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밖 56호] [연작기획] 사회적 고통: 고통, 언어, 소통 / 서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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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사회적 고통

우리는 모두 세계를 우리의 위대한 자아를 먹여 키울 젖통으로 생각하는 도덕적 아둔함 속에 태어난다. 도로시아는 일찌감치 그 아둔함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편 역시 그녀처럼 자기만의 중심이 있으며, 그 중심에 드리운 빛과 그림자는 언제나 자신의 것과 분명 다르리라는, 생각이 아니라 느낌처럼 생생한, 만질 수 있는 사물처럼 직접적인 감각으로 떠오른 그 깨달음을 인정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남편에게 헌신하며 그의 힘과 지혜 속에서 자신도 현명하고 강해질 것이라고 상상하는 편이 쉬웠을 것이다.1)

“누워 있을 때는 한숨을 쉬는 일이 없는데, 어쩌면 세워 심자마자 한숨을 쉬는지.” 마티가 말했다.

“그래?” 자일스가 대답했다. “난 한 번도 못 들었는데.”

마티가 소나무 묘목 하나를 구멍에 세운 뒤 손으로 잡았다. 바로 부드러운 음악 같은 숨소리가 들렸다. 다 자라 베일 때까지, 아마도 나무를 심는 두 사람이 쓰러지고도 한참 후까지 낮이나 밤이나 멈추지 않을 소리였다. 

“내 생각에는.” 마티가 다시 말했다. “사는 걸 정식으로 시작하기가 막막해서 한숨을 쉬는 것 같아. 우리처럼.”2)

이 글의 제목은 클라인먼(Arthur Kleinman), 다스(Veena Das), 록(Margaret Lock)이 집필・편집한 『사회적 고통』(Social Suffering)에서 빌려온 것이다. 세 편저자는 “고통의 소통 불가능성에 대한 서구 전통의 심각한 강박”에 문제를 제기하고 타자의 고통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둘러싼 질문을 고통을 일으킨, 또 이 고통의 존재를 인정 또는 무시하는 사회적 조건에 대한 질문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책의 기획의도를 밝힌다.3) 이 글은 『사회적 고통』의 문제의식과 목적을 공유하고 확장한다. 즉 재현과 공유가 어려운 고통의 사적 성격을 강조하는 비평 경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고통의 체험과 공유에 개입된 의미화의 사회적 성격을 환기하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다. 또 세 편저자는 일차적으로 “사회적 힘”이 야기한 고통을 사회적 고통으로 정의하지만 이 글에서는 고통의 의미 자체가 사회적으로 결정되며 고통으로 개념화되어 통용된다면 이미 사회적 고통이라고 제안한다.4) 그리고 이 제안의 과정에서 특정 현실의 모사(模寫)가 아니라 그 현실에 대한 공통의 의미와 가치, 궁극적으로 공통된 삶의 형식을 창조하는 언어의 기능을 부각하는 것이 이 글의 최종 목표다. 

본문에서는 20세기 후반의 비평적 대화를 주로 분석하지만, 첫머리의 두 인용문은 19세기 영국소설에서 발췌했다. 19세기에 출간된 두 작품의 인용문이 고통의 사적 성격을 강조하는 현대 비평의 핵심 전제와 귀결을 이미 압축적으로 제시하며 이를 통해 이 입장의 역사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1871년 출간된 엘리엇(George Eliot)의 『미들마치』(Middlemarch)에서 발췌한 첫 번째 인용문은 자신의 기대와 감정을 남편에게 투사하던 주인공 도로시아가 남편에게도 그만의 요구와 감정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어렵게 수긍하는 순간을 묘사한다. 남편에 대한 자신의 기대가 “터무니없는 환상”임을 깨닫고 남편이 자기만의 빛과 그림자를 경험하는 개인임을 인정하는 이 장면을 소설은 도덕적 성장의 순간으로 묘사한다.5) 저마다의 중심을 가진 개인이 세계를 각자의 인상으로 경험한다는 사실이 각성의 내용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두 번째 인용은 1887년 출간된 하디(Thomas Hardy)의 『숲 사람들』(The Woodlanders)의 한 장면이다. 병든 홀아버지를 돌보는 소녀가장 마티는 짝사랑하는 숲지기 자일스를 도와 묘목을 심으며 소나무의 한숨을 듣는다. 누워 있던 묘목을 세워 심었을 때 가지 사이로 바람이 지나며 나는 소리겠지만 마티는 그 소리를 자기처럼 산골에서 기쁨 없는 삶을 시작할, 그리고 일단 시작하면 낮이나 밤이나 멈추지 못할 나무들의 한숨으로 듣는다. 의도적인 거짓말과 전달되지 않는 진심들로 인물 간 교감이 반복해 실패하는 작품에서 마티가 생을 시작하는 순간 바람을 맞는 묘목의 한숨을 듣는 이 장면은 드물게 밀도 높은 교감이 성취되는 순간이다. 한숨이라는 비언어적 매개를 통해 산골 마을의 후경(後景)이 되는 삶, 또는 삶 일반의 막막함이 묘목과 마티, 자일스에게 이해되고 공유되는 순간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타인의 마음은 내 마음과 다르며 각자는 세계를 다른 음영으로 경험한다는 사실의 인정이 도덕적 성장이라는 『미들마치』의 제안이나 한숨 같은 비언어적 표현이 존재를 연결하는 더 순정한 매개라는 『숲 사람들』의 암시 모두 빅토리아 문학을 잘 모르는 현대인에게도 낯설지 않다. 건널 수 없는 인식론적 심연 너머의 타인/타자에 대한 비평이론뿐만 아니라, 타인의 마음은 알 수 없으며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아론적 착각이라는 주제를 담은 대중문화 산물도 흔하기 때문이다. 왜곡과 오해를 피하기 어려운 언어보다 한숨이나 눈물 같은 비언어적 표현이 더 진실하고 무매개적으로 존재의 내면을 전달한다는 생각 역시 현대의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모두가 다양하게 변주하며 재생하는 주제다. 

이 글이 비판적으로 검토할 비평의 핵심 논지, 즉 고통은 주체의 사적 경험이며 따라서 재현과 공유가 어렵다는 주장은 낯설지 않다. 고통의 사적 성격을 강조하는 비평적 대화가 20세기 후반 시작되어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미 활발히 진행된 탓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비평의 논지가 두 세기 전 소설에서 정식화되어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는 익숙한 인식, 즉 타인의 내면은 알 수 없고 그에 대한 언어적 재현은 불완전하므로 더 온전한 이해와 소통을 위해서는 언어 외적 매개가 필요하다는 제안과 유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넘어설 수 없는 경험과 감정의 궁극적인 경계로 작동하는 사적 개인이라는 개념, 그 개념에서 비롯된 인식・재현・소통의 문제를 반복하는 데서 오는 익숙함인 것이다. 

주체를 언어구조의 효과로 보는 관점이 20세기 내내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이후에도 고유하고 침범할 수 없는 개인의 내면이라는 개념이 일상과 학문적 담론에서 별 저항 없이 형태를 바꾸며 등장하는 현상은 언어와 사회 이전, 또는 그 바깥에 있는 주체라는 역사적 개념이 사유의 습관으로 깊이 자리잡은 정도를 입증한다. 겪는 사람이 고통을 고통으로 의미화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학습이 필요하고, 고통을 표현했을 때 상대가 이를 고통으로 인정할지 역시 사회적 대화 속에서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비평적 입장을 소개하며 이 글은 사적 자아라는 이 익숙한 개념 바깥에서 고통의 공유와 소통을 사유할 방식을 제시하고자 한다. 또 언어를 고립된 자아를 연결하는 불완전한 매개로 보는 견해에 대비해 언어가 개인을 연결하는 공통된 삶의 형식, 즉 언제나 이미 연결된 세계를 구성하는 매체임을 강조하는 관점을 소개한다. 타인의 고통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의 인정을 도덕적 각성의 귀결로 삼는 경향에 문제를 제기하고 비가시적 고통이 사회적 존재와 의미를 확보하는 과정, 그 과정에서 언어적 실천이 갖는 힘을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이어지는 본문은 먼저 20세기 후반 통증의 소통 불가능성을 둘러싼 대화를 주도한 스캐리(Elaine Scarry)의 논의를 소개하고, 스캐리의 통증 논의가 어떻게 사회 이전에 존재하며 사회로부터 자율적인 자아의 개념을 재도입하는지 논증한다. 이어서 개인과 사회, 언어의 상호 구성성과 연결성을 강조하는 역사적・문학적・철학적 입장 및 이 입장에 기반해 고통의 공유 가능성을 언어와 언어 사용 공동체에서 찾는 다스의 논의를 제시한다. 결론에서는 비트겐슈타인과 다스의 논의에 기반해 언어가 삶의 형식이며, 우리의 언어 사용이 곧 특정 고통을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삶의 형식 또는 특정 고통이 공유되거나 공유되지 않는 삶의 형식을 구성・수정・재구성하는 수행과 실천임을 강조한다. 

II. 고통, 언어, 소통 

『사회적 고통』은 고통이 소통 불가능하다는 주장에 대한 서구 비평계의 과몰입을 지적하며 스캐리의 『고통받는 몸』(The Body in Pain)을 이 대화의 출발점이자 중심으로 지목한다. 세 편저자는 겪는 사람에게는 통증이 부인할 수 없는 확실성을 갖지만, 그에 응답하도록 요청받은 사람에게는 상대의 통증이 불확실성을 의미한다는 차이, 또 그 차이를 매개할 언어의 실패에서 비롯된 소통 불가능성으로 이 주장을 요약하는데 이것이 『고통받는 몸』의 핵심 논지이기 때문이다.6)

세 편저자는 통증이라는 경험에 대한 개인의 확신 또는 회의를 둘러싼 이 대화가 사회적 고통이 생산되고 응답받거나 무시되는 조건들에 대한 질문보다 “덜 흥미롭고 덜 중요”하다는 이유로 대화의 중심을 이동할 필요를 제기한다.7) 그러나 “덜 흥미롭고 덜 중요”하다는 평가만으로는 『고통받는 몸』이 일으킨 반향과 1985년 출간된 후 지금까지 40년 가까이 유지된 그 논의의 지속적 영향력을 설명하기 어렵다. 고통의 재현과 소통 문제에 대한 고전으로 빈번히 인용되며 재생산되는 『고통받는 몸』의 논의 구도가 가진 문제를 구체적으로 분석할 수도 없다. 따라서 고통을 소통 불가능한 개인의 경험으로 이해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인식론적・윤리적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대화 구도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기 위해서는 긴 생명력을 유지해온 『고통받는 몸』의 이론적 효용이 무엇인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 그 효용을 가능하게 한 전제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고통받는 몸』의 출간 30주년을 기념해 발간된 학술지 『주체성』(Subjectivity)의 특별호 논문에서 매킨타이어(Michael McIntyre)가 묘사한 것처럼 『고통받는 몸』은 “놀라운” 성공을 거둔 비평서다. 출간 즉시 다수의 주요 학술지와 서평지에 소개되었고 출간 후 30년이 지난 뒤에도 아마존 문학이론 분야 판매 10위권 도서목록에 포함되었으며, 2015년까지 학술논문에 6000회 이상 인용되었기 때문이다.8) 매킨타이어처럼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지 않더라도 다수의 학자가 비판할 때조차도 신체적 고통의 재현과 소통을 둘러싼 학문적 대화에서 『고통받는 몸』이 갖는 기념비적 위상을 거듭 언급해왔다.9)

『고통받는 몸』이 출간 즉시 학계의 큰 관심을 끈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주체와 주체의 경험 일체가 언어적 구성물임을 강조하던 1980년대의 지적 분위기 속에서 스캐리가 언어화될 수 없는 신체감각, 좀 더 구체적으로는 신체적 통증의 특수성과 그 함의에 주목했기 때문이다.10) 스캐리는 주체의 여러 내적 상태가 그 상태를 설명할 외적 대상을 갖는 것과는 달리 통증은 지시적이거나 상관적인 외부 대상을 갖지 않는 내면 감각이라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좋아한다는 감정은 누구 또는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이고 보거나 듣는 지각이나 배고픔 같은 신체감각도 무언가를 보거나 듣는 상태, 어떤 것을 먹고 싶은 욕구라는 점에서 외적 대상을 갖는다. 그러나 스캐리에 따르면 신체적 통증은 이런 외적 대상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주체가 느낄 수 있는 신체 바깥의 “무엇에 대한, 또는 무엇을 향한” 통증이 아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특징보다 [지시적이거나 상관적인 외부] 대상을 갖지 않는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언어적 객관화에 저항한다”.11) 언어나 공유 가능한 다른 외적 대상으로 객관화될 수 없는 신체적 통증은 따라서 온전히 주체만이 느낄 수 있는 내적 감각으로 남는다. 그 결과 설사 지척의 거리에 있다고 해도 통증의 당사자와 관찰자는 완전히 다른 두 실재, 즉 통증을 생생하게 느끼는 실재와 도저히 그 통증을 알 수 없는 실재 간의 “절대적 단절”에 의해 분리된다.12)

언어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극심한 통증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하고 비명을 지를 때처럼 언어를 적극적으로 파괴하기도 하는 신체적 통증에 대한 『고통받는 몸』의 관심은 정치적이고 윤리적이다. 고문받는 사람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신체적 고통을 고문 도구로 구체화하고 그 고문 도구를 다시 고문자의 힘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사용하는 경우처럼 신체적 통증을 정치적으로 전유하는 사례가 주된 분석과 비판 대상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고통받는 몸』은 고문과 전쟁처럼 신체의 부상과 고통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전유하는 경우만이 아니라 고통을 줄이고 방지하려는 윤리적 이유로 이를 구체화하는 경우 역시 고통을 표현하는 “기호”와 그것을 느끼는 “몸” 간의 단절을 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강조한다.13) 통증이 기호로 가시화될 때 신체감각인 “통증의 본질은 더 깊은 비가시성의 영역으로 밀려나기” 쉽기 때문이다.14) 따라서 윤리적인 목적으로 통증을 언어화하는 경우에도 그 표현은 불완전한 재현, 신체감각인 통증을 더 소외시키고 보이지 않게 하는 재현이라는 자의식적 성찰의 대상이 된다. 

『고통받는 몸』이 받은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관심의 상당 부분은 언어를 거부하며 언어적 재현의 진실성과 도덕성을 문제 삼을 수 있게 하는 신체적 통증에 대한 이상의 논의에 집중되었다. 이 논의에서 통증은 주체에게만 접근 가능한 내적 경험으로서 언어에 저항할 뿐만 아니라 언어적 재현에 대한 정치적・윤리적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 외부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즉 언어의 효과로 환원되지 않는 주체 고유의 경험이자, 오염된 재현에 노출되지만 그 재현에 포섭되지 않는 신체적 진실로서의 통증 개념 덕분에 언어의 감옥 외부에 자리한 신체의 정치적・윤리적 함의에 주목하는 여러 학문적 대화를 촉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언어에서 신체로 비평적 관심이 이동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고 평가받는 스캐리의 통증 논의는 정작 20세기의 ‘언어적 전회’ 이후가 아니라 그 이전, 좀 더 구체적으로 서구 근대 시기의 자유주의적 주체・언어・재현 개념에 기반하고 있다. 다수의 학자가 『고통받는 몸』의 통증 개념이 언어와 사회로부터 자유로운 초월적 주체를 전제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예를 들어 라로코(Steve Larocco)는 언어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언어를 파괴하는 스캐리의 통증 개념이 “암묵적으로 언어에 선행하는 인간주체, 그 본질이 물질성에 있으며 통증을 겪을 때 언어와 재현, 문화 외부에 자리잡은 육체성을 노출하는 인간주체 개념”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15)애블로(Rachel Ablow)는 언어와 문화 외부에 자리잡은 이 주체 형식을 더 구체적으로 역사화한다. 『고통받는 몸』이 전제하는 주체, 즉 “사회적인 것에 앞서 존재하는 사적” 주체가 19세기에 공고한 이념으로 자리잡은 “자유주의적 주체성” 개념에 기초한 것임에 주목하기 때문이다.16) 더하여 애블로는 이렇게 사회 이전에 존재하며 사회로부터 자유로운 내면을 가진 주체를 상정하면 고립된 개별 주체를 연결하며 사회성을 창조하는 언어는 “[언어에] 선행하는 [주체의] 존재 상태를 반영하려 하지만,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재현의 매개로 이해된다고 덧붙인다.17)

스캐리의 통증 논의가 공사(公私) 영역 구분에 근거해 확립된 19세기의 사적 주체 개념 및 그 주체를 연결하며 사회성을 창조하는, 그러나 접근할 수 없는 개인 내면에 대한 불완전한 반영 도구로서의 언어 개념에 기반하고 있다는 애블로의 지적은 특히 더 주목을 요한다. 사적 내면을 신체적 통증으로 교체하더라도 사회와 언어로부터 독립된 주체의 경험과 감각을 상정하는 스캐리의 논의가 고립된 개인 간의 연결 문제를 둘러싼 이전 시기의 인식론적이고 윤리적인 아포리아를 재생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18) 따라서 소통 불가능한 사적 통증에 대한 스캐리의 논의에서 이 글 첫머리에서 소개한 두 인용문의 제안, 즉 자기만의 중심을 가진 개인과 이들을 연결할 불완전한 매개로서의 언어에 대한 19세기적 성찰을 발견하는 것은 놀랍지 않다. 타인의 고통은 알 수 없으며 고통에 대한 재현은 언제나 불완전하다는 사실의 인정이 윤리적 인식의 귀결로 제시되는 것 역시 새롭지 않다. 양자 모두에게 타인의 내면과 고통은 소통을 요구하는 한편 접근 불가능한 사적 영역으로 이해되며, 알아야 한다는 당위와 알 수 없다는 한계의 교착 상황이 인식론적이고 윤리적인 실천 가능성의 조건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언어에서 신체로의 전환을 촉발했다고 평가받는 『고통받는 몸』의 통증 논의는 결국 언어와 사회 외부에 존재하는 주체 내면이라는 역사적 개념을 소환하되 이를 통증이라는 개념으로 국지화하고 신체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스캐리의 논의에서 통증을 재현하고 공유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일차적으로 주체가 세계로 자신을 확장해 타인과 연결될 수단의 결핍이자 언어적 매개의 한계로 제시된다. 그러나 동시에 소통 불가능한 이 통증은 전유 너머의 고유한 주체 감각으로서 오염된 언어적 재현을 문제 삼을 수 있게 하는 근거로 기능한다. 자유주의적 주체의 내면이 사회로부터의 단절에서 자율성의 근거를 확보하는 것처럼 언어가 실패하는 곳에 재현의 실패를 증명하는, 신체적 통증이라는 주체 경험의 진실이 자리잡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통받는 몸』의 30주년 기념 학술지 특별호 편집자들은 스캐리의 통증 논의가 몸의 경험에 주목함으로써 당시 지배적이던 언어적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거나, [그 설명이] 문제가 되는 지점”을 적시해 큰 파급력을 행사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19) 그러나 스캐리의 통증 개념이 언어적 호명과 전유 너머에 자리한 주체성・경험・의미의 가능성을 시사했다면, 이는 사회와 개인의 구분을 재도입하고 개인의 내면을 언어를 포함한 사회성의 외부에 위치시킨 결과다. 그리고 주체에 대한 언어의 지배력을 강조하거나 언어에 대한 주체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두 입장은 주체와 언어, 사회의 구분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같은 사고방식을 전도된 형식으로 반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체적 통증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타인의 고통을 재현하거나 이해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제안하는 인문적 성찰들은 고통의 전유 가능성과 재현의 정치성에 대한 타당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사회로부터 독립적인 주체의 내면이라는 개념을 재소환하는 경향이 있다.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주체 경험의 진실성과 필연적으로 오염된 경험의 재현이라는 이분법도 이와 함께 반복적으로 재생산된다. 그리고 글의 첫머리에서 인용한 두 편의 19세기 소설처럼 타인의 경험과 내면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윤리적 성찰의 결론으로 제시하거나 비언어적이고 무매개적인 소통을 대안으로 상상하는 귀결로 이어지기 쉽다.20) 그러나 고통을 구성원의 합의를 통해 의미가 공유된 사회적 기호, 그 의미가 주체에게 학습되고 내면화되며 사용을 통해 재확립 또는 수정되는 감정이나 의식 상태로 이해하면 고통・언어・소통에 대한 다른 문제 설정이 가능하다. 

18세기 영국사회의 연극성에 대한 해들리(Elaine Hadley)의 논의는 사회적 정체성 및 감정구조에 선행하는 사적 내면을 상정하지 않는 주체성의 역사적 예를 제시함으로써 이런 문제 설정을 위한 구체적 참조 사례를 제공한다. 톰슨(E. P. Thomson)을 비롯한 다수의 역사학자들 또한 시장사회 확립 전 18세기 영국사회가 가진 연극적 성격, 무대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발견되는 연극적 성격을 분석한 바 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 영국사회에서는 사회적 신분과 역할에 따라 보호와 처벌, 감사와 두려움, 존중과 무시 등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고, 이 상호작용은 연극처럼 공적이고 가시적인 방식으로 행해졌다. 존경이나 두려움 등의 감정이 절, 호칭, 시선 등을 통해 외적으로 표현되고 상연되었으며 이런 가시적 상호작용을 통해 성원 간에 일상적으로 공유되고 재확립되었다는 것이다. 이 분석에 기반해 해들리는 이런 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이나 감정은 사회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례화된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고 주장한다. 또 사회적 의례의 수행을 통해 형성된 자아의식, 미덕, 감정 등이 개인의 성격이라기보다 그 공동체의 자질과 특성으로 이해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간단히 말해 20세기 비평가들이 조금 부정확하게 ‘자아의식’이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그것은 [상호]존중을 공적이고 연극적인 방식으로 교환함으로써 계속해서 재부가되는 보호 관계, 사회적・지리적 연결성, 위계적 역할 속에 자리했다. 자아를 구성하는 미덕이나 감정 역시 사적 공간에서 기원해 공적 공간에서 표현되는 것이 아니었다. 주체 위치가 사적 공간에 선험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덕이나 감정은 사회적인 덕이자 감정이다. 이때 ‘사회적 감정’은 개인이 사회에 대해 가진 감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체성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사회적 상호작용과 무관하게 또는 그 ‘외부’에 존재하는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감정을 의미한다. 사회적으로 생산되었으므로 이런 감정이나 미덕은 개인의 특징이 아니라 사회의 특징이고 개인의 특수한 성정이 아니라 사회의 보편적인 성품이다.21)

이 세계에서는 사회의 성원이 각자의 역할・가치・의미・감정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같은 대본”을 공유하기 때문에, 또 대본에 따른 역할이 개인의 정체성・자아의식・감정구조를 규정하기 때문에 내면과 외면의 일치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22) 개인의 내면이 먼저 있고 내면을 지시하거나 재현할 대본을 만든 것이 아니라 공통의 대본 상연을 통해 자아가 구성된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대본을 공유하는 성원들은 서로의 정체성・감정・가치를 이미 알고 있으며, 대본의 일상적 상연을 통해 그 지식을 확인하고 갱신한다. 그러나 이 대본은 추상적 구조가 아니다. 약속된 상호작용의 반복적 상연과 일상적 수행을 통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주와 농노의 장기간에 걸친 온정주의적 책임・보호・지배 관계가 공장주와 노동자의 익명성에 기반한 계약 관계로 이행되어 사회적 상호작용 수행의 조건이 달라지면 대본의 구속력은 약해지고, 수행의 빈도와 밀도는 줄어들다가 결국 사라진다. 

해들리가 소개한 주체 양식은 시장경제와 개인 개념의 부상과 확립 이전 영국사회에서 기능한 주체성의 역사적 형식이다. 그러나 해들리는 자신이 “멜로드라마적 양식”이라고 부르는 문학・문화적 재현 방식이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되는 주체성에 대한 이런 이해와 지향을 유지해왔음에 주목한다. 낭만주의 시와 소설 등 개인의 내면과 심리에 초점을 맞추는 문학양식이 우세해지는 19세기에도 공동의 가치와 감정 형성 및 공유를 통해 주체와 주체가 속한 공동체가 동시에 구성되는 과정을 작품의 중심에 두는 재현 양식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악당과 영웅을 그릴 때 이 재현 양식은 따라서 인물의 심리, 고유한 개인으로서 그들이 갖는 성격적 특징과 그 발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주요 인물이 대변하는 선악 간 대결을 전면화하고 그 도덕적 가치에 대한 합의와 공통 감정을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23) 합의된 가치와 감정의 형성이 주된 목적이므로 재현 대상의 왜곡 없는 모사는 중요한 고려사항이 아니다. 현실의 모사가 아니라 공유된 현실의 구성이 재현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해들리의 관점에서는 원본과 재현의 일치가 중요해지는 것, 그래서 왜곡 없는 대상의 모사를 지향하는 “사실주의” 개념이 부상하는 것이야말로 상당 부분 “멜로드라마적 양식”이 추구하는 공유된 세계가 약해진 결과이자 그 증상이다.24) 개인과 개인의 고유한 내면 및 영혼에 집중하는 서사 양식과 경합하며 유지되어온 멜로드라마적 재현 양식의 지향은 자연히 상실되어가는 이 공유된 세계를 다시 창조하는 것이다. 이 글의 맥락에서라면 고통의 의미뿐 아니라 공동체의 성원이 고통을 표현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이 합의가 개인들의 가치와 감정을 구성하는 동시에 그들을 연결하는 세계를 만들려는 것이다. 

언어철학의 영역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기능과 의미의 작동방식에 대해 해들리의 “멜로드라마적 양식”과 공명하는 관점을 제시한다. 대상의 모사가 아니라 의미의 공유를 언어의 주된 기능으로 이해하는 한편, 공유된 의미가 추상적 체계나 구조로 외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사용 속에서 그 유효성을 승인 또는 거부받는다고 제안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어린아이가 “통증”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배워 사용하는 과정을 예로 든다. 아이가 다쳐서 울면 어른이 와서 아이에게 말을 걸고, 아프다고 외치는 법이나 아픔을 설명하는 문장을 가르친다. 다쳤을 때 우는 것은 자신이 다친 것, 그래서 아프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통증 행동”(pain-behavior)인데 언어를 배움으로써 아이는 이제 우는 대신 통증이나 아픔 같은 단어를 써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태를 알릴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경우 통증이라는 단어가 울음, 또는 울음으로 알리고자 하는 아픔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통증 행동”인 울음의 기능, 즉 신호와 소통의 기능을 대체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25) 그러나 통증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매번 배운 대로 통용되지는 않는다. 그 의미를 학습한 맥락과 다른 맥락, 비트겐슈타인이 “언어게임”이라고 부르는 화용론적 맥락이 달라지면 단어의 의미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학습을 통해 특정한 감각을 통증으로 인식하고 언어로 그 감각을 표현하는 법을 익히더라도 그 단어의 의미와 용례가 유효할지는 언어게임의 규칙과 참가자들의 동의에 달려 있다. 언어적 표현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언어를 파괴하는 극심한 신체적 통증, 따라서 온전히 주체의 내적 감각으로 남는 통증을 설명하기 위해 스캐리는 고문을 예로 든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 따르면 이 상황이 시사하는 것은 통증을 표현할 언어의 부재가 아니라 고문이라는 언어게임의 맥락에서 언어를 포함한 피고문자의 “통증 행위”가 그 통상적 의미와 용례를 상실했다는 사실이다. 또는 해들리의 설명 틀을 빌리면, 책임・보호・연민・공감을 가능하게 하는 역할, 가치, 감정에 대한 상호인정의 규칙이 깨진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다.26)

『사회적 통증』의 저자들이 고통을 겪는 사람과 그 고통을 보거나 듣는 사람 간의 경험적 직접성의 차이에서 “고통이 인정되거나 부인되는 문화적 과정”으로 논의의 초점을 옮기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27) 인식론적인 확신이나 재현의 정확성이 고통의 존재에 대한 인정이나 그에 대한 윤리적 반응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고통의 존재와 의미에 대한 언어게임 참가자의 인정과 합의다. 『사회적 통증』의 편저자 중 하나인 다스는 내 고통이 타인의 신체에 위치하는 상황을 가정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사고실험을 소개하며, 내 고통의 존재와 의미가 타인의 합의에 달린 이 상황을 “당신 몸에 자리잡은 나의 고통”으로 부른다.28) 이 사고실험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지각의 도움 없이, 예를 들어 눈을 감고 있어서 통증이 있는 신체 부위를 보지 못하고 느낌만으로 통증을 인지하는 상황을 가정한다. 눈을 감은 채 그는 느낌에 의지해 왼손에 통증이 있다고 말한다. 누군가가 아프지 않은 그의 오른손으로 통증 부위를 눌러보라고 청한다. 시키는 대로 한 뒤 눈을 뜬 그는 자신이 상대의 손을 누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다.29) 다스는 이 사고실험에서 상대방의 손에 자신의 통증 위치를 표시한 사람이 언어게임을 시작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상대의 손을 누른 행위가 표면적으로는 통증의 위치나 강도에 대한 정보 전달처럼 보이더라도 그 행위의 더 우선적인 목적은 손에 통증이 있다는 자신의 발화에 대한 인정과 응답의 요구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다. 좌표처럼 정확한 통증의 위치와 그 강도에 대한 수치화된 정보를 가지고 상대의 손에 이를 재현한다고 해도, 다스가 강조하듯 상대는 내 통증 발화에 응답할 수도 있고 응답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정보와 재현의 정확성이 통증에 대한 응답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고실험에서처럼 축자적으로 내 통증이 상대의 몸에 표시된 경우가 아니라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 다스는 우리의 통증은 언제나 내 통증에 대한 인정과 응답을 결정할 당신의 몸에 거주한다고 제안한다.30)

“삶의 형식”은 나의 통증, 더 근본적으로는 내 존재의 의미가 거주하는 “당신의 몸”을 추상화한 비트겐슈타인의 개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하나의 언어를 상상하는 것은 하나의 삶의 형식을 상상하는 것”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언어 사용이 “삶의 형식의 일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31) 다른 주요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삶의 형식”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정의하지 않는 비트겐슈타인을 대신해 다스는 우리가 언어를 통해 습득하고 언어 사용을 통해 다시 세계에 투사하고 재생산하는 “자연스러움”의 기준으로 “삶의 형식”을 정의한다.32) 이는 한편으로 서로 다른 문화 간에 존재하는 차이, 이를테면 정치 지도자의 “대관식”이 자연스러운 문화와 “취임식”이 자연스러운 문화 간의 다른 삶의 “형식”들을 의미한다. 동시에 이는 “삶” 자체의 형식, 즉 인간은 “먹고” 새는 “쪼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느끼게 하는 다른 “삶”들의 형식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언어를 배울 때 우리는 단지 단어의 의미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여러 “삶”의 다른 “형식”들을 배우고 언어 사용을 통해 이 “삶”의 “형식”들을 세계에 다시 구현한다.33) 예를 들어 가축을 도축한다고 말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삶의 형식에서 가축은 살해될 수 없다. 반대로 인간을 죽이는 것을 살해로 표현하는 삶의 형식에서 인간은 도축될 수 없다. 다스가 강조하듯 삶과 언어는 외재적인 관계에 있지 않고 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34)

스캐리의 통증 개념처럼 언어에 저항하는 주체 내면의 고유한 경험을 강조하는 비평적 입장이 간과하는 것은 삶과 언어 간의 이 상호구성적이고 내재적인 관계다. 개인과 사회를 구분하고 사회 외부에서 개인의 자유를 찾는 전통의 연장에서 언어에 외재적인 “삶의 형식”을 상정하는 것은 단절을 통해 주체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한 방식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그러나 단절된 개인 간의 궁극적인 소통 불가능성만이 이렇게 확보한 자율성의 대가는 아니다. 언어와 삶이 내재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가능한 실천, 즉 다른 언어의 상상과 사용을 통해 다른 삶의 형식을 구현할 가능성에 대한 탐색도 방기되기 때문이다. 

다스는 인도-파키스탄 분할 시기의 폭력적 상황을 다룬 파키스탄 작가 만토(Sadat Hassan Manto)의 단편 「열어」(“Khol Do”)를 분석하며 언어가 세계에 존재의 장소를 마련하는 방식, 더 구체적으로는 장소를 갖지 못한 존재의 자리를 마련하는 방식의 예를 보여준다. 분할 시기의 혼란 속에 딸과 피난을 떠난 늙은 아버지는 중간에 딸을 잃어버렸다가 이후 피난민 보호시설에 시체로 실려 온 딸을 본다. 더위와 악취 때문에 의사가 창을 가리키며 열라고 소리치자 죽었다고 생각한 딸이 하의를 더듬어 연다. 가사 상태지만 실종되었던 기간 내내 들었던 말에 자동반사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의사는 그 행동이 시사하는 사실에 곤혹스러워 어쩔 줄 모르지만, 아버지는 기쁨에 차 딸이 살아 있다고 소리친다.35) 다스는 성폭력에 노출된 여성은 죽은 것과 같고 특히 그 아버지는 집안의 명예를 더럽히기보다 딸이 죽기를 바라는 사회에서, 살아 있다고 외치는 아버지의 말이 딸이 세계에 존재할 “집”을 마련한다고 분석한다. 성폭력 피해 여성을 살아 있어도 죽은 존재로 간주하는 “삶의 형식”에서 ‘열라’는 말에 반응한 딸의 움직임은 정확히 자신의 사회적 비존재를 보여주는 행동이지만, 그 행동을 생명의 신호로 해석하고 기쁨을 표현한 아버지의 말이 딸이 존재할 수 있는 다른 “삶의 형식”을 열었다는 것이다.36) 비트겐슈타인의 제안처럼 언어는 단지 이미 존재하는 삶을 모사하는 도구가 아니라 삶 자체를 이루는 형식이며, 다른 언어의 상상과 실천은 다른 삶의 상상과 실천이기 때문이다. 고통의 사회성을 부각하는 비평적 입장이 주목하는 점 역시 고통이 사회적 합의와 인정을 통해 존재와 의미를 확보한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 합의와 인정의 범위와 방식을 바꿀 수 있는 언어의 이런 실천적 가능성이다. 

III. 미메시스, 연결을 위한 모방

개인과 사회의 구분을 전제하고, 재현과 소통이 불가능한 고통의 사적 성격을 강조하는 비평 경향에 반해 이 글은 “같은 대본” 또는 공유된 “삶의 형식”인 사회적 규약과 언어를 통해 고통의 의미가 소통된다고 주장함으로써 고통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했다. 그리고 고통을 재현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 대신 공유되지 못한 고통을 공유할 새로운 의미의 장, 즉 다른 “삶의 형식”을 구성할 수 있는 언어의 생산적이고 실천적인 능력에 주의를 환기하고자 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언어를 통해 고통의 의미가 공유된다는 주장이 언어가 경험의 동일성이나 유사성을 제공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시 말해 언어적 재현이 제공하는 경험의 유사성이 고통의 의미를 공유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아니다. 고통의 사회성을 강조하며 이 글도 해들리와 비트겐슈타인의 제안처럼 서사와 언어의 기능을 세계의 지시나 모사 이전에 공유된 세계 또는 공통된 “삶의 형식” 창조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재현의 핍진성과 진실성보다 고통의 의미와 그에 대한 대응을 둘러싼 공동체의 합의가 고통의 공유 가능성을 결정한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러나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언어관에 따르면 유사성의 재현 자체가 연결을 창조하려는 행동이기도 하다. 「모방 능력에 관하여」(“On the Mimetic Faculty”)에서 벤야민은 모방 능력을 대상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유사성을 창조하는 능력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언어 사용을 가장 높은 수준의 모방 행위로 정의한다. 아이들이 기차나 물레방아의 움직임을 흉내내는 것, 또 의성어의 사용이 형태 또는 소리의 감각적 유사성을 발견해 이를 모방하는 것이라면, 언어는 감각적 유사성이 보이지 않는 대상에서도 유사성을 발견하거나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체의 움직임에서 인간 운명의 상동성을 발견하는 점성술처럼 언어는 대상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유사성을 읽어내고 모방 또는 생산한다. 보이지 않는,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 모를 유사성을 발견하고 창조하는 것이다.37)

언어를 거부하는 또는 언어가 그 재현과 매개에 실패하는 고통의 사적 성격을 강조하는 관점이 간과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모사나 지시처럼 보이는 경우라도 언어 행위의 궁극적 지향이 연결의 창조라는 이 같은 통찰이다. 그 결과 이 관점은 언어가 왜곡 없이 고통을 재현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고통의 공유를 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고통의 표현을 인정하지 않는, 다시 말해 연결을 거부하는 특정한 언어게임의 규칙들이 고통의 공유를 막는 실질적 장애물이자 비판적 개입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주목하지 못한다. 고통의 사회성을 강조하며 이 글은 나의 고통이 언제나 “당신의 몸” 또는 내 통증의 존재를 알리는 손가락이 당신의 손바닥에 닿아 시작된 언어게임 속에 거주한다고 제안했다. 또 고통을 알리는 나의 언어적 “통증 행위”는 통증의 묘사 이전에 내 발화에 대한 수신과 인정의 요청이며, 그 수신과 인정을 통해 나의 고통이 존재할 수 있는 “삶의 형식”을 만들려는 시도임을 주지하고자 했다. 언어에 외재적인 주체와 세계를 상정하는 대신 삶과 언어를 내재적 관계로 이해하면 인정되지 않는 고통의 형식들,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 존재의 인정받지 못한 “통증 행위”를 수신하고 그에 응답하기로 합의하는 새로운 “삶의 형식”을 생산할 수 있는 언어의 역량을 주목할 수 있다. 소통 불가능한 개체의 내면과 그 내면을 재현할 언어적 한계에 대한 비평이론의 지속적 관심에 반해 연결된 세계에 고통의 자리를 만드는 언어의 힘을 환기하는 것이 고통의 사회성에 주목하는 이 글의 최종 목적이다.


1)徐晶恩 한국교통대 영어영문학과 조교수. 최근 논문으로 「『전염병 일지』 혼종 서사 문체 번역의 고려사항들: 인본주의 서사로서의 특징을 중심으로」(2023)가 있다.

George Eliot, Middlemarch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1997) 146면. 

2) Thomas Hardy, The Woodlanders (London: Pen Books, 1980) 68~69면.

3) Arthur Kleinman, Veena Das and Margaret Lock, Introduction to Social Suffering, ed. Arthur Kleinman, Veena Das and Margaret Lock (Berkeley: U of California P, 1997) xiii면.

4) 같은 책 ix면. 모든 유기체 또는 존재의 통각(痛覺), 마모, 훼손에 고통이라는 의미가 부여되지는 않으며 자극이 고통으로 의미화되려면 사회적 인정과 합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이 제안의 전제다. 본문에서 다시 논의하겠지만 『사회적 고통』의 편저자 중 하나인 다스는 다른 글에서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언어철학에 기대어 고통의 의미가 사회적 합의에 따라 결정된다는 주장을 전개한다. 원인이 사회적인 경우만을 “사회적 고통”으로 정의하는 『사회적 고통』의 관점보다 넓게 고통의 사회성을 조명하는 것이다. “사회적 고통”에 대한 이 글의 정의는 고통의 의미가 언어 사용자들의 합의에 달려 있다는 비트겐슈타인과 다스의 논의에 기반
한다.

5) Eliot, 앞의 책 같은 면.

6) Kleinman, Das and Lock, 앞의 책 xiii면. 본문에서 스캐리나 『고통받는 몸』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미주에서는 요약한 주장의 출처가 스캐리의 『고통받는 몸』임을 밝힌다. xxvi면, 미주 5번 참고.

7) 같은 책 xiii면.

8) Michael McIntyre, “Rethinking The Body in Pain,” Subjectivity 9.4 (2016) 382면.

9) Cliffordvan Ommen, John Cromby and Jeffery Yen, “The Contemporary Making and Unmaking of Elaine Scarry’s The Body in Pain,” Subjectivity 9.4 (2016) 333면; Rachel Ablow, Introduction to Victorian Pain (New Jersey: Princeton UP, 2017) 5면 및 141면 미주 11번 참고.

10) 앞서 언급한 『주체성』 특별호 편집자들은 『고통받는 몸』이 출간된 1985년 이후 이론적 관심이 언어에서 신체로 이동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고통받는 몸』이 신체, 정동, 물질성 일반에 대한 2000년 전후의 폭발적인 이론적 관심이 시작된 일종의 분수령이라고 제안하는 것이다. Ommen, Cromby and Yen, 앞의 글 334면. 『고통받는 몸』에 대한 또 다른 학술지의 특별호 서론 저자들 역시 “신체의 부각”(foregrounding of the body)이 『고통받는 몸』의 주요한 특징이자 기여임을 강조한다. 그들은 『고통받는 몸』을 “물질과 신체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늘어나던 시기의 시대정신”을 포착한 저작으로 평가한다. Leila Dawney and Timothy J Huzar, “Introduction: The Legacies and Limits of The Body in Pain,” Body and Society 25.3 (2019) 3~4면.

11) Elaine Scarry, The Body in Pain (Oxford: Oxford UP, 1985) 5면.

12) 같은 책 4면.

13) 스캐리의 논의에서 이 “기호”(sign)는 구체적으로 망치, 칼, 못처럼 신체적 통증을 일으킨 무기를 의미한다. 이를테면 칼에 베이는 듯한 아픔을 표현하거나 못에 찔리는 것 같은 통증을 표현하는 경우 칼이나 못은 통증을 표현하고 지시하는 “기호”가 된다. 스캐리는 이를 통증을 일으킨 원인 또는 힘이라는 의미에서 “작인언어”(agency language)로도 부른다. 같은 책 17면.

14) 같은 책 13면.

15) Steve Larocco, “Pain as Semiosomatic Force: The Disarticulation and Rearticulation of Subjectivity,” Subjectivity 9.4 (2016) 350면.

16) Ablow, 앞의 글 4면. 애블로는 자유주의적 주체를 “사회적인 것 전에 존재하는, 사적이고 자의식을 가진” 주체 이상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그 개념의 역사적 기원이나 변화 과정을 설명하지도 않는다. 실제로 함의가 넓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영역에서 강조하는 특징이 다르며 기원이나 개념의 변화 양상 역시 논쟁적인 주제이기 때문에 “자유주의적”(liberal)이라는 수식어를 요약적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논의의 맥락상 애블로는 사회로부터 자유로운 심적 내면을 가진 주체를 자유주의적 주체의 핵심 정의로 사용하고 사적 주체라는 개념과 그 개념에서 비롯된 문제가 빅토리아 시기에 중요한 문화담론으로 자리잡았다고 전제하는데, 이 글 역시 애블로의 개념 정의와 전제를 공유한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분리가 18세기 후반 서구 산업혁명 시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역사적 현상이며, 사회로부터 자율적인 내면과 영혼 개념이 집으로 공간화된 사적 영역으로 공고화된 시기가 빅토리아 시대라는 견해는 큰 이견 없이 확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애블로가 사용하는 “자유주의적 주체” 개념에서 핵심적인 자유는 지위, 신분, 성별 등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조건에 구속되지 않는 주체 내면의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남성과 여성의 영역으로 구분되는 양상에 초점이 있긴 하지만 “영역 구분 이데올로기”(ideology of separate spheres)의 특징과 형성 배경에 대한 역사적 설명을 위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Catherine Hall, “The Early Formation of Victorian Ideology,” White, Male and Middle Class: Explorations in Feminism and History (Cambridge: Polity P, 1992) 75~93면.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구속을 초월하는 내면과 욕망을 가진 근대적 주체(modern subject) 개념이 18~19세기의 영국 가정소설을 통해 주조되는 과정을 분석하는 암스트롱(Nancy Armstrong)의 다음 책 3, 4장도 참조하라. Nancy Armstrong, Desire and Domestic Fiction: A PoliticalHistory of the Novel (New York: Oxford UP, 1987).

17) Ablow, 앞의 글 7면.

18) 스캐리의 통증 논의가 자유주의적 주체성 개념에 기반한 것임을 통찰력 있게 지적하긴 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인식론적・윤리적 아포리아를 지적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애블로의 목적은 아니다. 책의 서론에서 밝히듯 애블로의 주된 관심은 통증을 사적 경험으로 보는 관점과 통증 또는 고통의 사회성을 강조하는 관점,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인 두 관점 간의 대화가 19세기 영국문화에서 어떻게 경합하며 특정한 주체 양식에 대한 이해와 생산을 불러왔는지 검토하는 것이다. 같은 글 4면.

19) Ommen, Cromby and Yen, 앞의 글 334면.

20) 이와 관련하여 2000년대 초반 정동(affect) 개념에 쏟아진 폭발적 관심 역시 의미화의 매개를 거치지 않는 신체적 힘(force)의 개체 간 흐름 또는 전염 능력에 집중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만하다. 정동을 “신체와 신체 사이를 통과하는 강밀도”이자 “대개 의식적인 인지를 벗어난 (…) 신체적 힘” 또는 “연결의 힘”으로 정의하는 그레그(Melissa Gregg)와 시그워스(Gregory J. Seigworth)의 개념 소개를 참조하라. Melissa Gregg and Gregory J. Seigworth, “An Inventory of Shimmers,” The Affect Theory Reader, ed. Melissa Gregg and Gregory J. Seigworth (Durham: Duke UP, 2010) 1~2면. 그레그와 시그워스가 지적하듯, 모두는 아니지만, 정동 개념에 관심을 가진 상당수 이론가가 이 물질적인 힘의 탈개체적 흐름, 영향을 주고 또 받을 수 있는 신체적 연결과 변이의 역량이 “‘지금’보다 좋은” 무언가를 낳을 것이라는 “희망”(promise)을 표현한 바 있다. 같은 책 9~10면. 위의 설명처럼 정동이 일반적으로 의식과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신체적이고 물질적인 힘으로 이해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정동에 쏟아진 관심이 어떤 점에서 오염된 언어적 매개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신체적 접속이라는 대립구도를 재생산하고 있는지 볼 수 있다. 문제는 언어와 의식 너머의 물질적・신체적 힘에 대한 주목이라기보다 언어적・문화적・사회적 매개를 오염으로 전제하는, 따라서 그 매개의 부재에서 대안을 찾는 이론적 경향이다.

21) Elaine Hadley, Melodramatic Tactics: Theatricalized Dissent in the English Marketplace, 1800~1885 (California: Stanford UP, 1995) 16면.

22) 같은 책 18면.

23) 같은 책 30~33면.

24) 같은 책 31~32면.

25)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trans. G. E. M. Anscombe (Oxford: Basil Blackwell, 1968) 89e면.

26) 김현경은 삶의 연극성에 대한 고프먼(Erving Goffman)의 통찰에 기대어 해들리와 비슷한 견해를 전개한다. 김현경에 따르면 사람다움이란 우리가 가지고 태어나거나 획득하는 본질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체하는 어떤 것, 서로가 서로의 연극을 믿어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어떤 것”이다. 예를 들어 택시의 승객들이 기사가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는 듯 이야기를 나눌 때 승객들은 기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기사를 비인격체로 만든다. 시중을 들기 위해 옆에서 기다리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로 취급되는 하인도 마찬가지다. 인격은 실체나 권리가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의례적 수행을 통해, 그 수행 속에 현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현경의 논의를 이 경우에 적용하면 고문은 피고문자의 인격, 권리, 고통 모두가 그 존재를 인정하는 의례적 수행 바깥에서 비인격화되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문학과지성사, 2015) 83~85면.

27) Kleinman, Das and Lock, 앞의 책 xiii면.

28) Veena Das, “Language and Body: Transactions in the Construction of Pain,” Social Suffering 70면.

29) Ludwig Wittgenstein, The Blue and Brown Books: Preliminary Studies for the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Oxford: Blackwell, 1991) 49면.

30) Das, 앞의 글 70면.

31)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8, 11면.

32) Veena Das, “The Boundaries of the ‘We:’ Cruelty, Responsibility and Forms of Life,” Critical Horizon 17.2 (2016) 171면. 

33) 같은 글 171~72면.

34) 같은 글 172면.

35) Das, “Language and Body” 76면.

36) 같은 글 76~77면.

37) Walter Benjamin, Reflections (New York: Schocken Books, 1986) 333~36면.

│서정은│

徐晶恩 한국교통대 영어영문학과 조교수. 최근 논문으로 「『전염병 일지』 혼종 서사 문체 번역의 고려사항들: 인본주의 서사로서의 특징을 중심으로」(202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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