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밖 57호][이론과쟁점] 폭력, 취약성 그리고 용서 불가능성: 버틀러의 ‘비폭력의 윤리-정치학’이라는 꿈/ 김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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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령

1. 용서에 대하여: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1942년 폴란드 렘베르크의 야노프스카 집단수용소에 수감 중이던 유대인 비젠탈(Simon Wiesenthal)은 부역노동으로 차출된 한 야전병원에서 죽음을 앞둔 SS대원 카를(Karl)을 만난다. 눈은 멀고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임종실에 누워 있던 이 21세의 SS대원은 자신이 1년 전 가담했던 유대인 민간인 300여 명을 학살한 범죄행위를 고백하고 사죄하고자 간호사에게 ‘한 명의 유대인’을 불러달라고 부탁했고, 비젠탈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카를은 비젠탈 앞에서 자신의 죄과를 속죄하고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자기가 행한 범죄행위와 그로 인해 겪고 있는 가책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다.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용서의 말을 건네지 못하고 침묵으로 마무리된 이 만남을 반추하는 비젠탈의 에세이 「해바라기」(“The Sunflower”)를 읽는 독자는 그가 마지막에 던진 이 질문에 대해 답하기를 요구받는다. 그리고 훗날 비젠탈은 세계 각지에서 보내온 응답들을 갈무리해 한 권의 책을 출간했다.1)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죽음을 앞두고 깊은 가책으로 고통에 빠져 있는 이 청년에게 용서의 말을 건넬 수 있었을까? 그가 행한 끔찍한 ‘범죄행위’를, 또는 그것을 행한/행할 수밖에 없었던 ‘그’를 용서할 수 있을까? 나에게 그럴 자격이, 희생자를 대신에 용서의 말을 건넬 권한이 있는가? 도대체 용서란 무엇인가? 아렌트(Hannah Arendt)는 우리 인간에게 ‘용서의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무엇을 행하는지도 모르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지 못한 채 행했던 일들이 야기하는 예측할 수 없는 결과들을 되돌릴 수 없다는 무능력을 치유할 방법은 용서밖에 없다. 아렌트에 따르면 ‘행위의 환원 불가능성’이라는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오직 ‘용서의 능력’뿐이다.2) 우리는 용서받음으로써 자신이 행한 일의 결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회복할 수 없는 행위의 결과에 묶이게 될 우리 인간은 용서를 통해 서로를 과거에 행한 일로부터 해방시켜줌으로써 ‘자유로운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알지 못하고 행한 것으로부터 부단히 인간을 해방시켜야만, 인간의 삶은 계속될 수 있다”.3)

그러나, 누가, 무엇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인가?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범죄에 대한 용서 불가능성을 역설하는 장켈레비치(Vladimir Jankelevitch)의 『시효 없음』
(L’Imprescriptible)을 읽으면서, 이 물음에 천착한다. 이 책에서 장켈레비치는 “용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첫째, “용서는 용서가 ‘요청돼야만’ 용서에 동의하거나 용서에 동의할 가능성을 고려할 수 있다는 원칙”에 있다. 용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 용서를 빌어야 한다. “이는 자기 잘못을 자백하지 않는 자, 뉘우치지도 않고 명시적이든 그렇지 않든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 자를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뜻이다.4) 반성하지 않는 자를 우리는 용서할 수 있는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가해자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 자백과 사죄와 요청은 용서의 전제다. 그렇다면 잘못을 인정하고 죄를 고백하고 사죄하는 가해자는 ‘모두’ 용서받을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장켈레비치가 주장하는 두 번째 이유 때문이다. 범죄가 근본적인 악의 경계를 넘고 인간적 척도를 넘어 ‘비인간적인 것’이 되었을 때,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행위여야 하는 ‘용서’는 논의될 수 없는 것이 된다.5) 홀로코스트가 바로 그런 범죄다. 그것은 누군가의 행위나 생각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그/그들이 바로 그/그들이기 때문에 발생한 폭력, 즉 그/그들의 존재 자체에 가해진 폭력이었다. 과오도 없이, 행위도 없이, 그/그들이 그저 그 자신이기 때문에 절멸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이 반인륜적인 전대미문의 범죄는 “어떤 다른 잔혹한 범죄와도 비교 불가능한 범죄”였다.6) 이러한 사실이 홀로코스트를 다른 학살범죄와 가르는 특징이 되고,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 홀로코스트는 ‘용서 가능성’을 넘어서는 범죄가 된다. 

비젠탈은 바로 그 ‘용서 (불)가능성’의 경계를 직면해야 했다. 그의 에세이 「해바라기」는 전쟁범죄자 카를의 가책이 그의 고백을 들어야만 했던 유대인 포로수용소 수감자 비젠탈에게 전가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죽음에 직면한 청년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고 동정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비젠탈은 그의 영혼에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었을 용서의 말을 건네지 못하고 침묵했던 자신의 행위에 가책을 느낀다. 가책을 느낄수록 그는 용서 (불)가능성이라는 문제에 더 파고든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는가?7)

2. 용서가 없다면, 무엇이 남는가? 

용서 (불)가능성에 대한 성찰에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물음들이 부착된다. 사죄가 용서의 전제조건이라고 하지만, 가해자가 사죄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조건이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가해자가 사죄하고 용서를 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신뢰할 수 있을까? 그/그들은 진정으로 뉘우치고 사죄하고 있는가? 그리고 ‘자격’의 문제가 있다. 누가 용서할 수 있는가? 누가 용서할 자격이 있는가? 희생자를 대리해서 용서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희생자를 모독하는 월권 행위 아닌가? 가해자가 지상에서 사라지고 난 후 후손이, 가족이나 공동체가 당사자를 대신해 사과하고 사죄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는가? 역으로 죽은 희생자를 대신해 어떤 대리자, 가족이나 공동체가 가해자의 사죄를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일은 가능한가? 아니면 용서는 오직 당사자들의 일이어야 하는가? 

‘용서의 능력’이 과거의 사건을 치유하고, 그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올 수 있는가? 과거의 사건은 환원 불가능하다. 그것은 지나갔고, 그 피해는 ‘회복’될 수 없다. 상실한 것은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다. 폭력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용서가 ‘요청’되기도 한다. 다시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삶을 이어가기 위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반복적 회한과 상처 입은 분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용서를 통해 과거의 트라우마를 ‘치유’해야 한다고 말해지기도 한다.8) 그러나 이와 같은 용서의 기제는 기만적이지 않은가?9)

장켈레비치는 용서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고, 용서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인간적인 일이기에 인간의 척도와 한계를 넘어서는 범죄나 폭력에 대해서는 용서가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데리다는 당초 용서가 악을 넘어서야 하는 일이라면, ‘악을 넘어서는 용서’라는 것 자체가 이미 인간의 척도를 넘어서야만 가능한 일이 아닌지 되묻는다. “용서는 인간적인 무엇, 인간의 고유한 특성, 인간의 능력일까? 아니면 신에게만 속한 것일까?”10) 역사적·인간적 차원에서의 불가능성을 뛰어넘어야만 하는 용서는 오로지 신의 일, 신적인 차원에서만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이 지상에서 진정한 용서는 불가능한 것인가? 지상에서의 용서가 불가능한 것이라면, 용서가 없는 이 지상에는 무엇이 남는가?

용서의 정반대에 보복이 있다. 아렌트에 따르면 “보복은 죄에 대항하는 반동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고 자동적인 반응이다. 그래서 예상하거나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보복은 처음 벌어진 행위의 결과에 대한 반응으로 끝나지 않는다. 보복은 모든 당사자를 그 과거 행위에 묶어두고 반응의 연쇄를 허용하면서 무한한 과정이 되도록 만든다. 그렇게 보복은 무한한 연쇄로 빠져들 수 있다. 그러나 자동적 반응인 보복과 달리 용서는 예기치 못한 방식의 반응이다. 그것은 자유를 약속하는, 과거 행위로부터의 초월이다. “용서는 단순한 반동이 아니라 반동을 유발하는 행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새롭게, 갑자기 일어난다. 따라서 용서하는 자와 용서받는자 모두를 그 행위의 결과에서 자유롭게 해준다.”11)

이 지상에서 보복의 무한한 연쇄를 끝내기 위해 용서 외에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은 ‘법적인 처벌’이다. 처벌은 용서의 정반대는 아니지만 환원 불가능한 과거 행위의 결과를 복원하려는 시도다. 아렌트는 공정한 처벌이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전제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처벌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12) 공정한 법적 절차와 처벌은 사적인 분노와 보복이라는 폭력의 원환(圓環)을 공적인 정의의 법정으로 옮기면서 용서 가능성의 영역으로 가져간다.13) 아렌트는 공적인 세계, 정치적 공론장, 사법적 정의의 실현에 기대어서만 우리는 용서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렌트가 기대하는 것처럼, 법이 공정한 처벌을 통해 ‘보복적 폭력의 원환’을 잠재우고 용서의 능력을 보호할 정의의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 

3. 법과 폭력의 관계: 벤야민의 폭력 비판 

벤야민(Walter Benjamin)은 “폭력 비판이라는 과제는 그 폭력이 법과 정의와 맺는 관계들을 서술하는 작업으로 돌려 말할 수 있다”라고 지적하는 것으로 자신의 「폭력비판을 위하여」(“ZurKritik der Gewalt,” 1921)를 시작한다.14) 그리고 이어지는 비판적 고찰을 통해 법은 폭력의 외부가 아니라는 것을 밝힌다. 법은 폭력으로 세워지고(법 정립/제정적 폭력, rechtsetzende Gewalt), 폭력을 통해 유지(법 보존적 폭력, rechtserhaltende Gewalt)되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먼저 법 질서 안에서 폭력의 허용은 ‘목적과 수단의 관계’를 통해 정당화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폭력을 정당화할 가능성은 목적의 영역이 아니라 수단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즉 폭력적 수단은 정당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용 가능한 것이 된다. 자연법론은 개인들이 폭력을 사용할 권리를 국가에 위임하는 계약적 관계로부터 법이 성립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자연법론은 “마치 인간이 자신의 신체를 자기가 지향하는 목표를 향해 움직일 ‘권리’에서 문제될 것을 찾지 못하듯이, 정당한 목적을 위해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데서 하등의 문제를 보지 않는다”.15) 폭력을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는 자연법론에 맞서 실정법론(법실증주의)은 폭력을 역사적으로 생성된 결과라고 본다. 실정법론에 따르면 법이 수립된 후에야 적법성, 정당성이 발생하므로 실정법의 체계에서는 ‘승인된 폭력과 승인되지 않은 폭력’이 있을 뿐이다. 목적을 통해 법을 정당화하는 자연법론과 달리 실정법론은 수단의 적법성만을 판단한다. “자연법론은 목적의 정의(정당성)를 통해 수단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하며, 실정법은 수단을 정당화함으로써 목적의 정당성을 ‘보증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의미에서 “실정법은 목적의 무조건성에 대해 맹목적이라면 자연법은 수단의 조건성에 대해 맹목적이다.”16)

벤야민은 당대 유럽의 정치상황을 분석하면서 앞서 언급한 법의 수립과 보존에 작동하는 폭력이 어떻게 현실을 지배하는지 분석한다.17) 먼저, 법의 정립은 폭력의 발현이다. 법은 수립됨과 동시에 이전에는 없던 법적 강제를 작동시킨다. 우리는 정의로운 법의 목적에 대해 말하지만, 법의 기원이 되는 목적은 판단되지 않는다. 법은 수립됨으로써 정당화될 뿐이다. 한편, 법은 수립되고 나면 그 법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 강제되어야 한다. 이 ‘법 보존적 폭력’은 수립된 법의 질서 안에서 유지된다. 그런데 벤야민은 이 분리된 두 계기가 서로 얽히는 과정에서 법은 타락한다고 지적한다. 이 두 가지 폭력이 혼합된 현대국가의 제도를 대표하는 것은 바로 ‘경찰’이다. “경찰 안에서 법 정립적 폭력과 법 보존적 폭력의 구별이 지양되어 있다.”18) 경찰은 ‘치안 유지’라는 명목으로 명백한 법적 규제가 주어져 있지 않은 무수히 많은 경우에 시민들을 감시하고 그 삶에 개입한다. “경찰제도가 문명화된 국가들의 삶 속에 떠도는 결코 포착될 수 없고 도처에 확산되어 있는 유령 같은 현상이듯이 그것의 강제력은 형태가 없다.”19)

법의 정립과 보존은 폭력에 의존한다. 그리고 “수단으로서의 폭력은 법(Recht)을 정초하거나 보존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모든 가치를 잃게 될 것이다. 이러한 수단의 폭력 없이는, 이러한 권력의 원칙 없이는 어떠한 법의 문제 설정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모든 법적 계약(Rechtsvertrag)은 폭력 위에 정초된다”.20) 근대적 민주주의 질서 안에서, 그리고 ‘법의 지배’라는 국가 체제 안에서 법이 폭력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폭력의 바깥을 상상할 수 있을까? 

벤야민은 ‘폭력의 경계’, 폭력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폭력비판을 위하여」의 마지막 부분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고 가장 매혹적이며 가장 심오한 구절”로 나아간다.21) 여기서 벤야민은 수단이 아니라 발현으로서의 폭력, 운명처럼 압도하는 폭력의 폭발, 목적이나 정당성도 초월한 법의 정초를 보여주는 ‘신화적 폭력’을 그에 대립하는 ‘법 파괴적인’ ‘신적 폭력’과 구분하여 제시한다. “신화적 폭력은 (…) 신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도 아니고 신들의 의지의 발현도 아니며 무엇보다도 우선 신들의 존재의 발현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신화적 폭력의 탁월한 예를 ‘니오베(Niobe)의 신화’에서 볼 수 있다. 일곱 명의 아들과 일곱 명의 딸을 가진 테바이의 왕비 니오베는 한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낳은 여신 레토보다 자신이 더 행복하다고 자랑한다. 분노한 여신의 아들과 딸,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는 니오베의 일곱 아들과 일곱 딸을 차례로 죽인다. 이것은 현존하는 법을 위반해서 받은 형벌이나 범죄에 대한 처벌이 아니다. 교만(hybris)이라는 윤리적 죄에 대한 벌조차 아니다. 이 가혹한 응징은 “법을 침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운명에 싸움을 걸어 도박을 하기 때문”에 받게 된 숙명이다.22) “이 싸움에서는 언제나 운명이 승리할 수밖에 없고 법은 승리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낼 뿐이다.”23)

신화적 폭력의 직접적인 발현은 법 정립적 폭력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바로 이 사실, 즉 신화적 폭력과 법 정립적 폭력이 동형적이라는 사실로부터 법 정립적 폭력이 지닌 문제점이 가시화된다. 법 정립적 폭력이 스스로를 정당화할 때 제시하는 그 ‘목적-수단 관계’가 허구라는 사실, 즉 “법 정립은 [그 자체로 정당한 목적, 정당화할 수 있는 목적이 없는] 권력의 설정이며, 그 점에서 폭력을 직접 발현하는 행위”일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24) 벤야민에 따르면 신화적 폭력의 직접적인 발현은 모든 법적 폭력과 동일하며, 이 문제는 역사적 타락상을 통해 확인된다. 그러므로 “이 [타락한 법적 폭력의] 역사적 기능을 파괴하는 것이 과제가 된다”. 그렇게 신화적 폭력을 중단할 가능성으로 벤야민은 ‘신적 폭력’을 맞세운다.

벤야민에 따르면 신적 폭력은 모든 면에서 신화적 폭력의 반대상을 가리킨다. “신화적 폭력이 법 정립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 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이 경계를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은 경계가 없으며, 신화적 폭력이 죄를 부과하면서 동시에 속죄를 시킨다면 신적 폭력을 죄를 면해주고, 신화적 폭력이 위협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내리치는 폭력이고, 신화적 폭력이 피를 흘리게 한다면 신적 폭력은 피를 흘리지 않은 채 죽음을 가져온다.”25)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인다. “신화적 폭력은 그 폭력 자체를 위해 단순한 삶에 가해지는 피의 폭력이고, 신적 폭력은 살아 있는 자를 위해 모든 생명 위에 가해지는 순수한 폭력이다. 전자는 희생을 요구하고 후자는 그 희생을 받아들인다.”26)

신화적 폭력을 중단할 가능성, 법 파괴적인 신적 폭력은 무엇을 말하는가? 벤야민은 ‘개입하고 통제하는(shaltend) 폭력’이라 불릴 법 정립적 폭력이나, ‘그 폭력에 봉사하는 관리된(verwaltet) 폭력’이라 할 법 보존적 폭력을 ‘배척해야 마땅하다’고 말하면서, “성스러운 집행의 옥새와 인장이지 결코 그것의 수단이 아닌 신적 폭력은 베풀어 다스리는(waltend) 폭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맺는다.27)

4. 「폭력비판을 위하여」에 대한 버틀러의 독해

법을 파괴하는 ‘신적 폭력’이라는 이 메시지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벤야민은 “법은, 그 기원과 목적, 그 정치와 보존에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현전적이든 재현적[대표적]이든 간에 폭력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고 본다.28) 그리고 그가 ‘신화적 폭력’이라 불렀던 숙명처럼 쇄도하는 그 폭력의 대척점에 ‘신적 폭력’을 세움으로써 그것의 파괴 가능성을 현시한다. “신의 폭력은 (…) 법을 파괴한다.” 데리다는 벤야민이 법을 파괴하는 신적 폭력을 통해 ‘새로운 역사의 시대’를 말하고 있다고 읽는다. 데리다에 따르면 “벤야민은 신화의 지배 종언 이후에 신화적인 법 형식들의 마법적 파열 이후에, 슈타츠게발트(Staatsgewalt), 곧 국가의 폭력이나 권력 또는 권위의 폐지 이후에 뒤따르게 될 ‘새로운 역사의 시대’에 호소하고 있다”.29) 데리다는 벤야민이 제시하는 이 ‘새로운 역사의 시대’는 무정부주의적인 ‘새로운 정치적 시대’이기도 하다고 본다.30) 데리다는 벤야민의 이 ‘폭력비판의 역사철학’31)을 ‘메시아적 마르크스주의’라 부를 만한 ‘법 파괴적인 신적 폭력’의 도래를 제시한, 과감하지만 극단적이고, 매력적이지만 위험한 사유로 경계한다. “신의 폭력은 가장 정당하고,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역사적이고, 가장 혁명적이고, 가장 결정가능하거나 가장 결정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 자체로는 어떤 인간적 규정에도, 우리들의 어떤 인식이나 결정가능한 ‘확실성’에도 드러나지 않는다.”32) 데리다에 따르면, 벤야민의 이 글에서 신은 순수하고 본질적으로 정당한 폭력의 이름이다. “권위와 정의, 권력, 폭력이 그 안에서 하나를 이룬다.”33) 그리고 그 이름은 결정 가능성을 넘어서 있다.34)

벤야민의 ‘신적 폭력’에서 파국적 메시아주의의 흔적을 발견하는 데리다의 독해와 달리,35) 버틀러(Judith Butler)는 비폭력의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한다. 벤야민에게 법은 폭력의 대안일 수 없음이 분명하지만,36) 버틀러에 따르면, 벤야민은 불의한 법적 폭력이 강요하는 무비판적 복종을 거부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열어두고 있다.37) 벤야민의 「폭력비판을 위하여」를 “국가가 저지르는 법적 폭력”에 대한 비판이자 “시간을 거치며 이상을 실현한다는 진보적 역사관”에 대한 비판으로 읽는 버틀러의 독해는 벤야민에게서 ‘메시아적인 것’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의해 근거지워진다.38)

「폭력비판을 위하여」는 법적 폭력과의 단절로서 신적 폭력의 메시아적 힘을 상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버틀러에 따르면 그 신적 폭력은 강제력 같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벤야민이 말하는 신적 폭력이 드러나는 장소는 계명인데, 계명은 확고부동하고 행위를 가로막는 금지처럼 보이지만 법적인 강제나 금지와는 전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언급하는 것처럼 “죽여도 됩니까?”라는 물음은 “살인하지 못한다”는 계명으로 확고부동한 답을 얻는다. 그 확고부동성이 계명을 행동의 금지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계명의 확고부동성은 법적 강제가 아니다. 벤야민에 따르면 계명을 따르는 사람은 “홀로 있으면서 그 계명과 대결해야 하며 (…) 그 계명을 도외시하는 책임을 스스로 떠맡아야 한다”.39) 그렇게 인간은 계명과 홀로 싸운다. 이런 맥락에서 버틀러는 계명을 ‘윤리적 말걸기’로 해석한다. “윤리적인 말걸기의 형식으로서 계명은 개인들이 각자 본받을 누군가도 없이 싸워야 하는 대상이다.”40) 책임은 우리가 떠맡아야 하는 것이지만, 계명은 명령하지 않는다. 계명으로 인한 책임은 법적 강제에 대한 의무나 복종과 다르다. 계명은 법적 폭력처럼 강제하지 못한다. 이러한 해석에 근거해서 버틀러는 신적 폭력을 다른 정치적 국가나 실정법에 대한 대안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신적 폭력은 법적 폭력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가올 미래의 새로운 세상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지배하고 있는 모든 법적 폭력의 바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적 폭력은 파괴도 파국도 아니다. 「폭력비판을 위하여」를 발표한 1921년에 쓴 또 다른 미발표 글 「신학적·정치적 단편」(“Theleologisch politische Fragment”)에서 벤야민은 “역사적인 것은 어떤 것도 메시아적인 것과 관련될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신의 왕국은 역사적 동력(Dynamis)의 목표가 아니다”라고 확언한다.41) 벤야민에게 “메시아적인 것은 목적론적인 시간의 전개를 좌절시킨다(메시아적인 것은 결코 시간 속에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42) 메시아적인 것은 미래에 다가올 신의 왕국을 예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메시아적인 것’은 현재를 ‘지금-시간’(Jetztzeit)으로 변형하는 힘이다. 모든 현재가 ‘지금-시간’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현재는 보복과 복수의 순환을 통해, 일어났던 것의 빚을 변상하라는 요구를 통해 아주 빈번히 과거에 의해 요청되기 때문이다.”43) 그러나 과거에 매인 현재를 ‘지금-시간’으로 변형하는 것으로 벤야민의 ‘메시아적인 것’을 해석하면서, 버틀러는 그것을 용서와 연결하고 비폭력적 윤리-정치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5. 취약성: ‘비폭력의 윤리-정치학’의 근거

벤야민에 따르면 “모든 폭력은 수단으로서 법정립적이거나 법보존적이다”. 그는 법적 계약이 갈등을 비폭력적으로 조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법적 계약이 평화적으로 맺어지더라도 계약은 계약 당사자들에게 상대편이 계약을 위반하면 어떤 형태로든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또한 “계약의 결과와 마찬가지로 계약의 원천 역시 폭력을 요구한다”.44) 그러나 벤야민이 갈등을 해결하는 비폭력적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벤야민이 ‘비폭력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는 부분’은 공법 질서의 바깥, ‘사적인 개인들 사이에서’다. 벤야민은 “비폭력적 일치는 진심의 문화가 사람들에게 화합을 이룰 수 있는 순수한 수단을 제공하는 곳 어디에서나 가능하다”라고 적는다.45) 사적 영역에서 폭력이 배제된다는 것은 사적인 관계에서의 거짓말이나 기만이 처벌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벤야민에 따르면 담화(Unterredung, 협의, 상의)에서는 비폭력적 합의뿐 아니라 폭력을 원칙적으로 배제하는 일이 가능하다. 폭력이 배제된 담화의 가능성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바로 사적인 관계에서의 “거짓말은 처벌받지 않는다”는 사실이다.46) 거짓말이 처벌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권력과 법, 권위적 폭력뿐 아니라 정치적·법적·치안적 감시법을 벗어난다는 “이 사실에서 바로 폭력이 전혀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의 합의가 이루어지는 비폭력적인 어떤 영역이 존재한다는 점이 웅변되고 있는데, 본래의 ‘의사소통’의 영역, 즉 언어의 영역이 그것이다”.47) 버틀러는 이 대목에 기대어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비폭력의 윤리-정치학’과 연결짓는다. 

벤야민은 공법 질서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비폭력적 ‘합의 도출’은 ‘모종의 순수 수단’(ein reines Mittel)이자 ‘이해’(Verstehen) 본연의 영역인 ‘언어’를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버틀러는 이 언명에서 “폭력성에서 탈피해 모종의 비폭력적 대안을 구현하는 실천”의 가능성을 발견한다.48) 그녀는 ‘비폭력적’ 합의 도출이라는 기술을 법폭력을 ‘잠시 중단’시킬 가능성이자, “폭력에 주목할 수 있는 초법적 소통의 가능성을 마련한다는 것”으로 읽는다.49) 이러한 독해는 버틀러가 제안하는 ‘비폭력의 윤리-정치학’의 지향을 담는다. 

비폭력의 윤리는 흔히 비현실적이고 공허한 이념으로 여겨지고 일관된 주장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회의에 직면한다. 그럼에도 버틀러는 폭력 비판의 근거 위에서 비폭력의 윤리-정치학을 제안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비폭력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고자 두 가지를 주장한다. 첫째, 비폭력은 그저 윤리적 입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 즉 “개인의 윤리적 입장이라기보다는 사회적·정치적 실천이며, 그 궁극적 형태는 참여[…]를 동반한 저항”이라는 것이며, 둘째, 비폭력은 ‘영혼의 평화’에서 우러나오는 것도, 그것을 지향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공격성을 폭력과 동일시하지만, 버틀러는 비폭력 저항도 공격적으로 행해질 수 있으며 때로 공격적으로 행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50) 버틀러에 따르면 비폭력은 “절대적 원칙이 아니라 진행 중인 투쟁을 가리키는 이름”이다.51)

‘비폭력’은 추상적인 규범적 요청이 아니라, 지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불안정한 존재자들에게 주어진 현실의 구체적인 근거 위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윤리-정치적 선택이다. 그 첫 번째 근거는, 우리는 이 지상에서 우리 스스로가 선택하지 않은/선택할 수 없는 많은 이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자라는 사실에 있다. “지상에서의 공거(共居)에서 우리 스스로가 선택하지 않은 바로 그 특성이 윤리적·정치적 존재로서 우리 존재의 조건인 것이다.”52)

두 번째 근거는, 신체의 취약성과 생명의 상호의존성에 있다. “몸은 삶의 유한성, 취약성, 행위주체성을 암시한다. 피부와 살 때문에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고, 접촉과 폭력에도 노출된다.”53) 취약성은 공적 세계에 등장하는 몸의 피할 수 없는 조건이다. 몸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폭력적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공적 영역에서 내 몸은 내 것인 동시에 내 것이 아니다. 몸은 사회적 구성물이고, 사회적 권력이 끊임없이 개입하는 거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의 몸은 공적 공간에서 폭력에 더 취약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54) 따라서 신체적 취약성을 돌보는 일은 공적 세계의 정의를 수립하기 위해 고려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의제 중 하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취약성을 공적 세계에 등장하는 어떤 개인 또는 집단에 귀속되는 정체성 같은 것으로 고정시킬 수는 없다. 흔히 ‘취약 집단’이라는 표현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낙인화하여 수동적이고 시혜적인 약자의 위치로 표식하지만, 취약성은 배려를 요구하고 의존을 당연시해야 하는 무력함과 같은 속성이 아니다. 버틀러는 취약성을 “사회관계들을 연결하는 흐름이자 사회관계들을 지지하는 조건”이라고 규정한다. ‘취약성’ 또는 ‘취약 집단’과 같은 명명이 사회적으로 야기하는 부정적 작용, 낙인찍고 특정한 프레임에 묶어두는 권력의 작용을 거부하면서, 버틀러는 “취약성과 저항의 공조가능성”을 강조한다.55)

다른 한편, 비폭력의 윤리-정치학은 ‘체현된 삶의 상호의존성’에 착근한다. 버틀러는 개체주의적 사유에 반대하면서, 인간의 신체를 단수형으로 상상하면서 다른 신체들과의 불연속성과 자립을 상정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해러웨이(Donna Haraway)를 인용하면서, 버틀러는 “인간 신체를 환경, 사회적 관계, 인간·동물·기술의 구분을 가로지르는 자원과 유지의 네트워크로 복잡하게 이해되는 일종의 인프라에 대한 의존성으로서” 사유해야 한다고 제안한다.56) 이런 관점에서 취약성은 단지 개별 신체의 특질이나 성향이 아니라 ‘관계성의 양태’로 보아야 한다. 생명 유지의 차원에서나 사회적 차원에서, 신체/몸은 관계 의존성을 조건으로 삶 속으로 진입한다.57)

그렇다고 상호의존성을 언제나 아름다운 공존으로 상정할 수는 없다. 상호의존성은 때로 폭력적 양상을 띠고 분쟁을 야기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틀러는 상호의존적 취약성이라는 삶의 조건에 대한 이해가 비폭력의 윤리-정치학을 받쳐줄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폭력이 만연한 현실에서, 자기방어적 대응 폭력의 불가피성이 옹호되는 상황에서, 용서 없는 보복적 대응의 무한 연쇄인 분쟁과 전쟁이 지속하는 오늘날 ‘비폭력’은 불가능한 이념처럼 보인다. 그러나 버틀러는 ‘자기방어’를 위한 대응 폭력을 주장하는 진영에 맞서 지켜야 할 ‘자기’(self)는 누구인지, 그 자기가 지키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되묻는다. ‘신체의 취약성’이라는 조건은 어떤 개인도 상호의존적 관계 맺기 없이 이 세계 안에서 홀로 생존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 ‘관계성’은, 버틀러에 따르면, 사실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규범적 차원에서도 긍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상호의존적 관계성 없이 개체의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사회정치적 규범의 차원에서 관계성과 유대관계, 그리고 상호의존성을 숙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겪은 것과 같은 폭력으로부터 타인을 보호하겠다는 (…) 원칙이, 인간 공통의 취약성에 대한 이해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나올 수 있겠는가?”58)

6. ‘지상의 것들’로부터: 불가능한 것을 사유하기

버틀러는 벤야민이 계속 ‘메시아적인 것’으로 돌아갔지만 그것이 언제나 동일한 의미로 쓰인 것은 아니었음을 지적하면서, 초기 저작에서는 ‘메시아적인 것’이 ‘용서’나 ‘기억의 상실’과 연관지어졌음을 확인한다. 특히 숄렘(Gershom Sholem)과 교류하던 1913년에서 1920년 사이, 벤야민은 “메시아적인 것을 용서의 문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용서를 보복의 반대가 아니라 보복의 바깥으로 정립했다”라고 적는다.59) 벤야민은 이때 용서의 행위를 ‘폭풍’으로 형상화했다. “그리고 이 폭풍의 효과는 모든 죄의 흔적, 도로 잘못된 행위로 이끄는 모든 암호를 뿌리째 뽑는 것이다.”60)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쓴다. “최후의 심판의 중요성은 보복이 통치하는 법의 세계가 아니라 용서가 심판을 만나러 나오는 도덕적 우주에서 드러난다. 보복과 맞서 싸우기 위해 용서는 자신의 강력한 지지자를 시간에서 찾아낸다. 아테(도덕적 눈멈)가 좇는 시간은 두려움에 싸인 고독한 고요가 아니라 격정적인 폭우가 몰아치는 용서(…)이기 때문이다.”61) 여기에서 “최종적으로 난파되는 것은 보복의 프로젝트다”.62)

“용서는 오직 용서 불가능한 것만을 용서한다.” 데리다는 용서 불가능성에 대한 장켈레비치의 주장에 맞서 이렇게 말한다. ‘불가능한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할 수 없다는 것인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불가능한 것만을 용서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데리다는 용서는 조건, 범위,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가능성의 실현’이 아니라고 본다. “누군가가 스스로 저지른 잘못을 고백하고, 그 잘못을 바로잡아 변상하고자 하고, 용서를 빌려고 그 잘못에서 벗어나려 할 때만 그를 용서한다면, 이런 용서는 용서의 본질을 변질시키는 어떤 계산적인 논리에 휘둘리게 된다.”63) 데리다는 조건적이고 계산적인 용서에 “조건 없이 절대적인 용서, 뉘우침과 용서를 비는 것조차 필요하지 않은 용서”를 대비시킨다. 용서는 오직 용서 불가능한 것만을 용서한다. 용서는 바로 그런 것, 계산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불가능한 것으로서만 가능한 용서는 그저 던져진 윤리적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갈등, 회의, 의심, 좌절을 포함하는 지속하는 물음이다. 그러므로 “형태가 추상적이고 건조하며, 형식이 집요하고 반박 불가능한 아포리아, 용서도 없고, 만약 있다면 그것은 불-가능뿐이라는 이 아포리아의 함정에서 끊임없이 토론해야 한다”.64)

지상의 것들, 평화를 갈망하지만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취약한 존재자들, 서로 얽혀 의존하여 관계 맺으면서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고 죽고 살리고 죽이는 생명들, 그들의 실재를 옹호하는 것으로부터 버틀러는 ‘비폭력의 윤리-정치학’의 가능성을 그린다. 버틀러가 그리는 비폭력의 윤리-정치학은 지상의 것들의 불가피한 취약성 위에 세워진다. 그것은 신의 일이 아니다. 오로지 이 지상에서 용서 불가능성, 삶의 불안정성과 상호의존성, 지나간 사건을 되돌릴 수 없고 상실을 회복할 수 없다는 환원 불가능성 같은 것들이 우리를 불가능해 보이는 ‘비폭력의 윤리-정치학’의 가능성으로 인도한다. 비폭력은 용서가 그러한 것처럼 불가능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 가능성으로, 마치 선물처럼, 아주 희미한 형태일지라도 이 지상의 취약한 생명들 사이에서 늘 위협받으면서도 사라지지 않은 채 살아 있다. 그리고 이 불가능한 가능성으로 우리는 폭력적 세계의 현실 바깥을 꿈꾸면서 폭력적 세계를 살아갈 수 있다. 


1) 시몬 비젠탈 지음, 박종서 옮김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용서받을 자격과 용서할 권리에 대하여』(뜨인돌, 2019).

2)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 옮김 『인간의 조건』(한길사, 2019) 342~43면.

3) 같은 책 347면.

4) 자크 데리다 지음, 배지선 옮김 『용서하다』(이숲, 2019) 27면.

5) 같은 책 28면. 아렌트도 ‘용서의 능력’에 한계를 긋는다. 모든 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근본악’이라 부르는] 그 죄들을 처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그것들이 인간사의 영역과 인간 힘의 가능성을 초월한다는 사실만을 우리는 알 뿐이다. 근본악들이 나타나는 모든 곳에서 인간사의 영역과 인간 힘의 가능성은 파괴된다.” 아렌트, 앞의 책 348면. 이와 같은 죄에 대해서는 오직 신적 정의에 의한 심판만이 남는다. “예수에 따르면 이것은 하느님이 마지막 심판의 날에 판단하실 것이며―이 심판은 지상의 삶에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마지막 심판의 특징은 용서가 아니라 공정한 응보(apodounai)다.” 같은 책 346면.

6) 주재형 「용서와 폭력의 교환 경제: 데리다, 장켈레비치, 니체」, 『철학논집』 54 (2018) 110면.

7)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에 실린 비젠탈의 질문에 답하여 1976년과 1996년에 세계 각지에서 보내진 폭력 피해자 또는 가해자의 응답들은 대부분 (몇몇 종교 지도자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의 침묵에 공감하고 그의 행위를 지지한다. 그들은 비젠탈이 용서의 말을 전하지 않은 것이 정당하며, 오히려 섣부르게 용서를 전했다면 역사적·윤리적 오류가 되었을 것이라고 응답한다.

8) 스베탸 플라스뮐러 지음, 장혜경 옮김 『조금 불편한 용서』(나무생각, 2020).

9) “약자가 어쩔 수 없이 행하는 자기기만적인 용서가 있다. 그러나 이것도 상처와 원한에 괴로워하지만 복수를 행할 수도, 응징의 정의를 기대할 수도 없는 약자로서는 취할 만한 방책이다. [이] 용서는 소극적이지만 다소나마 치유의 효과는 있다. (…) 문제는 이런 소극적 치유의 용서가 사태의 제대로 된 해결 노력을 가로막기도 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사회 분위기가 이 같은 용서의 활용 경향을 부추기기도 한다.” 문성원 「용서와 선물」, 『시대와 철학』 33.3 (2020) 78~79면.

10) 데리다, 앞의 책 78면.

11) 아렌트, 앞의 책 347면.

12) 같은 책 347~48면.

13) 누스바움(Martha C. Nussbaum)은 아이스킬로스(Aischylos)의 『오레스테이아』(Oreteia) 3부작에서, 고대 세계의 법적 제도 도입이 사적인 복수를 대체하게 되는 과정을 읽는다. “정의로운 제도는 사건이 벌어지면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우지만 복수심에 찬 감정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삶을 지키고자 하는 신중한 판단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정의는 이미 손쓸 수 없게 된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행복과 번영을 만들어내는 데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법 제도는 폭력적 보복의 연쇄를 끊고, 외적 안전과 내적 평화를 제공한다.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강동혁 옮김 『분노와 용서: 적개심, 아량, 정의』(뿌리와 이파리, 2016) 24, 26면.

14)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폭력비판을 위하여」,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폭력비판을 위하여, 초현실주의 외』(도서출판 길, 2008) 79면. ‘폭력’으로 번역되는 독일어 단어 Gewalt는 힘·폭력·권력·권능·무력 등을 뜻하며, 때로 강제력·강압·~권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즉 Gewalt는 한국어의 ‘폭력’보다 폭넓은 의미망을 가지고 있고, 반드시 부정적인 의미만을 지닌 것은 아니다.

15) 같은 글 81면.

16) 같은 글 82~83면.

17) 벤야민에 따르면 법은 폭력을 독점한다. “법은 개인의 수중에 놓인 폭력을 [법의 질서를] 전복할 위험 요소로 간주한다.” “그 이유는 그 [개인적] 폭력이 추구하는 목적 때문이 아니라 그 폭력이 법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같은 글 85~86면.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제한하면서 파업이라는 비폭력 (비)행위를 폭력으로 규정하는 상황이나, 법의 이름으로 살인을 허용하고 강요하는 전쟁권과 사형제도 같은 법제들은 법의 폭력적 자의성을 드러낸다.

18) 같은 글 95면.

19) 같은 글 96면.

20) 자크 데리다 지음, 진태원 옮김 「벤야민의 이름」, 『법의 힘』(문학과 지성사, 2004) 105면.

21) 데리다는 이 구절에서 다음의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한다. “한편으로는, 이 논문의 주제를 이루고 있는 공포를 근저에서 반영하고 있는, 가공할 만한 윤리적·정치적 애매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 지위와 서명의 범례적 불안정성,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내가 감히 (…) 어떤 사고의 용기, 대담성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의 범례적 불안정성이 바로 그것들이다.” 같은 글 113~14면.

22) 이 가혹한 응징은 니오베를 직접 죽이지 않는다. “폭력은 불안정하고 양의적인 운명의 영역으로부터 니오베에게 불어닥친다. 그 폭력은 파괴적이지 않다. 그 폭력은 그것이 니오베의 자식들에게 피를 흘리는 죽음을 가져올지라도 어머니인 니오베의 삶 앞에서는 멈춰버리며, 이 삶을 자식들의 종말을 통해 이전보다 더 죄스러운 삶으로 만들면서 영원히 말 없는 죄의 담지자이자 인간과 신들 사이에 가로놓인 경계의 초석으로 남겨둔다.” 벤야민, 앞의 글 108면.

23) 같은 글 107면.

24) 같은 글 108면.

25) 같은 글 111면.

26) 같은 글 112면.

27) 같은 글 117면.

28) 같은 글 108면.

29) 데리다, 앞의 글 115면.

30) 버틀러(Judith Butler)는 많은 사람이 벤야민의 「폭력비판을 위하여」를 “순수하게 파괴적인 아나키즘으로 이해되는 신적 권능의 형상으로 끝나는 글”로 읽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녀는 데리다의 독해도 이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주디스 버틀러 지음, 김정아 옮김 『비폭력의 힘』(문학동네, 2021) 161면.

31) 벤야민에 따르면 “폭력에 대한 비판은 폭력의 역사에 대한 철학이다. 역사의 ‘철학’인 이유는 그 역사의 결말이라는 이념만이 그 역사의 시대적 자료들에 대해 비판하고 구분하며 결정하는 입장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벤야민, 앞의 글 115면.

32) 데리다, 앞의 글 121면.

33) 같은 글 124면.

34) 한편에서, 이 ‘신적 폭력’의 결정 불가능성은 데리다가 말하는 법을 넘어서는 ‘정의’, 그가 해체(deconstruction)와 일치시키려 했던 ‘정의의 아포리아’와 만난다. 법의 영역에는 결정 가능한 인식과 확실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데리다에 따르면, 이 결정 가능성과 그것이 주장하는 법적 정당성을 매번 개별적 판단의 차원에서 반추하고 해체해야 하는 정의의 결정 불가능성이 그 법적 판단에 언제나 동반되어야 한다. 이와 유사하게, 신적 폭력은 신화적 폭력과는 다른 편에 “결정가능한 확실성 없는 결정”으로, “결정가능하지만 결정이 없는 확실성”으로 놓여 있다. 그렇게 ‘신적 폭력’은 데리다에게 법과 다르지만 법적 판단에 언제나 매번 동반되어야 할 ‘정의’의 도래와 연결될 수 있다. 자크 데리다 지음, 진태원 옮김 「법에서 정의로」, 『법의 힘』(문학과 지성사, 2004) 11~62면. 다른 한편, 데리다는 벤야민의 파괴적인 신적 폭력의 ‘결정 불가능성’이 지닌 위험을 경고한다. 특히 그것이 무정부주의적이고 반의회주의적인 것으로 표상될 때, 신적 폭력의 결정 불가능성은 현실세계의 질서 전체를 전면적으로 파괴하는 ‘파국적 메시아주의’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35) 버틀러는 데리다가 과도하게 신랄한 해석을 했다고 본다. “벤야민에 관한 글에서 데리다는 ‘벤야민이 의회민주주의를 지나치게 비판했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어느 부분에서인가 데리다는 벤야민이 파시즘을 운반한 것과 똑같은 물결인 ‘반(反)의회 물결’을 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의 근거가 충분하지는 않다고 본다. 주디스 버틀러 지음, 양효실 옮김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 유대성과 시온주의 비판』(시대의 창, 2016) 146면.

36) 아렌트는 바로 이 지점에서 벤야민을 비판한다. 『폭력의 세기』(On Violence)에서 아렌트는 폭력과 권력(power), 강제력(force), 강성(strength), 권위(authority) 등의 개념적 차이를 분명히 하면서 권력의 토대는 폭력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권력과 폭력은 대립적이다. 즉 하나가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곳에서, 다른 하나는 부재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권력의 토대는 폭력일 수 없다. “폭력은 권력을 파괴할 수 있다. 하지만 폭력은 권력을 전혀 생산할 수 없다.” 한나 아렌트 지음, 김정한 옮김 『폭력의 세기』(이후, 1999) 90면. 이러한 근거에서 아렌트는 “벤야민이 국가의 정초가 비강제적인 시작일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것, 또 이런 의미에서 국가의 기원이 비폭력적일 수 있고 비폭력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버틀러, 앞의 책 146면.

37) 같은 책 134면.

38) 버틀러는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이스라엘의 시온주의에 대한 분명한 비판을 함축하는 견해로 읽는다.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적 국가폭력을 비판하는 모든 견해를 ‘반유대주의’로 낙인찍는 편향되고 왜곡된 주장에 대항하면서, 버틀러는 비시온주의적이고 반시온주의적인 유대관을 수립하고자 한다. 벤야민에게 ‘메시아적인 것’은 각기 다른 형태로, 다른 의미를 지닌 것으로 드러난다. “벤야민에게 메시아적인 것의 단일한 독트린 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벤야민의 메시아적인 것은 “현세의 체제들과 단절하려는 항(抗) 독트린적인 노력”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버틀러는 생각한다. 같은 책 135면.

39) 벤야민, 앞의 글 113면.

40) 버틀러,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 158면.

41) “메시아 자신이 비로소 모든 역사적 사건을 완성시킨다. 그것도 메시아가 그 역사적 사건이 메시아적인 것에 대해 갖는 관계를 스스로 구원하고 완성하고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역사적인 것도 그 자체로부터 메시아적인 것과 연관되기를 바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 왕국은 역사적 동력(Dynamis)의 목표가 아니다.”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신학적·정치적 단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폭력비판을 위하여, 초현실주의 외』(도서출판 길, 2008) 129~30면.

42) 버틀러,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 170면. 벤야민에 따르면 “신의 왕국은 목표로 설정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신의 왕국은 목표가 아니라 종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속적인 것의 질서는 신의 왕국에 대한 생각에서 구축될 수 없다”. 벤야민, 앞의 글 130면.

43) 버틀러,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 173면.

44) 벤야민, 앞의 글 96~97면.

45) 같은 글 98면. 또한 “벤야민은 (…)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에서처럼, 단지 사적인 관계들만이 아니라 일정한 공적 관계들까지 법질서에서 (…) 벗어나게 해주는 비폭력의 질서를 꿈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는 외교관들이 사적 관계와 유비적 방식으로 조약을 체결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갈등을 규제하는 외교관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경우는 ‘모든 법질서, 따라서 모든 폭력’을 넘어서 있기 때문에 비폭력적이다.” 데리다, 앞의 글 110면.

46) 벤야민, 앞의 글 99면.

47) 같은 글 같은 면.

48) 버틀러, 『비폭력의 힘』 165면.

49) 버틀러는 법폭력을 ‘잠시 중단’시킨다는 것을 ‘신적 폭력’으로 해석하면서, 신적 폭력을 비폭력적 합의 도출과 연결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주장이 “그리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같은 책 168~170면. ‘인기를 끌지 못하는’ 이유는 버틀러의 주장이 엄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공법 바깥에서의 비폭력적 합의 도출은―‘사기죄’의 도입에서 밝혀지는 것처럼―법의 폭력적 지배가 확장되면서 ‘퇴락’하여 점차 법적 지배의 일부가 된다. 따라서 ‘비폭력적 합의 도출’은 법적 폭력 영향권의 완전한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반면 ‘신적 폭력’은 모든 현실적 폭력 지배의 파괴로 현시된다. 따라서 이 둘을 연결하는 주장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비폭력적 합의 도출’이 법폭력을 잠시 중단시킬 가능성이자 초법적 소통 가능성을 예시한다는 해석은 버틀러의 ‘비폭력의 윤리-정치학’이라는 이론적 구상 안에서 적절히 자리잡을 여지가 있다.

50) 같은 책 36~37면.

51) 같은 책 39면.

52) 버틀러는 아렌트로부터 이 같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이해를 가져온다. “아렌트가 보기에, 지상에서의 공거는 우리 스스로가 선택하지 않은 바로 그 특성이 윤리적·정치적 존재로서 우리 존재의 조건인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 지음, 김응산·양효실 옮김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집회의 수행성 이론을 위한 노트』(창비, 2020) 164면.

53) 주디스 버틀러 지음, 윤조원 옮김 『위태로운 삶: 애도의 힘과 폭력』(필로소픽, 2018) 55면.

54) 누군가가(예를 들어 성소수자를 포함하여 여성과 소수자들이) 더 쉽게 폭력의 대상이 되거나 폭력 가능성에 노출된다는 사실은, “우리 각자가 (…) 욕망과 취약성의 장소, 자기 주장이 강한 동시에 외부 요인에 노출된, 공공성의 장소로서의 몸의 사회적 취약성에 의해 정치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책 47면.

55) 버틀러, 『비폭력의 힘』 241~42면.

56) 버틀러,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195면. 버틀러는 이와 같은 ‘관계의 윤리’의 토대가 되는 존재론적 관점을 해러웨이로부터 받아온다. 해러웨이는 모든 생명을 가진 신체들은 공구성적이며, 관계 이전에 개체가 없다는 것을 반려종들의 삶과 죽음, 공진화의 과정 등을 통해 입증한다. 해러웨이에 따르면 “모든 존재자는 관계에 선행해 존재하지 않는다”. 도나 해러웨이 지음, 황희선 옮김 「반려종 선언」, 『해러웨이 선언문』(책세상, 2019) 123면.

57) 버틀러,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192면.

58) 버틀러, 『위태로운 삶』 61면.

59) 버틀러,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 177면.

60) 같은 책 178면.

61) Walter Benjamin, “The Meaning of Time in the Moral Universe,” Walter Benjamin: Selected Writings, ed. Marcus Bullock and Michael W. Jennings (Cambridge: Harvard UP, 2004) 286~87면.

62) 버틀러,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 178면.

63) 데리다, 『용서하다』 81면. 데리다는 특히 ‘용서’가 특정한 계산적 목적에 봉사하는 정치적 수사(修辭)로 오염되면서 용서의 본질적 이념이 훼손되고 있음을 강하게 경계하고 비판한다. 자크 데리다 지음, 신정아·최용호 옮김 「세기와 용서: 미셸 비비오르카와의 대담」, 『신앙과 지식』(아카넷, 2016).

64) 데리다, 『용서하다』 87~88면. 누스바움 역시 ‘교환적 용서’나 ‘조건부 용서’는 계산적이기 때문에 보복적 분노에 대한 대안을 제기하기보다 분노의 두 가지 오류인 ‘인과응보의 오류’ ‘지위격하의 오류’를 되풀이한다고 지적한다. 그녀는 또한 ‘무조건적인 용서’가 ‘교환적 용서’의 오류를 수정하기는 하지만, 그 또한 도덕적 위험을 갖는다고 본다. 무조건적인 용서가 지닌 도덕적 위험은 그것이 과거 지향적이라는 것, 그리고 용서하는 사람이 도덕적 우위를 점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점 등이다. 누스바움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용서는 ‘무조건적 사랑과 아량’이다. 누스바움 『분노와 용서』 135~96면. 그러나 누스바움의 주장은 그녀가 거리를 두겠다고 한 종교적 의미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다. 그리고 ‘무조건적 사랑과 아량’이라는 개인적인 윤리적 태도로 회귀함으로써 용서를 개인적 성품이나 도덕적 성숙 같은 것으로 환원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김애령│

金愛鈴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인문과학원 교수. 최근 논문으로 「분배적 정의론의 한계: 공정에 대한 관계론적 고찰」(2022)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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