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은
1. 악을 쓰고 열변을 토했던 여자의 자서전
김연자는 미군위안부 최초의 증언자다. 정희진의 연구에 따르면 김연자는 1993년에 기지촌 여성의 삶을 최초로 증언했고, 그 이후로도 증언자의 존재를 넘어서는 발언을 이어나갔다.1) 정희진이 언급한 증언자의 존재를 넘어서는 행위(action)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2) 김연자는 기지촌 여성을 동정하면서 반미 상징의 구호로 기지촌 여성을 활용하는 사람들을 비판했고, 기지촌 여성을 분단과 미국 제국주의 침략의 희생자로만 간주하는 관점에 반기를 들었다.3) 김연자의 목소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증언자에서 운동가로 또다시 자서전 작가로 자신의 존재를 사회적으로 증명했다. 김연자의 자전적 글쓰기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김연자의 자기서사를 분석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2005년, 김연자는 자서전 『아메리카타운 왕언니, 죽기 오 분 전까지 악을 쓰다』를 출간했다. 서문에서 고백한 것처럼 김연자는 12년 동안의 준비 기간을 거쳐 자서전을 완성했다. 자서전의 제목 또한 “벌써부터” 준비해둔 자신의 비문, “정열적으로 열심히 산 여자, 죽는 순간 오 분 전까지 악(Big Voice)을 쓰고 열변을 토했던 여자 여기 묻히다”4)에서 가져왔다. 김연자는 왜 자기 자신을 ‘악을 쓰고 열변을 토했던 여자’로 규정했을까? 물론 ‘악’은 분명 김연자에게 우렁찬 목소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 글에서는 김연자의 자서전을 기지촌 여성의 ‘목소리’, 더 구체적으로는 기지촌 여성의 ‘욕’에 집중해서 해석해보고자 한다.
김연자의 자서전에 등장하는 기지촌 여성들의 욕은 ‘목소리의 정치’(politics of voice)로 해석될 수 있다. ‘목소리의 정치’는 여성의 자기서사와 서사적 정체성 형성을 연구해온 카바레로(Adriana Cavarero)가 제안한 개념이다. 카바레로는 목소리가 자아를 드러내는 중요한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목소리는 남성중심적인 언어와 이성을 강조한 서양철학사에서 소외되어왔다고 주장한 바 있다.5) 카바레로에 따르면, 말하는 사람은 목소리로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누군가 목소리를 낼 때 그 자신의 존재를 감추거나 속일 수 없다는 것이 카바레로의 통찰이다. 목소리는 한 개인의 고유성을 나타내는 존재 자체의 음향적 서명일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정치적인 정체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카바레로는 목소리가 단순한 언어적 의미 전달을 넘어서는 것임을 강조하며 목소리는 발화된 말의 내용보다 더욱 근본적으로 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의 신체적 존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역설했다. 목소리는 신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히 소리로서의 기능을 넘어서 몸을 통해 발화되며 존재 자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동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목소리는 인간의 신체와 분리될 수 없는 존재적이면서 관계적인 특징으로 인해 청자에게 영향을 끼치며, 화자와 청자의 관계 속에서 발화의 의미가 결정된다. 여성의 목소리는 공적 공간에서 억압되고 소외되었으며, 여성의 신체적 발화는 줄곧 폄하되어왔다. 카바레로는 역사에서 억압되었던 여성의 목소리에 주목하며, 목소리의 신체적 발현이야말로 정치적 참여와 주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임을 환기시켰다. 여성의 신체가 그 자체로 정치적이며 사회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매개체라는 관점에서 나온 카바레로의 주장은 여성의 신체가 언어와 표현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해석으로 확장된다. 카바레로는 여성의 신체적 발현은 권력구조와 젠더불평등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진다고 논의했다.
카바레로의 목소리의 정치 개념은 김연자의 자서전에서도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자신의 정체성을 ‘악’을 쓰는 아메리카타운의 왕언니로 규정한 김연자는 자서전에서 기지촌 여성들의 목소리, 더 구체적으로는 그들의 욕을 상세하게 기록했다.6) 김연자의 자서전에 등장하는 욕들은 목소리와 언어의 위계를 해체하려는 저자의 시도로도 해석된다. 실제로 김연자는 글쓰기의 가치와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저는 글을 쓰는 것을 곧잘 ‘똥 푸는 일’에 비유합니다. 내 인생에 담긴 싫은 것들, 후회스러운 것들, 아픈 것들이 똥이나 다름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12면). 김연자는 ‘악’을 쓰는 기지촌 운동가로서의 삶과 신학으로 내적 치유를 경험한 선교사로서의 삶을 동시에 이야기한다. 김연자의 ‘악’을 쓰는 목소리는 “회한과 분노, 갈등을 돌아보고 스스로 깨닫고 치유한 과정”(13면)으로 이어진다.
김연자의 자서전은 선형적인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지촌 여성들을 착취하는 부패세력들과 싸우다가 파산한 김연자는 연고가 없는 군산 기지촌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군산에서 아메리카타운의 자치회 회장이 된 김연자는 1977년에 미군 범죄에 항거하는 사법투쟁을 이끌었다. 이후 기독교에 귀의한 김연자는 자신의 내적 치유 경험을 기지촌 여성들에게 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종교적이고 경건한 언어로 자기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김연자는 욕과 악으로 자서전을 완성했다. 김연자가 자전적 글쓰기를 통해 실천하고자 했던 윤리적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지금부터 김연자의 욕과 악 그리고 기지촌 여성의 합창적 목소리에 초점을 맞춰 김연자의 자서전을 읽어보고자 한다.
2. 기지촌 여성들의 은닉 대본
1943년 중국 만주에서 태어나 해방 후 여수에서 성장한 김연자는 여수여고 졸업 후 서울신문사 여수지부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가 고향을 떠났다. 10대에 친척 오빠와 군인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하고 방황을 거듭하던 중 무작정 상경한 김연자는 책 외판원, 버스 차장, 구두닦이 등의 직업을 전전하다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을 듣고 1963년 가을에 서울시립부녀보호소에 들어간다. 하지만 부녀보호소는 감옥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곳이었다(81면). 1964년에 탈출하다시피 부녀보호소를 나온 김연자는 돈을 벌기 위해 동두천 기지촌에서 1년 동안 일을 한 후 여수로 돌아갔다. 하지만 생활고로 인해 다시 동두천 기지촌으로 떠났다.
김연자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동두천 기지촌에는 클럽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약 2천 명, 거리에서 미군들을 불러 몸을 파는 일명 ‘히빠리’들이 약 2천 명 정도 있었다고 한다. 김연자는 이곳에서 생활하며 클럽에서 일하는 여성들과 거리에서 미군을 상대하는 여성들 사이의 갈등은 물론이고 국제결혼을 한 여성과 기지촌 여성 사이의 갈등, 기지촌 인근에 사는 한국 주부들과 기지촌 여성과의 갈등, 아이를 키우면서 성매매를 하는 여성과 독신으로 성매매를 하는 여성 사이의 갈등, 흑인을 상대로 성매매하는 여성과 백인을 상대로 성매매하는 여성 사이에 벌어졌던 첨예한 갈등을 목격하게 된다(98~99면).
기지촌의 현실 못지않게 김연자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아버지를 향한 분노와 엄마와 살면서 쌓인 한이었다. 김연자는 외도를 일삼았던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김연자는 몸을 팔아 돈을 벌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잠시라도 잊기 위해 ‘미친 듯이 술을 마시고 토하며’ 욕을 내뱉었다. “쌍놈의 새끼, 좆팔놈의 새끼, 창만이 자식, 까까머리 중대가리 새끼……”(100면). “우리 아버지가 김창만이야! 김창만! 좆 같은 새끼, 창만이 새끼!”(101면). 자신을 버리고 짓밟은 한국 남자들, 그중에서도 아버지를 향한 분노는 자서전에서 욕으로 표출되었다. 욕은 한국정부를 향해서도 터져나왔다. 윤락 행위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기지촌에서는 정부에서 발행하는 검진증이 있으면 영업을 할 수 있었다.7) 기지촌 여성들이 검진증을 제시하지 못하면 미군 헌병 차에 실려 의정부경찰서로 끌려가 즉결재판을 받고, 돈이 없어 벌금을 못 내면 수용소에서 닷새 동안 갇혀 있어야 했다. 동두천과 의정부 사이에 있었던 몽키하우스의 실체에 대해서도 폭로했다. “침대, 담요, 약품, 의사…… 모든 것이 온통 미제인 미제 수용소에서 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날마다 미군들에게 가랑이를 벌리고 깨끗한 여자인지 아닌지 검사받는 일을 수치스러웠다”(106면). 한국정부는 기지촌 여성들에게 성병 검진을 받게 하고, 성병에 걸린 여성들에게 윤락 행위를 금지시켰다. 김연자는 또다시 욕을 했다. “재수 더럽게 없다. 보지가 내 보진 줄 알았는데 나라 보지냐”(105면). 김연자에게 욕은 기지촌 여성으로 겪은 폭력과 수모에 저항하는 정치적인 목소리였다. 김연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기지촌 여성들에게 술, 약물, 욕, 노래, 연극은 살고 싶은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107면).8) 김연자는 수치스러운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몽키하우스에서 “미제 모포를 뒤집어쓰고 악을 쓰며 노래를” 부르고, “불안과 아픔을 이기려고 침대 시트로 무대 커튼을 치고, 큰 나무 잎사귀를 따다가 왕관을 만들어 쓰고 연극”을 했던 기억을 소환했다. “살아 있다는 것이 낯설었고 너무 이상한 세계에 있는 듯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마음을 누르며 절박한 낭떠러지 위에서 노래를”(106~107면) 불렀다. 미군부대 안에서 식당 책임자로 일하는 백인과 잠시 동거하는 동안에도 너무 괴로워서 미칠 것만 같아 한국어로 노래를 부르고 욕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107면). 동두천 기지촌에서 7년을 머물렀지만 김연자는 돈을 모으지 못했고, 동두천 7사단이 철수하자 송탄 기지촌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김연자는 송탄에서 검진증을 뺏기지 않기 위해 참석한 교양강좌에서 기지촌 여성들의 자치회인 ‘자매회’에 대해 알게 된다. 학창시절 웅변부에서 활약했던 김연자는 자매회 임원으로 교양강좌를 맡았다. 자매회는 “행정적·법적으로 권한”이 없었지만, 김연자는 기지촌에 들어온 어린 여성들에게 당장 기지촌에서 나가 “사과장사”라도 하라고 호소했다(139면). 하지만 기지촌의 구조는 김연자의 말 한마디로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자매회는 기지촌에서 벌어지는 범죄를 묵인하고 방조하며 기지촌의 질서 유지에 일조하고 있었다. 김연자는 자기 자신을 “공범자”로 규정하며, 수치스러웠던 과거를 자서전에서 털어놓았다. 업주가 만들어온 “가짜 주민등록증”으로 미성년자들이 “양공주”가 되도록 했던 자매회 임원들을 “매매춘의 공범자”로 칭했다(140면).
자매회 임원으로서 느꼈던 수치심은 김연자를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김연자는 몰염치한 사람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어려운 결단을 내리게 된다.9) 그즈음에 송탄의 허승병원에서 자격증도 없는 조수에게 항생제 주사를 맞은 기지촌 여성이 그 자리에서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지촌 여성들은 통곡을 하면서도 병원장을 향해 거침없이 욕을 쏟아냈다. 김연자는 당시 분노한 기지촌 여성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기록했다. “흑흑흑, 이년아, 이 복도 없는 년아! 너는 죽어서까지도 버림을 받는구나. 이 불쌍한 년아.” “허도웅을 수원 검찰청에 고발하자! 합의가 무슨 개좆 같은 합의냐?”(142면).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된 줄도 모른 채 기지촌 여성들은 수원경찰서로 찾아가 “겁 없는 행동”을 저질렀다. 기지촌 여성들이 머리띠까지 묶고 “떼거지”로 몰려다니자 경찰은 기지촌 여성들에게 집단행동은 구속 대상이라고 경고했다. 주동자로 따로 조사를 받은 김연자는 훈시를 듣고 진술서를 쓰고 나왔다. 자매회 부회장으로 일하면서 회장과의 갈등으로 평택경찰서 정보과에 호출되었을 때도 김연자는 경찰들에게 욕을 퍼붓고 도망을 쳤다. “난쟁이만한 자식이 촌년 겁주고 있네. 야, 나도 양색시 왕초까지 됐는데, 왜놈같이 처먹은 놈이 사람 잘못 보았지.” “뛰는 놈 위에 나는 년 있다는 걸 너는 몰랐을 거다. 고리타분하게 심리전은 무슨 심리전이야. 바쁜 세상에. 나 놓치고 빤스 벗고 이나 잡아라”(150면). 김연자는 경찰에게 “욕을 무더기로 퍼부으며” 빠져나와 일시 잠적했고, 그사이 김연자에게 청와대에 연줄 닿는 친척이 있다는 유언비어가 돌아서 수사는 종결되었다.
권력과 언설의 관계를 연구한 스콧(James C. Scott)은 피지배자들이 지배자와의 관계에서 두 가지 상반된 소통방식을 사용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은닉 대본(hidden transcript)과 공개 대본(public transcript)으로 개념화했다.10) 공개 대본은 피지배자들이 지배자 앞에서 보여주는 순종적인 태도나 발언을 뜻한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피지배자들은 권력관계를 의식하며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스콧은 피지배자들이 공개 대본만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공개 대본의 반대 개념인 은닉 대본은 피지배자들이 지배자에 대한 불만과 비판, 저항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피지배자는 지배자에게 “뺨 때리기에는 뺨 때리기, 모욕에는 모욕이라는 부정적 호혜주의”11)를 실천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들만의 용어로 권력을 비판하는 은닉 대본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경찰 앞에서 자기 자신을 “양색시 왕초”이자 “촌년”으로 표현한 김연자는 한국 정부와 경찰들을 “난쟁이만한 자식” “왜놈같이 처먹은 놈” 등으로 지칭하며 모욕했고, “나 놓치고 빤스 벗고 이나 잡아라”는 욕을 남기며 경찰서 정보과에서 도망을 쳤다. 유신시대 경찰서 정보과에서 기지촌 여성이 경찰에게 조사를 받으며 내뱉은 욕은 “특정한 사회적 장소나 특정한 행위자들 사이에서만 제한적으로 통용”12)되는 은닉 대본으로 해석될 수 있다. 특히 언어뿐만 아니라 늑장 대응, 도주, 시치미 떼기, 좀도둑질, 나태한 노동 등과 같은 형태의 불복종으로 나타난다는 은닉 대본의 특징이 김연자의 행동에서 뚜렷하게 확인된다. 김연자가 잠적하면서 유언비어가 유포되고 곧이어 수사는 종결되었다. 김연자의 욕과 도주는 “힘없는 자들의 하부정치(infrapolitics)”13)로 평가될 수 있다.
김연자는 기지촌 여성들의 삶을 점진적으로 개선시키고 싶었지만 현실은 좌절의 연속이었다. 보건소 상납 등 관행으로 내려온 범법 행위에 가담하게 될 때마다 괴로워했다. 김연자는 자아분열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기지촌 여성들을 향해 욕을 퍼부으며 자기합리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화류계에서 의리는 무슨 의리냐, 커피 얻어 마시고, 양담배 얻어 피울 때뿐이지. 커피 떨어지고 양담배 떨어지면 방문턱에도 안 들어오는 년들, 개뼈따귀만도 못한 년들.’ 이렇게 생각하면서 동료들 위할 것 못 된다고 스스로를 변명하다가도, 계속되는 항의와 하소연, 울음소리를 들으면 양심의 가책에 마음이 흔들렸다”(153면). 김연자를 움직인 것은 기지촌 여성들의 “항의와 하소연, 울음소리”였다.
김연자는 송탄의 성병 검진 실태를 세상에 알리기로 하고 즉각 실천에 옮겼다. 수원법원에 증빙서류와 진정서가 접수되고, 수원검찰청과 평택경찰서에서 수사가 시작되면서 신문에 관련 기사가 보도되었다. 보건소장과 방역계장, 자매회장 등이 잡혀와 수사를 받았다. 김연자는 “포주, 클럽 주인들, 펨푸, 성병 진료소, 보건소. 이들의 착취에 우리는 과감히 일어나야 합니다. (…) 더 이상 부정을 방조해서는 우리 모두 죽습니다. 총궐기합시다!”(155면)라는 내용의 유인물을 작성해 배포했다. 김연자도 “공범자”였으므로 처벌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보건소장과 회장, 방역계장 모두가 집행유예를 받자 김연자는 전 재산을 털어 상고했다. 상고심에서 기소유예를 선고받았지만, 2년 동안 재판에 끌려다니며 “일자리, 돈, 의욕”을 모두 잃었다. 파산 후 당장 먹고살 일이 막막해진 김연자는 연고가 없는 군산 기지촌으로 향한다.
3. 기지촌 여성들의 저항과 합창
1976년 10월, 군산 아메리카타운에 도착한 김연자는 군산 기지촌이 동두천, 송탄과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조성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군산 기지촌은 “담 안”에서만 생활할 수 있는 구조였다. 사람들이 군산 아메리카타운이 주식회사라고 했을 때 김연자는 의아해했지만, 이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군산 아메리카타운은 정부의 인가를 얻은 개인이 운영하고 있었다. 성병 검진 카드가 기지촌 내에서 발급되었고, 기지촌 여성들의 “방세”도 사장이 직접 받아갔다. 군산 기지촌은 사장의 관리 감독 아래에 있었다. 쪽방의 세를 내지 못해 “방문에 못질”을 당한 채로 감금된 여성들도 있었다(169면).
김연자는 군산 아메리카타운의 자치회 회장을 맡았다. 미성년자 고용은 군산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꿀벌자치회의 회장 김연자는 “무법천지”인 군산 기지촌의 현실을 묵과할 수 없었다. 미성년자들을 고용하는 업소들의 행태에 분노해 경찰서 보안과를 직접 찾아가 협조를 요청했다. 군산에는 인신매매로 팔려온 미성년자들이 많았고, 그들은 대부분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타인의 주민등록증으로 일을 했다(175면). 홀 주인들은 김연자를 겁박했지만 김연자는 그들에게 욕으로 응수했다. “깡패 출신인 홀 주인 동생, 수사계 형사 출신 홀 지배인, 포주들”을 “거지발싸개 같은 놈들”이라고 욕하면서 보건시행령을 근거로 들어 그들에게 미성년자를 고용하지 말 것을 엄중히 경고했다. 불의에 저항하며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 김연자는 욕을 정치적인 언어로 활용하기도 했다. 김연자는 이 일을 계기로 군산에서 미성년자들을 고용하는 경우가 확연히 줄었다고 회고했다.
1977년 6월에 군산 아메리카타운에서 방화 살인 사건이 일어났고, 한 달 뒤 또 한 명의 기지촌 여성이 “칼에 찔려 유방 사이가 푹 패이고, 불두덩이 위가 칼자국투성이가 된 채, 배꼽도 칼에 찔려”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김연자는 한 달 전 증거 부족으로 범인을 놓친 경험을 떠올리며, 문을 잠그고 경찰이 올 때까지 열지 않았다. 현장을 방문한 지서장은 군산경찰서에 연락했다. 하지만 군산경찰서 정보과 수사과 형사들은 피해자를 위해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183면). 사체가 음식 보관하는 냉동실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아메리카타운의 여성들은 격분했다. 그들은 경찰들을 향해 “죽여, 씨발놈들아, 개새끼들아” “쌍놈의 새끼들”이라고 욕을 퍼부으면서 아메리카타운 담 밖으로 달려 나갔다. 행여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봐 두려워 아메리카타운 밖으로 나가지 못했던 기지촌 여성들이 살해당한 동료가 방치되는 현실을 목격하자 헌병에게 진압을 당하면서도 욕을 멈추지 않고 싸우기 시작했다. 김연자는 자신이 내뱉은 욕과 기지촌 여성들이 함께 외친 욕을 반복적으로 표현했고, 기지촌 여성의 욕이야말로 기지촌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언어임을 강조했다. “이 개새끼들아! 다 죽어버려라!” “그래, 나도 죽여봐라! 그래, 나도 죽여라”(185면) 등과 같은 욕을 하며 시위하는 기지촌 여성들은 1977년 한국사회에 어떤 파문을 일으켰을까?
김연자의 주장처럼, 유신 말기인 1977년에 일어난 군산 기지촌 여성들의 집단적인 사법투쟁은 군사독재 시절 미군은 물론이고 한국정부와 정면으로 맞선 운동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같은 면). 김연자와 동료들은 법정에 출두해 참고인 진술자 자격으로 증언했고, 두 달 사이 군산 기지촌에서 두 명의 한국 여성을 살해한 용의자로 스티븐을 지목했다. 한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은 스티븐은 우방의 군인이라는 점이 참작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67년 한·미 행정협정을 맺은 이후 한국 법정에서 최초로 미군 범죄에 무기징역형이 선고되었지만, 김연자와 동료들은 두 명의 여성을 죽인 범인에게 무기징역이 내려진 판결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법정에서도 기지촌 여성들은 욕을 멈추지 않았다. “이 개새끼들아! 뭐가 우방국의 군인이야! 사람을 두 명이나 죽였는데 우방국이냐?” “우방 국가 미국인, 애국자 양공주님, 죽어도 또 죽어도 숨은 애국자, 외화를 획득하니 긍지를 갖고, 또 열심히 씹을 팔고 좆을 빨자”(187면). 기지촌 여성들은 판사의 판결과 법정 언어에 욕으로 응수했다.
살인 사건 이후 군산 아메리카타운에서는 사고사와 자살 사건이 연쇄적으로 벌어졌다. 이태자가 연기에 질식해 죽었고, 이태자의 장례식장에 와서 부조하고 간 순희는 그다음 날 난로에 연탄 다섯 장을 쌓아놓고 죽었다. 여섯 명의 기지촌 여성들이 차례차례 죽음을 맞이했다. 김연자는 1977년, 1978년, 1979년 세 해 동안 살해당하고, 자살하고, 사고로 죽은 동료들의 최후를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실존적인 위기를 겪는다. 살해된 복순의 장례식장에서 시작된 하혈은 몇 해가 지나도 멈추지 않았다. “죽어간 여자들과 죽어가는 나를 생각하면 혼자만의 힘으로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196면). 자신도 모르게 “저를 구해 주세요, 하나님” 그렇게 기도하고 있었다. 김연자는 “신의 자비”만이 “깊고 캄캄한 수렁에서 우리를 끌어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유는 간단했다. “살아야 했기에 그렇게 믿었다”(같은 면). 김연자는 자서전에서 기지촌 여성들이 살기 위해 얼마나 처절하게 몸부림쳤는지 생생하게 증언했다. 욕과 악으로 표현되었던 그들의 절박함은 김연자의 자서전 후반부에서는 눈물과 절규, 간증과 기도로 재현되기 시작했다.
1979년 군산 아메리카타운 안에서 열린 전도대회에서 사회를 보게 된 김연자는 “험, 허어엄. 저, 아, 저 말이죠. 제가요, 왕년에 저, 송탄이랑 동두천에서 몸 팔던 여잔데요. 술 마시면 막 때려 부수던 깡패였어요”(202면)라는 말로 자기 자신을 소개했다. 전도사로 활동하며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교회를 만들고 싶었지만 돈이 가장 큰 문제였다. 집 주인을 설득해 “월부”로 교회 터를 마련하고, 한미 헤브론 교회를 개척했다. 1979년에 한미 헤브론 교회는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수양관을 짓기로 하고 기금을 모금했지만, 수양관 건립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목사와의 갈등도 격화되었다. 법정에서 판사를 향해 욕을 퍼부었듯이 기지촌 여성들은 목사 앞에서도 자기 목소리를 냈다. “씨팔, 그깟 교회 드러워서 안 간다”(215면). 기지촌 여성들은 직접 종교 공동체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돈을 모아 1986년에 땅 147평을 사서 천막을 쳤다(219면). 각목을 사고 기지촌에 버려진 장판을 모아 직접 못질을 했다. 김연자는 “결국 우리들 문제는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것”(220면)임을 처절히 깨달았다.
교회를 세우는 과정에서 김연자와 기지촌 여성들은 종교인을 비롯한 지식인들의 위선에 환멸을 느낀다. 그들이 기지촌 여성들을 얼마나 동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천막교회는 기지촌 여성들에게 해방구 역할을 했다. “홀 일이 끝나면 타운 여자들이 자식들 손을 잡고 모여들었다. 목사도 없었고,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지 않아도 되었고, 어떤 간섭도 받지 않고 웃고 떠들며 수다 떨 수 있었다. (…) 지긋지긋한 타운 생활을 털어내려고 기도하다 보면 예배 끝은 늘 눈물바다였다. 처음에는 무엇에 감사하며 기도해야 할지 몰라서 우리 공간이 생긴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가, 나중에는 ‘살인하지 않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221~22면) 하며 엎드려 울었다. 기지촌 여성들의 욕, 수다, 웃음, 통곡, 절규는 마치 합창처럼 천막교회에 울려퍼졌다.
하지만 기지촌 여성들의 합창은 이웃들에게 소음으로 간주되었다. 동네 주민들은 시끄럽다는 이유로 기지촌 여성들의 심야예배를 문제 삼았다. 민원이 접수되자 파출소에서는 천막교회의 심야예배를 저지했다. 기지촌 여성들은 경찰들과 동네 주민들에게 욕으로 저항했다. “사람들이 살아보겠다고 와서 이러는데 여기서 내쫓으면 우리보고 군산 앞바다에 집단 투신이라도 하라는 얘기냐? 누가 우리를 봐줬냐. 여자들은 죽어가고, 무섭고, 이렇게 해서라도 살길이 있을까 하고 그러는 거 아니냐! 천막을 뜰어낼라믄 뜯어내라. 인자,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다. 개쌍 연놈들아. 즈그들이 뭐, 뭐라구!” “그래 우리는 객지년들이다. 그래서 서러워서 제대로 한번 살아보겠다고 발악을 하는 거라구!” “그래, 살고 싶어 모여서 우는데 즈그들은 자식도 없어! 개씹 같은 연놈들, 잡아가려면 잡아가!”(222~23면) 김연자는 기지촌 여성들의 저항을 “이건 죽음 앞에서 외치는 소리였다. 벼랑 끝에서 무섭고 악에 받쳐서 소리 지르는데 배창자까지 끌려 올라오는 것 같았다”는 말로 표현했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기지촌 여성들은 교회에서 기도로, 욕으로, 통곡으로, 절규로, 목소리의 정치를 실천했다. 기지촌 여성들의 통성기도와 욕은 단순히 개인적인 슬픔이나 고통의 표출 양식으로만 해석될 수 없다. 지역사회에서조차도 배척당하는 기지촌 여성들의 집단적 경험은 천막교회에서 욕과 고함소리로 터져나온다. 기지촌 여성들은 합창과도 같은 욕과 고함소리로 그들 내부의 분노와 절망을 집합적으로 드러냈다. 따라서 기지촌 여성들의 집단적 목소리의 발화는 사회적 억압에 대한 저항행위로 볼 수 있다. 김연자가 자서전에서 기록했듯이 기지촌 여성들의 기도는 주민들과 경찰에 의해 저지당했다. 심야예배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았지만, 기지촌 여성들은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다. 개쌍 연놈들아. 즈그들이 뭐, 뭐라구!”라고 욕하며 자신들의 종교적 집회를 멈추지 않았다. 기지촌 여성들은 함께 욕하고 기도하면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시켰다. 집단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개인의 고통이 사회적 저항으로 전환되는 순간을 강렬하게 체험한 것이다.
기지촌 여성들은 함께 기도하고 울부짖고 욕을 하며 조금씩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흙 위에 스티로폼을 깔아 세운 천막을 3년 동안 사용했지만, 그토록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희망이 부화하고 있었다. 살해당하고, 자살하고, 약과 술에 심장이 멎어 죽은 여자들, 숱한 한이 있었지만 천막 공동체에서 새로운 생명력이 되살아났다”(236면)는 것이다. 국제결혼한 동료들이 헌금을 해서 천막 옆에 20평 남짓한 은혜수양관도 지을 수 있었는데, 수양관 건물이 완성되고 나자 김연자는 신학 공부를 해 “당당하게 전도사가 되어 성매매 집결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기지촌 운동가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1991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된 김연자는 기지촌 여성과 혼혈아가 많은 송탄으로 가서 기지촌 여성 선교를 시작했다.
4. 욕설의 재전유와 기지촌 운동가의 정체성
송탄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중 김연자는 두레방 실무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러고는 기지촌 활동을 하는 여대생들의 도움을 받아 1992년에 참사랑선교원을 세웠다. 혼혈아들을 위한 선교센터를 운영하던 중 동두천 기지촌의 윤금이가 미군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연자는 1990년대 초반 윤금이 사건을 기점으로 시작된 기지촌 운동을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 “고(故) 윤금이 추모제 행사”에 가니 “윤금이 사건에 대한 것보다 양키 반대라는 생소한 구호가 많았다”(252면). 김연자는 윤금이 사건을 반미운동으로 몰아가는 운동권의 논리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들은 미군을 나쁜 놈으로 비난하고 기지촌 여성을 불쌍한 사람으로만 여겼다. 김연자는 기지촌 여성들이 한국에서 왜 그렇게 단순하게 동정의 대상이 되어야만 하는지 납득하기 힘들었다(252~53면). 처참하게 미군에게 살해당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다는 이야기는 곧 누구도 살아 있는 기지촌 여성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김연자는 추모집회에 모인 사람들을 신뢰할 수 없었다. “반미 운동권들”은 윤금이의 죽음을 “미군 철수와 쌀 수입 반대” 이슈로 확장시키고 싶어했다(253면). 심지어 그들은 1977년 군산에서 이복순, 이영순 살인 사건의 범인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기지촌 운동사에 대해서조차 무지했다. 미군 범죄로 기지촌 여성들이 겪어온 고통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한국사회의 지식인들이 죽은 기지촌 여성을 이용하는 현실에 김연자는 모멸감마저 느꼈다.
무엇보다 기지촌 여성의 언어로 기지촌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다는 현실에 크게 절망했다. 기지촌을 주제로 열리는 학술행사에서 김연자는 소외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지식인들의 언어를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연자에게 지식인들의 목소리는 생소하기만 했다. 김연자는 지식인들이 왜 그렇게 “영어랑 우리말을 섞어서”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손을 들고 항의를 했다. “도대체 이런 모임은 그렇게 외국말만 하는 뎁니까? 나는 좀체 못 알아듣겠네요. 나는 기지촌 여성입니다”(254면). 김연자는 기지촌 여성을 이야기하는 지식인들의 진짜 관심이 무엇인지 문제 삼았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기지촌에 온 것일까? 논문의 대상을 찾기 위해서? 김연자는 지식인들의 언어와 태도에 격분했다. “30년 가까이 기지촌에서 살아갈 때 단 한 번도 운동가들이 찾아온 적이 없었다. 현장에 와보지 않고 현장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어떻게 여성 문제를 풀어갈 수 있을까.” 반미운동가들뿐 아니라 여성운동가들도 기지촌 여성들의 삶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관심했다. “나는 여성운동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주연은 여성운동가이고 현장 여성은 조연, 엑스트라일 뿐이었다. 기지촌 여성들을 연구 자료에 쓰려고만 했지 정작 중요한 개선책에는 얼마나 노력했는지 의문이었다”(255면).
선교사이자 기지촌 활동가인 김연자에게 새로운 언어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김연자는 기지촌을 나와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기지촌 여성의 현실을 사회에 알리고 싶었지만, 막상 “어떻게 의사소통을 해야” 할지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는 기지촌 여성들과 지식인들이 완전히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다는 데 있었다. 반미운동가, 여성운동가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기지촌 연극이라도 해보고 싶어 여기저기 쫓아다니고 여성 문화 단체 같은 데 가서 연극 얘기를 들어보면, 무슨 어려운 영화나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마광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건 우리 같은 밑바닥 삶과는 별 관련도 없고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는 얘기들이었다”(같은 면). 김연자에게 예술가는 “자기 연민에 빠진 폐병쟁이”에 지나지 않았다. 고향 여수에서 음악감상실을 운영하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을 정도로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했던 김연자에게 “반듯한 정식 공연”과 “작가가 매끈하게 구상한 고상한 내용”의 작품들은 도무지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김연자는 기지촌 여성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욕의 의미와 가치를 역설했다. 김연자의 주장처럼, “좆까고 바이올린 켜고 있네” “번개 씹하는 꼴을 보여줘야 정신 차리겠냐” “와이 유 째린다 미”(256면) 등과 같은 기지촌 여성들의 욕에는 기지촌 여성들만의 철학이 들어 있었다. 김연자가 자서전에서 언급한 “기지촌 여성들만의 철학”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김연자는 기지촌 여성이 아니면 쓸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욕으로 지식인들의 언어와 담론의 위계를 해체하고자 했다. 기지촌 여성들만의 철학은 기지촌 여성들이 사용하는 은어와 욕을 의미했다. 김연자는 기지촌 현장에서 터져나오는 기지촌 여성의 목소리는 기지촌 문제를 이론으로 설명하는 지식인들의 언어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기지촌 운동을 하면서 뒤늦게 접하게 된 여성주의 이론과 문학작품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김연자는 지식의 위계에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다.
김연자의 자서전에 등장하는 욕의 전복성을 검토하기 위해 파르주(Arlette Farge)의 통찰을 참조하고자 한다. 파르주는 18세기 프랑스 대중들이 사용했던 구어체를 분석하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들은 왜 공식적이고 권위적인 통치자와 지식인의 언어를 차용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언어를 고집스럽게 사용했을까? 파르주는 대중의 비공식적인 발화, 곧 구어체에서 지배적인 권력구조에 도전하고 전통적인 권위를 파괴하는 힘을 발견했다. 또한 프랑스 민중사에서 대중들의 일상적 대화·신랄한 농담·욕설 등이 권력에 대한 반발과 불만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어왔음을 강조하면서 이를 언어적 저항으로 규정하고, 사회적 변혁에 언어적 저항이 중요한 동력이 된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문서에 기록되지 못한 대중의 언어적 저항은 구두로 전해지거나 일상에서 작동된다는 특징을 가진다.14) 기지촌 여성들의 욕 또한 언어적 저항으로 해석 가능하다. 김연자는 기지촌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던 욕으로 기지촌 여성의 삶을 직접 이야기하며 기지촌 운동사를 새로운 방식으로 써내려갔다. 김연자가 자서전을 쓰기로 결심한 또 하나의 사건이 1994년에 발생했다. 경기도여자기술학원에서 화재가 발생해 원생 40명이 죽고 12명이 부상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김연자는 수십 년 전 서울시립부녀보호소를 탈출하다시피 나온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사회의 “밑바닥 여성들의 삶과 목소리는 여전히 묻혀 있었다”(256~57면)는 현실을 다시 한번 직시하게 되었다.
김연자는 자서전 집필 이외에도 다양한 사회적 활동에 참여했다. 기지촌 여성들과 혼혈아들의 현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방송에 출연하고 해외 심포지엄과 강연회에 참석하며 운동가로서의 보폭을 넓혀갔다. 하지만 그때마다 사람들이 자신을 인간 김연자, 기지촌 운동가, 선교사로 보지 않고 “전직 기지촌 매춘 여성”으로 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이야기가 청중과 매체에 엉뚱하게 전달되는 일도 자주 발생했다. 초청 강연회에서는 자신에게 “미군을 상대로 매춘을 하며 고통스러웠던 까닭, 자살하고 싶었던 경험 같은 것을 위주로 말해주기를 바랐고, 군사 정책을 중심으로 얘기가 진행되기를”(273면) 요구했다. 공식 석상에서 발화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외부 활동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과의 갈등도 심해졌다. 김연자는 결국 1996년에 참사랑선교회의 문을 닫게 되었지만, 기지촌 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을 끝내 버리지 않았다.
김연자는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자서전 집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내 말을 전하고 사람들의 말을 제대로 듣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쓰라린 시간을 더 견뎌야”(276면) 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기지촌 여성의 목소리가 세상에 전달되는 과정은 순탄하지 못했지만, 김연자는 자신이 큰소리로 말하며 악을 써온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고 자부했다. 자서전에서 김연자는 자신의 소명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동두천, 송탄, 군산에서 가족들과 떨어져 살던 여자들, 혼자 울던 여자들, 억울하게 죽은 여자들, 함께 저항했던 여자들, 슬픔을 깔깔거림으로 묻고 살아가던 여자들”을 잊지 않으며, 기지촌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한 시대와 역사 속에서 그들의 삶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지금 이 나라 기지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계속 얘기하고자 했다”(298면).
그렇기 때문에 김연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운동가이자 활동가로 규정한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간다. 김연자는 자서전에서 “나는 아직도 누가 믿거나 말거나 운동가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하나님을 믿지만, 전도사도 아니고 목회자도 아니고, 운동가다”(300면)라고 선언했다. 어렵게 신학교에 진학해 전도사로 활동한 김연자는 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기지촌 운동가로 설명했을까? 그 자신의 말처럼 특별히 의지가 굳거나 열성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기지촌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들은 욕과 악, 흐느낌과 한숨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김연자는 자신이 아는 유일한 세상인 기지촌의 욕들을 세상에 들려주는 것으로 기지촌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
아버지를 향해 혼자 내뱉던 김연자의 욕은 사회적이고 구체적인 대상을 찾아 점차 의식적인 언어로 전환되어갔다. 미군, 한국정부, 경찰, 포주, 목사, 판사, 여성운동가, 지식인, 문화예술인 등을 향해 욕을 쏟아내며 김연자는 정치적인 주체성을 스스로 회복했다. 김연자는 욕설을 재전유하는 방식으로 기지촌 여성의 정체성을 긍정했다. 이 글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기지촌 문제를 공론화한 지식인들의 언어와 기지촌 여성들의 욕설을 비교 분석하는 연구는 후속 과제로 남겨둔다.
1)張瑛恩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초빙교수. 최근 논문으로 「기지촌 여성의 자기서사와 반(反)역사: 최현숙의 구술생애사를 중심으로」(2024)가 있다.
정희진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교양인, 2023) 282면.
2) 카바레로(Adriana Cavarero)는 아렌트(Hannah Arendt)의 행동(action) 개념을 서사로 확장시켜 인간 존재의 서사적 특징을 강조했다. 카바레로에 따르면, 인간은 서사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서사는 주체가 자신을 타자와 나누는 방식이며,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재확인하는 도구인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Adriana Cavarero, Relating Narratives: Storytelling and Selfhood, trans. Paul A. Kottman (London, New York: Routledge, 2000) 참조.
3) 안일순 「기지촌 생활 25년 김연자 씨의 본격 증언: 내가 겪은 양공주, 미군 범죄의 세계」, 『말』(1993년 12월호); 정희진, 앞의 책 282면. 김연자의 증언은 안일순의 르포 소설 『뺏벌』(1995)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뺏벌』의 주인공 승자는 김연자의 삶을 상당 부분 반영한 인물이다.
4) 김연자 『아메리카타운 왕언니, 죽기 오 분 전까지 악을 쓰다』(삼인, 2005) 12면. 앞으로 이 책의 인용은 괄호 안에 면수만 표기함.
5) Adriana Cavarero, For More Than One Voice: Toward a Philosophy of Vocal Expression, trans. Paul A. Kottman (Stanford, Calif.: Stanford UP, 2005) 참조. 카바레로는 의미론적 언어에 중점을 두는 철학사의 ‘로고스의 탈음성화’ 전통을 비판했다. 개별적인 목소리는 고유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보다는 말의 뜻, 몸보다는 정신이 불변의 가치로 인식되어왔다는 것이다. 카바레로는 목소리를 이성적 담론을 전달하는 매개체로만 파악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등의 철학자들이 의미와 이성을 부각하는 동시에 목소리의 물질적 측면을 무시한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했다.
6) 김정자 증언, 김현선 엮음, 새움터 기획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미군 위안부 기지촌여성의 최초의 증언록』(한울아카데미, 2020) 참조. 김정자의 목소리를 분석한 차미령의 선행 연구가 이 글에 큰 시사점을 주었음을 밝힌다. 이와 관련해서는 차미령 「여성 서사 속 기지(촌) 성매매 여성의 기억과 재현」, 『인문학연구』 58 (2019) 7~43면 참조.
7) 박정미 「한국 성매매정책에 관한 연구: ‘묵인-관리 체제’의 변동과 성판매 여성의 역사적 구성, 1945-2005년」(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참조.
8) 기지촌 여성의 자살 충동, 자살 시도, 자살 사건을 우울, 고통, 비관 등의 감정으로 분석한 논의로는 김은경 「미군 ‘위안부’의 약물 중독과 우울, 그리고 자살: ‘위안’하는 주체의 (비)일상과 정동 정치」, 『역사문제연구』 40 (2018) 129~60면 참조.
9) 자하비(Dan Zahavi)는 수치심이 어떤 사람에게 불명예스러운 일을 하지 못하게 방지하고 억제할 것이라는 플라톤의 분석에 동의하며 수치심이 자기만족을 와해하는 한편 자기이해를 수정하게 된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단 자하비 지음, 강병화 옮김 『자기와 타자: 주관성·공감·수치심 연구』(글항아리, 2019) 382~89면 참조.
10) 이와 관련해서는 제임스 C. 스콧 지음, 전상인 옮김 『지배, 그리고 저항의 예술: 은닉 대본』(후마니타스, 2020) 16면.
11) 같은 책 15면.
12) 같은 책 47면.
13) 같은 책 17면.
14) Arlette Farge, Subversive Words: Public Opinion in Eighteenth-Century France, trans. Rosemary Morris (UK: Polity Press, 1994) 참조.
│장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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