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밖 56호] [서평] 서간문이라는 장르, “편지는 지상의 기쁨”, 에밀리 디킨슨 서간집, 박서영 옮김 『결핍으로 달콤하게』(민음사, 2023) / 박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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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아

올해 4월 2일 하버드대학의 자출판사인 벨냅 프레스(Belknap Press)는 디킨슨(Emily Dickinson) 서간집의 새로운 판본인 『에밀리 디킨슨의 서신들』(The Letters of Emily Dickinson, 2024)을 발간했다. 토드(M. L. Todd)가 모아 발간했던 두 권의 디킨슨 서간집을 보완하여 세 권짜리 서간집을 발간한 존슨(Thomas H. Johnson)의 판본이 유일한 정통 판본으로 여겨져온 지 66년 만의 일이다. 편집을 맡은 밀러(Christanne Miller)와 미첼(Domhnall Mitchell)은 저명한 디킨슨 연구자들로 존슨 텍스트에서 누락된 문자나 정보들을 새롭게 채워넣고 주석과 해설을 꼼꼼하게 새로 달았다. 약 1000면에 달하는 이 판본에는 새롭게 수집된 300여 편의 서간문도 포함되어 있다. 이 가운데 200여 편은 편지-시(letter-poem), 즉 수신자와 서명이 기입되어 있긴 하지만 시 이외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형태의 편지들이기도 하다. 그러니 새로운 서신은 물론 새로운 시를 수록하고 60년간 전개되어온 디킨슨 비평사를 딛고 선 이 새로운 서간집의 발간은 디킨슨 연구자들은 물론 19세기 미국문학 연구자들에게도 더없이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 분명하다.

디킨슨 연구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오늘날, 한국 또한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어느 정도 반영한 지 오래다. 2010년대부터 한국의 출판계는 때로는 주제별로, 때로는 시리즈의 형태로 디킨슨의 시들을 소개해왔고, 더러는 디킨슨 연구서나 디킨슨에 대한 영미권의 에세이들을 번역해 소개해왔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영미 여성작가들의 작품들이 한국사회에 대거 소개되면서 이들 작업의 영감이 되었던 디킨슨의 의의가 새롭게 주시된 덕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영미시 전반에 대한 독자층의 고양된 관심에 힘입은 덕이기도 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디킨슨이 영화화되거나 애플TV에서 드라마화가 진행되는 등 디킨슨 자체에 대한 사회문화적 관심의 몸피 자체가 커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출판된 『결핍으로 달콤하게』는 미국시를 전공한 박서영의 번역으로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디킨슨의 서간문 선집이다. 역자는 천여 편이 넘는 디킨슨의 서간문 가운데 가족들과 주고받은 서신을 제외하고 디킨슨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주변인들과 주고받은 82편의 서간문을 추려 실었는데, 책에는 디킨슨과 서신을 주고받은 개별 인물들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는 소개가 앞서고 이어서 주요한 서간문들이 배치되어 있다. 디킨슨 연구라는 목적에서 보자면 분량 면에서는 아쉽지만 국내 디킨슨 연구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특히 서간문이라는 장르의 무게감을 재설정하는 데 포문을 열리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왜 디킨슨의 서간문인가. 유명한 작가가 주변인들과 주고받은 서간문에는 분명 기대하는 바가 있다. 작가의 내면을 좀 더 들여다볼 수 있다거나 특정 작품의 문맥을 좀 더 잘 알 수 있기를 희망한다거나 하는 일종의 도구적인 필요, 그리고 작가가 작가라는 페르소나로 존재하지 않을 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관음적인 욕망이 그렇다. 게다가 디킨슨처럼 은둔하여 지내면서 세상 및 타인과 연결되는 거의 유일한 창으로 서간문을 활용한 작가는 흔치 않기에 그를 연구하는 데 서간문은 필수적인 텍스트일 수밖에 없기도 하다. 하지만 디킨슨의 서간문이 유독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디킨슨이 서간문을 세상과의 연결고리이자 자신을 마음껏 드러내는 서정의 장으로 사용했다는 데 있다. 그의 서간문을 살펴보면 그를 은둔자라고 부르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노예제・남북전쟁・인종문제 등 다양한 사회 이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인의 시선을 담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또 형식 면에서는 때로는 암시적이고, 때로는 직접적이면서, 가끔은 ‘편지-시’와 같은 장르전복을 시도할 정도로 실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디킨슨은 편지의 발신자로서 다정하게 사랑을 전하거나 애도와 위로의 마음을 보내면서도 인정을 갈구하는 젊은 시인의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더없이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텍스트의 서정주체로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서간문들 속에서 디킨슨은 누군가의 친구이자 연인이며 가족이면서도 늘 타인일 수밖에 없는 한 여성시인의 목소리를 주조하면서 갖가지 주제에 대해 고뇌하는 작가로서의 능력을 연마해왔다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디킨슨 연구에서 서간문은 디킨슨 시 연구의 부속적 텍스트라기보다는 하나의 탁월한 텍스트, 하나의 유의미한 장르로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하다. 

디킨슨 서간문의 장르적 의의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그녀가 히긴슨(Thomas Wentworth Higginson)에게 보낸 편지에 있다. 세상과의 교류가 거의 없었던 디킨슨이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당대의 진보 지식인이었던 히긴슨의 글에서 영향을 받아 그에게 무턱대고 시 네 편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는 대담한 일화는 유명한데, 그와의 첫 번째 서신 교환이 있은 후 보낸 1862년 4월 25일자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제 나이를 물으셨죠? 선생님—저는 작년 겨울 전까지는 거의—한두 편을 빼고는—시를 써 본 적이 없었답니다.

지난해 9월부터—어떤 공포를 느꼈어요—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지요—그래서 저는 노래를 불러요, 무덤가에서 소년이 부르는 것처럼—두렵기 때문이에요—제가 어떤 책을 읽는지 궁금해하셨지요—시인들 중에서는—키츠, 브라우닝 부부가 있어요. 산문으로는 러스킨—토머스 브라운 경—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읽어요.

학교에 다닌 적은 있어요—하지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의미하는 의미에서—정식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제게 불멸에 대해 가르쳐 준 친구가 있었어요—하지만 그 스스로 불멸에 너무 가까이 다가간 나머지—돌아오지 않았답니다. (213~14면)

나이를 묻는 히긴슨의 질문에 시를 쓰기 시작했던 시기를 대답으로 갈음하는 디킨슨의 수사는 스스로를 시인으로 정의하기 위한 최선의 방식이었을 터, 그는 자신이 시를 쓰게 된(“노래를 불러요”) 동력에 대해서, 자신의 문화적・의식적 자양분이 되어준 작가들에 대해서, 배움을 경험하는 자기만의 독자적이고 저항적인 방식에 대해서 이어 쓴다. 그 배움의 예로 가까운 이의 죽음과 “불멸”에 대한 사유를 들었다는 점에서는 더없이 디킨슨적이다. 그러나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언뜻 히긴슨의 질문에 답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4월 25일자 편지를 찬찬히 살폈을 때 드러나는 유기적으로 잘 짜여진 구성력이다. 극적 독백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 독특한 문학작품 속에서 작가는 자신을 시인으로 정의하면서도 기존의 장르 경계를 의식하지 않는 글쓰기 전략을 시도한다. 시인은 발신자와 수신자의 관계를 어느 정도 무용하게 만들면서 서간문이라는 사적 시공간의 경계를 흐릴 뿐 아니라 서간문이 얼마나 자체적인 구조를 지닌 문학양식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디킨슨 서간문이 형식적인 면에서 두드러지는 만큼 발신자의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서정의 장으로서 갖는 특징 또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말년의 연인으로 알려진 로드 판사(Otis Phillips Lord)에게 쓴 편지는 끝내 전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편지들 속에는 강렬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서정주체의 갖가지 수사법이 드러난다. 일례로 디킨슨은 “우리는 하나로 만들 수 있어요, 나의 고국을—사랑하는 이여, 이리로 와서 지금 애국자가 되어 주세요—사랑은 애국자예요, 그녀는 나라를 위해 삶을 바쳤어요. 이제 의미를 가지게 되었어요—오 영혼의 국가여 그대는 자유를 가졌습니다…”(276면)라고 쓰는데, 여기서 “우리”는 사랑에 빠진 두 사람으로 추정되면서도 그 수신자가 모호하고, 어쩌면 수신자를 특정하는 것이 불필요하게 여겨지는 수사를 구사한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더욱이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동원되는 국가, 자유, 형벌, 종교에의 암시들이 자유롭게 덧대지면서 수신자에게 닿기를 바라는 서간문의 주요한 목적은 흩어지고 강렬한 서정성의 실험만이 남는다. 

『결핍으로 달콤하게』의 또 다른 미덕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디킨슨과 여성들과의 교류를 주요하게 배치한 데에 있다. 일찍이 시인 리치(Adrienne Rich)는 자신의 산문 「집 안의 활화산: 에밀리 디킨슨의 힘」(“Vesuvius at Home: The Power of Emily Dickinson”)에서 “디킨슨이 단념해야 했던 구체적이고 살아 있는 남성 연인이 누구인지 밝히고 은둔 생활의 비밀과 수많은 시에 흐르는 흔적을 캐내려는 노력에 무수한 에너지가 들어갔”1)던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디킨슨의 연인이 누구인지, 이 “뉴잉글랜드의 수녀”가 거한 은둔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낱낱이 밝히고 싶어했던 긴긴 역사를 생각해보면 주변 여성들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서간문들은 디킨슨 이해에 새로운 관점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서간집에 실린 홀랜드(Elizabeth Chapin Holland) 부인과의 서신에서는 아래와 같은 행들을 찾을 수 있다.

어떤 단어를 써야 할지 망설여져요. 제가 취할 수 있는 단어는 몇 개 안 되는데, 그 각각의 단어 모두 최고여야만 하거든요. 하지만 떠올리죠. 이 세계에서 가장 생생한 장면조차 한 음절 안에, 아니, 한 번에 시 안에 놓인다는 사실을— (198면)

다정한 홀랜드 부인께 제가 또 다른 친구를 잃었다고 말씀드리면, 부인은 제가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 축 처치는 음절에 제 마음을 맞춘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으시겠지요. (…) 일부의 사람들만을 위해 흘리는 제 눈물을 용서하세요. 그 일부가 너무나도 많아요. 각자가 하나의 세계였으니까. (202면)

홀랜드 부인과 주고받은 서신에서 디킨슨은 지인들의 죽음과 여타의 사건들을 글로 풀어내고자 하는 자신의 노력에 대해 진심 어린 토로를 할 뿐만 아니라 이를 함께 논하고 또 어떻게 시어로 벼려낼 것인가에 대한 마음을 나눈다. 디킨슨 연구에서 자주 소환되는 불멸・죽음・자연・영혼・신성과 같은 주제들이 지닌 초월적 성격이나 이 주제들이 디킨슨을 둘러싼 모든 사회적・문화적 환경과는 무관하게 논의되어왔던 방향을 고려해보면, 리치의 지적이나 이 서간집의 구조 등은 자기만의 독자적인 목소리로 어떤 사건을 시화해나갈 때 믿을 만한 여성 동료들과의 교류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결핍으로 달콤하게』는 디킨슨만의 사유를 가볍게 또는 깊이 있게, 더러는 실험적으로 담아낸 서신들을 통해 그녀의 생각과 시의 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디킨슨이 당대의 사회적・문화적 문제에 어떻게 참여했는지, 그것이 그녀의 문학적 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새롭게 탐구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것이다. 서간집의 발간이 단순히 디킨슨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하는 것을 넘어서, 서간문이라는 장르의 학문적 가치와 연구 가능성을 크게 확장하는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결핍으로 단단하게』는 디킨슨의 텍스트들이 시대를 초월하여 다양한 독자들과 어떻게 의사소통할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예가 될 것이다.


1) 에이드리언 리치 지음, 이주혜 옮김 「집 안의 활화산: 에밀리 디킨슨의 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바다출판사, 2020) 87면.

서간문이라는 장르, “편지는 지상의 기쁨”

에밀리 디킨슨 서간집, 박서영 옮김 

『결핍으로 달콤하게』(민음사, 2023) 

│박선아│

朴善雅 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객원강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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