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억
보잘것없는 존재가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다루는 하나의 방법은 그 힘에 신성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노화와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그랬다. 인류 역사에서 노화와 죽음은 인간의 손에 쥐여지지 않은, 그래서 신성한 어떤 것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많은 신성한 것이 세속화되었듯 노화와 죽음도 차츰 세속화하고 있다.
1. 생의 의미와 시간성
치열했던 삶의 여정을 보낸 아메리(Jean Améry)는 스스로 죽음을 결정하기 10년 전인 1968년의 작품에서 나이 들어감을 ‘저항과 체념 사이의 어떤 것’으로 규정한다. 그는 자신의 글 앞머리에서 조금은 거칠게, 그러나 솔직한 속내를 드러낸다. “속절없이 늙어가는 사람에게 그 쇠락을 두고 ‘귀족과 같은 우아한 체념’이라거나 ‘황혼의 지혜’ 혹은 ‘말년의 만족’이라는 말 따위로 치장해 위로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굴욕적인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1)
아메리의 단도직입 화법에는 자못 비장함이 묻어난다. 노화, 그리고 그 끝에서 만나게 되는 죽음은 인간, 아니 생명이라면 피할 수도 없고 어찌할 수도 없다. 일단 노화가 시작되었다고 느끼면 많은 사람이 부정하고 저항하기 시작한다. 온몸 구석구석에 맞춤 영양제를 공급하고, 근육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열심히 운동하며, 노화를 막을 수 있다는 온갖 풍문에 귀를 곤두세운다. 하지만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에 저항할 방법은 없다. 누가 나이 들어감을 환영하고 죽음을 반가워할까. 살아 있음이 저주처럼 느껴지고 죽음이야말로 해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노화는 결코 반가운 손님이 아니다. 비록 죽음을 향해 달려갈지라도 생은 죽음에 저항하도록 설계되었다. 아메리의 솔직함은 말 그대로 모든 생명의 본능적 태도를 대변한다. 하지만 이런 저항도 끝내 부질없다는 것이 분명해지면 비로소 체념과 순응의 시간이 시작된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증언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유한함은 주어진 생의 의미와 소중함을 곱씹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인간을 ‘현존재’(Dasein)라고 부름으로써 다른 생명과 구별하고자 했다. 인간은 그저 생의 관성에 따르는 존재자이기를 넘어 존재의 의미를 묻는 유일한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 의미를 묻게 되는 가장 선명한 계기는 다름아닌 죽음이다.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생의 시간을 전면적으로 성찰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죽음은 각각의 현존재 스스로가 떠맡은 존재가능성(Seinsmöglichkeit)이다. 죽음과 더불어 현존재는 자신만의 가장 고유한 존재할 수 있음(Seinskönnen)에서 스스로를 마주하게 된다.”2)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누구도 대신 떠맡을 수 없는 자기 자신의 한계 상황이다. 죽음은 자기 자신의 소멸, 아메리의 표현을 따르자면 “말 그대로 ‘나의 파괴’다.”3) 생의 의미는 죽음 앞에서 비로소 그 진정성을 갖게 된다.
죽음이 도리어 생의 의미를 풍요롭게 한다는 역설은 인간의 시간성(temporality)에서 비롯한다. 시간성은 시간을 이해하는 우리의 도식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 시간성의 고유한 특징은 미래를 미리 당겨와 사유할 수 있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은 아직은 그저 가능성으로만 있는 죽음을 미리 당겨 사유함으로써 삶 전체를 전면적으로 재고하기도 하고 미래를 기획하기도 한다.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생의 의미를 이해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아메리가 본 삶과 죽음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선형적인 시간 속에서 이해되었다. 죽음이 단순한 소멸이든 또는 어떤 완성이든 그 이후의 시간은 ‘나에게’ 아무런 존재 의미가 없다. 죽음 이후에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형적 시간성에서 나의 삶은 일회적이다. 생의 모든 순간은 엄밀히 말해 언제나 마지막이다. 지나간 순간은 다시 반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화는 그런 생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가속페달이다. 속절없이 늙어가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따뜻한 위로의 말이라도 그저 기만일 뿐이라고 말하는 아메리의 비장함에는 그가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가 묻어난다.
그런데 만약 시간을 달리 이해하면 어떨까? ‘나의 파괴’를 순수한 종말로 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나’나 ‘새로운 나’의 시작이라면 어떨까?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삶이 있다고 해도 여전히 죽음의 의미가 같을까? 죽음의 의미가 달라지면 그 반대편에 있는 삶의 의미도 달라진다. ‘슬기롭게도’ 우리의 선조들은 계절의 변화에서, 그리고 한 생명의 소멸로 인해 다른 생명이 소생하는 현상으로부터 시간과 시간 위에 펼쳐진 생을 달리 이해할 수 있음을 상상했다. 물론 그 ‘새로운’ 나는 여전히 현재의 내가 아닌 탓에 이번 생에서 맞이하는 ‘나의 파괴’의 의미는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서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일로서의 죽음과 새롭게 시작하는 계기로서의 죽음은 의미가 다를 것이다.
인류의 종교적 본성을 해명하기 위해 애썼던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우리 선조들의 문화에서 죽음이 달리 이해될 수 있음을 가입식 또는 성년식의 문화에 빗대 이렇게 묘사한다. “그것은 원시 사회의 인간들이 자연적 생존의 단계에 ‘주어지는’ 것만으로는 자신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진정한 의미로 인간이 되기 위하여 그는 이 최초의(자연적) 생명으로는 죽어야 하며,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더 높은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4) 내세를 믿는 종교에서 죽음은 일종의 가입식, 또는 새로운 형태의 삶,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는 통과의례일 뿐이다. 그래서 엘리아데는 고대문화에서 이러한 가입식의 의례가 종교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해석한다. 4)
내세를 믿는 모든 종교에서 죽음은 새로운 탄생이나 영원한 삶을 시작하는 일종의 관문이다. 물론 그 양상은 다양하다. 시초의 낙원에서 출발하여 말세에 이르렀다가 마침내 영원한 안식에 이를 수도 있고, 끝없는 윤회 속에서 깨달음을 통해 마침내 해탈에 이를 수도 있다. 한쪽이 선형적인 시간관이라면 다른 쪽은 순환적이다. 신화와 그것을 합리화한 종교적 세계관에서 어떤 시간관을 갖느냐에 따라 그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양상도 다르다.
종교로부터 사뭇 멀어진 오늘날 우리의 시간 이해는 어떨까? 엘리아데가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종교적 본성과 체험을 해명하고자 했던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계속해서 그런 종교적 본성으로부터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속된 세계에서 우리는 사망, 결혼, 출생의 급진적인 세속화를” 보고 있지만 “폐기된 종교적 실천이 희미한 기억, 혹은 심지어 그에 대한 동경 가운데서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5)라는 엘리아데의 말에서 우리는 그의 의도와 달리 전진하고 있는 세속화에 대한 증언을 듣는다.
한 개인의 자기 정체성과 삶의 의미는 시간을 이해하는 그의 패러다임에 의존한다. 신화의 시대로부터 종교, 그리고 과학의 시대로 이행해온 인류 역사가 증언하듯이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변해왔다. 삶이 시간 도식 위에서 펼쳐지는 것인 한, 시간성의 변화는 삶에 대한 관점과 태도의 변화를 함축한다. 이러한 (현상학의 표현을 따르자면) 생활세계적 조건의 변화가 죽음, 그리고 그 전조로서 노화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균열을 일으킨다. 물론 이것이 아주 새로운 경험은 아니다. 이미 우리 선조들은 그 문제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했다. 그렇다고 단순한 반복도 아니다. 과거의 상상력이 그저 이룰 수 없는 꿈을 묘사했다면, 오늘날의 상상력에는 ‘어쩌면’이라는 현실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2. 오래 사는 삶을 향한 욕망과 상상, 그리고 노년의 쓸모
진나라 시황제의 불로초에 관한 이야기가 전하듯, 늙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삶을 향한 열망은 인류 역사의 공통된 문화 전승이자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다. 그 원초적 성격 덕에 문화와 지역의 차이를 뛰어넘는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새벽의 여신 에오스는 트로이의 왕자 티토노스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하지만 불사의 존재와 한낱 하루살이 같은 인간 사이의 사랑이 영원할 수는 없다. 자신의 연인이 필멸의 인간이라는 것을 걱정한 에오스는 제우스에게 간청하여 티토노스를 불사의 존재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미처 그에게 영원한 젊음까지 주어야 한다는 것에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늙고 쇠약해진, 그러나 죽지 않는 티토노스는 영원한 젊음을 향유하는 에오스에게 성급한 판단의 결과로 남은 짐일 뿐이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단지 오래 사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일찌감치 알았다. 그래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는 티토노스에 얽힌 이야기를 예로 들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노쇠였다고 해석한다.6) 근대적 상상력에서도 유사한 이야기가 반복된다. 스위프트(Jonathan Swift)는 걸리버의 입을 빌려 럭낵 땅에 살면서 죽지 않는 사람들인 스트럴드블럭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걸리버는 스트럴드블럭에 대해 이렇게 상상한다. “예전의 미덕을 그대로 전수받은 삶을 즐길 수 있으며, 과거의 지혜를 가르치는 선생들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가장 지혜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럭낵”일 것이며, “스트럴드블럭은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부터 해방된,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장 행복한 사람들”일 것이다.7)
스트럴드블럭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 럭낵의 고위 관료는 걸리버에게 당신이 만약 스트럴드블럭으로 태어난다면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고 묻는다. 걸리버는 먼저 충분한 부를 쌓고 세상에 도움이 될 만한 학문을 연구한 뒤, 이를 통해 인류 문명의 진보에 기여하는 삶을 살 것이라고 답한다. 그러자 그 관료는 걸리버의 대답은 “젊음과 건강 그리고 정력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8)이기 때문에 실제 스트럴드블럭의 삶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스트럴드블럭은 죽지만 않을 뿐 노쇠를 겪기 때문에 나이가 60을 넘어가면 죽지 않음으로 인해 무서운 절망을 갖게 되어 “그들이 주로 질투하는 것은 젊은 사람들의 행동과 나이 든 사람들의 죽음”이며, “스트럴드블럭 가운데에서 그래도 나은 사람은 노망이 들어서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럭낵에서는 80세에 이른 스트럴드블럭은 법적으로 죽은 자로 간주해버린다.9)
스위프트의 재치 넘치는 상상이 말해주듯 사실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히 나이 들어감이 아니다. 어렸을 때는 도리어 인생의 절정을 향해 빨리 오르고픈 마음에, 사실은 죽음을 향해 조금 더 나아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빨리 나이 들기를 소망하기까지 한다. 그런 의미에서 생의 절멸을 뜻하는 죽음이 유발하는 두려움과 노화에 대한 두려움은 그 성격이 조금 다르다. 정확히 말하면 단지 나이 든다는 의미의 노화(aging)와 나이 들어 쇠약해진다는 의미의 노쇠(frailty)를 구분해야 한다. 우리가 노화를 혐오하는 까닭은 단지 나이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쇠락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많아도 여전히 활기 넘치고 생의 복락을 누릴 수 있다면 나이 많은 것은 결코 흉이 아닐 수 있다. 도리어 행복한 경험의 총량이 많을 것이라는 시기 어린 질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건강하게 장수를 누리다가 어느 날 불현듯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복이라고 말하곤 한다. 죽음만큼이나 피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바로 노쇠일 것이다. 그런 바람이 나이를 거꾸로 되돌리는 ‘젊음의 샘’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문화적 전승들에는 인류사회가 노년의 삶을 어떤 시선에서 바라보았는지가 담겨 있다. 티토노스의 이야기나 스트럴드블럭의 이야기에는 정작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없다. 다시 말해 그 이야기들은 노년 자신이 맞이한 생의 마지막 순간들이라는 실존적 위기보다는 일종의 사회적 쓸모에 주목한다. 노년의 의미에 천착한 보부아르는 노년을 일의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노년의 삶은 언제나 당대의 사회적 관계에 의존해 있기 때문이다. 보부아르는 그래서 역사적인 시선에서 노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상세하게 추적한다. 이 작업을 통해 남성중심주의적인 서양의 역사에서 똑같이 비가시적 존재로 여겨져왔던 노인과 여성에 대한 시선을 보부아르는 이렇게 압축한다.
노인은 활동 능력이 있는 한 그 집단에 통합되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존재가 집단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나이 든 남자 성인일 뿐이다. 능력을 상실하게 되면 그때서야 ‘딴사람’으로 보이게 된다. 그때부터 그는 여자보다도 훨씬 더 근본적으로 순수한 물체가 되는 것이다. 여자는 사회에 필요한 존재이다. 그렇지만 노인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이다. 그는 이제 교환 화폐도, 재생산자도, 생산자도 아니며, 단지 짐에 불과하다.10)
물론 역사나 문화적 전승은 그 반대의 이야기, 존경해야 할 노년에 관한 이야기들도 전한다. 노년의 지혜가 공동체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는 이야기들이 그렇다. 대국이 낸 수수께끼를 풀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노모의 이야기처럼11) 켜켜이 쌓인 삶의 경험은 공동체의 존속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또 대부분의 전통사회에서 노년은 젊은 세대가 밖에서 일할 수 있도록 육아와 가사노동 등 배후 지원을 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노년의 삶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에서조차 ‘쓸모’는 빠지지 않는다. 이렇게 삶의 의미를 쓸모로 보는 한, 노년의 삶은 어쨌든 비효율적이었다. 하물며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노쇠에 빠진다면 더 말할 것이 없다. 그래서 보부아르는 이런 쓸모의 이야기를 서구사회를 지탱해온 도구적 합리성의 이념과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에 연결짓는다. “한 인간이 인생의 마지막 15년 또는 20년 동안 인수를 거절당한 불량품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 서양 문명의 실패를 나타낸다.”12)
보부아르의 책이 1970년에 나왔고, 그 무렵 우리나라는 여전히 노인을 공경하던 문화가 강건했을 때이므로 ‘서양 문명의 실패’라는 말은 나름의 의미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 사회라면 어떨까? 그 실패는 분명 시장경제 체제의 확산과 함께 전염되었다. 노인혐오 표현이 넘쳐나는 세상, 심지어 스스로를 무력한 존재로 보는 자기비하적 관점이 세계 어느 곳에서나 팽배한 오늘날에는 그 ‘실패’를 굳이 ‘서양 문명’에 제한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13) 전 세계적인 고령화와 그런 고령화를 심화시키는 저출생, 그리고 그로 인한 고령자 부양 부담의 문제는 결코 낙관적인 전망을 허락하지 않는다. 1970년대의 경제위기 이후 신자유주의는 거의 모든 세계로 확산한다. 그 신자유주의가 낳은 각자도생의 문화는 노년의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더욱 경직시킨다.
그런데 노년의 삶을 폄훼하는 문제를 무엇이든 효용성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흔히 말하는 도구적 이성이 지배하는 시장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적절할까? 물론 그런 접근방식이 가진 설득력은 분명하다. 배제와 혐오라는 사회적 병리 현상의 원인을 진단하고 그 대안을 마련하고자 하는 새로운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노년의 삶을 폄훼하는 문제 역시 시장경제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는 사회체제 전반을 바꾸지 않으면 해결이 요원할 것이다.14) 하지만 이러한 진단과 해법의 선명성은 그 선명성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시야를 좁힐 위험이 있다. 예컨대 시장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모순이 해결되면 노년의 삶을 폄훼하는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사실 타인의 삶을 자신의 안위를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생각하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가 새로이 만들어낸 삶의 방식은 아니다. 모질고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은 인류 역사에서 언제나 있었고, 노년의 삶을 폄훼하는 시선은 인류 역사 내내 사라진 적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시스템이 노년의 삶을 폄훼하는 시선과 무관하다는 것은 아니다. 치열한 경쟁 시스템이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을 폄훼하는 생각을 증폭시키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거나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해당 문제를 둘러싼 복잡한 문맥을 감출 수 있다.
예를 들어 순수하게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이제까지 노년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오늘날 선진국이라 불릴 수 있는 나라 중 대부분에서 고령자 세대는 청년세대와 비교해 더 부유한 편이기 때문이다. 시장은 이제 가난한 청년세대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더 부유한 노년세대에 의지해야 할 판이다. 초고령사회로의 이행은 (비록 일시적인 효과일 수도 있지만) 이런 변화를 가속화할 것이다.15) 더 나아가 사회적 의제를 선정하고 해법을 찾아야 하는 정치적 합의의 과정에서 고령자가 비고령자보다 더 많은 사회라면 어떤 결정들이 이루어질까? 이러한 변화는 인류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노인이 젊은 사람보다 더 많은 세상, 그것은 상상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일이 조만간 현실이 될 것이라 예고되었다. 게다가 생명공학 기술은 노년의 삶과 관련해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세간의 말이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님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노화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제 시장경제 비판의 프레임을 넘어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을 건드리고 있다. 보부아르의 말처럼 노년의 의미가 당대의 사회적 관계와 연관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면, 이제 노년의 의미는 달라질 것이 틀림없다.
3. 기술의 발전, 그리고 노화에 관한 발칙한 상상
속된 세상에서 신성한 것의 흔적을 뒤쫓은 엘리아데의 말에서 강조점을 옮기면, 신성한 것들의 흔적을 찾는 일은 점점 더 어려운 세상이 되고 있다. 인류는 그동안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신성성을 부여해왔다. 오래된 문화에서 볼 수 있듯 신성한 것들은 대개 터부(taboo)와 관련이 있다. 그것은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이 넘볼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 경계를 넘어서는 일은 불온하고 발칙한 것이어서 위험한 후과를 각오해야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생명을 조작하는 일이다. 셸리(Mary Shelly)는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통해 인공 생명을 창조하는 세상을 상상하고 그 터부를 넘어선 대가로 남겨질 것은 비극이라고 경고한다. 그렇게 생명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신성한 것으로 여겨져왔다. 하지만 인류가 유전자를 찾아내고 조작할 수 있게 되면서 사정이 변하고 있다.
신성한 것들을 세속화하는 과정은 근대 이후 점점 더 가속하고 있다. 그 첨병은 물론 과학과 기술이다. 근대과학은 세계를 신의 손에서 떼어내 마치 장인의 손에서 만들어진 시계처럼 보기를 요구한다. 시계가 잘 작동하는 한 우리가 시계 제작자를 찾을 일은 없다. 세상이 움직여가는 질서를 파악할 수만 있다면, 그 세상을 우리의 뜻대로 조작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생명은 오직 신이 관장하는 영역이라는 생각은 점점 더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인류가 마침내 플라스크 안에서 호문쿨루스를 탄생시키는 연금술사가 될 날도 머지않은 것처럼 보인다. 신성한 것들의 영역이 위축됨으로써 터부의 경계도 무뎌진다. 피그말리온이 자신이 조각한 사물과 사랑에 빠졌듯 인간이 기계인간과 대화하고 위안을 얻는 일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인류가 자연이 부여한 한계를 부정할 수 있는 존재자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이 신의 노여움과 벌로 여겨지던 팬데믹을 극복할 힘을 갖게 된 것은 신앙이 아니라 과학의 힘 덕이다. 생명을 다루는 일은 이제 종교의 영역이 아니라 과학과 기술의 영역이 되었고, 신의 명령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민주적 합의에 의해 결정될 일이 되었다. 그래서 셸리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 ‘부자연스러운’ 경향이 쉬 사그라질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시간의 경우는 어떨까?
시간과 운명을 관장하는 신들의 이야기처럼 시간이야말로 인간이 감히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들 중 으뜸이었다. 그런데 이 당연한 믿음에도 균열이 생긴다. 누구에게나 공평할 듯 보이던 시간이 관찰자의 이동 속도에 따라 달리 흐르는 것처럼 경험된다고도 하고, 심지어 중력의 차이에 따라 달리 흐를 수 있으며, 어쩌면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평행 세계가 동시에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시간을 설명하기 위한 과학적 이론과 가설은 시간을 세속화하고, 그래서 어쩌면 시간을 조작할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물론 인간이 시간 자체를 조작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대신 우리가 시간을 느끼는 방식, 곧 시간 체험은 변화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시간에 대한 생각들도 변화하고 있다.
시간 패러다임의 변화는 우리의 정체성과 사회적 관계도 변화시킨다. 한 개인의 정체성이 그저 그 사람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고립된 정체성’은 형식적이고 아무런 내용도 없는 공허한 추상적 구성물일 뿐이다. 세상 아무것도 없이 자신만을 생각하는 정체성이란 마치 아무 배경 없는 사물을 생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그가 살아가는 시간, 그가 살아가는 공간(그것이 물리적이든, 시간과 거리를 초월한 디지털 시대의 네트워크 속에서든), 그리고 그 시공간 속에서 만나는 모든 것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의미 네트워크 속에서만 내용을 갖고 규정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체성은 관계적이다.
인터넷이 확산하던 시기에 거겐(Kenneth Gergen)의 분석은 이러한 맥락에서 시사적이다. 거겐에 따르면 “100여 년 전, 사회적 관계는 대부분 마음 편히 걸을 수 있는 거리에 제한되었다. (…) [오늘날]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특히 산업화된 서구인들에게 작은 대면 커뮤니티는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16) 거겐의 분석 이후로 한 세대가 지난 오늘날, 사회적 관계의 조건으로서 시간과 공간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의지만 있다면 누구에게나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 시공간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구 반대편에서도 서로 얼굴을 마주한 채 큰 불편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술적 수단이 있기 때문이다. 거겐의 말처럼 오늘날 우리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지구 반대편에 사는 친구가 무엇을 하는지를 거의 실시간으로 확인하지만, 정작 이웃집에는 누가 사는지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16)
비슷한 맥락에서 로자(Hartmut Rosa)도 근대 이후 기술의 발전이 우리 사회체제를 더 빠르게 가속(acceleration)함으로써 나타난 효과를 분석한다. 예컨대 우리는 기술의 발전을 통해 거리와 시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됨으로써 더 많은 여유시간을 갖게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늘 시간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경증과 불안이 일상의 질환이 된 까닭이기도 하다.17) 시공간에 대한 우리의 패러다임이 변화함으로써 우리의 ‘생활세계’도 변화하고, 그에 따라 그 생활세계에 기초해서 구축하는 삶의 의미도 변화한다.
인류는 시계를 발명함으로써 시간을 계산했고 인공적인 빛을 통해 밤과 낮의 구분을 무력화했다. 그리고 기차와 자동차의 발명은 거리로 인한 시간을 단축함으로써 우리는 시간을 인간의 의지에 따라 조작할 수 있는 것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시간 관리’라는 말은 그런 변화를 상징한다. 그리고 마침내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거리의 장벽은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시간이 거리와 속도의 함수라면, 또는 단위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의 양으로 환산된다면 가속화된 현대인의 삶에서 시간은 조작 가능한 어떤 것일 테다. 이러한 기술문명의 힘, 같은 의미로 반자연적인 시간성은 그 시간 위에 펼쳐지는 삶의 과정을 이전과는 다른 시선에서 보게 만든다.
노화와 죽음은 바로 그 시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보부아르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에게 있어서 현실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시간화하는 것”18)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랜 세월 문화적 전승을 통해 우리에게 새겨진 시간성은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노화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결정해왔다. 이제 거꾸로 시간을 바라보는 프레임이 달라진다는 것은 생의 의미를 결정하는 프레임도 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 앞선 두 변화, 생명과 시간이 인간의 손에서 다루어질 수 있게 된 효과로 죽음과 노화의 의미도 달라지고 있다. 노화와 죽음은 이제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이 아닐지 모른다. 그래서 극복해야 하는 한계처럼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독특한 진화 전략을 가진 홍해파리는 발생이 다 끝나 성체로 살아가다가 환경이 좋지 않거나 노화가 진행되면 생활사를 되돌려 어린 유생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또 보통의 쥐는 수명이 2년이나 3년인 데 비해 벌거숭이두더지쥐는 30년이 넘게 산다. 벌거숭이두더지쥐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노화가 멈추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 홍해파리의 전략이나 벌거숭이두더지쥐를 따라 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4. 노화라는 질병, 그 인식 전환의 효과
세계 곳곳의 실험실에서 항노화(anti-aging) 연구가 진행 중이다. 이는 우리가 노화를 바라보는 관점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실제로 2018년 세계보건기구(WHO)는 고령(old age)에 질병코드(ICD) XT9T(ageing related)와 MG2A(ageing-associated decline in intrinsic capacity)를 부여함으로써 노화를 당뇨, 암, 퇴행성 뇌질환 등 여러 노인성 질환의 선행 질환으로 인식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만약 우리가 노화를 통제할 수 있다면 각종 노인성 질환을 예방하거나 좀 더 쉽게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가 빠르게 고령화하고 있고, 고령자들의 건강과 관련된 사회적 비용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노화를 질병으로 보려는 생각의 이면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항노화 연구는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의 한 연구에서는 세포의 정체성, 곧 게놈을 변화시키지 않고도 세포 노화를 역전시킬 방법을 찾았다고 보고했다. 그것도 유전학적 방법이 아니라 화학적 방법으로 가능하다고 말한다.19) 그 말의 의미는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노화를 통제할 수 있는 기술적 통로가 열렸다는 것을 뜻한다. 비유하자면 (화학적으로 제조된) 알약을 꾸준히 먹는 것으로 노화를 지연시키거나 심지어 젊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게놈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개인의 정체성 변화도 없을 수 있다. 우리의 선조들이 상상했던 젊음의 샘물이 이제 인류의 시야에 들어와 있는지 모른다.
현재까지 진행된 다양한 분자생물학적 연구에 따르면 노화의 세포·분자적 특징은 12가지로 알려져 있다.20) 노화의 원인과 노화를 유발하는 세포 기전(cellular mechanisms)이 밝혀진다면 노화를 기술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유전체가 불안정하다면 손상된 세포를 수리하고, 수명의 시계인 텔로미어가 줄어든다면 텔로미어를 연장시키는 효소를 활성화하면 된다. 게다가 이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과학 소식은 누군가에 의해서든 재빠르고 광범위하게 공유된다. 디지털 플랫폼은 누구든 관심만 있다면 이런 흥미롭고 새로운 소식을 들려줄 준비가 되어 있다. 이미 사람들은 새로운 소식들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며 항노화 시장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만성 염증은 노화를 유발하는 한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홈쇼핑에서는 만성 염증에 대항하는 건강 기능성 식품들 광고가 넘쳐난다. 또 사람들은 장내 미생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기능적으로 특화된 유산균을 먹는다. 장내 미생물의 불균형 역시 노화의 한 원인이다. 이미 사람들의 마음은 노화를 통제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정말 인간이 노화를 통제할 수 있을까? 인류의 과학과 기술이 자연이 부여한 한계를 실제로 넘어설 수 있을까? 인간은 지구상의 다른 종들과 달리 자연이 설정한 한계를 넘어서왔다. 그에 관한 기록이 곧 기술문명의 역사이기도 하다. 게다가 당장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노화를 통제할 수 있느냐는 기술적 가능성보다 그와 관련된 우리 인식의 변화다.21) 인식의 변화는 우리를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해 과거와는 다르게 생각하도록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노화는 결코 불멸의 신이 자신을 닮은 인간을 만들면서 신과 인간 사이에 차이를 두기 위해 걸어놓은 깨질 수 없는 제약이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인도의 한 매체는 인간이 노화에 저항하고 ‘영원한 젊음’에 대한 꿈을 실현할 수도 있다는 소문들을 실어 나르면서 이렇게 마지막을 맺는다. “영원한 젊음을 추구하는 것은 단순한 미학의 문제가 아니라 활력과 장수에 대한 인류의 본질적인 욕망을 건드리고 있다. 연구가 발전하고 획기적인 치료법이 등장하면서 항노화 치료의 미래는 우리가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고 경험하는 방식 자체를 변화시켜 노화에 대한 규범을 다시 쓸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22)
사람들의 인식 변화에 주목하는 대중문화는 우리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한다. 한 SF 작가는 인간보다 뛰어난 인공지능(AGI)의 도움을 받아 인간이 죽지 않고 계속해서 원하는 나이로 젊어질 수 있는 세계의 도래를 상상한다.23) 그런 세계에서 인간의 삶은 어떨지 미리 시뮬레이션해보는 것이다.24) 어느 날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할머니가 엄마보다 더 어린 모습으로 새 남편과 자신보다 어린 이모와 함께 나타난다. 그래서 엄마가 가족의 위계와 혼란을 피하기 위해 다시 더 젊어져야 하는 것은 아닌지를 고민하는 모습이 그런 것이다. 죽음과 노화가 사라진 시대가 되면 가족의 개념은 뭉그러지고 생의 시간은 취향에 따라 언제든 되돌릴 수 있는 것이 된다. 작가는 그 시대를 이렇게 상상한다. “정말로 열망할 것이 없는 시대”,25) 그래서 권태로 가득 찬 시대.26)
이러한 SF적 상상이 실제로 현실이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이야기가 과거 우리 선조들이 상상했던 티토노스와 스트럴드블럭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죽음과 노화에 대한 우리의 관념에는 이제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 이제 인류는 노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노쇠를 불가항력의 숙명이 아니라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분명 이러한 이야기가 지나친 과장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그 과장이라는 말의 의미가 신화적 상상력일 뿐이라는 말은 아니기 쉽다. 실제로 우리는 조만간 인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없었던 고령자들의 시대를 살아갈 판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우리 선조들은 노인이 젊은이보다 많은 세상은 상상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라고 말했을 것이다. 노화와 죽음을 극복한 세상이라는 상상은 적어도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분명 과장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과장은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미리 가늠하고 준비하라는 경고의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사람들의 시선은 더 이상 과거로 향해 있지 않다. 한때 우리는 우리의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를 알고자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제 다가올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에 대해 더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운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200여 년 전의 사람들은 미래의 후손이 자신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면 우리는 200여 년 후에 지금 세상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지를 의심한다.
죽음과 노화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은 날이 갈수록 발칙해지고 있다. 신중한 사람이라면 이 도발적인 상상의 후과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이가 들어 노쇠해지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리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일이었다. 이번 생의 불평등은 죽음을 통해 리셋될 수 있다. 그래서 노화와 죽음은 인간이 모두 평등한 존재라는 가장 분명한 증거였다. 하지만 과학과 기술이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면 어떻게 될까? 그 전조는 이미 보이는 듯하다. 살기도 어렵지만 (의료기술의 발달로) 죽기도 쉽지 않은 시절이다. 미국의 억만장자 존슨(Bryan Johnson)의 실험처럼 돈 많은 사람은 더 젊게, 그리고 더 오래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미래에는 젊음도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 구매해야 하는 것이 될까? 아니면 보편적 의료보험으로 누구나 값싸게 회춘할 수 있을까?
이제 우리는 조만간 다가올 미래의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숙고해야 하는 시점에 몰려 있는 듯 보인다. 보부아르의 말처럼 노년의 의미가 사회문화적 조건에 따라 결정된다면, 그리고 인류가 여전히 쓸모로 삶의 의미를 말하고자 한다면, 마침내 노화와 노쇠를 통제할 수 있는 기술적 힘이 인류에게 주어졌을 때 노년의 진짜 쓸모가 무엇일지, 또 그런 시절에 생의 의미는 무엇에 빗대 얻어질지.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늙어감에 대하여: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돌베개, 2021) 7~8면.
2) Martin Heidegger, Sein und Zeit (Tübingen: Max Niemyer Verlag, 1972) 250면.
3) 아메리, 앞의 책 41면.
4) 미르치아 엘리아데 지음, 이은봉 옮김 『성과 속』(한길사, 1998) 170~71면.
5) 같은 책 170면.
6)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홍상희·박혜영 옮김 『노년: 나이듦의 의미와 그 위대함』(책세상, 2002) 133면 참조.
7)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걸리버 여행기』(문학수첩, 1992) 259면.
8) 같은 책 263면.
9) 같은 책 263~64면.
10) 보부아르, 앞의 책 120면.
11) 우리나라의 구비설화 가운데 ‘고려장이 없어진 유래’는 공동체가 겪어보지 못한 문제에 대해 삶의 경험이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고려장이 없어진 유래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지게형’과 ‘문제형’이다. 지게형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아들이 노모를 산에 유기할 때 함께 온 손자가 노모를 버린 제 아비의 지게를 다시 가져가면서 나중에 아비를 버릴 때 써야 한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다. 비슷한 이야기가 그림 형제의 민담에도 있다. 문제형은 산에 버려진 노모가 대국이 낸 수수께끼 세 가지를 풀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이야기다. 대국이 낸 수수께끼는 다음과 같다.ⅰ) 위아래가 똑같은 통나무의 밑과 위를 가려낼 것, ⅱ) 코끼리의 무게를 잴 것, ⅲ) 똑같이 생긴 말의 어미와 새끼를 구별해낼 것. 산에 버려진 노모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어렵지 않게 풀어냄으로써 공동체를 위기에서 구해낸다. ‘고려장이 없어진 유래’에 관한 이야기는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큰 얼개는 거의 같다. 『한국구비문학대계』, 「고려장」 항목 참조. https://gubi.aks.ac.kr/web/TitleList.asp.
12) 보부아르, 앞의 책 16면.
13) 미국사회에서 연령차별의 문제를 고발한 애플화이트(Ashton Applewhite)는 노인 차별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은 노년에 든 사람들이 스스로를 비하하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애슈턴 애플화이트 지음, 이은진 옮김 『나는 에이지즘에 반대한다: 새파랗게 젊은 것과 고집불통 노인네가 모두 당하는 차별』(시공사, 2016) 참조.
14) 예를 들어 프레이저(Nancy Frazer)는 우리 시대가 돌봄에 취약해진 까닭을 자본주의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에서 찾는다. 같은 맥락에서 자본주의를 그저 하나의 경제 모델로 볼 것이 아니라 사회체제 자체라고 보자고 제안한다. 문제의 해결은 따라서 사회체제 전반을 완전히 새로운 시선에서 볼 때 가능하다고 분석한다. 이에 관해서는 낸시 프레이저 지음, 장석준 옮김 『좌파의 길: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서해문집, 2023) 참조. 물론 이렇게 완전히 판을 바꾸는 일은 결코 녹록한 도전이 아니다. 완전히 새로운 사회적 상상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15) 시장경제 시스템에서 두둑한 지갑을 가진 사람이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시장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 과거보다 더 건강하고 소비 여력이 큰 세대가 고령자 세대로 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영교 「더 건강하고 젊은 노인들, 소비패권 쥐게 된다」, 『동아일보』(2022년 1월 2일),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220101/111049120/1 참조.
16) Kenneth J. Gergen, “Social Saturation and the Populated Self,” Identity, ed. Anthony Elliott (London & New York: Routledge, 2015) 64면.
17) 하르트무트 로자 지음, 김태희 옮김 『소외와 가속: 후기 근대 시간성 비판』(앨피, 2020) 참조.
18) 보부아르, 앞의 책 505면.
19) David A Sinclair, Jae-Hyun Yang et al., “Chemically Induced Reprogramming to Reverse Cellular Aging,” Aging 15.13 (Jul. 12, 2023). doi:10.18632/aging.204896.
20) 12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다. 유전체 불안정성, 텔로미어 길이의 단축, 후성유전 변형, 단백질 항상성 상실, 자가포식의 저하, 비정상적 영양소 감지 능력, 미토콘드리아 기능 장애, 노화세포 증가, 줄기세포 고갈, 세포 간 신호전달 이상, 만성 염증, 장내 미생물의 불균형. 이러한 논의의 얼개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안지현·이민정 『항노화치료제』, KISTEP 브리프 107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2023). https://www.kistep.re.kr/board.es?mid=a10306040000&bid=0031.
21) 노화와 노쇠에 관한 대중의 인식에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은 아마도 하버드대학의 싱클레어(D. A. Sinclair)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는 『노화의 종말』(부키, 2020)이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졌다. 싱클레어는 수많은 노인성 질병의 공통 원인은 바로 노화라고 규정하고, 조만간 인류는 노화를 극복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22) “‘Reversing Ageing Process’: How New Anti-aging Techniques Are Evolving to Keep People Young,” The Economic Times News (Aug. 21, 2023). https://economictimes.indiatimes.com/news/how-to/reversing-ageing-process-how-new-anti-aging-techniques-are-evolving-to-keep-people-young/articleshow/102898325.cms?utm_source=contentofinterest&utm_medium=text&utm_campaign=cppst.
23) 닐 셔스터먼 지음, 이수현 옮김 『수확자』(열린책들, 2023) 참조. 2019년에 작품을 쓴 셔스터먼(Neal Shusterman)은 인류가 죽음과 노화를 극복하는 시점을 2042년으로 잡는다. 그리 머지않았다.
24) 대중문화의 효과는 우리의 생활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있다.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는 낯선 것들을 친숙하게 만든다. 어느 날 갑자기 광화문 네거리에 피카츄가 실제로 나타난다 해도 사람들은 놀라워하면서도 반가워할 것이며, 카톡의 라이언이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 말을 걸으면 사인이라도 받고자 할 것이다. 죽음과 노화에 관한 상상도 마찬가지다.
25) 같은 책 58면.
26) 같은 책 226면 참조. 셔스터먼은 여기서 로드러너(roadrunner)를 추적하는 코요테가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만화영화를 예로 든다. 끊임없이 되살아날 수 있다면, 같은 날이 매일 반복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쇠락이라는 축복이 없다면 생의 시간은 권태로 가득 찰 것이다.”
│박승억│
* 이 논문은 2020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20S1A6A3A03063902)
朴勝億 숙명여자대학교 기초교양학부 부교수, 최근 논문으로는 「현상학적 사회공학: 후설 현상학의 실천적 모색」(2024)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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