는 여정의 그 알 수 없는 백색의 공포가 낯설고 두렵지만, 그 알 수 없는 혼곤한 대상을 맞이하는 글릭의 세계에서, 그 밤의 여정에서는, 실은, 누구도 온전히 혼자가 아니었다. 죽어가는 어린 아기 옆에는 사랑하는 이를 저세상으로 보내는 데 전문가인 엄마가 자장가를 부르며 있었고, 연못에 빠진 아이는 혼자가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였다. 『아라라트산』의 아름다운 시 「눈」(“Snow”)에서 무동 탄 딸이 눈보라 속에서 아비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사방에서 달려드는 그 알 수 없는 공포를, ‘무’(nothing)를 온 눈(eyes), 온몸으로 흡수하는 것처럼, ‘죽음-하기’는 배움의 여정이고, 그 여정에는 다양한 동반자들이 늘 함께했다. 글릭의 시 세계를 한 바퀴 돌아 읽고 나면 독자로서는 그 점이 큰 위안이 된다(233면). 

동시에 늙음-하기, 죽음-하기는 일정 부분 이 세계의 세속을 떨쳐내는 과정이다. 『신실하고 고결한 밤』의 첫 시 「우화」(“Parable”)에서 긴 여정을 떠나는 이들이 준비하는 첫 단계는 바로 “세속의 것들”(wordly goods)을 내버리는 일이다.27) 해마다 겨울이 오면 노인들이 숲으로 가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마지막 시집의 시 「협동 농장의 겨울 요리법」은 노인들의 겨울나기다. 기운 없는 노인들은 함께 겨울을 나면서 이끼를 모아 삭혀 샌드위치를 만들고, 이끼로 분재를 만든다. 겨울은 위기다. 그 속에서 늙은 인간들은 매일의 노동을 반복한다. 더딘 작업으로.

빛이 이울고 있어서 

하루가 짧았다. 꾸러기가 가득 차면 노인들은 

힘들게 집으로 걸어갔다. 이끼는 들고 가기에 무거웠다.

아내들이 이 이끼를 삭혔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특히나 다른 세기에 태어난 것처럼 늙은

노인들에게는 더 그랬다.

하지만 노인들은 참을성이 있었다.28)

노년의 일상을 노년의 노동으로 되살리는 시에서 시인은 추락하는 이 세계를 지탱하고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뛰어난 개인의 재능보다는 함께함에서 나온다는 것을 강조하듯, 시인은 엄혹한 겨울의 세계, 남은 것이 추락뿐인 시간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 샌드위치를 포장하는 부엌에서 보이는 부엌문에 쓰인 어떤 글귀를 여기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 안쪽에, / 카드 위에 한자로 일의 순서가 쓰여 있었다 / 번역하자면, 같은 순서로 같은 일을 할 것, / 그리고 그 아래엔. 그것들의 기원을 우리는 지워버렸다, / 이제 그들에겐 우리가 필요하다”29)

척박한 겨울, 남은 것은 죽어가는 일밖에 없을 때, 기다림도 없고 희망도 없는 노년의 노동이 그려지는 이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 기묘한 안도감과 이상한 수긍을 동시에 느끼는 것은 반복되는 노동의 방식에서 온다. 12월, 어두운 겨울, 죽음의 계절, 죽은 나무의 쓸모없는 부분을 긁어모아 뭔가를 만드는 일, 이끼를 거두고 샌드위치를 만들어 포장하는 일상, 시인은 “같은 순서로 같은 일”을 하자는 당부 속에서 일상의 미시적인 순환을 삶이라는 거대한 순환과 겹쳐 사유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어떤 거창한 꿈이 사라진 나날, 노년의 시간은 다시 젊어질 것이라는 희망도 허상도 없이, 다만 내 앞에 주어진 시간을 차곡차곡 나아가야 한다는 어떤 다짐이 가장 절실히 요청되는 시간이다. 느린 속도지만 죽음을 향해 일제히 걸어가는 집단농장의 나날, 척박한 겨울, 남은 것은 죽어가는 일밖에 없는 노년의 시간에 대한 적확한 비유로 읽히는 이 시는 기다림도 희망도 없는 노년의 노동을 통해서 노년의 시간을 허상 없이 바라보게 한다. 

말할 수 없는 소년과 소녀의 여정으로 시작한 시인의 마지막 시집에서 시인은 노년의 시간에 노년의 노동이 갖는 의미를 통해 청춘을 다시 꿈꾸는 어떤 바람 없이,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나날을 차곡차곡 나아가는, 탄식하지 않고 나아가는 그 걸음을 통해 노년의 시간이 갖는 묵묵한 발걸음의 힘, 같은 시선, 같은 순서, 같은 속도로 되풀이되는 지루한 일상의 시간이 갖는 어떤 힘을 보여주고, 동시에 그 움직임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운다.

모든 건 변해요, 그가 말했다, 모든 건 연결되어 있고요.

또 모든 건 되돌아와요, 하지만 되돌아오는 건

떠나갔던 것이 아니랍니다.30)

시 「죽음의 부정」(“The Denial of Death”)에서 글릭은 연인이 떠나가고 혼자 남겨진 시의 화자가 호텔 컨시어지와 나눈 대화를 통해 늙음의 여정에서 만나는 어떤 동반과 지혜를 그린다. 모든 것은 끝에서 다시 시작으로 돌아간다는 것, 우리 생의 리듬이 자연의 순리나 우주의 순환 원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컨시어지의 통찰 어린 목소리가 이야기한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떠나간 모든 것이 되돌아온다는 것을 아는 일, 그러나 그 되돌아옴은 출발했던 자리가 아니라는 것, 떠난 자나 남은 자나 모두 어떤 변모를 거치리라는 것 말이다. 의미를 온전히 다 알 수 없는 이런 순환, 삶-죽음의 여정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자가 하루 여행을 함께하는 자든, 말이 많지 않은 이웃이든, ‘늙음-죽음-하기’라는 그 두려움을 줄여주는 동반이고, 그 동반은 어디든 있다는 것을 시인은 나와 컨시어지의 만남을 통해 비스듬히 알려준다.31) 시 「아이들 이야기」(“A Children’s Story”)에서 말해주듯 “미래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심지어 행성들도 미래는 알지 못한다.32) 하지만 시 속의 공주님들이 그 미래의 시간을 향해 걸어가야 하듯이 우리 각자는 모두 늙어감이라는 시간을 걷는다. 시인이 사유하는 노년의 시간성은 어쩌면 희망보다 절망, 기쁨보다 슬픔이 전제된 우리 삶의 비의를 가장 정확하게 들여다보게 한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걷는 잔혹동화의 주인공, “우리가 희망을 다시 찾고 싶다면 / 우리는 희망이 사라진 곳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단호한 선언은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간 코레의 운명, 그 힘을 다시 한번 변주한다.33)

5. 남은 말: 단 한 번의 죽음 이후

마지막 시집 『협동 농장의 겨울 요리법』의 마지막 시편들에서 시인 글릭은 그간 감춰두었던 이야기를 조금은 선명하게 드러낸다. 「어떤 기억」(“A Memory”)에서 “병이 내게 찾아왔다. / 어쩌다 아프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 정상인 척하는 게 점점 더 어려워졌다, / 건강한 척, 기쁨 안에서 사는 척하는 것이―”34)라고 하니 말이다. 여기서 언급된 ‘병’이 시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암이라든가 특정한 질병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글릭은 세상을 떠나기 불과 2주 전에 암 선고를 받았으니 말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죽음으로 향해 가는 노년의 일상이 맞는 보편의 병에 가깝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생애 마지막 기간에 서서히 약해진 육체적 쇠락을 실감하면서 시인은 꼼꼼히 일상을 챙기고 또 꿈을 꾸었다. 시에서도 자신의 삶에서도. “꿈을 꾸니 다행이지 / 불이 아직도 살아 있네”라는 시집의 마지막 구절은 시인이 끝내 코레의 생명력을 잃지 않고 꿈을 꾸고 걸었음을 알게 한다. 그리고 그 곁에는 무언가를 말해주는 누군가가 늘 있었는데, 그 누군가는 가족이나 오랜 연인보다도 스치는 관계 안에서 우연히 만나는 동반들이다. 그 우연한 관계는 노년의 과정에서 필요한 인내와 버팀이 의지적인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떠나는 이도, 남는 이도 모두 바람처럼 구름처럼 흩어지고 모이는 움직임 안에 있을 뿐이다. 

글릭에게 노년을 지나는 일은 반복적인 일상 안에서 갖는 견고한 버팀이고, 그 버팀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우연한 만남이고, 그 만남에서 나누는 말이고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는 정성이지만, 죽음은 단 한 번의 사건이다. 『야생 붓꽃』의 마지막 시 「흰 백합」(“The White Lilies”)은 이를 잘 보여준다. 

쉿, 사랑하는 이여. 되돌아오려고 내가

몇 번의 여름을 사는지 그건 내게 중요하지 않아요.

이 한 번의 여름에 우리는 영원으로 들어갔어요.

그 찬란한 빛을 풀어주려고 나를 파묻는 

당신 두 손을 나 느꼈어요. (303면)

백합은 다음 해에 다시 정원에서 피어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백합이 말하는 “이 한 번의 여름”은 글릭이 살다 간 한 생의 무게에 고스란히 값한다. 늙음이 순환적인 움직임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라면,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그 희망을 다시 찾으려면 그걸 잃어버린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 지혜는35) 우리가 인식하는 여인과 소녀 사이의 단절도 다시 돌아보게 한다. 노년이 상실의 경험과 세월을 통해 오는 것이고 또 통과해가야 하는 것이라면, 단 한 번의 사건인 죽음 또한 그처럼 지나는 일이고 삶과 죽음의 자리 또한 젊음과 늙음처럼 다시 연결되어 중첩된 방식으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그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여기서 아감벤으로 잠시 되돌아가자. 아감벤은 독일의 고전문헌학자 로데(Erwin Rohde)가 엘레우시스 비교의식(秘敎儀式)에 붙인 해석에 기대어36) 코레의 납치와 귀환이 대지에서 새싹이 돋아 씨앗의 심연이 드러나는 일이며, 해마다 식물이 소멸하고 재생하는 그 과정이 궁극에는 인간의 운명과 겹쳐진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사라질 운명이지만 결국 새롭게 다시 살아나는 인간 영혼의 운명에 대한 이미지라는 것이다. 신화에서 내려온 이야기를 다시 청하여 그 숨겨진 의미를 재해석하고자 하는 아감벤이 강조하는 것은 이것이다. 삶이라는 입회 의식에서 신화가 그리는 평온한 기쁨과 신비는 없다고. 오직 말할 수 없는 소녀만 있다고. 코레의 신비에 천착한 아감벤이 일견 신비를 부정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자가당착이나 논리의 모순이 아니라 신비가 갖는 에너지 때문이다. 

이 글에서 글릭의 비평에서 인용되지 않고 얼핏 직결되지 않아 보이는 아감벤의 말할 수 없는 코레를 가지고 이야기를 이어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아감벤은 이어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 입회해야 한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들과 다르다. 즉 우리 자신을 살아 있는 것으로 재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인간 속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야 하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라고.37) 그것은 상실을 경험하지 않는 한 우리는 삶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글릭에게 그 말은 이렇게 변주된다. 자신의 삶에 입회하는 “신과의 경기장에서 당신 차례가 온다면 /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504면). 이 질문에 끝내 글릭이 대답했던가? 다른 시에서 한 이 말이 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죽음은 나를 해칠 수 없어 / 내 사랑하는 삶, / 네가 나를 해친 것 이상으로는”(496면).38)

글릭에게 노년은 한 번만 겪는 상실이 아니었다. 그에게 삶은 탄생 이전부터 상실의 씨앗에 배태된 어떤 것, 이어지는 상실 속에서 슬픔을 계속 앓아야 하는 잔혹동화였다. 글릭의 말할 수 없는 소녀는 그런 삶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인 자, 어둠과 죽음을 대면하고 끝내 죽음 너머를 바라본 자다. 잃을 것도 잊은 것도 없는 상태로. 글릭의 주인공은 같은 일을 같은 시간에 한다는 규칙을 제시하면서 끝까지 늙은 코레로 남는다. 완만한 하강곡선을 그리는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영원한 딸이자 영원한 엄마는 이미 자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자로 말이다. 

처음부터 글릭의 시적 주체는 늙음과 죽음을 미리 알아버린 자, 부모의 죽음을 앞두고 자녀들이 상속세 걱정을 할 것을 미리 아는 지혜로우나 초라한 노인 또한 말할 수 없는 소녀의 다른 형태인 것은 그런 이유다. 그 자리에 남성인지 여성인지, 어른인지 아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후기 시집에서 글릭은 그간 혐오와 방어의 대상이었던 노인들의 세계를 서글플 것도 서러울 것도 없는 일상의 하루 안에 새겨넣으면서 그 노인들의 손으로 크고 작은 것들을 만들면서 완만한 죽음을 준비한다. 맹렬히 저항하고 거부해야 할 대상이었던 늙음을 이처럼 순순하게 규칙적인 방식으로 ‘하기’의 주체로 만들어 세우는 시인 글릭은 늙음이라는 낯선 손님에게 ‘환대’의 손길을 내민다. 늙음이라는 완벽한 타자가 내 안으로 이입되는 과정은 쉽지 않지만, 이 환대를 통해서만이 나는 나의 늙음과 함께 갈 수 있다. 

시인 글릭이 들려주는 늙음의 이야기는 ‘말할 수 없는 소녀’의 말할 수 없음이 재현의 불가능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타자의 말에 귀 기울이고 말을 건네는 행위에 더 가깝다. 페르세포네의 순결과 겁탈로 이어지는 옛 신화를 재편하면서 글릭은 사람이 태어나 나이 들어 늙어가는 과정을 바라보면서 젊음과 늙음을 재단하는 호오(好惡)의 공식 대신, 어제의 일을 다시 반복하는 그 순환적인 움직임으로 어둠과 죽음을 넘어선 자신의 삶을 완성한다. 살아 있는 자는 죽어가는 자이고, 죽어가는 자는 살아가는 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시인 글릭은 죽음이라는 단 한 번의 사건으로 우리 각자가 영원한 부재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잘 안다. 삶의 전장, 모험을 찾아 다시 나가자고 외치는 늙은 영웅 대신, 글릭의 코레는 일상을 말없이 이어가는 자다. 완고한 모성신화의 허구를 알면서 동시에 그 엄마의 눈물을 잊지 않는 씨앗을 품고 있는 소녀이자 엄마, 여성이자 남성, 또 무녀다. 신화에서 코레는 죽음에서 다시 지상으로 올라온 말할 수 없는 소녀, 우리에게 “늙음-하기”를 어떻게 대면해야 할지 “그 어두운 비밀”을 알려주는 꼿꼿한 증거자다. 2023년 10월, 글릭은 단 한 번의 죽음으로 마침내 이 지상에서 소멸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코레의 생명력은 글릭이 남긴 시의 언어로 전해지고 있다. 늙음과 죽음과 밤, 상처와 상실과 고통을 긍정하는 힘으로.


1) * 이 논문은 2021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인문사회분야 중견연구자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NRF-2021S1A5A2A01071141)이며 한국외국어대학교 교내학술연구비의 지원을 함께 받았음. 

鄭恩龜 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최근 논문으로 「애도의 방법론과 책임의 윤리: 재난과 죽음을 바라보는 열세 가지 방법」(2023)이 있다.

Glück에 대한 한글 표기가 자주 논란거리가 되는데, 헝가리계 유대인인 시인의 성은 실제 발음으로 ‘글룩’에 가깝지만 대체로 ‘글릭’으로 표기되고 연구자에 따라 ‘그릭’으로 쓰기도 한다.

2) Louise Glück, Poems 1962-2012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2012) 5, 19면. 글릭의 번역 시집 13권이 시공사에서 출간되었으나 여기서는 원 시집의 출처를 밝히고 번역은 필자의 시공사 번역본을 따르기로 한다. 앞으로 이 시집의 인용은 괄호 안에 면수만 표기한다.

3) 글릭 시의 주인공들에게 화사한 청춘의 시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 상처와 같은 단어로 경험되는 시절, 첫 시집을 낸 후 글릭은 여러 해 창작에 어려움을 겪는 슬럼프에 빠지지만 다른 이들에게 시-쓰기를 가르치면서 이를 극복한다. 미국 시단에 그 이름을 알린 두 번째 시집 『습지 위의 집』(The House on Marshland, 1975)은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젊음의 통과의례가 비교적 행복하게 그려진다. 시인 자신은 당대의 주류였던 고백시파의 방식과 거리를 두면서 자전적 요소를 숨기지만, 시의 상당 부분이 시인의 삶과 겹쳐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4) 시인들이 몸소 겪는 치매 및 두뇌의 노화와 상상력의 변화를 다루는 최근 연구로 Aagje Swinnen, “Poetry and Dementia: Imagining and Shaping More Just Futures,” A Poetic Language of Ageing, ed. Olga V. Lehmann & Oddgeir Synnes (London: Bloomsbury Academic, 2023) 27~42면 참조.

5) Giorgio Agamben and Monica Ferrando, The Unspeakable Girl: The Myth and Mystery of Kore (Calcutta: Seagull Books, 2014) 1~2면. ‘생명력’이라는 어근에서 나온 그리스어 코레는 동물과 식물을 자라게 하는 추동력에서 비롯되는데, 늙은 소녀들, 그라이아이 즉 백발들이라고 불리는 포르퀴데스처럼 늙었을 수도 있기에 사람-소녀보다는 기녀에 가깝다.

6) 젊은 날에는 상실을 먼저 알아버린 빨리 늙은 젊은이로, 늙은 날에는 생명력의 핵심을 알았으나 몸은 늙은 소녀로 살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알맞을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해도 글릭이 가혹하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7) 1995년 초기 시집 4권을 묶어서 펴낸 시집과 만년에 나온 시집 두 권을 제외하고 이전에 나온 시집 11권을 묶어서 2012년에 출간된 두꺼운 모음집까지 합치면 시집만 14권이다.

8) 양균원의 두 논문, 「자아의 부재에서 목소리를 내다: 루이스 그릭」, 『현대영미시연구』 15.2 (2009) 83~114면; 「탈(脫)서정의 서정: 루이스 그릭의 충직하고 고결한 밤」 『현대영미시연구』 27.1 (2021) 57~92면 모두 서정시의 문법과 다른 시인의 시 세계를 읽어낸다. 글릭의 서정시가 갖는 실험성에 대해서는 정은귀 「루이즈 글릭과 서정시의 귀환: 입장료 1달러 시의 수행성을 생각하며」, 『안과밖』 50 (2021) 200~29면을 참조할 것.

9) 2020년 글릭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직후 가진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와의 인터뷰에서 글릭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자신의 수상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은 “글을 쓸 수 있을 때부터” 죽음에 대해 썼다며 “노화는 좀 더 복잡한 문제지만요”라고 한 바 있다. 죽음과 노화가 비슷한 방식으로 시인을 사로잡았다는 이야기다. Alexandra Alter,“‘I Was Unprepared’: Louise Glück on Poetry, Aging and a Surprise Nobel Prize,” New York Times (Oct. 8, 2020). https://www.nytimes.com/2020/10/08/books/louise-Glück-nobel-prize-literature.html 참조.

10) 세 번째 시집 『내려오는 모습』(Descending Figure, 1980)의 첫 시 「익사한 아이들」(“The Drowned Children”)은 물에 빠져 죽은 아이들에 대한 묘사가 방관자적인 시선으로 지극히 건조하다 하여 ‘아이를 미워하는 사람’(child hater)이라고 비난한 비평가(Greg Kuzma)도 있었다.

11) 다섯 번째 시집 『아라라트산』(Ararat, 1990)의 여러 시편, 특히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Children Coming Home from School”)과 「자장가」(“Lullaby”)를 볼 것. 「자장가」는 “엄마는 한 가지 일에 있어 전문가다. /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저 세상으로 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212면).

12) 『신실하고 고결한 밤』(Faithful and Virtuous Night, 2014)의 이야기 시들을 참조
할 것.

13) 2008년에 개봉한 미국의 로맨틱 판타지 영화로 F.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의 1922년 작품 「벤저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에서 출발한 이야기다.

14) 고백시의 고백의 형식에 대해서도 여러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글릭 스스로는 첫 시집이 “고백시의 아류”라는 평가를 들은 이후 평생 고백시와 거리를 두었고, 고백시의 자기함몰적 경향에 대해 특히 비판적이었다. 여기서는 연극적 요소를 도입한다든가, 이야기 시의 형식을 통해 서정 주체와 거리두기가 확연해지는 서정의 실험을 염두에 두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Marjorie Perloff, Poetics License: Essays on Modernist and Postmodernist Lyric (Evanston: Northwestern UP, 1990)을 참조할 것.

15) 여기서 시인 글릭의 조로(早老)는 조심스러운 판단이지만 ‘정신적인’ 상태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시인은 거식증으로 죽음을 넘나드는 고통을 겪었으니, 죽지 않기 위해서 대학을 포기하고 7년 동안 치료를 받았던 것이다. 젊음이 흔히 겪는 ‘조로’와 병적인 우울과 절망에 대해서는 아마도 다른 지면에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16) 『아라라트산』의 첫 시 「파라도스」(“Parados”)와 마지막 시 「최초의 기억」(“First Memory”)을 참조할 것.

17) 여기서 데리다(Jacques Derrida)가 뒤푸르망텔(Anne Dufourmantelle)과 주고받은 ‘환대’(hospitality)에 대한 대화, 그리고 커니(Richard Kearney) 등의 논의를 염두에 둔다. 환대는 이주민이나 난민과 같은 현실의 외국인, 현실의 타자의 문제이지만 동시에 철학적 주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철학적 주제로서의 이방인을 염두에 두면 늙음이나 죽음 또한 같은 맥락에서 논의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늙음이나 죽음이야말로 가장 반갑지 않은 이방인, 데리다의 말을 빌리면 “견딜 수 없는 질문” 아닌가? Jacques Derrida and Anne Dufourmantelle, Of Hospitality, trans. Rachel Bowlby (Stanford: Stanford UP, 2000) 5면.

18) Martha Nussbaum, Hiding from Humanity, Disgust, Shame, and the Law (Princeton: Princeton UP, 2004) 4장 참조. 

19) 여기서 ‘하기’는 시인 김혜순의 말에서 빌려왔다. 김혜순은 “시-하기”를 통해 시를 쓰는 일에 적극적인 행위 의지를 부여한다. 이는 “여성-하기”에도 적용된다. ‘시-하기’ ‘여성-하기’를 더 확대하여 ‘늙음-하기’에 적용해보면, 모두 사회에서 주권의 위치에 오르지 못한 환대받지 못한 ‘이방인-되기’에 해당되는데, ‘되기’보다 ‘하기’가 더 적극적인 능동의 의지로 의미가 있다. 김혜순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문학동네, 2022) 참조.

20) Robert Baker, “Versions of Ascesis in Louise Glück’s Poetry,” The Cambridge Quarterly 47.2 (2018) 133면.

21) 이 이야기는 작가별로 여러 다양한 버전이 있다. 일차적으로 국내 번역본으로 아폴로도로스 지음, 강대진 옮김 『그리스 신화』(민음사, 2022) 52~53면을 참조했지만 아감벤의 책 후반부에 여러 버전이 상세히 보충 설명되어 있다. 아감벤의 책은 뒤에 나오는 각주를 참조할 것.

22) Uta Gossmann, “Psychoanalyzing Persephone: Louise Glück’s Averno,” Modern Psychoanalysis Studies 35.2 (2010) 219면.

23) 같은 글 219면.

24) Agamben, 앞의 책 3면. 

25) Louise Glück, Faithful and Virtuous Night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y: Carcanet, 2014) 34면.

26) Louise Glück, Winter Recipes from the Collective (FSG Adult, 2022) Kindle Edition.

27) Glück, Faithful and Virtuous Night 3면.

28) Glück, Winter Recipes from the Collective, Kindle Edition.

29) 같은 책, Kindle Edition.

30) 같은 책, Kindle Edition.

31) 이에 대해 2023년 시공사에서 나온 번역 시집, 역자의 후기를 참조할 것.

32) 같은 책, Kindle Edition.

33) 같은 책, Kindle Edition.

34) 같은 책, Kindle Edition.

35) 같은 책, Kindle Edition.

36) 엘레우시스는 아테네 서쪽에 위치한 도시다. 엘레우시스의 ‘비의’(mystery, 비밀한 의식)는 데메테르가 페르세포네를 저승에서 되찾아온 이야기에 기원을 두고 있는 극적인 신비의식으로, 죽었다가 부활하는 어떤 각성 또는 영적 체험을 수반하는 무언극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37) Agamben, 앞의 책 47면.

38) 『아베르노』의 연작시 「시월」(“October”)의 한 구절이다. “death cannot harm me / more than you have harmed me, my beloved life”.

│정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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