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밖 57호][연작기획] 정치적 기획으로서 소수자의 자기발명과 우정/ 이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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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길

I. 자기발명, 혹은 ‘삶-작품’을 향한 실천

1983년 4월 철학자 드레이퍼스(Hubert Dreyfus)와 인류학자 래비나우(Paul Rabinow)는 버클리에서 푸코(Michel Foucault)와 몇 차례의 인터뷰를 가진다. 이후 그 내용은 ‘윤리의 계보학에 관하여: 진행 중인 작업의 개관’이라는 제목 아래 두 연구자의 푸코 해설서에 후기로 실린다. 이 인터뷰에서 푸코는 말년에 몰두한 윤리학적 문제 설정을 상세히 설명하는데, 그 과정에서 나온 ‘작품으로서의 삶’이라는 명제는 이후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그 명제를 둘러싼 논의 맥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몇 가지 유의할 만한 대목이 눈에 띈다. 우선 푸코는 오늘날 도덕과 다른 구조들(정치·경제·사회)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으며, 윤리적 문제들이 과학 지식과 반드시 연관성을 지니지도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자 두 대담자는 도덕에 그저 역사적 응고 작용(historical coagulations)만이 있다면, 우리가 현재 어떤 유형의 도덕을 정교화할 수 있는지 질문한다. 개인의 삶과 예술작품을 연결 짓는 푸코의 답변은 이와 관련해 나온 것이다. “내게 놀라운 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예술이 개인이나 삶이 아닌, 오로지 사물하고만 관계 맺는 무언가가 되었다는 (…) 사실이다. 그런데 모든 인간의 삶은 하나의 예술작품일 수 있지 않을까?”1) 두 대담자는 이에 대해 버클리 같은 곳에는 아침식사부터 여가, 성행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삶을 일종의 작품화하려는 사람들이 흔하게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푸코는 자신이 구상하는 윤리가 그러한 이들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오히려 그들 대다수가 스스로 삶이나 자연, 신체, 욕망에 대한 진실에 따라 행동하고 살아간다고 여긴다는 사실이 우려스럽다는 것이다. 

대담의 초점은 곧 푸코와 사르트르(Jean-Paul Sartre) 사이 윤리관의 차이 문제로 넘어간다. 만일 푸코 윤리관의 핵심이 우리가 보편적 법칙과 인식에 의존하지 않고서 자신을 창조해야 한다는 데 있다면, 그것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 과연 어떤 점에서 다른가? 대담자들의 질문에 대한 푸코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사르트르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로서의 자기’라는 발상에서 벗어났지만, 진정성(authenticity)이라는 개념을 통해 다시 ‘진정한 자신이 되어야만 한다’는 도덕 관념으로 돌아가버렸다. 그런데 푸코가 보기에, 자기를 부단한 형성 과정으로 보는 사르트르의 이론적 발견이 실질적인 의미를 지니려면 그것을 “진정성 관념이 아니라, 창조성의 실천(practice of creativity)과 연결”해야 한다.2) 우리 자신이 미리 주어져 있지 않다면, 우리에게 남는 단 하나의 선택지는 자기를 예술작품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푸코는 사르트르가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등에 관한 분석에서 창작 작업을 작가 자신에 대한 (비)진정성의 태도에 결부시켰다면, 자신은 정확히 그 반대 입장에 선다고 말한다. 즉 “우리는 어떤 개인의 창조적 활동을 그가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즉 진정성/비진정성]에 관련지을 것이 아니라, 그가 자기에 대해 맺는 관계 유형을 창조적 활동과 관련지어야 한다”는 것이다.3) 이때 관건은 자기에 대한 관계가 과연 창조적인지에 있다며, 푸코는 이러한 자신의 관점이 사르트르보다는 니체(Friedrich Nietzsche)에 더 가깝다고 덧붙인다.

개인의 삶을 작품화해야 한다는 푸코의 주장에서 사르트르와의 유사성을 읽어낸 대담자들의 직관은 예리한 만큼이나 적절한 것이었다. 1945년의 유명한 강연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사르트르가 인간의 도덕적 선택을 예술작품의 창작과 비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 전문가 드레이퍼스가 이를 놓칠 리 없었을 것이다. 그 강연에서 사르트르는 인간이 마치 그림을 그릴 때처럼 도덕에서도 창조적 상황 속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자유로운 존재로서 우리는 이미 다 만들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존재”이며 자신의 법칙을 스스로 발명할 수밖에 없다. ‘해야만 하는 것’이 선천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과 도덕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두 경우 모두에서 우리가 창조와 발명을 본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4) 예술가가 미리 정해진 규칙이나 규범에 맞춰 창작하지 않는 것처럼 인간은 특수한 역사적 상황 안에서 자신의 도덕을 선택하며 스스로를 창조해나간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르트르는 “언제나 발명이 있을 뿐”이며, 현재의 발명이 “과연 자유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아는 것”만이 관건이라고 단언한다.5) 그에 따르면 삶에는 본래적이거나 본질적인 그 어떤 의미나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자신을 발명한다는 말은 살기 이전의 삶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철저히 우리의 몫이고, 우리가 선택하는 그 의미가 바로 삶의 가치라는 뜻이다. ‘존재와 자기창조는 하나일 따름이다.’

이렇게 보자면 푸코와 사르트르가 구상한 윤리관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두 철학자는 모두 예술과 도덕의 유사성에 주목하면서, 개인이 지배적 규범이나 도덕적 코드에 구속당하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만들어나가길 권유한다.6) 푸코는 사르트르가 진정성을 자기발명 이전에 존재하는, 우리가 자신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관계 형식으로 전제한다고 비판하지만, 이 또한 두 철학자 사이의 근본적인 충돌 지점이라고 보긴 어렵다. 사르트르는 개인의 구체적인 선택의 자유를 도덕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 선택이 자기기만(mauvaise foi) 위에서 이루어진다면, 이는 진실이 아닌 오류이기에 비난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기만의 가치를 발명해야 하는 인간이 그러한 실존적 조건을 외면한 채 기존의 도덕적 가치를 답습하거나 승인하는 선택을 한다면, 이는 진정한 자유의 행사가 아니므로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시각에서 진정하지 않다는 것은 자기(그리고 타자)와의 관계에서 창조적이지 않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보면 자기기만과 같은 비진정성의 태도에 대한 사르트르의 비판은 푸코의 시각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푸코 역시 자기에 대한 관계의 창조성을 필수불가결한 덕목으로 강조하기 때문이다. 인터뷰에서 분명히 나타나듯, 그는 자신의 삶을 작품화하려는 개인의 시도가 모두 ‘창조적’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이는 역사학자 래시(Christopher Lasch)가 ‘나르시시즘의 문화’라고 이름 붙였던, 1970년대 미국 부르주아지의 자유주의 문화에 대해 푸코가 드러낸 부정적 반응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7) 그는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추론이 영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푸코는 심리학·정신의학·정신분석 등이 개인의 정신·욕망·신체에 관한 ‘진실’을 바탕으로 제시하는,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삶의 약속에서 (래시와 비슷하게) 새로운 형태의 권력 작용을 간파한다. 그렇다면 그 정치적 효과나 다를 바 없는 ‘자기숭배’ ‘일상의 미학화’의 유행은 자기에 대한 창조적 관계 맺기의 실천이라고 볼 수 없을 터이다.8) 이는 결국 푸코의 사유 안에서 지배적인 권력관계와 지식체제, 가치규범에 대한 순응 정도를 척도로 삼는 창조성/비창조성의 평가 범주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범주는, 우리가 보기에, 사르트르의 진정성/비진정성이라는 범주와 근본적인 유사성을 지닌다. 

사실 “자유는 윤리의 존재론적 조건”이며, “윤리는 자유의 숙고된 형태”라는 푸코의 단언에서 사르트르의 사유를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푸코는 사르트르처럼 “나는 개인들의 자유를 믿는다”고 토로했으며, 이는 무엇보다도 “우리는 상황 바깥에 자리할 수 없고 어디서든 온갖 권력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언제나 그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9) 이러한 맥락에서 두 철학자는 모두 자기발명을 중요한 윤리적 원칙으로 제기했고, 안타깝게도 이를 미완의 과제로 남겼다. 사르트르의 경우, 『존재와 무』(L’étre et le néant, 1943)의 말미에서 약속한 도덕론을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작업했으나 생전에 완결짓지 못한 채 유작 『도덕론』(Cahiers pour une morale, 1983)으로 출간했다. 다만 그가 1952년 발표한 『성 주네-배우와 순교자』(Saint Genet-Comédien et martyr)는 작가가 삶 속에서 실천한 자기발명의 윤리를 평전 형식을 빌려 구체적으로 탐구한 저작이라 할 수 있다.10) 푸코의 경우 1980년대 초 각종 강연과 인터뷰, 콜레주드프랑스 강의를 기회로 자신의 윤리적 문제 설정을 전개했으며, 그것을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주체 형성에 관한 『성의 역사』(L’histoire de la sexualitee) 2, 3권의 역사적 분석과 연계시켰다. 이는 그가 이 책들에서 탐구한 ‘실존의 기술’(arts de l’existence)을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스스로 행동 규칙을 설정할 뿐 아니라 자기를 변화시키고 그들의 특이한 존재 속에서 자기를 변형시키며, 그들의 삶을, 어떤 미학적 가치를 지닌, 그리고 어떤 스타일의 기준에 부합하는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신중하고도 자발적인 실천”으로 정의할 때 분명히 나타난다.11)

유념해야 할 것은 사르트르나 푸코에게 자기발명이 결코 주체의 무한정한 자유와 역량을 전제하는 개념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언제나 특정한 상황, 특수한 권력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기주도적 실천을 가리킨다. 이는 자기발명을 주체화의 한 가지 차원으로 상대화하는 푸코의 개념화에서 좀 더 명확히 드러난다. 즉 개인이나 집단이 주체로서 구성되는 작용을 가리키는 주체화는 크게 예속화(assujettissement)와 미학화(esthétisation)라는 두 세력 선의 긴장과 경합, 교접과 타협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는데, 이때 자기발명은 미학화의 차원을 가리킨다. 푸코는 이를 ‘자기형성’ ‘자기변형’ ‘자기의 기술’ ‘수행적 실천’(pratique ascétique) ‘실존의 미학’과 같은 다양한 용어로 표현한 바 있다. 용어야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러한 능동적·미학적 주체화로서의 자기발명이 예속적 주체화와의 관계 속에서, 아니 차라리 그 강력한 자장 아래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12)

그러므로 자신의 관계와 경험을 주된 질료로 삼는 끝없는 창조와 발명, 즉 자기 삶을 예술작품으로 구성하는 작업은 특수하고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권력에 대한 투쟁, 예속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띠고 나타난다. 마치 조각가가 육중한 돌덩이를 부단한 망치질로 깨뜨려가며 그 속에서 자신이 반드시 미리 구상하지는 않았던 어떤 형상을 끄집어내듯, 우리는 사회가 가하는 각종 제약과 억압, 구속과 유인 가운데서 자유의 실천을 통해 자신의 삶을 작품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발명은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정언명령인 셈이다. 

II. 자기발명의 소수자적 경로 

그렇다면 자기발명은 현실 속에서 어떤 형상을 띠고 나타날 수 있을까? 우리가 ‘삶-작품’을 창조하기 위해 구사할 수 있는 ‘자기의 기술’에는 실제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 프랑스 작가 에리봉(Didier Eribon)의 『랭스로 되돌아가다』(Retour à Reims, 2009)와 루이(Édouard Louis)의 『변화하기: 방법』(Changer: méthode, 2021)은 이런 일련의 궁금증을 부분적으로나마 풀어줄 수 있는 텍스트다.13) 이 책들은 모두 저자의 자기발명 과정에 대한 서술 의지를 명시적으로 표방한다는 점에서 우리 질문들과 관련해 자세히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다. 

푸코의 전기 작가로 유명한 에리봉은 게이 주체성의 형성을 탐구한 『게이 문제에 관한 성찰』(Réflexions sur la question gay, 1999)을 통해 푸코 윤리학에서 자기발명 개념이 가지는 의의를 강조한 바 있다. 그로부터 10년 뒤 출간한 『랭스로 되돌아가다』(이하 『랭스』)에서 그는 게이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생애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매개로 ‘소수자의 자기발명’이라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탐구한다.14) 랭스에서 노동자 아버지와 가정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그는 노동계급 특유의 마초문화·인종주의·동성애 혐오를 견디지 못하고, 교육체계가 놓아준 성공의 사다리를 타고서 그 세계로부터 탈주한다. 파리로 이주한 그는 경제적 곤란 때문에 박사과정 공부를 중도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지만, 우연한 계기로 언론계에 진입하기에 이르고 기자 활동을 통해 친분을 맺은 푸코, 부르디외(Pierre Bourdieu) 등의 도움으로 지식인이 되고자 했던 자신의 소망을 마침내 실현한다. 

한편 에리봉의 영향 아래 글쓰기를 시작한 루이는 자전적인 첫 소설 『에디의 끝』(En finir avec Eddy Belleguele)을 통해 피카르디의 시골에서 보낸 어린 시절 겪었던 빈곤과 고통, 소수자로서 당한 모욕과 억압을 진솔하게 서사화한 바 있다.15) 이후 그는 자신과 가족 구성원(아버지, 어머니, 형)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노동계급의 비참한 운명과 사회적 폭력을 탐구한 소설들을 계속 발표했다. 다섯 번째 저작인 『변화하기: 방법』(이하 『변화』)에서 루이는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부터 데뷔작을 쓰고 작가로서 정체화하기까지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변화시켜왔는지 서술한다. 『에디의 끝』이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 루이의 중학교 시기까지를 다루었기에, 『변화』는 그 이후 시기의 본격적인 자기발명의 경로를 되짚은 셈이다. 첫 소설과 마찬가지로 자서전과 소설 사이의 모호한 경계 위에서 이루어지는 이 자기분석의 글쓰기는 언뜻 『랭스』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서사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성 정체성 문제로 끊임없이 고통받으며 배제와 차별을 경험하고, 치열한 노력 끝에 고등교육을 거친 뒤 작가가 되어 자기에 관한 책을 쓰기에 이르는 화자의 실제 경험이 자세하게 그려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루이는 스스로 “변신에 대한 강박관념”이라고 표현할 만큼 강렬한 자기발명의 의지를 드러낸다.16)

에리봉과 루이는 거의 40년의 나이 차가 나지만, 이와 무관하게 매우 유사한 성장 환경과 사회적 궤적을 보여준다. 두 사람 모두 프랑스 북부 지방의 노동계급 자녀로 태어나 우수한 학업능력을 바탕으로 파리로 이주한 후 작가이자 지식인으로서 성공하는 이력을 밟았기 때문이다. 에리봉과 루이는 또한 둘 다 성 소수자라는 중요한 공통점을 지닌다. 이러한 ‘일탈적’ 성 정체성은 그들이 자기 가족과 소속 계급의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기발명을 도모하는, 우연한 만큼이나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그들의 성 정체성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것 때문에 감수해야 했던 모욕과 배제는 그들이 자기 환경으로부터 탈주하도록 촉진한 근본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루이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당신이 또 모르는 것은 모욕이 나머지 모든 것, 그러니까 가난, 우리가 사는 방식, 마을 사람들의 끊임없는 인종주의를 내가 참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마치 배제가 나만의 고유한 가치체계―그 안에서 내가 내 자리를 가질 수 있을―를 발명하도록 나를 강제한 것처럼 말이다.17)

자기발명의 윤리가 소수자만의 전유물일 수는 없다. 하지만 들뢰즈가 지적한 바 있듯, “구성된 지식과 기존 권력의 가장자리에서 이루어지며 새로운 지식과 권력을 야기”하는 주체화는 주로 “지배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으로 배제된 자들”에게서 일어난다.18) 주체화가 언제나 권력관계와 지식체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면, 권력의 필요에 맞추어 주체를 규율하고 개별화하며 단일한 정체성에 고정하려는 규범화의 예속 형식이 작동할 때 소수자는 이를 한층 예민하게 의식하고 대응할 수밖에 없다. “주체성을 향한 투쟁은 따라서 차이를 향한 권리, 변형 및 변신을 위한 권리로서 드러난다.”19) 이처럼 자기발명의 실천은 소수자에 대한 모욕과 배제를 불러오는 권력-지식의 작용에 맞서 일어난다. 그것은 소수자가 자기 자리를 보장하고 인정해주는 대안적 관계망과 규범체계를 구성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든다. 사회 내 권력관계에서 소수자적 위치를 점한다는 것은 그에게 불리한 경제적·물리적·상징적 조건 속에서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고, 지배적 범주와 규정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재구성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발명은 현실 속에서 다양한 거부와 창조의 기술, 즉 푸코가 ‘자기에 대한 자기의 작업’ 또는 ‘수행’(ascese)이라고 명명한 기술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때 수행은 포기나 단념, 금욕의 도덕이 아니라 “스스로를 정련하고 변형하고 모종의 존재양식에 다다르려고 노력하는, 자기에 대한 자기의 실행의 도덕”을 가리킨다.20) 달리 말하면 자기발명은 수행의 실천을 통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존재양식을 구현하는 일이자, 그로써 새로운 지식과 권력관계를 창조하는 일이다. 

에리봉과 루이의 책은 개인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발명의 현실적 기술들을 다양하게 제시한다. 우리는 두 책에서 저자들이 거쳐온 공통된 경로를 발견할 수 있다. 공식적·비공식적 교육을 향한 열의, 책 읽기와 문화활동을 통한 지식과 교양의 추구, 지리적인 이주, 가족을 포함한 기존의 사회적 관계와의 단절과 새로운 관계망 속으로의 편입, 소수자 문화에의 참여, (수치심과 같은 정동의 능동적·적극적 변환을 통한) 자긍심의 배양, 자신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글쓰기 등이 그것이다. 교육이든 교양이든 정동이든 그들은 다른 상황, 다른 세계를 꿈꾸고 만들어갈 수 있는 역량을 스스로 쌓아나갔다. 그 과정을 부단히 추동한 ‘진실 의지’는 이들의 자기발명에서 각별히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21) 그런데 이와 관련해 특히 두 가지 문제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선 에리봉과 루이의 자기발명이 계급 이동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어떤 독자들이 이들의 사례를 ‘노동계급 출신 게이 청소년이 온갖 사회적 편견과 역경을 뚫고서 학업적 재능을 통해 중상층계급 지식인으로 올라서는 출세담’처럼 읽게 만든다. 물론 두 저자의 자기발명이 ‘작가/지식인-되기’의 어느 정도 의식적인 추구와 실현, 그리고 그에 따른 계급 횡단 과정과 맞물려 일어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자기발명이 어떤 경우 사회적 이동(상승이건 하강이건)을 수반할 수 있다 해도, 반드시 그래야 할 필연성은 없다.22) 더더구나 계급 상승이 자기발명의 우연찮은 부산물일 수 있어도 종국적인 목표나 도달점일 수는 없다. 바로 이 점에서 자기발명과 ‘자기계발’은 명백한 차이를 지닌다. 이는 『랭스』나 『변화』가 예컨대 『힐빌리의 노래』(Hillbilly Elegy) 같은 미국식 성공 서사에 기초한 자서전과 질적으로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23) 더욱이 출신 계급의 운명을 재생산하지 않고 다른 계급으로 이행한 이른바 ‘계급횡단자’(transclasse)는 다른 사회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주체의 의도만으로는 출현할 수 없다.24) 자기발명의 실천이 구조의 재생산 과정에서 예외와 일탈, 균열을 만드는 데 일정하게 기여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발명의 지향점 자체가 계급 이동을 통한 비재생산(non-reproduction)에 놓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면 작가/지식인 되기가 에리봉과 루이에게 ‘행복한 결말’을 제공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사회적 상승은 어떤 면에서 그들의 소수성을 한층 강화하는 경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계급횡단자는 집단적 가시성을 띠지 않는 일종의 ‘숨겨진 소수자’를 구성한다. 그는 과거의 출신 계급으로 되돌아가지도 못하고, 새로 옮겨간 계급에 진정한 소속감을 느끼지도 못하는 ‘영원한 망명 상태’의 자의식 아래 살아갈 수 있다. 『랭스』와 『변화』는 모두 화자가 두 세계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떠도는 자신의 상황을 인식하고, 그 지점에서 또 다른 출발을 암시하며 끝을 맺는다. 이 ‘끝없는 부유의 경험’과 그로 인한 불안은 바로 화자가 기존의 정치경제적 구조 안에 온전히 편입되지 않고 자기만의 고유한 자리에서 권력과 창조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것은 자기발명이 이런저런 ‘세속적 성취’로 완수되는 자기계발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시킨다.

덧붙여 에리봉과 루이의 사례는 계급 이동을 초래하는 자기발명이 얼마나 복잡한 궤도를 그리며 나아갈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들의 자기발명 과정은 중상층계급에 대한 선망과 그에 따른 상승 의지 위에서 학업적 성공(제도화된 지식의 습득과 인정)을 추구하는 한편, 이성애적 동일시 규범에 대한 거부 또는 거리두기를 통해 소수자적 정체화(게이로서의 자기긍정)를 지향한다. 전자가 지배적인 가치체계와 사회구조에 부합하려는 노력이라면, 후자는 그것들에 저항하려는 시도다. 에리봉과 루이에게 ‘성공’이 탈주의 힘을 확보하는 차원에서만 의미 있는 기획이라 하더라도, 계급과 성 정체성의 교차는 주체를 때로 내적 갈등과 파열에까지 몰고 갈 수 있는 중층적 스펙트럼을 자기발명의 운동에 부여한다. 

또 하나 유념할 점은 『랭스』와 『변화』의 글쓰기가 지니는 수행적 성격이다. 즉 이 텍스트들은 저자의 자기발명을 현재완료형으로서 재현하고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다시 자기발명의 의미 있는 계기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과거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이며, 자기발명은 끝없는 진행형이라는 점에서 언제나 재발명일 수밖에 없다. 에리봉의 말처럼, “우리의 과거는 여전히 우리의 현재다. 따라서 우리는 표명되고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재표명되고 재창조된다”.25) 『랭스』는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거기서 ‘귀향’의 모티브는 저자가 단순히 자신의 성공적 계급 탈주 뒤에 감춰진 고난의 일대기를 회고하기 위해 설정한 진입로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랭스』는 ‘이미 끝난’ 것이 아닌, ‘다시 시작하는’ 자기발명의 이야기다. 오래전 떠나온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에리봉의 여정은 파리의 지식사회에서 게이 지식인으로 생활하던 그가 자신이 새롭게 정주한 공간의 규범체계와 생활양식, 사유 관행―인종이나 섹슈얼리티 문제에는 관대하면서도 계급문제에 대해서는 편견이나 무관심이 지배적인―을 문제시하고, 자신의 중간계급적 존재양식이 촉발한 사유와 이해의 한계를 반성하고 확장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는 책 서두에서 에리봉이 스스로에게 제기하는 질문을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파리에 정착한 뒤, 나는 나와는 다른 사회 계층 출신의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종종 그들에게 내 출신 계급을 거짓말로 둘러대거나 진실을 고백하며 마음속으로 불편함을 느낄 때마다, 내 출신 환경에 대한 수치, 사회적 수치를 경험했다. 그런데 나는 왜 책이나 논문에서 이 문제를 다뤄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을까?26)

에리봉의 귀향은 교수가 된 자신이 내면화한 또 다른 규범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서 비롯하며, 그리하여 또 다른 자기발명의 도정 위에 놓인다. 오래전 떠나온 노동계급의 세계로 귀환을 감행함으로써 그는 그동안 자신의 가족을 포함한 노동계급에 대해 가져왔던 혐오와 편견, 몰이해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고 객관화할 기회를 마련한다. 이는 이전까지 지성사와 섹슈얼리티를 연구주제로 삼았던 그가 그간 의식 속에서 ‘억압해온 것’(계급정치)을 소환하고 대면함으로써 새로운 정치적 각성에 이르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에게 랭스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고 성적 수치심을 안겨준 노동계급의 공간이었다면, 파리는 계급 불평등을 은폐하고 사회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킨 지식인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귀환의 여정을 계기로 에리봉은 랭스에서 파리로, 노동계급에서 중간계급으로, 문제아에서 지식인으로 이행해간 자신의 궤적이 성공의 그럴듯한 외양 뒤에 가리고 있던 거대한 한계를 깨닫는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열렬히 원했던 ‘파리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위치가 자신의 관점과 입장을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신이 새롭게 습득하고 깊숙이 내면화한 가치체계 역시 상대화되어야 하는 성찰의 대상이라는 사실에 관련된다. 에리봉이 수십 년간 증오했으며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평생 사회세계의 폭력에 시달린 희생자였다는 진실을 결국 이해하고 눈물을 흘리는 책의 마지막 장면은 그가 탈주하고 단절했던 세계로의 귀환을 통해 자신을 (랭스와 파리가 상징하는 노동계급과 교양계급 그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한층 자율적인 지식인 주체로 어떻게 재창조해내는지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변화』 역시 에리봉의 책처럼 자기발명의 서사이자, 글쓰기 그 자체를 ‘자기의 기술’(techniques de soi)로 통합하는, 수행적(修行的)인 동시에 수행적(隨行的)인 작업이다. 『변화』는 ‘두 개의 서문’, I장 ‘엘레나(아버지에게 보내는 가상의 해명)’, II장 ‘디디에(단절)’, III장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들(엘레나에게 보내는 가상의 해명)’로 이루어져 있다. 책을 여는 두 개의 서문에서 루이는 빈곤과 폭력의 경험을 씨줄로, 탈주와 변신을 향한 열망을 날줄로 짜인 자신의 26년 생애를 짧게 되짚고는, 마침내 자신이 바라던 대로 파리고등사범학교 학생이 되었지만 여전히 가난에 시달리며 남창 일로 돈을 버는 현재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서문을 제외한 모든 장은 아버지와 친구 엘레나를 수신인으로 하는 일종의 편지글처럼 쓰여 있다. 그 내용은 그가 자기발명 과정에서 두 사람에게 저지른 ‘배신’에 대한 일종의 긴 자기변명이다. 그 속에서 떠오르는 그의 생애 서사는 흥미롭게도 성공 아닌 실패의 형상을 띤다. 

루이는 어릴 적 살던 시골의 노동계급 가족에게서 벗어나 아미앵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그리고 다시 파리의 그랑제콜로 진학하며 필사적인 탈주와 변신의 시도를 거듭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지닌 (성적) 매력을 이용해 여러 부류의 사람을 만나며 귀족과 부르주아지를 비롯한 유럽사회 다양한 계급의 생활공간에 내재하는 어둡고 부정적인 면들을 체험한다. 이는 그에게 실망과 좌절감, 극도의 피로감을 안겨주었고, 결국 그간의 노력을 스스로 실패로 규정한 후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에스파냐로 떠나도록 만든다. 하지만 기대와 달랐던 바르셀로나에서의 은둔생활 역시 짧게 끝나버리고, 다시 파리로 돌아온 루이는 『에디의 끝』의 원고를 비로소 마무리 짓는다. 『변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에디의 끝』 출간 이후 그토록 갈망하던 사회적 성공을 이루었으면서도 새로운 환경과 조건에서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고 후회와 회의감에 휩싸인 복잡한 심경을 서술한다. 그는 자신의 오랜 노력과 투쟁이 과연 헛된 것은 아니었는지 자문하고, 자신이 도망치듯 떠난 어린 시절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싶어하는 것이다. 

편지 형식의 자기해명을 근간으로 하는 『변화』의 글쓰기는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편지가 ‘자기의 글쓰기’이자 ‘자기의 기술’이었다는 푸코의 언급을 상기시킨다. 푸코는 그 당시 편지가 무엇보다도 자기성찰과 변형의 실천이었으며, 이는 자기에 관한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다시 자리매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쓴다는 것은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고, 보이게 하는 것이며, 타자 곁에서 자기 고유의 얼굴을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편지는 우리가 수신인에게 보내는 시선인 동시에(…), 그에게 쓴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를 자기 시선에 던지는 방식이기도 하다. (…) 편지가 수신인에게 행하는 작업, 발신인에게 또한 그 자신이 보낸 편지에 의해 행해지는 작업은 ‘자기성찰’(introspection)을 함축한다. 그런데 이 내성(內省)은 자기에 의한 자기의 해독이라기보다는 타자를 향한 자기의 열림으로 이해해야 한다.27)

가상의 편지로써 펼쳐지는 루이의 자전적 글쓰기는, 고대의 편지에 대한 푸코의 해석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며 타자에게 자기를 여는 실천을 통해 자기발명을 지속하는 수단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또한 자기발명의 서사가 자기계발에 의한 성공담과는 다르다는 점을 명확히 드러낸다. 작가 되기와 이를 통한 계급 상승은 루이에게 행복감을 가져오기는커녕 모종의 퇴행적 감상을 자아낸다. 자기발명의 수행이 초래한 ‘소진’과 ‘계급 멜랑콜리’ 앞에서 그는 그 실천의 근본적인 의미를 되묻는 글쓰기로써 대응한다. 그러한 투쟁의 산물이 다름아닌 『변화』인 셈이다. 루이의 이 성찰적 태도와 수행은 그의 자기발명이 역설적이게도 그 실패에 관한 글쓰기를 통해 계속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III. 우정의 힘

계급횡단자의 수행적 글쓰기라 할 수 있는 『랭스』와 『변화』에 그렇다고 유사성과 공통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두 저작 사이에는 한 가지 큰 차이점 또한 두드러진다. 자기발명 과정에서 우정이 갖는 위상, 그리고 그 성격과 의미에 대한 논의가 그것이다.28) 우정은 사랑만큼이나 모호하고 광범위한 개념이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친족관계나 성적 매력, 사회적 예의범절에 기초하지 않은 상호적이고 지속적인 애착, 친밀성, 존중과 신뢰의 감정’이라고 규정해볼 수 있다. 그것은 나아가 그러한 감정으로 연결된 사회적 관계 역시 가리킨다.29)

『랭스』에서는 우정이라는 주제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는 데 반해, 『변화』에서는 아예 서사를 구조화하는 주축을 이룬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사뭇 대조적이다. 물론 『랭스』에 친구관계를 둘러싼 에피소드가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에리봉 자신과 가족의 역사를 매개로 계급사회 프랑스의 해부에 집중하는 책의 전체 흐름 때문인지, 우정 문제는 매우 제한적으로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에리봉은 고등학교 시절 공부에 몰두하고 문학과 예술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 같은 반의 한 친구 덕분이었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강렬한 감정적 애착을 느꼈으며 교수의 아들이기도 했던 그 친구와의 관계를 간략하게만 논의하고 넘어간다. 에리봉은 20세 즈음 주변 친구들에게 자신의 성 정체성을 털어놓는데, 뒤이어 “그들은 이미 알고 있거나 한참 전부터 그럴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동안 왜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 의아해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정도로 지나치듯 가볍게 이야기한다. 기자와 취재원의 관계로 인연을 맺은 푸코나 부르디외와 관련해서도 그는 그들과 “아주 친밀한 우정을 나누었다”고 언급하지만, 그 양태와 의미에 대해서는 별달리 상술하지 않는다.30) 그런데 사실 이러한 친구들과 맺은 우정은 에리봉의 자기발명 과정에서 번번이 전환점들을 마련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등학교 동창의 경우 에리봉에게 교양 추구의 동기를 불러일으키며 역할 모델을 제공해주었다면 주변 친구들은 새로운 정체화의 여건을 마련해주었고, 푸코와 부르디외의 경우에는 언론·출판계와 학계에서 든든한 지원자 노릇을 해주었다. 유감스럽게도 『랭스』는 이 관계의 의미와 효과에 관한 깊이 있는 성찰이나 분석을 제공하지 않는다. 

이와 달리 『변화』는 친구관계와 우정을 서사 구성의 중심축으로 설정한다.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1장과 2장의 제목은 아예 ‘엘레나’와 ‘디디에’로, 저자 루이의 자기발명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두 친구의 이름에서 그대로 따온 것이다. 고등학교 동창인 엘레나는 루이가 선망했던 교양 있는 중산층 가정의 여학생으로, (에리봉의 고등학교 동창과 마찬가지로) 루이에게 책 읽기와 문화예술에 대한 취향, 그리고 계급 상승을 통한 탈주의 열망을 불어넣어준 존재라 할 수 있다. 루이는 연극에 대한 흥미와 재능 덕분에 자기 고향 마을에서 벗어나 예술 관련 전공이 있는 아미앵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는데, 거기에서 엘레나를 알게 된다. 그는 엘레나와 아미앵 대학교에 나란히 진학하며, 엘레나의 소개로 디디에 에리봉의 강연에 참석하고서 다시 파리로의 이주와 고등사범학교 진학을 꿈꾸게 된다. 한편 이처럼 우연찮게 루이의 삶에 들어온 ‘디디에’는 『랭스』를 통해 루이의 의식적인 자기재창조의 기획을 자극한 인물이다. 그는 애당초 일종의 멘토 또는 조언자 노릇을 하다가 점차 친구로 변모한다. 둘 사이의 친분이 쌓이면서 루이는 디디에로부터 고등사범학교 입시 준비와 파리 생활, 그리고 이후의 소설 쓰기에 이르기까지 실질적인 도움을 받는다. 

사회구조의 재생산에 균열을 가져오는 계급횡단자들의 문제를 탐구한 철학자 자케(Chantal Jaquet)는 그들의 성공적인 탈주에 “[행위] 역량을 강화하거나 감소시키는 신체적·정신적 변화의 총체”로서 감정이 핵심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31) 이를테면 야심, 정의감, 수치심, 자긍심, 분노, 고통, 사랑, 우정 등이 그것이다. 에리봉과 루이의 텍스트는 이러한 자케의 주장을 경험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실례로 가득하다. 이 가운데 우정이라는 감정은 각별한 의미를 띠는 것으로 다루어질 만하다. 사실 어떤 이에게나 자기발명은 오롯이 개인적인 문제일 수 없다. 그것은 특수한 권력관계 속에서 때로 지배와 억압, 규범과 이데올로기를 거스르거나 그에 맞서 일어나는 과정인 동시에 모종의 지지와 협력, 인정과 연대에 힘입어 일어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르트르식으로 말하자면, 자기발명은 자기에 대한 자기의 관계라는 차원을 넘어 언제나 타자성(altérité)에 열려 있다. 이때 타자는 지배와 억압의 주체 이전에 공존을 위한 상호인정과 연대의 상대로서 시혜(générosité)와 순수한 무상성(gratuité)으로 특징지어진다.32) 그렇다면 우정은 자기발명과의 관련성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 우리는 에리봉과 루이의 텍스트들에 나타나는 우정의 두 가지 기능을 주목해볼 수 있다. 

먼저 우정은 수치심의 극복 또는 전환 과정에서 일종의 보조자 역할을 한다. 에리봉은 수치심에 내재하는 ‘변형 에너지’를 강조하며, 그러한 맥락에서 수치론(hontologie) 또는 수치분석(honto-analyse)을 주창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수치는 소수자가 경험하는 단순한 감정 수준을 넘어 그의 정체성을 틀 짓는 구성적인 정동으로 기능한다. 소수자의 자기발명은 수치심을 자긍심으로 전환하는 과정, 즉 사회적 낙인과 모욕, 열등화를 주체적으로 전유하는 과정이기도 하다.33) 이때 우정은 소수자가 자신의 납덩이 같은 주체성을 변환하는 존재론적 연금술의 효과적인 촉매제로 작용할 수 있다. 당연히 우정만이 유일한 작용인은 아닐 테다. 예를 들면 에리봉은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감당하고 재전유하기로 결심하기까지 “책들이 버팀목이 되어주었다”고 회고한다.34) 그런데 세세한 논의나 해석이 뒤따르지는 않아도, 『랭스』에는 에리봉이 자긍심을 가진 게이로 주체화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우정의 지원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에피소드들이 산재해 있다. 

사실 그가 커밍아웃을 감행했을 때 친구들의 인정과 지지, 신뢰가 없었더라면(또는 감행 이전에 그런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하지 못했더라면), 그의 자기발명 또한 훨씬 더 힘든 과업이 되었을 것이다. 기존 가치체계에 대한 소수자의 ‘배반’의 현장에는 이처럼 알게 모르게 그러한 이탈을 자극·촉진하거나 지지하고 연대하는 동료들, 친구들, 그리고 그들 간의 우정이 자리한다.35) 에리봉 스스로 일반론의 형식 아래 쓰고 있듯이, 소수자에게 그의 ‘동족들’이 모이고 만나는 공간이 사회성의 교류, 정보와 지식의 교환, 문화적 유산의 전수 등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면, 그 공간의 원활한 작동이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우정을 매개로 가능해진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가족과 불화하거나 심지어 단절하기 쉬운 소수자의 경우, 삶의 궤적에서 친구관계가 갖는 중요성은 한층 커질 수밖에 없다. 이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루이의 책은 우정이 갖는 다면적인 영향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편 우정은 자기발명 과정에서 적극적인 원동력으로도 기능한다. 이는 특히 우정이 개인의 변신에 준거를 제공하는 모델에 대한 감정적 관계 형식이 될 때 두드러진다. 개인이 이전까지와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그러기 위해 아예 자계급으로부터 이탈하고자 한다면 문화와 규범체계, 생활양식을 공유하는 동일한 환경 출신이 아닌 ‘다른 삶’의 모델에 대한 선망과 모방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36) 그런데 선망이나 모방의 심리적 메커니즘은 모델을 구현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 또는 우정을 통해 가장 효과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친족 가운데 예외적인 선례라든지, 존경하는 교사의 본보기, 또는 좋아하고 닮고 싶은 친구의 존재는 그 자체로 개인의 변신이나 계급상승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자기발명의 의지를 강화하고 그 과정을 가속하도록 힘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에리봉이나 루이의 고등학교 동창은 그 구체적인 예를 보여준다. 두 사람 모두에게 자기변신은 계급 탈주와 뗄 수 없게 맞물린 문제였고, 그들은 다른 계급의 친구에게 깊은 우정을 느끼면서 그를 ‘새로운 나’의 본보기로 삼았다. 자케의 지적처럼 “서로 다른 계급 사이의 우정 혹은 사랑의 만남은 우리가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 싶고 또한 우리가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타자성을 향한 열림을 통한 정체성의 재주조를 동반한다.”37) 이때 우정으로의 이끌림이 매우 복합적인 심리 작용의 면모를 띤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엘레나와의 만남이 자기에게 가졌던 의미를 서술하는 루이의 다음과 같은 문장은 우정이 때로는 어떤 권력 의지의 변형태로서 나타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엘레나와의 만남을 통해 나는 새로운 삶의 양식, 새로운 사회계급의 코드와 그 계급에 연결된 온갖 것, 예술, 문학, 영화에 열중하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내가 어린 시절에 복수할 수 있게 해주었고, [아버지] 당신과 내 과거, 가난, 모욕(Insulte)에 맞설 힘을 주었기 때문이며, 이 삶을 모방하면서 당신을 언제나 주눅 들게 했고 당신이 언제나 암묵적으로 우월하다고 인정했던 어떤 세계에 내가 발을 들였기 때문이다.38)

루이 스스로 “우정을 넘어선 애정의 관계”로까지 여길 수 있었던 엘레나에 대한 정동은 이처럼 어린 시절의 가족과 마을 전체에 대한 복수심, 그리고 중상류층의 삶을 향한 동경과 기대, 이에 따른 계급적 상승 욕구와도 긴밀히 결합해 있었다. 모든 감정이 그렇듯 우정 역시 마냥 순정한 감정은 아닌 셈이다. 

IV. 우애관계의 이상 

우정의 의미는 개인의 자기발명 과정에 직간접적인 동력을 제공하는 감정적·기능적 자원이라는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우정은 친구-타자에 대한 기본적인 감정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 구성되는 하나의 사회적 관계 형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정은 대안적 삶의 양식으로서 자기발명의 일부인 동시에 그 지향점을 제공할 수 있다. 풀어 말하면 감정으로서의 우정에 힘입어 자기발명이 일어날 수 있는 것만큼이나, 관계로서의 우정을 추구하며 자기발명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푸코가 『성의 역사 1. 지식 의지』 발간 이후 주체화와 관련한 일련의 논의를 전개한 시기에 우정에 관한 사유의 단편들을 제시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푸코는 우정이 법과 제도의 통제를 받지 않는 기초적이고 유동적인 관계 형식이며, 그 안에서 사람들이 자유와 선택, 밀도 있는 감정을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정을 나누는 친구들은 외부에서 부과되지 않은 자기들만의 고유한 코드를 형성해가며, 사회공간 안에 일종의 자율적인 연대의 장소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우정은 사회규범에의 예속화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다시 발명할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렇게 해서 출현하는 새로운 관계 형태와 삶의 양식으로부터 기존 질서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힘이 나온다.39) 푸코는 이러한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1970~80년대 게이문화를 주된 참조대상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바꿔 말하면 그는 동성애를 단순한 정체성이나 성 해방의 문제가 아닌,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조하고 발명하는 문제로서 접근하고자 했다. 그의 관점에서 퀴어정치의 쟁점은 ‘자유로운 성애의 보장’이나 ‘심오한 성적 진실의 규명’이 아닌, 다른 형태의 관계·공존·연결·쾌락의 생산이었던 셈이다.40) 그렇다면 ‘삶의 양식으로서 우정’이라는 관념을 퀴어정치의 틀을 넘어서 일반화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이는 또 어떤 의의를 지니게 될까? 

정치철학자 라갸느리(Geoffroy de Lagasnerie)는 2023년 출간한 저작 『셋. 바깥을 향한 열망』(3. Une aspiration au dehors)에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제공한다.41) 그는 ‘삶의 양식으로서 우정’에 대한 푸코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그것의 의미를 폭넓게 탐색하고 좀 더 진전된 논의를 제시한다. 주목할 것은 이 과정에서 그가 자신과 에리봉, 그리고 루이 사이의 우애관계를 이론적·철학적 성찰의 주재료로 삼는다는 것이다. 라갸느리는 에리봉의 법적인 ‘생활 동반자’이기도 한데, 에리봉을 통해 루이를 알게 된 후 2011년 가을부터 10여 년간 세 사람이 깊은 우정을 쌓아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셋. 바깥을 향한 열망』(이하 『셋』)은 반드시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2008년까지를 다룬 『랭스』와 2013년까지의 이야기인 『변화』 이후 에리봉과 루이의 자기(재)발명 과정을 그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제삼자의 목소리로, 또는 라갸느리를 경유해 세 사람의 한목소리로 들려주는 텍스트인 셈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하루하루의 일정, 만남의 방식은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했다. 하지만 금세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해졌다. 산다는 것은 셋이 산다는 것이고, 셋이 감동하는 것이고, 음악회나 공공 행사에 셋이 참여하는 것이고, 시사문제에 셋이 논평하는 것이다. 마치 어떤 경험도 함께 겪었을 때에야 완전히 살아낸 것이 된다는 듯이 말이다.42)

『셋』이 기술하는 세 사람의 ‘우정 만들기’ 또는 ‘우애적 주체(sujet amical) 되기’는 매우 이상적인 성과를 거둔 것으로 나타난다. 각자의 삶을 뒤흔들고 실존에 깊은 흔적을 남긴 이 우애관계는 그것이 움튼 이후 공동의 대화·식사·독서·여행·문화활동 등으로 이어져 가족관계를 실질적으로 대체했고, 정치적 참여(시위·성명서·공적 발언)라든지 창작 작업의 지원(정서적 지지·원고의 상호 검토와 비평) 같은 긴밀한 공동 실천을 낳은 것으로 묘사된다. 라갸느리는 이러한 관계가 고유한 의례(휴가와 여행·생일과 기념일의 축하), 장소(단골 카페·영화관·공연장·레지던스), 시간성(일정의 공유와 상호조정), 관계망(공동의 친구들)을 통해 그들에게 하나의 삶의 양식이자 감정과 경험의 틀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셋은 “우정이 삶의 양식, 즉 문화이자 주체성 생산양식이 된 관계 공간”을 창출하는 데까지 다다른 셈이다.43)

이러한 말이 갖는 의미의 한 가지 단면이 라갸느리가 세대 간 우정과 관련해 기술한 내용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에 따르면 세대 간 우정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정하는 ‘나이에 맞는’ 행동이나 역할, 정체성에 거리를 두고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해주며, 동일한 연령대만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허용하지 않는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세대 간 우정을 통해 다양한 연령대를 동시에 상상하고 체험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다원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친구들 가운데 어떤 개인이 ‘회춘’ 또는 ‘조로’하는 문제가 아니라, 친구들 모두의 사회적 나이 경험을 분화·다양화·이질화하는 문제다.44) 라갸느리가 직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지만, 이런 지적이 1981년생인 자신과 1953년생인 에리봉, 그리고 1992년생인 루이 사이의 우애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사실 세 사람 간 우정의 세세한 면모는 절친한 친구관계의 일상적인 전형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라갸느리가 그들 관계에서 끌어내는 이론적 논점들은 삶의 양식으로서 우정이 갖는 정치적 의미라는 차원에서 흥미로운 성찰의 지점들을 제공한다. 

일단 라갸느리는 우리 사회에서 친구관계의 가치를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는 가족관계(부부, 부모-자녀)에 부여되는 중요성과 매우 대조적이다.45) 제도화된 가족관계는 각종 행정적·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마치 ‘사회적인 것’의 마지막 보루인 양 여겨진다. 그것은 또 당연히 주어진 것이자 일차적인 것으로서, 친구관계에 선행해야 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라갸느리는 가족관계가 친구관계보다 우월하다는 발상을 우리가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우선하는 것은 가족애가 아니라 오히려 우정이다. 개인이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기까지 가장 소중한 것으로 인식하는 친구관계는 성인기로 접어들면서 점차 부차적인 것으로 변해간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결혼, 자녀의 출산과 양육, 부모 및 친족과의 관계 재정립 등을 통해 가족제도에 본격적으로 (재)편입되면서 친구관계를 정리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가족관계는 우정에 대한 애도 작업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라갸느리는 우리가 사회의 지배적 권력관계와 규범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다르게 구성하고자 한다면, 스스로를 가족관계가 아닌 우애관계 속에 재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정이 우리 실존에 대한 규범적 장치들과 지배적 에토스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탈출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정은 ‘선택가족’이나 ‘대안가족’ 아닌 ‘반가족’(anti-famille)의 형상을 띤다. 그것은 가족 중심의 삶이 초래하는 정체성의 고착과 교류 관계의 사막화에 맞서서 다원성, 연계성, 창조성을 작동시키는 존재 원리다.46)

제도화된 가족관계가 우리 삶의 지배적인 형태라면, 다른 삶을 위해 우리는 대안적인 형태를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푸코를 뒤이어 라갸느리는 우정을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 계발하자고 제안한다. 우애관계는 “바깥을 향한 열망이 가로지르는 실존적 실천”으로, “다른 공간, 사회의 바깥, 다른 존재방식이 발명되는 반(反)문화적 공간”을 낳는 모태로 기능할 수 있다.47) 이처럼 우정을 하나의 삶의 양식으로 정초하는 일은 주체의 윤리적 변환을 요구한다. 우정이라는 관계성은 관습적인 삶의 형태들에 덧붙는 무엇이 아니라 아예 다른 그 무엇이며, 따라서 모종의 방향성 아래 지배적 삶의 형태들을 희생시키며 이뤄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 개인에게 가족적 삶과 우애적 삶은 병립할 수 없다. 우리 실존과 관심사의 중심에 가족 아닌 친구를 위치시키는 것은 공간과 시간에 대한 규범적 관계를 재구축하는 작업을 요구한다. 그것은 친구들끼리 시간을 서로 맞추고 내어주며 같은 장소에서 공존하는 일이고, 미시적인 상호의존과 상호작용을 통해 일상생활의 틀을 함께 구성하는 일이다. 또 우리가 우정을 지속하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을 기울이며 자기에 대한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면, 자기의 성장과 심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 친구와는 절교할 수 있어야 한다. 우애적 삶의 양식을 구축하는 작업은 우리에게 우애적 주체로의 전환을 요청하지만, 동시에 우애적 삶의 양식을 통해 우리는 우애적 주체로서 생산된다. 말하자면 우애적 주체는 우정의 가능 조건이자 그 효과인 셈이다.48)

당연한 말일 수도 있지만 라갸느리는 이런저런 관계적 배치들이 모두 우정의 범주에 속하는 것은 아니며, 우정에도 다양한 유형이 가능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어디에 써먹거나 그저 즐기기 위한 우정이 아닌 다른 삶의 발명, 다른 세계의 창조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한 우정이다. 이 점에서 라갸느리의 우정론은 아리스토텔레스나 니체의 그것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49) 이는 우정을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서로에게 쾌락을 줄 수 있는 온갖 것의 총합”으로 정의한 푸코의 시각과도 일맥상통한다.50) 이때 쾌락은 자기발명과 수행이 수반하는 정동, 말하자면 창조성의 짝패를 가리킨다. 삶의 양식으로서 우정은 단순히 소수자들만의 자족적인 ‘공동체’ 또는 폐쇄적인 ‘하위문화’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적인 실존양태와 관계 형성의 경로를 발명하고 진작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우정이 갖는 의의는 바로 이러한 창조성으로부터 나온다. 

창조적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우정이 존재한다. 그런 우정은 관계성과 삶에 대한 다른 관념 같은 무언가를 수반한다. 견고하든 그렇지 않든 지속적이든 그렇지 않든 여타 제도화된 틀에 굴복하지 않으며, 우리 실존의 양식화 방식을 재구성할 수 있는 일종의 힘을 자기 안에 간직한다. 그런 우정은 수행의 장소, 반문화 발명의 본거지를 형성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대부분의 제도화된 실존 양식들을 변경할 원리들을 길어올린다. 다르게 살기 위해.51)

라갸느리의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우리가 우애관계를 통해 사회세계, 좁게는 문화생산의 장과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는지, 그 기대효과가 무엇인지 이론적·경험적 설명을 시도하는 대목이다. 사실 이는 상당히 논쟁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라갸느리는 우정이 근본적인 중요성을 띠는 이유가 무엇보다도 대안적인 인정(reconnaissance)의 공간을 마련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논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부르디외의 철학적 인간론과 상징혁명론을 적극적으로 끌어온다. 먼저 그에 따르면, 부르디외가 자기 사회학의 바탕에 깔고 있는 인간론은 모종의 비관적·비극적 형이상학으로, 그 핵심은 본래 존재의미와 존재이유가 없는 존재인 인간은 그 의미와 이유를 바로 사회에서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삶의 무의미와 무상성에서 벗어나려면 (타자의 인정을 제도적으로 생산하는) 사회세계 안에 있어야 한다. 사회세계에서 개인 행위자들이 추구하는 경제자본(capital économique)·문화자본(capital culturel)·사회관계자본(capital social) 등이 모두 상징자본(capital symbolique)을 수반한다는 부르디외의 명제는 라갸느리가 보기에 인간이 지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상징자본―즉 타자의 인정·명예·위신·신망 등―이며, 인간은 결국 이를 위해 사회적 게임 안에서 투쟁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식 위에서 부르디외는 행위자들이 다양한 유형의 자본을 더 많이 차지하거나 독점하기 위해 경쟁하는 사회세계가 불평등하게 위계화되며, 그러한 구조는 일종의 신체적·제도적 경로 의존성을 매개로 재생산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구조의 지속성과 상대적 안정성을 강조하는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사회세계에 대한 정태적인 관점으로 위기와 변화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비판에 자주 시달렸다. 하지만 이는 부르디외의 사유와 저작 전반에 대한 균형 잡힌 비판이라고 하기 어렵다. 일례로, 19세기 프랑스 문화생산 장에서 플로베르나 마네(ÉdouardManet)가 수행한 상징혁명에 관한 부르디외의 분석은 그가 단지 구조의 재생산뿐만 아니라 변화와 그 사회적 가능 조건에 대해 얼마나 큰 관심과 주의를 기울였는지 알려주기 때문이다.52) 이 상징혁명론을 참조하면서 라갸느리는 마네가 당대의 아카데미즘에 맞서 인상주의라는 상징혁명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우애관계가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데 주목한다. 즉 이단자 마네의 예술적 실험과 혁신은 화단의 제도적인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친구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비공식적 지지공간이 있었기에 그것을 기반으로 계속될 수 있었고 마침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는 것이다. 라갸느리에 따르면 이는 문화생산 장 내의 ‘이단’이 ‘정통’과의 세력 투쟁에서 승리하는 데 우정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지 일깨워주는 역사적 사례다.

부르디외의 철학적 인간론과 상징혁명론을 발판 삼아 라갸느리는 문화생산 장에서 제도적인 인정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또는 제도 안에서 상징자본을 축적하기 어려운 이단·비주류·대항세력이 존립·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바로 고유한 우애관계라고 역설한다. 우정은 대안적인 인정의 심급을 제공하며, 그럼으로써 제도화된 것, 규범화된 것과는 다른 인식과 담론이 출현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한다. 라갸느리는 이러한 논리를 다시 자신과 에리봉, 루이의 우애관계와 연결 짓는다. 달리 말해 제도권 학계와 예술계에서 일종의 이단자들에 가까운 세 사람은 지배적인 전통과 관행, 전문성의 요구에 맞춘 연구와 창작을 수행하지 않는다. 주류에 맞선 일종의 대항담론 생산자로 자처하는 그들은 학문과 예술 제도의 규범에 따른 장 내부의 인정과 평가를 추구하기보다, 제도화된 장이 그 자체로 행사하는 검열 메커니즘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지식과 글쓰기를 실험하고자 한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학문을 위한 학문’ ‘예술을 위한 예술’을 거부하고 지배에 대한 비판과 사회 변화에 이바지하는 정치적 담론을 지향한다. 라갸느리는 세 사람의 이와 같은 ‘이단적’ 실천이 한편으로는 독자 공중(또는 시장)의 인정에, 다른 한편으로는 친구들의 우정에 기초해 있다고 지적한다. 우애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은 상대방의 글을 꼼꼼히 읽어주고 생산적으로 비평하며 서로의 작업을 격려한다. 이들이 상대방에게 보내는 인정과 정서적 교감은 대학과 제도권 지식사회 바깥에서 그 규범을 거스르는 혁신과 발명이 이루어질 수 있는 원천으로 작용한다. 우정은 이단자들에게 대안적 소속 공간을 마련해줌으로써 창조적 기능을 수행하고, 이로써 관계적 창조와 상징적 창조는 서로 긴밀하게 얽힌다.53)

V. ‘실존적 박탈’을 넘어서 

에리봉, 루이 그리고 라갸느리는 자신들의 삶과 관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객관화를 통해 자기발명의 소수자적 경로와 그 과정에서 우정이 갖는 특별한 위상을 잘 보여준다.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고 재창조하는 작업은 그 내용이 미리 규정될 수 없으며 끝없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은 무한한 다원성과 복수성 속에서만 사유될 수 있다. 그럼에도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사례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자기발명과 우정의 관계성을 어느 정도 이론화할 수 있고, 역으로 그 현실적인 한계와 난점들을 포착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에리봉과 루이의 자기서사는 라갸느리가 세 사람의 관계 경험을 토대로 이론화한 ‘창조적 우정’ ‘삶의 양식으로서의 우정’이 실제로는 얼마나 성공하기 어려운 과업인지를 다양한 측면에서 일깨운다. 자기발명 과정에서의 모든 만남이 친구관계로 이어지지는 않으며, 또 모든 친구관계가 안정적인 우정의 상태를 구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적잖은 인간관계는 부르디외가 말한 사회관계자본으로 전유되는 수준에 머문다. 한 예로 에리봉은 『리베라시옹』(Libération) 기자 출신의 ‘죽이 잘 맞았던’ 한 여자친구에 관해 아주 간략하고 건조한 서술만을 제공하는데, 이는 무직자로 실의에 빠져 있던 에리봉이 그 기자의 소개로 언론계에 진입해 본격적인 경력을 시작할 수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좀 놀랍게 느껴진다. 그가 짧게 교제했던 게이 청년을 통해 건너 건너 친분을 맺게 된 이 기자를 에리봉은 “게이 하위문화가 제공한 자원”으로도 표현한다.54) 그에게 이 여자친구는 유용한 인맥이자 연줄이었으나, 우정의 상대는 아니었다는 뜻일 테다. 

사실 감정이자 관계로서의 우정도 언제나 취약하고 불안정하다. 특히 서로 다른 출신, 서로 다른 환경에 있는 사람들은 친분을 맺을 기회도 적지만, 우정을 나누더라도 갈등을 빚고 충돌할 개연성이 매우 높다. 에리봉이 예리하게 간파한 것처럼 “우정도 역사라는 중력을 벗어나지 않는다. 두 친구는 공존을 시도하는 두 개의 체화된 사회적 역사이다. 얼마나 친밀하든 간에, 관계가 진행되는 동안 아비투스의 관성효과에 의해 두 계급이 맞부딪힌다”.55) 우정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친구들 간의 이해와 신뢰, 타협과 조정의 기술, 충실성의 테크놀로지가 반드시 요구되는 이유다. 게다가 자기발명과 우정은 때로 양립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를 수도 있다. “내 삶의 역사는 깨진 우정들의 연속”이라고 말하는 루이의 경우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56) 그에 따르면 삶의 매 단계마다 자기발명의 내면적 요청은 자신의 현 상태에 맞서기를 강제했고, 그는 더 나아가기 위해서 이전에 사랑했던 사람들과 헤어져야 했다. 이는 순전히 그나 다른 이들의 결정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다만 루이는 자신을 변형하기 위해 자신과 투쟁해야 했고, 그 결과 변신의 의지와 욕구가 없는 주변 친구들과 달라졌고, 차츰 하고 싶은 말이나 나눌 수 있는 감정도 사라져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을 내팽개치고 자신을 반겨줄 수 있는 새로운 사람들을 향해,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루이에게 “변화한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된다는 의미였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다른 이들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였던 것이다.57) 이처럼 그의 자기발명은 불가피하게 우정의 ‘창조적 파괴’를 수반한 셈이다. 

루이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구축한 우정의 서사가 큰 부분 배반의 서사이기도 하다는 점은 라갸느리의 이상적 우정론과 달리 현실에서는 ‘기능적 우정’과 ‘창조적 우정’의 구분이 얼마나 모호한지, 우정을 ‘삶의 양식’으로 구축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자기발명과 우정이 얼마나 복잡미묘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알려준다. 우애관계는 그 경계를 명확히 규정하기 힘든 ‘우정’과 ‘연줄’, ‘교감’과 ‘이용’, ‘변신’과 ‘배반’의 대립구도 속에서 균열을 일으키거나 난관에 직면할 수 있다. 그것은 당사자들을 예기치 못한 심리적 곤경과 정서적 나락에 빠뜨린다. 이는 파리로의 진학과 이주를 계기로 절친했던 친구 엘레나와 단절한 이후 루이가 경험하는 복합적 감정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관계의 파탄에 대한 죄책감과 불안감에 휩싸인 그는 과거의 우정을 그리워하면서도 자신의 입장을 내심 다음과 같이 항변하고 정당화한다.

(나중에 내가 엘레나와 그 가족과 관계를 끊었을 때 엘레나의 어머니는 내게 이렇게 말할 것이었다. 넌 우리가 너한테 전수해준 모든 것을 이용해먹었구나. 이용해먹다니, 그 무슨 말인가? 엘레나 역시 그녀의 어머니가 전수해준 것을 이용해먹지 않았나? 자신의 사회적 환경을? 이용이 정당한 일이 되는 사람들과 스캔들이 되고 사취가 되는 사람들이 따로 있단 말인가?)58)

물론 이러한 부정적 실례들이 적지 않다고 해서 우정에 대한 라갸느리의 정치적·윤리적 전망을 기각해야 할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라갸느리의 이론적 논의 역시 에리봉과 루이와의 10여 년 우애관계를 실제 참고 사례로 정교화된 것이기도 하다. 세 사람의 저술작업과 그 성과는 우정의 창조적 잠재력에 대한 라갸느리의 주장에 나름의 설득력을 부여한다. 그는 무엇보다도 “제도화된 문화 장들에 대해 모종의 외부성을 유지하고, 모든 상징재 생산자에게 주제, 글쓰기 방식, 형식의 면에서 주어지는 명령어들에 대해 상대적 자율성을 확보할 구체적인 가능성을 제공하는 주체화 장치”로 우정을 작동시키는 데 일차적인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59) 이는 삶의 양식으로서 우정이 문화생산 장에서 생산할 수 있는 효과를 구체적으로 겨냥한다는 점에서 흥미롭지만, ‘생계의 걱정에서 일정하게 벗어나 있는 남성 지식인들 간의 관계’를 유일한 모델로 삼고 있다는 원초적 한계 역시 드러낸다. 가족관계(또는 ‘성인의 삶’)를 거부한 채 친구들의 인정과 지지 아래 비주류의 연구나 창작에 전념하는 생활양식은 혹시 자유롭고 무책임한 ‘대학 생활’을 끝없이 연장하고 싶어하는 도시 중산층 청년의 열망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60) 라갸느리는 『셋』의 한 대목에서 슬쩍 이러한 자기반성을 내놓지만, 이 해석에도 일리가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만 덧붙인 뒤 금세 ‘창조적 우정’의 문제로 화제를 돌린다. 

라갸느리는 사실 책에서 ‘셋’의 우애관계가 지니는 긍정적 가치에만 집중한 나머지 그 내재적 한계에 관해서는 별다른 논의를 전개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책 서두에서 제시한 ‘실존적 박탈’ 개념은 자기발명과 우정의 기획이 지니는 난점과 의의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점에서 꼼꼼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선 라갸느리는 사회질서가 작동하는 논리와 행위자들이 그 내부로 편입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대항적 분석학(analytique oppositionnelle)을 수행하려면 실존, 관계성, 삶의 형식들(formes-de-vie)이라는 차원을 탐문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사회학은 ‘경제적 박탈’과 ‘문화적 박탈’에만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그에 버금가는 ‘실존적 박탈’의 문제를 경시해왔다. 이때 박탈(dépossession)은 “사회가 모종의 자원들과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경험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제한하는 방식”을 가리킨다.61) 아마도 민중계급을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의 박탈 상태로 특징지은 부르디외를 의식하면서 라갸느리는 그간 간과되어온 실존적 박탈을 새롭게 문제시하는데, 그 메커니즘이 우리의 현재 모습을 규정하고 장악한 삶의 형식을 감수하게끔 만든다고 부연한다. 이는, 라갸느리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사회와 타자들에 의해 자신의 실존을 도둑맞는 것, 어쩌면 자신의 특정한 판본에 의해 자신의 여러 다른 가능성을 도둑맞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62) 말하자면 실존적 박탈은 우리에게 더 잘 맞고 더 많은 행복을 줄 수 있는 다른 삶의 형식들을 상상하거나 실험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현재와 같은 삶과 존재양식을 무비판적으로 감내하게끔 만드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자기발명이나 우정이라는 대안적 삶의 양식이 지니는 가치를 부각하는 일은 실존적 박탈을 거부하는 일종의 저항이자 투쟁으로서 의의를 띨 수 있을 테다. 

아쉽게도 라갸느리는 실존적 박탈을 일종의 문제제기 이상으로 발전시키거나 체계화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 개념의 이론적 함의를 좀 더 밀어붙여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실존적 박탈을 경제적·문화적 박탈과의 관계 속에서 사유하는 일이 전제되어야 한다. 기이하게도 라갸느리는 실존적 박탈이 마치 다른 유형의 박탈과 연관성이 없는 별개의 문제인 양 다룬다. 이는 그가 책에서 세 사람 관계에 내재하는 일종의 계급적·지식인적 편향을 의식하지 않는 면모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하지만 우리는 실존적 박탈이 문화적·경제적 박탈과 긴밀한 상관관계를 지닐 것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예컨대 심각한 경제적·문화적 박탈 상태에 놓인 사람일수록 실존적 박탈에 시달릴 가능성 또한 클 것이다. 한편 어떤 개인이 다른 삶, 다른 존재양식에 대해 상상하고 실험할 수 있는 잠재력은 그가 지닌 문화자본이나 경제자본의 양이 많을수록 커질 것이다. 이러한 상호관련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은 중요하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사회의 대안적 조직화에 대한 한층 복합적인 전망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라갸느리는 실존적 박탈에만 집중하면서 또 다른 삶의 양식으로서 창조적 우정을 강조하고, 이를 새로운 인정의 심급으로 구축하는 미래상을 제안한다. 그 바탕에는 제도화된 인정의 권력을 해체하고 그 너머에서 개인의 자율적인 존재형식을 고취하고자 하는 열망이 깔려 있다.63) 여기에는 자본주의적 착취관계의 변형과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에 대한 문제의식이 끼어들 자리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실존적 박탈을 지양하기 위해서는 자기발명과 우정이 갖는 가치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 사회경제적 가능 조건이 무엇인지, 그 조건은 어떻게 도래할 수 있는지 같은 질문들 역시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64)

소수자에게 자기발명과 우정은 실존적 박탈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과 관계 형식들을 모색하기 위한 윤리적 방향성을 제시한다. 그런데 실존적 박탈을 넘어서려는 의지는 그것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는 다른 유형의 박탈들을 더불어 해결해야 할 또 다른 과제로 제기한다. 나아가 박탈 개념은 우리에게 아직껏 주어진 적은 없지만 우리도 정당하게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것들―부·교양·지식·다른 삶·새로운 판단 범주와 가치체계―의 부재 상태를 비난하고, 사회에 의한 탈취를 문제 삼으며, (‘탈취로 인한 부재 이전以前’이라는 ‘가상 상태’로의) ‘원상회복’을 위한 명분을 제공한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소유와 소유권을 개인이 가진 원초적 특권으로 재정립하는 기회를 부여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소유개인주의’의 틀을 내파할 수 있는 지향들―분배·공유·평등·대안―을 소환하는 셈이다.65) 이는 소수자의 자기발명과 우정이라는 윤리적 실천이 결국 사회의 전면적 재구조화에 대한 구상과 맞물리는, 지극히 정치적인 기획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1) Michel Foucault, “On the Genealogy of Ethics: An Overview of Work in Progress,” ed. Hubert L. Dreyfus and Paul Rabinow, Michel Foucault: Beyond Structuralism and Hermeneutics (Chicago: The U of Chicago P, 1983) 392면.

2) 같은 글 같은 면.

3) 같은 글 393면. 참고로 푸코가 이 인터뷰를 프랑스에서 출판할 때 사르트르와의 차이에 관한 질문의 답변에 상당한 수정을 가했다는 점을 덧붙여두자. 1984년의 프랑스어본에는 앞에서 정리한 내용이 완전히 빠진 채 다음과 같은 문단만 나온다. “사르트르에게서는 주체에 대한 모종의 개념화와 진정성의 도덕 사이에 긴장이 존재한다. 나는 언제나 이 진정성의 도덕이 [사르트르의 첫 책] 『자아의 초월성』(La transcendance de l’Ego)에서 말해진 것을 사실상 논박하지 않는지 자문한다. 진정성이라는 주제는 명시적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 자신과의 일치(adéquation)에 의해 정의되는 주체의 존재양식을 가리킨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자기에 대한 관계는 다원적인 형태들에 따라 기술될 수 있어야 한다. ‘진정성’은 그 가운데 하나의 가능한 양태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자기에 대한 관계를 고유의 모델, 동형성, 변이형들뿐만 아니라 창조형 또한 가질 수 있는 구조화된 실천으로 개념화해야 한다. 자기의 실천은 복합적이고 다원적인 영역이다.” Michel Foucault, “A propos de la généalogie de l’éthique : un aperçu du travail en cours,” Dits et Ecrits IV (Paris: Gallimard, 1994) 617면.

4)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태 옮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이학사, 2008) 74면.

5) 같은 책 80면.

6) 푸코는 도덕(morale)과 윤리(éthique)를 개념적으로 구분하는데, 이를 들뢰즈(Gilles Deleuze)는 “도덕이 우리의 행동과 의도를 초월적 가치에 관련지어 판정하는 특수한 유형의 억압적 규칙들의 집합이라면, 윤리는 우리가 한 일, 말한 것을 그것이 함축하는 실존적 양태에 따라 평가하는 임의적 규칙들의 집합”이라고 정리한다. 질 들뢰즈 지음, 신지영 옮김 『대담 1972-1990』(갈무리, 2023) 187면. 도덕과 윤리는 자기에 대한 관계와 작업이라는 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지닌다. 예컨대 우리가 배우자에 대한 충실성을 발휘할 때, ‘관습적 금기의 준수’라는 ‘도덕’의 차원에서 그럴 수도 있고, ‘욕망에 대한 지배와 절제’ ‘감정의 상호성과 지속성’ 같은 ‘윤리’의 차원에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7) 크리스토퍼 래시 지음, 최경도 옮김 『나르시시즘의 문화』(문학과지성사, 1989) 참조. 래시의 책은 푸코가 ‘자기의 테크놀로지’에 관심을 갖는 계기를 제공했다. 미셸 푸코 외 지음, 이희원 옮김 『자기의 테크놀로지』(동문선, 1997) 9면.

8) 같은 인터뷰 뒷부분에서 푸코는 동시대 자기숭배 문화의 핵심은 “진정한 자아를 그 소외 요인이나 투명성 저해 요인으로부터 분리해내고 심리학 지식이나 정신분석 작업에 힘입어 자아의 진실을 해독함으로써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것”에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이는 “예술작품으로 구성하고 창조해야 할 자기”라는 관념에 바탕을 둔 그리스의 자기배려(souci de soi) 같은 고전적 자기수양의 대척점에 있다는 것이다. Foucault, 앞의 글 624면.

9) 차례로 Michel Foucault, “L’éthique de souci de soi comme pratique de la liberté,” Dits et Ecrits IV 712면; Michel Foucault, “Verité, pouvoir et soi,” Dits et Ecrits IV 782면; Michel Foucault, “Michel Foucault, une interview: sexe, pouvoir et lapolitique de l’identité,” Dits et Ecrits IV 740면. 원저자 강조.

10) Jean-Paul Sartre, Cahiers pour une morale (Paris: Gallimard, 1983); Jean-Paul Sartre, Saint Genet-Comédien et martyr (Paris: Gallimard, 1952); 강충권 「사르트르의 『도덕에 관한 노트』: ‘도덕적 전환’의 존재론」, 『프랑스학 연구』 22 (2002) 43~63면; 윤정임 「진정성 개념과 『성자 주네』의 회심」, 『프랑스학 연구』 80 (2017) 43~70면 참조.

11) 미셸 푸코 지음, 문경자·신은영 옮김 『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나남, 1990) 25면.

12) 이상길 「취향, 교양, 문화: 사회학주의를 넘어서」, 『문학과 사회』 27.2 (2014) 249~51면.

13)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랭스로 되돌아가다』(문학과지성사, 2021); Édouard Louis, Changer: méthode (Paris: Seuil, 2021).

14) 이기형 「‘주체의 사회적 구성’을 자전적인 접근으로 탐구하는 지적인 실험의 도전과 의의: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를 사례로」, 『언론과 사회』 30.2 (2022) 42~93면 참조.

15) 에두아르 루이 지음, 정혜용 옮김 『에디의 끝』(열린책들, 2019) 참조. 루이는 이 책을 디디에 에리봉에게 헌정했다. 또 그는 『랭스』의 문고본에 부친 서문 격의 인터뷰에서 에리봉의 책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매우 드문 책 가운데 하나”로 자기 삶을 바꿔놓았다고 말한다. Édouard Louis, “Cinq questions à Édouard Louis,” Didier Eribon, Retour à Reims (Paris: Flammarion, 2018) viii면.

16) 책에서 루이는 다른 도시로의 이주와 진학은 물론, 에디 벨괼(Eddy Belleguele)이라는 본명에서 에두아르 루이로의 개명, 성형, 문신 등을 단행할 만큼 자기변신에 대한 욕구가 강력했다고 토로한다. 그런데 그가 책에 쓴 바와 달리 실제로는 법적 개명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사실이 2022년 밝혀지면서, 오토픽션(auto-fiction)에서 글쓰기의 진정성과 진실성 문제가 새삼 논란거리로 떠오른다. 심진경 「스캔들의 문학과 비평의 몫」, 『문학과 사회: 하이픈』 36.4 (2023) 35~36면 참조. 이와 관련해 『변화』에 작가의 이야기가 과연 어디까지 사실인지 자문하도록 이끄는 각주가 하나 달려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각주에서 작가는 실제 일어났던 어떤 사건의 인물을 여러 가지 이유로―그중 하나는 일관성이다―책에서는 마치 다른 인물처럼 서술했다고 밝히는데, 이는 독자가 그전까지 모두 사실처럼 받아들이며 읽어왔던 텍스트를 급작스럽게 사실과 허구가 불명료해진 새로운 시각에서 읽게 만든다. 각주라는 글쓰기 장치가 암묵적으로 일치한다고 여겨졌던 화자와 작가를 단번에 분리하면서 텍스트의 진실 효과를 ‘사실’이 아닌 ‘창작’의 차원으로 옮겨놓는 것이다. Louis, 앞의 책 140면 참조.

17) 같은 책 28~29면.

18) 들뢰즈, 앞의 책 279~80면.

19) 질 들뢰즈 지음, 허경 옮김 『들뢰즈의 푸코』(그린비, 2019) 179면.

20) Foucault, “L’éthique de souci de soi comme pratique de la liberté” 709면. 푸코는 수행을 “우리가 자기를 변형하기 위해, 또는 다행히도 결코 도달하지 못할 이 자기를 나타나게 만들기 위해 자기에 대해 스스로 행하는 작업”이라고도 정의한다. MichelFoucault, “De l’amitié comme mode de vie,” Dits et Ecrits IV 165면.

21) 푸코는 지식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없을지 몰라도 우리를 변형할 수는 있으며,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는 지식을 통한 자기변형을 일종의 미학주의(esthétisme)로 표현하며, 다음과 같이 자문한다. “자기 그림으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면 화가가 뭐 하러 작업하겠는가?” Michel Foucault, “Une interview de Michel Foucault par Stephen Riggins,” Dits et Ecrits IV 535면; 폴 벤느 지음, 이상길 옮김 『푸코 그의 사유, 그의 인격』(리시올, 2023) 146~50면도 참조.

22) 자기발명 과정에서 벌어지는 계급 하강은 예컨대 종교인, 혁명가 등에게서 종종 나타난다.

23)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힐빌리의 노래』(흐름출판, 2017) 참조.

24) 샹탈 자케 지음, 류희철 옮김 『계급횡단자들 혹은 비-재생산』(그린비, 2024) 42면.

25) 에리봉, 앞의 책 257면.

26) 에리봉, 앞의 책 23면.

27) Michel Foucault, “L’écriture de soi,” Dits et Ecrits IV 425~26면. 『변화』에서는 이러한 편지 형식 이외에도 자기와의 상상적 인터뷰, 시, 어린 시절의 사진 등이 화자의 내면과 자기성찰을 복합적으로 드러내는 서술기법으로 쓰인다.

28) 이 글에서는 ‘감정 상태’에 초점을 맞출 때는 주로 ‘우정’을 사용하고, ‘관계 형식’에 방점을 찍을 때는 ‘우정’과 ‘우애관계’를 혼용할 것이다. ‘친구관계’는 반드시 우정으로 맺어졌다고 말하기 어려운 비공식적인 친교 일반을 포괄하기 위해 쓴다. 한편 우정을 형용사형으로 써야 할 때는 ‘우애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이다.

29) Jean Maisonneuve and Lubomir Lamy, Psycho-sociologie de l’amitié (Paris: PUF, 1993) 20면 참조. 푸코, 메종뇌브(Jean Maisonneuve)와 라미(Lubomir Lamy)를 비롯한 여러 연구자가 지적하듯, 우정이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그 의미와 위상을 계속 달리해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대나 사회구조에 따라 우정은 억눌리기도 부추겨지기도 했다. 우정 관념이 주로 남성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발전했다는 젠더적 편향성 또한 주의해야 한다. 이에 더해, 우리가 우정과 사랑을 특히 섹슈얼리티 문제를 지렛대 삼아 구분한다 해도 두 개념의 명확한 분할과 구별은 쉽지 않다는 점을 시인해야 한다. 그렇다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우정과 섹슈얼리티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 또한 이 글의 범위를 한참 넘어선다. 

30) 에리봉, 앞의 책 191~99, 255~56, 264면.

31) 자케, 앞의 책 301면.

32) 강충권, 앞의 글 44~51면.

33) 이상길 「소수자의 글쓰기와 자기발명의 윤리」, 에리봉, 앞의 책 308~17면.

34) 같은 책 255면.

35) 같은 책 240~44면.

36) 자케, 앞의 책 65~89면.

37) 같은 책 105면.

38) Louis, 앞의 책 50면.

39) 프랑스와 미국 등지에서 진행한 일련의 인터뷰를 통해 제시된 푸코의 이러한 성찰은 일관성 있는 체계를 구성하기보다는 동일한 주제에 대한 변주, 향후의 연구를 위한 아이디어들을 제공한다. 그 개략적인 내용은 이상길 「취향, 교양, 문화: 사회학주의를 넘어서」 252~53면; Didier Eribon, Réflexions sur la question gay (Paris: Fayard, 1999) 441~42면 참조.

40) 이와 관련해 에리봉은 푸코가 대항 담론과 정치적 행동을 두 가지 방향에서 전개했다고 지적한다. 현실의 전략적인 장 내부에서의 실제 투쟁, 그리고 ‘다른 공간들’의 발명이 그것이다. 그는 이를 “저항과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의 이중적 몸짓”으로 요약한다. 에리봉이 보기에 주체화나 자기실천, 삶의 양식 등은 예속화 체계에 대한 ‘편차 만들기’라는 차원에서 헤테로토피아의 은유에 부합한다. 같은 책 449면. 한편 비슷한 맥락에서 버틀러(Judith Butler)는 푸코적인 의미의 ‘비판’이 기성의 권위에 대한 ‘거부(또는 불복종)’, 그리고 ‘자기발명’의 두 가지 차원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거부가 자기발명의 공간을 연다면, 그 공간은 아마도 헤테로토피아의 성격을 띨 것이다. Judith Butler, “Critique, Dissent, Disciplinarity,” Critical Inquiry 35.4 (2009) 787~88면.

41) Geoffroy de Lagasnerie, 3. Une aspiration au dehors (Paris: Flammarion, 2023).

42) 같은 책 37면.

43) 같은 책 13면.

44) 같은 책 129면. 루이는 10대 초반의 중학생 시절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해 혼자 숨어들곤 했던 학교 도서관이나 마을 도서관의 30대 여성 사서들과 맺었던 친밀한 관계를 우정으로 회고한다. Louis, 앞의 책 89~92면.

45) ‘친구’(ami)가 매우 다양한 형태의 관계적 배치(agencement relationnel)를 포괄하는 모호한 단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라갸느리는 ‘기능적’ 친구관계와 ‘창조적’ 친구관계를 구분하면서 우정에 대한 논의를 후자에 한정한다. 당사자들이 정해진 역할과 정체성에 머물면서 관행적인 교류를 지속하는 기능적 친구관계는 사회적 필요와 이해관계에 봉사하는 ‘인맥 쌓기’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간 다른 각도에서 우리는 우정의 심도(또는 밀도)라는 문제를 제기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라갸느리는 상징적 창조의 전제조건으로 매우 끈끈한 우정만을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우정이 창조적이려면 얼마나 깊거나 강렬해야 하는가? 역으로 느슨한 우정은 과연 창조적일 수 없는가? 연대는 혹시 느슨한 우정의 다른 말은 아닐까?

46) 같은 책 119면.

47) 같은 책 53, 69면.

48) 같은 책 59면.

49) 선(탁월성)과 공통의 목표(지혜와 도덕)를 위한 우정이 중요하다고 본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니체는 이상적인 우정의 조건을 친구들 사이의 ‘공동목적’과 그것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공동기쁨’으로 전제했다. 또 그는 친구들이 ‘아곤’이라는 그리스의 경쟁원리를 통해 각자의 잠재력을 최대한 실현함으로써 자기완성(‘초인’)이라는 공동목적을 함께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강용수 「니체의 우정의 정치학: 아곤(agon) 개념을 중심으로」, 『니체연구』 38 (2020) 7~36면; Willow Verkerk, Nietzsche andFriendship (London: Bloomsbury Academic, 2019) 2장 참조.

50) Foucault, “De l’amitié comme mode de vie” 164면.

51) Lagasnerie, 앞의 책 17~18면. 원저자 강조.

52)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신혜영·이상길 옮김 「아노미의 제도화」, 『인문예술잡지 F』 5 (2012) 77~102면; 이상길 『상징권력과 문화: 부르디외의 이론과 비평』(컬처룩, 2020) 201~11면 참조.

53) Lagasnerie, 앞의 책 147~48, 173면; Geoffroy de Lagasnerie, Logique de la création (Paris: Flammarion, 2011) 참조.

54) 에리봉, 앞의 책 263면.

55) 같은 책 195면; 이상길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어떤 실패한 우정, 혹은 적대에 관한 이야기」, 『인문예술잡지 F』 10 (2013) 95~110면 참조.

56) Louis, 앞의 책 197면.

57) 같은 책 197~98, 164면. 원저자 강조.

58) 같은 책 81면. 마찬가지로 루이는 그가 파리 정착을 위해 친구 뤼도빅을 이용했다는 엘레나의 비난에 그렇지 않다고 독백한다. 자신은 “존재의 절망” 때문에 그의 도움을 바랐고 실제로 비위를 맞추거나 속에 없는 말을 하면서까지 도움을 얻어냈을 뿐, 그를 조종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우애관계의 모호성은 이 경우에도 예민한 쟁점으로 떠오른다. 같은 책 212면.

59) Lagasnerie, 3. Une aspiration au dehors 173~74면.

60) 같은 책 125면.

61) 같은 책 10면.

62) 같은 책 11면. 한편 라갸느리가 적시하지는 않지만 ‘삶의 형식’이라는 용어는 비트겐슈타인에서 빌려온 것으로 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언어를 통해 의사소통하며 참/거짓을 논의할 수 있으려면 먼저 의미/무의미를 가르는 기본적인 차원을 공유해야 한다고 보고, 이를 ‘삶의 형식’(lebensform)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푸코의 ‘삶의 양식’ 개념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여겨진다. 오라치오 이레라트 「푸코와 비트겐슈타인에서의 개념들의 실천」, 프레데리크 그로·아널드 데이비슨 엮음, 심재원 옮김 『푸코, 비트겐슈타인』(필로소픽, 2017) 224~25면 참조.

63) 이러한 맥락에서 라갸느리는 부르디외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우리가 인정에 대한 강박, 직위와 공식 의례의 물신주의로부터, 즉 ‘대타자’(Autrui)의 시선에 따라 우리를 주체화하는 방식, 국가의 규정과 범주화에 따라 우리 자신을 정의하는 방식으로부터 최대한 탈피해야 한다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 Lagasnerie, 앞의 책 198면. 하지만 이는 부르디외의 정치학을 지나치게 ‘인정’과 ‘상징적인 것’의 차원으로 축소해버리는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초창기의 알제리 인류학 연구에서도 분명히 나타나듯, 부르디외는 ‘분배’와 ‘경제적인 것’의 차원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그는 생존의 불안이 없어지고 기본적 욕구가 충족되는 정도의 수입에 도달한 노동자들이야말로 알제리에서 정치적 변혁의 합리적·현실적 전망을 담지하고 행동할 세력으로 출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한마디로 ‘경제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또는 ‘정치적인 것’)은 긴밀한 연계 속에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64) 루이는 사회세계가 어떤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규정한다는 관점에서 ‘부정적 존재론’(ontologie negative) 개념을 제기한 바 있다. 그것은 우리가 행한 것이 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행하지 않은 것―받지 않은 교육, 배우지 않은 교양, 벌지 않은 돈, 갖지 않은 정상성―이 바로 우리가 되는 삶이다. 이때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는 우리가 행하지 않은 것은 열악한 사회경제적 위치로 인해 ‘행할 수 없었던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처럼 어떤 개인들은 그가 행한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행하지 않은 것에 의해서 규정된다. Louis, 앞의 글 vii면.

65) 주디스 버틀러·아테나 아타나시오우 지음, 김응산 옮김 『박탈: 정치적인 것에 있어서의 수행성에 관한 대화』(자음과모음, 2016) 26~28면 참조.

│이상길│

李相吉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최근 논문으로 「비판커뮤니케이션 연구 100년, 성찰과 전망: 지성사적 관점」(2024)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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