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밖 57호][서평] 폐허는 어떻게 삶의 시작이 되는가?: 애나 로웬하웁트 칭 지음, 노고운 옮김 『세계 끝의 버섯: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현실문학, 2023)/ 원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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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선

1. 폐허와 삶의 역설

2016년 첫 출간 이후 7년 만에 국내 번역서로 나온 인류학자 칭(Anna Lowenhaupt Tsing)의 『세계 끝의 버섯: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The Mushroom at the End ofthe World: On the Possibility of Life in Capitalst Ruins)는 제목에 책의 의도와 내용을 함축하여 담고 있다. 저자가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2004년부터 2013년까지 미국과 일본, 캐나다, 중국, 핀란드에서 송이버섯 시즌 동안 수행된 현지 조사자료, (…) 과학자, 산림관리인, 송이버섯 무역업자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쓰[인]” 송이버섯 추적의 기록이다.1) 책의 주인공이 버섯, 좀 더 정확히는 송이버섯인 셈이다. 또한 원자폭탄 투하 후 히로시마에서 제일 먼저 나타난 생물이 송이버섯이었다는 풍문에 걸맞게도 송이버섯 이야기의 배경은 “자본주의의 폐허”다. “폐허”는 기후변화가 위기를 지나 비상사태로 나아가고 있는 우리 시대에 대한 암울한 진단이자, 생태수탈적 자본주의 역사와 뗄 수 없이 엮여 있는 현실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 책은 송이버섯이 살아가는 세계 곳곳의 산림지역을 탐험하는 여정인 동시에, 근대성에 함몰된 시야 밖 세계를 볼 수 있는 “알아차림의 기술”(45면)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며, 나아가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의 안과 밖을 가로지르는 주변자본주의의 “열린 배치”(open-ended assemblages, 8면)를 탐색하는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의 “세계 끝”은 “폐허”와 짝을 이루어 어두운 미래의 울림을 지니면서도, 그 끝에서 생명을 일구는 버섯에서 “삶의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책의 바람과도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세계 끝에서 버섯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찾는 안내자가 되는가? 이것이 바로 책을 읽는 내내 함께하는 물음이다. 

상당한 분량의 책 내용을 크게 단순화하면, 균류 생물인 송이버섯의 생태와 식용 상품인 송이버섯의 상업이라는 두 갈래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지만 책을 이루는 “짧지만 다채로운 장들이 (…) 비 온 뒤 쑥쑥 올라오는 버섯 같았으면”(8면) 한다는 칭의 비유적 표현대로, 이 책은 직선적 논리 전개 방식을 벗어나 각 장(章)과 그에 따르는 작은 장들이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다 다시 모여 연결되도록 구성되어 있다. 송이버섯의 생장은 소나무와 숲의 생태는 물론 균과 포자, 생물학적 종의 분류체계와 진화생물학의 이론적 배경으로 퍼져나가고, 송이버섯 무역의 궤적은 전쟁과 복구에 맞물린 목재산업의 경기 변화와 국가적·지역적 산림관리 정책, 그리고 글로벌 자본주의의 공급사슬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마주치는 버섯 채집인, 중개인, 무역업자, 산림관리인, 소농민, 그리고 균류생물학자, 생태복원 활동가 등 다양한 인간 집단의 생계와 문화, 역사가 버섯에 얽혀 있는 방식이 “민족지”(ethnography, 11면) 서사들로 펼쳐진다. 따라서 단연 돋보이는 책의 특징은 풍부함과 구체성이며, 여러 분야의 이론적 논의마저도 칭이 자신의 서술방식을 일컫듯 다양한 장르를 오가는 “모험 이야기”(12면)의 일부가 된다. 이러한 책의 형식은 버섯의 삶이 그것에 관여하는 다층의 생태적·사회문화적·경제적 문맥에 얽혀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저자의 존재론적·인식론적 지향에 조응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이 책은 난감하게도 구체적인 이야기를 뺀 정리나 요약에 저항한다.

2. 송이버섯의 생태: 다종의 협력적 생존

송이버섯의 주무대로 칭이 찾은 미국 오리곤주와 핀란드 북부, 중국 윈난성의 산림지역 등은 구체적인 양상은 다르지만 모두 다종의 마주침에서 창발하는 생존의 현장이다. 예컨대 미국 오리곤주의 대규모 벌목, 또는 산업비림을 유지하기 위한 산불억제 등의 산림정책은 숲을 황폐화하고 특정 수목의 생장이 억제되거나 번창하는 생태환경을 만들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러한 인간 활동은 송이버섯 생장에 유리한 로지폴 소나무 숲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다종적 마주침의 일부로 작용할 뿐이다. 다른 수종과의 생태적 마주침이 촉발하는 로지폴 소나무의 번성과 더불어, 소나무와 버섯 곰팡이의 공생, 곤충과 동물의 생태 습성 등 버섯의 생태계를 구성하는 다종의 얽힘이 인간 활동과 교차하는 시·공적 배치를 통해 송이버섯의 생장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속 가능한 목재 생산을 위해 근대 산림관리로 시행되는 핀란드의 전나무 동령(同齡) 관리는 계획된 개벌 과정에서 송이버섯의 생장에 필요한 소나무 숲을 만들며, 계획되지 않은 소나무 숲의 출현은 불규칙한 소나무의 씨앗 맺기 주기와 맞물려 송이버섯의 “벼락 경기와 불경기”(308면)라는 예상치 못한 리듬으로 나타난다. 요컨대 조림과 벌채, 방치를 포함하는 인간 활동은 버섯을 둘러싼 다종의 생태적 얽힘을 “교란”하지만, 저자가 주목하는 지점은 송이버섯이 인간의 계획과 같고도 다른 시공간을 통과하고 가로지르며 삶을 만들어가는 방식이다. 

미국과 핀란드의 산업비림과 달리 중국 윈난성은 소농민 숲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곳의 송이버섯은 산림 보호와 사유재산 확대를 목적으로 시행된 가구별 삼림 접근권으로 만들어진 인클로저에서 보호·관리되는데, 실제로 송이버섯의 생장에 유리한 지저분하고 개방된 소나무 숲은 생계를 위한 지역 주민의 산림자원 이용과 통행을 묵인하는 관행에 더 크게 빚진다. 즉 윈난성의 송이버섯은 사유재산 제도와 공유지 사용의 관행이 맞물리는 가운데 소농민의 “교란” 덕분에 번성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곳의 공유지는 “일시적이고 곧 사라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송이버섯 거래에서 확인되는 사유재산을 향한 욕망은 언제라도 “기대하지 않은 파괴의 후원자”가 될 수 있음을 칭은 강조한다(483면). 버섯의 생존은 “자본주의적 규율의 무능력”(489면)이 드러나는 곳이지만 언제나 불안정성을 딛고 있고, 그래서 항상 “폐허” 가까이에 있다. 

이렇듯 숲의 역사를 변형하거나 멈추는 인간 역사와의 얽힘에도 불구하고 나무와 버섯의 동행이 “역사를 만드는 한” 그들의 역사는 인간의 산업적이고 자본주의적인 “통치를 위협한다”(294면). “위협”은 숲의 생명력에 대한 매우 강력한 (그래서 어쩌면 희망적일 수 있는) 울림을 준다. 그것이 비인간 존재의 행위성에 대한 긍정과 더불어 인간 역사를 거스르는 어떤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교란에 기반한 생태”(28면)에서 “교란”은 단일한 주체에 의한 것만도 아니고 그 결과 또한 파괴와 복원, 또는 정체, 지연 등 어느 방향으로든 이어질 수 있다. 바꾸어 말해 교란된 삶의 가능성은 그 어떤 존재의 마주침도 뒤로 물리지 않으면서 열린 배치로 이루어지는 삶의 얽힘, 다시 말해 저자가 거듭 강조하는 “패치성”(patchiness, 9면)을 들여다볼 때 비로소 발견된다. 따라서 단선적 발전이나 확장을 전망하지 않는 송이버섯의 이야기는 종말론적 서사에 갇히지 않되 소외와 호환, 확장성을 근간으로 한 근대적 진보 서사와도 단호히 단절할 것을 요청하지만, 그렇다고 ‘구원’을 희망하지도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곤경과 함께하기’와 ‘인간 없는 세상’ 사이 어디쯤을 향하는 듯하고, 그 가운데 길을 내는 일은 지난해 보인다. 뜻밖의 공생으로 창발하는 삶의 가능성이 우리를 둘러싼 패치성에 존재한다는 책의 통찰은 근대 담론에 함몰된 거대 단일 서사의 허구와 무력감에 맞설 시각과 방법론의 전회로 다가오지만, 패치를 따라가며 마주하게 될 폐허의 실질적인 위협은 조급함과 함께 때로 시야를 흐리게도 하는 것이다. 

3. 송이버섯의 상업: 자본주의의 안과 밖

송이버섯의 생장이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에 연결된 목재 생산과 공급, 그리고 그와 결부된 근대적 산림관리의 역사와 맞물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 소비지인 일본에서 값비싼 선물로 거래되는 식용 송이버섯의 채집과 유통, 소비는 그 모든 과정에 얽혀 있는 개인 또는 집단의 구체적인 역사와 함께하며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방식과 뗄 수 없이 엮여 있다. 송이버섯의 생장이 폐허에서 창발하는 상리공생의 패치에 둘러싸여 있다면, 송이버섯의 상업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공급사슬을 가로지르는 자본주의 패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송이버섯이 글로벌 자본주의에 다양한 패치로 얽혀 들어가 있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칭이 제시하는 중요한 개념은 “구제”(salvage)와 “번역”(translation)이다. 구제는 “자본주의적 통제를 받지 않고 생산된 가치를 써먹는 것”(120면)으로, 자본주의에 연결되어 있으나 그 자체로 자본주의적 자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국면에서 비자본주의적 가치 생산 과정을 가로지르며 자본으로 축적된다. 따라서 구제가 일어나는 장소는 “자본주의의 내부인 동시에 외부”이며, 칭은 그 장소들을 “주변자본주의적”(paracapitalist)이라 부른다(121면). 주변자본주의적 장소에서 자본 축적을 위해 구제되는 가치는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생산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것을 글로벌 공급사슬에 올려 태우기 위해서는 각 국면에서 다양한 조율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렇게 구제된 가치가 자본 축적을 위해 조율되는 과정이 바로 번역이다. 번역은 주변자본주의적 장소가 자본주의 체제 안으로 편입되는 작동방식에 필수적 과정이지만, 번역이 거쳐가는 길목은 예기치 못한 경제적·문화적 다양성이 교차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미국 오리건주에서 채취된 송이버섯이 일본의 값비싼 선물용 상품으로 거래되어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은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가치가 여러 국면의 번역을 거치는 생생한 현장이다. 이 과정을 칭은 “선물로서 시작되고 선물로 끝나는 자본주의 상품”(238면)인 송이버섯의 삶이라고 부르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풍부하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부분이 “선물로서 시작”되는 단계인 “오픈 티켓” 현장이다. 버섯 경매를 위해 임시 캠핑장을 차리고 채집인과 중개인, 구매인이 모이는 오픈 티켓은 송이버섯의 주변자본주의적 구제가 글로벌 공급사슬에 올라타는 상품화 과정의 일부이지만, 그곳으로 모여드는 라오스·베트남·캄보디아 출신의 동남아시아 채집인들, 백인 참전용사와 아메리카 인디언,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채집인들은 말 그대로 자본주의의 변방에 존재하면서 자신들의 비자본주의적 문화와 가치, 그리고 생계 방식을 구현한다. 칭은 국유림과 사유지를 공유지마냥 사용하는 버섯 채집인들이 오픈 티켓에서 교환하는 것이 버섯과 돈만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들이 버섯과 돈에 부여하는 가치는 각 집단이 자신들의 역사·문화적 경험을 채집이라는 경제활동에 접합하여 만들어낸 각자의 “자유”이며, 버섯과 돈은 오픈 티켓에서 벌어지는 “자유의 공연”에 주어지는 “트로피”다(143면). 

예를 들어 동남아시아계 채집인들의 경험은 인도차이나전쟁의 굴곡진 역사와 결부되어 있는데, 이들은 각 집단이 마주한 현실에 따라 나름의 방식으로 전쟁을 겪어내고 미국에 오면서 미국적 ‘자유’의 개념 안에 자신들의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가치를 연결함으로써 버섯 채집을 자본주의적 노동과는 다른 가치의 생산으로 만든다. 이들에게 ‘자유’는 서로 다른 함의로 모두를 버섯 채집으로 연결하는 매개이며, 오픈 티켓에서 마주치는 이들의 과거와 현재는 그 자체로 각각의 민족지 서사다. 버섯을 중심에 두고 이를 칭의 표현으로 뒤집어 말하면, 오픈 티켓에 모이는 “오리건주의 버섯은 ‘자유’의 문화적 실천에 오염되어 있다”(132면). 칭이 보기에 ‘자유’를 열망하는 이곳의 송이버섯 채집은 낭만화된 전근대적 가치나 공동체적 삶이라기보다는 인도차이나전쟁과 미국 이민정책의 변화, 신자유주의가 낳은 불안정한 생계 등이 버섯의 삶과 얽히면서 드러나는 균열의 국면이다. 따라서 칭이 ‘자유’에 “실천”이라는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이곳의 채집과 구매 행위가 자본주의 흐름의 일부이면서도 동시에 비자본주의적 관계와 가치를 인간과 버섯의 공생적 얽힘으로 연결해주는 “자연-문화의 매듭”(106면)의 열린 배치를 증언하기 때문이다. 칭이 목격한 오픈 티켓 현장은 국유림과 사유지를 공유지로 영토화하고 자본 축적과 투자에서 미끄러지며, 인간과 사물의 소외에서 벗어나 “자유 만들기와 자유 확인하기”를 실천하는 “공연장”이다(143면).

4. 전망: 잠복해 있는 공유지와 협력자

그렇다면 “글로벌 정치경제의 균열”을 드러내는 주변자본주의의 구제 현장에서 협력적 얽힘이 “생존의 한 가지 방식”(26면)으로 예시하는 송이버섯의 삶은 어떤 정치적 전망을 보여주는가. 송이버섯을 둘러싼 생태·자본주의의 패치들은 그 자체로 다종의 역사와 역동성을 지니고 있으며, 근대적 확장성이 실패하는 “차이의 세계”다. 하지만 칭이 거듭 경계하듯이 송이버섯을 둘러싼 패치들은 차이를 가로지르며 “연대를 위해 설계된 유토피아적” 정치 전망이나 “자본 축적과 권력을 향한 분노”로 쉽게 통합되지 않는다. “어떤 패치도 ‘대표적’이지 않으므로” 단일 대오로 자본주의 폐허를 전복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448면). 다만 우리는 알아차림의 기술을 연마한다면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는 “공동의 목적에 동원될 수 있는 얽힘”, 즉 “잠복해 있는 공유지(latentcommons)”에서 “전략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뿐이며, 따라서 칭이 제안하는 연대와 투쟁은 “다양하고 이동하는 연합체의 힘을 가진 정치”의 모습을 띤다(449면). 

송이버섯이 협력적 생존의 안내자라고 할 때, “전략적” 실천은 송이버섯이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얽힘의 순간들에서 “잠재적인 협력자”(449면)를 ‘알아차리는’ 일이기도 하다. 소농민 숲의 회생을 위해 활동하는 “사토야마 회생 운동” 그룹인 “마스타케 크루세이더스”(Matsutake Crusaders, 456면), 오리건주의 숲에서 실행되고 있는 “정치적 듣기”(449면)의 유산을 남긴 지역 활동가 베벌리 브라운(Beverly Brown), 종간 상리공생의 진화를 지워왔던 근대 자연과학에 도전하는 제도권 안팎의 과학자들, 그리고 “학문의 상품화”와 협력 연구의 “사유화”를 거스르며(499면) 협력적 공동연구를 진행하는 학문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칭이 소개하는 “잠재적인 협력자”의 이야기는 책 어디에나 있다. 칭이 보기에 이들을 묶어줄 공통적인 의제의 실마리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고, “기껏해야 수명이 짧은 희미하게 깜빡이는 빛”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 희미한 빛이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같은 면). 

한 인터뷰에서 책이 “희망적”으로 보인다는 언급에 칭은 희망과 회의 양쪽의 혐의를 동시에 받고 있지만 그렇게 혼탁한 전망 외에는 달리 선택지가 없으며, 굳이 말하자면 “디딤대와 함정”을 모두 가진 불안정성을 전제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전망이 “실용적 희망참”(practical hopefulness)이라고 답한다.2) 그의 대답은 “깜빡이는 빛”처럼 요원하게 들리는 책의 전망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칭은 안일한 낙관과 손쉬운 절망을 거부하고 실천적 유효성에서 탈각되기 쉬운 이론·개념적 전체주의를 경계하면서도, 인간 역사와 분리된 비인간의 행위성이나 다종의 협력이 가능케 하는 삶의 가능성을 과장하는 흐름과도 냉정히 거리를 둔다. 그래서 칭이 보기에 현실은 여전히 (또는 아직) “폐허”다. ‘희망’이라는 말도 “폐허”와 “삶의 가능성”을 모두 지닌 현실적 모순을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칭의 이 같은 관점은 해러웨이(Donna J. Haraway)와 라투르(Bruno Latour) 등이 제안하는 생태정치와 견주어볼 때도 여러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서로 다른 정치적 주체의 이동하는 연합의 힘’에 대한 칭의 입장은, 예를 들어 라투르와 비교하여 정치적 연대의 현실적 힘에 대해 좀 더 유보적으로 보인다. 열린 배치와 행위자로서 비인간의 정치적 몫을 강조하는 한편, 인간 역사와 자본주의적 관계를 전선 뒤로 물리지 않는다는 면에서 같고도 다른 지점들이 있다. 물론 이러한 비교 검토는 서평의 범위를 넘는 논의가 되겠지만,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이 책의 가장 큰 차별점이자 미덕은 전망의 실마리를 찾는 고단함보다는 즐거움이 내내 강조된다는 점이다. 송이버섯과 함께 그 향기를, 글과 함께 시편과 사진을, 그리고 이론적 논의보다 모험과 호기심을 제안하는 이 책의 독서 경험은 ‘이야기’의 힘과 즐거움을 새삼 실감하는 과정이다. “폐허”를 말하면서도 즐거움을 곁에 두고 나아가는 태도는 책이 견지하는 가치이자 정치성의 중요한 일부이며, “실용적”이라는 제한에도 불구하고 ‘희망’보다 “희망참”이 책의 큰 감화력을 설명하는 데 더 어울리는 이유다. 


1)元永善 서울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애나 로웬하웁트 칭 지음, 노고운 옮김 『세계 끝의 버섯: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현실문학, 2023) 10면. 앞으로 이 책의 인용은 본문 괄호 안에 면수만 표시.

2) Brandon Adams, “Cap and Trade,” The New Inquiry (Feb. 12, 2016). Online.

│원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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