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산
I. 들어가며
최근 공연계에서 관객의 참여를 전제로 하는 몰입형(immersive) 퍼포먼스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셰익스피어 극의 경우, 2003년 첫 선을 보인 펀치드렁크(Punchdrunk)의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가 「맥베스」(Macbeth)의 배경을 1930년대로 재설정하고 관객이 자유롭게 이동하며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형식을 도입한 데 이어, 관객이 배를 타고 여정에 동참하는 전개를 제시한 애프터아워극단(After Hours Theatre Company)의 2023년 작 「템페스트: 몰입형 경험」(The Tempest: An Immersive Experience)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관객 참여가 시도되고 있다. 동시대 몰입형 퍼포먼스는 상당수가 점진적으로 디지털 플랫폼을 경유하는 특징을 보인다. 「슬립 노 모어」에서 관객이 흩어져 있는 배우를 따라다니며 나름의 스토리를 재구성한다면, 2019년 VR 영상으로 제작된 커먼웰스 셰익스피어 극단(Commonwealth Shakespeare Company)의 「햄릿 360: 당신 아버지의 영혼」(Hamlet 360: Thy Father’s Spirit)에서 관객은 지금은 단종된 구글 카드보드(Google Cardboard) 또는 데이드림 뷰(Daydream View)를 부착한 구글 픽셀폰 등의 VR 헤드셋으로 몰입형 경험을 했다. 2021년 배우와 관객이 동시에 VR 공간에 접속하여 상호작용하는 퍼포먼스를 수행하는 「더 언더 프레즌츠: 템페스트」(The Under Presents: Tempest) 역시 디지털 몰입형 공연이다. 디지털 플랫폼을 통한 몰입형 경험은 가상현실에서 이루어지기에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편리함으로 팬데믹 당시 탄력을 받았고, 이후 연극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으로 확장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오브제의 안전한 보존을 위해 거리 확보 관람을 요구하는 전시회조차 최근에는 관객의 적극적인 몰입형 경험을 시도한다. 고흐의 작품 속 공간을 구현하여 관객의 다감각적(multi-sensory) VR 경험을 고무하는 「반 고흐: 몰입형 경험」(Van Gogh: The Immersive Experience)과 2020년 루브르박물관이 첫 VR 몰입형 관람으로 제작한 「유리 너머 모나리자」(Mona Lisa Beyond the Glass)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몰입’은 직관적으로 관객이 몰두하는 행위를 뜻하지만 공연 경험에서 ‘몰입’은 결코 순수하게 자생적이거나 능동적일 수 없다. 특히 디지털 시대의 몰입형 퍼포먼스는 관객 경험의 감각적 영역을 가상공간으로 확대하기에 관객을 퍼포먼스의 의미 창출 과정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며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관객의 주체성을 필연적으로 강조한다. 하지만 오롯이 자연인으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디지털 공간에서 관객의 주체성은 사실 매우 복잡한 역학의 산물이다. 예를 들어 「햄릿 360」의 경우 관객은 VR 기기를 쓰고 방향 전환, 줌인, 줌아웃 등을 통해 자신의 시선 아래 피사체를 통제할 수 있지만 그들이 볼 수 있는 모든 디테일은 원천적으로 사전 설계되어 있다. 무엇보다 장르의 정체성을 전제하는 테크놀로지가 지극히 재정에 민감한 자원에 의존하기에 이를 누릴 수 있는 관객층도 상당히 제한적이다. 이 글은 디지털 시대 퍼포먼스의 향후 전망에 관한 논의가 디지털 퍼포먼스 장르가 품고 있는 경제적·사회적 가치의 가능성에 대한 고민으로 수렴한다는 관찰로부터 시작한다. 과연 디지털 시대의 몰입형 퍼포먼스는 관객의 힘을 승인하는 민주적인 플랫폼일까? 아니면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말대로 주체성의 환상을 교묘하게 호도하는 것일까? 이 글은 먼저 디지털 퍼포먼스의 실험적 시도가 폭발적으로 행해진 뉴밀레니엄 전후 10년을 첫 단계로, 코비드 팬데믹 직후 공연 경험의 대안으로서 디지털 퍼포먼스의 폭발적 수요가 발생한 2020년 이후 3년을 두 번째 단계로 파악하여 지난 20년 동안 퍼포먼스계에서 테크놀로지의 수용과 그 비판적 견제의 양가적인 반응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서 디지털 몰입형 퍼포먼스를 둘러싼 관객의 주체성을 고찰하고, 마지막으로 생성형 인공지능 시대를 눈앞에 둔 현 시점 디지털 몰입형 퍼포먼스의 사회적 가치와 전망에 대한 동향을 살피며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II. 뉴미디어, 그 새로움에 대한 경외와 불편함1)
디지털 몰입형 퍼포먼스에서 ‘몰입형’이라는 개념은 비교적 쉽게 직관적으로 이해된다.1)물론 그 몰입이 동시대 공연계에서 통용되는 관객의 신체적 개입을 넘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가 전제하는 심리적 개입까지 포함할지는 또 다른 복잡한 설득의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일반적으로 ‘몰입형’ 개념은 공연 과정에의 관객의 물리적인 참여를 설명한다. 이와는 달리 공연에 연계된 ‘디지털’이라는 개념의 정의는 의외로 상당히 모호하다. 예를 들어 블레이크(Bill Blake)는 디지털을 정의하는 대신에 디지털이 포함하고 있는 예시를 제시하여 글을 읽는 이들이 역으로 개념을 유추하게끔 하는 접근을 택한다. “디지털-사이버공간, 정보망, SNS, 컴퓨팅 과정, 전자적 재현, 기타 등등”2)이라는 설명에서 블레이크가 디지털과 뒤에 나열한 예시를 동치관계로 보는지 아니면 디지털이 후자를 품어내는 위계질서가 전제된 관계로 보는지는 애매한데, 심지어 예시를 느슨하게 “기타 등등”으로 마무리 지으며 디지털 영역의 확정마저 독자에게 넘겨버린다. 이에 애덤스(Matt Adams)는 디지털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한마디로 “헛된 일”이며 블레이크가 이 힘든 업무를 “현명하게도 슬쩍 피했다”고 지적한다.3) 딕슨(Steve Dixon)은 이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이지만 여전히 넓은 범주에서 디지털 퍼포먼스를 파악한다. 2000년 전후로 약 10년 동안 공연계에서 폭발적으로 시도되었던 컴퓨터 테크놀로지에 주목한 딕슨은 디지털 퍼포먼스를 컴퓨터 기술이 콘텐츠·기술·미학·전달 방식에서 부수적인 기능이 아닌 핵심 역할을 하는 모든 퍼포먼스라 지칭하고, 1. 디지털로 제작되거나 조정할 수 있는 프로젝션을 가진 라이브 연극·댄스·공연예술 2. 로봇·가상현실 퍼포먼스 3. 컴퓨터 감지/활성 장비 또는 텔레마틱 기술을 이용한 설치물이나 극장물 4.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접근 가능한 퍼포먼스 작품과 활동을 그 범주에 넣는다.4) 그런데 딕슨의 예시들은 분명 컴퓨터 기술이 중추적인 기능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앞서 배제했던 “컴퓨터 기술이 부수적으로 기능”하는 퍼포먼스와 차별화가 되는지는 의문이다. “부수적인 기능”과 “핵심 역할” 사이의 선긋기에서 한편으로는 테크놀로지의 도구적인 기능을 지양하려는 딕슨의 노력을 읽어낼 수 있지만, 이는 테크놀로지의 존재론적 가치의 확인으로 이어지기보다는 역설적으로 테크놀로지를 여전히 ‘콘텐츠’의 하위 개념, 그래서 태생적인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 그 무엇으로 파악하는 인식을 드러낸다. 살츠(David Saltz)의 다소 냉소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것을 무형의 디지털 데이터로 바꾸어버리는 컴퓨터의 탐욕스런 경향”에 잠식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연계의 만연한 불안감을 반증하기도 한다.5)
퍼포먼스 영역에서 컴퓨터 테크놀로지 수용 그리고 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6) 살츠가 관찰하듯 전 세계 컴퓨터 수가 5만 대도 채 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공연계에서 컴퓨터 테크놀로지 역할이 색인과 논문 데이터베이스 구축 정도에 그치다가 1980년대 들어오면서 극장역사가들이 역사 데이터를 분석하기 위해서 컴퓨터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초기 활용은 이름·장소·날짜·수치 등 주로 정량적인 데이터 분석에 집중했고 공간·몸·활동 등에 기반한 퍼포먼스의 특수한 현상을 다루기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컴퓨터 테크놀로지는 1980년대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과 함께 특히 셰익스피어 학습 영역에서 하이퍼텍스트를 제공하면서 활발하게 이용되었고, 1990년대 컴퓨터지원설계(CAD) 소프트웨어의 개발과 보급으로 극장역사가들이 디오니소스와 리슐리외(Richelieu)의 팔레 카디날 극장(Palais Cardinal theater) 등 예전 극장 또는 무대장치를 본격적으로 3D 모델링을 통해 재구성하는 데 활용되었다.7) 살츠의 추적을 따라가면 공연계에서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활용은 (당연히 겹치거나 회귀하는 부분이 있을지언정) 크게 교육, 아카이빙을 포함한 연구, 퍼포먼스 실천으로 이어지는 순차적인 발전 단계를 거친다. 테크놀로지는 그것이 명백하게 도구로 사용되는 교육과 아카이브/연구 분야에서는 혁명적인 돌파구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환영받았지만 퍼포먼스에 응용되어 구현되는 실천의 영역에서는 그 수용이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뉴밀레니엄을 전후로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퍼포먼스에서 폭발적으로 응용되면서 가상현실과 현실 공간 사이의 상호작용을 도모하는 디지털 퍼포먼스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대표적인 사례를 통해 디지털 퍼포먼스를 분류하면 1. 1990년대 중반부터 거트루드 스타인 레퍼토리 극단(Gertrude Stein Repertory Theatre)은 비디오 콘퍼런스 툴을 통해 배우들이 퍼포먼스를 하는 라이브공연을 시도했으며, 2. 코츠(George Coates)는 3D 가상환경에 라이브 배우들을 출현시켰고,8) 도브(Toni Dove)는 맞춤형 동작 감지 소프트웨어를 착용한 관객을 미디어 퍼포먼스에 참여시켰다.9) 3. 로럴(Brenda Laurel)과 스트릭랜드(Rachel Strickland)의 1993년 작 「플레이스홀더」(Placeholder)에서 관객은 헤드마운트를 착용하고 라이브 공연자가 조정하는 디지털 캐릭터와 상호작용하며 내러티브를 만들어냈다.10) 4. 공연자들을 물리적으로 다른 공간에 위치시키고 정보통신기술로 소통하여 퍼포먼스를 만들어내는 텔레마틱 퍼포먼스도 디지털 퍼포먼스의 중요한 한 갈래다.11) 최신의 테크놀로지는 퍼포먼스가 공유되는 시공간은 물론 퍼포먼스와 관람의 경계선도 해체했는데, 특이하게도 디지털 퍼포먼스가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될수록 이 새로운 매체에 대한 공연 관계자들의 불편함은 심화되었다. 영국의 영화 제작자 퍼트넘(David Puttnam)은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목적이 아닌 가교”로 기능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영국의 멀티미디어 디자이너 스트링어(Roy Stringer)는 “예술 창조 행위는 테크놀로지와 아무 관련이 없으며 (…) 신기술의 핵심 응용프로그램은 콘텐츠”라고 단언했다.12) 딕슨은 뉴밀레니엄 직전 영국에서 열린 예술·디자인 분야에서의 컴퓨터 사용에 관한 학회에서 일련의 발표자들이 컴퓨터 기술은 목적이 아닌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미디어가 콘텐츠를 결코 포섭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모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13)예를 들어 2001년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의 예술 및 디자인을 위한 첨단 컴퓨터 센터(Advance Computer Center for Art and Design)가 모션 데이터 아카이브를 구축하기 위해 광학 모션 캡처 시스템으로 마임 예술가 마르소(Marcel Marceau)의 공연을 캡처했을 때는14) 테크놀로지의 혁신적 쓰임이 인정을 받았지만,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실제 퍼포먼스에서 내러티브를 지배하고 관객과 상호작용하며 구현될 때 유달리 저항감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테크놀로지가 그것이 지탱하는 공연과의 관계에서 객반위주하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공감과 디지털 미디어의 ‘침공’으로부터 공연의 마지막 보루인 ‘순수한’ 정체성을 지켜내야 한다는 뿌리 깊은 신념이 자리한다.
한 차례의 급진적인 실험기가 지나고 디지털 퍼포먼스는 코비드 팬데믹으로 인해 2020년부터 약 3년 동안 반강제적으로 시행된 비대면 생활로 또 한 번 폭발적으로 활성화되었다. 뉴밀레니엄 때의 디지털 퍼포먼스가 매개화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가상과 실재, 관객과 공연자의 경계를 초월하는 수행성을 통해 적극적인 상호작용성을 도모하고자 했다면 팬데믹 시기의 디지털 퍼포먼스는 상호작용보다는 배급을 위한 아카이빙의 필요성에서 출발했다. 거리두기의 미학으로 장려된 팬데믹 극장에서는 상호작용성이 부재했고 그 부재는 당시 뉴노멀 시대의 일종의 규범이기도 했다. 팬데믹 초창기의 디지털 퍼포먼스는 공연을 녹화하여 송출하는 온라인 스트리밍 형식이 주를 이루었고 비디오 콘퍼런스 툴을 이용한 비대면 공연, 메타버스 공간을 활용한 공연 등 다양한 실험이 시도되었다. 실시간 송출이든 사전 녹화든 온라인 스트리밍은 록다운 시기에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으나 공연의 영상화는 기존의 영상매체와 차별화된 강점을 만들어내기보다 오히려 후자의 특수효과에 미치지 못하는 어중간한 한계가 있었다. 또한 메타버스로 플랫폼을 바꾼 가상현실 콘서트 공연 등은 당연히 몰입형 공연을 지향했지만 관객이 가진 장비에 의존해야 했기에 디지털 경험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공연예술의 적응과 회복력: 팬데믹과 그 이후』(Adaptation and Resilience in the Performing Arts: The Pandemic and Beyond)에서 팬데믹이 공연계에 가져온 패러다임 변화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 결과를 제시한 미섹(Richard Misek)은 팬데믹을 전후로 영국 공연예술계에서 디지털 활동에 대한 상당한 거부감을 포착한다. 박물관계는 효율적인 아카이빙에 도움이 될 디지털 기술을 열렬히 환영한 반면 공연예술계는 디지털 활동15)이 전통적인 방식의 “신체적 공동 현존을 혼란스럽게 하기” 때문에 온라인 작품 생산이 공연 정체성에 반한다는 반감 내지는 적어도 공연이랑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의구심을 보인다는 것이다.16) 미섹은 공연계가 상황에 따라 디지털 활동의 필요성을 인정하기는 하나 이는 이론적 차원이고 실제로는 관련 조직이나 부서가 디지털 실행을 주저한다고 관찰하며 이 상반된 감정을 “양가성”(ambivalence)17)이라 칭한다. 그리고 이 양가성을 팬데믹이 끝나 디지털 플랫폼이 더 이상 절실하지 않은 현 시점 공연계에서 특히 유효한 특징으로 파악한다. 실제로 영국의 219개 공적 기금을 지원받는 극단 중 스트리밍 공연을 한 극단은 팬데믹 첫 18개월 동안 56퍼센트에서 2021년 가을 28퍼센트인 60개, 2022년 겨울/봄에는 16퍼센트에 해당하는 35개로 빠르게 감소하며 전통적 방식의 극장으로 회귀했다.18)
이전 세대 디지털 퍼포먼스를 둘러싸고 감지되었던 반감이 같은 레토릭으로 반복되었다. 시디로풀루(Avra Sidiropoulou)는 극장에 디지털 미디어를 접목시키는 것에 대해 분명한 우려를 표명한다.19) 시디로풀루는 전통적 연극에 디지털 미디어를 활용하는 것이 스토리텔링을 원활하게 하고 역동적인 비주얼 환경을 만든다며 그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지만, 테크놀로지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일시적인 매혹일 뿐이며 “궁극적으로 변혁을 야기하는 극장 내 경험을 못 누릴 것”이라 경계한다.20) 호손(Katie Hawthorne)이 조사한 상당수의 유럽 극장들 역시 디지털 극장의 한계로 “실재성”(realiness)과 “라이브니스”(liveness)의 부재21)를 꼽으며 디지털 테크놀로지 사용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는데 “디지털 또는 온라인 공간은 극장의 진짜 공간이 아닐”뿐더러 디지털 아카이빙과 배급이 극단들의 해외 순방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 수 있기에 극단에게 “존재적 위협”(existential threat)22)이 된다는 것이다. 미섹이나 호손이 디지털 퍼포먼스를 썩 환영하지 않은 공연 관계자들에게서 읽어낸 거부감이나 시디로풀루의 경고는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매혹적인 눈요기 이상으로 인정하지 않는 불안감이 1세대 디지털 퍼포먼스 이후 여전히 지속 또는 강화되고 있음을 확인한다. 더군다나 팬데믹 이후 종전의 대면 사교활동을 재개하려는 욕구는 극장의 ‘라이브니스’ 회복에 대한 정당성에 더욱 힘을 실었다.
미섹은 팬데믹 기간의 특수성으로 디지털 극장을 통해 극장 경험을 대체하려 했던 시도들이 결과적으로는 라이브니스와 “디지털성”(digitality)23)을 대립하는 개념으로 보는 인위적인 이분법적 접근을 강화했다고 비판하고, 디지털 퍼포먼스의 미래를 위해서 극장을 “물리적인 극장 현장과 연결되는 예술형태”24)와 동일시하는 역사적인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섹은 나아가 디지털 극장이 이른바 ‘전통적’ 극장과 상생해야 한다고 제안하며 하이브리드에서 대안을 찾는데, 가장 효과적인 하이브리드 형태로 디지털 몰입형 퍼포먼스를 제안한다. 디지털 퍼포먼스는 디지털이 전달하는 비물성 데이터와 이를 수행하는 물성의 몸, 가상의 퍼포먼스 공간과 실제 관람 공간―또는 그 반대의 관계―등 다층의 이항대립적인 가치들을 조율해야 하기 때문에 미섹이 주창하는 하이브리드는 매우 설득력 있는 돌파구를 제시한다.
III. 관객 몰입형 경험, 주체성 그리고 생성형 인공지능
앞서 살폈듯이 전통적인 극장 경험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디지털 퍼포먼스를 이해하는 경향이 오랫동안 널리 퍼져 있었다. 디지털의 가능성을 지지하는 블레이크조차도 디지털 퍼포먼스가 흔히 전통적 극장 가치로 정의되는 “라이브 상호작용, 진정한 친밀감, 실재 현존, 신체 표현”25)을 결여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디지털 퍼포먼스가 전통적 또는 ‘정통’ 극장의 존립을 위협하는 타자로 인식되기까지 한다. 반면 『디지털 프론트 로』(The Digital Front Row)같이 온라인 극장은 라이브 공연을 실시간 스트리밍하거나 녹화해서 온라인으로 송출하는 것으로, 디지털 극장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공연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포함하는 라이브 극장 공연”으로 구별하며 라이브니스를 디지털 미디어에 본질적으로 내재된 자산으로 간주하는 시각도 있다.26)살츠 역시 퍼포먼스 예술과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본질적으로 친밀한 관계”(inherent intimacy)27)로 보며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우호적으로 파악하는 평자 중 한 명으로, 올드미디어인 인쇄·영화·TV는 수많은 관객에게 무형의 재현을 무한히 복제하지만 뉴미디어는 그 재현을 라이브 공연에 가깝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고 그 근거로 디지털 미디어의 “상호작용성”(interactivity)을 꼽는다.28) 이 상호작용성은 미섹이 주창하는 “하이브리드”, 곧 디지털 몰입형 퍼포먼스의 근간이 된다.
살츠가 이야기하는 상호작용성은 디지털 환경에서 어떻게 라이브니스를 창출하며 디지털 몰입형 퍼포먼스 장르의 존재론적 가치를 보장하는가? 정확한 합의점은 없지만 평단에서는 대체로 ‘몰입성’을 관객의 ‘참여성’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블레이크를 위시한 평자들이 디지털 퍼포먼스의 다양한 사례를 연구하면서 디지털 극장의 정의를 역으로 더듬어가려 했던 것처럼 올스턴(Adam Alston) 역시 몰입형 퍼포먼스의 사례 분석을 통해 공통된 특징을 포착하고 몰입형 극장의 개념을 역으로 추적한다. 올스턴은 몰입형 극장을 관객 참여에 따라 진화하는, 고정되지 않은 “느슨한 개념”29)이라 칭하고 관객이 생산적인 참여자로서 몰입형 극장에 참가하는 방식에 집중한다. 프리즈(James Frieze)는 몰입형 극장을 전통적 극장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파악한 매천(Josephine Machon)을 인용하며 진보적/전통적, 감각적/이성적, 촉각적/시각적, 주체적/수동적 등의 이분법 틀에서 전자의 가치를 지닌 몰입형 극장이 후자인 전통적 극장에서 해방된 것으로 파악해온 구분법에서 벗어날 것을 제안한다.30) 프리즈는 ‘몰입형’보다는 ‘참여형’(participatory)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관객의 주체성을 강조하며, 참여는 수행적이고 퍼포먼스는 참여적인 상호의존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퍼포먼스 장르의 존재론적 정체성을 관객의 참여에 두는 것이다. 몰입형 퍼포먼스가 디지털 환경으로 전이될 때 관객의 몰입은 더욱 중요해진다.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디지털 퍼포먼스가 단순한 아카이빙을 넘어서 퍼포먼스 장르로서의 존재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라이브니스가 명확히 구현되어야 하며, 이러한 라이브니스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실시간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몰입성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디지털 퍼포먼스 장르의 존재론적 정당성을 관객의 몰입, 궁극적으로 관객의 주체성에서 찾으려는 접근은 미디어화된 퍼포먼스의 존재론적 정당화를 위해 라이브니스에 집착했던 방식과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라이브니스의 가장 일차적인 기표는 공연자와 관객의 시공간적·신체적 공동현존이다. 펠런에게 퍼포먼스의 존재론적인 정체성은 “소멸”(disappearance)이기에 미디어화되어 반복되는 퍼포먼스는 본질적으로 퍼포먼스가 아니다.31) 펠런에게 일회성은 좁은 의미로 공연자와 관객이 퍼포먼스의 시간과 공간을 물리적으로 공유할 때만 가능하지만 아우슬랜더에게는 미디어를 통한 라이브니스가 공연자와 관객의 퍼포먼스의 시공간 공유 영역을 확장한다.32) 퍼포먼스가 실제 수행된 시간과 관객에게 재생·전달되는 시간이 일치하지 않거나, 공연자와 관객이 각기 점유하는 공간이 다르다 하더라도 관객의 현존은 그 순간 소비되는 퍼포먼스를 라이브화하는 것이다. 라이브니스의 또 다른 기표는 퍼포먼스 서사의 변주를 만들어내는 우연성33)이다. 연극공연의 역사에서 우연성이 텍스트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의미를 생성한다는 것이 본격적으로 인정된 것은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서 활발하게 진행된 네오아방가르드 운동에서부터다. 작가와 텍스트 중심의 전통적 연극에서 수행성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한 퍼포먼스 이론의 창시자 셰크너(Richard Schechner)가 주창한 환경연극(Environmental Theatre)은 관객의 개입을 공연의 일부로 수용했고, 1959년 뉴욕 루벤 갤러리(Reuben Gallery)에서 캐프로(Allan Kaprow)의 퍼포먼스 이후 1950년대와 60년대를 풍미했던 해프닝(Happenings)은 퍼포먼스 진행의 우연성과 임의성을 강조하면서 관객과 소통했다. 관객의 개입으로 서사가 무작위로 변형되어 진행되는 몰입형 공연은 필연적으로 일회성을 가지는데, 이는 특히 디지털 환경에서 신체적 공동현존이 부재한 상황에서도 라이브니스를 승인케 하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라이브니스는 상호작용성으로 확인이 되고 상호작용성은 라이브니스로 가능한 공생적 관계다.
라이브니스의 이 두 가지 기표 모두 핵심은 몸이다. 퍼포먼스에서 가장 일차적인 미디어는 공연자의 몸이고, 라이브니스를 결정하고 확인하는 것은 관객의 몸이다. 포스트드라마에서 몸이 물성을 지닌 유기체로 존재했다면 디지털 퍼포먼스에서는 몸을 둘러싼 퍼포먼스 역학이 한층 더 복잡하다. 홀로그램, 가상 이미지, 디지털 아바타 등을 통해 공연자뿐 아니라 관객의 몸이 실제의 공간과 가상의 공간에서 분리되어 이중으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연자와 관객의 몸이 일대일로 반응하던 전통적 역학과 달리 디지털 맥락에서 두 몸의 역학관계의 종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앞 장의 사례에서 보듯 디지털 퍼포먼스는 라이브/디지털 공간에서 라이브/디지털 공연자와 관객의 역할이 얽히는 복잡한 역학을 생성하는데 이때 라이브성과 디지털성을 조율하는 미디어가 몸이다. 딕슨은 데카르트 이후로 서구문화에서 이원론적으로 정신의 지배를 받던 몸이 20세기 중후반 그 위계를 전복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데카르트의 이분법 논리에 갇혀 있다고 관찰한다. 스트래턴(Jon Stratton)이나 윌슨(Peter Lamborn Wilson), 스톤(Allucquere Rosanne Stone)은 디지털 시대에 사이버 공간에서의 탈육체화(disembodiment)는 자아가 몸을 떠나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을 강화하고 결국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확장시킨다고 주장하지만, 딕슨은 디지털이 퍼포먼스에 적용될 때는 위 비평가들의 주장과는 반대의 역학이 발생한다고 본다.34) 딕슨은 퍼포먼스를 하는 가상의 몸이 육체의 몸에 비해 ‘덜 진짜’이거나 탈육체화된 것이 아니라 선언하고 디지털, 가상의 몸에서 실재성을 읽어내고 주체성을 강조하는 한편, 물리적인 몸을 강조한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은 오히려 데카르트 전통으로 회귀한다고 비판한다. 포스트드라마가 텍스트 속 캐릭터로서가 아닌 현존하는 무대 위 몸으로써의 배우의 몸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한다면, 관객 몰입형 공연에서는 관객 몸의 물리적 위치 및 무대와의 접근성 등이 의미 생성에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가진다. 디지털 퍼포먼스에서 디지털 몸과 물성의 몸은 각각의 한계를 인식하며 디지털과 라이브라는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조율해간다.
디지털 퍼포먼스에서 공연자와 관객의 몸이 서로 다른 논리로 운영되는 두 세계를 조율하는 과정은 볼터(J. David Bolter)와 그루신(Richard A. Grusin)의 재매개(remediation)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35) 이들의 이론에서 재매개란 특정 미디어가 이전 미디어의 형태와 내용을 차용하고 재해석 및 재구성하면서 조율하는 과정이고, 이때 새로운 미디어는 이전 미디어를 위협하기도 하고 보존하기도 하는 역동적인 과정을 거치며 끊임없이 진화한다. 따라서 뉴미디어는 독립적으로 발생한다기보다 이전 미디어를 재목적화(repurposing)하는 과정에서 발전한다. 볼터와 그루신은 미디어가 관객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미디어 경험의 투명성 또는 가시성에 기반한 ‘즉각성’(immediacy)과 ‘하이퍼미디어시’(hypermediacy)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들에 따르면 즉각성은 미디어를 지워버려 관객이 미디어를 인식하지 않고 콘텐츠를 직접 경험하게 한다. 이와 반대로 하이퍼미디어시는 미디어의 가시성을 전제로 운영되고 관객은 다층의 팝업, 비디오 클립 삽입, 스크롤 텍스트 등 다층으로 작동하는 미디어의 존재와 그 작동 과정을 인식한다. 앞서 살펴봤듯이 디지털 퍼포먼스는 고정된 정의는 없지만 전통적인 연극 미디어에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융합하여 변형, 재구성의 재매개 과정을 거친 뉴미디어 장르라는 합의점은 있다. 다양한 미디어의 개입을 강조하는 하이퍼미디어시와 달리 즉각성은 미디어의 가시성을 지우고 비매개적인 경험을 생성하는 지향점을 가지는데, 디지털 퍼포먼스는 재매개 과정에서 즉각성과 하이퍼매개성을 모두 구현한다. 2000년대 디지털 퍼포먼스는 테크놀로지에 과몰입한다는 비판이 상당했던 만큼 비디오 프로젝션, 스크린, 인터랙티브 장치 등 디지털 미디어와 매개 과정의 가시성을 극대화하는 하이퍼미디어시를 생성했다. 그런데 최근 가상현실과 메타버스 쪽으로 플랫폼이 확장되면서 디지털 인터페이스를 보이지 않게 하여 관객을 디지털 공간 경험에 몰입시키려는 즉각성이 강조되고 있다. 가상현실의 경험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메타 퀘스트, HTC 바이브 플로 등의 가시적인 하드웨어 장비와 소프트웨어를 통해서 가능하지만, 가상현실과 메타버스의 ‘특이점’(singularity)은 가시적 장비가 없어도 몰입 경험이 가능한, 실재와 가상이 완벽하게 합을 이루어 현실과 가상의 차이가 모호해지는 지점을 지향한다.
관객의 참여가 라이브니스를 재생산하고 유지하는 몰입형 공연에서 퍼포먼스를 하는 몸은 여느 미디어처럼 매개되고 재매개된다.36) 디지털이 결합되면 실제의 몸과 디지털 몸이 즉각성과 하이퍼매개성을 수행하며 그 상호작용성을 토대로 라이브니스를 창출한다. 라이브니스를 둘러싼 미디어의 딜레마를 디지털 수단과 몸을 통해 조율한 대표적인 시도가 라이브 공연과 디지털 네트워크를 결합한 텔레마틱 퍼포먼스다. 텔레마틱 퍼포먼스는 디지털 몸의 실재성, 물성의 몸의 가상성, 디지털 현존, 원격현전(telepresence)의 의미를 화두로 던지고 무엇보다 몰입형 퍼포먼스에서의 관객 주체성에 대한 고민을 전면에 부각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자기지시적이고 재귀적인 디지털 몰입형 퍼포먼스다.37)
대체로 텔레마틱 퍼포먼스는 물리적으로 분리된 공간에서 비디오 콘퍼런스나 라이브 스트리밍 등의 텔레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를 통해 공연자들의 공동현존을 시도하며 관객 참여의 몰입형 경험을 유도한다. 가장 혁명적인 예시의 하나로 꼽히는 서먼(Paul Sermon)의 「텔레마틱 드리밍」(Telematic Dreaming)38)은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도구적 기능을38)넘어 장르의 존재론적인 정체성을 매개할 수 있을지, 디지털 몸과 물성 몸의 공존, 그리고 원격현전에 대한 고민을 전면에 부각한다. 물리적으로 동떨어진 두 개의 방에 각각 놓인 침대에 아티스트인 서먼과 관객(공연자)이 위치한다.39) 양쪽 공간의 상황은 서로에게 실시간 녹화 송출되고 두 공연자는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부재하는 상대의 몸의 이미지와 교감한다. 서먼은 전시장과 분리된 공간에서 오디오와 모니터를 통해 자신의 몸을 조정하여 관객과 접촉하고 관객 공연자는 전시장 침대에 누워 침대에 투사된 서먼의 디지털 이미지와 접촉한다. 이 과정에서 물성의 자아(또는 자신의 몸)와 가상의 타자 몸이 원격현전하고 서로를 조율하며 소통을 모사한다. 또 다른 대표적인 텔레마틱 퍼포먼스인 오스트레일리아 예술가 스텔락(Stelarc)의 「핑보디」(Ping Body)는 관객 공연자의 테크놀로지 수행이 공연자의 몸을 좀 더 직접적으로 통제한다.40) 관객 공연자가 컴퓨터를 사용하면 인터넷 활동 거리와 밀도 수준을 나타내는 “핑값”에 맞춘 볼트가 생성되어 아티스트인 스텔락의 몸 근육의 움직임을 활성화하는, 다시 말해 집단의 인터넷 활동이 배우 몸의 움직임을 디자인하는 퍼포먼스다.
몰입형 경험은 이를 경험하는 관객 공연자의 주체성을 강조한다. 개인의 퍼포먼스 개입이 장르의 존재론적 기표인 라이브니스를 단정짓는다는 점에서 몰입 경험의 힘은 상당히 강력하게 인지된다. 집단 경험일 때 특히 그러하다. 볼터와 그루신은 디지털 공간 내의 자아의 주체성을 시선의 역학으로 설명한다. 관객 공연자는 컴퓨터 공간에서 마우스·키보드·조이스틱 등을 통해 자신의 시선을 운영하면서 가상공간을 점유하고 탐험하는 이동성을 획득하고, 이는 디지털 공간 내에서의 주체성과 이어진다. 볼터와 그루신은 이동성으로 추진된 탐험이 서구 역사에서 오랫동안 식민지 착취와 오리엔탈리즘을 강화해온 것을 인정하고 디지털 영상 미디어 안에서 시선의 역학에 기반한 이동성 역시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포스트모더니스트나 포스트제국주의자들의 우려도 어느 정도 긍정하지만, 그럼에도 시선의 이동성이 다각도의 관점에 이입할 여지를 주고 이는 결국 공동체 의식과 사회적 유대감 형성의 잠재성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볼터와 그루신은 브리큰(Meredith Bricken)을 인용하면서 가상현실 내 유연한 시선 이입이 다른 구성원들을 이해하는 근간이 되고 결국 민주사회 시민의 윤리를 함양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41) 볼터와 그루신의 관찰은 후에 몰입형 경험의 사회적 책임의식 부재를 비판하고 “포스트 몰입형 경험”을 주창한 ZU-UK의 비전의 초석이 된다.42) 몰입형 경험이 생성하는 공감과 이입의 역학은 궁극적으로 디지털 정체성의 정치적 힘을 승인한다는 점에서 몰입을 통해 형성된 관객의 주체성을 극한으로 인정한다고 할 수 있다. 볼터와 그루신의 개념에 기대면 텔레마틱 퍼포먼스가 공연자·관객 공연자·관객 등 다양한 층위의 주체를 형성하고, 몰입형 경험의 개인적 파편화를 방지하며, 유대감을 형성하는 동시에 나아가 정치적 동력의 가능성을 마련하는 잠재력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디지털 몰입형 퍼포먼스에서는 환경, 콘텐츠, 상호작용 규칙이 사전 설계되기에 관객 참여자의 통제권이 원천적으로 제한된다. 특히 전체 기획자로서의 공연자(아티스트), 퍼포먼스에 참여하는 관객 공연자, 퍼포먼스를 관람하는 관객이 주체와 객체로 의미생성 과정에 참여하는 텔레마틱 퍼포먼스에서 주체성의 문제는 한층 더 다층적이고 복합적이다. 텔레마틱 퍼포먼스에서는 퍼포먼스 공간 내에 존재하는 물성의 몸이 시선의 이입, 나아가 주체성의 확인을 유도한다. 전시장의 관객은 디지털 이미지로 구현된 아티스트와 물리적 신체로 퍼포먼스하는 관객 공연자 중 후자의 주체성을 더 쉽게 인식한다. 물론 이때 감지되는 관객 공연자의 주체성은 궁극적인 것이 아니다. 텔레마틱 퍼포먼스에서는 관객의 참여가 전시의 일부로 통합되기에 관객 공연자의 수행은 일시적으로 승인된 그들의 주체성을 더욱 지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텔레마틱 드리밍」에서 전시장의 실제 공간은 아티스트가 아니라 관객 공연자가 현존하는 공간이므로, 공연의 주체성은 언뜻 전시장의 실재성을 체현하는 관객 공연자에게 이양되는 듯하다. 「핑보디」 역시 관객 공연자가 아티스트의 몸을 통제하고 조종하기에 어느 정도의 주체성이 실현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텔레마틱 드리밍」에서 장비를 설치하고 프로그램을 준비한 것은 아티스트 서먼이었고 관객 공연자는 궁극적으로 전시 오브제의 일부로써 관객의 시선의 대상이 된다. 같은 맥락으로 「핑보디」에서 최종적인 주체가 퍼포먼스를 설계한 아티스트인지, 오브제로써 아티스트의 움직임을 창출한 관객 공연자인지, 아니면 몸의 움직임을 체현하는 아티스트인지에 대한 명확한 주체성의 귀속 문제가 제기된다. 관객의 층위가 퍼포먼스에 참여하는 관객 공연자와 퍼포먼스 밖의 순수 관객으로 나뉘면 관객 공연자의 물성의 몸은 그 자신에게는 ‘즉각성’의 경험을 이끌어내지만, 그 층위 밖의 관객에게는 ‘하이퍼매개성’으로 기능하는 오브제가 되기에 텔레마틱 퍼포먼스는 관객이 디지털 몰입형 퍼포먼스의 의미를 창출하는 데 과연 디지털 아바타 이상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 관객 공연자의 주체성에 대한 메타퍼포먼스적인 자각적 고찰을 수행한다.
20세기 말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디지털 퍼포먼스가 가히 혁명적인 방식으로 다양하게 시도되었다. 디지털 몰입형 퍼포먼스에서 또 한 번의 획기적인 패러다임 전환기는 어떠한 형태로든 생성형 인공지능을 경유할 듯 보인다. (딕슨이 이야기하는 디지털 퍼포먼스의 전신으로서 아방가르드 퍼포먼스를 제외하고) 1세대 디지털 퍼포먼스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여전히 도구적 쓰임에 머물렀다면 2022년 여름 챗GPT의 발표와 함께 생성형 인공지능이 예술 창작의 세계에 깊숙이 들어오게 된다. 그림, 음악, 디자인 등 예술 창작의 다양한 영역에서 콘텐츠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해체되었고 창작 영역에서 소비자의 진입장벽이 낮아지고 있다. 인공지능의 활용은 댄스 분야에서 활발한데, 이 분야는 특히나 소비자가 공연 관객이자 창조자가 될 수 있는 밀접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 몸의 움직임을 산출하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안무 도구로 활용하거나 디지털 아바타를 무대 위에 구현하여 파트너로 협업하는 등 인공지능과 댄스 분야의 접점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43) 디지털 퍼포먼스에서 테크놀로지는 한편으로는 관객의 참여를 용이하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가상현실 내에서 관객의 반응을 조정하는 양면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 이중성은 댄스 분야에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윙겐로스(Lauren Wingenroth)는 인공지능 활용을 둘러싼 댄스계의 양가적인 기류를 포착한다. 윙겐로스에 따르면 인공지능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과 무대에서 춤을 추는 쿠안(Catie Cuan)이나 작품 「AI-AM」(AI-AM)에서 인공지능으로 훈련된 컴퓨터의 디지털 아바타와 즉흥적으로 춤을 추는 제임스(Valencia James) 등은 인공지능과 상호작용에 매우 적극적이다. 제임스는 인간 몸의 물리적 제약을 초월하는 인공지능의 움직임을 고무적으로 받아들이고, 쿠안은 인공지능이 안무가들에게 공간 오디오 안무, 메타버스 안무 등 새로운 직업을 창출해줄 거라 믿지만 다른 많은 이는 인공지능의 진입에 거부감을 보인다. 윙겐로스에 따르면 롱스트레스(Katherine Longstreth)는 작품 「더 라스트 댄스 픽처 쇼」(The Last Dance Picture Show)에서 인공지능이 퍼포먼스 예술가들의 신체 데이터를 잠식하고 예술가들의 창의성마저 앗아갈 가능성에 우려 섞인 경고를 보내고, 스카이베터(Sydney Skybetter)와 로손(Laurel Lawson) 역시 일부 테크 기업들이 동의나 크레딧 등의 보상 없이 온라인 비디오에서 움직임 데이터를 수집하며 이들을 착취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현재 일반 사용자들이 사진을 제공하면 안무 템플릿을 이용하여 디지털 아바타의 퍼포먼스 동영상을 생성하는 툴은 상용화되어 있고 스탠퍼드대학의 HAI(Human-Centered ArtificialIntelligence)를 위시한 많은 기관이 인간 몸의 가능한 움직임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사용자가 안무를 짜는 프로그램을 개발 중이다. 작가의 권력을 전복시킨 포스트드라마에서도, 관객의 몰입을 적극 장려했던 디지털 몰입형 퍼포먼스에서도 창작의 영역이 관객에게 넘어오지는 않았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창조의 권한을 관객 소비자에게 이양한다면 관객의 주체성이 내포하고 있는 정치적 역학에 또 한 번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
IV. 디지털 몰입형 퍼포먼스의 사회적 가치와 전망
팬데믹 시기를 거치면서 디지털 퍼포먼스의 사회적 기능이 재조명받고 있다. 거리두기 정책으로 디지털 극장이 활성화하자 그동안 극장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던 관객이 수혜를 입게 된 것이다. 미섹은 팬데믹 기간에 (비장애인) 영국인들의 35퍼센트가 온라인 문화생활을 하는 동안 장애인 영국인의 57퍼센트가 온라인 문화생활을 했고44) 2020년 4대륙 16개국 관객이 오페라 노스(Opera North)의 라이브 스트리밍 「피델리오」(Fidelio)를 즐겼음에 주목하며 디지털 극장이 극장 접근성과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최근 많은 국가의 정부 산하 문화 관련 조직 또는 공적 기금으로 운영되는 비영리 예술기관들은 디지털 극장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큰 공공자금 극장 네트워크인 ETC(European TheatreConvention)는 유럽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의 크리에이티브 유럽 프로그램(Creative Europe Programme)의 자금 지원을 받아 운영되며, 유럽 전역의 극장들이 민주주의 가치 발전을 위한 상호작용은 물론 시대의 변화에 맞춘 성장을 꾀하기 위한 목표를 가진다. 특히 ETC의 호손은 디지털 퍼포먼스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이 장르를 지원하기 위해 2019년부터 2022년까지 17개 유럽 국가의 19개 디지털 극단과 디지털 전략을 분석하여 디지털 극장의 모델을 제시한 『디지털 극장: 유럽 극장의 전략과 비즈니스 모델』(Digital Theatre: Strategies and BusinessModels in European Theatre)을 발간했다.45) 창의적인 예술 진흥을 위해 오스트레일리아 정부 산하 조직으로 만들어진 오스트레일리아 예술위원회인 크리에이티브 오스트레일리아(CreativeAustralia) 역시 2023년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공연으로 관객 유치를 꾀하는 극단과 배우들을 위하여 디지털 극장을 연구 분석했다. 문화예술 정책 관련자들에게 디지털 극장은 경제적·지리적·신체적 제약으로 문화예술 향유 기회에서 소외되었던 관객들에게 다가가는 사회적 책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전망이 분명 존재하고 위의 두 분석 모두 공연계의 미래를 디지털 미디어에서 찾는다.
그러나 디지털 극장을 둘러싼 공공기관과 극단의 입장은 분명 온도차이가 있어 보인다. 유럽의 한 극단은 디지털 퍼포먼스는 정부가 규정한 목표일 뿐 자신들은 이를 우선으로 추진할 의도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했다.46) 비교적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는 공공기관과 달리 상업 극단은 단기적인 경영 실적에 민감한 전략으로 운영되기에 디지털 미디어에 대한 극단의 망설임은 재정문제와 같은 현실적인 상황에서 비롯한다. 호손에 따르면 2019년과 2020년에는 33퍼센트의 극장이, 그리고 2021년에는 급격히 증가한 수치인 50퍼센트의 극장이 기술에의 접근을 장벽으로 꼽았는데 이는 점차 고급화된 기술을 원하는 소비자들의 요구가 반영된 수치다.47) 호손은 기술에의 접근이 결국 제작비용 문제와 직결된다고 보고 33퍼센트의 극장이 재정문제를 호소한 것을 중요한 신호로 파악한다.48) 팬데믹 때 정부가 제공하던 보조금이 끊기자(영국의 경우 15억 7천만 파운드의 문화회복기금)49) 테크놀로지가 핵심인 디지털 공연은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고 테크놀로지의 질 저하는 당연히 관객의 외면을 야기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의 공적 지원금이 끊기거나 극적으로 감소한 포스트팬데믹 시기에 디지털 공연의 발전과 지속을 위해서는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개발하고 이용할 수 있는 비용 및 극단의 수입 창출 모델 확보가 가장 시급한 과제다.
미섹은 수입 창출의 해결안을 디지털 미디어를 활용한 몰입형 퍼포먼스에서 찾지만 해당 장르의 경제적 잠재력이 오히려 궁극적으로 자원의 불공정한 분배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예를 들어 영국 예술 및 인문학 연구기금 제공 기관인 영국 연구혁신청(UKRI)과 예술 및 인문학 연구위원회(AHRC)는 최근 3930만 파운드 규모의 프로젝트를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RSC)과 아르드만 애니메이션(Aardman Animation) 등에 지원했다.50) 또한 내셔널 시어터, RSC, 로열 오페라(Royal Opera) 같은 엘리트 기관들이 일차적으로 지원금을 수혜받았는데, 문제는 이들이 그 후 몰입형 기술에 상당한 자원을 투자해 전문 센터가 된 뒤 다시 추가적인 디지털 혁신 자금을 확보하는 데 유리한 고점을 차지하는 공고한 카르텔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51) 영국정부가 지원금을 책정하는 데 팬데믹 초기 강조했던 “접근성, 포용성, 다양성, 사회가치와 공동체 교류”52) 등 가치에 기반한 기준을 완전히 배제했다는 사실 역시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수익성에 기반한 경제적 논리는 콘텐츠 재분배 과정에서 소외 현상을 가속화할 수 있다. 디지털 공간을 경유한 몰입형 경험은 좀 더 많은 관객을 끌어들여 수입을 창출할 수 있는 매력적인 창구이지만 VR, AR, XR 경험을 위한 고글, 스마트 안경, 헤드셋, 베이스 스테이션 등의 값비싼 장비를 구비할 수 있는 계층은 제한적이다. 배리어프리(barrier-free) 문제도 발생한다. 미섹은 팬데믹 초기인 2020년과 2021년에는 온라인 아카이빙과 배급을 촉진한 디지털 극장이 소외된 계층의 접근성을 늘리며 민주사회를 위한 책무를 수행했지만, 2022년 이후 디지털 경험이 가상 및 증강현실의 고급 기술로 전환되면서 소외계층이 늘어났다고 지적한다. 15분 경험에 20파운드를 지불해야 하는 「커런트, 라이징」(Current, Rising) 공연이 예시하듯 정교한 몰입형 퍼포먼스는 티켓값이 비쌀뿐더러 대부분의 VR, AR, XR 스마트 글래스 등의 장비는 자막을 제공하지 않기에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의 접근성을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53)
디지털 몰입형 경험이 소비재로 거래되는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몰입 경험의 윤리적 문제에 대한 우려도 발생한다. 동시대 디지털 몰입형 공연을 선도하고 있는 런던 기반 ZU-UK의 창립자 라모스(Jorge Lopes Ramos), 예술감독 마라발라(Persis Jade Maravala), 하우리(Joseph Dunne-Howrie)와 사이먼(Bart Simon)(이하 라모스)는 지난 10여 년간 연극 및 예술 산업을 넘어 확산하고 있는 몰입형 퍼포먼스를 신자유주의 시대 ‘공연의 경험’이라는 교묘한 위장술로 둔갑한 마케팅 전략 및 소비 형태라며 강도 높게 비판한다. 경제적 이익이 최종 목적이기에 사람들이 상업적 거래를 통해 사회 참여를 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몰입형 공연이 경제적 불평등과 관련된 문제와 불안감을 그대로 재생산한다는 것이다.54) 라모스는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대기업들이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 그들의 작업을 이용하기에 예술의 방향성이 수익에 민감한 시장논리에 휘둘릴 수 있음을 지적하고 상업적 요구에 함몰된 예술이 문화적 논의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지 못하게 될 것을 우려한다. 라모스에게 대부분의 몰입형 경험은 실제로는 관객을 소외시키고 민주적 참여에의 환상을 호도하는 상업적 거래물에 불과하다. 특히 가상현실로의 ‘몰입’은 현실에서 유리된 채 사회관계 속 자신을 잊게 하는 위험한 것이다. 신자유주의에서 개인이 공동체 안에서의 유기적인 존재로 인식되기보다 시장 안에서 분절된, 그러므로 대체 가능한 소모품으로 기능하듯 가상현실에서 관객 유저는 사회 공동체에서 유리된 채 개별 정체성으로 함몰된다. 이에 라모스는 몰입형 경험이 지지하는 주체성을 “신화”55)라 결론짓고 “포스트 몰입형 선언문”을 천명한다. 라모스가 주창하는 “포스트 몰입형” 경험의 핵심은 VR 기계를 착용하는 순간 가상현실에 함몰되어 현실과 사회 속 관계에서 단절된 자아로 존재하는 ‘몰입형 경험’56)과 달리 경험에 함께 참여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아와 정체성을 기억하는 사회적 책임의 연대 수행이다.57) 따라서 바람직한 디지털 몰입형 경험의 핵심은 공동체적인 가치 구현이다.58)
종합해보면 동시대 디지털 퍼포먼스는 빠르게 발전하는 테크놀로지의 수용 및 유지를 위해 비용을 확보해야 할 뿐 아니라 관객의 물리적·경제적 접근성을 적극적으로 도모하는 동시에 라이브니스로 표현되는 극장의 ‘전통적 정체성’을 지켜내야 할 쉽지 않은 당면 과제를 가진다. 디지털 몰입형 퍼포먼스는 뉴미디어 라이브니스를 생성하여 장르의 정체성을 지키며 관객을 끌어들이는 매력적인 안이지만 미섹과 라모스가 주목하듯 경제적 장벽이 야기할 수 있는 관객 소외라는 딜레마도 수반한다. 따라서 디지털 몰입형 경험이 승인하는 관객의 주체성이 과연 얼마나 자율적인 것인지,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미 소비재가 되어버린 몰입형 경험의 사회적 책무를 어떻게 조율할지에 대한 고민 역시 지속된다.
V. 나가며
최근 디지털 퍼포먼스의 사례 분석과 전망에 대한 논의는 당연하게도 장르의 폭발적 증가와 확산을 야기한 팬데믹의 특수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거리두기가 규범이었던 팬데믹 기간은 역설적으로 코비드 이전에 문화예술 활동에서 지리적 또는 경제적으로 소외되었던 관객들에게 문화활동의 기회를 제공했다. 특히 많은 국가 정부들이 공공기금 지원 등을 통해 온라인 극장을 장려한 만큼 이때의 디지털 퍼포먼스는 일종의 공공재와 같은 역할을 했다. 하지만 록다운과 보조금 같은 규제의 시기가 끝난 지금 디지털 퍼포먼스의 미래는 또다시 철저한 자본주의 논리에 기댄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사회 내에서 몰입형 경험의 상품화를 강도 높게 비판한 라모스의 주장은 디지털 퍼포먼스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윤리적인 시사점을 더한다.
요약하건데 디지털 뉴미디어를 경유한 몰입형 퍼포먼스의 핵심은 관객의 주체성이다. 디지털 공간에서 관객은 아바타 또는 VR 고글을 통해 무대에 공존하며 전통적 의미의 수동적 관찰자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관객의 주체성은 여전히 작가와 텍스트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제한적이다. VR 퍼포먼스든 증강현실 게임이든 서사를 창조한 작가는 초월적인 차원에서 존재한다. 가상현실과 현실의 공존과 관객의 몰입형 경험이 고도의 기술과 비용을 전제한 장비 없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치명적인 제약이다. 몰입형 퍼포먼스가 강조하는 관객의 주체성이 미섹이 주장하듯 해방구가 될 수 있을지, 아니면 라모스가 주장하듯 마케팅 술수의 환상인지 이 두 가지 갈린 평이 접점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다만 2022년 챗GPT 공개 이후 빅테크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출시하고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소비자 주체성의 지평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예측은 가능하다. 기존의 로봇이 인간의 육체적 노동을 대체한다면 두뇌 노동을 대신하여 대중의 고급 정보로의 진입장벽을 현저히 낮춘 생성형 인공지능은 그 수혜 계급을 확대한다. 그동안의 디지털 몰입형 퍼포먼스가 생산자에 의해 기획·설계되어 관객 주체성의 경제적·민주적 가능성에 의문의 여지를 남겼다면, 생성형 인공지능을 경유할 차세대 디지털 몰입형 퍼포먼스는 창조의 영역에 진입한 소비자 주체성에 조금은 다른 기대감을 만들어낼 듯하다.
1) 인공지능 시대 퍼포먼스의 플랫폼은 디지털 공간을 이용하는 뉴미디어로 옮겨지고 있다. 먼저 짚어볼 것은 뉴미디어의 정의다. 새롭다는 개념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뉴미디어는 고정된 실체를 뜻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1877년 축음기, 1907년 라디오, 1927년 텔레비전 등 이미 한 세기도 더 전에 발명된 이 매체들은 지금은 구시대의 유물일지언정 당시에는 뉴미디어였다. 음반의 경우 바이닐 레코드, 카세트테이프, CD를 거쳐 디지털 음원의 형태로 음악의 미디어가 변화하고 있다. 다시 말해 뉴미디어는 계속해서 진화하는 불안정한 개념이라 하겠다. 동시대 뉴미디어는 가상현실, 증강현실, 소셜미디어 등을 아우르는 디지털 텍스트를 매개하며 디지털 공간을 경유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 글에서는 디지털 플랫폼에 집중하겠다.
2) Bill Blake, Theatre and the Digital (Houndmills: MacMillan International, 2014) 4면.
3) 같은 책 viii면.
4) Steve Dixon, Digital Performance: A History of New Media in Theater, Dance, Performance Art, and Installation (Cambridge: MIT P, 2007) 3면.
5) David Z. Saltz, “Performing Arts,” A Companion to Digital Humanities, ed. Suan Schreibman et al. (Oxford: Blackwell P, 2004) 121면.
6) 딕슨의 경우 디지털 퍼포먼스의 전신을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운동, 특히 미래주의에서 찾지만 이 글에서는 동시대에서 직관적으로 디지털 퍼포먼스로 분류되는 뉴밀레니엄 전후의 퍼포먼스에 집중하겠다.
7) 같은 글 123면.
8) 같은 글 126면.
9) Dixon, 앞의 책 2면.
10) Saltz, 앞의 글 128면.
11) 이 단락의 네 가지 분류는 살츠와 딕슨이 각자의 논의에서 주목한 당대 대표적인 퍼포먼스들에 텔레마틱 퍼포먼스를 더해 필자가 재정리한 것이다.
12) Dixon, 앞의 책 6면에서 재인용.
13) 같은 책 같은 면.
14) Saltz, 앞의 글 124면.
15) 미섹은 디지털 활동(activities), 공연(performance), 시어터(theatre) 용어를 혼용
한다.
16) Richard Misek, “The Present and Future of Digital Theatre,” Adaptation and Resilience in the Performing Arts: The Pandemic and Beyond, ed. Pascale Aebischer and Rachael Nicholas (Manchester: Manchester UP, 2024) 24면.
17) 같은 글 같은 면.
18) 같은 글 30면.
19) Avra Sidiropoulou, “Permission/Seduction/Indulgence: Integrating Digital Media in the Theatre-Making Process,” SKENE Journal of Theatre and Drama Studies 7.1 (2021) 41~59면.
20) 같은 책 56면.
21) Katie Hawthorne, Digital Theatre: Strategies and Business Models in European Theatre (ETC European Theatre Convention, 2023) 40면. 퍼포먼스 이론에서 ‘라이브니스’는 녹화되거나 미디어화된 공연 경험과 퍼포먼스를 구별하는 핵심 개념으로 이해되거나 반박되어왔다. 펠런(Peggy Phelan)과 같이 ‘전통적’ 개념의 공연을 옹호하며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비평가에게 퍼포먼스는 즉각성(immediacy)이나 자발성(spontaneity)이 공연자와 관객의 상호작용을 조율하며, 따라서 미디어화된 공연의 반복성과 퍼포먼스의 존재론적 정체성을 구분짓는다. 반면 펠런의 방어적인 입장에 정면으로 도전한 아우슬랜더(Philip Auslander) 같은 이들에게 라이브니스는 공연자와 관객의 물리적인 시공간의 공유를 뜻하는 한정된 개념이 아니라 미디어화된 시공간의 공유 역시 아우르는 확장된 개념이다.
22) 같은 책 45~46면.
23) 같은 책 38면.
24) 같은 책 같은 면.
25) Blake, 앞의 책 4면.
26) Creative Australia, The Digital Front Row: Understanding Online and Digital Theatre Audiences (2023). https://creative.gov.au/advocacy-and-research/the-digital-front-row-understanding-online-and-digital-theatre-audiences/.
27) Saltz, 앞의 글 121면.
28) 같은 글 같은 면. 팬데믹 기간 동안 디지털 극장에서 볼 수 있듯, 상호작용이 결여된 디지털 퍼포먼스는 기록된 전시를 넘어서는 의미를 갖지 못했다.
29) Adam Alston, Beyond Immersive Theatre: Aesthetics, Politics and Productive Participation (London: Palgrave Macmillan, 2016) 6면.
30) James Frieze, Reframing Immersive Theatre: The Politics and Pragmatics of Participatory Performance (London: Palgrave Macmillan, 2016) 3면.
31) Peggy Phelan, Unmarked: The Politics of Performance (London: Routledge, 1993) 146면.
32) 자세한 논의는 Philip Auslander, Liveness: Performance in a Mediatized Culture (London: Routledge, 1999) 참조하라. 라이브니스에 대한 설명은 주석 21 참조.
33) 우연성은 서사 발생의 자발성(spontaneity)과 무작위성(randomness)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34) Dixon, 앞의 책 214면.
35) J. David Bolter and Richard A. Grusin, Remediation: Understanding New Media (Cambridge: MIT P, 2000).
36) 볼터와 그루신은 가상현실의 사용자가 가상세계와 실제 세계 간의 차이를 끊임없이 의식하여 자신의 신체가 가상현실에서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자신의 시점을 조정해나가기 때문에 가상현실은 데카르트적 자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재매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같은 책 253~54면.
37) 텔레마틱 퍼포먼스의 성공은 실시간 비디오 피드(real-time video feeds)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비디오 송출 지연과 같은 기술적 문제가 민감하게 제기된다. 이러한 기술적 제약은 기술이 주체성을 제한하거나 단순화하면서 주체성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재조명한다.
38) Paul Sermon, Telematic Dreaming (1992). https://www.youtube.com/watch?v= S4Wt16PnqeY. 최종 접속 2024년 6월 10일.
39) 몰입형 경험을 통해 공연을 수행하는 관객을 순수하게 퍼포먼스를 관람하는 관객과 구분하여 관객 공연자로 칭하기로 한다.
40) Stelarc, Ping Body: An Internet Actuated & Uploaded Performance, Directed and Performed by Stelarc (Sep. 17-29, 1996), Dutch Electronic Art Festival 96, Rotterdam.
41) Bolter and Grusin, 앞의 책 245면.
42) 이어지는 장에서 논의 참조.
43) Lauren Wingenroth, “How are Dance Artists Using AI―;and What Could the Technology Mean for the Industry?” Dance Magazine (July 23, 2023). https://www.dancemagazine.com/how-dancers-use-ai/#gsc.tab=0.
44) Misek, 앞의 글 26면.
45) Hawthorne, 앞의 책 주석 19 참조. ‘디지털’은 사용하는 주체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 대체로 디지털 퍼포먼스를 라이브 스트리밍이나 사전녹화를 온라인으로 송출하는 온라인 극장과 차별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호손은 디지털 극장에 온라인 극장을 포함한다.
46) 같은 책 43면에서 재인용.
47) 같은 책 42면.
48) 같은 책 43면.
49) Misek, 앞의 글 31면.
50) 같은 글 32면.
51) 같은 글 37면.
52) 같은 글 32면.
53) 같은 글 35면.
54) Jorge Lopes Ramos, Joseph Dunne-Howrie, Persis Jade Maravala and Bart Simon, “The Post-immersive Manifesto,” International Journal of Performance Arts and Digital Media (2020) 1~16면.
55) 같은 글 14면.
56) 물론 완벽한 단절은 불가능하다. 라모스는 “몰입의 오류”(immersive fallacy)라는 개념을 들며, 유저들이 가상현실을 진정으로 경험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은 VR을 사용한다고 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는 논리와 같기 때문에 잘못되었고, 착용이 불편하여 그 존재가 실감각적으로 상기되는 VR 장비는 가상현실과 현실의 완전한 단절이 결코 가능하지 않음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같은 글 11면.
57) 같은 글 같은 면.
58) 라모스는 자신이 기획한 관객 몰입형 퍼포먼스 「호텔 메디아」(Hotel Medea)가 높은 인기로 고가의 암표가 거래되는 등 몰입형 퍼포먼스가 의도치 않게 배타적인 성향으로 소비되는 것에 경각심을 느끼고(같은 글 4면) 가상현실 경험이 진행되는 동안 관객이 현실과 유리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경험하는 이들과 공동체적인 경험으로 승화해야 함을 주장한다.
│김다산│
金茶山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강사. 최근 논문으로 「메타버스와 퍼포먼스: 가상과 실재 사이, 모사된 라이브니스」(202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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