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영
서론: 육후이 철학의 현재적 의의
육후이(Yuk Hui)에게 기술은 과학인 동시에 완연히 철학적인 성격을 가진다. 과학은 기술로 인해 발전해왔으며 기술은 과학으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는다.1) 철학적 측면에서 하이데거(M. Heidegger) 이래 존재론이 존재-물음에서 시작한다면, 그리고 그로부터 존재 이해가 달성된다면, 거기에는 그 존재를 드러내 밝히는 기술적 본성에 대한 고려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술 시스템을 고려하지 않고서 철학이 충분히 정초될 수는 없다.2)
그런데 현대의 기술 시스템은 예전과는 많은 점에서 다르다. 오늘날 기계들은 인간의 유기적 기능을 모방하는 단계를 지나 스스로 유기적인 것이 된다.3) 마르크스(K. Marx)가 『자본론』에서 기술한 ‘자동기계’는 21세기적인 자동성을 탑재하고 있지는 않았다. 현재의 자동성은 네트워크화한 유기적 피드백으로서 스마트시티, 인공지능, 나노 기술, 생명공학 등으로 불리운다. 18세기의 고전적 기계가 가진 파워-오프와 파워-온의 단순한 기능은 수십억 개의 알고리즘 분기 과정 안에 제각각 기입되어 나노미터 수준의 집적회로 안에 구현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초미시적 수준의 가동성(operation)이 거시적 수준의 정치경제학적 환경 안에 재기입되는 과정은 거의 빛의 속도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인간과 기계의 상호관계는 애초부터 분리 불가능한 ‘얽힘’(entanglement)4)이다.
육후이의 기술철학이 기반하고 있는 철학사적 기반은 매우 광범위하다. 그는 우선 하이데거의 ‘기술성’과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 테제를 그의 스승인 스티글러(B. Stigler)와 공유하면서, 시몽동(G. Simondon)의 2차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논의와 그것에 대한 들뢰즈(G. Deleuze)의 존재론적 계승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이외에도 육후이는 자신의 철학에 독일 관념론과 사이버네틱스 이론의 역사, 그리고 중국철학의 전통까지 흡수한다.
이 글에서는 육후이의 기술철학이 이러한 철학사조의 계승자일 뿐만 아니라 신유물론적 맥락에서 유의미한 지점이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를 위해 육후이의 철학을 ‘디지털 객체’ ‘사이버네틱스’ ‘코스모테크닉스’(cosmotechnics)라는 핵심 개념을 통해 살피고, 그 각각의 내용을 신유물론의 개념인 ‘물질의 능동성’ ‘얽힘과 관계’ ‘방행’ ‘강도와 개체화’ ‘존재-윤리-정치학’ ‘횡단성’과 연관하여 논한다. 이 논의는 정치철학적으로 확장되어 마지막 결론에서 요약되는데, 이때 ‘코스모폴리테크닉스’(cosmopolitechnics)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안할 것이다.
1. 기술 망각과 디지털 객체의 등장
(1) 기술 망각의 역사
육후이는 스티글러에게서 ‘기술 망각’이라는 개념을 가져온다. 이 개념은 하이데거의 ‘존재 망각’을 기술철학적으로 재전유한 것으로서 근대적 사유체계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기술 망각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육후이에 따르면 기술 망각은 철학이 산업혁명 이후 사회변화와 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흡수하는 데 실패한 데서 비롯된다. 철학은 “단순한 비판만으로 기술 외부에 서 있고,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와 사유의 순수성에 의존하는 철학자들의 생각은 테크놀로지 발전 과정의 흐름에서 퇴출되어”5)버린 것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적인 의미에서 근대성의 종언은 근대적인 기술적 무의식이 의식화됨으로써 완결될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이 세계 안에서 그것을 지배한다는 근대적 환상은 재고되어야 한다. “근대성의 종언은 이 환상의 재-인식”이며, “인간화를 조건 지은 것이 바로 기술이라는 인식”이 그 뒤를 따른다.6) 마찬가지로 기술 망각에 기반하여 성립된 서구 형이상학 또한 이 종언이 명확히 정립됨과 아울러 재정립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결과적으로 기술 시스템이 가진 자율성을 드러낸다.
기술적 구성이 정교화된다는 것은 근대인들에게는 문명으로의 환대인 동시에 기술적 무의식의 저수지를 더 깊게 파서 블랙박스를 더 깊고 어둡게 만든다는 의미다. 이제 인간은 자신의 기억・감정・업무 내용・전화번호 등 모든 것을 기술적 객체 안으로 외부화하며, 스스로 기꺼이 빈곤해진다. 문제는 그러한 외부화 과정에서 단계적으로 발생하는 버전업된 기계들이 우리의 신체적 경험과 동기화됨으로써 인지과정의 디폴트값이 되는 사태다. 여기서 기술 시스템은 정보기술의 발달과 궤를 같이한다. 즉 그것은 시공간적 거리를 단축시키고, 다양한 매체환경으로서 사물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등장을 촉진한다. 이는 전 지구적 기술과정으로서 전산과정의 보편화를 불러오며, 어느 지점을 넘어섰을 때 그 어떤 기술 분야에서든 강제적인 요건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기존의 자연이 모조리 인공적으로 변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지식체계 안에서 하나의 범주로서의 자연이 아주 다른 의미를 취했다는 것”7)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 것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맥루한(M. McLuhan)이 스푸트니크 호를 두고 지구행성을 위한 새로운 환경을 창조했고 새로운 생태학이 태어났다고 할 때의 그러한 변화다. 인류는 최초로 지구행성 전체를 시야에 담고, 그것을 전체상 안에서 감각하게 되었으며, ‘생태’(ecology)는 비로소 추상적 상태를 벗어난 개념이 된 것이다. 그것은 16세기 관념론자들의 시대에 진행 중이었고 사이버네틱스 시대에 완성되었다.8)
(2) 디지털 객체의 횡단성: 물질의 능동성
디지털 객체의 등장은 기술적 망각을 더욱 밀어붙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망각의 사실을 스캔들로 만듦으로써 극명하게 고지한다. 이러한 상황은 디지털 객체에 대한 육후이의 규정에서부터 나타난다. 육후이는 디지털 객체를 “컴퓨터 스크린 위에 모양을 갖춰 있거나, 프로그램의 후단부(back end)9)에 숨겨져 있는 객체”10)라고 정의한다. 이 객체는 “구조와 도식에 따라 규제되는 데이터와 메타데이터로 구성”되는데, 이때 메타데이터란 말 그대로 데이터에 대한 데이터다. 메타데이터는 도식에 따라 의미론적이고 기능적인 의미화를 실행하는 온톨로지들(ontologies)11)이다. 다시 말해 디지털 객체는 언제나 숨겨진 객체 또는 안주름잡힌(implicated) 객체이며, 그와 동시에 스크린 위에 밖주름잡힌(explicated), 즉 표현되는 객체다. 이 객체는 늘 표현되면서 함축된다. 이로써 디지털 객체는 의미화를 완수한다. 따라서 디지털 객체는 메타데이터가 심화됨에 따라(예컨대 하이퍼링크에서 시멘틱 웹으로, 또 객체-지향으로) 초지성적 능력(생성형 AI와 차세대 초지능 AI)을 예화함으로써 놀라움을 가져다준다. 마찬가지로 디지털 객체는 환경과의 상호작용 안에도 위치해야 한다. 이를 육후이는 (시몽동을 따라) ‘연합환경’이라고 부른다. 연합환경은 디지털 객체를 둘러싼 기술적, 더 나아가 사회적・정치적 환경으로서, 디지털 객체를 개체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여기서 ‘데이터’는 더 이상 컴퓨터 안에 갇힌 이진법 정보가 아니다. 그것은 이제 물질성을 가진 정보로서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복잡한 알고리즘을 따라 환경 안에서 자기-생성하는 개체다. 즉 이것은 신유물론적인 의미에서 ‘능동적 물질’이다. 신유물론에서 물질은 멈춰 서 있는 어떤 고대적 의미의 원자와 같은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변화・변환하는 속도 또는 강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정보 또한 고대적인 의미의 소박한 물질성으로도, 그러한 의미에서의 에너지로도 환원할 수 없다. “정보는 ‘차이를 만드는 차이’로서 가동적(operational)이며 자기-참조적(self-referential)이다.”12) 즉 어떤 정보로서의 신호-A는 신호-B를 촉발하고 이 가운데 실제적인 효과를 가동시킨다. 만약 우리가 컴퓨터 화면 위에서 물질화되는 질서 잡힌 인터페이스를 목도한다면, 그것은 동시에 이러한 신호들이 촉발하는 실제적인 효과인 것이다. 이것은 신호들 간의 일정한 알고리즘을 형성함으로써 노이즈를 걸러내고(A-[B]-C) 개체화한다(A-C). 이것은 무한히 계속될 수 있다(A-C-[D]-F-…). 이 가운데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화 작용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이 디지털 객체는 수직적인 관계성이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의 확장으로 정의 내려질 수 있으며, 이를 “횡단개체적 관계”13)라고 할 수 있다. 횡단개체적 관계는 디지털 객체뿐만 아니라 기술적 객체 전체로 확장되는 관계성이다. 그런데 디지털 객체의 횡단개체적 관계는 광범위하기 때문에 불안정하다.
이 불안정한 횡단개체성(transindividuality)은 자기-구성의 내향화와 환경과의 연합 구성을 도모하는 외향화를 끊임없이 가동시킨다. 전산처리의 측면에서 볼 때 논리와 수학은 ‘처리속도의 증가’이며, 그것이 거의 빛의 속도에 이르렀을 때 그 어떤 인간적 인지기관도 그것에 감응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디지털 객체의 일반화된 횡단개체적 사태’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디지털 객체는 우리 시대의 주도적인 물질성, 즉 신유물론적 의미에서의 물질성으로 자리잡는다.
따라서 우리는 육후이가 “인간은 항상 인공적이고 자연적인 객체들에 둘러싸인 잡종적 환경에서 살아왔다”14)라고 말할 때 그 ‘항상’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즉 기술적 객체는 인간의 ‘손안에’ 놓인 고분고분한 도구가 아니라(물론 이런 의미에서의 도구도 존재한다), 더욱더 구체화되어 확장하는 기술적 환경이며, 물질화하는 물질(mattering matter)이다.
(3) 관계의 물질성: 얽힘과 관계적 존재론
이러한 사태는 연합환경 안에서 인간의 지위가 지식의 측면에서 축소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과 함께 간다. 하지만 디지털 객체들은 그것을 변형하고 창조하는 인간적 활동 없이는 제 기능을 할 수 없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디지털 객체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기술적 객체도 인간 자신의 실존과 경험에 관련된다. 그렇다고 해도 이는 어떤 새로운 인간중심주의를 건립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디지털 객체 전체 네트워크의 지절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사실에 더 부합한다. 그 지절 안에서 인간은 ‘지능’과 ‘신체’로 연접한다. 문제는 인간과 기계가 어떻게 결합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상호 가동되는가 하는 것이다. 소셜네트워크나 챗GPT(ChatGPT)와 같은 전산과정의 물질화 안에서 인간과 비인간은 하드웨어적인 측면뿐 아니라 지능의 측면에서도 서로 얽혀 있다. 기능적으로 이 둘은 정보 제공자와 수용자의 자리를 끊임없이 바꾸면서 과정을 신뢰할 만한 것으로 만든다. 요컨대 디지털 객체와 현실적 객체는 구분 불가능하게 얽혀 있다. 이때 객체들은 고립된 실체가 아니라 시몽동이 말한바, ‘관계적 앙상블’(ensemble of relations) 내에서만 존속할 수 있다.15) 이러한 얽힘(entanglement)의 관계성이야말로 바라드(K. Barad)가 말한 그러한 물질의 본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바라드는 물질을 ‘현상’이라 부르고, “현상들은 존재론적 얽힘들”16)이라고 말한다.
이런 측면에서 “디지털 환경 안에 공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관계만이 있다”17)라는 언급이 가능하다. 이는 또한 바라드의 “관계항 없는 관계”(relation without relata)라는 공식과 일치한다. “현상은 존재론적으로 원초적인 관계, 즉 선재하는 관계항 없는 관계다.”18) 관계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관계항으로부터 이차적으로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항의 상호 존재론적 의존성, 즉 관계가 존재론적인 기초다. 관계항은 특정한 내적 작용의 결과로 현상 내부에만 존재한다. 다시 말해 독립적인 관계항은 존재하지 않고 관계-내부-관계항만 존재한다. 따라서 바라드의 신유물론적 존재론은 ‘관계적 존재론’이다.
육후이 역시 그 자신의 디지털 존재론이 ‘관계적 존재론’임을 분명히 한다. 디지털 기술은 대상을 재현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관계를 물질화한다. 그리고 물질화된 관계는 축적되고 이전되며 호환된다. 만약 실체에 대한 표상만 있고 그것의 가동을 촉진하는 관계가 없다면 네트워크는 붕괴될 것이다. 이와 같은 관계는 위상적이다. 즉 시공간은 선재하는 것이 아니고 발생한다. 그것은 관계에 따라 유동적으로 형성되는 것이지 절대적인 좌표로 놓여 있지 않다. 디지털화된 줌렌즈는 공간을 당기거나 더 멀리 보내버리고, 검색엔진은 미래와 과거를 더 가깝게 옮겨놓는다. 이와 같은 관계의 물질화는 수렴하고 발산하는 얽힘이며 접힘이다. 기술적 객체는 그 안에 인간을 접어 넣으면서 환경을 구축한다. 이것이 축적되면 그 환경은 다른 지점(특이점)으로 탈영토화되며 이전의 종합적 환경과는 이질적인 다른 관계성의 누증 과정이 시작된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관계다. 디지털 객체들의 웹 전체는 동시에 관계의 웹이다. 소셜네트워킹의 맥락에서는 이러한 관계가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19) 디지털 객체 초기의 하이퍼링크적인 관계는 이제 데이터에 직접 구현되며, 그것 자체가 생산이다. 그렇다고 해서 데이터베이스(DB) 자체가 제거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URI에 의해 지시되는 “더욱더 미세한 관계의 더 심화된 물질화”20)다. 그것은 DB 수준의 관리가 아니라 그러한 조직이나 가동성의 절차들이 좀 더 잘게 나뉜 간객체적 관계로 대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21) 그러한 연결은 사실상 무한히 증식할 수 있으며, 이것은 실제로 네트워크적 순환에 관한 상상력을 조장한다. 이를 통해 네트워크는 현존재적 사유의 재현적 역능을 넘어서 확산된다. 이것은 시몽동적인 의미에서 준안정적인 전개체성의 발현이며, 그 가운데 사이버네틱스의 항상성에 우발적인 균열을 도입하고, 새로운 발명을 촉진할 수 있다.
2. 사이버네틱스와 일반 변체론
(1) 재귀성과 우발성: 방행
육후이 기술철학의 존재론적 내용을 형성하는 것은 ‘재귀성’ (recursivity)과 ‘우발성’(contingency)이다. 육후이는 재귀성을 “자기-조직화와 자기제작(autopoiesis)”하는 유기적 체계로 본다.22) 이때 유기적인 것은 언제나 “이미 다른 유기적이고 비유기적인 존재들과 더불어 그 자체의 바깥에 있다”.23) 다시 말해 유기적인 것이란 다른 유기적이고 비유기적인 존재와 더불어 관계를 맺으며 자기 자신의 바깥으로 향한다.
또한 재귀성은 목적을 가지는데, 육후이는 기존의 목적성(finality)이라는 개념 대신 목적율(teleonomy)을 옹호한다.24) 목적율은 사이버네틱스적인 자기목적성을 가지는 피드백 순환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피드백 순환상은 하나의 영역에서만 맴돌지 않는다.25) 육후이는 1차 사이버네틱스에서 발견되는 목적성이 기정적(predefined, 미리 정해진)이라고 말한다. 이에 반해 2차 사이버네틱스는 관찰자와 환경 모두를 피드백 안에 놓는다. 따라서 2차 사이버네틱스에서 순환상은 확장적・창조적이다. 즉 하나의 영역에 갇히지 않고, 물리학적이고 사회학적이며 생물학적인 다른 환경으로 적극적으로 진입하면서 횡단한다.26) 목적율을 가지는 재귀성은 목적 없이 방황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재귀성의 ‘수렴’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신유물론적인 의미에서 이는 ‘방행’(pedesis)과 부합한다. 방행은 수행적 신유물론(performative new-materialism)의 핵심 개념으로서, 물질적인 것의 운동은 연속적이지만 그 방향성과 강도는 미결정적이며 불확정적이라는 의미다. 요컨대 방행운동은 ‘무작위적이지 않은 무질서 운동’이다.27) 재귀성은 이러한 방행적 운동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재귀성의 실질적 내용을 구성하는 것은 ‘다시당김’ (retention)과 ‘미리당김’(protention)이다. 예컨대 요한 슈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을 처음 들을 때 우리는 그 모든 멜로디를 귀 기울여 보존할 것이다. 이러한 멜로디의 보존은 1차 다시당김으로 불린다. 동시에 나는 다음의 멜로디를 예측하는데, 만약 그러지 않으면 그 악절들을 파악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단지 소리 외에 음악이라곤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다가올 지금에 대한 예측, 즉 아직-아님(not-yet)은 1차 미리당김(primary protention)으로 불린다. 만약 내가 내일 「푸른 도나우강」을 기억한다면, 그것은 기억 또는 2차 다시당김(secondary retension)이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 음악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으므로, 모든 악절의 끝과 작품의 끝을 예상할 수 있는데, 이를 2차 미리당김(secondary protention)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1차와 2차 다시당김과 미리당김의 개념들에 기초하여 스티글러는 3차 다시당김(tertiary retension), 즉 인공기억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28) 예컨대 슈트라우스의 작품에 대한 나의 2차 다시당김은 시간을 따라 날아가버리기 때문에 믿을 만하지 않다. 하지만 CD는 나의 기억을 재생하도록 도울 것이다. 이제 축음기(아날로그식)나 CD 또는 MP3(디지털식)가 3차 다시당김이며, 이것은 어떤 측면에서 1차와 2차 다시당김과 미리당김을 불러일으킨다.29)
육후이의 기여는 2차 미리당김에 3차 미리당김을 추가한다는 점이다. 알고리즘은 3차 미리당김의 기반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아마존이나 구글에 구축된 광고 노출 알고리즘은 개인화된 것으로 나의 취향을 미리당김으로 추계한다. 오프라인 동선도 그렇게 예측된다. 직장에서 점심시간쯤 식당을 검색하기도 전에 내 스마트폰에는 그간의 식당 동선으로 구축된 알고리즘이 작동하면서 인터페이스에 선택지들을 노출한다. 사물 인터넷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퇴근 후 커피를 마시고 싶은 내 욕구는 집에 있는 AI 커피머신에 의해 미리당김된다. 나는 집에 도착해 이렇게 마련된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이와 같이 3차 미리당김은 3차 다시당김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것은 관계의 새로운 종합이라고 부를 수 있다. 축적되고 구조화된 데이터와 그에 기반한 알고리즘은 우리의 운동과 동선을 정확하게 예측한다. 이것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미리당김의 사례들이다. 우리를 앞서 기술적 객체들, 디지털 객체들이 기투하는 시공간이 발생하게 된다. 이 시공간이 우리의 기술적 의식 안에 통합되면, 이 3차 미리당김은 어느새 1차와 2차 다시당김이 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미리당김이 우리의 경험과 상상을 미래로 ‘기투하면서 되받아오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것은 다음 순간의 ‘선취’인데, 3차 미리당김은 이러한 선취가 테크놀로지에 의해 더 높은 수준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육후이는 베르그송(E. Bergson)과 유사하게 수영을 배우는 과정을 통해 재귀성의 창조적 양상을 설명한다. 즉 수영을 배운다는 것은 “인간-물 통일체에 속한 하나의 기능으로 통합하는 새로운 동작들을 발명한다는 것”이다.30) 배움은 기하학적인 정적 과정이 아니라 행동학적인 수행 과정이다.31) 이 예는 상호독립적인 객체들(물/신체)이 상호작용32)하면서 서로 간에 ‘되기’를 수행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이 객체들의 재귀적 상호작용 안에서 새로운 것(물-신체)을 발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지성과 지능은 신체에 체현된 상태로 작동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신체들 간의 공명(resonance)과 얽힘이다.
재귀성과 더불어 우발성은 육후이 기술철학의 또 다른 핵심 개념이다. 우발성은 재귀 형식으로부터 단절된 것이지만, 반드시 재귀성으로 나아간다. 우발성은 필연적이지만 재귀성은 그것을 드러냄으로써 그 자신 안으로 수렴시킨다. 우발성의 내용은 재귀적 필연성보다 더 깊고 광범위하다. 그것은 표면의 파도와 심층의 심해라는 은유로 설명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우발성과 필연성은 재귀적으로 연결되지만 서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우발성은 개체화 이전의 전개체성, 즉 시몽동이 즐겨 인용했던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의 아페이론(apeiron)과 같다. 또한 신유물론자들이 들뢰즈에게서 들여온 잠재적 차원의 카오스모스(chaosmos)와 같다. 우발성은 원인이 아니라 잠재적인 것 또는 원천으로서, 그것을 통해 원인으로부터 결과로 가는 경로가 실현된다. 우발성은 통일성 이상이면서 동일성 이상이다. 다른 말로 그것은 숨겨진 초과분(hidden excess)으로서의 전개체적인 것이다.33)
(2) 육후이의 사이버네틱스: 강도와 개체화
육후이는 1966년 『슈피겔』(Der Spiegel)에서 진행한 하이데거의 유명한 인터뷰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Only a God Can Save Us”)를 즐겨 인용한다. 하이데거는 이 인터뷰에서 철학 이후에 무엇이 오느냐는 질문에 “사이버네틱스”라고 대답한다.34) 즉 하이데거는 서구 형이상학과 동일시되어온 철학의 종말 이후에 오는 새로운 사유가 ‘사이버네틱스’라고 한 것이다. 이로써 현대 기술은 형이상학의 역사 안으로 들어온다.
AI를 통해 드러난 테크놀로지의 이상은 기계학습 알고리즘을 통해 그것이 유기체와 같은 환경에 적응이 가능함을 드러냈다. 정신과 마찬가지로 AI는 3차 다시당김과 미리당김을 거쳐 유기체적인 1, 2차 다시당김과 미리당김을 선취하며, 그것들과의 선순환을 달성하면서 새로운 정보가 가지는 우발성을 재귀적 알고리즘 안에 기입한다. 이로써 각각의 디지털 객체의 온톨로지가 완성되고, 기술적 객체들, 곧 인터페이스에 기억과 예견을 체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몽동이 말한 개체화 과정의 디지털 버전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각각의 디지털 객체는 정보와 더불어 스스로를 변조(modulation)하고 세계 자체를 변환(transduction)한다.
한편 사이버네틱스는 “재귀적 인과성”(rucurrent causality)35)에 기반한다. 이것은 연역(deduction)이나 귀납(induction)이 아닌 변환의 논리를 따른다. 데카르트(R. Descartes)의 논리가 고전논리학에 기반했다면, 사이버네틱스의 논리는 변환의 논리로서 “질문에 속한 존재구조의 변형”36)을 이끌어낸다. 이는 철저하게 존재론적이면서 인식론적인 것(존재-인식론)으로서, 그러한 존재구조의 변형 안에 인식의 변형이 함께 이루어지는 실험양식이다.
이로써 사이버네틱스의 인식론은 존재-인식론으로서 늘 존재의 강도 또는 긴장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시몽동을 따라 개체화(individuation)와 개별화(individualization)를 구별할 필요가 생긴다. 개체화는 긴장의 발생과 해소에 따라 관계가 재구조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달리 개별화는 개체화를 통해 나오는 신체적・심리적 분화의 도식이다. 개체화는 준안정적 상태의 지속이다. 개체화는 잠재적이며 강도적이지만, 개별화는 강도적인 것을 함축함과 동시에 현행적인 것으로의 펼침이다. 육후이는 이를 “존재자들의 두 가지 분리된 크기 등급”37)이라고 말한다.
(3) 일반 변체론: 존재-윤리-정치학
변환은 개체화 과정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사유방식임과 동시에 객체의 변모를 의미한다. 그것은 “구조적 변화와 증폭 과정 둘 모두”38)를 의미한다. 변환은 그래서 귀납과 연역과는 달리 발생적 사유의 논리다. 이것은 “존재구조의 변형”39)을 이끄는데, 이때 핵심 요건이 ‘속도’와 ‘강도’다. 속도와 강도는 안정된 상태의 지속이 아니라 준안정적(metastable) 상태의 불균등성에서 간객체적 정보 이동을 규정하는 요소다. 이 정보 이동은 그 정보 간의 번역(translation)을 야기한다. 정보가 객체들 간에 얼마나 빨리, 그에 따라 얼마만한 강도로 이동하는가가 변환의 논리이자 작동 메커니즘의 핵심인 것이다. 준안정적 불균등성은 간객체적 네트워크의 환경이자 조건으로서 그러한 변환의 강도와 속도를 가능하게 함과 동시에 그 강도와 속도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변환 이론은 관계적 존재론의 네트워크 형성 과정에서 핵심을 이룬다. 변환은 번역과 변조를 아우르는 주름운동(enfolding)이다.
여기서 정보 간의 차이, 환경 간의 차이, 그리고 정보와 환경의 차이가 나타난다. 차이들은 차이화 과정에서 우발성을 배태하면서 재귀적 순환상에 격절을 도입한다. 여기서 생기는 문제는 다시 그 해결을 위한 재귀성을 만들어내며, 미분적(defferential) 변환 과정을 거쳐 어떤 도약을 향해 나아간다. 오늘날 실제로 웹 온톨로지는 이러한 자동화 과정과 논리학을 통합하면서, 즉 변환의 논리를 통해 사이버네틱스를 구현한다.
육후이는 이러한 메커니즘을 시몽동의 용어를 가져와 ‘일반 변체론’(general alagmatic)40)이라 부른다. ‘변체론’이라고 번역한 alagmatic은 그리스어인 allagma(αλγάμμα)를 어원으로 해서 시몽동이 만든 신조어다. allagma는 변화나 변천(vicissitude)을 의미하는데, 이는 또한 교환관계에서 주고받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시몽동의 용법에서 이는 에너지 교환이라는 생각에 좀 더 가깝다. 개체화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에너지의 체계다. 개체화 원리는 가동성이다. 어떤 존재자의 형성이란 그것의 질료도 그것의 형상도 아니고, 그 질료가 형상을 어떤 내적 공명의 체계에서 취하는 가동이다. 벽돌의 개체화 원리는 진흙이 아니고 거푸집도 아니다. 각각의 벽돌은 그 자신의 특개성(haecceity)을 가진다. 이 특개성은 주어진 시간에, 가장 세세한 거푸집의 꼴을 포함하여 에너지 체계 안에서 그 진흙이 어떤 압력 아래에 들어서고, 이에 따라 압력이 확산되며, 결국 자기-현행화되는 그 가동성에 따른 것이다. 이것은 에너지가 각각의 분자에서 다른 분자들로, 진흙으로부터 거푸집의 벽으로 그리고 거푸집 벽에서 진흙으로 모든 방향으로 총체적으로 옮겨지는 그 순간이다. 개체화 원리는 통일체가 평형 상태에 이르기까지, 질료와 형상 간의 에너지 교환을 수행하는 가동이다. 아니, 오히려 우리는 질료와 형상은 이러한 수행적 가동 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우리는 개체화 원리가 잠재적인 에너지의 현행화를 통한 질료와 형상의 공통적인 변체론적 가동자(allagmatic operation)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에너지는 체계의 에너지다. 그것은 체계의 모든 지점에 동등한 방식으로 효과들을 창출하며, 가동 가능하고 소통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가동자는 지금/여기 구체적인 것의 특이성들에 놓여 있으며, 그것들을 감싸고 증폭한다. 따라서 일반 변체론은 ‘가동의 이론’이기도 하다. 시몽동은 가동을 ‘하나의 구조가 다른 구조 속으로 수렴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41)
육후이에 따르면 이러한 변체의 가동성은 에너지의 장에서 출현하며, 그것을 ‘바탕’이라고 말한다. 이때 바탕은 잠재성의 차원에 있는 신호들의 체계다.42) “그것은 미지의 것(the Unknown)이고 가장 우발적인 것”43)이다. 미지의 것, 알려지지 않은 것, 또는 함수의 부재 상태는 사이버네틱스가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세계 안에서 전개되는 인간/비인간의 행위양식이자 기술적 객체들의 관계성이 거주하는 이 상태를 육후이는 들뢰즈의 개념을 빌려 “일관성의 평면”(plane of consistency)44)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일반 변체론은 존재론의 차원에서 이해되는 기술적 객체의 발생론이며 논리학이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사이버네틱스가 가진 재귀성과 우발성의 종합을 포괄하면서 어떤 ‘보편’ 사이버네틱스를 겨냥한다. 이는 지식의 가치론일 뿐 아니라 존재의 지식, 다시 말해 개체발생론(ontogenesis) 또는 존재-가치론(onto-axiology)이며, 행위와 가치, 가동성과 구조를 통합한다는 의미다. 새로운 가치의 출현은 어떤 문제틀의 존재에 의존한다. 여기서 가치론적 기능은 전체적(holistic) 체계의 구조적 변형이다. 가치론적 기능은 외적이면서 내적인데, 이는 그리스의 폴리스(polis)에서 시민들과 시민정체(civic regime)가 하나의 전체적 구조와 가동성을 구성하는 것과 같다.45) 즉 폴리스는 시민과 시민정체라는 구조와 가동성의 목적율이다. 따라서 사이버네틱스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목적율적 ‘정치학’을 요구한다.
따라서 일반 변체론은 사이버네틱스로부터 발원한 ‘존재-윤리-정치학’(onto-ethico-politics)으로서 새로운 코스모테크닉스를 예비한다. 따라서 일반 변체론은 ‘거대한 바깥’의 총체적인 미리당김, 가속하는 포스트휴먼의 신체를 전경화한다. 여기에는 총체적인 투쟁의 양상이 있다. 그러한 투쟁은 “인간의 기관성의 우월함을 보존하려는 어떤 것이 아니라 기술, 다시 말해 사이버네틱스나 변체론적 사유을 재정립하려는 투쟁”46)이다. 이때 사이버네틱스는 기술적 구체화 너머로 나아가면서 가치론적 사유의 가동과 변환을 이끌어낼 것이다.
육후이는 이러한 ‘너머’의 세계가 알고리즘적 파국(algorithmic catastrophes)을 건너간다고 본다.47) 알고리즘적 파국은 그리스적인 의미에서 비극적인 것도 아니며, 기독교적 의미에서 묵시록적인 것도 아니다. 파국은 전 지구적이며 동시에 인공적이다. 그것은 기후변화, 전 지구적 금융시장의 급작스러운 붕괴, 대량 실업사태, 그리고 진행 중인 사이버 전쟁 및 로봇 전쟁과 같은 것이다. 허무주의가 도래하는 이 순간은 사실상 니체적 의미에서 심연을 들여다보며 긍정하는 순간이다. 문제는 이 긍정이 곧장 파국에 휩쓸려 들어가는 악순환을 만들어내지 않고, 좀 더 폭넓은 체계와 다른 체계로 건너갈 수 있는 문턱이라는 점을 아는 것이다. 일반 변체론이 예비하는 코스모테크닉스는 이 파국을 건너가는 ‘존재-윤리-정치학’이다. 이제 대홍수는 셈족의 강이 아니라 포스트휴먼의 정보-바다에서 발생할 것이고, 따라서 방주는 잣나무와 역청이 아니라 미지의 푸른 금속(음陰)과 도래하는 붉은 생명(양陽)의 조합으로 건조된다.
3. 코스모테크닉스
(1) 코스모테크닉스의 의미
‘코스모테크닉스’는 육후이 기술철학에서 중추적인 개념이다. 그는 여러 대담에서 코스모테크닉스를 “도덕적 질서와 우주질서의 통합이며 기술이 세계관에 녹아드는 방식”이라고 정의한다.48) 다시 말해 코스모테크닉스는 분석적이거나 종합적인 개념이라기보다 수행적 개념이다. 이 개념을 통해 우리는 존재와 가치, 자연법칙과 인륜법칙의 이분법을 횡단하고자 한다. 이때 지도리가 되는 것은 바로 ‘기술’이다.
언뜻 보면 이 개념은 매우 과거회귀적인 것 같다. 왜냐하면 도덕과 자연 또는 우주가 일치된다는 전제하에 담론을 전개하는 것은 고대적 사고방식, 더 정확히 말하면 동양의 전통적 사고방식과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후이도 지적하고 있듯이 ‘천국’에 대한 개념이 사라진 시대에 톈샤(天下)는 더 이상 도덕적 의미를 띠지 않는다. 따라서 전통으로의 복귀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한 전통 회귀는 테크놀로지적 근대성에 맞서서 위기를 돌파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보다 육후이는 코스모테크닉스를 ‘재우주화’라는 맥락에서 사고해야 한다고 본다.49) 재우주화는 코스모테크닉스의 내용이 무엇이든, 다시 말해 그것이 중국의 도(道)든 하이데거의 존재(Sein)든 간에 현대과학, 기술 그리고 신비주의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을 개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시적 상상력의 역설적 언어와 과학의 메마른 장치들, 산수화와 추상회화, 사이버네틱스와 노장사상을 코스모테크닉스적 재우주화를 통해 재배치해내는 시도다.
따라서 언제나 물질적인 배치, 그리고 그 배치를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퓌시스는 숨기를 좋아한다’고 했고, 재우주론자인 우리는 ‘테크네는 숨기를 좋아한다’라고 말하며 그런 한에서 퓌시스의 은폐와 탈은폐를 제대로 논할 수 있다고 믿는다.
(2) 횡단-가치적 사유
코스모테크닉스는 전통이면서 도래할 기술과 그 민중들의 혼종 형성 지대라고 할 수 있다. “자연에서 기술로, 자연에서 정치체제로 가는 그 어떤 선형적인 시간적 발전도 존재하지 않”는다.50) 여기에는 단지 복잡화의 상이한 형태나 수준들로서의 시간‘들’이 있다. 그러므로 코스모테크닉스는 기술생태다양성(technodiversity)51)으로서의 다양한 원기술(Urtechnik)을 포함한다. 이것이 육후이 코스모테크닉스의 출발점이다. “다양한 코스모테크닉스가 존재하는 만큼 다양한 창세(geneses)가 존재한다.”52)
이러한 다양한 창세를 긍정하기 위해 육후이는 상이한 우주론 체계의 재독해를 수행한다. 예컨대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부족적 다양성, 중국・일본・한국을 비롯한 문화의 기술생태다양성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이한 우주론들을 어떤 연속적인 강도적 되기(becoming)로 바라보아야 한다. 즉 각각의 우주론에서 자연과 문화, 기술과 도덕 사이에 어떤 연속성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유지되거나 단절되는가를 보는 것이며, 동시에 그 각각의 우주론 간의 관계도 보아야 한다. 이것은 기술문화론에서의 행동학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관점에서 인도와 중국, 유럽의 기술이 ‘무엇인가’(본질 물음)라는 것은 부수적이다. 오히려 그러한 다양한 기술성들이 내/외부에서 어떤 방식으로 회집되고 이산되는지, 그때 이루어지는 기술적・사회적・정치적 환경과의 관계는 무엇인지, 그로부터 창발하는 새로운 기술과 환경은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육후이에게 이러한 관점은 ‘횡단-가치적 사유’의 요청이다.53) 이것은 폐쇄적 국지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우선 기계적 결정론과 생물학적 진화론을 기각한다. 다시 말해 유기적인 것과 기계적인 것의 이분법에서 벗어나는 것이 일차적인 과제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이분법은 가능한 변형을 보증하지 못한다. 결정적으로 이러한 이분법은 새로운 조건의 생산을 가로막고 기술을 도덕이나 우주론과 유리되게 만듦으로써 코스모테크닉스의 강도적 흐름을 절단하게 만든다. 육후이는 이러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기술적 판단 중지(epochē)”54)를 요구하는데, 이로써 근대적인 모든 기술-사유적 기제들의 영향력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늘날와 같은 디지털 기술 시대에 에피스테메(episteme)는 “인간과 기술의 동질적 관계”55)로 향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당연히 자본의 요구에 따라 인간과 기술의 수준에 동일한 척도, 즉 화폐의 척도를 착근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전 지구적이고 일반화된 가치로서의 인간 신체와 디지털 기술은 신경회로 하나하나 맥놀이 하나하나도 모두 생체상품의 가치로 환산할 수 있게 만들며, 다양한 인종적・민족적・성적 지향성들을 획일화된 목적성에 종속시킬 수 있도록 한다. 디지털 기술로 측정된 개개인의 생체정보들이 곧장 다국적기업과 의료기기 업체들 그리고 보험사에 전달되는 것은 이러한 동질적 경향의 현상 형태다. 이는 말 그대로 대규모의 정보 양화와 통제를 불러올 것이다. 이럴 경우 테크놀로지의 재전유는 요원해진다. 따라서 이러한 경향에 동기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다양한 코스모테크닉스가 내장한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재해석하는 과제를 더욱 긴급하게 수행해야 한다.
인류세 시대의 자본주의는 코스모테크닉스의 횡단-가치적 사유를 ‘부품적 사유’로 대체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전일적인 지배는 도덕적 코스모테크닉스는커녕 존재에 대한 우주론적 사유마저 불가능하게 만든다. 육후이는 이러한 상황에서 인류세에 대한 물음은 공해 감소 조치와 같은 물음에만 그칠 수 없다고 주장한다.56) 여기서 더 나아가 인류세를 자본세와 더불어 사유하면서 이를 돌파할 수 있는 코스모테크닉스를 발명할 필요가 있다.57) 그 가능성은 일차적으로 예술과 기술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3) 예술과 코스모테크닉스
육후이는 예술이 철학의 종말 이후 사이버네틱스 시대에 다른 형태의 실천을 보여줄 수 있으며, 그것은 기술의 잠재력을 드러낸다고 본다.58) 다시 말해 육후이는 하이데거가 1967년 「예술의 기원과 사유의 결정」(“Die Herkunft der Kunst und die Bestimmung des Denkens”)에서 사이버네틱스 시대에 예술의 위치를 생각해야 한다고 보았듯이, 예술이 철학의 종말 이후 사이버네틱스적 사유를 이끌어갈 중요한 분야라고 보는 것이다. 특유한 점은 이렇게 함으로써 기술과 예술이 상호접힘 안에서 서로를 밀어붙이는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술은 기술을 통해 과학적 합리성과 제국주의적 권력이 아닌 완전히 다른 잠재력을 드러낼 수 있으며, 기술을 예술을 통해 비유럽적인 코스모테크닉스를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이때 현실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상의 발명이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다른 시작’(der andere Anfang)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좀 더 현대적인 의미에서 예술가는 일종의 ‘예시적 인물’이다. 왜냐하면 예술가는 이런 ‘다른 시작’을 예고하며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술가란 직업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성격도 아니며, 단지 횡단적인 인물 또는 비인격적 개체화의 과정에서 명멸하는 어떤 ‘상태’다. 예술가는 이런 상태의 인격적 매개다. 여기서 예술가는 “예술작품의 형식 안에 외재화된 감각 가능한 것을 통해 나와 우리 사이의 횡단개체화를 허용하는 어떤 순환을 창조할 수 있으며, 그것을 책임질 수 있는 누군가”59)라고 할 수 있다. 이 규정에서 예술은 기술과 등치된다. 기술적 대상은 여기서 예술작업의 필수불가결한 조응물이다.
다른 한편 육후이는 예술을 ‘비철학적 직관’의 작품 생산 과정으로 이해한다. 예술은 이를 통해 현상을 재현하는 것에서 벗어나 더 복잡하고 풍부한 우주의 모습을 작품 안에 담는다. 따라서 예술적 직관이란 “더 이상 카메라에 의해 정지되거나 포착된 대상이 아니며, 이는 주로 감각적인 것에서 실재를 해방하고 감각적인 것을 실재로 확인하는 변형을 수반”60)한다. 육후이는 이것이 들뢰즈가 베르그송을 인용하면서 지적한 그 직관적 방법과 통한다고 말한다.61) 비철학적 직관은 철학에서 나와 예술로 건너간다.
특히 회화는 이러한 예술적 직관을 붓의 움직임과 재료의 혼합이라는 기술적 연접을 통해 어떤 미지의 것, 즉 부재의 현존을 드러낸다. “부재하는 것을 결여가 아니라 그 반대인 감각적으로 만드는 것”62)이다. 때문에 회화의 텔로스(telos)는 바로 부재하는 것, 현존을 통해 드러날 수 있는 부재를 향한 길을 조형적으로 개척함으로써 가능한 개방성이다. 이러한 개방성 안에 지역성이 놓여 있다. 이 지역성은 곧 다양성이며 코스모테크닉스의 기반이 된다. 일본・중국・유럽・한국은 각각의 독특한 직관을 개발해왔으며, 이에 따라 다른 감성과 감성교육의 절차들을 발명했다.
이러한 감성과 감성교육은 비가시성의 비재현적 감응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여기서 감각은 어떤 새로운 능력을 발휘하는 토대가 된다. 플라톤의 이데아(Idea) 이래 감각은 대개 시각중심주의를 견지해왔다. 하지만 코스모테크닉스적인 감성과 감각은 시각을 벗어난 비가시적인 것을 감각화하는 예술적 기량을 발휘하길 바란다.63)이러한 요청은 사실상 현재 예술적 객체의 물질성이 예전과는 달리 현저히 선조화(ancestralization)64)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상황에서 “예술은 정신에서 사물로, 비물질적인 물질성으로, 사물의 능동적인 행위로 향하는 동시에 정신은 사물과 관계 맺기 위해 스스로를 위치시켜야”65) 한다. 이제 새로운 감성과 감성교육은 물질성과 기계의 새로운 작동에 의해 가능하며, 이로써 창의성의 조건은 일신한다.
육후이는 이러한 감성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임을 항상 강조한다. 코스모테크닉스는 항상 복수성인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다른’ 감성은 주로 중국 예술에서 볼 수 있다. 중국에서 예술은 리(li, 禮, 의례, 의식)와 위에(yue, 樂, 음악)를 강조하는 바탕에서 성립한다. 그것은 그리스 비극의 디오니소스적 열정의 분출과는 매우 상이하다. 리와 위에는 렌(ren, 仁, 자애)에 기초를 두고 있다.66) 리는 주로 몸짓과 기술적인 수단을 통해 우주(하늘)와 사회적/도덕적(인간) 사이의 통일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리는 규범적 역할에서 파(fa, 法, 법)와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법은 불법행위 이후의 처벌로 이해되는 반면, 리는 예방적인 일상적 관습이다. 위에는 음악과 춤을 포함하며 교육 목적으로 리와 결합된다. 리와 위에는 함께 감성교육을 형성하는데, 이는 중용(zhong, 中)과 조화(he, 和)라는 과하지 않은 만족감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중(中)은 잠재력이 가득하고 변화할 수 있기 때문에 평형이 아니라 준안정성(metastability)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감정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태(未發)를 중이라고 한다. 감정이 자극되거나 촉발되면(已發) 반응하고 행동해야 하며, 이러한 반응이 적절한 정도에 이르렀을 때 ‘조화’가 이루어진다. 부족함이나 과잉이 아니라 적절한 정도의 강도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 비극의 하마르티아(hamartia)나 카타르시스(katharsis)와는 현격히 다른 특성을 지닌다. 즉 중국 예술은 디오니소스적 충동과 카타르시스를 향한 비극적인 여정 대신 단순함과 평온함을 추구한다. 여기서 감성교육으로서 미학은 사회적・정치적 삶, 공동체 구성원 간 또는 인간과 비인간 간의 갈등을 해결하고 관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동시에 우주에서 인간을 입장 짓는 명확한 방식으로 정의된다.
회화의 영역에서 육후이가 주목하는 것은 중국의 산수화(山水畵)다. 산수화는 문자 그대로 ‘산과 물’이라는 뜻으로, 위진 시대에 등장했다. 정신적 체험의 가장 높은 표현으로 여겨지는 산수화는 여러 시대에 걸쳐 양식과 재료에 중점을 두어 발전했으며, 원나라 시대에 이르러 성숙하고 대중화되었다. 서양 예술에서 비극이 차지하는 역할과 비교하면 산수화는 장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중국 예술의 핵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육후이는 이 산수화에서 도교사상의 궁극적 표현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15세기 유럽에서 등장한 풍경의 개념과는 다른 것으로 인식된다. 산수화는 인간세계와 우주 사이의 관계를 예술적이고 철학적으로 해석한 그림이다. 도교사상의 으뜸인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 따르면 ‘천지는 나와 동시에 태어났고, 만물은 나와 하나다’. 산수화는 이에 입각해 가장 큰 것을 드러내고, 관람객의 시야를 넘어 위대한 이미지를 표현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 자아의 유한성을 무한성으로 열어주면서 스스로 형식의 구속에서 벗어난다.67)
따라서 육후이는 산수화를 기술적(technical) 활동, 즉 회화를 통해 우주적 질서와 도덕적 질서가 통일되는 더 넓은 우주적 현실 속에서 인간과 그 기술세계를 재구성하는 코스모테크닉스로 본다. 이러한 코스모테크닉스는 동일률에 따라 우주와 도덕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호혜적인 간-행을 따라 재귀적으로 구성되는 체계다.68)
중국 산수화에서 드러나는 특유한 우주론과 기술은 육후이가 강조하는 ‘현(玄)의 논리’로 이어진다. 현은 ‘있음(有)’과 ‘없음(無)’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기본 범주를 담고 있다.69) 현은 종종 ‘신비’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검은색’ 또는 ‘어둠’이라는 구체적인 의미로도 쓰인다. 이 현은 그래서 반대되는 것들의 재귀적 회귀 또는 차이화라고 볼 수 있다. 육후이는 이를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이라는 구절로 정의내린다. 이것은 ‘반대로 되돌아감이 도의 움직임이다’로 새길 수 있다. 여기에는 ‘대립’은 있으나 ‘모순’은 없다. 다시 말해 극성이 성립하지만 불연속성(모순) 대신 연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현의 논리의 핵심으로서 ‘상반적 연속성’(oppositional continuity)이라고 부른다.70)
이러한 상반적 연속성은 이미 『주역』에서 하늘과 땅의 상징인 건과 곤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또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음의 힘과 양의 힘에 의해 가능하기 때문에 반대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도의 역학은 상반적 힘에 의해 움직이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첫 번째 원인이라는 의미보다는 모든 움직임과 모든 존재방식에 내재되어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제일 원인론에서 비롯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만으로는 예술과 기술에 대한 중국 사상을 이해할 수 없다. 4원인론(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도 마찬가지로 부족하다. 이 원인론은 고대 그리스적인 시학, 즉 제작술을 설명할 수 있지만 중국 예술에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대신 우리는 비선형적 원인론을 가정해야 한다. 그것이 상반적 연속성으로서의 현의 원리다.
중국 회화의 이러한 이념적・기술적 배경은 어떤 칸트적인 숭고함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단조로움(ping dan, 平淡, 말 그대로 평평하고 무미건조한)을 나타낸다는 특성을 지닌다. 특히 그림 안에서 단조로움은 주체를 더 넓은 현실로 재귀적으로 던져버림으로써 주체가 자신의 하찮음을 인식하고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도의 일부로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하는 해체력을 가지는 것이다. 이것은 사라지거나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찮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주체가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풍경을 더 이상 대상으로 보지 않는 순간을 의미한다.71)
그래서 산수화에서 주체는 그리스적 영웅이 아니며, 그를 통해 카타르시스가 발생하지도 않는다. 여기에는 조화롭게 사는 법을 잘 아는 나무꾼과 어부, 산중에서 책을 읽고 장기를 두는 학자와 문인이 있다.
결론: 신유물론의 기술철학과 코스모폴리테크닉스
육후이는 기술과 자연을 완전히 다른 이분법의 극항으로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에 관한 이해 자체에 기술적 형식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가 지구행성에 대한 생태적 전체론의 시야를 갖게 된 것은 스푸트니크라는 첨단기계 복합체 덕분이며, 세포 단위에 이르기까지 생명체를 관찰하게 된 것은 현미경 기술의 발달 덕분이다. 여기에는 수많은 관측・실험 장치들이 무한히 추가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기술적 형식을 통해서만 자연의 내밀한 비밀을 간파할 수 있다. 육후이는 이에 대해 “더 이상 어떤 순수하고 소박한 첫 번째 자연은 존재하지 않”72)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것은 들뢰즈가 말한바, ‘신자연주의’ 또는 ‘신유물론’의 도래를 기술철학의 측면에서 드러낸다. 기술과 자연의 간-행은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2차적인 자리바꿈 또는 인공적 생산물의 능산화에 의해 가능해진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어떤 관념론적 사유로의 일탈을 꿈꾸어서는 곤란하다. 문제는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지구행성의 이미/지금으로서의 기술적 물질성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사태란 고전적이고 소박한 유물론, 즉 관념론과의 대립 안에서 스스로를 표명하는 반응적 형태의 유물론으로도 파악 불가능하다. 가능한 단 하나의 길은 “물질의 가능성을 한계까지 밀고 나가는 유물론”73)이며, 따라서 ‘신유물론’이다.
이러한 상황, 즉 기술과 자연의 이분법이 해체되고 하나의 ‘자연’ 안에서 일관성을 드러내는 신유물론적 상황을 물질과 지능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육후이는 베르그송을 따라 지능과 물질이 동일한 발생적 과정의 두 측면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 “지능은 물질 안의 공간을 이해하기 위해 물질에 대해 행위하며, 물질은 지능을 도식화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둘은 끊임없이 서로간에 갈마들며, 바라드적 의미에서 얽힘을 형성한다. 이것은 긴 역사 안의 진화과정이기도 하고, 순간순간 이루어지는 존재-인식론적 계기들에서 발생하는 사태이기도 하다.
새로운 객체로서의 디지털 객체는 기존의 기술적 객체와는 달리 어떤 하나의 시공간 안에 특정화되어 집합체로 실존하지 않으며, 망상조직화된 환경 안에 편재한다. 그러므로 이 객체는 더욱더 관계적이다. 디지털 객체의 가능성의 조건은 GML, SGML, HTML 또는 XML과 같은 인터넷 언어의 규범이나 표준인바, 사회공학적 인공물로서 이것이 디지털 환경을 조성한다. 이것은 물질적인 의미에서 ‘확장된 의식’(extended mind)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디지털 객체는 데카르트의 연장 실체도 아니고, 칸트의 물자체나 감각의 잡다도 아니며, 현상학적인 의미에서 주어짐(donée) 또는 줌(donation)도 아니다.
그것은 기술적으로 ‘개발된’ 웹 온톨로지이며, 문법화된 규칙들에 따라 환경을 구축한다. 이것은 인공/자연 이분법 안에서 작동하는 인공적인 도구가 아니라 이 이분법을 횡단하는 ‘환경’이다. 이 환경은 재귀함수들에 의해 구체화된다. 우리는 이 객체가 1차적인 자연에 착근된, 그리고 각자의 신체에 체현된 2차적 자연으로서의 기술환경을 살아간다. 이러한 망상조직화된 네트워크 안에서 사람들은 그것을 염려하고, 또 그것에 의해 위협받거나 도움을 받으면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말하자면 디지털 객체는 존재의 일의적 평면을 구성하는 역동적인 주름운동 안에 촘촘히 인입된 그물망으로서 인위/자연의 구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행위소가 된다. 발명된 것이 발견되는 와중에 ‘자연’이 된다.
이러한 신유물론적 전망 안에서 보면, 코스모테크닉스는 일종의 정치적 개념이자 유기적 개념으로서 기술적 활동을 통해 우주론과 도덕을 결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간 배경으로 머물러왔던 우주론적 도덕정치, 또는 기술적 활동의 윤리적 전개를 전경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기술과 정치의 서구중심성은 해체될 것이다. 이때 도덕은 환경뿐만 아니라 우주론을 전경화함으로써 윤리적 사유의 조건이 된다.74) 육후이는 이 모든 이론적・생태적 사태를 파악하는 것을 “21세기 유물론의 과제”75)로 본다. 유물론은 완료되지 않은 과정으로서 기술체계와 새로운 형이상학의 완성을 겨냥하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정치학(politics)의 가능성이 놓인다. 이를 코스모테크닉스의 정치학 또는 ‘코스모폴리테크닉스’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코스모폴리테크닉스는 아래에 기술한 바와 같이 육후이 기술철학과 신유물론이 만나는 맥락 안에서 가동된다.
| 육후이 기술철학 | 신유물론과의 공명 |
| 1. 기술적 망각이라는 근대적 사태는 디지털 객체의 시대에 이르러 그 망각 자체를 일깨우는 테크놀로지들로 인해 점점 더 심각하게 주제화된다. | • 디지털 객체의 일반화된 횡단개체적 사태 |
| 2. 디지털 객체는 자연/인공의 이분법을 더 멀리까지 밀어붙여 그 구분 자체를 해소하면서 포스트휴먼적 환경을 조성한다. | • 이분법의 해소 |
| 3. 디지털 객체는 자기제작하는 능동적 물질의 역능을 최대화한다. 이로써 디지털 객체는 개체화하는 역능을 지닌다. | • 물질의 능동성, 강도와 개체화 |
| 4. 코스모테크닉스는 디지털 시대에 횡단-가치적 사유를 도입한다. | • 관계적 존재-가치론, 물질의 횡단성 |
| 5. 코스모테크닉스는 우주론과 도덕, 존재론과 인식론을 횡단하면서 동시에 국지적인 복수의 우주론과 도덕을 소통・공명시킨다. | • 존재-윤리-인식론 |
| 6. 기술은 예술과 더불어 새로운 코스모테크닉스의 발명을 위한 감성교육을 촉진하며, 이를 통해 어떤 정치학의 가능성을 연다. | • 일반 변체론의 정치학, 예술-기술의 변환 능력 |
이에 따라 코스모폴리테크닉스는 기술생태다양성을 예술적 감응 양식 안에서 변환하는 일반 변체론이 된다. 이러한 변환을 위해 가속과 강도를 증진시키고, 물질적인 것들이 인류-자본세에서 벗어나도록 목적율을 가동시키는 것이 바로 코스모폴리테크닉스 또는 코스모테크닉스의 정치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朴俊映 수유너머 104, 서울과학기술대. 최근 저서로 『신유물론, 물질의 존재론과 정치학』(2023)이 있다.
Yuk Hui, Recursivity and Contingency (London: Rowman & Littlefield, 2019) 156면 참조.
2) Yuk Hui, On the Existence of Digital Objects (Minneapolis: Minnesota UP, 2016) 248면 참조.
3) Hui, Recursivity and Contingency 183면 참조.
4) 바라드(K. Barad)의 이 개념에 대해서는 Karen Barad, Meeting the Universe Halfway (Durham: Duke UP, 2007) 2면 참조.
5) Hui, On the Existence of Digital Objects 12면.
6) 허욱 지음, 조형준・이철규 옮김 『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새물결, 2019) 311면. 이 글에서는 이 번역본의 서지사항을 밝힐 때 외에는 ‘허욱’의 영어식 발음인 ‘육후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것이다.
7) Hui, Recursivity and Contingency 77면.
8) 같은 책 78~79면 참조.
9) 사용자와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하지 않고 프로그래머 또는 관리자만 접근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시스템의 후면 부분.
10) Hui, On the Existence of Digital Objects 1면.
11) 웹 온톨로지를 의미한다. 어휘나 개념의 정의 또는 명세로서, 데이터의 속성과 관계를 모두 포함한다. 즉 시스템의 내용을 웹 온톨로지가 정의한다.
12) Hui, Recursivity and Contingency 19면.
13) 같은 책 199면.
14) Hui, On the Existence of Digital Objects 1면.
15) Hui, On the Existence of Digital Objects 194면,
16) Barad, 앞의 책 333면
17) Hui, On the Existence of Digital Objects 242~43면
18) Barad, 앞의 책 같은 면.
19) 같은 책 140면.
20) 같은 책 320면.
21) 육후이가 디지털 객체적 관계를 강조하는 데서 왜 ‘실체’ 개념을 거부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동시대의 하먼(G. Harman)이 하이데거를 해석하면서 강조하는 실체를 거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육후이는 하이데거에게서는 실체가 아니라 관계, 시간 속의 관계가 관건적이며, 그래서 하이데거를 ‘관계의 철학자’로 명명한다. 같은 책 17~18면 참조.
22) Hui, Recursivity and Contingency 42면.
23) 같은 책 182면.
24) 목적율은 ‘목적’이 아니라 어떤 경향, 지향과 더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우리는 이것을 ‘창조적 목적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같은 책 169면 참조.
25) 같은 책 142~43면 참조.
26) 같은 책 125~26면 참조.
27) ‘방행’에 대해서는 박준영 『신유물론, 물질의 존재론과 정치학』(그린비, 2023) 478~80 참조.
28) Hui, Recursivity and Contingency 201면
29) 육후이는 3차 다시당김에 따른 재귀성의 형성에서 정신은 노에시스(noesis)이면서 동시에 기술, 즉 테크네에 의존하는 테크네시스(technesis)라고 규정한다. 같은 책 같은 면 참조.
30) 같은 책 172면.
31) 우리는 이와 똑같은 예를 들뢰즈의 배움(apprentissage) 개념에서도 본다. 질 들뢰즈 지음, 김상환 옮김 『차이와 반복』(민음사, 2004) 71~74면; 질 들뢰즈 지음, 서동욱・이충민 옮김 『프루스트와 기호들』(민음사, 2004) 23~47, 129면 참조. 이를 이어받은 신유물론자들도 이와 비슷한 예를 자주 활용한다. 이를테면 브라이언트(Revy R. Briant)의 ‘선원의 신체’에 대한 예는, 레비 R. 브라이언트 지음, 김효진 옮김 『존재의 지도: 기계와 매체의 존재론』(갈무리, 2020) 197면을 참조하라. 이 예시 외에도 브라이언트는 Levi R. Bryant, “Phenomenon and Thing: Barad’s Performative Ontology,” Rhizomes: Cultural Studies in Emerging Knowledge 30 (2016); https://doi.org/10.20415/rhiz/030.e11에서 다른 세 가지 예를 더 든다.
32) 바라드라면 이를 ‘간-행’(intra-action)이라고 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Barad, 앞의 책 33면 참조.
33) Hui, Recursivity and Contingency 196면 참조.
34) Yuk Hui, “Singularity Vs. Daoist Robots,” Noēma Magazine (2020). https://www.noemamag.com/singularity-vs-daoist-robots/(2024년 3월 20일 최종 접속) 참조; Yuk Hui, Art and Cosmotechnics (Mineapolis: U of Minnesota P, 2021) 69면 참조.
35) Hui, Recursivity and Contingency 190면.
36) Yuk Hui & Louis Morelle, “A Politics of Intensity: Some Aspects of Acceleration in Simondon and Deleuze,” Deleuze Studies 11.4 (Edinburgh: Edinburgh UP, 2017) 501면.
37) Hui, On the Existence of Digital Objects 55면.
38) 같은 책 191면.
39) Hui & Morelle, 앞의 글 501면.
40) allagmatic을 변체론이 아니라 ‘변환역학’으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 변환으로 번역되는 transduction과 혼동될 여지가 있다. 변환역학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혼동을 피하기 위해 나는 이를 ‘변체론’으로 번역한다.
41) Taylor Adkins, “A Short List of Gilbert Simondon’s Vocabulary,” Fractal Ontology (blog). https://fractalontology.wordpress.com/2007/11/28/a-short-list-of-gilbert-simondons-vocabulary/ (최종 접속 2024년 3월 19일) 참조.
42) Hui, On the Existence of Digital Objects 214면 참조.
43) Hui, Recursivity and Contingency 288면.
44) 같은 책 229면.
45) 같은 책 192면.
46) 같은 책 220면.
47) 같은 책 234면 참조.
48) “On Technodiversity: A Conversation with Yuk Hui,” Anders Dunker interviews with Yuk Hui, LARB, 2020. https://lareviewofbooks.org/article/on-technodiversity-a-conversation-with-yuk-hui/?fbclid=IwAR1tjhsJcpG-EwLZOVH6UTCZ9_U0HRqOiv5dEriiinJIVu9aH07bRAxEo4g; “Singularity Vs. Daoist Robots,” Noēma Magazine (2020). https://www.noemamag.com/singularity-vs-daoist-robots/ 참조.
49) 같은 인터뷰.
50) Hui, Recursivity and Contingency 271면.
51) 이 개념은 보통 ‘기술다양성’으로 번역된다. 하지만 이렇게 번역되면 ‘다양성’의 코스모테크닉스적인 함축이 모두 증발되어버린다. 이 개념에 대한 맥락적 이해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나는 이를 ‘기술생태다양성’으로 번역한다.
52) 같은 책 222면. 육후이는 다음과 같이 이 자연‘들’을 정의 내리기도 한다. “이 자연 개념은 낭만주의적인 첫 번째 자연(Romantic first nature)에서부터 하이데거적인 의미에서 자연을 ‘부품’(standing-reserve)으로 간주하는 두 번째 자연(second nature)을 거쳐간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는 세 번째 자연(third nature), 즉 낭만주의적인 자연도 부품으로서의 자연도 아닌, 내가 코스모테크닉스라고 부르는 개념 안에 새겨진 그 자연을 또한 거쳐갈 것이다.” 같은 책 1면.
53) 같은 책 184면 참조.
54) 같은 책 269면.
55) 허욱, 앞의 책 98면.
56) 같은 책 377면 참조.
57) 육후이는 이러한 새로운 코스모테크닉스의 발명에 중국적 사유가 기여했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것이 이른바 ‘중화미래주의’와 같은 트랜스휴머니즘적인 방향으로 가는 것은 경계한다. “그러한 미래주의는 도덕적인 코스모테크닉스적 사유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유럽의 근대 기획의 가속화일 뿐이다.” 허욱, 앞의 책 376면.
58) Hui, Art and Cosmotechnics 93면 참조.
59) Hui, Recursivity and Contingency 208면.
60) Hui, Art and Cosmotechnics 119면.
61) 이에 대해서는 질 들뢰즈 지음, 김재인 옮김 『베르그송주의』(그린비, 2021) 1장 참조.
62) Hui, Art and Cosmotechnics 144면.
63) 같은 책 133면 참조.
64) 이 개념은 메이야수(Quetin Meillassoux)의 ‘선조성’(ancestrality)을 응용한 것이다. 나는 이 용어를 물질적인 것의 자율성이 심화되는 현 시대의 디지털화된 객체들의 상황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다.
65) Yuk Hui, “Imagination and the Infinite: A critique of artificial imagination,” Balkan Journal of Philosophy 15.1 (2023) 12면.
66) Hui, Art and Cosmotechnics 22면 참조.
67) 같은 책 153면 참조.
68) 여기서 나는 육후이의 기술철학, 예술철학을 신유물론적인 용어인 ‘간-행’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런 진술방식은 이 글 전체에 걸쳐 시도되는 중이다.
69) 같은 책 202면 참조.
70) 같은 책 44면 참조.
71) 같은 책 46면 참조.
72) Hui, Recursivity and Contingency 148면.
73) 허욱, 앞의 책 111면.
74) 같은 책 86, 195면 참조.
75) Hui, Recursivity and Contingency 144면.
│박준영│
朴俊映 수유너머 104, 서울과학기술대. 최근 저서로 『신유물론, 물질의 존재론과 정치학』(2023)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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