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급물살을 타고 학계와 시민사회에 퍼지고 있는 담론 중 하나는 ‘돌봄’에 관한 것이다. 개인은 자신의 사유와 행위를 수행할 능력이 있으며, 따라서 이성적인 선택과 결정을 통해 자율적인 개인 주권을 행사한다는 근대의 개인 신화에 반하여, 최근 부상한 돌봄 논의는 우리가 항상 도움을 필요로 하고 또 도움을 주는 관계망에서 살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돌봄’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듯, 돌봄 논의는 인간이 서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상호의존성’을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상호의존과 돌봄이 이제 우리 삶과 제도, 그리고 실천을 견인하는 보편적 원리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것이 그 진정한 함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의존이라는 ‘약함’의 징표를 통해 사회적 차별의 대상으로 여겨지던 장애 개념은 정치이론의 곁가지가 아니라 오히려 핵심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며, 이 책은 장애학이 가진 바로 그 담론적·정치적 가능성을 가늠할 좋은 무대를 제공한다.
아네일(Barbara Arneil)과 허시먼(Nancy J. Hirschmann)이 편집한 『장애의 정치학을 위하여』(Disability and Political Thoery)는 장애학이 단지 장애인에 관련한 이론과 실천에 그칠 수 없으며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자유・평등・정의・개인・공동체 등의 개념을 재정의하고, 그럼으로써 이전보다 나은 사회적 원칙과 정치적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데 필수적임을 강변한다. 사회가 약자를 정의하고 이들을 배제하는 방식은 물론 인간의 근본 조건을 사유하는 방식에 관계하는 장애학은 “정치학의 기본개념들과 시민권을 어떻게 재정의할 수 있는가?”(27면)에 대한 탐구로 자리매김된다. 근대 역사를 통해 사회가 장애를 정의하는 방식에 나타난 근본적 변화, 즉 의료적 모델에서 사회적 모델로, 사회적 모델에서 상호의존 모델로의 변화는 바로 장애가 얼마나 정치적 사유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장애를 개인의 결함으로 간주하는 ‘의료적 장애 모델’은 인간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분류하고 이를 통해 인구를 선별하고, 배제하며, 통치하는 권력을 합리화하는 강력한 담론적 기반이 된다. 장애의 자리를 인간의 신체보다는 그 신체를 둘러싸고 작동하는 언어적·물리적·정치적 사회제도, 즉 정치와 권력이 힘을 행사하는 장으로 파악하는 ‘사회적 장애 모델’은 장애인의 권리 주장을 용이하게 하고 이들을 위한 ‘편의제공’을 이끌어내기는 했지만, 인간을 권리와 의존, 자립과 의존으로 나누는 근대 이후 정치의 근본적인 이원성 틀 안에 있었기 때문에 장애인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기보다 약자로 자리매김하는 이중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 책의 사상적 토대이자 출판 동기인 ‘상호의존적 장애 모델’은 서구 근대사상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는 비장애중심주의를 내파하고 의존의 보편성에 기반한 정치학을 정초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장애를 둘러싸고 벌어진 이런 담론적 변화는 다양한 삶의 질곡을 거쳐오면서 의문을 제기하고 이를 변화시키기 위한 숱한 시도와 실천의 결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책 역시 이런 변화를 일상에 가져오기 위한 운동에 동참하는 하나의 형식이다.
열한 개의 장으로 구성된 『장애의 정치학을 위하여』는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우선 1장부터 4장까지는 본격적인 이론으로서 근대 정치사상의 근간을 형성해왔던 정전들이 기대고 있는 편견과 그 편견에서 기인하는 논리적·이론적 한계를 지적하고, 장애를 정치적 사고의 근원적인 원칙으로 제시한다. 1장 「정치이론과 국제적 관행에서의 장애: 평등과 자유를 재정의하기」에서 아네일은 로크(John Locke), 흄(David Hume), 롤스(JohnRawls)와 같은 서구사상을 정초한 주요 이론가들이 장애인의 배제를 통해 ‘시민’ 개념을 정의했다고 비판하면서, 이를 현재 장애에 대한 국제적 관행에서 입증되고 있는 상호의존의 원칙에 의해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네일은 장애가 한 개인의 정신이나 몸에 내재되어 있다는 의료적 모델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포함과 배제의 사회정치적 권력관계에만 집중해서 장애를 분석할 때의 한계도 뚜렷하다고 단언하면서, 장애는 특정 시기에 특정 그룹에게 두드러질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잠재적인 어떤 것이라고 밝힌다. 돌봄이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정체성을 반영하면서도 특정한 어려움에 대한 대처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장애는 보편과 특수의 변증법적 정치원리로 자리매김된다. 핀헤이로(Lucas G. Pinheiro)는 2장 「비장애중심주의적 계약: 지적장애와 칸트의 정치사상에서 정의의 한계」에서 칸트(Immanuel Kant)의 정언명령에 정식화되어 있는 이성적 자율성과 도덕적 인격의 등치가 궁극적으로 장애 정체성을 시민성이 아닌 자연의 영역에 위치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비판한다. 이어지는 3장에서 심플리컨(Stacy Clifford Simplican)은 「롤스의 정의론에서 장애의 부인과 그의 비판가들」을 통해 롤스가 사회계약에 참여할 수 있는 정의의 주체를 한계 짓는 과정에서 ‘정상적인’ 지적 능력에 부합하지 않은 장애인을 배제함으로써 장애 정체성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시민에 대한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정의를 통해 실질적인 불평등과 차별을 합리화하는 배제적 시민권의 길을 열었다고 비판한다. 허시먼은 4장 「장애를 만들어 내는 장벽, 할 수 있게 만드는 자유」에서 ‘이성적 사유를 통한 자유로운 의사결정의 주체’라는 서구의 개인 관념이 얼마나 문제적인가를 고찰한다. 허시먼은 자유, 능력, 이성, 정신을 동일선상에 놓고 장벽, 장애, 비이성, 몸을 그 반대항에 위치시키는 근대적 사고가 결국은 배제의 논리를 양산했을 뿐 아니라 자유에 대한 개념 자체도 왜곡시켜왔다고 비판한다. 몸/장벽의 부재를 자유의 조건으로 사유하는 방식은 물질성/몸과 담론/의미의 상호구성적 역할과 이를 통한 자유를 향한 실천을 무시하고 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5장부터 9장까지는 이 책의 두 번째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장애학에서 얻어진 통찰을 적용하여 다양한 사회정치적 문제를 새롭게 해석·진단하는 사례들로 구성되어 있다. 5장 「울스턴크래프트, 홉스, 그리고 여성들의 불안에 존재하는 합리성」에서 보팅(Eileen Hunt Botting)은 의료계에서 “여성과 부정적으로 결부시키면서 그것을 여성의 생리학적 특성 탓으로 돌리”는 탓에(253면) 흔히 젠더 특정적으로 간주되는 불안장애에 주목한다. 이성을 길잡이로, 이성 없는 정념을 광기로 묘사하는 홉스(Thomas Hobbes)와 달리 양자를 상보적으로 보는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를 참조하면서 보팅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불안은 현실적 도전에 대한 합리적 반응으로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여성들의 불안에 내포된 정치적 역량과 가능성을 온당히 평가할 것을 요청한다. 퍼거슨(Kathy E. Ferguson)은 6장 「난독증을 위한 선언」에서 난독증을 신경다양성의 하나로 평가하며, 따라서 다양한 방식으로 ‘가치 있는’ 차이의 하나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퍼거슨은 난독증을 교정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보기보다 난독증이라는 차이를 수용하고 이를 위한 다양한 교육방식을 개발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퍼거슨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편견일 가능성, 그리고 차이가 보편일 수 있다는 통찰을 난독증 사례를 통해서 보여준다. 7장 「비배제적 민주주의에서의 성원권과 참여를 다시 생각한다: 인지장애, 아동, 동물」에서 도널드슨(Sue Donaldson)과 킴리카(Will Kymlicka)는 ‘언어적 행위 주체성’이 없다는 이유로 잘못된 해석, 조작, 부당한 후견주의에 노출된 이들의 목소리와 권리를 ‘의존적 행위 주체성’의 관점을 통해서 재사유하고자 하며, 8장 「한나 아렌트와 장애: 탄생성과 세계에 거주할 권리」에서 매크레이리(Lorraine Krall McCrary)는 인간의 존엄에 대한 다양한 담론을 비교분석하면서 아렌트(Hannah Arendt)의 탄생성 개념이 가진 가능성에서 새로운 정치적 사고의 가능성을 본다. 9장 「단절된 존재들과 접속하기: 정신장애와 정치 혼란」 역시 8장과 마찬가지로 아렌트를 중심에 놓고 논지를 전개한다. 리(Theresa Man Ling Lee)는 파농(Frantz Fanon), 야스퍼스(Karl Jaspers), 그리고 아렌트를 연계하면서 인간을 독립적이고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서로 주체적으로 관계를 맺는 ‘상호주관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존재라고 설명하며, 제국주의·전체주의 등의 억압적 사회구조 속에서 무너진 타인과의 관계, 즉 상호주관성에 주목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정치적 주변화와 차별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말한다.
10장과 11장은 각각 폭력과 치료의 개념을 다룬다. 10장 「장애와 폭력: 민주주의적 포함과 다원주의에 대한 또 다른 요구」에서 트론토(Joan Tronto)는 장애인에 대한 폭력에 구조적인 차원이 개입되어 있음을 명백히 한다. 공적 영역인 시설뿐 아니라 사적 영역인 가정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장애인에 대한 폭력은 신체적 학대에서 선별적 낙태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다양하며, 이때 이런 광범위한 폭력을 발생·유지·순환시키는 사회구조는 폭력을 ‘정상화’함으로써 작동한다. 트론토는 인간의 취약성과 돌봄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은 윤리적 기반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돌봄과 폭력이 혼재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장애를 공포와 혐오의 대상으로 만드는 ‘비장애 이데올로기’의 해체야말로 핵심적인 사안이며 그 열쇠는 차이와 다양성의 존중이라고 강조한다. 11장 「‘치료’와 ‘편의제공’을 다시 생각한다」는 그 제목이 말해주듯 의료적 장애 모델과 사회적 장애 모델의 의미와 기능을 재평가하는 글이다. 여기에서 낸시 허시먼과 스미스(Rogers M. Smith)는 전통적으로 ‘치료’가 열등함이나 결함과 오랫동안 결부되어왔으며 ‘편의제공’이 ‘치료’개념에 담긴 부정성과 대립하면서 성장하여 왔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허시먼과 스미스는 이 두 접근법의 분기와 대립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양자를 결합하려고 시도한다. 이들은 ‘치료’가 반드시 장애 정체성의 거부나 삭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며, 치료가 고통에 대한 합리적 반응으로서, ‘정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돌봄의 존재태(state of being)로 향하는 과정으로 재정의 될 수 있다면 치료와 편의제공의 공존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장애의 정치학을 위하여』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첨예한 분야를 다루는 다양한 논문을 모아놓은 책이다. 이 책은 장애에 대한 이해가 우리 사회의 모순과 질곡, 폭력과 고통을 보는 데 얼마나 핵심적인지를 잘 알려주는 책이다. 이 책의 논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아마 ‘장애는 정치의 보편을 사고할 수 있게 하는 시금석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의혁・김은영│
姜義赫 전남대 영어영문학과 부교수.
金恩永 전남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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