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밖 56호] [시평] ‘교권’의 굴레에 갇힌 ‘독박교실’: 존엄의 상호의존으로 교권 담론 다시 쓰기 / 배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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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인권조례가 권리만 부각하고 책임을 외면해 다수 학생의 학습권과 교권을 침해하고 있다.” 

– 충남도의회 국민의힘 도의원들 ‘학생인권조례 폐지안’ 발의 취지 중에서1)

권리만 있고 책임은 없는 ‘균형 잃은 학생인권’이라는 비난의 강풍이 2023년 한국사회를 강타했다. 지난해 7월 서울 강남구 S초등학교에서 발생한 교사의 자살 사건이 기폭제가 됐다. 정부와 교원단체들은 교사를 죽음으로 내몬 핵심 원인으로 ‘괴물 부모’와 ‘교권 추락’을 지목하며 파상공세를 이어갔다. 보호자들의 악성 민원으로 힘들어하는 교사가 부지기수이고, 학생인권만 강조하다 보니 교사들이 방패도 없이 전장에 내몰려 있다는 주장이었다. 같은 달, 용인의 한 초등학교에서 유명 웹툰작가가 발달장애 자녀에 대한 아동학대 혐의로 특수교사를 고소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이 사건 역시 ‘괴물 부모’에 의한 악성 민원의 대표적 사례로 치부되면서 교권 회복 주장에 더욱 힘이 실렸다. 사회 전체가 교권 회복 담론에 휩싸인 사이 두 사건이 사회에 던진 근본적 질문은 무엇인지에 대한 숙고는 물론, 다양한 방면에서 해답을 찾는 과정 역시 실종되어버렸다.

특히 정부는 교권 회복 대책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교육의 위기를 바로잡을 기회와 마땅히 져야 할 책임으로부터 빠져나갔다. 이른바 ‘교권 5법’(초중등교육법·유아교육법·교원지위법·교육기본법·아동학대처벌법)이 개정되었고, 학생인권조례 개정 요구, 학생 생활지도 고시 제정과 같은 조치도 뒤를 이었다. 이에 따라 ‘교육활동 침해’라는 모호하거나 교사중심적 해석이 가능한 기준으로 학생에 대한 교실 밖 분리 조치・징계・생활기록부 기재 등이 가능해졌고,2) 아동학대 신고를 당하더라도 정당한 사유가 없는 한 직위 해제(피해 학생 보호를 위해 가해 혐의 교사를 담임 등 업무에서 일시 배제하는 조치)를 당하지 않도록 교원 지위가 강화되었다. 신고된 아동학대 사안에 대해 교육감이 7일 안에 조사나 수사기관에 의견서를 제출하도록 하는 절차도 도입됐다. 2024년 3월부터는 교권침해 전담 전화가 개설되고 보호자3) 민원 대응체계도 강화된다. 이제 교사는 안심하고 교육활동을 할 수 있고, 학생과 보호자도 교사를 믿고 학교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일까. 

‘교권 vs. 학생/아동 인권’의 프레임에서 보자면 교권 또는 교사의 학생통제권 회복이 지금의 교육위기를 타개하고 교사를 보호할 유일한 해법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치 않다. 애초에 교권의 대립항에 학생인권을 가져다놓은 프레임 자체가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착시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1. 사건의 진실을 마주하기 위한 질문들 

해당 교사를 죽음으로 내몬 직접적 사인과는 별개로, S초 교사 사망 사건이 사회에 던진 핵심적인 질문은 크게 다섯 가지였다. 첫째, 왜 저연차 교사에게 오히려 더 힘든 업무(1학년 담임과 열악한 환경의 교실, NEIS 업무 등)가 배정되었나. 이는 교직사회에 존재하는 불평등한 위계와 비민주적 업무분담 문제의 심각성을 암시한다. 지난해 땡볕 더위 속에서도 이어진 집회에서 교원단체들이 교권 회복은 크게 외치면서도 왜 이 위계와 불평등을 자성하는 목소리는 제대로 내지 않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둘째, 왜 교사는 자신의 고통을 주위에 말하기 힘들었나. 전문성과 카리스마를 갖춘 채 완벽하게 교실을 통솔하는 가부장적 교권의 이미지가 오히려 족쇄가 되어 교사 개개인이 당면한 어려움을 드러내지 못하게끔 만든 것은 아닌가. 이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미숙함 또는 취약함에 대한 고백이 곧 ‘능력 없음’으로 여겨지는 교직문화와 교권이라는 이름의 족쇄를 성찰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셋째, 교사의 어려움을 나눠 질 시스템과 동료는 왜 ‘부재’했나. 달리 말하면 협력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애초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나. S초가 있는 강남구는 서울의 다른 자치구보다 과밀학급 문제가 심각한 지역이어서 교사 홀로 다양한 욕구를 지닌 학생들에게 개별적 지원을 제공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고통과 부담은 오롯이 교사 개인의 몫으로 남겨졌다. 

넷째, 오인이나 악의에 의한 신고로 피해를 겪을 수 있는 교사를 보호할 방안은 무엇인가. 일련의 ‘스쿨 미투’와 ‘체벌 거부 선언’ 캠페인에서 알 수 있듯, 교육과 폭력의 경계는 아슬아슬하게 맞닿아 있다. 사람과 사람은 서로 밀접하게 기대어 있기에 서로를 해할 수도 있는데, 교사와 학생 역시 마찬가지이고 교사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것이 학생의 본분이라 여겨지는 관계에서는 더더욱 학대의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하기에 교원단체들이 주장하듯, 교사의 교육활동을 아동학대의 예외로 두어야 한다는 ‘아동학대 면책 주장’은 정당성을 갖기 힘들다. 그러나 아동학대의 가능성을 전면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잘못된 신고로 억울한 피해를 겪는 교사가 생기지 않도록 하려면, 특히 개인적 대응과 사법 절차에만 떠맡겨둔 채 학교나 교육 당국은 뒷짐 지고 있는 상황을 해결하려면 현행 절차를 보완할 필요는 있다. 특히 교사보다 계층이나 신분상 우위에 있는 보호자로부터 교사의 안전을 보호하는 일은 교사의 노동권 보장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던져야 할 질문은 학교 현장에서 보호자의 민원이나 아동학대 의심은 왜 갈수록 늘어나는가라는 것이다. 경찰 조사 결과, 교원단체들이 교사 죽음의 원인으로 지목한 ‘악성 민원’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지만,4) 근래 들어 교사에게는 ‘특이 민원’으로 여겨지는 보호자의 문제제기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를 요즘 보호자들이 ‘괴물’이 되어가기 때문이라고만 해석하기는 힘들다. 보호자의 인권 감수성이나 학교에 거는 기대가 달라졌고 학교와 교사가 지닌 사회적 지위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음에도 학교가 이에 잘 대처하지 못하는 탓도 있다. 교육의 시장화가 확산하면서 교육을 제공받는 서비스 상품으로 여기는 사회 인식도 분명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학교와 교사가 신뢰를 회복하려면 보호자의 ‘질문할 권리’를 보장하되, 교육을 상품이 아닌 보편적 권리로 전환하려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위 다섯 가지 질문 가운데 정부가 그나마 응답한 질문은 네 번째 질문뿐이다. 아동학대 신고가 들어오더라도 교사가 즉시 직위해제를 당하지 않고 수사기관이 교육감의 의견을 참고하도록 한 것 정도가 전부인 셈이다. 반면 나머지 네 개의 질문은 공론의 장에 제대로 등장하지 못했다. 이 질문들은 하나의 문제를 일관되게 가리킨다. ‘독박교실.’ 지금 교실에는 다양한 삶의 위기로 흔들리는 가정에서 살아가는 학생들, 아주 어린 나이부터 프로그래밍된 일상을 보내느라 집중과 몰입을 힘들어하는 학생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학교에서 지워지고 외면받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5) 이는 교사 개인에게만 내맡겨진 교실에서는 교육이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바로 그 위기를 몸으로 떠안고 있는 학생들을 혼자서 직접 대면해야 하는 위치에 놓여 있기에 교사 역시 위험에 빠지기 쉽다. 고립된 교실에서 독박노동에 지친 이들은 그 분노를 자기가 돌보고 지원해야 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원망과 폭력으로 해소할 가능성이 큰데, 바로 그 위험성 때문에 교사가 아동을 학대할 수 있다는 의심을 더 사게 되는 악순환이 빚어진다. 학생이 학교에 볼모로 잡혀 있다고 여기는 보호자들의 불안도 한몫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2023)에 등장하는 싱글맘 사오리처럼, 보호자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민원인’이 되어야 학교로부터 제대로 된 응답을 받을 수 있고 아동을 지켜낼 수 있다는 암시를 받는다. 아동의 어떤 특성으로 인해 차별받은 경험이 누적된 보호자일수록 학교의 무심하거나 형식적인 대처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독박교실은 사회에 자리잡은 차별구조에 따라 해당 교사에게 차등적으로 배정되었고, 어지러운 교실 상황도, 보호자의 민원도 그저 견딤의 대상이 되었다. 

웹툰작가 자녀의 아동학대 피해 사건 역시 ‘독박교실’이 교사 자신은 물론, 학생과 보호자에게도 치명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사건의 개요는 이러하다. 자폐스펙트럼장애가 있는 초등 2학년 학생이 통합반 교실에서 바지를 내리는 돌발 행동을 했다. 학교는 장애학생을 특수학급(‘맞춤 학습반’)으로 격리하는 조치만 취했을 뿐이었다. 특수학급으로 분리된 이후 자녀가 매우 불안해하고 급기야 등교마저 거부하자, 특수학급에서만 보내는 시간이 염려된 보호자는 일주일 뒤 자녀의 가방에 녹음기를 넣었다. 녹음된 파일에는 일반적 훈육이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는 교사의 언행들이 담겨 있었다. 교사와 자녀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수사기관의 판단이 있어야만 한다는 교육청과 학교의 답변을 들은 보호자는 특수교사를 아동학대 혐의로 신고했다. 검찰은 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송치했고 2024년 2월, 1심 재판부는 아동학대 혐의 중 일부를 인정해 교사에게 벌금 200만 원에 선고유예를 판결했다.6) 검찰과 피고인 모두 1심 결과에 불복해 항소했다. 

몰래 녹음과 아동학대 신고로 무고한 교사 피해자를 만들어냈다면서 웹툰작가 가족에 대한 마녀사냥이 이어지는 동안, 정작 이 사건이 제기한 질문들은 증발해버렸다. 옳고 그름을 떠나 발달장애 학생이 바지를 내리는 행위를 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이유를 알아야 재발 방지도 가능할 텐데, 왜 통합반 교사는 전조(前兆)를 알아차리거나 예방할 수 없었나. 당시 교실에는 학생과 교사를 도울 특수교육실무사나 다른 협력자들이 왜 존재하지 않았나. 발달장애 특성을 고려해 해당 학생뿐 아니라 통합반 학생에게도 필요한 교육이 제공되어야 했을 텐데 왜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나. 특수교육지원법상 대상 학생이 6명 이상이면 학급을 증설하게끔 되어 있는데, 왜 이 학교에는 8명의 학생이 대상자였음에도 특수학급도, 특수교사도 오직 하나뿐이었나. 특수학급으로의 분리 조치는 장애학생과 특수교사 모두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나. 학생을 교육하려는 의도였다는 말로 아동의 존엄과 정신적 안녕을 위협하는 특수교사의 언행이 용인될 수 있는가. 학교와 교육청은 보호자와 학생을 도울 방안을 찾기보다 왜 신고하는 방법만 제시했나. 그 무엇보다 사건이 발생한 2022년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기나긴 사법 공방에서 과연 승자는 있었나. 특수교사의 열악한 노동환경은 그대로이고, 학생은 결국 학교를 떠나게 된 상황은 또 다른 사건을 예고하고 있지는 않은가. 발달장애 학생을 특수학교로 분리하라는 사회적 압력만 강화되었을 뿐, 통합교육 현장에서도 발달장애 학생이 그림자처럼 배제된 채 존재해야 하는 교육 현실은 그대로이지 않는가.

2. 회복되어야 한다는 ‘그 교권’

두 사건의 사회적 귀결은 ‘교권 강화’였지만, 역설적으로 교권이 해결책이 될 수는 없으며 교권이라는 개념의 용법 자체도 매우 문제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7월 28일, S초 교사 사망 사건 직후 국가인권위원장이 발표한 성명에는 이런 문장이 포함돼 있다. “교사의 교권과 학생의 인권은 결코 모순·대립되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택일적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인권위원회로서는 당연히 해야 했고 박수받아 마땅한 입장 발표였으나, 안타깝게도 이 문장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이해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설득당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들, 자기 이익을 위해 대립구도를 부러 설파하는 이들을 설득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이해해보려는 사람들에게도 이 문장의 의미는 잘 가닿지 않는다. 교사와 학생의 인권은 왜 택일적 관계가 아닌가. 학생인권과 대립하지 않는다는 ‘교권’은 무엇을 가리키나. 

교권이라는 말은 그 쓰임새와 맥락에 따라 교사의 권위, 교사의 권리 또는 권한, 교사의 인권 등 의미가 달라진다. 쓰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저마다 다른 개념적 틀로 이해하기 때문에 의미 있는 토론이 오가기도 힘들다. 교권이 어떤 말의 줄임말인지에 따라 학생인권과의 관계도 달라지기 때문에 ‘학생인권보다 교권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은 위험하고 ‘교권과 학생인권은 모두 존중되어야 한다’는 말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교권과 학생인권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교권 담론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교권은 학생이나 보호자들에게 존경받아야 할 교사의 ‘권위’나 우대받아야 할 사회적 ‘지위’를 뜻하는 개념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학생인권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이 낮고 제도적 보장책이 마련되지 않았던 시대에 교사의 ‘권위’는 그 자체로 학생 위에 군림하는 ‘권력’이 되기 쉬웠다. 도구나 신체를 활용한 체벌, 바리깡으로 상징되는 두발 단속, 교문지도와 제식훈련이 학교의 일상 풍경인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부당한 지시에 대한 거부는 물론 학생의 질문조차 교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한마디로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춰 있었다. 사회의 인권 의식이 높아지고 학생인권 보장 운동이 일어나면서 교사의 권위가 학생의 인권을 제한할 명분이 되기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했다. 사실 권위라는 것은 본질적 속성상 교사가 수업의 전문성이나 사유의 나침반이자 인생의 참고문헌이 될 만한 철학을 가지고 있을 때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고 자발적으로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지, 주장하거나 법으로 강제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2000년대 즈음부터 교권은 학생인권에 대항하여 학생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교사의 직무상의 권한(직권職權), 그 가운데 특히 학생에 대한 ‘통제권’을 의미하는 말로 주로 쓰이기 시작한다. 1998년 정부 차원에서 학생인권선언 제정이 시도되고 체벌금지 여론이 일자, 이듬해인 1999년 2월 국회에서는 초중등교육법을 개정해 교사의 체벌권을 명시적으로 보장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자유민주연합 장일주 당시 의원은 법제화를 추진하는 배경으로 “교권과 학생의 인권을 조화롭게 높이기 위해 발판을 마련”7)하는 차원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문장에서 교권은 학생을 때려 제압할 권한을 정확히 가리킨다. 2006년 대구의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200대 체벌’ 사건, 2010년 서울의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오장풍 교사 체벌’ 사건8) 등이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학생인권 보호 입법 요구가 확산하자, 2010년 서울시교육청은 체벌 전면 금지 지침을 발표했다. 강제 야간학습, 복장·두발 단속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도 이어지면서 2010년과 2011년에는 경기도와 서울, 광주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었다. 이듬해에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으로 교사의 직접 체벌이 법으로도 금지되었다. 이후 이런 조치들에 대한 반동으로 교권 추락 담론이 급부상했고, 교사가 학생에게 폭언이나 폭행을 당하는 사건들이 집중 보도되기 시작했다. 그 후 ‘때릴 수 없는 교사 vs. 교사도 때릴 수 있는 학생’ ‘교사의 생활지도권 vs. 학생인권’과 같은 대립구도가 더욱 강화되
었다. 

최근 교권은 보호자의 민원이나 아동학대 신고, 교실 붕괴 등과 같은 위기로부터 교사의 교육활동과 지위를 보호하기 위한 법적 ‘권리’에 가까운 개념으로 변용되고 있다. 특정 집단의 ‘지위 향상’이 법 이름에 명시된 경우는 교원・전공의・사회복지사 관련 법이 유일한데, ‘교원의 지위 향상 및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특별법’(약칭 교원지위법)은 2010년대 중반부터 교사의 교육활동을 침해한 학생이나 보호자에 대한 조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어왔다.9)공론의 장에서 체벌권을 대놓고 주장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면서 체벌이 아닌 다른 형태의 학생 징계 권한이나 통제권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다. S초 교사 사망 사건 이후 뒤따른 입법 조치들 역시 교사의 반대편에 오직 학생이나 보호자만 상정한다. 교사의 정치 기본권, 관리자에 의한 갑질이나 폭력·차별로부터의 자유, 노동권과 같은 기본적 인권을 의미하는 교사인권 담론도 조금씩 형성되고 있지만, 학생통제권이나 보호자에 대한 방어권 중심의 교권 회복 담론의 위세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다. 

교권이 교사인권의 줄임말이라면, 모든 사람의 존엄을 보장하기 위해 요청되는 인권은 교사에게도 당연히 보장되어야 한다. 그런데 교권이라는 말이 여러 의미를 어지럽게 내포하고 있기에 이 의미로 사용하려면 ‘교권’이 아닌 ‘교사인권’이라고 쓰는 게 적합하다. 교사의 인권과 학생의 인권이 어떻게 대립관계가 아니고 오히려 상호의존하고 있는지는 후반부에 다시 다루기로 한다. 반면 교권이 교사의 수업권을 비롯한 직무상의 권한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라면, 이때 교사의 권한은 학생의 교육권을 보장하기 위해 창설된 법적 권한이기에 학생인권을 보장하는 범위 내에서 행사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요구된다. 경찰의 수사권이 피의자나 시민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행사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반대로 교사의 권한은 오히려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사용될 때 그 의미를 발한다. 교사의 수업 권한의 핵심은 국가의 통제나 편향된 교육에 맞서 교육의 자유를 방어할 권리, 학생의 재능과 특성에 맞추어 다양한 교육지원책을 찾아내고 국가에 대해 그 제공을 요청할 권리에 있다. 학교생활이나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은 교사의 통제가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시스템을 통해 다른 형태의 지원을 제공받아야 할 존재다. 물론 학생에 의해 교사의 인격권이나 교육활동이 침해되는 일이 있다면 제지되어야 하겠지만, 실제 교사의 교육활동이 침해되는 경우는 관리자를 포함한 동료 교직원에 의한 경우가 더 많다.10) 교권이 교사의 권위나 권력을 줄여서 말하는 것이라면 이때의 교권이 학생인권에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교사들이 교사인권보다 교권에 더 기대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권의 개념이 사회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앞서 말한 ‘독박교실’에 포위되어 있기에 바로 그 교실 안에서 주어져야 할 제한적 권한에만 매달리게 되는 악순환이 빚어지기 때문은 아닐까. 문제는 독박교실이라는 구조가 해결되지 않는 한 교사가 원하는 안전한 교육활동도, 학생과의 원만한 관계나 의미 있는 교육도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데 있다. 지난해 9월 ‘공교육 멈춤의 날’ 교사집회에서 이루어진 초등교사 현유림의 발언은 지금 교사에게 필요한 지원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짚고 있다.

“학생들은 제 수업을 듣지 않았고 반은 돌아다니며, 특히나 반 3분의 1의 학생들은 성적인 농담을 일삼으며 낄낄거리는 등 제가 어쨌거나 거기서 무언가를 하기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관리자분께 처음으로 어렵게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관리자분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선배 교사께서는 저를 위로한답시고 ‘이래서 애들을 때릴 수 있어야 하는데’라고도 하셨고, ‘선생님이 너무 착해서 애들을 못 잡아서 그래요’라고도 하셨습니다. (…) 사실 그 힘든 학생들 때문에 제가 고통받고 그 힘든 학생들을 정말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방식으로 지원을 받고 싶었습니다. 예를 들면 교감 선생님께서 따로 학생들과 수업을 해주시거나 학급당 학생 수가 줄어서 교사 혼자서 또는 둘 셋 팀을 이루어 학습 분위기를 원만히 조성할 수 있는 그런 실질적인 방법들 말입니다.”11)

다시 S초 사건과 웹툰작가 자녀의 아동학대 사건으로 돌아가보자. 서로 의존하는 두 사람의 관계가 한 사람의 독박노동에만 의존한 채 고립되면 서로를 해치는 관계로 전환될 위험이 크다. 둘 사이를 들락거리는 관계, 개입하고 조정하는 관계, 지원을 요청할 둘레의 세계가 없을 때 두 사람 모두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이 만들어지고 결국 관계 자체가 위기에 빠진다. 일대일 관계를 넘어서는 협력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먼저 그 위험과 취약성부터 고백해야 하고, 둘의 관계가 어떻게 의존하고 있는지를 좀 더 상세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사실 교사도 너무 외롭다. 교장한테 당하고 와서 학생에게 말할 수도 없고. 학생이랑 대치하고 나서도 교사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 없이 바로 다음 수업을 해야 하고. 가위 들고 뛰어내리겠다고 하는 학생을 붙잡고 나는 어쨌거나 영어 수업을 해야 하는 아주 이상한 상황이 계속 있는데, 그게 교사한테는 구조적인 폭력이다. 최소한 스스로 마음을 추스를 시간과 공간조차 없으니 교사를 더 고립시키고 고립되니까 억울한 마음의 화살을 약자인 학생한테 돌리게 되는 구조다.” 

– 초등교사 여름(현유림)12)

“나는 전문성이 부족한 ‘특수’교사였다. 도저히 혼자서는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의 다양한 요구에 응답할 수 없었다. (…) 학교 환경은 A부터 Z까지 장애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 환경에서 내 한 몸 또는 한 개인의 제한된 지식으로는 아이들의 욕구를 맞출 재간이 없었다. 이처럼 특수교사 개인으로서 느꼈던 나의 부족함은 협력이 필요함을 일깨워주었다.” 

– 특수교사 윤상원13)

3. ‘연결’에서 ‘존엄의 상호의존’으로 

교사의 인권과 학생의 인권 또는 교사의 존엄과 학생의 존엄이 어떻게 상호의존하고 있는지를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상호의존의 개념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권의 상호의존성 원칙(원리)은 ‘사람은 사회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 기대어 살아가기 때문에 인권도 서로 기대어 있을 수밖에 없다’라는 식으로 흔히 설명된다. 인간의 존재양식 가운데 어떤 부분도 타인이나 사회로부터 독립되어 있지 않다. 서로의 취약성을 돌보지 않는다면 어떤 공동체도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과 인간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인권 또는 존엄이 상호의존한다는 결론이 자동으로 도출되지는 않는다. ‘연결’과 ‘의존’은 다른 말이다. 인권의 상호의존, 존엄의 상호의존을 말하기 위해서는 좀 더 복합적인 이야기가 필요하다. 

먼저 ‘역사적·통시적 차원’의 상호의존이 존재한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인권이나 민주화와 같은 사회적 결실들은 이전 세대가 남겨준 유산이다. 정세랑 작가의 소설 『피프티 피플』의 대사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안전법들은 유가족들이 만든 것”이고 그 결과로 오늘날 우리가 조금은 더 안전한 사회에 살고 있다. 내가 지금 누리는 이동 편의는 장애인들이 앞서 투쟁한 덕분이다. 이렇게 현재 우리가 누리는 존엄과 인권은 역사적·사회적 빚짐의 결과다. 한편 독립운동가들이 그러했듯이, 과거나 현재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이들은 당대에 원하는 변화를 성취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미래의 누군가는 다른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존엄을 위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을 힘을 얻는다. 후대의 존엄이 당대의 나의 존엄을 포기하지 않을 힘이 되는 것이다. 이때의 의존은 직접적 관계나 얼굴을 가지지 않는 ‘간접적인 상호의존’의 성격을 띤다. 

두 번째는 ‘사회구조적 차원’의 상호의존이 있다. 니묄러(Martin Niemöller) 목사의 「처음 그들이 왔을 때」(“First They Came”)14)에서 잘 드러나고 있듯이, 타인의 인권이 무너지고 이를 묵인하면 결국 나의 인권도 무너질 수 있다. 장애인의 인권이 함부로 침해되고 방치되는 사회는 비장애인 누군가도14) ‘장애화’되어 차별받을 수 있는 사회다. ‘고.다.자’(고르기 쉽고 다루기 쉽고 자르기 쉽다는 뜻) 노동의 참혹함은 노년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많은 이의 삶을 가로지르며 확산하고 있는 차별이다. 소수자는 차별을 가장 먼저 겪는 이들이지 차별의 마지막 종착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흑인여성은 인종차별과 성차별, 나아가 흑인여성만의 고유한 차별을 중층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데, 그 흑인여성의 나이와 계급적 지위,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에 따라 차별의 양태는 다시 달라진다. 흑인 여성학자 크렌쇼(Kimberlé Williams Crenshaw)를 비롯한 교차성 이론이 보여주고 있듯이 성, 인종, 장애, 나이, 계급 등에 따른 억압은 서로를 가로지르며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중전선에서 함께 싸우지 않는 한, 하나의 억압으로부터도 해방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이야기한다면 인권 또는 존엄의 상호의존은 내가 유사한 피해를 겪을 가능성만을 염두에 둔 제한적 상호의존에 그칠 우려가 있다. 나에게 피해가 돌아올 가능성이 없다고 해서 우리는 서로의 존엄을 묶어 세울 수 없는 것일까.

셋째, ‘수행적 차원의 상호의존’이 존재한다. 존엄의 상호의존을 ‘증명이 필요한 원칙’이 아니라 ‘지향해야 할 가치’로 받아들이고 수행하면서 정치적 윤리로 구성해가는 접근이다. 이는 우리의 존엄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의존하기를 소망한다는 쪽에 가깝다는 의미에서 ‘의지적 상호의존’으로도 부를 수 있다. 먼 나라에서 온 낯선 난민을 우리는 왜 환대해야 하는가. 국제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난민을 발생시킨 국제상황에 우리도 책임이 있기에, 또는 나도 난민이었거나 난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난민을 환대해야 할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난민을 환대하는 세상을 원하기에, 내쫓기는 난민을 지켜보는 일이 고통스럽기에, 난민을 내쫓는 사회라는 비참을 견디기 힘들기에 난민의 존엄과 나의 존엄, 난민의 존엄과 내가 사는 사회의 존엄을 ‘결연’하기로 선택하는 이들이 있다. 흑인 차별에 맞서 싸우는 백인, 비장애인 중심주의에 저항하는 비장애인, 청소년의 존엄 곁에 서려는 비청소년,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연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랬듯이 ‘두 번째 사람’15)이 되기로 선택하는 사람들이다. 인권의 역사는 당사자들의 저항뿐 아니라 바로 이 두 번째 사람들의 연대를 통해 발전해왔다. “타자의 통곡에 소매가 붙들린” 이들, 바우만(Zygmunt Bauman)이 『자유』(Freedom)에서 주장한 ‘속박받는 이들이 존재하는 한 나의 자유는 특권이자 권력’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을 특권의 자리에서 해방하여, 자신의 가해자성을 인정하면서 모두의 평등한 존엄을 구한다.16) 상호의존의 믿음을 현실에 밀어넣어 상호의존의 사회를 만들어간다. 이때 존엄의 상호의존은 의지와 선택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내는 결과적 규범이다.17)

마지막으로 ‘실재적 차원’의 상호의존이 있다. 인간의 존엄이 좀 더 직접적으로 얽혀 있고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 곧 부모와 자녀, 교사와 학생, 사회복지사와 이용 시민, 돌보는 자와 돌봄을 받는 자와 같은 관계에 실재하는 상호의존이다. 2023년 방영된 넷플릭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는 ‘액팅 아웃’(acting out)18)하는 환자를 진정시키는 과정에서 보호사가 환자를 붙잡다 상처를 입는 장면이 나온다. 환자의 진정을 돕고자 하는 행동이지만 동시에 필요 이상의 완력을 사용하거나 모욕할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보호사는 숙련된 자세로 환자를 침대에 눕히고 그가 진정될 때까지 손을 잡아준다. 이 장면이 주는 감동은 보호사가 위기 상황에 놓인 환자를 적대하지 않고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환자를 숙련되게, 그리고 정성껏 돌봄으로써 자기 노동을 완성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보호사’의 노동은 그 직업의 명칭처럼 환자를 자해나 타해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이 일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안전하게 환자를 진정시킬 수 있는 기술의 훈련, 환자의 액팅 아웃 전조(前兆)를 잘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업무 조건(담당 환자 수의 축소와 같은), 산재 발생 시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치유권과 같은 노동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환자 개개인의 병력(病歷)이나 생애사, 개별 욕구, 핫 버튼(hot button) 등이 고려되지 않는다면 ‘좋은 돌봄’이란 불가능하고 보호사 자신의 안전도 보장받기 힘들다. 보호사의 노동권이 환자에게는 보호받을 권리의 바탕이 되고, 보호사에게도 환자를 책임질 권리로 이어지는 셈이다. 이는 요양보호사와 고령자,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서도 다르지 않다. 

심지어 적대적 관계로 마주 선 존재들의 존엄도 상호의존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예들은 많다. 트라우마 연구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의 고통에서 시작되었는데, 전쟁터에서 학살에 가담했던 군인들이 보여준 심각한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 증상들은 전쟁과 폭력이 피해자의 생명과 존엄을 앗아갈 뿐 아니라 가해자의 존엄과 안녕도 위협함을 보여준다. 고문으로부터의 자유는 피의자의 ‘고문받지 않을 권리’뿐 아니라 수사관의 ‘고문하지 않을 권리’도 함께 의미한다. 개별 수사관이 고문을 통해 자백을 받아내라는 잔혹한 명령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피의자를 보호하는 인권 수사가 법과 원칙으로 분명히 서 있을 때 수사관도 잔혹한 노동조건에서 해방될 수 있다.

4. 교사와 학생의 존엄은 어떻게 상호의존하는가

존엄의 상호의존을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 비춰보자. ‘교사의 존엄한 노동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가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이다. 교사의 존엄한 노동을 뒷받침하는 ‘교육노동권’이란 자신의 신념과 노동인권, 자기 정체성 등을 보장받으면서 학생의 교육권을 위해 교육활동을 수행할 권리로 정의할 수 있다. 교육노동자로서 학생 개개인을 온전히 바라보고 교육, 돌봄, 특별한 지원을 제공할 수 있는 조건이 교사의 노동을 존엄하게 만든다. 학생의 존엄을 고려하지 않거나 아예 고려할 수 없는 교육활동은 일의 세계에서 존재해야 할 노동의 의미를 빼앗고19) 교사와 학생 모두를 교육으로부터 소외시킨다. 

“교사의 교육권이란 장애라 명명된 학생의 삶과 교육을 위해서 온전히 고민할 수 있는 권리 아닌가. 학생의 권리와 교사의 권리가 같이 만날 수 있는 그 지점을 침해하는 핵심이 바로 학교 사회가 교사에게 부여하는 불법적인 행정 업무다. (…) 학교 행정 업무를 하다 보면 애들이, 애들을 어떻게 지원해야 할지 안 보인다.” 

– 특수교사 윤상원20)

이와 같은 교사의 노동권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부당한 외압으로부터 교육의 자율성을 방어할 권리뿐만 아니라 노동권 보장을 위한 구조를 성취할 권리, 곧 단체행동권을 비롯한 노동3권의 온전한 보장과 정치 기본권의 확보가 필수적이다.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고 정당 가입과 같은 정치적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사에게 정치 기본권이 부정되는 근거가 바로 ‘학생의 미성숙’이다. 초・중고생의 경우 수용성과 모방성이 왕성한 시기에 놓여 있기에 학생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교사가 정치적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논리인데, 이때 학생은 자기 판단력을 가지기 힘든 존재로 전제되어 있다. ‘학생의 미성숙’은 학생인권을 제한하는 근거로도 오랫동안 작동해왔다. 교육활동 과정에서 교사가 학생을 교화시키거나 특정 사상이나 정치적 입장을 주입해서는 안 되지만, 국가를 상대로 정치적 행동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은 부당한 제약이다. 중립이라는 명분으로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판단하지 않음’과 ‘침묵’이 강요될 때, 오히려 성숙은 지연되며 민주시민교육도 불가능해진다. ‘교화나 주입 금지 원칙’을 명확히 하는 가운데 교사에게는 민주주의를 실천할 기본권이, 학생에게는 교사와 동등하게 토론하고 수업이나 학교 운영에 참여할 권리가 보장될 때 학생과 교사 모두에게 강요되는 미성숙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성숙은 나이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할 기회에 비례한다. 학교 운영에도 제대로 참여해본 경험이 없던 학생이 나이가 든다고 어느 날 갑자기 민주시민이 될 수는 없다. 수업시간에 선거제도에 대해 배워서가 아니라 존중받고 권리를 행사하는 경험을 통해 시민이 되어간다. 

나아가 교사가 자기 양심에 따라 학생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행동할 수 없도록 만드는 구조의 폭력도 학생과 교사의 존엄을 동시에 위협한다. 

“초등 2학년 때 교사가 오장풍 같은 사람이었는데, 그 교사가 우리에게 그렇게 하고 있을 때 옆반에 엄청 착한 신규 교사가 안내장 같은 거 나눠주러 왔다가 그 장면을 목격하고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짓고 있던 표정이 엄청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나는 교사 되면 저렇게 안 돼야지, 좀 더 나은 대처를 할 수 있을 거야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나도 전혀 다르지 않더라. 방관자가 되어 있더라. 내가 나를 책망하고 있을 때 친구가 ‘네가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도 학교 구조의 폭력인 것 같다’라는 말을 해줬을 때 언어를 또 찾은 느낌이었다.” 

– 초등교사 현유림21)

둘째, 교사와 학생 안의 소수성 또는 차별의 교차성을 중심에 놓으면 다른 내용의 상호의존이 출현한다. 교사도, 학생도 단일한 집단이 아니다. 억압받는 소수자로서 나와 당신의 존엄이 어떻게 의존하고 있는지를 발견할 때, ‘교사 vs. 학생’이라는 단일 정체성에만 얽매이지 않고 확장된 연대를 도모할 수 있다. 교권이라는 개념은 엄한 가부장의 얼굴을 하고 있기에 저연차 여성 교사나 인권을 섬세하게 고려하려는 교사의 존엄은 관리자, 동료 교사, 학생들에게서조차 쉽게 위협받는다. 능력주의가 점령한 장소에서는 미숙함, 실수, 취약함과 같은 인간의 보편적 조건이 관용이나 지원의 이유가 되기보다는 차별받아 마땅한 이유가 된다. 저연차 교사에게 차별적인 학교는 ‘미숙함’이나 ‘어림’ ‘저경력’ 등을 이유로 존재가치를 평가절하당하는 모든 존재에게 위협적인 장소다. 차별에 맞서지 않는 학교에서는 소수자인 학생도, 소수자인 교사도 차별에 그대로 노출된다. 여학생에게 안전하지 않은 학교는 여교사에게도, 성소수자에게도 안전하지 않은 장소다. ‘특수교사는 장애인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라는 윤상원의 말처럼, 소수자인 교사와 소수자 학생의 곁에 선 교사는 소수자 학생이 겪는 차별을 함께 겪는다.22)

“나는 어린이의 인권을 짓밟고 찾는 평화는 평화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것은 학교의 또 다른 취약한 구성원인 저연차 교사 또는 여성 교사, 또 다른 비정규직 교사에게도 폭력으로 돌아올 것이다. 교사에게 어린이를 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교사를 도와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권리가 아니라 위력이 될 뿐이다.” 

– 초등교사 현유림23)

“(학교에서 특수교사로 산다는 것은) 이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과 똑같은 의미인 것 같다. (…) 교사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얼마나 존중받느냐가 실제로 그 교사의 존중과 연결되어 있다. 특수학급 혹은 학습도움실은 일반 학교 안에서 외딴섬과 같은 존재다. 장애학생이 소외되고 배제되는 만큼 특수교사의 지위 또한 소외되고 배제당하는 위치에 있다.” 

– 특수교사 윤상원24)

셋째, 교사와 학생이 그나마 보장받고 있는 현재의 존엄은 역사적・사회적 빚짐의 결과다. 교사가 노동자임을 인정받고 노동조합 결성의 권리를 가지게 된 데에도, 사립학교의 민주화와 교사를 부당해고로부터 보호할 제도가 마련된 데에도 많은 교사와 학생의 노력과 희생이 동반되었다. 1980년대부터 이어진 교육민주화운동과 사립학교 시설 비리 척결 싸움에는 언제나 교사와 학생이 함께였다. 학급당 학생 수 감축은 인구 감소에 따른 자연적 결과가 아니라 학생인권과 교사노동에 대한 사회적 관심 덕분에 빚어진 사회적 결과다. 학생인권조례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교사들의 참여가 있었고, 조례가 만들어진 덕분에 교사 역시 ‘생활지도’ 노동에 대한 압박을 덜었고 자기 양심에 반해 단지 학칙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학생의 신체·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학생의 존엄을 지키는 일은 교사의 자기 정체성의 일부이기도 한 ‘어린 나’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교사는 더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아니지만, 이제는 학생이 아닌 교사의 위치로 학교에 돌아왔지만, 과거의 나를 지우고 현재의 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비청소년은 모두 차별받고 배제되었던 ‘어린 존재’를 품고 있는 존재다. 누구나 생애 전반을 거쳐 어떤 일을 새로 시작하면서 미숙함 또는 ‘어린 나’를 계속해서 마주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회 곳곳에 깔린 ‘학생, 어린 존재, 미숙함’에 대한 혐오는 비청소년의 자기혐오로도 이어진다. 사람 누구에게나, 나이와 상관없이 언제나 존재하는 미숙함과 취약함, 자유분방함, 부끄러운 실수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더 너그럽고 취약함 속에 깃든 존엄을 아끼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학생인권 옹호는 ‘내 안의 어린 존재’를 옹호하는 일이고 ‘내 편이 되어주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긴 청소년기에 받았던 부당한 대우 같은 게 나를 많이 차지하고 있어서 잊을 수 없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학생인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 내가 교사한테 맞는다든지 폭언을 듣는다든지 했을 당시에 동료(옆반 교사든 학부모든)가 한 명쯤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냥 같이 공포에 떠는 동급생 말고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 고립감이 진짜 컸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20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지금 학교도 출근하면 사실 똑같다. 이제는 내 위치가 바뀌어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때보다는 많이 늘었기 때문에, 똑같은 공간에서 그때 나한테 필요했던 것, 예를 들면 완전 문제제기는 못하더라도 그 학생의 마음을 물어본다든지 아니면 저것은 선생님의 잘못이라고 직접 말해준다든지 할 때, 내가 내 편에 있어주는 느낌이 든다.” 

– 초등교사 여름(현유림)26)

25)

5. 상호의존의 동심원을 위하여

물론 교사와 학생의 존엄이 언제나 상호의존한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돌봄이나 교육에서 대상자와 제공자의 힘이 균등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학교사회에서 여전히 학생은 상대적 약자이고, 교육과 돌봄에서 ‘해석 권력’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가진 사람은 교사다. 우리 모두는 서로 기대어 있기에 서로를 해할 위험도 있는데, 교사에게는 학생을 통제하라는 조직적 압력이 계속 가해지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위치에 놓이기 쉽다. 교사는 특히 자신이 만나는 학생과 보호자의 삶에 누적된 차별과 그 경험이 삶에 남긴 흔적에 대해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치이기도 하다. 특수교사 윤상원은 이를 교사의 직업적 특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학생들한테 항상 학기 초에 얘기한다. 내가 잘못하면 어쨌든 아동학대로 신고하라고. 학교에서는 교사에게 학생들 관리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인권침해의 위험에 대한 경각심이 필요하다. 어떤 식으로든 민원이 제기될 수 있다는 걸 직업적 특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 특수교사들은 학생들을 더 많이 챙겨야 하고 또 부모님들도 편견과 차별을 자주 경험하다 보니 더 우울감이 있거나 민감하다거나 하는 상황에서 일한다. 조그마한 밴드 하나 붙이는 상처가 생겨도 미리 말씀 안 드리면 다 연락 온다. 교사들이 자존심 세우면서 미안하다고 하지 않으면 부모들은 또 미안하다는 말을 왜 안 하냐고 못 받아들인다. 일반 교사가 가지고 있는 기준에 따라서 우리가 대우를 받아야 되고 아이들과 부모들이 나한테 이렇게 해야 된다라는 비교를 하다 보니 괴로워지는 거다. 용인 특수학급 사건이 재판까지 간 것도 그것 때문이다. 부모들이 차별 경험이나 죄책감이 쌓여서 트라우마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교사들이 이해해야 한다.”

– 특수교사 윤상원26)

교사 개개인이 이와 같은 교사의 위치와 직업적 특성을 깨우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성찰은 구조적으로 뒷받침되었을 때 더 촉진될 수 있다. 존엄의 상호의존 관계가 서로를 해하는 관계로 전환되지 않도록 하려면 이 관계를 돌보고 지원하는 동심원이 펼쳐져야 한다. 김영옥·류은숙은 돌봄이 가능해지려면 적어도 세 개의 동심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가운데 핵심에는 두 당사자가 있고, 그 두 사람을 돌보고 돌봄 관계가 적절하게 유지되도록 개입하고 중재하는 둘레 세계, 그리고 복지제도를 포함하여 그 세계를 돕는 사회적 연대망이 펼쳐져야 한다는 것이다.27) 돌봄의 동심원과 마찬가지로 교육현장에도 상호의존을 뒷받침하는 ‘곁들의 동심원’이 필요하다. 교사와 학생이 서로 배움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동심원의 한가운데 두 당사자가 있고, 그 두 사람을 돌보는 학생, 동료 교사, 특수교육 전문가나 작업치료사, 상담사와 같은 전문가, 관리자 등이 둘레 세계에 있어야 하고, 이들을 지원하는 교육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웹툰작가 자녀의 아동학대 사건으로 돌아가보자. 장애아동이 입학할 때부터 학교에서 학생의 장애 특성과 욕구에 맞는 개별화교육 계획을 촘촘하게 마련하고 또래 학생과 교사들에게 장애 이해와 인권에 관한 교육을 제공했더라면 어땠을까. 장애학생이 불편이나 불안을 느낄 가능성도 줄어들고, 바지를 내리는 행동에 대한 주변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을까. 장애학생을 도울 활동지원사나 특수교육 실무사가 통합학급에 함께했더라면 학생이 왜 바지를 불편해하는지 빨리 알아차리고 사전에 조치하지 않았을까. 장애아동이 학급에 피해를 줄 수 있는 부적절한 행동을 반복하거나 또래 학생들과 어울리지 못할 때 작업치료사가 정기적으로 찾아와 필요한 도움과 교육을 제공했더라면 어땠을까. 장애학생에게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를 살펴 지원을 요구하는 특수교사의 의견이 존중되고 통합학급 교사를 도울 협력교사가 배치되었더라면 통합학급에도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을까. 특수교육 대상 아동이 늘어남에 따라 법에 정한 대로 특수교사가 증원되었더라면 특수교사가 그 장애학생을 부담 덩어리로만 취급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장애학생을 특수학급으로 분리해 방치해두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원인을 파악하고 필요한 교육이 제공되었더라면 어땠을까. 누적된 차별 경험으로 민감할 수밖에 없는 장애학생 보호자를 위해 치유 상담과 자녀교육 지원을 담당하는 돌봄체계가 마련되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적어도 장애학생은 외딴섬처럼 배제되고 특수교사는 홀로 동동거리고 보호자는 학교를 의심하느라 안절부절못하는 상황이 반복될 가능성은 줄어들 것이다. 교사, 학생, 보호자를 지원하는 상호의존의 시스템이 펼쳐질 때 모두의 존엄도 실현될 수 있다. 


1)裵慶乃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최근 저서로 『우리는 청소년-시민입니다』(공저, 2022)가 있다.「충남학생인권조례 운명은?…법원 제동에 국민의힘 도의원들 ‘직접 폐지’ 추진」 『서울신문』(2023년 10월 28일).

2) 이전에도 학생 생활지도 차원에서 가능했던 일들이나 법률에 구체적인 조항이 삽입되어 법적・상징적 효과가 강화되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3) 학부모라는 명칭은 이른바 ‘정상가족’ 중심의 호칭이기에 이 글에서는 보호자로 바꾸어 쓴다.

4) 「서이초 교사 사망 “학부모 혐의 없어”…수사 종결에 교원단체 반발」 『KBS뉴스』(2023년 11월 14일).

5) 대표적인 예로 “2000년 5만 4732명이던 특수교육 대상자 수는 2022년 10만3695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같은 기간 유치원·초·중·고등학교 학생 수가 853만 6557명에서 301만 8411명으로 쪼그라든 것과 대조적이다. 장애 영역별로 살펴보면, 시각·청각·지체(운동기능) 장애 비율은 줄어드는 반면, ‘자폐성 장애’와 ‘발달 지체’가 차지하는 비율은 빠르게 늘고 있다.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장애에 대한 인식 개선과 진단 기준 확대 등으로 숫자가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특수교사 고소 논란이 남긴 아픈 질문」 『시사인』 834 (2023년 9월 15일).

6) 2시간 30분가량의 녹음 파일에서 학생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자 특수교사는 “말을 해야지. 뭘 보는 거야 도대체. 아 진짜 밉상이야. 도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 거야?”라고 말했다. 2시간이 넘어간 시점에서는 “너 성질 부릴 거야? 넌 친구들하고 못 어울려. 친구들한테 가고 싶어? 못 가. 못 간다고”라고 말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후 교재에 적힌 ‘버릇이 고약하다’라는 표현을 읽자 특수교사는 “너야 너. 너보고 말하는 거야. 버릇이 매우 고약하다. 아휴 싫어. 싫어 죽겠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여러 혐의 가운데 ‘너, 싫어’라는 명확한 말을 반복해서 사용한 것이 정서적 학대에 해당한다고 보았지만, “죄책이 결코 가볍지 않다”면서도 피고인이 특수교사로서 성실히 근무한 점, 동료 교사와 학부모들이 선처를 요구한다는 점 등을 들어 선고를 유예한다고 밝혔다. 또 표현력이 있는 여러 학생이 있는 교실과 달리, 소수의 장애학생만 있는 공간에서 이루어진 몰래 녹음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이 아니어서 증거능력이 인정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주호민 아들 ‘정서적 학대’ 혐의 특수교사 1심 유죄…벌금형 선고유예」 『한겨레』(2024년 2월 1일). 선고유예란 유죄는 인정되나 일정 기간 형의 선고를 미루고 2년이 지나면 사실상 없던 일로 처리해주는 판결을 말한다.

7) 「2월 18일…매를 들 수 있는 권리?」 『경향신문』(2019년 2월 18일).

8) 평소 ‘손바닥으로 한 번 맞으면 장풍을 맞은 것처럼 쓰러진다’는 뜻으로 학생들이 ‘오장풍’이라는 별명을 붙인 오모 교사가 학생의 뺨을 때리고 바닥에 넘어뜨려 발로 차는 영상이 공개되면서 사건이 알려졌다. 「‘오장풍’ 교사와 학생인권조례」 『경향신문』(2010년 7월 17일).

9) 제정 당시 법의 명칭은 ‘교원지위 향상을 위한 특별법’이었는데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불법단체로 규정하는 대신 교사 민심을 달래기 위해 제정된 법이었다. 2019년 지금의 이름으로 개정되었다.

10) 박근영 「교육침해 현황과 특성」, 『교육정책포럼』 311 (2019) 36~39면. 

11) 2023년 9월 4일, 대구에서 열린 ‘공교육 멈춤의 날’ 교사집회에서 초등교사 현유림의 발언문. 강조는 인용자.

12) 2023년 9월 19일에 진행된 초등교사 현유림과의 심층 인터뷰 기록. 배경내 「‘교사인권 vs. 학생인권’ 대항 구도를 넘어서기 위하여」, 『2023년 제3차 인권교육단체 인권교육가 과정 자료집』(국가인권위원회, 2023) 68면.

13) 윤상원 『누구를 위해 특수교육은 존재하는가』(교육공동체 벗, 2023) 74~75면. 강조는 인용자.

14) 마르틴 니묄러 목사의 연설문을 시(詩)의 형태로 옮긴 이 글은 다양한 버전으로 기록되어 있다. 목사의 연설이 장소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 기념일 트러스트(Holocaust Memorial Day Trust)가 소개하고 있는 버전은 다음과 같다. “그들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사회민주당원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유대인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내게 왔을 때,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줄 이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www.hmd.org.uk/resource/first-they-came-by-pastor-martin-niemoller.

15)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고병권의 표현에서 따온 말이다. 고병권은 “두 번째 사람이 선 자리는 첫 번째 사람이 도와달라며 손을 내밀 때 소매가 잡히는 자리”라고 말한다. 「고병권의 묵묵: 두 번째 사람, 홍은전」 『경향신문』(2020년 10월 12일).

16) 후지이 다케시는 “‘인간’은 항상 가해자 속에서 생겨난다. 피해자 속에서는 생겨나지 않는다. 인간이 스스로를 최종적으로 가해자로 승인하는 장소는 인간이 스스로를 인간으로서, 하나의 위기로서 인식하기 시작하는 장소”라는 이시하라 요시로의 말을 인용하면서 “스스로가 가해자임을 깨닫고 자신을 가해자로 만든 위치에서 벗어나기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회를 만들어간다고 말한다. 후지이 다케시 『무명의 말들』(포도밭출판사, 2018) 59~60면.

17) 인간 존엄의 수행적・구성적 관점은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문학과지성사, 2015)와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사계절, 2018)에 크게 빚지고 있다.

18) 무의식 속에 있는 욕구를 행동으로 직접 드러내는 것. 흔히 정신질환자의 ‘난동’이나 발달장애인의 ‘도전행동’으로 불리는 행동인데, 규범적 판단을 배제하고 중립적인 표현을 쓰기 위해 영어 발음 그대로 ‘액팅 아웃’으로 표기한다.

19) 존중(노동기준을 포함한 권리 보장), (어떤 의미에서든) 보상, 노동의 의미, 전망이라는 네 가지 요소가 갖춰 있을 때 일의 세계는 일하는 사람에게 존엄을 보장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

20) 2023년 9월 26일 진행된 윤상원 교사와의 심층 인터뷰 기록. 배경내, 앞의 자료집 70면.

21) 같은 자료집 66면.

22) 이윤승 외 『별별 교사들 다양성으로 학교를 숨 쉬게 하는 교사들의 이야기』(교육공동체 벗, 2023)는 ADHD 교사가 ADHD 학생을, 법적으로는 아니지만 ‘이혼녀’인 교사가 다양한 가족형태를 가진 학생을, 성소수자인 교사가 성소수자 학생을 어떻게 응원하고 교육적 영향을 주고받는지에 관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23) 현유림 「내가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늘의 교육』 76 (2023년 9/10월) 31면.

24) 배경내, 앞의 자료집 69면.

25) 같은 자료집 66면.

26) 같은 자료집 71면.

27) 김영옥·류은숙 『돌봄과 인권』(코난북스, 2022) 201~202면.

│배경내│

裵慶乃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최근 저서로 『우리는 청소년-시민입니다』(공저, 2022)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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